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淳台의 6·25 南侵전쟁이야기(20)/ 金白一 장군의 묘안과 국군의 38선 돌파
사라진 7만 북한군의 후예는 惡性腫瘍(악성종양)으로 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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從北이란 ‘惡性종양’의 기원 
 
 
낙동강 전선에서 9월15일까지 최후의 공세를 취했던 북한군 약 10만 명 중 유엔군의 포위망을 깨고 북으로 도주한 병사는 3만 명 前後로 추정된다. 나머지 7만 명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이들은 그 후 한국사회를 교란하는 惡性腫瘍(악성종양)으로 키워졌다. 그 악성종양은 아직도 유령처럼 한국사회를 배회하고 있다. 바로 從北(종북)세력이다. 당시 西方(서방)언론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남부전선의 북한군은 어떻게 유엔군의 추격을 피해버린 것일까? 그들은 하루 밤에 자취를 감추고 유엔군의 정찰기도 후퇴 중의 縱隊(종대)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京仁(경인)지구로 이동했던 징후도 없다>

그렇다면 북한군은 도대체 규모가 얼마이며, 어디로 달아난 것일까? ‘9월 공세’ 초기,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온 북한군의 규모는 보병 13개 사단, 기갑사단 1개와 기갑연대 2개, 화포 250~300문, 전차 약 242대 등이며, 병력은 전사상자를 완전히 충원하지 못해 총 9만 8000 명으로 추정되었다. 

북한군의 병력은 남침 때부터 전투에 참가한 병력은 30% 이하였고, 그 3분의 2는 북한으로부터의 新兵(신병)과 한국 내에서 강제 徵募(징모)했던 자들로 그 전투기술은 수준 이하였다. 북한군의 보급량은 계속 감소되어 왔는데, 현지조달도 한계상황에 달했던 것으로 8월 이후 軍糧(군량)은 3분의 1로 줄어들었다. 따라서 북한군은 거의 영양실조와 극도의 심신피로로 사기는 저하되어 갔다. 戰後(전후) 美 극동사령부가 표본으로 추출한 북한군 포로 825명에 대해 ‘사기 저하의 원인’을 조사했는데, 그 21.4%가 ‘식량의 부족’ 때문이었다고 한다.


북한군 조직의 붕괴
              
북한군은, 유엔군의 상륙작전이 임박했다는 정보가 속속 들어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9월공세로 거둔 戰果(전과)는 그리 절망적이지 않았다. 부산만 공략하면 새로운 상륙작전도 저지할 수 있다고 판단, 부산 교두보 공략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대구 정면에서는, 유엔군의 反攻(반공)이 시작된 9월16일까지의 2주간에 걸쳐 逆攻(역공)에 역공을 거듭했다. 9월15일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하자 북한군은 우선 상륙부대부터 격파하려 했지만, 부대의 轉用(전용)은 거의 불가능했다. 낙동강 전선의 유지가 어려워지자 북한군은, 戰線(전선)을 정리하기로 결심했다.

북한군 지도부는, 南面하는 제2군단에 대해 양쪽 날개에 해당하는 부대로부터 축차적으로 錦江(금강)의 선을 향해 후퇴하도록 명했다. 후퇴작전은 세계 어느 군대에서도 미리 훈련받은 작전이 아니다. 더욱이 교전 중의 적과 일정한 간격을 벌리면서 이탈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이것에 실패하면 부대는 編制(편제)를 잃고 궤멸한다. 낙동강 西岸(서안)에 붙어있던 제1군단이 이탈해, 후퇴하기 위해서는 대구 북쪽의 要點(요점) 확보가 절대적이다. 그러나 제1군단의 부대가 이탈하기 전에 이 요충은 국군 제1사단과 美 제1기병사단에 의해 돌파되었다.

9월21일 경에는 全전선에 걸친 북한군의 붕괴가 명백해졌다. 이 무렵, 북한군 제13사단의 참모장을 비롯, 연대장·대대장 급의 고급장교가 속속 국군이나 미군에 투항했다. 낙동강 전선에서 살아남은 병력 9만 8000명 중 38선을 넘어 이북으로 도망간 병력은 중장비를 휴대하지 않은 2만 5000명~3만 명에 불과했다.

