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전 가난한 박정희 대통령의 부자 나라 독일 방문記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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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르하르트 총리
  1964년 12월 8일 오후 7시, 뤼브케 대통령 주최 만찬장에서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서독 총리는 낮에 아우토반을 달려 본 박정희 대통령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
  
  “경제 발전에는 도로·항만 등 기간 시설의 정비가 선행되어야 하겠지요. 비록 나치가 한 일이긴 하나, 아우토반을 건설한 일을 나는 고맙게 생각합니다. 히틀러가 백년 앞을 내다본 이 거대한 사업은 마땅히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나는 평소 아우토반에 진입할 때, 그리고 인터체인지 램프를 돌아 나올 때 마음속으로 아우토반에게 경례를 합니다. 1958년에 한국을 방문했습니다만, 도로사정이 썩 좋지 못한 걸로 압니다. 개발도상국에서는 고속도로 건설이란 엄두도 못 낼 사업이지만, 독일 국민은 한국민이 겪은 그런 시기에 산업동맥 건설을 성취한 자랑을 지니고 있습니다.”
  
  박 대통령은 진지한 표정으로 경청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에르하르트 총리는 1948년부터 1963년까지 자신이 경제장관으로 재임했을 때 서독 경제가 부흥한 요인을 몇 가지로 요약했다.
  
  “정부가 기본 공업 투자를 선행했습니다.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했습니다. 시장경제 체제를 빨리 복구시켰습니다. 중소기업 육성에 힘썼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에르하르트 총리는 박 대통령의 팔을 잡더니 이런 말도 했다.
  
  “각하, 분단국으로서는 경제번영만이 공산주의를 이기는 길입니다.”
  
  박정희는 밤 9시에 만찬장을 나와 베토벤 할레(음악당)로 자리를 옮겨 환영음악회 및 리셉션에 참석해야 했다. 國賓(국빈)에게는 반드시 교향곡을 연주해 들려줘야 한다는 서독 정부의 관례에 따른 것이었다. 폴켈 반덴하임의 지휘로 모차르트의 교향곡 38번이 연주되었다. 밤 11시에 숙소로 돌아 온 박정희는 측근들에게 불만을 털어놓았다.
  
  “이렇게 힘들게 일정을 잡아 놓으니 사람이 살 수 있나. 너무 빡빡하니까 아직까지 변도 안 나온다.”
  
  동행했던 당시 <조선일보> 이자헌 기자는 “그때 박 대통령은 빡빡한 일정 때문에 변비로 고생했다. 우리는 ‘독일인들이 비용을 아끼려고 이렇게 했다’면서 ‘지독한 사람들’이라고 불평했다”고 회고했다.
  
  12월 9일 오전 9시 30분, 訪獨(방독) 3일째를 맞은 박 대통령은 전날 밤 음악회가 열렸던 베토벤 할레(음악당)로 나갔다. 유학생·기술훈련생(광부)·간호원 등 170여 명의 교포들이 모인 가운데 박 대통령은 15분간 즉석연설을 했다. 담담하게 연설해 가던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을 소개하는 대목에 이르러 이렇게 말했다.
  
  “본인은 군사혁명을 일으키고 스스로 제시한 공약을 실천함에 실패하였다는 비난이 있음을 잘 알고 있으나, 진정한 재건을 위해서는 국가이익 앞에 私利(사리)를 희생시키는 전 국민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박 대통령의 연설이 끝나자 在獨(재독)한인회 회장이던 작곡가 尹伊桑(윤이상, 뒤에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은 “저는 박 대통령 각하께서 해오신 정치의 안정과 경제발전에 감격했고, 남북통일 문제에 있어서 박 대통령 각하의 현명하신 생각에 감명된 바 있으며, 異域(이역)에 있는 저희들을 격려해 주시는 간곡한 말씀에 감동되었습니다”라고 말한 뒤 서독 대통령으로서 2代(대) 연임했던 데오도르 호이스 교수의 자서전을 선물로 전달했다.
  
  박 대통령은 유학 온 남학생들에게 파고다 담배 500갑을, 여학생들에게는 사진집 <女流(여류)한국> 60권을 주었다.
  
  박 대통령 일행은 독일연방공화국 하원을 방문, 몇 달 전 한국을 방문했던 게르슈텐마이어 하원 의장과 네 명의 부의장에게 병풍과 자개 꽃병을 선물한 뒤 에르하르트 총리관저로 출발했다.
  
