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래카 해협 아슬아슬 통과記
슈퍼 탱크 타고 오일 로드를 가다(7)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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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 2호의 둘레는 이제 어두운 구름의 장막으로 감싸진 것 같았다. 정면의 구름 커튼은 회색이었는데 그 가운데 검은 부분이 깔때기 모양으로 바다에서 하늘로 뻗어 있었다. '동해'는 그 깔때기를 향해 가고 있었다.
  "지금 저것은 스콜이 내리고 있는 거예요."
  
  崔 선장이 또 해설을 맡았다. 30분쯤 지나 그 검은 장막 속으로 들어가니 폭우가 쏟아졌다. 갑판엔 홍수가 났다. 갑판을 넘은 물이 폭포수처럼 콸콸 바다로 들어갔다. 약한 바람이 해면을 쓸고 가며 주름살을 남겼다. 이 비 기둥 사이를 빠져 나오는 데 30분쯤 걸렸다. 천둥소리가 음산하게 울려왔다. 이때는 레이다 스코프도 부옇게 되어 배의 항적을 잘 알아볼 수가 없었다.
  
  '동해'가 스콜의 장막을 막 헤치고 나오는 순간 왼쪽 11시 방향에서 안개 사이로 불쑥 巨體(거체)가 드러났다. 초록색 탱커였다. 우리와의 거리는 1해리쯤. 소스라친 '동해' 항해사는 경적을 연거푸 울렸다. 5리나 떨어졌는데 뭘 그러냐고 할지 모른다. 초대형 유조선에 있어서 5리는 방향을 바꾸기엔 너무나 좁은 거리다.
  
   "유조선은 절대로 자동차처럼 갑자기 부딪치지는 않습니다. 상대방이 다가오는 것을 뻔히 보면서, 몇 분 뒤에는 박살이 난다는 걸 알면서 충돌하는 겁니다. 한 5분간은 서로의 배를 쳐다보며 그냥 '어! 어!' 소리만 내고 있는 거예요. 그때쯤 되면 全速(전속) 후진을 걸어도 급선회를 걸어도 이미 늦어요. 20만 톤짜리를 택시처럼 홱홱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지요. 그래서 유조선 선장은 자동차 운전은 못할 겁니다. 도대체 時差(시차) 감각이 다르거든요."
  
  李 선장의 말이었다.
  
  "5만 톤짜리 한국 유조선을 타고 봄베이에 입항하다가 사고를 낸 적이 있죠. 인도 도선사가 잘못 지시를 내렸어요. 全速 후진을 해야 할 상황인데 착각인지 全速 전진으로 엔진을 돌리도록 명령했단 말입니다. 뒤늦게 전속 후진으로 바꾸었으나 늦었어요. 우리 배는 부두를 향해 슬금슬금 미끄러져 가는 겁니다. 부두 위에는 그때 인부들이 크레인을 갖고 하역작업 중이었죠. 우리 선원들은 선실 바깥으로 뛰쳐나왔죠. 모두 질린 얼굴로 멍하니 있는 거예요. 그 5분간의 초조, 긴장을 뭐라고 표현할까요. 틀림없이 터질 사고를 운명처럼 기다리는 겁니다. 사형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의 심리라고나 할까요? 어쨌든 몇 시간이나 흐른 것 같습디다. 배가 부두에 충돌하기 직전 나는 하역 인부들의 놀란 표정과 흩어져 달아나는 모습까지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 배는 船首(선수)로 크레인을 들이받았는데 크레인이 두 동강 나면서 한 동강은 바다로 고꾸라집디다. 배와 부두 시설만 부수었고 사람은 안 다쳤지만 사고를 미리 알아버린다는 건 지옥이에요."
  통신장 안장렬 씨의 체험이었다.
  
  초록색 탱커는 驚笛(경적)을 든고 방향을 틀었는지 좌현으로 500미터쯤 거리를 두고 지나갔다. 뱃전에 쓰인 'DOCENAVE'란 글자가 맨눈으로도 보였다. 오후가 되자 구름이 서서히 걷혀 갔다. 스콜 뒤의 공기는 상당히 맑아졌다. '동해'의 전후 좌우 배들이 쫙 깔리다시피 했다. '동해'는 말래카 해협에 들어서면서 마스트에 그물로 만든 원통을 달았다. 이것은 홀수가 깊은 배라는 표시다. 통신사는 또 싱가포르 무선국으로부터 다른 대형 유조선의 말래카 해협 통과 시간표를 받아 항해사에게 전달했다. 서해만큼이나 넓은 해협이지만 홀수가 20미터나 되는 VLCC가 지나다닐 수 있는 뱃길은 좁고 파칭코 기계 속의 迷路(미로)처럼 난관이 많고 복잡하다. 이 좁은 뱃길에서 자칫 벗어나면 좌초. 滿船(만선)한 유조선은 그럴 때 두 동강 나기 십상이다. 이어서 원유 대유출.
  