북한군은 전력의 한계를 넘어 ‘9월 공세(제5차 작전)’을 강행해, 전·사상자 약 1만 명 냈고 중장비의 대부분을 상실했다. 9월 말, 한국 내에서 발견된 북한군의 隱匿(은닉)병기는 전차 11대, 자주포 4량, 야포 66문, 박격포 50문, 對전차포 22문 등이었다. 북한군은, 연료가 부족해 중장비의 후송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38선을 향해 도주했다. 편제를 유지하며 후퇴한 부대는 方虎山(방호산) 소장이 지휘한 敵 제6사단 정도였다.

方虎山의 제6사단은, 한반도 남부의 점령정책을 위해 각지에 파견되어 있던 文官(문관) 8000명을 수용해, 지리산에 일시 농성한 후 10월 말부터 11월 초에 걸쳐서 산을 타고 가서 북한에 도착했다. 김일성은 방호산을 격찬, 일약 군단장으로 승진시키는 동시에 軍功(군공)을 세운 장군에게만 특별히 수여되는 최고훈장 二重英雄(이중영웅)을 주었다. 휴전 후 그도 김일성으로 미움을 받는 延安派(연안파)여서 숙청의 위기를 느껴 중국으로 망명했다.


남한서 징모된 敵兵 17만과 부역자 30만의 행방

그렇다면 나머지 북한군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북한군에게 후퇴명령이 내려졌을 때, 이탈 곤란한 부대는 게릴라 활동으로 전환한 후 命을 기다리도록 지령되고 있었다. 동해안을 따라 후퇴했던 敵 제5사단에서는 後衛(후위)의 연대장이 부하 장병에게 무기·식량을 분배, 다시 남침할 때까지 太白山脈(태백산맥) 중에서 게릴라 활동을 명하고 분산시켰다고 한다. 南部軍(남부군)의 거점으로 유명한 지리산에도 상당한 숫자의 북한군 패잔병이 게릴라가 되어 山中에 雄據(웅거)했다. 이때 게릴라로 변신한 인민군의 수가 1만~2만 명으로 추정되었다.

앞서 거론했지만, 북한군 병력의 다수는 한국 내에서 강제 징모된 新兵(신병)들이었다. 그들은 소모율이 높은 총알받이로 전장에 떠밀려 갔다. 그들 대부분은 북한을 위해 싸워야 할 이유도 없었다. 따라서 평소 도망 등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督戰隊(독전대)의 총구 때문에 물러설 수 없었다. 따라서 9월15일 경까지는 도망자 및 투항자가 의외로 적었다.

낙동강 전선이 붕괴하고 퇴로가 차단되어 부대의 조직이 와해된 후, 눈에 띄게 투항자가 늘어나 50명이나 100명이 일단이 되어 국군이나 美軍에 투항했다. 9월16일부터 30일 경까지 수용된 포로는 1만 명에 달했다.

혼란을 틈타 徵募(징모)된 패잔병의 다수가 탈주하여 한국 내 그들의 연고지로 돌아가 숨어버린 것으로도 추정된다., 그 수가 4만~5만 명으로 추정되었다. 더욱이 낙동강 전선에서 전투하던 기간 중 북한군 10만 명을 위한 보급품을 운송하는 데 동원된 남한 사람도 무려 30만 명으로 추정되었다. 이들은 한 사람 당 보급품 20kg씩을 어깨에 짊어지고 하루 20km를 걸어서 최전선으로  날랐던 것이다. 북한군은 유엔군의 제공권·제해권 장악 하에서 古代 수준의 兵站線(병참선)을 유지했던 것이다.

