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淳台의 6·25 南侵전쟁이야기(14)/ ‘부산 교두보’의 작전환경
경남 사람들의 대범한 人心 덕분에 부산교두보를 지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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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의 보급전- 부산항의 위력

補給戰(보급전)이라는 것은 자기의 兵站線(병참선)을 유지·방위할 뿐만 아니라 적의 병참선을 파괴하여 아군의 상대적 병참력을 높이는 싸움이다. 개전으로부터 1개월 남짓 북한군은 일방적으로 한미군을 부산교두보로 밀어붙였다.

그러나 당연한 결과로 적의 병참선은 전선이 남하하면 할수록 길어졌다. 더욱이 제해권·제공권이 유엔군에 장악되고 있어서, 수송은 모두 빈약한 육상교통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유엔 항공기의 위협에 노출되었다.   

지도로 보았을 때, 한반도는 장구처럼 잘록하다. 서울의 緯度(위도) 역시 그와 비슷하다. 주요 도로망도 서울을 거쳐 가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북한의 평양·원산·청진 등에서 적재한 군수품도 반드시 서울을 통과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북한군은 서울시민 수만 명을 동원하여 한강철교를 복구해 이곳으로부터 부채꼴로 남하하는 보급로를 사용해 제1선에 전개한 11개 사단을 먹이고 포탄과 탄약을 보냈다. 이에 미 제5공군은 이 적 보급차량에 치열한 항공저지작전을 전개했다.

그러나 북한군은 낮에는 열차 및 트럭을 터널 및 引込線(인입선)·退避線(퇴피선)에 감춰두고, 밤만 되면 열차와 트럭을 살그머니 끄집어내어 운행했다. 또 북한군은 약 30만 명의 노무자를 남한에서 징발하여 보급수송을 맡겼다. 노무자는 氣象(기상) 상태가 어떠하든 약 20kg의 화물을 하루에 20~24km를 운반하여 다른 마을 노무자에게 인계하는 릴레이 방식이었다. 이 人海戰術(인해전술)로써 1일 평균 400톤의 보급품을 제1선으로 운반하고 있었다.

북한군 1개 사단의 1일 평균 보급량이 7월15일까지는 206톤이었던 것이 8월15일에 이르러서는 그의 4분의 1인 51톤으로 감소했고, 특히 ‘9월공세’ 기간 중 보급량은 21.5톤으로 급감했다. 

북한군의 문제는 현지 조달해야 했던 식량이었다. 작전지역에도 산지가 많았고 평야라 해도 아직 추수 전이었던 만큼 식량의 획득은 어려웠다. 따라서 식사도 정량의 2분의 1 또는 3분의 1로 자꾸 줄일 수밖에 없었다. 조셉 굴든 저서 《한국전쟁: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에 따르면, 당시 미군 정보대가 파악한 북한군 병사들은 다음의 기술처럼 부족한 보급에 허덕이기는 했지만, 그만큼 野戰性(야전성)이 강했다.

<북한 보병들은 일상생활에 있어서 역경에 익숙하고 소박한 자들이었다. 그들의 장비는 부족했으며, 중장비는 거의 없었다. 그들은 한 벌의 군복과 한 자루의 소총, 그리고 약간의 물품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고무신을 신고 있어서 산악과 논을 통과하는 데 우리 병사들보다 더 곤란을 겪었다. 또한 그들은 약탈한 비교적 적은 양의 식량으로 끼니를 이어갔다. 지쳤을 때 그들은 가까운 오두막이나 노천에서 휴식을 취하는데, 멍석이 그들의 침대였다.>

반면, 제해권과 제공권을 틀어쥔 유엔군은 부산항을 통해 병력·무기·장비·식량를 공급받았다. 부산항은 한국군과 유엔군의 생명선이었다. 7월 하순의 경우 부산항에 입항한 수송선은 하루 평균 16척, 하역량은 4만 톤에 달했다. 이 보급품의 흐름과 증원부대의 도착이 북한군을 저지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8월 초순, 국군은 신형 대전차무기인 3.5인치 로켓포와 57mm무반동총을 지급받았다. 미군은 3.5인치 로켓포를 주면서 “이 무기는 적에게 빼앗기면 절대 안 되므로 사단장이 직접 관리해 달라”는 조건을 붙였다. 2~3정씩 3.5인치 로켓포를 수령한 각 연대는 짧은 훈련을 거쳐 곧바로 실전에 사용했다. 각 연대는 특공대를 조직해 낙동강 건너 적진에까지 침투하여 적 전차 사냥에 나섰다.

과연 3.5인치 로켓포탄은 전차의 철갑을 관통했다. 제1사단 12연대가 맨 먼저 적 전차 4대를 파괴하고 그 중 1대를 빼앗았다. 이 전차는 후일 대구에 전시되었다가 현재는 육군사관학교에 전시되어 있다.
 
