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正熙 대통령 서거 34주기- 趙甲濟의 'CEO 박정희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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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을 하여야 한다. 고운 손은 우리의 敵이다'

글 | 趙甲濟 조갑제닷컴대표

 

(1) CEO 박정희 연구
관념론과 총론 타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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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正熙 대통령은 근대화 혁명이란 가장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면서도 말은 아주 신중하게 했고, 방법은 점진적이었다. 말이 앞서지 않았다는 것이다. 최근의 소위 민주투사 출신 대통령들은 당장 내일 정의가 실현될 것처럼 과격한(본인들은 멋지다고 생각하는 듯) 말로써 개혁 아닌 改惡을 한 경우가 많은데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성공한 개혁가는 말을 아꼈다.

한국인들은, 특히 말로써 먹고사는 지식인과 정치인들은 말에서 지기 싫어하기 때문에 과격하고 단정적이며 그러다가 보니까 현실과 괴리된 과장된 말들을 쏟아놓는다. 행동으로 뒷받침될 수 없는 이런 말의 잔치가 국민들의 불신을 산다. 개발年代의 신문 人事 프로필 기사를 읽다가 보면 '과묵한 실천력'이란 말이 많이 나온다. 말과 글을 실천보다 중시했던 조선조의 양반정치를 극도로 경멸했던 朴正熙가 추진력 위주로 사람을 썼기 때문일 것이다.
1977년 朴正熙는 청와대를 찾아온 대구사범 시절의 일본인 교사 기시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일본에는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우수한 민족성의 기반이 있습니다. 한반도에서 문화인과 기술자가 일본에 건너가서 정착하여 이들이 또 독자적인 일본 문화를 만들었지요. 유교로 말할 것 같으면 本山인 중국에서는 쇠퇴하고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일시적으로 눈부신 발전을 했지만 여기서도 형해화하고 말았고 유독 일본에서만 일본유학으로서 大成하였습니다.
한국의 유교는 공자묘 등 각지에 형식상 남아 있기는 하지만 본질은 이미 죽어버렸습니다. 대구사범시대에 배운 이야기 가운데 지금도 잊지 않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에도의 學塾에서 孔孟의 가르침을 강론하는 자리에서 야마자키라는 사람이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만약 공자 맹자가 군대를 이끌고 일본을 침략해 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제자들은 대답을 잘 하지 못했습니다. 야마자키 선생이 말하기를, '우리는 즉시 공맹을 맞아 싸워 그들을 포로로 삼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공맹의 가르침이다'라고 했습니다. 학문이란 것은 이렇게 살려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朴正熙는, 조선조 선비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면 그들은 '공맹한테 어떻게 저항할 수 있나. 부모님 나라인데 당장 항복해야 한다'고 답했을 것이라는 뜻을 깔고서 그런 말을 한 것이다. 朴대통령의 이 例話가 암시하는 것은 간단치 않다. 한국인들은 외래사상을 받아들여 교조화하는 악습이 있다. 주자학, 민주주의, 마르크시즘까지도 한국으로 들어오면 우상이 된다. 본래의 취지는 죽어버리고 형식화되어 政敵을 치는 흉기가 된다. 왜인가.

주체성이 약한 지식인들은 조국이 처한 현실을 무시하고 수입품을 무조건 좋은 것이라고 우기면서 이에 반대하면 독재니 이단이니 반동이니 斯文亂敵(사문난적)이니 하여 말살하려 든다. 현실적이고 애국적인 異見을 외래사상의 힘을 빌어 억누르는 이것이 진정한 사대주의이다. 독일계 유태인이 만든 사회주의의 힘을 빌어 동족의 살길을 막아버린 金正日이 그런 인간이다. 朴대통령이 가장 통탄했던 것은 그런 반역적 사대주의였다.

외래사상으로서의 주자학, 민주주의, 마르크시즘을 우상화하면 공허한 논리의 관념론에 빠진다. 그런 사상이 만들어진 외국의 풍토를 무시하고 이론만 수입했고 그 이론만 떼어내어서 연구하기 때문이다. 관념론은 또 과격하다. 말로써야 무슨 짓을 못하겠는가. 총 한방 쏠 줄 모르는 사람도 선언문이란 관념 속에서는 '최후의 일인까지 싸운다'고 큰 소리 친다. 온갖 위선과 부패를 다 저지른 정치인도 말로써는 '행동하는 양심'이라고 우긴다.

