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힘이 되어준 소영이와의 추억
조인정의 미국 유학奮鬪記(20) / 기쁨과 슬픔의 순간마다 소영이와 함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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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은 한국의 가족, 시험 스트레스, 소프트 볼 경기 도중의 실수와 같은 수많은 걱정거리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내 마음 한구석의 작은 상처로 아려온다. 차마 부모님께 말할 수 없는 고민거리와 비밀들은 내 숨통을 막기도 했다. 그 순간마다 내가 달려가는 곳이 있었으니, 여자 기숙사 201호. 나의 가장 친한 한국인 친구 소영이의 방이다. 그 곳은 내게 있어 힐링(healing)의 장소이며 가슴 속 차곡차곡 쌓아놓았던 심적 부담감을 내려놓을 수 있는 ‘지상 낙원’이었다.

머시허스트 고등학교를 재학하기 전에 나는 유학원에서 助言(조언)을 몇 가지 들었다. 그 중 한 가지가 유학 중 만나게 되는 한국인에 관한 이야기였다. 유학원 담당자는 ‘한국인과 대화하고 어울리는 시간은 최소화하고 미국인과의 대화 시간은 많이 가지라’고 조언했다. 유학을 떠나는 한국인들도 주변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거라 생각한다. 他地(타지)에서 만나는 한국인은 언제나 반갑지만, 그들과 어울리는 순간을 피하는 것이 영어를 익히기 위해서 좋다는 말이다. 많은 유학생들이 외국에 나가기에 앞서 한국인 비율이 적은 학교와 지역을 선택하는 것도 이 같은 이유일 것이다.

내가 읽었던 어느 유명인의 유학 자서전을 보면, 주인공은 영어를 마스터하기 위해 일부러 한국인들을 멀리하고 미국인들과 몰려다녔다 한다. 그만큼 한국인과의 만남은 유학생들에게 어느 정도로 민감한 이슈인지 감이 올 것이다. 幸인지 不幸인지, 위스콘신에서 일 년간 교환학생을 할 당시 나는 학교의 유일한 동양인, 즉 한국인이었기에 집과 학교 어디에서나 미국인들과 어울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펜실베니아주 머시허스트 고등학교로 옮기면서 나를 제외한 7명의 한국인들을 만났다. 엄마는 내가 펜실베니아로 가기 전에 학교에서만은 미국인과 최대한 함께 다니기를 권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생활하게 된 기숙사는 오로지 외국학생들을 위한 기숙사였고, 대부분의 학생들이 유학을 생애 처음 온 중국인들이었기 때문에 영어로 하는 기본적인 대화에도 불편함이 따랐다. 즉, 내가 영어를 배울 수 있는 최적의 장소는 학교였다.

학교를 마친 후 기숙사로 돌아오면 한국인과의 만남은 피할 수 없었다. 난 학교에서의 수업 시간보다 기숙사에서 보내는 시간이 훨씬 더 길었다. 기숙사에서의 즐거운 시간은 곧 미국 생활의 행복과 같았다. 처음에는 他地에서 만난 한국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어렵고 불편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한국이라는 끈으로 똘똘 뭉쳐 기쁜 일이 있으면 함께 웃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서로를 다독이며 힘든 유학생활을 이겨냈다.
 
유학 중 내게 고추장은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아이템이었고, 어느 음식을 막론하고 고추장은 몸보신 음식이자 별 다섯 개짜리 특급 소스였다. 어느 날 기숙사에서 저녁을 놓친 나는 소영이와 컵라면을 먹었다. 한국의 小자 컵라면보다 약간 더 작은 사이즈의 미국식 컵라면이었는데, 겉에는 ‘치킨 맛’ 이라고 표기돼 있었다. 물론 치킨의 맛이 약간 날 뿐 내게는 밍밍하기만 했다. 소영이는 그 때 고추장을 한 두 스푼 정도 넣고 휘휘 저었다. 마치 고추장 찌개처럼 빨갛게 변한 라면 매콤한 라면을 보니 군침이 절로 났다.