국토의 인구밀도가 높은 근대의 전쟁에서는 생각지도 않던 전투가 전개된다. 1940년, 프랑스에 진공했던 독일군의 전차부대는 프랑스 국내의 주유소로부터 연료를 조달해 쾌속진격을 했다. 반면 다음해인 1941년, 소련을 공격했을 때 독일 전차부대는 적의 연료를 전혀 탈취해 사용하지 못해 진격이 한계에 부딪쳤다. 6·25 때 한국은 敵에게 소련과 같은 조건이었다.

반면 오늘날의 한국은 프랑스와 같은 환경이다. 농촌에도 자동차 없는 집이 별로 없고, 산간벽지에도 주유소가 영업하고 있다. 敵은 한국 내로 진격하기만 하면 차량과 연료 획득에 의해 얼마든지 기동력을 확보할 수 있으며, 집집마다 있는 냉장고만 열면 먹을 것도 얼마든지 조달할 수 있다고 판단할 것이다. 이런 사태에 대비하지 못하면 고속도로나 고속화한 국도는 敵을 부르는 ‘레드 카펫’이 되기 쉽다.   

어떻든 敵을 위해 복무 또는 부역한 사람이 이토록 많았다는 것은 남북대치 상황속에서 대단한 약점이다. 그들 다수는 이미 노령화되거나 사망했겠지만, 그의 후손들 중 상당수는 북한을 추종하는 세력으로 성장했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이다.

졸자는 7~8년 전 지리산과 더불어 ‘빨치산의 메카’로 알려진 回文山(회문산)을 답사했지만, 그곳의 모형 아지트에서는 빨치산이 국군 장병에게 조준 사격하는 모형을 만들어놓고 있다. 그리고 전교조 교사들은 이곳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종북의 현장실습을 시키고 있다.

左派정권 10여 년을 거친 지금, 우리 안보기관의 종북·부역에 관한 자료는 대부분 폐기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것은 전쟁 등의 국가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 ‘내부의 敵’을 정리하기 어렵게 만든 국가반역행위이다. 이때 간첩 등 反국가적 행태를 벌였던 자들이 국가로부터 원호금을 받는 등 ‘민주인사’로 둔갑된 사례도 허다하다.
 

美 통합참모본부, 中蘇의 개입 의도가 없는 경우에만…

38선을 돌파해야 할 것인가, 멈추어야 할 것인가? 한국과 미국 사이에 미묘한 견해차가 나타났다. 10월1일, 한국군 제3사단이 제일 먼저 38선을 돌파, 北進(북진)을 개시했다. 조셉 굴든이 쓴 《한국전쟁,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에 따르면 “한국군 3사단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道步(도보) 혹은 차량으로, 종종 상급 사령부와 일체의 통신도 없이 올라갔다”고 쓰여 있다.

미국이 6·25전쟁에 개입할 때는 “북한군을 38선 이북으로 격퇴한다”는 것으로, 1950년 6월27일의 유엔 결의에 의거한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군 격퇴 후에 전쟁을 어떻게 종결시킬 것인가에 대한 명확한 구상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이 무렵, 美 정부 내에선 북한군 격퇴 후 취할 행동에 대해 의견이 분열되어 있었다. 국무부는 유엔군의 공동행동에 의해 한반도의 통일을 해야 할 것이라는 極東局(극동국)의 견해와 38선에서 일시 정지, 정치적 해결을 꾀해야 할 것이라는 정책기획실의 의견이 대립했다. 前者(전자)는, 38선에서의 정지는 북한군 再(재)침공의 우려가 남게 되고, 진격 중의 군을 38선에서 정지시키는 것은 곤란하며, 억지로 정지시키면 38선이 영구적 국경으로 간주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後者(후자)는, 38선의 돌파는 소련·中共의 개입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고 했고 CIA도 그 가능성에 대해 경고를 발하고 있었다.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당초부터 북한군 격멸이 제1의 목적이고, 이를 위해서는 38선 돌파도 어쩔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이같은 맥아더의 판단에 이끌려 국방성도 통합참모본부도 점차 북진론에 기울고 있었다. 이리하여 미국 정부 내에서 의견 차이에 의해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의 의견 통일이 늦어져 트루먼 대통령의 승인(NCC81/1)을 얻은 것은 인천상륙작전 직전인 9월11일이었다. 그 내용은, 38선 이북에의 진군을 승인하지만, 소련과 중국의 개입이 없는 경우에 限(한)한다는 조건이 붙은 것이었다. 통합참모본부는 9월27일, 맥아더 원수에게 다음 요지의 지령을 보냈다.

