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시의 자살… 아직 가시지 않은 그날의 슬픔
조인정의 미국유학奮鬪記(25)/ 저 세상에서는, 그가 더 이상 아프지 않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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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식을 듣자마자 나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넋이 나간 채 멍하니 한참을 있었다. 그것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을 이내 알아차리고 오열했다. 심장이 찢겨 나가는 것 같았고, 내 마음은 송곳에 찔린 것처럼 쑤셔왔다. 너무 고통스러웠다.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날은 2013년 5월21일, 나의 친구 제시(Jessie Edwards-Borowicz)가 너무 갑작스럽게 세상과 이별을 고한 날이었다.

Christian Ethics(기독교 윤리) 수업 시간에 나와 레이첼을 포함한 몇몇 친구들은 학교에서 받은 아이패드에 그룹메시지를 만들었다. 21일 밤, 무슨 재미난 이야기라도 하는지 친구들이 주고받는 수 십 통의 그룹메시지 때문에 내 아이패드는 쉴새없이 소리를 냈다. 궁금해진 나는 그룹메시지를 켰다. 메시지의 첫 문장을 읽고 나는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Jesse Borowicz commited suicide(제시가 자살했어).”

그 순간 나는 제시가 병원에 있다고 생각했다. 자살이란 함부로 범하기 어려운 일이다. 분명 제시도 자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병원에서 치료 받고 있을거라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는 게 더 옳았다.

나는 친구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제시 괜찮은 거지? 제발 그가 괜찮다고 말해줘.” 하지만 내게 돌아오는 레이첼의 답변이란, “오늘 밤에 죽었어”였다. 그 순간 몸에 힘이 완전히 풀리더니, 영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나는 氣力(기력)을 잃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눈물이 폭풍처럼 밀려와 앞을 가렸다. 오늘 학교에서도 보았던 제시였다. 그런 그가 자살을 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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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방과 후에 학교 앞에서 제시를 보았다. 그날은 내가 소프트볼 시즌을 마치고 연습이 없어 처음으로 스쿨버스를 타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연습이 없으니 기분이 뭔가 이상했지만, 발걸음은 가벼웠다. 스쿨버스를 기다리는 데, 저 멀리서 누군가 나를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더니 “인정!”이라 소리치며 걸어왔다. 제시였다.

학교 토론부에 들어가면서 알게 된 제시는 나와 친하게 지내던 두 명의 남자 친구 중 한 명이었다(다른 한 명이 브래난이다). 제시는 나를 보자마자 반가움에 가볍게 포옹을 했고 우리는 간단한 인사를 나눴다. 그 날 제시는 평소와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얼굴에 핏기가 없이 하얗게 보였고 계속 기침을 했다. 감기에 걸린 것 같았다. 대화를 나눈 지 얼마되지 않아, 스쿨버스가 도착했고 나는 바로 차에 오르며 그와 인사를 했다. 내가 제시와 나눈 마지막 인사였다.

제시의 갑작스러운 자살소식에 나는 갑자기 무서워졌다. 항상 밝게 웃으면서 지냈던 제시가 이 세상을 떠났는데도,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시간은 아무 변화없이 흘러갔고, 주위의 모든 것들 역시 여전히 똑같았다. 달라진 단 한 가지는 제시를 잃은 슬픔에 대성통곡 하고 있는 나의 모습이었다.

나는 제시와 함께했던 지난 추억들을 反芻(반추)해 보았다. 토론부 활동을 했던 난, 토론대회 파트너였던 윌리엄과 열심히 대회 준비를 하고 있었다. 교실에서 열심히 자료를 찾던 나에게 어떤 남자아이가 다가와 “니하오”라고 말했다. 난 기분이 약간 언짢았다. 나는 “니하오, 그런데 나 한국 사람이야”라고 말해줬다. 그때, 그 남자아이의 파트너로 보이는 다른 남자아이가 나에게 물었다. “정말? 너 어느 쪽 한국에서 온 거야? 북한? 남한?” 난 내가 만약 북한에서 왔다면,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분명 미국 정부당국의 조사를 받았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나에게 중국어로 인사를 했던 친구가 자신의 파트너에게 한국과 북한의 다른 정부 형태 등에 대해 선생님처럼 능숙하게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둘은 한국에서 온 내가 신기한지 한국에 대한 질문을 내게 계속 했고, 우리는 어색함을 느낄 겨를도 없이 금새 친해졌다.