朴正熙 대통령은 항상 실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말을 조심했다.

예컨대 1969년9월25일 '저축의 날' 치사에서 그는 '조국 근대화가 통일의 중간목표임'을 강조했다. 朴대통령은, 한국에서 근대화가 이뤄지면 그 경제역량과 민주역량을 기반으로 한 남한이 통일전략 추진의 기지가 되어 북한을 자유화할 수 있다고 보았다.

朴대통령은 한반도에서 평화만 유지된다면 체제대결에서 한국이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자신의 아내를 앗아가고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였던 金日成과의 대화도 인내심 있게 모색하면서 평화의 시간을 길게 가져가려고 했다. 시간은 한국 편이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朴대통령은 그러나 인내와 자제에는 한계가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는 '6.25와 같은 전면전쟁을 도발하여 올 때는 우리도 모든 것을 송두리째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일보의 양보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1969년4월25일 기자회견).

朴대통령은 실무와 각론에 강한 사람이었다. 주자학적 관념론에서 해방되어 유연한 지식체계를 가진 덕분이었다. 주자학적 관념론에는 총론밖에 없다. 이런 전통을 이은 소위 민주투사 출신 대통령들은 '세계화'를 외치면서도 그 실천방법을 몰라 외환위기를 부르고, 민족화해를 주장하면서 민족반역자를 도우고, 인권을 중시한다면서 북한동포에 대한 인권탄압을 방치했다. 좋은 말만 하면 그것이 자동적으로 실천된다고 착각하거나 실천을 위한 각론에는 무능하니까 말로써 때우는 데 이력이 난 탓이다.

1968년 5월22일 朴正熙 대통령은 강원도 삼척군 北坪읍의 雙龍시멘트 東海대단위 공장을 시찰했다. 그는 보고회에서 직접 매직펜을 들고 「북평읍의 도시계획은 이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고했다. 조선일보 정치부 崔秉烈 기자(전 한나라당 대표)가 쓴 정치면 가십란에는 이런 지적이 있었다.

<이곳 관리들은 (대통령으로부터) 브리핑을 듣는 입장에 서고 말았다. 서울 외곽의 도시계획도 대부분 朴대통령의 아이디어에 따라 하는 것이라는데, 그 실력이 여기서 처음으로 공개된 것이다. 朴대통령은 금년 8 월부터 연간 180만t을 생산하여 동양 제1을 자랑하게 되는 雙龍시멘트가 오는 1971년 부터는 연간 420만t 생산으로 규모를 확대 , 단위 공장으로는 세계 제1의 규모가 된다는 보고를 받곤 철도수송은 물론 해상수송 등에 정부가 만반의 뒷받침을 해주라고 지시. 朴대통령은 특히 고속도로가 서울 - 삼척 간의 육상수송에 도움이 된다는 金成坤 의원의 말을 듣고는 『雙龍이 주동이 되어 민간자본을 동원, 民營고속도로를 건설하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한마디했다>

흔히 朴대통령의 국가발전 전략을 국가주도라고 한다. 朴대통령은 그러나 민간의 창의성과 자발성을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국가가 개입해야 한다는 생각을 일찍부터 했다. 지금도 실현되지 않고 있는 民營고속도로 發想(발상)도 그런 경우이다.

朴대통령은 또 '反共도 관광자원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돈벌이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주자학적 선비정신의 핵심은 淸貧사상이고 이는 돈벌이를 거의 죄악시했으나 군인출신 개혁가는 격전지까지도 관광자원으로 이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65년 2월 그는 춘천댐 준공식에 참석해 이런 요지의 말을 한다.

<앞으로 많은 관광객, 특히 수학여행을 이 춘천댐으로 誘引시켜 우리의 기술을 자랑하고 또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진 업적들을 보도록 할 것을 당부합니다. 우리나라의 反共 業績은 훌륭한 관광자원이라고 생각하며, 또 이는 반공사상을 鼓吹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판문점, 휴전선, 평화선, 자유센터 등을 資源으로 하는 관광개발에 종합적 계획이 있기를 바라며, 특히 이 지점들에 적절한 시설(전망대, 休息所, 관광 코스와 버스 등)을 함으로써 훌륭한 관광지대가 될 것입니다. 이에 대한 적극적 조치 있기 바랍니다.>

朴대통령은, 1964년 10월26일에는 부산의 UN묘지를 방문한 뒤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린 적이 있다.

