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淳台의 6·25 南侵전쟁이야기(19)/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승률낮은 도박’이라는 비판에도 성공을 거둔 인천상륙작전

鄭淳台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鐵床에 적을 올려놓고 해머로 때리는(Sledge-Hammer) 작전

맥아더 원수가 仁川(인천)상륙작전에 처음 구상한 건 그가 漢江(한강)전선을 시찰했던 6월29일이었다. 東京 사령부로 돌아오자마자 참모장 알몬드 소장(훗날 駐韓 미 제10군단장 역임)에게 작전 계획 수립을 지시했다.

이때 이미 맥아더 원수는 駐日(주일) 미 지상군을 한국에 투입해 북한군을 저지하고, 새로운 부대를 敵軍(적군)의 배후에 상륙시키는 튼튼한 鐵床(철상)을 놓기로 했다. 이어 北上(북상)한 한미연합군이 커다란 망치로 敵을 내려친다는 구상이었다.

즉, 규슈(九州)의 제24사단과 칸사이(關西)의 제25사단을 갖고 북한군을 저지하고, 칸토(關東)에 주둔하고 있는 제1기병사단을 인천에 상륙, 북한군의 배후를 끊은 뒤 섬멸시킨다는 작전이었다. 이것은 ‘블루 하트(청색 심장) 계획’이라 명명되었고, 이 계획에 따라 제1기병사단은 1950년 7월6일부터 요코하마(橫浜)에서 승선을 개시했다.

하지만, 북한군의 南進(남진) 속도가 예상보다 너무 빨라 한국군과 美 제8군은 錦江(금강)-소백산맥 선에서 적을 방어하는 데에만 급급했다. 이 때문에 항해 중이던 제1기병사단은 진로를 바꿔 동해안의 迎日灣(영일만)에 상륙, 제8군의 戰列(전열)에 참여했다. 
  
맥아더 장군은 “航空優勢(항공우세)와 제해권을 활용하여 적의 배후를 친다”는 전술에 집착하고 있었다. 태평양 전쟁에서 큰 성공을 거둔 그만의 승리공식이었다. 맥아더는 ‘블루하트계획’에 대신할 상륙작전을 立案(입안)하고 있었다. 이것은 ‘클로마이트 계획’이라고 불렸는데, 美 본토로부터 항행 중에 있는 제2사단과 제1해병여단을 인천·군산·주문진의 인근에 주둔시켜 北의 공세를 저지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美 제8군은 大田(대전)을 잃는 등 위기에 빠져 최후의 방어선인 낙동강 전선으로 후퇴, 부산교두보를 지키는 수밖에 없었다. 제2사단과 제1해병여단을 부산에 상륙시켜 낙동강 방어선을 보강했다. 이 조치에 의해 상륙부대는 없어지게 되었다.

맥아더 원수는 戰線(전선) 배후에의 공격을 고집, 제8군의 낙동강 전선에서 전투 중인 제5해병연대를 뽑아내어 완전한 美 제1해병사단을 편성하고, 일본의 호카이도(北海道)와 토후쿠(東北) 지방을 방위하던 제7사단과 합쳐 제10군단을 만들어 인천에 상륙하도록 했다. 이것이 이른바 ‘클로마이트 100B계획’이다.

병력이 부족했던 美 제7사단에는 한국군 병력 8000여 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한국군에 의해 강제 징집당해 수송선에 실려 일본에 보내졌다. 부두에 도착했을 때 그들의 복장은 신사복에서 반바지와 런닝셔츠 차림 등 각양각색이었다. 간단한 훈련 후 美 군복을 입고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다.

상륙작전의 조건은 나빴다. 黃海(황해)는 干滿(간만)의 차가 크고, 특히 인천 일대에서는 10m에 달해 연속적인 상륙은 불가능하다. 더욱이 해안 모래사장이 없고, 해안으로부터 바로 시가지가 펼쳐져 있어 해군 뿐 아니라 워싱톤의 軍 수뇌부도 상륙작전에 대해 ‘승률낮은 도박’이라고  반대했다. 맥아더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기습이 성공한다”고 버텼다 

작전의 구상은 이러했다. 상륙부대인 美 제10군단이 남북교통의 교차지점인 수도권 지역을 장악해 여기에 鐵床(철상)을 설치하고, 낙동강 전선으로부터 북상해 오는 제8군이 ‘해머’가 되어 이 철상에 북한군을 올려놓고 흠씬 두들겨 팬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해병부대를 내놓은 제8군의 攻勢移轉(공세이전)이 가능하냐는 것이었다. 