  공중줄타기 하는 곡예사처럼, 이 거대한 선체는 좁디좁은 항로 위에서 발을 헛놓아선 대파멸이다. '동해'는 이제 첫째 관문을 향해 10노트 속도로 다가가고 있었다.
  
  원 패덤 뱅크(One Fathom Bank). 세계의 유조선 선원들의 소름을 돋게 하는 地名(지명)이다. 뜻 그대로 水深(수심)이 한 길밖에 안 된다는 길쭉한 모래톱이다. 말레이시아 수도 쿠알라룸푸르에서 40킬로미터 서쪽에 있는 항구가 포트 클랭이고 이 항구에서 약 60 킬로미터 서쪽으로 나간 해협의 한가운데, 해협과 같은 방향으로 20킬로미터쯤 길게 발달해 있는 것이 이 모래톱이다. 물론 이 모래톱은 해면 밑에 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수심이 3∼15미터 유조선이 얹히기 안성마춤이다. 원 패덤 뱅크 근방에는 같은 방향의 길다란 모래톱들이 뻗어 있다. VLCC급 유조선들은 이 모래톱 사이의 좁은 공간을 통해 빠져나가야 한다. 그것은 바늘 구멍에 낙타 지나갈 정도는 아니지만 바늘을 서너 개 나란히 세워놓고 한꺼번에 구멍을 꿰는 것만큼 어려운 곡예다.
  
  원 패덤 뱅크는 한국행 유조선엔 말래카 해협의 실질적인 시작을, PG행 유조선엔 긴장의 해소를 알려주는 상징이기도 하다. 이 모래톱에서 싱가포르까지의 약 400킬로미터가 말래카 해협(총 길이 800킬로미터)의 위험水路(수로)다. 이덕인 선장이 직접 항해를 지휘하기 위해 브리지에 올라온 것은 원 패덤 뱅크 통과를 앞둔 이날 오후였다. 그는 조류의 방향과 조석의 차이를 수시로 체크하도록 항해사에게 지시하고 스크류 회전수, 레이다 스코프, 海圖(해도)를 훑어 가며 바늘구멍의 통과작전을 머리에서 설계하기 시작했다.
   오후 2시쯤 '동해'는 인도네시아 어선들이 그물을 치고 있는 漁場(어장) 바로 옆을 지나갔다. 어부들의 모습이 쌍안경에 잡혔다. 쿠웨이트를 떠난 뒤 外界(외계)의 인간을 구경하기란 이것이 처음.
  
   오후 3시쯤 오른쪽 수평선에서 작은 바위섬들이 점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배의 진로에 따라 암초는 하나, 둘씩 새로 등장했다. 그 바위섬의 행렬은 '동해'를 향해 뻗어 있었다. 해면은 검푸른 색을 벗어 던지고 초록 빛깔로 갈아입고 있었다. 초록색은 바다가 얕다는 암시다. 바다 위에 잉크를 뿌려 놓은 것 같은 이 암초 밭에는 살롱 알랑, 투홍 신방, 바 투 벨라야, 바투 만디 따위의 이름을 가진 無人(무인) 바위섬이 열 몇 개나 솟아 있었다. 게 중에는 해면 바로 밑에 잠겨 있는 암초도 있어 휜 물결이 그 위에서 일고 있었다. 그것이 아마도 '하프 타이드 록'(Half Tide Rock)인 듯했다. 밀물 때는 여섯 개로 보이고 썰물 때는 다섯으로 보이는 五六島(오륙도)처럼 조류에 따라 드러나기도 하고 잠기기도 하는 암초란 뜻이다.
  
