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트피플'을 구한 船長과 버린 船長
슈퍼탱커 타고 오일 로드를 가다(8)/난민들이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게 환히 보였다. 퀸호는 달아나기 시작했다. 난민선은 뒤따라오다가 처져버렸다. 이때 선장이 갑자기 '船首(선수)를 돌려라!'고 명령했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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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를 지나면 한국에 다 온 기분이 된다'고 선원들은 말한다. 쿠웨이트에서 호스버거 등대까지가 약 3973해리. 호스버거에서 울산까지가 1450해리. 울산 입항 예정일까지는 아직 열흘, 그러나 선원들은 본격적으로 집 생각, 처자식 걱정에 착수하고 있었다. 싱가포르를 지나면 거의 모든 선원들이 한 번씩은 집으로 전화를 건다. 이때부터 통신장의 파워가 세어진다. 통신실에 올라가 통신장에게 전화를 부탁하면 서울 무선국을 불러준다. 무선국 교환에게 번호를 대면 곧장 통화가 된다. 선원들은 대개 부인을 찾는다. "그 동안 별일 없었지?" 첫 대화는 으레 이런 질문으로 시작된다.
  
  목소리가 떨리는 건 저쪽의 감도가 좋지 않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머니 병세는 어때?"
   "○○합격했나?"
   "○○는 취직됐겠지?"
  이런 질문의 해답 여하에서 선원들의 앞으로 열흘 기분이 결정되고 만다. 아내가 집에 없어 통화가 안되면 불안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그들이다.
   "야, 카바레로 걸어보는 게 빠르겠다."
   "문패가 아마 바뀌었을 걸…"
   "너희 집사람 지금 고무신 거꾸로 신고 전화 받고 있다."
  이런 짓궂은 농담을 옆에서 퍼부으면 얼굴이 벌겋게 되어 울상을 짓는 순덕이 선원도 있다.
   "뭐야, 속 시원하게 말해봐!"
  부인의 말투가 불길한 사연을 숨기는 듯 느껴지면 그렇게 안달을 내며 다그치기도 한다.
   "집안에는 아무 일 없는데 당신 건강은 어때요?"
  이런 대답을 들은 선원들은 행복하다.
  
  좀 꺼림칙한 소식에 접한 선원들은 고민을 시작한다.
  "방안에 틀어박혀 아예 나오지도 않습니다. 싱가포르를 지나면 휴게실에 사람이 줄어요. 이불과 뒹굴며 걱정을 해보았자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닌데 얼굴 색이 하얗게 되도록 혼자서 걱정을 만들어 합니다. 누가 충고를 해 줄 수도 없지요. 그래서 저는 일부러 전화를 걸지도 않습니다. 몇년 전에는 집에 돌아가서야 아내가 복막염 수술을 했다는 걸 알았습니다. 걱정거리가 있다 한들 어떻게 할 겁니까? 날아갈 겁니까, 헤엄쳐 갈 겁니까?"
  조타수 주문길 씨의 말이었다. 싱가포르를 지나면 잠을 못 자는 선원들이 많아진다고 한다. 걱정 때문에, 걱정 없는 사람은 고향 간다는 설렘으로 잠을 못 이룬다는 것이다.
  
  한밤중에도 할 일 없이 복도와 휴게실을 그림자처럼 힘없이 싸돌아다니는 선원들이 그런 사람들인 것 같았다. 다음날 점심 때 士官(사관) 식당의 화제는 尹 기관장이 전해 준 캐나다 근해의 시추선 침몰 사고에 집중되었다. 전번 항차에는 남지나해를 지날 때 연일 거친 파도를 맞아 닻을 망가뜨린 적도 있었고, 지금도 '이번엔 무사할까?'라는 불안 속에서 항해를 하고 있는 중이라 그 海難(해난) 사고는 실감을 갖고 士官들의 관심을 끌었다. 식당 바깥으로 넘실대며 지나가는 파도의 굴곡을 바라보고 있던 누군가가 '지금 어딘가에 난민들이 떠돌고 있을까?'라고 중얼거렸다. "이런 바다에 어딜 나와" 尹 기관장이 나무라듯 말했다. 그는 난민들과는 인연이 깊다.
  