 
대성공을 거둔 인천상륙작전

9월10일부터 11일 밤에 걸쳐 美 제1해병사단은 고베(神戶)항을 출항하고, 12일에는 미 제5해병연대·한국 해병연대·한국 제17연대가 부산항을 출항하여, 9월15일 아침 大함대가 인천 앞바다에 집결했다. 이때 국군 제3사단장인 白仁燁(백인엽) 대령은 연대장으로의 강등을 자청, 제17연대를 지휘에 참여했다.

작전에 참가한 함선은 한국 15척, 미국 226척, 영국 12척, 캐나다 3척, 호주 2척, 프랑스 1척으로 7개국 261척이었다. 동원된 항공기는 무려 1000대에 달했다. 인천상륙을 기만하기 위해 5일부터 유엔 공군은 서해안의 군산에 폭격을 가하고, 美英의 특공부대가 군산에 威力偵察(위력정찰)을 감행했다. 13일에는 동해안의 삼척과 평양의 外港(외항)인 鎭南浦(진남포) 일대에 함포사격 및 폭격을 가했다. 인천·서울 지구를 고립화하려는 항공작전도 계속됐다. 최초의 상륙점인 인천항의 月尾島(월미도)에는 항공공격을 거듭하면서 13일에는 함포사격을 가했다. 

9월15일 오전 5시 상륙지원 함포사격을 개시, 6시31분 제1파인 제5해병연대 제3대대가 상륙을 개시했다. 미군의 對월미도 함포사격이 엄청나 북한군은 저항할 의지를 잃었다. 월미도 내의 저항은 산발적이어서, 대대는 오전 7시 50분 경 소탕을 끝냈다.

이날 두 번째 滿潮(만조)에 맞춰 主力부대의 상륙이 개시되었다. 인천항의 북부에 상륙한 미 제5해병연대과 한국 해병대는 敵의 저항을 배제하고 진격, 한밤중에 그날의 목표 선에 도달했다. 인천 남부에 상륙한 제1해병연대는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역시 한밤 중에 제1차 목표선을 확보했다.

다음 날인 16일, 美 해병사단은 제1·제5연대를 竝列(병렬)시켜 진격을 개시했다. 이날 저녁에는 인천항으로부터 10km 거리에 설정한 海岸堡(해안보)를 확보하고, 17일 아침부터 진격을 준비했다. 이러는 사이 한국 제1해병연대는 인천 시가지의 평정을 담당했다. 북한군은 대개 도주했지만, 민간인을 가장하여 숨어 있던 자들도 있었다. 이로써 인천상륙작전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상륙군의 서울 진격, 烏山 북쪽에 鐵床 완성

제1해병사단이 인천에 上陸(상륙)하자 북한군은 남쪽과 북쪽으로부터 이 지역에 병력을 투입하기 시작했다. 유엔 공군의 공격 때문에 서울 부근에 집결한 것은 新編(신편) 혹은 인근 부대 뿐이었다. 유엔군은 새로 투입된 북한군 병력을 약 2만 명이라고 보았다.

상륙작전 직전에 철원으로부터 낙동강 전선으로 南下(남하)하고 있던 북한군 제18사단은 중도에서 급거 되돌아와 수원(서울 남방 25km) 부근에서 이곳 敵 제70연대와 함께 방어전에 착수했다. 이때 팔로군 출신자가 많은 북한군 제18사단에는 신의주로부터 막 도착한 제42전차연대(T34X18대)가 배속되었고, 연대 규모의 부대가 한강 南岸(남안) 영등포에 배치되었다. 개성의 북한군 제107보안연대는 富平(부평)·김포·江華(강화) 부근에 각각 1개 대대를 급파했다. 북한군도 필사적이어서 내륙으로 진격을 시작한 美 제10군단은 이들 부대와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美 해병사단은 제5해병연대에게 김포비행장을, 제1해병연대에게 영등포를 공격토록 명했다. 17일 이른 아침, 제5해병연대는 부평 부근에서 T34 전차 6대를 앞세운 적 1개 대대의 역습을 받았지만, 이를 격퇴하고, 이날 밤 김포비행장에 진출했다. 이후 북한군 소부대의 夜襲(야습)을 물리치고 19일에는 한강 제방에 진출했다.