윌리엄과 토론대회를 나간 이후 나는, 소프트볼 연습으로 인해 토론부 일에 참여하기가 힘들었다. 어느 날, 제시는 내가 자신의 파트너가 되어 곧 있게 될 토론대회를 나갈 수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제시는 자신의 원래 파트너와 잘 맞지 않아 다른 파트너를 찾고 있었는데, 그 마땅한 사람이 나라고 했다. 당시 大入 원서 작성과 소프트볼 연습 때문에 내 몸은 두 개라도 모자랄 판이었지만, 친구를 위해 그의 파트너가 되어주었다.

토론대회 준비를 하며, 우리는 방과 후에 도서관에 남아 자료를 찾고, 우리 주장을 글로 써서 연습했다. 연습할 시간이 많이 부족했기 때문에 제시는 대회 바로 전날까지도 내가 살던 기숙사로 찾아와 연습을 하며 글을 다듬고 수정했다. 약 일주일 정도의 짧은 준비기간을 가지고 출전하게 된 대회였기에, 작성한 글을 손볼 시간이 넉넉하진 않았다. 제시는 그런 나를 여러가지로 도와주었다. 1998년생으로 내 동생보다 겨우 한 살 더 많았지만 내게 제시는 언제나 오빠같이 든든했고 큰 힘이 되었다.

제시가 기숙사를 떠난 뒤에도 나는 글을 계속 손보았다. 자정이 넘어서도 계속되는 나의 연습과 노력을 제시도 알고 있었는지, 그는 내게 “내일 대회를 위해 어서 자!”라는 메시지를 보냈고, 다음 날 아침에는 커피까지 직접 가지고 왔다. 하지만 토론대회장에서 나는 여전히 떨렸고, 미국인들의 빠른 말과 수준 높은 어휘력에 아무리 당해낼 수가 없었다. 제시가 反論을 훌륭히 잘 펴가며 토론을 이끌었지만 아쉽게도 4등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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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31일, 할로윈 데이에도 제시는 나를 그의 집으로 초대했다. 사실은 우리와 친했던 미국 여자 아이 한 명도 초대했지만, 그녀는 다른 일 때문에 우리와 시간을 보낼 수 없게 되었다. 학교가 끝나고 제시 엄마의 차를 타고 우리는 마트에 들러 감자칩과 빵을 샀고, DVD점에서 할로윈 데이에 어울릴 만한 아주 무서운 영화를 한 편 빌렸다. 제시의 집에 오자 마자 우리는 할로윈 데이에 빠져서는 안 될 ‘잭오랜턴(Jack-o’-lantern: 할로윈에 사용되는 호박으로 판 공예품)’을 만들었다. 호박 안을 먼저 다 판 후에, 우리는 호박 위에 무섭게 올라간 눈초리와 무시무시한 이빨이 있는 입을 그려 넣었고, 칼을 이용해 호박을 조각했다. 불을 켠 초를 조각 한 호박 안에 넣고 방의 불을 끄자 호박 등이 아름답고도 사나운 모습으로 환하게 불빛을 내며 타올랐다.

한참 동안 비명을 지르며 무서운 영화를 보고, 나는 제시와 제시 엄마와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제시 엄마는 제시가 갓난아기였을 때 한국에서 온 남자아이 한 명의 호스트를 한 적이 있었다고 했다. 말이 나온 김에 우리는 그 한국인에게 메일을 보내기로 했다. 제시 엄마가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을 부르면 나는 한국어로 번역했다. 난 미국 명문대에 합격했던 이 분에게 대학 입시에 관해 궁금한 점을 물어보기도 했다.

제시의 자살 소식을 들은 그 날, 나는 이 분에게 메일을 통해 제시의 자살 소식을 알렸다. 호스트 생활을 일 년 해보았던 나로서 호스트 가족은 결국 나의 가족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나는 그가 제시의 형으로서 이 문제에 대해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시의 자살 소식은 곧 학교 전체와 에리(Erie) 전역에 퍼졌다. 그를 추모하는 글이 페이스북에 殺到(쇄도)했고, 제시와 가깝게 지냈던 사람이었건 그렇지 않았건 상관없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포옹했다. 다음날 학교에서는 아침마다 진행하는 예배에 엄청난 수의 학생들이 찾아와 제시가 천국으로 잘 갈 수 있도록 기도를 했다. 학생들은 제시를 追慕(추모)하기 위해 그가 가장 좋아하는 색이었던 분홍색이나 노란색의 옷을 입고 학교에 등교했다. 복도에는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포옹하며 울고 있었고, 교실에서는 선생님이 수업을 하지 않고 대신 제시를 위해 기도하고 주변 친구들에게 사랑의 뜻을 전하는 시간을 가졌다.