<『UN묘지는 우리나라의 하나의 성지이며, 또 부수적으로는 관광자원인 것입니다. 따라서 UN묘지 周邊의 도시계획에 있어서는 상당한 국가적 配慮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의 말대로 외국인들도 많이 찾는 판문점을 비롯해 휴전선, 임진각, 땅굴, 이제는 소원해졌지만 「평화의 댐」 등은 훌륭한 관광자원이 되었다. 그에게 反共은 안보이면서도 돈벌이고 교육소재도 되는 「자원」이었다.

군인 출신 대통령들이 민간인 출신보다도 실제적이고 추진력도 있었으며 더 유연하고 개방적이었다는 이 점이 한국 현대사를 보는 하나의 키 포인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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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위대한 CEO 朴正熙 강좌

먹고 사는 문제를 개혁의 주제로 설정

'잘 살아 보세' '올해는 일하는 해'식의 적나라한 진실이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새마을 운동 對 주체사상

1970년대 朴正熙가 추진하던 근대화 혁명의 구호는 '잘 살아보세' '새마을 운동-근면 자조 협동'이었다. 같은 시기 金日成은 인간이 자신의 운명에 대한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주체사상'을 들고 나왔다. 朴正熙는 사람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선 데 반해 金日成은 인간改造를 선언한 것이다.
朴대통령은 주부나 家長 같은 이야기를 했고 金日成은 철학자나 성직자 같은 명분을 내세웠다. 결과는 어떤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한 朴대통령은 민주화, 즉 정치적 자유의 물질적 토대를 놓았고, 金日成은 자신의 주인이 된 것이 아니라 인민들의 주인이 되어 그들을 노예화하는 데 성공했다.

朴正熙의 위대성은 먹고 사는 문제를 개혁의 가장 큰 주제로 정직하게 내세워 가식 없이 밀고나갔다는 점이다. 30대 초반에 기자생활을 하면서 필자는 '잘 살아보세'라는 노래가 울려퍼질 때마다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뭐 저런 수준 낮은 구호를 들고나오나. 평등, 평화 같은 멋진 말들도 많은데'라고 우습게 생각했다.

정치의 본령은 먹고 사는 문제의 해결

지금 돌이켜 보면 세계 역사상 성공한 거의 모든 개혁은 그 지도자가 국민들이 먹고 사는 문제를 주제로 설정한 경우이다. 서기 7세기 전 전국 시대 管仲의 개혁에서 시작하여 鄧小平의 중국 현대화 노선, 대처의 영국병 개혁, 아데나워-에르하르트 콤비의 '라인강의 기적', 레이건의 미국 경제 개혁에 이르기까지 성공한 개혁은 예외 없이 경제와 안보를 주제로 삼았다. 그들은 정치의 本領(본령)을 정확하게 파악했던 것이다. 정치의 본질이란 '곳간이 차면 영욕을 안다'는 管仲의 명언 속에 있는 것이다.

毛澤東, 金日成, 盧武鉉式 개혁은 자주, 평등, 正義를 내세웠지만 인간말살, 부패, 事大, 가난의 확산, 위선으로 결말났다. 그들은 국민들을 먹여 살리는 데 무능한 것을 위장하기 위하여 인간개조를 명분으로 들고나와 국민 분열, 민족 분열의 정치를 자행했던 것이다.

朴正熙의 성공비결은 구체적인 목표를 제시하고 일관된 정책을 밀고 나간 점이다. 그가 1963년에 쓴 '국가와 혁명과 나'를 읽어보면 이 책에서 제시한 自助-自立-自主의 전략을 한번도 수정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그 방향으로 나아갔음을 알게 된다. 이 무서운 일관성은 단순성에서 나온 것이다. 철학과 전략이 복잡하면 일관성이 유지되지 않는다. 그의 철학은 '국민들이 편하게 먹고 사는 과제를 해결해주면 자유 민주는 저절로 온다'는 것이었다.