美 제1해병연대의 영등포 진격은 북한군의 격렬한 저항, 매설된 지뢰, 대전차장애 등에 의해 고전을 거듭하다가 19일에 겨우 영등포 남부에 진출했다. 敵의 역습 때문에 영등포를 점령한 것은 22일이었다. 19일 밤, 제5해병연대는 對岸(대안)의 행주산성에 정찰대를 파견했지만, 북한군 진지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어 해병연대는 8척의 상륙주정을 타고 도하를 시작했지만, 사격을 받아 도하에 실패했다. 20일, 제5해병연대는 對岸에 맹렬한 포격을 가해 놓고 주간에 强襲渡河(강습도하)를 감행했다.

25일 아침, 美 제5해병연대는 서쪽으로부터 공격을 계속, 5일간에 걸쳐 완강히 저항하던 북한군 제25사단을 격파하고 서울 서부의 고지대를 점령했다. 美 제1해병연대는 여의도로부터 한강을 도하, 美 제5해병연대의 공격을 지원하고, 美 제32연대는 西氷庫洞(서빙고동) 쪽으로 한강을 도하하여 南山(남산)을 점령했다. 이때 국군 제17연대는 제32연대 우익으로 진출하여 소탕전을 전개했다. 28일, 서울은 완전 수복되었다. 美 해병사단은 미아리 고개로 진출했다. 그 무렵, 북한군은 서울 북방으로 퇴각을 개시하고 있었다.

美 제7사단의 主임무는 남쪽 방면으로부터 서울 방면으로 북상하는 북한군의 증원을 저지함과 아울러 수원 부근의 요지를 확보하여 슬레지(鐵床)을 만들어, 낙동강 전선으로부터 반격해 오는 제8군과 제휴해 북한군을 격멸한다는 것이었다. 美 제1해병여단에 이어 미 제7사단은 18일 예하 제32연대가, 19일에는 예하 제31연대가 인천에 상륙, 21일 安養(안양)을 점령, 남방으로부터의 증원을 차단해, 그곳으로부터 동남으로 나아가 수원 방면으로 향발했다.

22일 아침, 제7사단은 수원비행장을 점령했다. 이어 24일에는 북한군의 격렬한 반격을 받았지만, 이를 격퇴했다. 격퇴당한 북한군은 烏山(오산)의 북방 고지를 점령, 그 엄호 아래 대전 부근으로부터 북한군이 原州(원주) 방향으로 퇴각하고 있었다. 27일, 제7사단은 오산 고지의 적을 공격했지만, 의외로 강력하게 버텼다. 28일, 공격을 다시 시작한 제7사단은 화력을 집중시킨 후 이 고지를 탈취하고 南面(남면)해서 진지를 점령했다. 이리하여 ‘대장간의 鐵床(철상)’은 완성되었다. 이제는 美 제8군이 낙동강으로부터 해머를 갖고 올라와 敵을 힘껏 내려칠 차례가 되었다.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제10군단의 인천상륙 다음날인 9월16일, 美 제8군과 국군이 부산교두보에서 攻勢(공세)로 移轉(이전)했다. 워커 중장은, 미국의 제1기병사단·제24사단·제5연대전투단과 국군 제1사단으로 美 제1군단(군단장 밀번 소장)을 편성해 主攻(주공)으로 삼았다. 美 제1기병사단과 국군 제1사단에 엄호된 美 제24사단이 京釜本道(경부본도)로 북상한다는 계획이었다.

제8군의 攻勢移轉(공세이전)에는 병력·탄약·도하자재의 부족 등의 문제도 있었지만, 더 큰 문제는 開戰(개전) 이래 3개월 가까이 후퇴와 방어에만 익숙했던 장병들의 심리를 하루 아침에 공세로 변화시키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공세이전 후 한미군은 2~3일간이나 아무런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오히려 북한군의 逆攻(역공)에 부딪쳐 진지를 확보하는 데도 급급했다.

이런 교착상태를 타개한 것이 국군 제1사단이었다. 9월18일, 국군 제1사단은 다부동 북방에서 敵의 틈새를 뚫고 적의 후방에 진출하여 敵의 퇴로를 차단했다. 이어 19일부터는 南面(남면)하여 美 제1기병사단과 함께 남북에서 북한군 제13사단을 끼고 쳤다.