  "저렇게 보이는 암초는 겁이 안 납니다. 안 보이는 게 문제지요."
  李 선장이 말했다. 이 암초 밭을 지나고 있을 때인 3시30분께 레이다 스코프에 반짝이는 영상이 나타났다. 11시 방향으로 약 15해리 떨어져 있었다. 그 영상은 30초마다 한 번씩 스코프에 잡히고 있었다. 이것은 원 패덤 뱅크에 설치된 전파 반사기. 모래톱의 위치를 접근하는 선박의 레이다에 알려주는 구실을 한다. 이제 브리지엔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李 선장은 느릿느릿 항해실을 오가며 입을 굳게 닫고 있었다. 항해사는 레이다 스코프에, 조타수는 키에 매달려 있었다. 여느 때의 풀어진 분위기가 아니었다. 나 같은 관람객은 말을 붙이기가 미안할 정도로 브리지의 공기는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고 그들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동해'는 수심 25∼30미터의 바다를 지나가고 있었다. 이 때 '동해'는 선체를 19.5미터나 물 속에 잠그고 있었다. 오후 4시30분쯤 1항사가 '보인다'고 조용히 말했다. 선원들의 눈은 워낙 좋다. 1항사가 맨눈으로 찾아낸 것을 나는 쌍안경으로 겨우 발견했다. 10시 방향으로 등대가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흰 바탕에 검은 테를 두른 등대는 노리개처럼 좀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그러나 그 주변의 표정이 살벌했다. 등대 바로 옆에는 검은 암초, 등대 앞쪽에는 굴뚝과 마스트를 내어놓고 모로 쓰러진 난파선이 있었다. 잡화선인 듯한 이 沈船(침선)은 말래카 해협을 오가는 선원들에 대한 영원한 경고로서 처음부터 그렇게 있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원 패덤 뱅크 쪽으로 '동해'가 바다를 지쳐가고 있던 오후 5시30분께 정면 바다에서 갑자기 허수아비가 솟아났다-고 나는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확 트인 바다에 불쑥 솟은 빨간 쇠기둥은 주변풍경과 너무나 어울리지 않고 톡 튀어나와 있어 허수아비가 방금 바다 밑에서 솟은 것처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찬찬히 훑어보니 이 허수아비 모양의 쇠기둥은 서울의 길가에 박아 둔 철제의 원통형 쓰레기통과 닮았다. 높이 10미터쯤. 이것을 부이(Buoy)라고 부르는데 아무래도 적당하지 않은 이름인 것 같다. 이 빨강 허수아비 뒤편 오른쪽에는 파란 부이가 하나 또 바다에 말뚝처럼 박혀 있었다. 이 파란 것은 여자 변소의 표지처럼 2등변 삼각형의 치마를 입고 있는 모습. 빨강 부이가 남자라면 波浪(파랑) 부이는 여자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이 두 개의 말뚝 사이로 지나가야 하는 것이 동해2호 같은 VLCC의 숙명이다. 말뚝 사이의 간격은 1350미터. 쿠웨이트에서 여기까지 3700리 곧 1만8000리를 달려온 것도 한 뼘밖에 안 되는 이 목구멍을 지나기 위함이었다. 붉은 부이의 바깥으로 조금만 벗어나면 수심 14미터의 모래톱, 파랑 부이의 바깥은 폭발물 투기장과 깊이 12미터의 모래톱. 두 부이 사이의 수심은 24미터. 동해2호의 홀수는 19.5미터니 5.5미터의 여유가 있다. 그러나 10 노트로 달리면 船首(선수)가 1미터쯤 가라앉으므로 여유 수심은 더욱 좁혀진다. 동해 2호보다 더 큰 26만 톤 코리아 선, 코리아 배너, 코리아 스타 호는 24만 톤의 기름을 싣고 여기를 지나는데 여유 수심이 3미터 안쪽일 때도 있다.
  
  1974년 한국 선장으로선 처음으로 24만 톤급 VLCC 천우호를 몰고 말래카 해협을 지난 김태덕씨(45세 아세아상선)는 두 해 전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선저와 해저 사이의 여유가 1미터도 안 된 적이 있었습니다. 수심 측정기를 들여다보면 배 밑창이 해저에 붙은 것처럼 나오지요. 이럴 때 배가 흔들린다든지 파도가 치면 박살이 안 나고 견디겠습니까?"
  