  12시 20분, 에르하르트 총리관저에 도착한 박 대통령 일행은 서독 측 각료들과 함께 회담에 임했다. 이날 한국 측에선 장기영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이동원 외무부 장관, 박충훈 상공부 장관,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 최덕신 서독 대사가 참석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백영훈 통역관을 대동하고 에르하르트 총리와 단독회담을 시작했다. 경제학 교수 출신의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총리는 1948년 서독 경제장관이 된 후 경제부흥을 이룩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1963년 10월 이후 서독 총리로 재직하고 있었다. 1958년 10월에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던 67세의 에르하르트 총리는 40분간 예정된 회담에 임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먼저 서두를 꺼냈다.
  
  “우리 한국도 서독과 마찬가지로 공산국가들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공산국가들을 이기려면 경제가 번영해야 합니다. 내가 혁명을 한 이유는 정권을 탐해서가 아닙니다. 정치가 어지럽고 경제가 피폐해져 이대로는 한국이 소생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 때문입니다. 경제를 재건해서 공산국가들의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뿐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돈이 없습니다.”
  
  에르하르트 총리는 시가를 피우면서 “야(Ja)! 야!”하며 듣고 있었다. 통역하던 백영훈 교수의 증언에 따르면 에르하르트 총리는 자신에게 하소연하고 있는 스무 살 아래의 박 대통령을 연민어린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고 한다. 박정희의 ‘하소연’은 계속됐다.
  
  “사실 우리가 서독을 방문한 목적은 라인 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서독의 경제 발전상을 배우기 위한 것도 있지만, 돈을 빌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군인들은 거짓말을 못 합니다. 돈을 빌려 주시면 그것을 국가 재건을 위해 쓰겠습니다.”
  
  충고
  에르하르트 총리와의 단독회담을 시작하면서 먼저 말문을 연 박정희 대통령은 총리에게 기회를 주지 않은 채 같은 내용을 다른 표현으로 둘러가며 반복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100년 전 우리 조상들이 강하지 못해 세계를 몰랐고 그래서 기회를 놓쳤습니다. 이제 독일에 와서 라인 강의 기적을 배우고 우리도 독일처럼 부강한 나라가 되어 공산국가의 위협에서 자유로운 강국이 되고자 합니다. 제가 어릴 때는 일제시대였지요.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백영훈 통역관의 회고.
  
  “박 대통령은 대한민국이 얼마나 기구하게 살아왔는지를 두 번 세 번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5·16 군사혁명을 시작한 배경에서 일제시대 이야기로 갔다가 6·25 때 경험담, 자유당 시절의 이야기에서 다시 일제시대로 두서없이 넘어가는 상황이었습니다. 옆에서 통역하던 제가 민망스러울 정도로 반복되었지만 에르하르트 총리는 시가를 피우면서 끝까지 들어주었습니다. 박 대통령의 과거사를 들으며 에르하르트 총리는 감동하는 표정이 역력했습니다만, 반복되는 내용에 민망해진 저는 흐르는 땀을 훔치느라 정신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박정희는 예정된 40분을 혼자서 소진해버리고도 모자랐다. 에르하르트 총리는 비서를 통해 회담 시간을 30분 연장하라고 지시했다. 박정희는 최종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다시 한번 서독 정부의 경제 지원을 부탁했다. 에르하르트 총리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각하, 일본하고 손을 잡으시지요.”
  
  박정희는 이 말을 통역해 준 백영훈 교수에게 화를 냈다.
  
  “뭐? 돈 좀 꿔달라는데 일본 얘기는 왜 꺼내?”
  
  에르하르트 총리는 박정희의 표정을 통해 감을 잡은 듯 백 교수의 통역이 시작되기 전에 다시 말문을 열었다.
  
  “각하, 우리 독일과 프랑스는 역사상 마흔두 번이나 전쟁을 했소. 그런데 아데나워 총리가 드골과 만나 악수를 하면서 이웃 나라끼리 손을 잡았소. 한국도 일본과 손을 잡으시지요.”
  
  박정희 대통령도 지지 않았다. 두 손바닥을 마주치면서 “독일과 프랑스는 서로 대등한 입장에서 싸웠지요”라더니 이번에는 오른손 바닥을 왼손등 위로 내리치며 “우리는 항상 눌려 지냈습니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일본과 대등한 입장에서 싸워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몰래 힘을 키운 일본이 침략했을 뿐입니다. 그래놓고도 지금까지 사과도 한번 하지 않습니다. 이런 나라와 어떻게 손을 잡으란 말입니까.”
  