  1976년 여름이었다. 윤씨가 일본의 닛쇼 기센 소속 17만 톤짜리 탱커 칵투스 퀸 호를 탈 때였다. 퀸 호의 선원들은 모두 한국인들. 일본 회사에선 한국 선원들이 월남 난민들을 잘 구조해 준다는 사실을 알고는 '절대로 난민들을 받아 실어선 안 된다'는 지시를 내려놓고 있었다. PG에서 기름을 싣고 일본으로 가는 길에 남지나해를 지나다가 작은 난민선을 만났다. 난민들이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게 환히 보였다. 퀸 호는 달아나기 시작했다. 난민선은 뒤따라오다가 처져버렸다. 이때 선장이 갑자기 '船首(선수)를 돌려라!'고 명령했다.
  
  "선장은 달아나면서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더니 갑자기 그런 결단을 내리더군요. 저는 회사의 지시를 들먹이며 말렸습니다만."
  
  難民船(난민선)을 다시 찾아간 퀸호는 월남인들을 건져 올리기 시작했다. 스물 여덟 명이었다. 그들을 발가벗겨 방역 소독을 한 뒤 船室(선실)을 비우고 임시 수용소(?)를 만들어 집어넣었다.
  
  "젊은 여자들도 있었지요. 우린 총각 선원 하나가 연애를 했지요. 그 친구는 여자속옷도 세탁해 주었습니다."
  
  퀸 호는 고베港(항)에 들어가 곤욕을 치렀다.
  
  "일본수사관들은 우리를 꼭 범죄자 취급을 하더군요. 5일 동안이나 外港(외항)에 기다리면서 조사를 받는 바람에 회사에선 3000만 엔의 손해를 보았습니다. 회사에서도 우거지상이 되어 왜 골치 아픈 난민들을 받아 주었느냐고 따지고… 휴머니즘을 발휘했다는 보람보다는 그 뒤의 일이 지긋지긋해서…덕분에 난민들은 지금쯤 미국에서 잘 살고 있겠죠."
  
  이덕인 선장은 1979년 6월에 이곳 남지나海에서 그들을 만났다. 10톤쯤 되는 어선, 칠, 팔십 명이 어창과 갑판에서 바글바글 대고 있었다. 어선은 李 선장이 몰던 도쿄 탱커(주)의 유조선에 접근했다. 한 월남인이 유조선의 뱃전에 붙은 고리에 밧줄을 걸어 어선을 탱커에다가 붙들어 매었다. 李 선장은 우선 먹을 것을 주도록 했다. 호스를 어선에 던져 食水(식수)를 공급하고 들통에 라면을 가득 담아 내려 주었다. 난민들은 살려달라고 울부짖었다. 두 손을 비비며 기도하는 시늉을 내고 절을 수십 번이나 했다. 한 여인은 젖먹이를 라면 담았던 들통에 집어넣고 끌어올려 달라고 애원했다.
  
  "그때 사진기를 갖고 있었더라면 특종 사진을 찍었을 텐데… 저는 정말 난감하더군요. 저 심정 같아서는 모두 구조하고 싶었지만 명색이 선박의 책임자이고 회사의 지시를 어길 수도 없는 입장이라 어쩔 줄을 모르겠습디다. 저의 이런 곤경을 풀어 준 것은 난민선 선장이었습니다. 난민들이 우왕좌왕하는데 신경질이 났든지 호스로 브리지의 창을 깨뜨리면서 고함을 꽥지르더군요. 그리곤 우리 뱃전에 묶어 두었던 줄을 풀게 하고는 싱가포르로 가는 길을 묻습디다. 하마터면 난민선의 포로가 될 뻔했던 우리는 그 선장의 양보로 풀려나 무사히 귀향했습니다만 돌아오면서 가끔 후회를 하곤 했습니다. 저는 그 항차를 마지막으로 해서 그 배를 내리게 되어 있었는데 이왕 그만둘 것, 눈 딱 감고 좋은 일 한번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오래오래 남았어요. 조직에 대한 충성과 인간애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충성을 택한 셈인데 그들이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 문득문득 생각이 나곤 합니다."
  