북한군의 전력을 약화시킨 최대의 펀치는 유엔군의 제공권이었다. 제공권 장악에 의해 ▲적 전력의 근원을 때리는 전략폭격 ▲적 보급을 저지하는 항공저지 작전 ▲최전선의 적을 격파하는 근접 항공지원 작전 등이 가능했다.
 

김일성, “해방 5주년 기념일까지 부산 함락…”

북한군은 전투경력이 풍부한 중공군 출신의 제6사단을 한미군 부대의 저항이 거의 없는 전라도(군산→목포→여수→광양) 방면으로 크게 우회시킨 전략적 실수를 범했다. 또 동해안의 7번 국도를 따라 내려온 북한군 제5사단의 진격속도도 국군의 저지 능력에 비해 매우 완만했다. 이 두 가지는 서울 함락 후 북한군 주력부대가 3일간 추격을 멈춘 것과 더불어 북한군 初戰(초전)의 3대 실수로 꼽을 수 있다.    

8월 공세는,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일성이 鳥嶺(조령) 바로 북쪽 동네인 水安堡(수안보)의 전선사령부(사령관 金策 중장)에까지 내려와 다음과 같이 독전함으로써 벌어진 적의 일대 군사적 캠페인이었다.   

“조선 해방 5주년 기념일인 8월15일까지 부산을 함락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적이 숨돌릴 틈도 주지 않고 낙동강을 건너 대구·부산을 점령하라.”

김일성은 미 본토로부터의 증원부대가 바야흐로 부산에 도착하려던 상황을 보고, 그 점령을 서둘려고 했다. 그의 독전에 따라 북한군은 추격의 태세 그대로 부산 교두보로 돌진했다. 8월3일경, 북한군 전선 부대는 낙동강 전선에 진출, 공격을 속행했다.

‘8월공세’를 북한군은 ‘제4차 작전’이라고 일컬었다. 지금은 수안보 인근 梨花嶺(이화령) 밑에는 터널이 뚫려 있지만, 당시의 이화령엔 터널이 없고 그 골짜기는 미군 항공기의 접근이 어려워 낙동강 전선에 보급되는 북한군의 군수물자 집적소로 사용되었다.  

북한군은 전력을 크게 둘로 나누어 서쪽과 북쪽으로부터 부산 교두보에 접근해 왔다. 西로부터 제1군단(4개 사단)이 부산을 점령해서 대구를 배후로부터 공격하고, 또 北으로부터 제2군단(6개 사단)이 대구·永川(영천)·浦項(포항)을 점령한다는 것이었다. 

이 무렵, 북한군은 미 공군의 제공권 하에 1개월여에 걸친 장기 작전으로 제1선의 損耗(손모)와 피로가 누적되고 있었다. 남침 당초, 국군·미군의 대단한 공포를 주었던 T34 전차도 마침내 그 마력을 잃었다. 그러나 북한군은 사기가 높아 勢(세)를 탔다. 그래서 전력적으로 우세한 유엔군을 오히려 압도한 것이었다. 당시 공산주의는 ‘인민해방’이라는 허구의 깃발을 들었지만, 그것이 그 시대의 위력적인 물결이었다.

낙동강 방어선이 형성된 후 유엔군과 국군 내부의 노무자들의 역할은 더욱 부각되었다. 낙동강선 방어작전 동안 미군 사단에는 평균 500 명의 노무자가 배치되었고, 이들은 보급소에서 전방부대까지 도로가 발달되지 못한 산악지대에 지게로 보급품을 운반하고, 부상병을 후송했다. 국군 1개 대대에도 50~60명의 노무자들이 있었다.  


‘부산 교두보’의 작전환경
 
1950년 여름은 30년 만의 가뭄 때문에 무덥고 대체로 맑은 날씨가 계속되었다. 8월 한달 동안 낙동강 지역의 강우량은 34.1mm에 불과했다. 기상은 제공권을 장악한 아군에게 유리했다. 그러나 적은 강우량, 섭씨 37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로 인해 하폭 500~1000m인 낙동강의 流水幅(유수폭)이 200~250m로 격감했다. 가뭄 때문에 水位(수위)가 낮아져 수심 1~1.5m로서 몇 곳을 제외하면 어느 곳이던 걸어서 강을 건너는 것이 가능했다.  

부산 교두보 전반을 보면 북한군은 북쪽과 서쪽으로부터 부산이란 1점을 향해 구심적으로 공격하고, 유엔군과 한국군은 부산을 등에 대고 이것을 지킨다는 태세였다. 북한군은 外線(외선)에 위치해 불리했고, 유엔군과 한국군은 기동로가 발달한 內線(내선)에 위치해 유리했다. 지금까지의 지체전술이 아니라 엷기는 하나 처음으로 일정한 전선을 형성할 수 있었다.