  “그래요? 일본이 사과는 해야지요. 독일은 프랑스와의 전투에서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지만 전쟁에서는 독일이 이긴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웃음). 나의 전임자인 아데나워 총리는 참 훌륭하신 분이었습니다. 독일과 프랑스가 그렇게 사이가 나빴는데 그 분은 드골 프랑스 대통령을 만나 악수를 하고 손을 잡았습니다.
  
  각하, 지도자는 과거나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보고 가야 합니다. 두 나라 사이에 협력관계를 만들어야 공산국가로부터의 위협에 대비할 수 있습니다. 일본과 손을 잡으십시오.”
  
  박정희는 다시 오른손 바닥을 왼손등 위로 포개면서 “이렇게 눌려 싸웠는데도 말이오?”라고 되물었다. 에르하르트 총리는 인자한 표정으로 박정희의 손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
  
  “예, 각하. 눌려 싸운 것이나 대등하게 싸운 것이나 모두가 과거의 일입니다. 일본과 손을 잡고 경제 발전을 이루세요. 우리가 뒤에서 돕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합심해서 살아갑시다. 우리가 돕겠습니다.”
  
  박 대통령은 에르하르트 총리의 말에 감격한 표정으로 총리의 손을 마주 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담이 시작된 지 한 시간 10분이 지나 있었다. 에르하르트 총리는 회담 후 담보가 필요 없는 財政(재정) 차관 2억 5,000만 마르크(약 4,770만 달러)를 한국 정부에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1964년 12월 9일 오후, 에르하르트 총리와 성공적인 정상회담을 마친 박정희는 서독 방문 후 처음으로 홀가분한 기분이 되어 에르하르트 총리가 주최하는 午餐會(오찬회)에 참석했다.
  
  박정희는 오찬이 끝나자 에르하르트 총리에게 준비해 간 선물을 증정한 뒤 오후 4시경 숙소로 돌아왔다. 그 사이에 장기영 부총리가 에르하르트 총리와 단독회담을 통해 한·독 경제협력과 관련한 구체적인 내용들을 검토하고 서독 정부 측의 확답을 받아냈다. 양측은 1965년부터 1967년까지의 한·독 경제협력 3개년 계획에 합의하고, 서독 측은 한국 면직물 수입쿼터를 100만 마르크에서 200만 마르크로 증대시켰다.
  
  이날 밤 8시엔 박정희 대통령이 주최하는 만찬이 열렸다. 뤼브케 대통령 부부와 에르하르트 총리 부부 등 서독 정부의 요인들과 기업인 등 150여 명이 초청되었다. 만찬장에서는 실내악단이 재독 작곡가 윤이상의 작품 ‘로랑’을 은은하게 연주하고 있었다.
  
  에르하르트 총리는 명랑한 표정으로 만찬장 분위기를 주도해갔다. 그는 샴페인 글라스를 들고 좌중을 향해 “제가 총리가 되기 전 경제장관으로 있으면서 한국의 경제고문으로 갈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경제부흥에 참여해 보고 싶었지요”라고 말해 갈채를 받기도 했다.
  
  그는 또 “앞으로 한국 경제재건 문제에 있어서 한국 정부가 저의 개인적인 지식과 도움을 필요로 한다면 언제든지 요청에 응할 것입니다”고 했다. 에르하르트 총리가 슈베르트의 ‘보리수’를 부르자고 제의하여 한·독 합창이 흘러나왔다.
  
  대통령의 눈물
  1964년 12월 10일 아침, 본에서 중요 일정을 모두 마친 박정희 대통령 일행은 우리 광부들이 일하는 루르 지방으로 출발했다. 경찰기동대 오토바이들이 선도하는 차량행렬은 라인 강을 따라 아우토반을 달렸다.
  
  오전 10시 40분, 박 대통령이 탄 차가 루르 지방의 함보른 탄광회사 강당에 도착했다. 인근 탄광에서 근무하는 한인 광부 300여 명, 뒤스부르크와 에센 간호학교에서 근무하는 한인 간호원 50여 명이 태극기를 들고 환영했다.
  
  검은 炭(탄)가루에 찌들은 광부들이지만 모두 양복 차림이었고 격무에 시달린 간호원들도 색동저고리를 곱게 차려입고 박 대통령 일행에게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박 대통령과 육영수는 서독 실정을 잘 알던 통역관 백영훈 교수로부터 서독에 파견된 우리 광부와 간호원들이 초과근무를 自請(자청), 몸이 부서져라 일해서 고향에 송금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차 안에서 이미 들었던 터였다.
  