  최명기 1항사도 남지나해를 지날 때는 생각나는 정경을 쓰라린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몇년 전 이곳에서 한 가족으로 보이는 월남난민 대여섯 명이 탄 조각배를 만난 것이었다. 아버지인 듯한 남자가 나무막대기에 흰 속옷을 白旗(백기)처럼 달고 애처롭게 흔들면서 탱커를 향해 달려오더란 것이다. 선장은 탱커의 속력을 높여 도망가도록 했지만 최씨는 '살려주자'고 애기했다가 꾸중만 들었다. 지금도 손을 흔들던 어린아이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했다. PG와 한국을 정기적으로 오가는 유조선 선원들은 '보트피플'과 가장 친근한(?) 사람들이다. 그들을 가장 많이 구해준 것도 유조선 선원들이었다.
  
  물론 더 많은 난민들을 외면해야 했을 것이다. '표류하는 사람은 국적이나 사상을 묻지 않고 구조해야 한다'는 선원들의 의무도 월남 난민들의 경우엔 적용될 수 없었다.
  
   "싱가포르에 입항하려다가 내쫓긴 난민선이 말래카 해협에서 풍파로 침몰, 타고 있던 300여 명이 실종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난민들을 구조하라는 電文(전문)이 우리 배로 날아오더군요."
  
   최1항사는 씁쓸하게 말했다. 한국인 유조선 선원들이면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죽어 가는 사람들을 보고도 그 面前(면전)에서 도망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회사의 명령인가, 國益(국익)인가, 귀찮음 때문인가?
  
  이날 점심식사가 거의 끝나가고 있을 때였다. 최화섭 선장이 벌떡 일어나더니 '저, 저, 저런'이라고 소리쳤다. 창 밖으로 시선들이 날아갔다. 바다가 암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넘실대는 파도의 골과 꼭대기, 눈이 닿는 해면 전체가 그랬다.
  
  "어느 놈이 기름을 부었군, 저런 새낀 고발해야 돼!"
  
  尹 기관장이 내뱉었다. 동업자끼리의 의리도 생각할 여지가 없을 만큼 原油(원유) 유출의 정도가 심했던 것이다. 갑판으로 뛰쳐나갔더니 油膜(유막)에서 기름냄새가 확 풍겨왔다. 남지나해는 벵갈灣(만)과 함께 탱커들이 가장 자주 기름을 버리는 곳이다. 탱커 通航量(통항량)이 많은 데다가 中東으로 향하는 유조선들은 주로 이곳을 지나면서 탱크 청소를 하기 때문이다. 탱크 청소는 탱커 선원들이 가장 하기 싫어하는, 그러면서도 한 항차마다 한 번씩 꼭 해야 하는 일이다.
  
  탱크를 깨끗이 하는 건 더티 밸러스트 물을 버리고 클린 밸러스트 물을 담을 장소(탱크)를 마련하기 위함이다. 고압 분사기로 빈 탱크의 벽에 물을 뿜어 기름 찌꺼기를 떨어뜨린다. 이 찌꺼기는 맨 뒤편의 슬롭 탱크에 모아 둔다. 그런 다음 빈 탱크 속으로 선원들이 내려간다. 청소 상태와 펌프를 점검하고 半(반)고체 상태의 찌꺼기를 퍼내기 위해서다. 내려가기 전에 탱크 안의 가스를 뽑아낸다. 석유가스, 곧 탄화수소가스는 독하다. 0.2퍼센트 농도에서 30분쯤 있으면 눈, 코, 목구멍이 아프고 현기증이 난다. 0.7퍼센트에선 15분 안으로 만취상태가 된다. 2퍼센트에선 급성마비로 인사불성이 되며 곧 죽는다. 석유가스로 마비증상을 일으켜 혼수상태에 빠진 사람은 4분만 방치하면 죽거나 뇌 손상으로 식물인간이 된다.
  
