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만이 엄마를 잊고 그런 짓(再婚)을 할 것 같아?”
"친구가 홀아비가 되었을 때는 그 마음을 짐작하지 못했는데 내가 겪고 보니 가슴이 텅 빈 것 같아. 성경에는 남자의 갈비뼈 하나를 뽑아서 여자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내 생각으로는 여자의 갈비뼈 하나로 남자를 만든 것 같아, 허허.”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아침에 산소에 다녀왔어요. 아내 산소 앞에서 나는 속으로 얘길 했지, ‘남편을 두고 혼자 먼저 가는 버릇은 어디서 배웠노’ 하고."
 
“지만이 엄마랑 같이 시찰한 거야”
  
   1975년 8월 1일.
   대통령은 며칠 전부터 저도에서 여름 휴가를 보냈다. 그러나 말이 휴가이지 일종의 지방 시찰과 다름없었다. 아침 일찍부터 대통령은 몇 명의 경호원과 수행원만 데리고 연락도 없이 섬을 떠나 거의 하루종일 보이지 않았다. 모두들 궁금해 했으나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저녁 나절에야 숙소에 돌아왔다.
   “어디 갔다 오셨습니까?”
   “구경 좀 하고 왔지.”
   더 이상의 말은 없었다. 주위에서 계속 물어보니까 그때서야 설명을 했다.
   “여천 공업단지, 호남정유 메탄올 공장, 七肥(칠비), 삼일만 부두공사 현장, 중화학공업단지, 여천 단지 공사 현장 등을 보고 왔소. 많이 구경했지? 허허. 지금 진행 중인 공사들이 완공되어야 선진국으로 가는 문이 조금씩 가까워질 거야.
   오늘 그 많은 공장과 공사 현장을 보니까 마음이 후련해지더군. 해수욕하는 것보다도 한결 시원한 것 같아.”
   이 말을 하는 대통령의 표정은 무척이나 밝아 보였다. 영부인이 서거했을 때 그토록 통곡하고 우울해 하던 대통령의 표정이 이날은 유달리 밝아 보여서 비서들은 같이 기뻐했어야 했는데도 차라리 숙연해졌다.
   대통령의 이런 모습을 보고 수행했던 기자들이 나중에 “영부인의 1주기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저렇게 종일 일을 하실 수 있을까” 하며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수군거렸다.
   그날 밤 대통령을 찾은 한 비서가 이런 말을 했다.
   “영부인의 기일이 다가왔는데 각하께서는 일만 하신다고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들 합니다.”
   이 말을 들은 대통령의 표정은 갑자기 굳어지며 침통하게 눈을 감았다.
   “지만이 엄마 기일이 다가오니까 해수욕 생각도 없고, 그래서 團地(단지)들을 돌아보고 온 거야. 만석꾼 집에서 고이 자란 志晩(지만)이 엄마 소원이 뭔지 알아? 나보다 더한 개혁주의자였고, 국민들을 잘살게 해달라고 늘 나에게 말했어. 오늘 다녀온 곳이 모두 우리가 잘살게 되는 기본 시설 아닌가.”
   영부인의 얘기를 하는 대통령의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오늘 내가 혼자 시찰하고 온 줄 알아? 지만이 엄마랑 같이 갔다 온 거야.”
   낮은 목소리로 쓸쓸하게 말하는 대통령의 그 말에 순간 비서는 온몸이 저리는 것 같았다.
  
   1975년 8월 9일.
   방한한 미국의 울프 의원이 진해까지 대통령을 찾아와서 면담을 했다. 면담을 끝내고 함께 수행했던 비서관들과 울프 의원을 만난 뒤의 느낌을 말하는 대통령은 아주 기분이 좋아 보였다.
   “미국의 울프 의원 일행을 만나서 얘기하니 기분이 좋구먼. 양국의 공동 관심사에 대해 솔직한 의견을 나누었어. 울프 의원이 나에게 얘기했던 것을 보면 우리 실정을 제대로 알고 있는 것 같더군. 그러니까 말하기도 쉽고, 이해도 서로 빨리 되는 것 같아.
   우리는 울프 의원과 같은 知韓波(지한파)와 평소에 잘 사귀어 둬야겠어. 제대로 미국에 로비스트도 못 둔 형편에는 더욱 그러하지. 미국 행정부는 왜 그런지 딴 나라 로비에 대해서는 관대하면서 한국한테는 좀 섭섭하게 대하는 것 같아.
   한국 사람들은 對人(대인) 접촉이 좀 서툰 모양이야. 우리는 따로 로비스트도 없고, 그러니 결국 내 자신이 미국 대통령을 만나 로비를 하는 정도이니 내가 代役(대역)을 하는 셈이지.”
  
   “내가 지만이 엄마를 잊고 재혼할 것 같아?”
  