그의 전략은 인간은 스스로를 먼저 도와야 국가가 도와줄 수 있고, 그 自助정신을 기반으로 하여 경제적으로 自立해야 인간도 국가도 독립된 개체로서 존엄성을 지켜나갈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전략과 철학을 깔고 그는 항상 구체적인 정책과 행동지침을 제시한 뒤 국민들을 설득했다.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그는 근대화 혁명의 행동강령으로 '경제 至上' '건설 우선' '노동 至高'를 내걸었다. 그가 가장 좋아한 세 단어는 일과 생산과 효율이었을 것이다.

고운 손은 우리의 敵이다

'국가와 혁명과 나'에는 이런 詩가 소개되어 있다.

땀을 흘려라!
돌아가는 기계소리를
노래로 듣고
..........
이등객차에
불란서 시집을 읽는
소녀야,
나는, 고운

손이 밉더라

朴대통령은 이 詩를 소개한 뒤 이런 논평을 붙였다.

<우리는 일을 하여야 한다. 고운 손으로는 살 수 없다. 고운 손아, 너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만큼 못살게 되었고, 빼앗기고 살아왔다. 고운 손은 우리의 敵이다>

국민을 향해 '거지정신'이라고 비판

朴正熙는 쿠데타로 집권하지 못했더라면 평생을 反骨(반골)로 살았을 것이다. 그는 무위도식, 위선, 명분론, 권위주의, 권력남용에 대해 본능적인 반발심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의 반골의식은 권력과 결합되자 거대한 생산적 에너지로 전환되었다. 그는 반항의 대상을 무능, 위선, 미신 같은 前근대적 가치, 즉 봉건적 잔재로 설정했다. 그는 한국의 후진적 요소들에 대해서 반골의식을 표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1967년 2월26일 서울대학교 졸업식 치사에서 朴대통령은 '생산하는 지도자'라는 개념을 설명한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의 지도자들은 국가발전에 대한 뚜렷한 정책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생산이란 용어를 외면했습니다. 식민지 생활의 잔재로서 남아 있는 관료근성과 낭비의 습성, 무조건 반항하는 부정적 생리, 혼란과 무질서를 틈타 안이한 요령만을 꾀하는 출세주의, 이는 이미 낡은 한국과 함께 사라져버린 '지도사像'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발전적인 지도자의 유형은 한 마디로 '생산하는 지도자'인 것입니다'

'올해는 일하는 해' '올해는 더 일하는 해'식의 구호가 '조국 해방의 해'에 비교하면 작고 촌스럽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모든 허위와 가식을 던져버리고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자는 적나라한 진실이 거기에 있었다. 朴正熙의 반골정신은 민주주의의 무오류성에 대한 도전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민주주의는 하느님이 아니다'라고 말한 유일한 정치인이다. 그는 또 국민들을 향해서 아부하지 않은 유일한 정치인이다. 국민들을 겨냥하여 공개석상에서 '거지정신'이란 말을 쓰기도 했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국민 여러분께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 국민은 확실히 못사는 국민이다. 뒤떨어져 있는 국민이다. 후진국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는 멀지 않는 장래에 다른 선진국가에 못지 않게끔 우리도 自力으로써 自立해서 남과 같이 떳떳하게 잘 살 수 있는 그런 국민이 되겠다는 그러한 꿈과 우리의 자신과 그러한 용기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까지 가든지 '남한테 원조 받아야 되고, 남한테 동냥을 해야 되고, 남한테 얻어먹어어야 산다'는 그런 거지정신을 가진 국민이라면, 우리는 영원히 자립할 수 없을 것입니다'(1965년 5월2일 진해 제4비료공장 기공식 연설).

1960년대 말 朴대통령은 강원도청을 순시한 자리에서 지사를 상대로 약30분간 숨막히는 일문일답을 한다. 주제는 앙골라 토끼. 왜 이 토기에서 생산되는 털이 줄었는가, 왜 전번 보고와 다른가, 왜 120g이 아니고 130g이 되었나... 이처럼 집요하게 지사를 몰아세우는 대통령! '우리도 잘 살아야 한다. 잘 살아야 인간대우를 받는다'는 절박한 꿈이 대통령의 짜증나고 안타까운 목소리에 담겨져 있었다.
朴대통령은 개혁의 참여층을 전국민으로 확대했기 때문에 성공했다. 냉소자와 방관자를 고립시켰기 때문에 성공했다. 모든 개혁의 성공은 구성원의 참여의식에 달려 있다. '참여정부'라는 盧정권이 국민분열과 계급적 적대감으로 참여의식에 찬물을 끼얹은 것과는 대조적으로 朴대통령은 한국인의 마음속에 '잘 살아 보세'라는 불씨를 심었다.