<유엔군의 군사목적은 북한군의 격멸에 있다. 이를 위해 38선 이북에의 진격을 허가한다. 단, 소련 및 중국의 개입의 事實(사실)도 意圖(의도)도 없는 경우에 한한다. 또 이것은 최종적인 것은 아니다. 북한에의 진격계획을 立案(입안)할 것. 단, 실행은 대통령에 의함.>

28일, 맥아더 원수는 작전구상을 워싱턴에 보냈고, 다음날 29일 통합참모본부는 그 계획을 승인하여 맥아더 원수에게 계획의 실행을 명했다. 그날 동해안에서는 국군 제3사단이 38선에 도달해 있었다.

맥아더 원수는 통합참모본부에 “제8군에 38선의 돌파를 명해도 좋은가?”라고 물었지만, 참모본부는 “이 이상 설명 및 발표를 하지 말고, 귀하의 작전을 계속하라”고 답할 뿐이었다.  38선의 돌파는 전쟁목적의 변경을 의미하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 조건으로 中蘇 개입의 판단을 현지의 군사령관에게 위임한다는 것은 매우 중대한 의미였다.


李 대통령의 의지에 따른 국군의 38선 단독 돌파

한국의 입장은 단호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이 38선을 먼저 넘은 이상, 이미 38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표명하고,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후에는 “우리가 38선에서 정지할 이유는 없다”고 밝혔다. 이러한 이 대통령의 생각은 국군을 38선 단독 돌파의 방향으로 이끄는 데 한 몫 했다.

국군이 38선에 도착한 다음날인 9월30일, 이 대통령은 국군의 38선 돌파를 정일권 참모총장에게 명령했다. 정치와 軍事(군사) 사이에 처했던 丁 총장은 고민했다. 심정적으로는 대통령과 똑같았다. 국군의 작전지휘권은 大田協定(대전협정)에 의거해 유엔군사령관에게 있었고, 한국 육군은 美 제8군의 작전통제를 받고 있었다. 마음대로 국군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다음은 정일권 장군의 회고록 《전쟁과 휴전》에서 인용한 것이다.

<서울이 완전 탈환된 이틀 후인 9월30일 오후 부산 경무대에서 호출명령이 떨어졌다. 육군본부의 참모들과 함께 오라는 것이었다. 나를 비롯한 육본 참모들은 경비행기를 타고 대구 동촌비행장을 출발했다. (중략)
“丁 총장, 간밤에 신성모 국방장관으로부터 보고를 들었는데, 38선에 도달한 부대는 어느 부대입니까?”
나는 李鍾贊 준장의 제3사단과 宋堯讚 준장의 수도사단이라고 보고했다.
이 대통령은 “사단 이름이 아니라 연대 이름이 무엇이냐?” 고 다시 물었다.
金淙舜(김종순) 대령의 제23연대와 任忠植(임충식) 대령의 제18연대라고 설명했다.
이대통령은 이들 부대를 특별히 표창토록 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丁 총장…”
 이 대통령의 목소리가 갑자기 무거워졌다. 엉뚱한 질문이 튀어나왔다.
 “丁 총장은 어느 쪽인가, 미군 쪽인가”
 이 대통령의 심중을 헤아릴 수 있었던 것은 한참 후에였다. 이 대통령은 각 참모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
다음 질문에 앞서 다짐을 받으려는 것이엇다.
“丁 총장, 그리고 여러분들, 실례인줄 알면서도 이러한 질문을 한 것은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입니다”
우리 모두는 눈을 감았다. 이대통령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여러분, 38선에 도달한 우리 국군에게 어찌해서 북진하라는 명령을 하지 않소? 38선 때문인가, 아니면 딴 이유 때문인가?”
꾸중이었다. 실내는 깊은 침묵이 흘렀다.
나는 대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38선 때문입니다”
이어 나는 워커 중장과의 이야기를 간추려서 보고했다(注: 워커 중장은 “미 제8군의 38선 돌파는 1950년 10월15일~30일 사이의 적당한 시기”라는 것이 맥아더의 복안이라고 丁 총장에게 귀띔했다고 한다). 이 대통령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38선이 어찌 됐다는 건가? 무슨 철조망이라도 쳐 있다는 건가? 장벽이라도 쌓여 있다는 건가? 넘지 못할 골짜기라도 있단 말인가?”
이때처럼 이 대통령이 노여워하는 것을 본 적은 그전에도 그후에도 없었다.>
 