  코리아 배너 같은 배들은 홀수가 20미터를 넘는다. 해면이 가장 높아지는 밀물 때를 기다렸다가 그 大潮期(대조가)를 틈타 황급히 얕은 길목을 빠져나가기도 한다. 이 때 선장들은 '해도야, 제발 틀리지 말라'고 기도하는 심정이 된다. 그들의 행동은 해도에 나타난 수심(해도의 수심은 해면이 가장 낮아졌을 때의 깊이)의 정확성을 근거로 하여 결정된다.
  
  水深(수심)측량은 해저를 훑는 게 아니다. 몇 군데의 표본조사라는 한계성을 갖고 있다. 해저의 이변으로 모래톱이 생기거나 바위가 굴러와 있을 수도 있다. 말래카 해협의 인도네시아쪽 수심 자료는 믿을 수 없다는 것이 정평으로 되어 있다. 이 해협의 수심 표시는 세계 최고의 권위인 영국 해군 水路局(수로국) 것보다 일본 수로국의 海圖(해도)가 더 정확하다고 한다. 일본은 해협 연안국과 합동으로 해마다 이곳의 水深측량을 실시하고 있다. 일본의 유조선들이 가장 많이 이 해협을 이용하고 있는 데 대한 일종의 보상이다.
  
  오후 5시30분 '동해'는 두 말뚝 사이 한가운데를 지나갔다. 빨강 부이를 통과하면서 李 선장은 變針(변침) 지시를 내렸다. 107도에서 116도로, 107도 방향으로 곧장 가면 5킬로미터 앞에 있는 또 다른 침몰선 부근을 지나가게 되어 있었다. 이 침선은 해면 위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그 부근은 수심 15∼18미터. 이 제2의 침선 바로 남쪽에는 제3의 침몰선이 묻혀 있다. 첫 관문을 통과한 동해는 두 번째 난관인 침선 골목을 빠져나가야 했고 그래서 5킬로미터를 앞두고 변침한 것이었다. 곧은 물길이 배 꽁무니에서 큼직한 원호를 그리기 시작했다. 두 침선 사이의 거리는 약 1000미터. 투수 이덕인 선장는 5킬로미터 앞에서 공을 던져 1킬로미터 너비의 스트라이크존을 맞추어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 공이 길이가 330미터. 너비가 50미터나 되고 반응 신경이 무딘 놈이란 점이었다. 다행히 李 선장은 20년 동안의 바다생활 중 백 번 이상 여기서 그런 투구를 해 본 사람이었다.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예민한 감각으로 그는 이 둔중한 괴물을 부드럽게 몰이해 갔다. 李 선장은 두 시간에 걸쳐 세 곳의 관문을 더 통과해야 했다. '동해'는 노련한 조련사의 지휘를 받는 코끼리처럼 외길 항로의 줄을 아슬아슬하게 타고 가며 다섯 개의 바늘구멍을 항로라는 굵은 실로 차례차례 꿰어 갔다. 구슬 꿰기가 대충 끝난 것은 밤 8시가 넘었을 때였다.
  
   "무슨 일 있으면 불러!"
  
  李 선장은 어둠이 깔린 해협을 항해사에게 넘겨주고 브리지를 떠나 식당으로 내려갔다. 이제부터 싱가포르까지엔 별 문제가 없으리란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남은 건 필립 채널 하나다. 그는 이번의 시험에서도 무사히 합격한 안도감에 잠시 젖었다. 그러나 내일의 시험은? 유조선 선장에겐 오직 백전백승이 있을 뿐임을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백전 99승 1패는 뱃사람들에겐 파멸을 뜻한다. 그는 오늘밤도 다리 뻗고 자기는 틀렸다고 생각한다. 아직 2차 시험이 남아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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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夜食(야식)이 나왔다. 떡과 감주. 원 패덤 뱅크의 '바늘구멍'을 무사히 통과한 2월15일 밤이었다. '살롱' 이영우씨가 선실을 돌면서 배달해 주기도 했다. '살롱보이'라는 애칭을 가진 李씨는 서른 살의 '어른'. 앳된 童顔(동안)으로 해서 그렇게 불리고 있었다. 船室(선실)의 청소, 船內(선내) 매점운영 등을 맡고 있는 그는 줄곧 유조선만 타느라고 婚期(혼기)까지 놓쳤다고 했다. 夜食은 배에서 만든 것이 아니었다. 울산 출항 때 실어 보관한 것이었다. 취사부는 3, 4일에 한 번쯤 야식을 나눠주고 있었다. 동해 2호 선원들은 한결같이 '사주장을 잘 만났다'고 했다. '船內 분위기를 좌우하는 건 선장과 사주장이다'는 말이 있다. 사주장, 곧 취사부의 책임자가 어떤 요리 솜씨와 성의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 선원들의 일상 분위기가 흐렸다, 개었다 한다는 것이다.
  