  박 대통령과 육영수는 이들에게 손을 흔들어 답례했다. 벌써 육영수는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간호원 중에도 조국의 대통령 부부를 보아서인지 더러 눈물을 훔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박 대통령 일행이 강당으로 들어가 대형 태극기가 걸린 단상에 오르자 광부들로 구성된 브라스 밴드가 애국가를 연주했다. 박 대통령이 선창하면서 합창이 시작됐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한 소절 한 소절 불러감에 따라 애국가를 부르는 소리가 더 커져갔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이 대목부터 합창소리가 목멘 소리로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우리 광부와 간호원들에게는 떠나온 고향과 조국산천이 눈앞에 스치고 지나갔을 것이다. 가난한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젊은이들이 타국에 와 고생하는 현장을 본 박정희의 음성도 변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마침내 마지막 소절인 “대한사람 대한으로…”에서는 더 이상 가사가 들리지 않았다. 모두가 눈물을 쏟아냈다. 밴드의 애국가 연주가 끝나자 박정희 대통령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코를 풀더니 연설을 시작했다.
  
  “여러분. 萬里他鄕(만리타향)에서 이렇게 상봉하게 되니 感慨無量(감개무량)합니다. 조국을 떠나 異域萬里(이역만리) 남의 나라 땅 밑에서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 서독 정부의 초청으로 여러 나라 사람들이 이곳에 와 일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한국 사람들이 제일 잘하고 있다고 칭찬을 받고 있음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박 대통령은 원고를 보지 않고 즉흥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광부 여러분, 간호원 여러분. 母國(모국)의 가족이나 고향땅 생각에 괴로움이 많을 줄로 생각되지만 개개인이 무엇 때문에 이 먼 異國(이국)에 찾아왔던가를 명심하여 조국의 명예를 걸고 열심히 일합시다. 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을 위해 남들과 같은 번영의 터전만이라도 닦아 놓읍시다….”
  
  박 대통령의 연설은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울음소리가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감정의 轉移(전이)로 말미암아 박 대통령 자신도 울고 말았다. 육영수도, 수행원도 울었다. 결국 연설은 어느 대목에선가 완전히 중단되었고 강당 안은 눈물바다가 되어버렸다.
  
  박 대통령은 참석한 광부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고 파고다 담배 500갑을 전달한 뒤 강당 밖으로 나왔다. 30분 예정으로 들렀던 광산회사에서 박 대통령 일행이 강당 밖으로 나오는 데는 거의 한 시간이 걸렸다.
  
  함보른 광산회사 측에서는 박 대통령에게 한국인 광부가 지하 3,000m에서 캐낸 석탄으로 만든 재떨이를 기념으로 선물했다. 박 대통령과 육영수는 울어서 눈이 부어 시선을 바로 두지 못했다.
  
  대통령 일행이 광부 기숙사를 둘러보고 차로 향하자 어느새 수백 명의 우리 광부들이 운집해 있었다. 몇몇은 작업복 차림에 갓 막장에서 나와 검은 탄가루를 뒤집어 쓴 채였다. 박 대통령 가까이 있던 광부들이 검은 손을 내밀었다.
  
  “각하, 손 한번 쥐게 해 주세요.”
  
  “우리를 두고 어떻게 그냥 떠나시렵니까?”
  
  경호원들이 몰려드는 광부들을 제치고 박 대통령 일행이 갈 수 있도록 길을 만들었다. 박 대통령이 손을 흔들며 차에 오르자 광부들은 일제히 만세를 불렀다.
  
  “만세! 만세! 대한민국 만세! 대통령 각하, 안녕히 가십시오!”
  
  박 대통령의 차량은 뒤스부르크의 데마크 철강회사를 향해 아우토반에 올랐다. 박 대통령은 車中에서 눈물을 멈추려 애쓰고 있었다.
  
  베를린 장벽 소감
  1964년 12월 10일 낮, 함보른 광산회사를 떠난 박정희 대통령 일행은 데마크 제철회사를 방문한 뒤 석탄·제철 공업의 중심지인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의 주지사 마이어스 부부가 주최한 오찬에 참석했다.
  
  박 대통령은 이날 오후 4시 15분 뒤셀도르프 근처의 로하우젠 비행장에서 팬아메리칸 항공사 소속의 베를린행 여객기를 타고 약 한 시간 반 뒤 北(북)독일 평원지대에 자리한 西(서)베를린 시 템펠호프 공항에 도착했다.
  