졸자는 40년 기자생활 중에 6·25 전쟁의 名將(명장)들을 두루 만나는 기회를 누렸다. 특히 1950년대에 대장이 되었던 세 분 모두를 여러 번에 걸쳐 인터뷰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들은 다 대장이 될 만한 인물들이었다.‘국군 제1의 파이터’이며 최초의 4성 장군인 백선엽 장군은 인내심이 강하면서 학구적인 군인, ‘대한민국 군번 1번’이형근 대장은 콧대 높은 美 고문관에게 기합을 줄 만큼 자의식·자존심이 강한 군인이었다. 이 대통령은 美軍 앞에 기를 못 펴는 국군 장군에 대해 여봐란 듯 이형근 장군에게 별 4개를 달아 주었던 것이다.

‘丁마담’이란 별명을 지닌 정일권 대장은 강한 개성의 李 대통령과‘甲(갑)’의 입장이었던 유엔군 수뇌 사이에 윤활유 역할을 했다. 名不虛傳(명불허전)이었다. 졸자는 1970년대 중반 裡里驛(이리역) 폭발사고 현장을 위로 방문하는 정일권 국회의장을 수행·취재하면서 “과연!”하고 감탄한 바 있다. 그것은 故人(고인)의 개인적 명예와 관련한 일이므로 여기선 밝힐 순 없다. 정일권 대장은 作故하기 전 졸자에게 회고록 집필을 도와달라고 했는데, 이를 개인적인 사정으로 수락하지 못했다. 나는 이 점을 아직도 후회하고 있다. 다시 그의 회고록의 인용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노기에 실내 분위기는 점점 무거워져만 갔다. 한참 후에 이 대통령은 인사국장 黃憲親(황헌친) 대령에게 물었다.“인사국장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38선을 넘어도 되는 것인가, 안 되는 것인가?”
황대령은 머뭇거림없이 대답했다.
“각하의 명령이라면 국군은 언제라도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대통령은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이어 정보국장 張都暎(장도영) 대령, 작전국장 姜文奉(강문봉) 대령에게도 차례로 물었다.
모두 황대령과 같은 대답을 했다. 특히 강대령은 유엔이 북괴군을 침략자로 낙인을 찍은 이상 도망치는 침략자를 추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헌병사령관 崔慶祿(최경록) 대령은 38선은 이미 북괴군이 남침하면서 없어졌으므로 우리 국군만이 지켜야 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이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비로소 미소를 지었다. 흡족할 때의 표정이었다.
그런데 군수국장 楊國鎭(양국진) 대령만은 조금 달랐다.
“각하 좀더 신중히 검토한 다음에 결정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무슨 뜻인가?”
이 대통령은 잠시 표정을 굳혔다.
이 대통령은 끝으로 나의 결심을 물었다.
“저희들은 대한민국 국군입니다. 유엔군과의 지휘권 문제가 있습니다만, 각하의 명령에 따라야 할 사명과 각오를 갖고 있습니다. 38선 돌파는 이제 시간 문제입니다. 명령만 내리신다면 제가 현지에 가서 책임지고 결정하겠습니다.”
이 대통영은 잠시 후 결론을 내렸다.
“여러분의 의견은 나에게 용기를 주었습네다. 나는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에게 우리 국군 지휘권을 맡기기는 했으나, 내가 자진해서 한 것입네다. 따라서 되찾아 올 때도 내 뜻대로 할 것이오. 지휘권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따질 일 없습네다. 그러한 즉 대한민국 국군인 여러분은 대한민국 대통령의 명령만 충실히 지켜 주면 되는 것이오.”
이 대통령은 이어 책상으로 걸어갔다. 종이 한 장을 집어들었다.
“이것이 나의 결심이고, 나의 명령이오”
이 대통령은 그 종이를 나에게 주었다.
‘명령, 국군은 즉각 북진하라’
경무대를 나온 후 나는 부산에서 강릉으로 직행했다.>