  유조선 선원들의 味覺(미각)은 예민하다. 고립된 無寄港(무기항) 항해, 달리 욕구를 발산시킬 출구가 없다. 막혀서 충만해진 욕구는 미각에 집중되고 '먹는 재미'를 갈구하게 된다.
   "다른 배 같으면 음식에 좀 불만이 있더라도 항구에 닿으면 마음대로 먹고 마시고 배설할 수 있어 쌓인 스트레스가 풀립니다. 탱커에서는 그렇게 안 되지요. 설상가상으로 副食(부식)조달에 애로가 많습니다. 출항 때 한 번 실으면 그걸로 두 달을 견뎌야 합니다. 지금과 같은 귀향길에는 김치 등 채소가 동이 나는 수가 많아요. 그러면 고기만 내놓게 되는데…아무리 요리 솜씨가 뛰어나도 그것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재료가 한정되어 있어 안타깝습니다."
  
  사주장 박도석 씨의 말이다.
  
  "음식 솜씨도 좋아야 하지만 사주부의 사교술도 중요합니다. 평소에 선원들과 잘 어울려 인간 관계를 돈독히 해 놓으면 우리의 작은 실수는 묻혀 넘어가 버립니다. 요리가 언제나 좋을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군중심리라 할까요. 누가 먼저 음식 투정을 하기 시작하면 너도나도 들고 나와 사주부를 집중 공격하게 됩니다. 이런 불만의 집결과 폭발을 막으려면 평소에 정치를 잘 해야 한다 말입니다. 허허…"
  
  조리수 김동훈씨는 얼마 전에 선원들로부터 밀리다시피 하여 下船(하선)한 어느 사주장의 사례를 들면서 말했다.
  
  배는 밤에도 분명히 가고 있었다.
   "밤에도 정말 배가 가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더러 있어요."
   늘 반바지 차림으로 알몸을 드러내 놓고 다니는 펌프 맨 김무 씨가 휴게실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뭍 사람들의 뱃사람들에 대한 무식을 비꼬고 있었다.
  
  "윤정희가 여선장으로 나오는 영화가 있었죠? 선장이 키를 잡지 않나, 갑판장이 船長에게 말을 놓고, 하역중인데 출항 명령이 떨어지지 않나…개판 오 분 전 같은 영화 말입니다."
  尹 기관장이 화가 치민 듯 내뱉었다. 대다수 육지 사람들이 가진 선장의 이미지는 어떤 것일까? 마도로스 모자를 약간 치켜 쓰고 파이프 담배를 지긋이 문 채 키를 빙글빙글 돌리고 있는 털보 사나이- 통선이면 몰라도 큰 배의 선장은 절대로 키를 잡지 않는다. 비록 그것이 멋은 있겠지만, 키를 돌리는 건 操舵手(조타수)의 임무이며 그것도 위험한 항로를 지날 때만 그런다. 90퍼센트 이상의 시간은 자동 항해기에 맡겨두고 브리지 안을 어슬렁어슬렁 왔다 갔다 하는 게 조타수의 일이다.
  
  선장이 키를 잡아야 할 때는 사고로 항해사들과 조타수들이 전멸한 뒤이다. 갑판장은 거창한 職名(직명)에도 불구하고 선장과 감히 맞먹을 수 없다. 船長 다음의 선임자는 기관부의 책임자 기관장, 세 번째가 갑판부의 책임자 1등 항해사. 1항사는 흔히 '초사'로 불린다. '치프 오피서'(Chief Officer)를 일본 사람들이 줄여서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초사는 갑판부의 日課(일과), 선실 생활의 통제, 화물의 싣고 부림을 책임 맡은 사관, 곧 선박 운용의 실무 책임자. 배에서 가장 분주한 사람일 것이다. 초사 밑에 2항사, 3항사, 통신장이 있고 기관장 밑에는 1기사, 2기사, 3기사가 따른다. 이들이 장교단과 같은 사관 그룹을 이룬다.
  