며칠 후, 많은 弔問客(조문객)들이 제시의 뷰잉(Viewing: 돌아가신 분의 얼굴을 화장하여 관 안에 뉘여 놓고 관 뚜껑을 열어 놓은 채 문상객들에게 마지막 예를 표하는 기회를 주는 것)을 찾았다. 나도 간절하게 제시를 마지막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그가 살아서 나를 반기는 모습이 아닌 관 속에 누워있는 모습은 차마 볼 수는 없었다. 결국 뷰잉 가는 것은 포기했다. 나는 뷰잉에 갈 기숙사 선생님을 찾아가 제시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제시의 장례식은 뷰잉이 있던 그 주의 주말에 진행되었다. 장례식은 제시가 다니던 어느 교회에서 진행되었는데, 나는 제시와 토론대회에 나가면서 입었던 검은 정장을 입고 갔다. 교회의 예배 장소는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장내는 아주 조용했다. 다만 몇몇이 참을 수 없는 감정에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중국어를 사랑하며, 학교에서 장학금을 받아 중국으로 여행을 다녀온 제시를 위해 교회 교단에는 “福”자가 쓰여진 물건을 놓았다.

잔잔하면서도 슬픈 선율의 피아노 곡이 연주되며 장례식은 시작되었다. 곧이어 제시의 관이 교회 안으로 들어왔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눈물을 삼켰다. 목사님은 우리 곁에서 밝고, 건강하고,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았던 제시를 잊지 말자고 했다. 우리는 그가 천국으로 갈 수 있도록 기도했다. 나 역시 제시의 밝은 모습을 떠올리며 기도했다.

장례식이 끝나고 나오는 길에 제시 엄마를 볼 수 있었다. 많은 조문객들이 그녀의 주위에서 그녀를 안아주며 격려했다. 나는 그분께 전날 내가 기숙사의 모든 학생들에게 부탁해 작성한 편지를 드렸다. 그는 너무 고마워하며 이렇게 말했다.

“제시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 줘서 너무 고마워. 너희들 무서운 영화도 같이 봤잖아. 그리고 어제 택진이(제시 부모님이 호스트한 한국인)와 너 덕분에 오랜만에 전화했어. 너무 고맙다.”

아들을 잃은 엄마의 마음은 분명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가슴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이리라. 하지만 그는 오히려 내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제시의 부모님이 예전에 호스트 했던 한택진 씨는 나로부터 제시의 訃音(부음) 소식을 듣고 장례식에 오려고 했지만, 비자 문제로 인해 안타깝게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유감스러운 마음과 제시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제시의 부모님께 전화로 전했던 것 같다.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옛 말에 따라 나는 다만 그에게 제시의 부음을 알리는 작은 일을 한 것뿐이었는데, 이것이 제시 부모님에게는 큰 힘이 되었나 보다. 나는 그와 포옹하며 한참을 울었다. 장례식 동안 내 마음 속에 억눌려 있던 모든 감정들이 북받쳐 올라왔다. 친구들, 선생님 등 장례식에 참석한 모든 사람을 끌어안고 한참 눈물을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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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가끔 제시의 밝은 웃음과 그가 나를 위해 들려주었던 아름다운 선율의 피아노 연주가 생각난다. 자신의 집 화장실에서 스스로 목을 매달아 자살을 한 제시는 遺書(유서)도 남기지 않았다. 분명 그의 마음속에는 세상을 살면서 아무에게도 말 할 수 없었던 남모를 걱정과 비밀이 있었을 것이다. 그의 환한 미소 뒤에 숨겨진 마음의 고통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친구로서 도와주지 못한 점을 지금도 후회한다. 저 세상에서는, 제시가 더 이상 마음 아프지 않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그곳에서도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밝은 미소를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 2013-08-21, 14:1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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