  특히 유화수소 성분이 섞인 원유 가스는 서너 번만 마셔도 즉사해버린다. 유화수소는 낮은 온도에선 '썩은 달걀' 냄새를 풍긴다. 농도가 높아지면 인간의 냄새 맡는 기능을 곧장 마비시켜 버리므로 아무런 예방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중독되고 마는 것이다. 청소된 탱크라도 바닥에는 공기보다 무거운 석유가스가 깔려 있는 수가 많다. 사람이 들어가 돌아다니거나 바닥의 찌꺼기를 헤친다든지 하면 가스가 사람을 에어포켓처럼 감싸버린다.
  
  "평소에 얌전한 사람이 갑자기 헬렐레해져 중얼중얼대고 노래를 부르며 기분이 좋아해 하는 수가 있어요. 영락없이 가스에 취한 경우지요. 이런 사람은 빨리 탱크 바깥으로 올려 보냅니다."
  
  이런 선원은 갑판에 올라와선 구토를 하면서 나뒹굴어버린다. 우유가 이럴 땐 좋다고 해서 탱크 청소를 할 땐 그걸 꼭 준비해 둔다.
  
  외국에선 탱크 속으로 들어갈 땐 防毒面(방독면)을 쓰도록 하고 있는데 한국선원들은 거의 그런 안전수칙을 따르지 않고 있다. 방독면을 쓰지 않고 작업을 하다가 가스에 중독, 숨진 사고가 부산 근해의 탱커 청소 현장에선 몇 번 발생했다. 탱크 안에서 가스를 마시고 쓰러졌다고 하자. 갑판 위에서 망을 보던 사람이 그를 끌어 올려 살릴 수 있는 시한은 4분뿐이다. 탱크 안은 어둡다. 지름 1.5미터 가량의 해치를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 있긴 하지만 갑판과 탱크의 바닥을 연결하는 쇠다리는 높고 위험하다. '동해'의 경우 높이가 6층 건물과 맞먹는 23미터. 이 사다리는 벽에 붙어 있지 않고 허공에 떠 있다. 사다리의 뒷받침도 없다. 목욕탕 굴뚝에 붙은 그런 식이다. 이 사다리의 발 받침은 좁고 기름이 묻어 미끌미끌하다. 이런 사다리를 타고 오르면서 중독된 사람을 4분 이내로 업고 나온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갑판원 정태석 씨는 이렇게 말했다.
  
  "갑판원의 일터는 마스트 꼭대기에서 탱크 바닥까집니다. 또 녹슨 船體(선체)에 페인트칠을 하는 것과 탱크 청소하는 게 두 가지 큰 일이죠. 달리는 배 위에서 20미터 높이 마스트 꼭대기에 내 몸을 묶고 페인트를 칠하는 건 지긋지긋해요. 그래도 일단 몸을 놀려 일에 몰두하면 무섬증이 사라집니다. 탱크 안 작업은 달라요. 탱크 속으로 내려갈 때마다 내가 다시 살아서 나올 수 있을까 하는 방정맞은 생각이 들지요. 밀폐된 탱크 바닥에서 일하면 기분이 먼저 갑갑해져 금방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생각이 불쑥불쑥 솟구칩니다."
  
  '동해'에선 탱크 청소를 할 때는 선원들에게 라이터를 호주머니에도 못 넣게 하고 있다. 라이터가 갑판이나 탱크 바닥에 떨어지면 정전기 스파크가 일어날 수 있고 그것은 대폭발로 비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갑판 위에서 탱크 출입구(해치)에 기대어 탱크 속의 작업을 구경하던 갑판원의 웃옷 호주머니에서 라이터가 흘러나와 탱크 속으로 떨어졌다. 바닥 철판과 부딪치면서 스파크, 이어서 원유가스가 폭발, 작업선원 두 명이 불 타 죽은 사고가 외국에서 있었다. 보통 4, 5일 걸리는 탱크 청소를 마치면 선원들은 그 항차의 일은 3분의 1이 끝났다고 말한다. 나머지 3분의 2는 原油(원유) 실음과 원유 부림.
  