  갑판장은 '보숭'(Bos'n)이라고 불리는데 갑판부의 보통 선원들 가운데 선임자. 군대에 비교하면 선임하사다. 기관부의 선임하사는 '남방'(Number One Oiler의 준말)으로 불리는 操機長(조기장). '보숭'밑에는 펌프 맨, 갑판수, 갑판원, '남방' 밑에는 기관수, 전기수, 기관원. 이런 계급 구조이니 갑판장이 선장과 맞먹는다는 것은 선임하사가 부대장과 맞먹는 것과 같다. 세계 어떤 나라에서든 항해사 출신만이 선장이 될 수 있다. 이 때문에 항해사와 갑판부가 기관사나 기관부보다 서열이 높다는 인상을 주고 불화와 대립의 잠재적 요인이 되고 있다.
  
  브리지가 배의 가운데에 있는 선박에선 사관들과 갑판 부원들에겐 중앙 선실에, 기관부의 보통 선원들에겐 기관실이 있는 배 꽁무니의 선실에 침실을 배당, 분단을 고착화시켰는데 슈퍼 탱커에서는 중앙 선실이 船尾(선미) 선실로 바꾸어지면서 '통일'되어 양쪽의 갈등이 상당히 해소되고 있다고 한다. 이 밖에도 해양 대학이 후배인 선장이 선배 기관장을 거느리게 되면 여러 가지 미묘한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선박회사에서는 선배 선장-후배 기관장으로 짝을 맞추어 놓으려고 애쓰고 있다. 동해 2호도 그런 경우인데 선장과 기관장 사이가 좋은 것이 船內 분위기가 명랑한 주요한 배경이라고 선원들은 말하고 있었다.
  
  말래카 해협에 들어선 이후 선원들은 한결 들떠 보였다. 휴게실 텔레비전 수상기에선 인도네시아 방송이 잡히다가 말레이시아 방송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휴게실은 시청자들로 흥청대고 있었다.
   "내일 싱가포르를 지난다."
  선원들의 표정은 그 기대로 밝아져 있었다. '내일 소풍간다'는 희망에 들뜬 국민학생들처럼. 다음날 아침은 부옇게 밝았다. 욕실의 수증기처럼 진한 공기가 海面(해면)을 얕게 덮어 누르고 있었다. 동해 2호는 새벽 3시에 말래카港(항) 앞바다를 지나 싱가포르로 다가갔다. 우리는 한 달 전의 약속에 따라 사흘 전에 말래카의 폭슬리 영감에게 동해 2호의 항공 촬영을 재차 부탁하는 電文(전문)을 보냈다.
  
  말래카 비행장에서 동쪽으로 약 100킬로미터 떨어진 해상을 지날 때의 시간(상오10시)을 미리 알려주고 비행기의 출현을 기다렸으나 말래카 현지의 날씨 때문인지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동해 2호는 새벽부터 각양각색의 선박들에 둘러싸여 싱가포르로 접근하고 있었다. 말래카 해협은 선박 전시장이었다. 맨눈으로도 열한 척의 탱커, 어선, 컨테이너船(선)들이 오가는 걸 볼 수 있었다. 巨船(거선)들이 오, 륙백 미터 간격을 두고 우리 배를 스쳐 지나갔다. 갑자기 바다가 좁게 느껴졌다. 바닷물 색은 텁텁한 초록이었다. '한 달 전 싱가포르 항구에서 본 바로 그 물색이구나'고 나는 직감했다.
  
  나무 껍질, 판자, 해파리, 고무튜브, 야자수 잎 따위가 둥둥 떠내려왔다. 몰려 사는 인간들의 존재와 그 숨결을 확인시켜 주는 조짐들. 무선기에선 싱가포르 무선국을 부르는 소리가 숨가쁘고 어지럽게 오가고 있었다. 무선국의 교환수는 여자였다. 브리지 당직자들 가운데는 무전기에 귀를 바짝 대고 달콤한 그 목소리를 들으려고 애쓰는 선원들도 있었다. 항구, 등대, 갈매기, 돌고래, 여자는 선원들의 향수를 달래주는 5大 친구라고 할까? 인간은 세 가지 동경을 갖고 있다고 한다. 고향에의 동경(Home Sick), 이성에의 동경(Love Sick), 바다에의 동경(Sea Sick). 육지 사람들은 이 세 가지 가운데 두 가지 동경을 충족할 수 있으나 바다 사람들은 하나밖에 만족시킬 수 없다.
  