  서베를린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소련이 점령한 동독(독일민주공화국)에 둘러싸여 지리적으로 서독(독일연방공화국)과 격리되었다. 동독 주민들은 낮에는 서베를린 지역으로 건너와 일을 하고 저녁이면 동독지역으로 돌아가곤 했다. 빌리 브란트(뒤에 독일 총리 역임)가 서베를린 시장으로 재임 중이던 1961년 무렵 동독 주민들이 서베를린을 통해 탈출하는 일이 잦아 인구 공동현상이 심화됐다. 체제 붕괴의 위험을 느낀 동독 당국은 1961년 8월 20일 일방적으로 총연장 50km의 콘크리트 장벽을 세웠다(이 장벽은 1989년 11월 9일 밤에 무너졌다).
  
  서베를린 공항에서 박 대통령은 브란트 시장의 “베를린의 문제점과 업적을 보일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는 환영사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나는 오늘 정신적으로 자유 베를린의 한 시민이 된 기분으로 이곳을 찾아왔을 뿐입니다. 나는 조금 전에 동독 상공을 지나면서 바다와 같이 캄캄한 동독을 내려다보고 북한에 있는 우리 동포들의 처지를 생각했습니다. 오늘의 베를린은 여러분만의 도시나 또 독일만의 베를린이 아닐 것이며, 온 세계 자유애호국민들의 정신적인 도시입니다.
  
  기아와 공포의 공산주의 曠野(광야) 속에서 자유와 부흥의 불꽃이 활활 타고 있는 베를린의 존재는 오늘날 자유승리의 상징이며 공산주의 미신을 깨우치는 복음의 불꽃이 퍼지고 있는 것입니다. 베를린과 판문점의 비극이 끝날 날이 가까워졌습니다. 우리는 비극의 종결만이 인류의 평화와 번영을 영구화할 수 있는 것이며, 끝까지 뭉쳐 전진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공항 의식이 끝난 뒤 캠핀스키 호텔에서 잠시 휴식을 하고 베를린 시청을 방문했다. 빌리 브란트 시장은 “용감한 국민의 용감한 대통령을 맞아 기쁘다”는 요지의 인사를 했다.
  
  박 대통령은 연설을 통해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한 사실을 언급하면서 “우리는 그때 국기 없는 승리를 했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빌리 브란트 시장과의 만찬을 끝으로 베를린에서의 첫 날을 마감했다.
  
  다음날인 12월 11일 쌀쌀한 겨울 아침이 시작된 베를린에서 박 대통령은 독일 기업인들과의 朝餐(조찬)을 가진 뒤 베를린 장벽을 시찰했다. 박정희는 롤프 슈베들러 베를린 시 주택건설부 장관의 안내로 포츠담 광장에서 木製(목제) 전망대에 올랐다. 박 대통령은 적막에 둘러싸인 동독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곁에서 지켜본 통역관 백영훈 교수는 ‘방독기간 중 박 대통령의 표정이 가장 심각한 순간’이었다고 기억한다. 박 대통령은 동독 지역을 한참 지켜본 뒤 돌아서서 수행기자들에게 소감을 말했다.
  
  “나는 오늘 북한을 보았습니다. 한국에서는 결코 북한을 볼 수 없으나 오늘 東(동)베를린을 통하여 북한을 보았습니다. 이곳은 자유 베를린 시가 평화와 자유를 위해 얼마나 수고했던가를 역력히 나타내 주는 곳입니다. 자유 베를린의 이런 노력은 공산주의라는 미신을 타파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그 공은 영원히 빛날 것이며, 勝共(승공)의 상징이 될 것입니다.”
  
  박 대통령은, 1962년 8월 서베를린으로 장벽을 넘어오다 동독 인민경찰의 총을 맞고 장벽 아래에서 세 시간여 동안 신음하다 숨진 동베를린 건축공 페터 페히터 군의 묘 앞에서 헌화했다.
  