나의 고추장 사랑은 대단했다. 라면을 먹을 때를 비롯해서 밥, 고기, 피자, 파스타, 치킨, 햄버거 등 그 어느 곳에 상관없이 나는 고추장을 그 위에 쓱쓱 발라 맛있게 먹었다. 아침식사로 식빵에 고추장을 딸기잼 마냥 발라 먹을 정도였다. 매콤한 고추장을 먹는 잠깐의 시간은 유학 중 느낄 수 있었던 喜悅(희열)이자 樂(낙)이었다.

2012년 11월의 어느 날, 나는 엄마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해 들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는 평소의 생기 있는 목소리가 아닌, 나지막하게 떨리며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엄마가 조심스럽게 내게 전한 건 바로 내가 사랑하는 외할머니의 죽음이었다. 나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펑펑 울었다. 가장 먼저 소영이에게 달려갔다. 내 어깨를 다독이며 ‘괜찮아’를 연거푸 말하는 소영이를 보면서 내 눈물은 그칠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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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영이 방과 내 방에 들렀던 중국 친구들은, 내가 왜 그렇게 심하게 울고 있는지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할머니의 訃音(부음) 소식은 한국인들 사이에도 빠르게 퍼져 영훈오빠, 민주언니까지 알게 되었다. 소영이는 고맙게도 나를 찾아와 오랫동안 슬피 우는 내 옆에 있어주었다. 외국에 있어 외할머니 장례식에 가족 유일하게 참석하지 못해 내 가슴은 더욱 아팠다. 내 옆에 있던 영훈오빠와 민주언니는 자신들도 예전에 유학 중 친지의 죽음으로 나처럼 한국으로 갈 수 없어 눈물만 흘릴 수밖에 없었다고 위로했다. 자상한 기숙사 선생님 제프(Jeff Green)의 기도문에 따라 나는 기도를 하며 외할머니가 천국으로 잘 가실 수 있도록, 그 곳에서는 아프지 않도록 빌었다. 내 옆에서 영훈오빠, 민주언니, 소영이도 나의 슬픔이 그들의 아픔인 것 마냥 진지한 기도를 올렸다.

방학동안 한국의 어느 태권도장에서 온 태권도 꿈나무들이 우리 기숙사에서 잠시 머물게 되었다. 에리(Erie)에 위치한 우리 기숙사에서 조금만 가면 한국인이 운영하는 어느 태권도장이 있었는데, 한 30명 정도 되는 태권도 꿈나무들이 한국에서 이 태권도장까지 방문 겸 훈련을 왔었다. 미국 유명 도시도 여행할 겸 이곳을 찾은 것이다. 내가 살던 기숙사가 10일 동안 그들이 머무를 숙소가 되었다. 일곱 살 어린아이부터 중학생까지 연령층이 다양했고, 우리 한국 유학생들은 그 어린 친구들과 밤에 함께 피자 파티를 하기도 하고, 영화를 보기도 하는 등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그러던 어느 날, 기숙사에서는 외부 사람들을 초청해서 비디오 게임대회를 개최했다. 사상 처음 열렸던 이 대회에는 예상치 못할 만큼의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기숙사는 시끌벅적 했다. 그런데 갑자기 여덟 살쯤 된 한국 여자아이가 場內(장내)가 떠나갈 듯 큰 소리로 울음보를 터뜨렸다. 그 아이 옆에는 같은 나이 또래로 보이는 여자 아이가 심각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무언가 심각해 보이는 분위기를 감지한 나는 울고 있는 그 아이에게 다가갔다.

무언가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 분명했다. 울고 있던 여자아이가 $100의 큰돈을 잃어버린 것이다(사건의 顚末은 생략). 그 아이의 지갑은 방에 있었는데, 그 지갑은 펼쳐져 있었고, 누군가 몰래 열어 돈만 슬쩍 빼 달아난 것이 확실했다. 그 아이의 친구는 어떤 키 큰 흑인 한 명이 게임 경기 도중에 몰래 아이들의 방이 있는 기숙사 쪽으로 올라갔다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모두가 패닉(panic)상태에 빠졌다. 그 여자아이가 울기 시작하자 이는 곧 전염이 되어 비슷한 또래의 어린 아이들 대부분이 울음보를 터뜨렸다.