참모총장 이하 육본 참모들과의 사이에 벌어진 논의를 보면 이승만 대통령의 카리스마를 느끼게 한다. 6·25가 발발한 그해, 이 대통령은 75세, 장군들은 30세 안팎이라 경륜 많은 할아버지와 어린 손자들과의 대화처럼 느껴진다.

당시 유엔군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원수 70세, 美 제8군사령관이었던 워커 중장 60세였다. 둘 모두 웨스트포인트를 졸업 후 美 육군의 엘리트 코스를 걸어왔지만, 조지 워싱턴 대학 학사, 하바드 대학 석사, 프린스턴 대학 박사인 이승만 대통령이 그들에게 밀릴 것은 전혀 없었다. 동서양의 학문을 겸비한 이승만은 조선조 말기에 민족주의 운동을 하다가 무기징역수로 복역하면서 《英韓(영한)사전》을 저술했고, 일제에 의해 국권을 강탈당한 이후 40년 여 간은 망명생활을 했던 독립투사였다.


국군의 38선 돌파

경무대를 나온 후 정일권 총장은 부산에서 江陵(강릉)으로 직행했다. 당시 강릉에는 제1군단사령부가 있었다. 제1군단 예하의 2개 연대가 이미 38선까지 북상해 있었음은 앞에서 썼다. 제1군단장은, 丁 총장과 만주 奉天(봉천)군관학교 재학 중에 1~2위를 다투던 동기생인 金白一(김백일) 준장이었다. 김백일 장군에게 丁 총장이 물었다.
“무슨 묘안이 없을까?”
김백일 준장은 갑자기 “있다. 있어!”라고 소리쳤다. 그리고는 책상 위에 5만분의 1 사이즈의 작전지도를 펴 놓았다.
“바로 여기야!”라면서 한 지점을 짚었다. 基士門里(기사문리)라고 적힌 38선 바로 북쪽의 조그마한 항구였다.           
“여길 보라구. 38선에서 약 800m야. 여기서 敵의 직사포탄이 심심찮게 날아와. 이곳을 이용하자고.”
당시 敵은 기사문리의 敵陣에서 국군 23연대를 향해 맹포격을 퍼붓고 있었다. 金 군단장의 논리는 이러했다.

‘我軍(아군)의 희생이 적지 않는데, 총 한발 못 쏘고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 38선 때문이다. 앉아서 당할 수 없다. 잠깐 38선을 넘을 수밖에 없다. 美 8군은 이걸 이해해 달라.

丁 총장은 이런 논리로 워커 중장을 설득해 동의를 얻었다. 그리곤 38선에서 대기 중인 제23연대로 가 “즉각 북진하라”고 명했다. 10월1일 오전 11시25분이었다. 그 후, 국군의 돌격은 기정사실화되었다. 실은 美軍 측도 돌파를 결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엔군, 북한에 진격 개시
 