  '겨울의 남지나해 치고는 얌전하다'고 선원들은 말했지만 船首(선수) 갑판에는 계속 파도가 올라오고 있었다. 선수 갑판 밑에 있는 창고로 들어가려는 선원은 비옷을 입어야 했다. 갑판부원들도 갑판 위 작업을 중단하고 있었다. 갑판원들의 작업은 흔히 '소금기와의 싸움'이라고 한다. 海水(해수)의 소금기는 철판에 파고들어 썩게 한다. 뱃전, 갑판, 마스트는 온통 녹의 흉터로 뒤덮인다. 이 부식을 막기 위해 특수 페인트를 끊임없이 칠한다. 그것도 세 겹으로. 갑판부 선원들의 작업 시간 중 거의 3분의 2가 페인트칠에 소모된다. 옛날에는 선원이 되려면 '오햄머를 잘 쳐야 된다'고 했다. 기관실이나 갑판의 마개·뚜껑·밸브 따위를 열고 닫으려면 홍두깨만한 쇠망치로 나사를 풀고 죄야 했었다. 완력으로 감당하던 그런 일은 이제 유압 또는 공기 압력으로 해결된다.
  
  요즘은 선원들의 특기가 '칠을 잘해야 한다'로 바뀌었다. 이 갑판의 페인트칠도 겨울엔 남지나海에 진입하기 전에 끝내야 한다. 남지나海를 지날 때는 풍랑으로 갑판 작업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선원들이 고구마라고 부르는 대만을 향해 北北東進(북북동진)하는 동해 2호는 끙끙대며 비탈을 오르는 짐꾼처럼 힘겹게 보였다. 지금까지는 바다를 '미끄러져 왔다'면 이제는 바다를 '뚫고 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높이 3, 4미터의 파도, 그 첨탑이 해면을 자욱히 뒤덮었다. 바다가 좁아 보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해면이 전체적으로 쑥 올라온 것 같았다. 나는 船首 갑판 밑 창고에 들어갔다. 파도의 충격을 가장 가깝게 느껴보고 싶었다.
  
  두께 5센티쯤의 철판을 사이에 두고 나는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와 마주했다. 꽈, 꽝-쿵, 꽈당-20초에 한 번쯤은 금속성 굉음이 코앞에서 터지고 있었다. 밀폐된 창고 안에서 그 소리는 귀 속과 속골까지 멍멍하게 만들었다. 폭음이 터질 때마다 배는 주춤주춤했다. 버스 운전사가 급브레이크를 밟았을 때의 그런 느낌이었다. 23만 톤의 선체와 파도의 격돌. 금방이라도 파도가 철판을 종잇장처럼 찢어발기면서 창고로 밀려 들어와 나를 휩쓸고 나가버릴 것 같은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船尾(선미) 브리지에선 파도의 폭음이 먼 戰場(전장)에서 울려오는 은은한 포성처럼 들려왔다. 320미터 저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철판과 파도의 死鬪(사투)는 이 유조선 마을 사람들에겐 딴 동네의 일처럼 무관심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기관실에선 또 수리작업이 한창이었다. 연료유인 벙커시유는 섭씨 백 도쯤까지 데운 다음 연소시킨다. 이 연료유 가열장치 속의 스팀 튜브(이 튜브 속으로 뜨거운 스팀이 지나가면서 연료유를 가열함) 속에 찌꺼기가 양초처럼 끼어 가열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이 찌꺼기를 긁어내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두 대의 연료유 가열장치를 번갈아 청소하자니 하나밖에 돌릴 수 없게 되었다. '동해'의 속도는 8노트로 낮추어졌다. 아하마디 출항 뒤 네 번째의 기관실 수리. 李 선장은 수리가 끝나자 尹 기관장의 노고를 위로하는 술자리를 집무실에서 베풀고는 '울산에서 배를 타기 전날 밤 꿈에 몽키 스패너가 보이더니…'라고 중얼거렸다. '딱, 그 꿈대로 돼 갑니다'라고 기관장은 말을 받았다.
  