유엔군·한국군의 작전구상 포인트는, 우선 낙동강의 하천장애와 교두보 내의 環狀機動路(환상기동로)의 활용이었다. 돌파될 듯한 正面에 힘센 예비대를 즉각 투입해서 튀어나오는 적을 때리는 것이 기본적인 전술이었다. 이 때문에 교두보 내에서 環狀(환상)기동로의 어느 한 点(점)이라도 돌파되어 막혀버리면 작전구상은 무너질 위험이 있었다.
 
북한군은 낙동강이란 천연 장애물을 극복하는데 있어 모든 작전을 야간에만 실시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 중 8월6일 낙동강 돌출부의 오항나루터와 8월8일 다부동 서쪽 마진나루를 통한 야간 도하작전은 기습을 달성해 아군에게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예컨대 다부동 전투에서 한 달간 계속된 교전기간에 북한군이 주간에 공격한 것은 7회에 지나지 않았다. 그 가운데 네 번은 아군 전폭기의 출격에 의해 실패했다. 반면 북한군은 수없이 야간공격을 실시했다. 아군도 8회에 걸쳐 실시한 야간공격 모두 성공했다. 이는 야간전투의 중요성을 강조해 주는 사례이다.

북한군은, 航空劣勢(항공열세)와 절망적인 보급으로 인해 戰力(전력)의 집중이 거의 불가능했다. 많은 경우 1개 사단, 많아야 3개 사단이 개별적으로 유엔군·한국군의 陣地線(진지선)에 부딪쳐 오는 작전형태였다. 이러한 피아의 작전구상과 조건 아래 부산 교두보 안은 다양한 환경에 처해 있었는데, 그것 주요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당시 부산 교두보 안에는 약 70~80만 명으로 추정되는 피난민이 있었고, 여기에 다시 매일 2만 수천 명이 새로 유입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원래 주민들과의 사이에 자칫 분쟁이 일어날 우려도 없지 않았다. 우리 정부는 ‘피난민수용에 관한 임시특별법’을 발표하고, 여유 있는 주택 등에서 피난민을 수용시키고, 유엔은 쌀·의약품·방역자재를 급송하여 구호활동을 강화했다.

또 미 제8군은 피난민을 통제하기 위해 한국의 경찰대를 각 사단에 배치하여 심문, 소지품 검사, 호송 등을 맡게 했다. 이러한 조치도 있어서, 부산 교두보에서는 피난민이 의식주가 곤란해 폭도화 한다든지, 게릴라의 활동무대가 된다든지, 혹은 전염병의 발생원이 된다든지 하는, 군사 면에 악영향을 주는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특히 ‘경남의 대범한 인심’과 미국의 풍부한 물자, 그것을 감당한 부산항의 탁월한 능력이 부산 교두보를 지키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특히 부산에서 제일 큰 국제사장의 상권은 赤手空拳(적수공권)으로 피난을 내려온 이북 사람이 잡기 시작했다. 이것은 부산사람의 열린 마음, 국제성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교두보 내에는 전쟁 전부터 普賢山(보현산: 경북 靑松郡· 부산 북방 116km)과 운문산·가지산 등 ‘영남알프스’를 근거로 활동하고 있던 재래의 게릴라 외에 제766부대 등 남침과 더불어 남파한 게릴라 및 작전간 북한군 각 사단으로부터 파견된 편의공작대 등의 게릴라도 있었다.

유엔군은 그 총수를 약 3만 명으로 추정했지만, 실체는 확실하지 않았다. 이들 게릴라는 후방에서 국군과 유엔군에 관한 정보의 수집, 통신선의 절단, 지휘소 및 후방기관·要人(요인) 암살, 포격의 유도, 교통선의 파괴·습격 등의 활동을 벌였다.

국군·경찰과 유엔군은 피난민의 통제, 철도·도로·유선통신의 경호를 실시하고, 때로는 적극적으로 게릴라를 토벌했다. 그 때문에 부산 교두보 내 게릴라 활동은 소규모적·산발적인 것으로 머물러 방어전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미군은 매우 긴장했지만, 국군 관할지역에서는 북한의 사투리가 구별되기 때문에 게릴라 활동은 거의 맥을 추지 못했다. 미군부대에는 한국 경찰관이 파견근무를 했다.
 
    
유엔 해·공군의 지원

유엔 해군은 해상봉쇄·해상수송·함포사격·해군항공기에 의해 지상작전을 지원했다. 유엔 공군의 주력인 미 제5공군은 7월 말에는 전투기 890대 이외에 전략폭격기·수송기 등을 다수 보유하여, 공군력으로 近接(근접)항공지원, 항공저지, 전략폭격, 항공정찰, 항공수송 등을 실시했다. 8월의 근접항공지원의 출격회수는 7000기에 이르고, 이것은 1개 사단마다 1일 평균 40기가 지원을 한 꼴이었다.
 
