鄭淳台의 6·25 南侵전쟁이야기(11)/ 敵 전차와 맞선 마틴 대령의 자존심
혼란을 극복한 한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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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땅’ 烏山의 유래 

병점 다음역이 烏山大(오산대)역이다. 오산대 안병일(예비역 포병중령) 예비군대대장이 역구로 졸자를 출영했다. 그는 오산전투와 관련한 자료를 제공했다. 安 대대장과 함께 오산대로 올라가 任桂淳(임계순) 이사장을 방문했다. 任 이사장은 한양대 교수(중국사 전공) 시절에 명저 《만주족이 통치한 중국- 淸史》를 저술했다. 拙者(졸자)는 <月刊朝鮮> 2000년 10월호에 ‘만주족 제국의 흥망- 무식한 30만 명이 1억 5000명을 지배한 시스템의 비밀’을 이란 제목으로 任 교수와의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그때 任교수는 이런 말을 했다.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것은 인구수나 경제력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다.
▶淸(청) 태조 누르하치는 朝鮮(조선) 태조 李成桂(이성계)의 부하였던 몽거테무르의 6대孫(손)이다.
▶한때 세계 GNP의 30% 생산했던 淸國(청국)은 ‘팍스 시니카’ 시기를 거치면서도 산업혁명을  이루지 못하고 곧장 쇠퇴기로 접어든 까닭은 파우스트 정신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임계순 이사장은 필자의 취재를 돕기 위해 오산읍 시절에 읍장을 지낸 한세택 옹(92세), 수원비행장에서 근무했던 공군 통신대대 발전병 출신의 고병길 선생(73세), 오산전투 현장인 죽미령 기슭에서 태어난 오산시 문화관광해설사 이종철 선생, 유엔군 初戰(초전)기념관 학예연구사 정다혜씨 등 오산 지역의 원로 및 연구자 등 10명이 참석하는 오찬모임을 마련해 주었다. 이 모임에서 필자는 烏山(오산)이란 地名(지명)의 뜻이 ‘까마귀 산’이 아니라 검은 산, 세마역의 세마가 貰馬(세를 받고 빌려주는 말)가 아니라 洗馬(말을 씻음)이고, 오산전투 때 적의 포대가 위치한 독산성이 한자로 獨山城(독산성)이 아니라 대머리 산(헐벗은 산)을 뜻하는 禿山城(독산성)임을 알게 되었다.
      
<오산은 황구지천과 오산천 사이에 발달한 평야지대인데, 어릴 적 학교의 미술시간에 황구지천의 검은 흙을 파가지고 가서 공작을 했다… 요즘의 독산성은 수목이 울창하지만 원래는 대머리 산이었다. 임진왜란 때(1592년) 權慄(권율) 장군이 幸州山城(행주산성)에서 대승을 거두기 전 수개월 동안 웅거했던 곳이 바로 독산성이었다. 왜군은 헐벗은 독산성에는 물이 없을 것이라 짐작하여 권율 장군의 부대를 遠隔(원격)포위만 하고 있었다. 권율 장군은 부하들에게 말(馬)의 몸통에 쌀을 자꾸 부어서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독산성이 말에게 샤워를 시킬 만큼 물이 풍부한 곳으로 보이도록 위장했다. 권율 장군의 기만전술에 넘어간 왜군 스스로가 포위를 풀고 퇴각했던 땅이란 점에서 이후 이곳을 洗馬(세마)라 부르게 되었다.>
   
오찬 후의 답사에는 오산대학교 예비군 대대장 안병율 씨가 오산 지리에 어두운 졸자를 위해 동행했다. 오산대驛(역) 건너편이 6·25戰史(전사)에서 ‘수청말’이라는 지명으로 등장하는 수청동이다. 수청동의 ‘물향기수목원’ 부근이 스미스 지대에 배속되었던 미 제52포병대대가 105mm 야포 5문을 방열시켜 놓고 이곳에서 1.8km 북방인 죽미령의 보병 진지를 엄호했다. 6·25 전쟁에서 미 지상군의 初彈(초탄)이 발사된 곳이 바로 지금의 ‘물향기수목원’ 앞이다. 이 물향기수목원 바로 남쪽 구릉에 오산대학교의 캠퍼스가 위치해 있다.
 