   1975년 8월 15일.
   이날은 육영수 여사가 돌아간 지 1년째 되는 날이다.
   대통령은 아침 일찍 영부인 묘소에 다녀왔다. 대통령이 비서들을 집무실로 불렀다.
   “벌써 1주년이 되었구먼. 그 사람 극락에 가 있겠지. 처음에는 눈물도 많이 흘렸으나, 이제 지만 엄마를 위로하는 길은 그 사람이 입버릇처럼 말하던 나라 발전에 힘쓰는 것이라고 느껴. 자네도 알다시피 그 사람은 만석꾼의 딸로 보잘것없는 나에게 시집와서 한 번도 편안히 지내지 못한 채 오십도 채우지 못하고 가버렸어.
   주위에서는 예의에 벗어난 줄도 모르고 재혼을 권하는 사람도 간혹 있는데, 내 뜻을 모르는 사람들이야. 그 사람들에게 부질없는 소리 말라고 일러 줘요. 국내외에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내가 지만이 엄마를 잊고 그런 짓을 할 것 같아?”
   대통령은 육 여사 생전에는 영부인에 대한 애정을 좀처럼 표현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영부인이 죽은 뒤로는 못다 준 情(정)이 항상 대통령을 괴롭혔던 것 같다.
   대통령은 영부인을 잃은 쓸쓸함을 계속해서 말했다.
   “용기와 의욕을 잃어버리면 집사람 초상화를 보면서 대화를 하지, 그 사람의 유지를 받들어 더 열심히 일을 해야지 하고. 그 알뜰한 모습과 숭고한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애들과 살아야겠어. 이것이 바로 그 사람의 뜻이려니 하면서 용기를 내지. 아이들도 잘 자라고 있고….
   친구가 홀아비가 되었을 때는 그 마음을 짐작하지 못했는데 내가 겪고 보니 가슴이 텅 빈 것 같아. 성경에는 남자의 갈비뼈 하나를 뽑아서 여자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내 생각으로는 여자의 갈비뼈 하나로 남자를 만든 것 같아, 허허.”
  
   대통령의 그늘에서 빛났던 육 여사
  
   대통령은 마치 살아 있는 영부인을 옆에 두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대통령의 숙연함에 비서들은 다 식은 커피잔만 내려다보며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대화가 끝나자 대통령은 기제사를 지내기 위해 2층 거실로 올라갔다. 그 뒷모습이 쓸쓸하게 보였다.
   한 번은 영부인이 나환자촌의 환자들을 방문하여 위로하고 돌아왔을 때였다. 당연히 영부인은 나환자들의 손을 잡고 어루만지기도 했었다.
   “당신 손으로 불우한 사람들을 어루만져 줬구먼.”
   그렇게 말하면서 대통령은 한참 동안이나 아무 말 없이 영부인의 손만 계속 꼭 쥐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비서관들은 나중에 영부인도 영부인이지만, 나환자의 손을 만졌던 영부인의 손을 의식적으로 꼭 쥐고 있던 대통령의 모습을 화제로 삼았다.
  
   청와대의 야당
  
   陸(육) 여사는 대통령에게 공정한 조언자 역할도 했다. 외부의 솔직한 이야기를 대통령에게 전하기 위해 각계의 여성 인사들을 자주 청와대로 초청하여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그래서 영부인을 일컬어 ‘청와대 야당’이라는 소리도 있었다.
   진정서가 陸 여사에게로 들어오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육 여사는 그것을 부속실에 맡겨 사정을 알아보게 한 다음 신빙성이 있으면 대통령에게 시정을 요청하기도 했다.
   육 여사가 대통령에게 부탁한 것은 거의가 타당하다고 밝혀졌기 때문에 대통령은 그런 육 여사의 부탁을 대부분 수용했으며, 특히 신경 써서 신중히 처리했다.
  
   한 번은 어느 기관에 붙들려 갔다온 사람이 억울하게 당했다고 영부인에게 진정서를 낸 일이 있었다. 육 여사는 그 진정서를 대통령에게 보내어, 확인한 후에 바로잡아 달라고 부탁했다. 대통령은 다음날 즉시 관계 책임자를 불러 그 문제를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며칠 후 그 기관장은 그런 사실이 없었다는 보고를 해왔으며, 대통령은 그날 영부인에게 그런 일은 없었다면서 진정서를 낸 사람이 과장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뜻을 전했다.
   영부인은 다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진정서를 낸 사람을 청와대로 직접 불러 상황을 들어보았다. 그리하여 영부인은 그 사람을 조사했던 기관에서 심하게 다루어 생긴 상처까지 확인할 수 있었고, 진정서의 내용이 거짓이 아님을 알고는 대통령에게 다시 연락을 했다. 진정서 내용이 사실이니 국민에게 악영향을 끼치지 않도록 철저히 조사해서 처리해 줄 것을 대통령에게 다시 요청했다.
   결국 대통령은 다른 기관을 시켜서 그 진상을 조사하게 했다. 재조사한 결과 그 사건이 사실로 밝혀지자, 대통령은 해당 기관장을 불러서 심하게 꾸짖고 나서 즉각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그 기관장은 1급 공무원에 해당하는 실무 담당자를 불러서 당사자에게 사과시킨 다음 해임 조치하는 것으로 사태를 수습했다.
   심지어 육 여사는 대통령에게 “대통령직을 그만두고 野(야)에서 조용히 지내는 게 어떻겠느냐” 하고 진언한 적도 있다. 육 여사가 그런 진언을 했다는 것은 당시에 있었던 비서관들 사이에서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영부인의 죽음 뒤, 대통령은 경호실 직원 한 명만 데리고 새벽 시간을 이용하여 영부인의 산소에 소리 없이 다녀온 적이 많았다. 특별히 영부인이 생각나는 때가 있었던 것 같다. 산소를 만들기 전에도 몇 차례씩 들러 공사장 인부들을 위로도 하고, 직접 지시도 하면서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애정 표현의 有無(유무)를 떠나 영부인에 대한 대통령의 애정은 살아 있을 때보다 돌아간 뒤에 몇 배나 더 커진 것이 분명했다. 막상 곁에 없다 보니 더 절실한 것 같았다.영부인을 그리워하며 쓴 詩만 해도 100 수가 넘는다.
  