  "제가 1등 기관사 시절에 말입니다. 어느 날 기관장이 간밤에 북해도 화산이 폭발하는 꿈을 보았다고 하는 거예요. 바로 그 날 기관실에서 폭발 사고가 터져 불이 났어요."
  
  꿈이나 '상어사냥'과 같은 불길한 징조에 대해 유달리 소심한 尹 기관장이었다. 다른 선원들은 그들의 안전과 특별한 관계된 특별한 터부 의식을 갖고 있지 않은 듯했다. 그러기에는 유조선은 너무나 기계화, 거대화, 非인간화된 강철덩어리다. 그러나 한 사람 조리수 김동훈씨(35세)는 '불길했던 사건'으로 해서 마음에 큰 상처를 받고 있었다. 가슴이 털북숭이고 얼굴은 활극 영화의 배우처럼 생긴 강건한 체구의 그는 탁구를 칠 때만 빼고는 거의 입을 떼지 않고 과묵하기 짝이 없는 부산 사람이었다.
  
  침실이 내 것과 붙은 인연으로 해서 나는 밤에 가끔 그를 찾아갔다. 어느 날 밤 그는 이런 체험담을 털어놓았다.
  ―지난 1978년 일본 산코 라인의 광석 유류 겸용선을 탈 때였다. 그는 '살롱'으로 일하고 있었다. 선장까지 모두 한국 수출 선원들이었는데 기관장만은 일본인이었다. 미국 근해를 지나고 있던 어느 날 아침 김씨는 여느 때같이 기관장 방을 청소하려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기관장은 죽어 있었다. 한 손으로 전화기를 잡은 채 침대 위에 엎드려 숨진 싸늘한 屍身(시신)이었다. 심장마비사였다. 시신을 난생 처음 본 그는 심한 충격을 받았다. 충격은 이걸로 끝나지 않았다. 시신을 수습하여 육곳간으로 옮기게 되었다. 기항할 때까지 냉장 육곳간에 보관키로 한 것이다. 기관장의 뻣뻣해진 시체를 흰 베로 감싸고 선원들이 방을 나서자마자 전기가 나가면서 복도 벽에 비상벨이 발갛게 깜빡깜빡 울기 시작했다. 컴컴한 복도, 따르릉― 소리, 흰 시신, 피빛으로 번득이는 비상벨. 여기에서 김씨는 더한 쇼크를 받았다.
  
   다른 선원들은 기관실로 뛰어내려갔다. 보일러와 엔진이 갑자기 작동 정지된 것이었다. 고장 원인을 찾는다고 법석을 떠는 사이 기적처럼 보일러와 엔진이 되살아났다. 고장원인도, 회생의 까닭도 밝힐 수 없었다. 선원들은 기관장의 죽음과 이 원인 모를 고장을 연관시키기 시작했다. 선실엔 삽시간에 공포 분위기가 깔렸다. 선원들은 혼자 자기가 두렵다 하여 한 방으로 두서너 명씩 모여 자기 시작했다. 屍身을 지키는 당직도 두 사람씩 했다. 두 사람도 모자라 나중엔 십여 명씩이 육곳간 앞에 모여 술판을 벌여 놓고 밤을 지새웠다. 이 충격으로 김씨는 심장병에 걸렸다고 한다. 괜히 불안해지고 가슴이 두근두근하며 안절부절 하는 증상이었다. 책을 읽어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고 잠자리는 악몽의 연속―.
  
  3년쯤 치료를 받고 거의 회복은 된 것 같지만 지금도 약을 계속 먹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 2014-05-07, 11:1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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