오산대학교를 뒤로 하고 오산전투의 현장 죽미령으로 북상했다. 졸자는 지난 2월에도 죽미령의 ‘유엔초전비’와 1번국도를 답사했었다. 이때 유엔초전비 옆에 건립된 유엔군 초전기념관(오산시 경기대로 742)에 들렀으나 아직 개관을 하지 않고 있었다. 한달 후(3월13일)의 재차 방문 시에도 개관일은 또 며칠 연기되어 있었으나 기념관 측은 당초 약속대로 졸자에게 미리 준비한 사진 자료 등을 제공하고, 아직 다 꾸미지 못한 기념관 내부도 공개했다.   
  

적 전차와 맞선 미 제34연대장 마틴 대령의 자존심

7월5일 밤 늦게 스미스지대의 패잔병들은 무참한 모습으로 미 제34연대의 진지에 나타났다. 이때 연대장 러브리스 대령은 平澤(평택)과 安城(안성) 등지에 있는 예하 부대와의 통신 불통으로 매우 당황해 하고 있었다. 패주하는 한국 군인과 민간인들이 짐을 꾸리기 위해 길을 따라 설치된 전화선을 계속 끊어 가버렸던 것이다.  
   
제1대대 병력은 평택 북방 3km 안성천변의 물 고인 참호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平澤이란 지명, 그 자체가 “연못이 많은 저습한 평야지대”라는 뜻이다. 동틀녘의 안개비 속을 뚫고 차량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파괴된 다리 저편에는 적 탱크의 윤곽도 보였다. 탱크는 모두 13대였다. 탱크는 안성천변에 정지했다. 북한군 보병들은 헤엄쳐 강을 건너왔다.  제1대대장 에이어스 중령은 저항다운 저항도 하지 않고 대대원들에게 天安(천안)으로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안성을 지키던 제3대대도 마찬가지로 天安(천안)으로 후퇴했다.

북한군 제4사단은 미 제34연대를 뒤쫓았다.  그래도 스미스 지대는 진지에서 쫓겨날 때까지 싸웠지만, 제34연대는 적군과 가벼운 접전만 했을 뿐인데도 일찌감치 짐을 꾸려 후퇴했다. 러브리스 연대장의 영어표기가 여러 자료에서 대개 ‘Lovless’인데, ‘애정 없다’ 뜻의 Loveless라고 표기된 자료도 있다. 하기야 러브리스 대령에게 한국이 무슨 특별한 애정이 있었겠는가.
 
딘 사단장은 불같이 화를 냈다. 7월7일, 딘 사단장은 러브리스 연대장의 보직을 해임하고, 새로운 연대장으로 東京에 있단 로버트 마틴 대령을 불렀다. 호출명령을 받은 마틴 대령은 단화와 베레모 차림이었다. 급히 오느라고 철모와 야전작업복도 미처 갖추지 못했다.
 
그 다음날인 7월8일 오전 6시, 북한군이 천안 시가지를 공격하자 외곽 방어선은 조기에 무너지고 적 전차가 천안 시가지를 마음대로 유린했다. 천안역은 경부선의 주요 역이자, 충남의 內浦(내포)지방을 종단하여 금강 하구의 長項(장항)에 이르는 장항선의 시발역이다.

조선시대 영·호남으로 가는 길이 갈라졌던 천안삼거리 부근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적 전차가 육박해 오자 제34연대장 마틴 대령은 크리스텐센 하사에게 2.36인치 바주카에 로켓탄을 장전하도록 명했다. 마틴 대령과 크리스텐센 하사는 각각 2.36인치 로켓포 하나씩을 어깨에 둘러매고 오두막집에서 뛰쳐나왔다. 둘은 동시에 적 전차를 향해 로켓탄을 발사했다.

거의 동시에 마틴 대령은 적 탱크의 85mm직사포에 맞아 몸이 두 조각 나버렸다. 연대장으로 보직된 지 하루만이었다. 탱크에 맞선 용기— 그것은 용기라기보다 군인으로서의 자존심이었다.

크리스텐센 하사는 그때의 진동으로 눈알이 밖으로 튀어 나왔다. 그는 고통을 참으면서 그 피 묻은 눈알을 도로 집어넣었다. 그러면서도 한 가지 위안을 받은 것은 적 전차도 화염에 휩싸였다는 것이었다. 크리스텐센 하사는 그날 포로가 되었는데,  그때의 상처로 인해 포로수용소에서 사망했다.
 
졸자는 公州(공주) 쪽에서 25번 고속도로로 타고 올라가다, 南(남)천안IC를 통해 천안에 들어가 다시 3km 쯤 북상하여 천안삼거리에 이르렀다. 마틴 대령의 전투기념비에 참배하기 위해서였다. 마틴 기념비는 천안삼거리초등학교 바로 뒤에 세워져 있다. 한국인이라면 그 앞을 지나면서 결코 무심할 수 없는 곳이다. 이곳에는 다음 내용의 地名(지명)기념비도 세워져 있다.
 