  오전 11시. 박 대통령은 ‘자유 베를린 공과대학’을 방문했다. 파울 힐리비 총장은 1,000여 명의 학생들이 기다리고 있는 전기 공학부 강의실로 박 대통령을 안내했다. 박 대통령이 단상에 오를 때 서독 학생들은 박 대통령을 환영한다는 표시로 책상을 쾅 쾅 두드리며 우-하는 소리를 질렀다. 순간 박 대통령의 표정이 굳어졌다. 국내에서 학생 데모로 계엄령까지 펴야 했던 박 대통령은 베를린 공대 학생들의 환영의 표시를 저항의 표시로 오해했다. 파울 힐리비 총장의 소개가 있자 서독 대학생들이 다시 한번 책상을 쾅 쾅 치며 환호했다. 야유를 받는다고 생각한 박정희는 불쾌한 표정으로 연설문을 읽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기회를 마련해 주신 학교 당국에 대해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
  
  연설 도중 첫 대목이 끝나자 다시 학생들로부터 우레와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책상을 치며 고함지르는 독일 학생들과 눈이 마주친 박정희는 그만 맥이 풀렸다. 박정희는 연설문의 다음 문장을 찾지 못한 채 즉흥 연설을 시작했다. 통역하던 백영훈 교수는 진땀을 흘렸다. 즉흥연설 중 박정희는 독일 학생들이 좋아할 이야기를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은 내가 평소에 기대하고 希願(희원)하던 이 나라의 과학문명의 본산입니다.”
  
  학생들이 다시 한 번 책상을 치며 발을 굴렀다. 이 모습을 찬찬히 보던 박 대통령은 그제야 학생들이 자신을 환영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박정희는 연설문 원고를 훑어보더니 중단된 부분을 찾아내 읽기 시작했다. 이날 박정희는 학생들의 환호에 십수 번이나 연설을 중단하곤 했다. 연설이 끝난 뒤 단상을 내려오던 박 대통령은 백영훈 교수의 팔을 툭 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백 교수. 거, 얘기 좀 미리 해주지…”
  
  박정희의 얼굴엔 함박웃음이 터질 듯했다.
  
  大使도 세일즈맨
  1964년 12월 11일 박 대통령 일행은 베를린 공과대학을 방문한 뒤 지멘스 공장, AEG 전기공장, 독일개발협회를 방문·시찰했다. 이날 박 대통령은 철강 산업의 실상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박 대통령을 공장으로 안내한 지멘스 社(사)의 브레마이어 소장은 “각하, 철강이 없으면 근대화가 불가능합니다”라고 말했다. 박정희는 브레마이어에게 “저건 짓는 데 얼마나 듭니까”, “저건 어떤 용도로 운영됩니까” 등등 상세하게 질문을 했다.
  
  오후 5시경, 박정희는 독일개발협회 시찰을 마치고 나오다 순간적으로 휘청거렸다. 박종규 경호실장이 박 대통령을 부축했다. 28시간의 불편한 비행, 그리고 방독 5일째까지 거의 휴식 없는 강행군으로 누적된 피로 때문이었다. 숙소로 돌아온 박정희는 이날 밤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주치의 지홍창 박사가 절대 안정을 요구했지만 박 대통령은 장기영 부총리와 박충훈 장관을 방으로 불렀다. 박정희는 두 사람에게 “기간산업을 발전시키려면 제철공장 없이는 안 되겠더구먼. 우리도 제철공장을 지어야겠소. 돌아가면 제철공장 건설계획을 세워 보고하시오”라고 지시했다.
  
  12월 12일, 박정희는 전날의 피로를 회복한 듯 밝은 모습으로 아침을 맞았다. 그는 방독 여정의 최종 기착지 뮌헨으로 가기 위해 베를린 공항으로 나갔다. 오전 10시 20분발 예정의 전세기는 기상조건이 악화되어 세 시간 뒤에 출발했다.
  
  기내에서 점심을 든 박 대통령은 오후 2시 30분경 뮌헨 리임 공항에 도착했다. 바이에른 주지사 고펠 부부와 주정부 요인들이 영접을 나왔다. 뮌헨의 교포와 유학생 100여 명은 ‘박 대통령 환영’이란 플래카드를 들고 나왔다. 그들 옆으로는 한국인 태권도 사범이 이끄는 독일인 제자들이 태극기를 그린 커다란 종이를 펼쳐 들고 환영했다.
  
  박 대통령은 고펠 지사의 안내로 뮌헨의 비어야레스자이텐 호텔에 들렀다. 이날 오후 4시부터 호텔에서 유럽-아프리카 公館長(공관장) 회의가 열렸다. 휴식할 틈도 없이 박 대통령은 이 회의에 참석했다.
  
  30대인 이동원 외무장관이 주재한 이날 회의 참석 대사들 가운데는 박정희의 군 선배들이 많았다.
  