이런 挾擊(협격)에 그렇게 완강하게 저항하던 북한군에게도 붕괴의 조짐이 나타났다. 다른 사단들의 정면에서도 점차 공세가 진전되어 美 제2·제24사단은 낙동강을 도하·北上(북상)했고, 美 제25사단도 진주를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국군 제6사단은 북한군 제8사단을 돌파하고, 동해안의 국군 제3사단은 포항을 탈환하고, 興海(흥해)로 육박했다. 이리하여 한미군의 돌파는 攻勢移轉(공세이전) 6일 째인 9월21일에 달성되었다. 그때 우리 사회에 풍미했던 軍歌(군가)는 한결 밝아졌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이야 피에 맺힌 원수를 무-우-찌르고서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 
      
 
포위·섬멸을 위한 추격전- 敵 주력 포착에는 실패
 
9월22일, 워커 중장은 지금이야말로 총반격의 好機(호기)로 판단, 全軍에 돌진을 명했다. 美 제10군단과의 제휴를 재빨리 이룩해 북한군을 포위·섬멸, 38선에의 진출을 지령했다. 이에 美 제24사단은 김천-영동-대전의 경부국도를 따라 북상, 28일에는 대전에 돌입했다. 제1기병사단은 다부동-상주-淸州(청주) 가도를 따라 북상, 美 제10군단과 제휴를 위해 오산으로 돌진했다. 이때 제1기병사단은 777지대라고 부르는 기갑부대를 편성, 先導隊(선도대)로서 미리 정한 북상로로 돌진시켰다. 이 777지대는 26일, 오산 북쪽 고지에서 美 제10군단과의 제휴에 성공했다.

국군 제1사단은 다부동 주변의 잔적을 소탕한 후 미 제1군단의 예비가 되어 미 제1기병사단을 뒤따랐다. 9월15일, 정일권 육참총장은 河陽(하양)의 제2군단 사령부에서 사단장급 이상 긴급지휘관 회의를 소집했다. 국군 6개 사단의 진격 코스가 결정되었다.
 
제1사단(白善燁 준장): 상주-보은-조치원-수원-서울-高浪浦(고랑포)
제6사단(金鍾五 준장): 軍威(군위)-店村(점촌)-원주-춘천-華川(화천)
제7사단(申尙澈 대령): 예천-충주-원주-의정부-연천
제8사단(李成佳 준장): 의성-안동-영주-제천-양평-철원
수도사단(宋堯讚 대령): 청송-春陽(춘양)-영월-평창-襄陽(양양)
제3사단(李鍾贊 대령): 영덕-울진-삼척-강릉-주문진-양양

제1군단(金白一 준장)은 동부전선을, 제2군단(劉載興 준장)은 내륙 진격을 통괄 지휘하기로 했다. 美 제1군단의 南方(남방)에 있던 美 제2·제25사단은 9월23일 새로 편성된 美 제9군단의 지휘 하에 들어가 병진해서 추격을 벌였다. 당초, 북한군의 저항이 격렬해 고전했지만, 27일 제2사단이 安義(안의)를 공략하던 무렵부터는 快速(쾌속)진격, 28일에는 咸陽(함양)·南原(남원), 이어 全州(전주)를 수복했다.

동부 산악지역에서 국군은 道步(도보)로 추격했지만, 그 속도가 매우 빨랐다. 국군 제8사단은 24일 安東(안동) 남쪽에 도착하고, 26일에는 격전 끝에 안동을 점령했다. 30일에는 堤川(제천)을 우회, 10월1일에는 原州(원주)로부터 북상을 계속했다. 동해안의 제3사단은 유엔 해군에 의해 해상으로부터 보급을 받았기 때문에 다른 사단보다 훨씬 진격 속도가 빨라 9월25일에는 영덕을, 29일에는 삼척을 통과하여 38선에 육박했다.

북한군은 편제가 무너진 상태로 敗走(패주)를 계속했는데, 그 중 9000여 명이 포로가 되었다. 유엔군은 제8군과 제10군단이 제휴하여 북한군을 궁지로 몰아넣었음에도, 그 주력 부대를 포착하는 데는 실패했다.

[ 2013-12-20, 16:1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뉴데일리  |  리버티헤럴드  |  뉴스파인더  |  이승만TV  |  장군의 소리  |  천영우TV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