<1950년 6·25전쟁의 천안 7.8전투에서 산화한 미 제24사단 제34연대 연대장 로버트 마틴 대령을 비롯한 128명 전사자를 기리기 위해 마틴 거리로 地名하고 기념한다.>
   
연대장이 전사한 제34연대 병사들은 천안에 많은 장비를 유기하고 금강 南岸(남안)으로 철수했다. 이어 제24사단 예하 제21연대는 대전 북방 차령산맥 일대 국도에서 遲滯(지체)전술을 시도했으나 정면으로부터 적 전차부대의 공격을, 도로 양측으로부터 적 보병의 침투 공격을 받아 7월9-11일 사흘을 버티다가 철퇴했다. 평택에서 천안까지의 42km를 사흘 만에 돌파당한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적군의 부산 점령이 먼저냐, 유엔의 증원군 도착이 먼저냐

이런 상황에서도 제공권을 획득한 미 공군은 점차 그 힘을 발휘하여 7월10일, 평택 부근에서 적의 大종대를 발견, 총력을 다해 두둘겼다. 적 전차 38대, 트럭 7대, 차량 117대를 파괴하고, 적병 다수를 살상했다. 이것은 6·25전쟁 중 한 번의 폭격으로 거둔 전과로서는 최대급이었다.

7월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유엔군의 창설을 결의, 그 사령관의 임명을 트루먼 미 대통령에게 위임했다. 다음 날인 8일,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원수를 유엔군사령관에 임명, 사상 최초의 유엔군이 탄생했다. 이로써 UN군은 전쟁 수행에 있어 지휘체계의 효율화를 기할 수 있었다.

문제는 한국과 유엔군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는 것이냐에 있었다. 7월14일, 李 대통령은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에게 서한을 보내 한국군도 유엔군의 작전지휘하에 들어가도록 요청했다. 이리하여 유엔군의 지휘관계는 통일되어, 그 후 참전하는 각국의 부대도 미군의 육·해·공군 사령관의 지휘 하에 들어갔다.

7월7일, 북한군은 “적에게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게 높은 공격속도로써 맹렬한 타격을 가해 금강과 소백산맥을 돌파하고, 대전지역과 소백산맥에서 적의 기본집단을 포위·섬멸함으로써 전주·논산·문경 지역과 울진 및 그 남방 지역을 해방한다”고 하는 제3차 작전을 개시했다. 
북한군은 예비사단을 전선에 투입해 진격 속도의 진전을 시도했다. 유엔군은 후퇴를 계속하면서도 전력의 충실화에 의해 반격의 기회를 잡으려 했다. 이리하여 전황은 북한군의 부산 점령이 빠르냐, 아니면 유엔 증원군의 도착이 먼저인가—참으로 시간과의 싸움이라는 양상을 드러내게 되었다.

병력 투입 면에서 보면 미군이 가까운 일본에 주둔하고 있었다는 것은 한국으로서는 결정적 도움이 되었다. 미군은 九州(규슈)에 주둔하던 제24사단에 이어 關東(간토)에 주둔하던 제1기병사단, 關西(간사이)에 주둔하던 제25사단, 오키나와에 주둔하던 제29연대를 차례로 한국에 투입, 일본에는 北일본에 주둔하는 제7사단만 남게 되었다. 결국 미군은 가까운 일본에 주둔하던 부대부터 이동시킨 데 이어 먼 거리에 있는 美 본국의 병력을 축차적으로 한국에 투입했던 것이다.  

유엔군은 제해권·제공권을 확보 하에 연일 부산항에 대량의 물자를 양육했다. 하루 4만톤의 하역능력을 보유한 부산항의 뛰어난 능력은 이후 전황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유엔군은 보급과 보충의 스피드 전쟁에서 적을 압도하고 있었다. 
 

혼란을 극복한 한국군

한강방어선을 포기했던 한국군 주력은 7월4일 평택 부근에 집결했다. 그러나 싸움에 지친 6개 사단의 전력은 절반 이하로 저하되었고, 장비의 70%를 상실했다. 7월5일, 정일권 참모총장은 이 6개 사단을 재편, 수도사단·제1사단·제2사단으로 제1군단(김홍일 소장)을 편성하고 제17연대를 예비로 했다. 그리고 7월6일부터 제1군단도 전선에 가입했다. 이 사이 중동부의 산악지대에서는 제6사단·제8사단이 저항을 되풀이하면서 후퇴를 계속하고 있었다.