  정오께 '동해'는 말레이시아 海域(해역)을 벗어나 싱가포르 남쪽의 필립 협수로에 진입했다. '동해'는 다도해 같은 섬밭 사이를 지나가기 시작했다. 섬 마을의 방파제와 쇠탑이 보일 정도로 가깝게 스쳐갔다. '동해'의 앞뒤로는 탱커, 켄터이너 선, 자동차 전용선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巨船들의 행렬-그것은 광화문 네거리의 자동차 행렬과는 다른 스케일로 융단처럼 깔린 赤道(적도)의 바다를 꽉 채우고 있었다. '동해'는 지금 세계에서 가장 번잡한 항로에 들어선 것이었다. '동해'는 정면에서 앞장서 달리는 컨테이너 선과 자동차 전용선의 물길을 뒤따라가고 있었다. '동해' 뒤 1킬로미터쯤에서는 탱커가 따라 오고 있었다.
  
  오후 1시쯤 '동해'는 싱가포르의 주롱 정유 공장지대 앞을 통과했다. 錨舶地(묘박지)에는 탱커들이 열세 척 와글와글 떠 있었다. 1시35분께 앞서 가던 컨테이너선이 좌회전했다. 35분 뒤 李 선장도 동해의 船首(선수)를 056도 방향으로 돌렸다. 왼쪽으로 싱가포르의 고층건물 군이 어렴풋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싱가포르 항 내의 누런 바닷물이 초록색의 外洋水(외양수)와 맞닿은 곳에서는 뚜렷한 경계선이 그어져 있었다. '동해'는 그 경계선을 돌파, 녹쓴 海水(해수) 속으로 들어갔다. 수증기가 걷히고 하늘은 유리알같이 맑아졌다. '동해'는 싱가포르에서 인도네시아 쪽으로 징검다리처럼 놓여진 섬들의 띠를 향해 항진하고 있었다.
  
  인도네시아의 펭기스 섬에서는 산불이 났는지 우유 빛깔의 연기가 피어올랐다. '동해'는 싱가포르 쪽 타콩 섬과 인도네시아 쪽 타본 섬 사이를 지나는 항로를 밟아갔다. 이 항로는 국제 지정항로이며 중앙 분리선이 있고 배들은 우측 통항을 해야 한다. 타콩 섬 바로 앞에 가면 20만 톤 이상의 슈퍼 탱커가 지날 수 있는 항로의 너비는 1000미미터로 좁혀진다. 양쪽에는 부이가 떠 있어 항로의 한계를 명시하고 있었다. 1000미터 너비의 항로는 중앙 분리선에 의해 다시 쪼개어진다. '동해'는 오른쪽의 너비 500미터 항로를 지나가야 한다. 이 항로에서 벗어나면 충돌이나 좌초의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윈 패덤 뱅크의 너비 1350미터 '바늘구멍'보다 더 좁은 '바늘구멍'이다.
  
  '동해'는 이 바늘구멍을 1킬로미터 앞두고 변침했다. 침로를 056도에서 040도로, 선체는 덜덜 진동하며 완만한 圓弧(원호)의 물길을 그리고 방향을 바꾸었다.
  
   "중앙 분리선에 바짝 붙여 지나가야 안심이 됩니다. 이때 마주 오는 배의 선장이 당황하면 큰일납니다. 이쪽은 자신이 있기 때문에 중앙선으로 붙는데 상대방은 이쪽이 중앙선을 넘는 줄 알고 황급히 키를 돌려 피한다는 것이 중앙선을 넘어와 충돌 사고를 빚기도 합니다. 몇 년 전 그런 사고가 이 부근에서 났지요. 들이받은 것은 한국인 선장이 몰던 일본 탱커였고 중앙선을 침범, 들이받힌 쪽은 일본인 선장이 몰던 일본 탱커였지요. 일본인 선장의 탱커가 침몰, 최근까지도 마스트를 드러내 놓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한국인 선장에다가 '이순신'이란 별명을 붙여 주었습니다."
  
  李 선장은 항해사와 조타수에게 수시로 명령을 내리면서도 구경꾼인 나에게 항해 해설을 해주는 여유를 보였다.
  