10월1일, 맥아더 원수는 북한군에 항복을 권고했지만, 반응이 없었다. 다음날인 10월2일, 유엔군은 “10월3일 0시 이후 38선의 돌파를 명한다”고 하는 일반명령 제2호를 발했다. 10월6일, 국군  제2군단은 38선을 돌파, 북진을 개시했다.
유엔 안보리는 38선 돌파 제안이 소련의 거부권 행사로 봉쇄되자, 미국은 이를 총회에 제의했다. 총회는 논쟁 끝에 10월7일 38선 돌파를 의결했다. 이것에 의해 10일 아침, 맥아더 원수는 제8군에 북진을 명했다. 이에 앞서 맥아더는 북한 진공의 기본구상을 결정하고 있었는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제8군으로 서울 북방 지역에서 38선을 돌파, 平壤(평양)을 향해 진공한다. 2. 제10군단은 인천과 부산에서 승선한 후 원산에 상륙, 美 해병제1사단은 중국과의 국경으로 북진케 하고, 美 제7사단은 평양 북쪽을 향해 西進(서진)케 한다.>

결국 제8군과 제10군단 예하 제7사단으로서 평양을 협격, 북한군 주력의 격멸을 企圖(기도)한 것이었다. 그러나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軍(군)의 분할에 반대했고, 제10군단이 인천항을 사용하는 것에 의해 제8군에의 보급이 늦어지는 것을 우려했다. 제10군단의 원산 상륙 전에, 북진 중의 국군이 원산을 점령할 것으로 보이는 만큼 제10군단은 평양 공략 기일에 맞추지 못할 것으로 판단, 맥아더의 案(안)에 비판적이었다.

맥아더 원수는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10월2일, 제10군단은 원산 상륙을 위해 승선지로 이동을 개시했다. 미 제1해병사단은 인천에서 승선을 시작, 10일에 승선을 완료했다. 그런데 美 제7사단은 육로로 이동하여 부산에 도착한 것은 12일이었다.

그 무렵, 미군의 병참을 위한 기차 종착역은 한강에서 300 km나 떨어진 왜관에 있었다. 인천항은 맥아더의 원산 상륙계획에 따라 그곳을 향해 떠나는 美 제10군단에 붐비고 있었다. 이로 인해 美 제8군은 병참선을 유지하기 어려워 탄약과 보급품 등이 결정적으로 부족하게 되었다.  


평양 향한 1번 入城 경쟁

그 사이에 동해안을 진격하던 한국군 제1군단은 착착 元山(원산)에 육박, 10월10일을 기해 이미 원산을 점령하고 있었다. 결국 맥아더의 원산 상륙작전은 헛수고로 끝나게 되었다.

한반도의 동부에서 국군이 쾌조의 진격을 계속하고 있던 무렵, 평양 공격에 나선 미 제1군단은 아직 38선 부근에서 작전 준비 중이었다. 美 제1군단의 구상은 美 제1기병사단을 金川(금천)-沙里院(사리원) 가도로, 美 제24사단을 市邊里(시변리)-遂安(수안) 가도로부터 평양을 공략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국군 제1사단은 美 제1군단에 배속되어 있었다. 이에 국군 제1사단장 백선엽 준장은 미 제1군단장에게 “적의 수도인 평양 공략에 한국군이 참가하지 않는 것은 작전의 의의가 없다. 더욱이 평양은 나의 고향이고, 그곳 지리에 밝은 내가 반드시 먼저 공략하고 싶다”고 강력히 요청했다. 美 제1군단장 밀번 소장은 白 사단장의 요청을 받아들여, 즉각 美 제24사단과 한국군 제1사단의 임무를 교대시켰다.

평양공략전은 한국 제1사단과 美 제1기병사단 사이에 누가 1등으로 입성할 것이냐의 경쟁으로 되었다. 국군 제1사단은 임진강을 건너 高浪浦(고랑포)에서 평양을 향해 진발했다. 고랑포에서 평양까지는 170km. 당시 38선을 넘어간 북한군 패잔병은 2만 5000명이었으며 북한에 남아 있는 병력은 그 이하였다. 당시 유엔군은 22만 9000명이었다. 국가별로 ▲한국군 10만1000명 ▲美軍 12만 5000명 ▲英聯邦 1700명 ▲필리핀 1300명 등이었다.

[ 2013-12-24, 16:1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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