특히 유엔 공군은 북한군의 보급 루트를 공격하여 전력추진을 저지하고, B-29 등의 전략폭격기에 의해 북한 내의 철로, 元山정유소, 도크, 興南(흥남) 화학공장 및 城津(성진)제철소 등을 폭격했다.

7월30일부터 9월19일까지 사이에 투하된 폭탄은 1761톤에 달해 이 폭격에 의해 북한의 軍需(군수) 생산기구는 파괴되어 전투계속능력을 상실해 갔다. 이처럼 해·공군의 지원이야말로 부산 교두보의 방어가 가능해진 결정적 배경이었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은 북한군 제5사단의 동향과 延日(연일)비행장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미 극동해군에서는 동해안에 대한 함포사격과 상륙작전, 근접항공지원을 위한 기동함대 함재기의 출격 등에 관한 계획을 수립했다. 이 계획에 따라 북한군 후방의 병참선을 차단하기 위해 미·영 해군은 7월10일 새벽 2~3시 三陟港(삼척항)에 대한 대규모 함포사격을 시작으로 포격범위를 점차 북한지역으로 확대해 갔다. 

북한군 제5사단이 7월8일 蔚珍(울진)을 점령한 후 계속해서 남진하자, 7월12일 국군 제3사단은 함포 지원사격을 요청했다. 7월13일 미 포병장교 1명이 지상전 상황을 중계하고, 함포사격의 표적을 지정하기 위해 주노艦(함)에 파견되었다. 이날, 주노함과 듀헤븐함이 지상군의 요청에 따라 울진의 북한군 병력, 墨湖港(묵호항)의 철도 시설, 삼척항의 油類(유류) 탱크 등에 함포사격을 퍼부었다.

이 함포사격은 지상군의 無線(무선) 통보에 의해 유도되었고, 그 효과가 매우 컸다. 함재기의 폭격은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당시 북한군 제5사단 소속으로 포로가 된  병사들은 “울진에서부터 미군의 공습이 매우 심하여 비행기 소리만 들리면 쥐구멍을 찾았다”고 털어놓았다.


북한군을 상회했던 유엔군 병력
 
1개월 여에 걸친 지체 작전에 의해 북한군 병력의 손실은 5만 8000명에 달하고, 전차는 40대로 격감해 있었다. 더욱이 유엔 공군의 제공권 하의 작전은 보급을 곤란하게 하고, 장졸들의 피로를 현저하게 증대시켰다. 전차는 마력을 잃고, 공격 衝力(충력)도 저하하고 있었다. 다만 사기만은 아직도 왕성했다.

북한군의 병력은 8월 초에 약 7만 명으로 격감되었지만, 곧 충원됐다. 7월 중순부터 점령지역에서 징병을 단행, 제1선에 밀어 넣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낙동강전선의 북한군은 병력 10만 명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점령 현지에서의 병력 충원은 馬賊(마적)들에게나 가능한 악랄한 짓이다.

이에 비해 유엔군은, 한국군 7만 명, 미군 5만5000 명이었고, 8월 중에 미군 2개 사단과 영국군 1개 여단이 도착할 예정이었다. 이처럼 유엔군은 병력면으로 보았을 때, 북한군을 압도하고 있었지만, 북한군 병력·전력의 실체를 꿰뚫어보지 못하고 후퇴 때와 마찬가지로  대단한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전쟁심리이다.

특히 미군은 보급에 완벽을 기해 갔기 때문에 생각지도 않은 벽에 부딪쳤다. 후방요원이 늘어나 제1선의 전투요원이 감소했던 것이다. 1개 사단에 소총병이 겨우 400명에 불과해 서둘러 카투사 부대를 창설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이런 모습은 후일 월남전에도 재현되었다. 미군은 후방지원 요원이 많아 월남 파견 병력이 최대 53만 명의 시점에서 전투 병력은 절반도 되지 않았던 것이다. 

카투사 제도는 1950년 8월15일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원수의 합의에 따라 시행되었다. 카투사 설치 목적은 駐韓(주한) 미군 사단의 부족 병력을 보충해 전력을 유지시키는 데 있었다. 한국전선에 투입된 駐日(주일) 미군 사단은 평시의 감소 편성으로 병력이 부족한 데다 전투 손실의 발생으로 병력 보충이 시급했다. 미군 사단은 사단별로 8300 명의 한국군 병력을 보충받았다. 카투사는 주로 경계·정찰, 그리고 노동력을 많이 요구하는 업무에 종사했다. 특히 이들은 중화기중대에서 기관총·박격포·무반동총 및 탄약을 운반했다. 

[ 2013-08-21, 16:2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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