  싱가포르 해협 통과 시간을 꼭 낮으로 잡는 것은 이 부근의 통항량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巨船들이 줄지어 이 '바늘구멍'을 쉴 새 없이 들락거리는 그 시간에도 요트, 돛단배, 경비정, 原木(원목) 운반선 등 연안 선박들은 탱커 항로를 요리조리 가로질러 다니며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동해'는 연방 경적을 울려댔다. 하늘에선 싱가포르 전투기들이 폭음을 내면서 공중전 연습에 열중, 이 해협의 긴장감을 더해 주었다. 지휘권을 선장에게 빼앗긴 2항사 이종권씨는 진땀을 흘리며 필립 채널 부근의 확대판 해도에다가 10분마다 한 번씩 배의 위치를 그려 넣고 있었다.
  
  항해실 안의 팽팽한 긴장과는 달리 브리지 발코니엔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아이들처럼 재잘대고 있었다. 최화섭 동승선장, 최용선 2기사, 안장렬 통신장 등은 점점 또렷이 다가오는 싱가포르의 市街(시가) 풍경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다. 2시50분께 '동해'는 타콩 섬의 등대와 암초 밭을 왼쪽으로 바라보며 '바늘구멍'을 벗어났다. 그러나 아직 안심은 금물. 수심 19미터의 얕은 해저가 오른쪽으로 길쭉하게 달리고 있었고 '동해'는 그것을 피하기 위해 039도로 다시 변침해야만 했다. 이 항사는 이제는 2분마다 한 번씩 위치를 내고 있었다. 항해 계기만 믿고 있다가 潮流(조류)에 밀려 좌초해 버리는 사고를 막기 위함이다.
  
  우리에게는 안면이 있는 싱가포르 시가지는 이제 손에 잡힐 듯 가깝게 왼쪽으로 뻗어 있었다. 정유공장의 울긋불긋한 굴뚝, 마운트 페이버의 케이블 카, 47층짜리 DBS빌딩, 52층짜리 OCBD빌딩들이 보였다. 해안 매립 공사장의 작업선과 쌓아 둔 모래더미도 알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동해'의 구경꾼들은 넋빠진 듯 뭍의 풍경에 매달려 있었다. 그들은 入港(입항) 기분을 내고 있었다. 왕복 6만 리의 오일로드에서 항구를 이처럼 가깝게 스치는 건 싱가포르뿐이다. 假睡眠(가수면) 상태와 닮은 '가입항 상태'의 환상에 얼이 빠진 선원들은 난간에 턱을 괴고 하염없이 향수 어린 視線(시선)을 던져놓고 있었다.
  
  싱가포르 水域(수역)을 빠져 나와 다시 말레이시아 동해안으로 들어선 것은 오후 5시께 였다. 노을이 지기 시작한 말레이시아 어촌에서는 밥 짓는 연기가 군데군데 솟아오르고 있었다. 싱가포르를 벗어나면 남지나해! 바람결부터 달라졌다. 서늘하고 세찬 맞바람에 물결도 거세어지고 가끔 白波(백파)도 보이기 시작했다. 얼마 뒤부터는 선수에서 파도가 쳐 올라오기 시작했다. 바다 색깔도 초록에서 검푸른 大洋의 물색으로 바뀌었다. 새로운 바다, 그것은 새로운 나라였다. 국경을 넘어 낯선 나라로 들어간 것처럼 풍경과 냄새와 색깔과 분위기도 급변했다. 싱가포르의 赤道的(적도적)인 정물화 풍경은 사라지고 남성적인 살벌한 바다가 펼쳐지고 있었다. 구경꾼들도 자리를 털고 일어나 식당으로 사라져갔다.
  
  저녁 7시25분께 '동해'는 호스버거 등대 바로 앞을 지나 남지나 해의 종단항해로 돌입했다. 호스버그 등대는 바다 한가운데의 암초 위에 버티고 있었다. 어둑한 바다 속에서 파도를 맞고 있는 얼룩무늬 등대는 겨울의 남지나해, 그 시작을 알리는 상징답게 처절한 인상을 풍겼다. 등대 바로 뒤에는 침몰선이 마스트만 비스듬히 내어놓고 모로 누워 있었다. 말래카 해협 위험 수로의 양쪽 입구인 원 패덤 뱅크와 호스버거 등대 곁에는 이런 침몰선이 상징적인 유물처럼 뱃사람들에게 겁을 준다. '동해'는 26시간 만에 두 침몰선 사이를 주파한 것이었다.
  
  
  
  
  
  
[ 2014-05-07, 11:1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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