  1964년 여름, 이동원 외무장관이 임명된 직후 국내 언론들은 정부가 직업 외교관이 아닌 장성급 출신의 군인들을 대사로 임명하는 것에 대해 문제를 삼았다. 이 장관도 “민간 외교관으로 교체해야 바람직하다”는 취지의 말을 했었다. 이 발언에 격분한 군 수뇌 인사들이 이 장관을 불러다 놓고 “혁명은 누가 했는데… 군인이 민간 외교관보다 못하다는 이유를 대라”고 다그치기도 했었다.
  
  뮌헨에서 공관장 회의가 열리기 직전에 박 대통령은 李東元 장관에게 “거, 좀 잘될 수 없을까”하면서 걱정했다.
  
  “각하, 양해만 해 주신다면 제가 오늘 몇 말씀 하겠습니다.”
  
  박정희가 이 장관을 빤히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좋소”라고 했다. 이날 공관장 회의에는 駐(주)영국 대사 이형근(육군참모총장 역임), 駐프랑스 대사 백선엽(육군참모총장 역임), 駐이탈리아 이종찬 대사(육군참모총장 역임), 駐스위스 대사 이한빈, 駐스웨덴 대사 유재흥(연참의장 역임), 駐제네바 대사 정일영, 駐터키 대사 崔榮喜(최영희, 육군참모총장 역임), 駐모로코 대사 신현준(해병대 사령관 역임), 駐브라질-콩고 대사 崔文卿(최문경), 駐우간다 대사 金永周(김영주), 駐케냐 영사 대사 安光鎬(안광호), 駐카이로 영사 姜春熙(강춘희)가 참석했다.
  
  박 대통령은 회의 벽두에 ‘경제외교’란 말을 사용하면서 대사들의 분발을 촉구했다.
  
  “여러분은 외자 도입과 차관 획득과 해외시장을 개척하는 데 死力(사력)을 다해야 할 임무를 띠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처지는 외교관이라 하여 형식과 양식과 체면만을 따지고 있을 형편이 못 됩니다. 여러분은 외교관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장사꾼이 된 각오로 경제외교의 사명을 다해주시기 바랍니다.”
  
  박 대통령은 또 북한의 아시아-아프리카 지역진출을 저지하는 데 노력해 줄 것을 당부했다. 박정희는 유럽-아프리카 공관장들로부터 직접 보고를 받고 자리를 이동원 장관에게 넘긴 채 자신은 방으로 올라갔다. 이때부터 이동원 장관에게 몇몇 대사가 불만을 터뜨렸다.
  
  “대사를 민간 외교관으로 교체할 거라며? 군인들이 뭘 잘못했다고 교체하나?”
  
  이동원 장관은 공세적으로 반론을 펴기 시작했다.
  
  “자꾸만 군사정권이라 하시는데 그건 5·16 때고, 지금은 민간정권입니다. 이 정권은 국민이 선거로 뽑은 정권이지 한강 넘어온 군인들이 세운 정권이 아니잖습니까.”
  
  “각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이제부터 저는 여러분들의 성적을 매기고 승진 여부를 결정짓겠습니다. 기준은 세일즈 성과입니다. 돈 빌리는 것도 재주입니다. 빌린 돈도 내 돈입니다. 나라를 위해 돈을 많이 빌려 오십시오. 성적에 포함됩니다.”
  
  李 장관에게 공관장 회의를 주재토록 한 뒤 방으로 올라온 朴 대통령은 수첩을 꺼내 소감을 적기 시작했다.
  
  결혼기념일의 메모
  박정희는 1964년 12월 12일 방독을 마무리하면서 뮌헨 호텔 방에서 메모를 쓰고 있었다.
  
  <오늘 유럽-아프리카 공관장들을 통하여 내가 받은 보고들 중에는 심각한 관심을 끌어 마땅할 문제들이 있었다.
  
  첫째, 그들은 자신들에게 할당된 수출실적을 거의 예외 없이 올리고 있었으나, 둘째, 더 많은 수출을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름 아닌 한국 상인들끼리의 경쟁과 무성의 때문에 손해를 보고 기회를 逸失(일실)하고 있다는 것이며, 셋째, 中近東(중근동) 지역과 아프리카 일대는 우리가 조금만 노력하면 한국 상품의 원가가 저렴하므로 얼마든지 진출할 여지가 있고, 넷째, 佛(불)·英(영)·이탈리아 등 여러 나라도 남아돌아가는 자금을 세계의 어떠한 곳에 투자할 것인가 망설이고 있어, 이런 나라들로부터 외자도입의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놀라운 사실은 우리와 맞서 있는 北傀(북괴)는 내가 독일을 방문하고 있는 바로 그때 20여 명의 친선사절단을 50여 명으로 증강시킨 민속예술단으로 만들어 아프리카 일대를 순회하면서 외교와 교역을 함께 도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안의 사정을 생각할 때 나는 참으로 한심스러운 생각을 금할 수 없다.
  