   陸 여사 死後엔 혼자만의 시간 늘어
  
   대통령은 영부인이 돌아가고 나자 눈에 띄게 쓸쓸한 모습을 자주 보였고, 기력도 많이 약해졌다. 전에는 비서관들을 자주 불러 술도 함께 하며 농담도 잘했으나, 영부인의 서거 뒤로는 혼자 있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자리를 같이 하더라도 술보다는 주로 차를 들었다.
   청와대 식당 한쪽 벽에 커다란 영부인 초상화를 걸어 두고, 그곳에서 대통령은 혼자서 식사할 때도 자주 있었다. 식사를 하면서 초상화의 영부인과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한 번은 차를 마시면서 대통령이 “옛말에 惡妻(악처)가 효자보다 낫다는 말이 있는데 그 의미를 좀 알 것 같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육 여사의 초상화를 매일 바라볼 수 있는 식당에 걸어 두고 잊지 못하고 있는 대통령에게 재혼 권유가 소용없다는 것은 오히려 당연했다. 그 누구도 그 자리를 채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대통령을 바로 곁에서 모셨던 비서관들 중에서 정식으로 대통령에게 재혼을 권유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통령은 영부인 死後(사후) 거의 2년여 동안은 매일 일기장에 영부인 이야기를 빼놓은 적이 거의 없었다.
  
   “살았으면 은혼식 올렸을 텐데”
  
   1975년 9월 16일.
   대통령은 집무실에서 몇몇 비서관과 이야기하다가 얼마 전에 있었던 조총련계 재일동포의 모국 방문에 대해 만족감을 표현했다.
   “조총련계 재일동포의 모국 방문은 성과가 큽니다. 딴 곳에도 이 정책을 넓혀야 되겠어. 이 사업을 창안하여 추진한 趙一濟(조일제) 오사카 총영사에게 고생 많았다는 치하의 말을 전해 줘요. 모처럼 고국을 방문해 친척들이 서로 껴안고 울면서 같이 성묘하는 것을 텔레비전에서 보고 나도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이렇게 마음씨 좋은 겨레가 왜 남북으로 갈라져 서로 헐뜯고 살게 되었는가’ 하고 우리 역사를 한탄한 적도 있어요. 우리 국민은 사촌이 논을 사면 배아프다는 말도 있는데, 이것을 빨리 고쳐서 동포끼리 서로 위로하고 격려해야 될 것입니다.”
   조일제 공사는 조총련의 사주를 받은 문세광에 의하여 대통령의 부인이 살해되었는데도 조총련 母國방문 사업을 건의,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다.
  
   1975년 12월 12일.
   대통령은 점심 식사를 기자와 공보실의 비서관들을 불러 함께 했다. 대통령은 육 여사를 그리워하며 안타까워하는 심정을 토로했다.
   “오늘은 지만이 어머니와 결혼한 지 만 25년이 되는 날입니다. 아내가 살아 있었으면 은혼식을 올릴 수 있었을 텐데….
   대신 아침에 산소에 다녀왔어요. 아내 산소 앞에서 나는 속으로 얘길 했지, ‘남편을 두고 혼자 먼저 가는 버릇은 어디서 배웠노’ 하고.
   참 생각할수록 고생만 하다가 간 사람이야. 애들에게 보충 수업도 해주고. 지만이가 중학교 3학년이었을 때는 여름에 피서도 안 가고 근혜하고 지만이를 가르쳐 주었지. 내가 강사료라도 좀 주었어야 했었는데. 참 그렇게 되면 과외수업이 되지, 허허허.
   아내가 살아 있을 적에 내가 ‘지만이를 위해 강사를 초빙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고 말했더니 집사람이 ‘그런 것을 하면 과외수업이 돼서 정부 방침에 어긋나는 게 아닙니까? 지만이는 나와 두 누나가 도와 주면 족하니 그런 것 생각지 마시고 지만이 아버지는 정치에나 전념하십시오’라고 했었는데….”
  
[ 2014-04-06, 09:5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뉴데일리  |  리버티헤럴드  |  뉴스파인더  |  이승만TV  |  장군의 소리  |  천영우TV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