개전 초기에는 기습을 받아 혼란에 휩싸인 국군이었지만, 점차 쇼크로부터 회복해, 산악지대의 地利(지리)를 살려 완강하게 저항했다. 鎭川(진천)의 수도사단(金錫源 준장)은 7월7일 북한군 제2사단과 조우, 일진일퇴의 공방을 거듭하면서, 5일간에 걸쳐 이것을 저지했다.
 또 7월8일, 제6사단 제7연대 제2대대(金鍾洙 소령)는 음성 북쪽 毛陶院(모도원)에 진출, 이곳 同樂(동락)국민학교에 숙영 중이던 북한군 15사단 48연대를 맹타했다. 전리품은 야포 24문, 박격포 31문, 장갑차 7대, 기관총 62정, 트럭 65대, 소총 197정이었다. 적 포로 188명, 사살 2943명이란 6·25 초전 최대의 전과였다.

동락초등학교 운동장에 널린 적의 무기는 모두 소련제였다. 김일성 집단의 남침을 뒤에서 사주한 것이 소련이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폭로하는 현장이었다. 포로 중에는 敵 제48연대 군수참모(소좌)도 섞여 있었다. 승전 현장에 달려간 정일권 참모총장은 직접 그를 심문했다. 다음은 정일권 장군의 회고록에서 인용한 것이다.

<“우리는 주민들에게 속았습니다.”
“무슨 말인가?”
“마을에 도착해서 국방군이 지금 어디쯤 있는냐고 물었더니 간밤에 모두 차를 타고 도망쳤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안심하고 있었는가?”
소좌는 더 이상 대답을 하지 않았다. 며칠 후 아군 철수 후 뒤따라 들어닥친 북괴군은 보복하듯이 마을 주민들을 집단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한편 그 동부 忠州(충주) 부근에서는 제6사단(金鍾五 대령)이 7월7일부터 북한군 제12사단의 공격을 받았지만 짧게 끊어치는 공격을 되풀이 12일까지 이를 저지했다. 또 丹陽(단양)에서도 제8사단(李成佳 대령)이 북한군 제8사단을 상대로 습격을 되풀이하여, 이를 5일간 저지하고 竹嶺(죽령: 대재)으로 후퇴했다.

그 후, 수도사단은 淸州(청주)·報恩(보은)에서, 제1사단은 槐山(괴산)-米院(미원)에서, 제6사단은 梨花嶺(이화령)에서, 제8사단은 竹嶺(죽령)-榮州(영주)에서 끈질기게 버텼다. 각 부대는 험악한 지형을 이용해, 매복공격 및 역습을 거듭하면서 적에게 많은 타격을 가했다.

특히 제17연대(연대장대리 金熙濬 중령)의 化寧場(화령장: 현재의 상주시 化西面)전투는 지체작전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것이었다. 7월15일, 국군의 후퇴에 의해 생긴 틈새를 찌르면서 북한군 제15사단이 남하해 왔다. 이에 급파된 제17연대는 18일 새벽에 1개 연대를 기습해서 궤멸시키고, 뒤따라온 輜重隊(치중대)를 매복에 의해 노획하고, 20일에는 1개 대대를 매복공격하여 궤멸시켰다. 정일권 참모총장은 이 제17연대 全장병에 대해 1계급 특진을 시켰다.

이 사이 동해안의 7번국도 정면에서는, 제3사단이 고전을 계속하면서도 미 해군의 함포사격 지원 하에 적군을 지체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제3사단은 점차 압박을 받아 7월17일에는 盈德(영덕)을 잃었다. 이 소식에 놀란 미 제8군은 포병중대를 급파했다. 제3사단은 맹렬한 함포사격의 지원을 받고 반격하여 공방전을 벌이다 7월 말에 드디어 영덕을 탈환했다.

7월24일, 국군은 또다시 재편성에 의해 2개 군단 5개 사단 체제가 되었다. 그 개요는 제1군단(수도사단·제8사단), 제2군단(제1사단·제6사단), 그리고 제3사단(李俊植 준장)은 육본 직할이 되었다. 이와 같이 국군은 후퇴를 계속하면서도 부대의 재편에 노력하고, 산악지대의 지형을 이용해 북한군을 지체시키는 등 초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전황은 여전히 어려웠고, 小白山脈(소백산맥)을 돌파한 북한군은 집요하게 추격해 국군은 계속 남하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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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7-31, 17:1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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