  우리를 에워싼 모든 국가가 묵묵히 건설과 발전을 위하여 피와 땀을 흘리고 있을 때, 또한 우리의 정면의 적이 세계가 좁다 하고 수십 명을 거느리고 아프리카 天地(천지)를 行脚(행각)할 때 우리는 政爭(정쟁)과 紛爭(분쟁)과 입다툼으로 세월을 보내는 실정에서랴…>(청와대에서 펴낸 《박정희 대통령 방독기》에서 인용)
  
  이날 유학생들이 마련한 ‘한국의 밤‘ 행사에는 영부인 육영수만이 참석하고 저녁 늦게 돌아왔다. 육영수는 골똘하게 생각에 잠긴 남편에게 말을 걸었다.
  
  “저, 여보세요.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세요?”
  
  “음? 무슨 날이오? 오늘이?”
  
  “우리 결혼기념일이에요.”
  
  육영수는 손을 입으로 가져가 웃으며 말했다.
  
  이날 오후 육영수 여사 수행원 중 한 사람이 뮌헨 공대 기계공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데마그 제철회사에서 연구원으로 근무 중이던 金在官(김재관·KIST 책임연구원·국방과학연구소 부소장·중공업 차관보·한국 표준연구소 소장 역임) 박사의 집으로 전화를 했다. 김 박사의 부인이 전화를 받았다.
  
  “육 여사께서 오늘 저녁 늦게 호텔로 돌아오실 텐데 호텔 후문으로 중국집 만두 두 접시만 갖다 주세요. 서양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셔서 식사를 잘 못하셔서요.”
  
  김재관 박사가 이날 밤 만두를 포장해 호텔 후문으로 날랐다. 수행원은 김 박사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한 다음 올라가더니 두툼한 보따리 하나를 들고 내려왔다.
  
  “이건 뭡니까?”
  
  “이걸 가져가세요. 영부인께서 식사를 통 못 하셨는데, 이걸 꼭 갖다 드리래요.”
  
  김 박사가 집에 와 풀어 보니 붉은 비단에 금박으로 용 두 마리를 수놓은 침대보였다. 訪獨 선물로 준비한 것들 중 하나를 준 것이었다.
  
  다음날(1964년 12월 13일) 아침, 박 대통령은 80여 명의 교포 유학생들을 초청한 조찬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김재관 박사는 자신이 작성한 ‘한국 강철 산업 발전계획시안’을 선물로 들고 나왔다.
  
  김 박사는 1962년 독일의 철강회사들이 한국의 울산종합제철소 건설계획에 참여할 무렵 데마그 철강회사 소속원으로 활동했다. 1964년 1월에는 장기영 부총리 앞으로 종합제철소를 건설할 수 있는 방안들을 적어 보내기도 했었다.
  
  金 박사는 박 대통령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각하, 철강재는 공업에 가장 많이 들어가는 소재입니다. 자금 때문에 지금은 할 수 없지만 어차피 언젠가는 해야 할 사업입니다. 제 논문이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면 기쁘겠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돌아가서 꼭 철강회사를 만들 생각입니다. 잘 보겠습니다.”
  
  박 대통령과 악수를 나눈 김 박사는, 대통령의 손이 따뜻하고 부드러웠다는 기억을 갖고 있다.
  
  조찬 모임 후 박정희는 독일 알프스의 최고봉 주그스피체에 등정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일기불순으로 취소하고 뮌헨 근교의 님펜부르크 성과 슐라이스하이머 성을 관광했다.
  
  관광을 마친 박 대통령 부부는 이날 오후 6시에 바이에른 주지사 고펠 부부를 공식 방문한 뒤 오후 7시에는 쿠빌리에 극장에서 모차르트의 가극 ‘피가로의 결혼’을 감상했다.
  
  뮌헨에서 마지막 밤을 보낸 박 대통령은 1964년 12월 14일 월요일 아침, 독일 공군이 제공한 군용기편으로 뮌헨의 리임 공항을 떠나 오전 10시에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했다. 독일 의전장과 주지사 대표, 교포들의 환송을 받으며 다시 루프트한자 정기 항공기의 1등석에 탑승해 귀국길에 올랐다.
  
  
출처 : '朴正熙 傳記'
[ 2014-03-29, 12:38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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