인간과 인생을 긍정한 사람

'하나의 민족국가가 새로이 부흥할 때는 반드시 민족전체에 넘쳐 흐르는 자신과 용기와 긍지가 있어야 하고 적극성과 진취성이 충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근대화 작업을 좀먹는 가장 암적인 요소는 우리들 마음 한 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패배주의와 열등의식, 그리고 퇴영적 소극주의 바로 이것인 것입니다. 또 하나 있습니다. 비생산적 사이비 행세, 이것들입니다. 또 있습니다. 속은 텅텅 비고도 겉치레만 번지레 꾸미려 하는 권위주의, 명분주의, 그리고 언행불일치주의자들입니다. 이러한 요소들을 과감하게 씻어버려야 합니다'(1965년 6월23일 한일회담 타결에 즈음한 특별담화).

먹고 사는 문제를 가볍게 보는 정치인은 인간과 인생을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다. 먹고 사는 것이 인간존재의 본질이란 것을 겸허하게 직시하는 사람은 삶의 가치를 긍정하고 인간을 결국 고귀한 존재로 만든다. 朴正熙가 그런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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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박정희 CEO 강좌
작은 것의 소중함
朴正熙 대통령은 대범함 면과 섬세한 면을 함께 가진 인물이었다. 대범해야 할 때는 굵게, 섬세해야 할 때는 아주 세심했다. 예컨대 1973년 연두순시 때 농림부에서 농민들의 구태의연한 농사법을 지적할 때는 농부처럼 아주 구체적으로 말한다.

'우리 농민들이나 농민을 지도하는 공무원들은 그 동안의 많은 연구로 개선 보급된 새로운 영농지식과 기술을 영농에 활용해야 할 것인데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한 가지 예로 保溫 못자리를 하면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날씨가 좀 춥고 귀찮으니까 '매년 보온 못자리를 하지 않았어도 별 탈이 없었다'는 타성에 빠져 실천하지 않는 농민이 많이 있다. 퇴비나 유기질 비료를 더 많이 생산한다든가 深耕을 하여 地力을 높인다든가 한 여름에는 풀이나 피를 뽑고 가을에는 適期에 벼를 베고 벤 벼는 물이 질퍽한 논바닥에 그대로 둘 것이 아니라 볏단을 거꾸로 메거나 건조한 장소에 옮겨 말려야 된다는 것들을 알면서도 그것이 귀찮다고 하지 않아 전국적으로 막대한 양의 양곡 감소를 가져오고 있다.

또 보리밭을 밟아주고 보리골에 흙을 넣어주면 보리가 튼튼하게 자라고 凍害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농민들이 이를 실천하지 않는 사례가 있는데 이러한 일이 없도록 농민 지도에 만전을 기해야겠다.'

한국역사상 가장 생산성이 높은 CEO였던 박정희의 리더십은 말을 정확하고 쉽게 하며 이에 따라 정보를 정확하고 빨리 전달하는 능력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그의 말에는 현장감이 물씬 묻어났다. 헛소리가 없는 것은 생활과 체험에서 우러난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큰 것을 개혁하려면 작은 데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도시 새마을 사업 지침으로 전국에 내려보낸 항목중 첫번째는 '내 집앞 내가 쓸기'였다. 30년 전 이 지침을 보았을 때 대통령이 참 별것까지 신경을 쓰는구나 하고 비웃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내 집앞 내가 쓸기'가 정착되는 날이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되고 국민들이 민주시민이 되는 날이라는 것을 알 것 같다. 내 집앞을 내가 쓴다는 것은 이웃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배려, 내 것은 내가 해야 한다는 자주성 등 책임 있는 민주시민의 기본 교양을 반영한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한 뒤에 국가에 요구하는 국민의 이런 자세가 제대로 정착되기 전에 형식으로서의 민주주의가 확산되면 민주주의는 행패와 억지를 합리화하는 좋은 방패가 된다.

1970년대 부산에는 '성실한 사람이 잘 사는 사회'라는 구호가 많았다. 30년, 한 세대가 지났지만 이 구호는 아직 유효하다. '불성실한 사람이 못 사는 사회'를 먼저 만들어야 성실한 사람이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 2013-10-26, 23:1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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