경찰이 와서 사건을 조사했다. 사건의 정황을 물었다. 가만있을 수 없던 나는 경찰 뿐 아니라 기숙사 선생님들께 아이가 전했던 모든 사실을 영어로 통역하기 시작했다. 한국인 언니와 오빠들까지 가세했다. 미국에 대한 환상으로 가득 차 있던 이 어린 아이는, 이 사건으로 인해 문 밖으로 나가려하지 않았다.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도 가지려 하지 않았다. 그날 밤 공포에 질려 제대로 잠들지 못했던 그 아이를 위해, 나는 아이가 잠들 때까지 옆에서 돌보며, 다음 날 아침까지 함께 있었다. 다행히도 이 사건은 빠른 시일 내에 좋게 마무리 되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내가 소영이의 방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을 표현한 말이 아닐까. 한국에 있는 가족이 보고 싶을 때, 많은 양의 숙제로 스트레스를 받을 때, 소프트볼 연습 후 기진맥진이 되어 있을 때, 출출할 때 등 작은 일을 핑계 삼아 나는 매일같이 소영이 방에 잠깐 들렀다. 소영이는 고맙게도 내가 자주 왔다고 신경질을 낸 적이 한 번도 없었고, 매사에 긍정적이었다. 소영이와 같이 있으면서 그동안 짊어졌던 무거운 심적 부담감을 내려놓을 수 있었고, 내 방으로 돌아올 때의 발걸음은 무척 가벼웠다. 가끔은 인생을 쉽게, 그리고 아무런 걱정없이 살아가는 소영이를 보면서 가끔은 그녀가 인생무상이라는 인생의 진리를 이미 터득하며 살아가는 ‘도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나는 항상 소영이의 도움을 받았다. 그때까지만해도 난 화장을 전혀 할 줄 몰랐다. 소영이는 학교 댄스파티인 홈커밍(Home coming)과 프롬(Prom: 졸업무도회)을 비롯한 여러 행사가 있을 때, 항상 내 화장을 해주는 코디네이터 역할을 해주었다. 배가 고플 때 소영이 방에 찾아가면 소영이는 그 동안 숨겨놓았던 즉석 밥, 컵라면, 누룽지, 즉석 카레, 참치 통조림 등을 내게 선뜻 내놓았다. 한국 인스턴트 식품들은 최고급 호텔의 일등 주방장 요리처럼 여겨져 막상 먹지는 못하고 다시 침대 밑에 숨겨놓곤 했다. 하지만 가끔 너무 배가 고파 밤에 잠이 오지 않을 날에는 어쩔 수 없이 즉석밥을 뜯어 비닐 봉투에 넣고, 물이 끓는 전기포트에 그 봉지에 담긴 밥을 그대로 집어넣어 삶았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먹었던 밥 중 가장 맛이 있었다.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는 우울한 날이면 나와 소영이는 항상 노래를 불렀다. 한국에서 유행하는 최신가요를 부를 때가 대부분이었는데, 우리의 노랫소리는 복도에도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이렇게 우리가 열창하고 있을 때면 지나가던 중국 친구들은 우리 방에 들러서 우리의 우스운 모습에 함께 웃고, 박수를 쳐주기도 했다. 행복과 자신감으로 내 몸은 100%로 다시 충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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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시간에 셰익스피어의 맥베스(Macbeth)를 배운 후 이와 관련된 연극 동영상을 만들어 제출하라는 과제를 받았을 때, 소영이는 나의 든든한 카메라맨이면서 소품 담당자가 되주었다. 반대로 후에 소영이가 나와 같은 맥베스 과제를 받았을 때, 이번에는 맥베스 역을 맡은 소영이를 위해 내가 맥베스의 적이었던 맥더프(Macduff)가 되어 싸움씬(scene)을 찍기도 했다.

유학 생활 중 한국 유학생들과 나눴던 대화, 유머, 웃음은 마치 텁텁한 건빵과자를 먹다가 중간중간 발견하는 달콤한 별사탕 같았다. 학교수업, 소프트볼 연습, 숙제의 굴레에 묶여 매일 똑같이 굴러가는 쳇바퀴와 같았던 내 일상에서 그들은 내게 달콤한 행복을 선사했다. 지금까지도 가족이라 여기며 지냈던 한국인들과의 추억은 내게 진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 2013-08-07, 11:4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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