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 속의 위기일발
육지사람은 잘 모르는 바다와 船長 이야기(6)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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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당' 취재반이 열 나흘 만에 쿠웨이트의 뭍을 떠나는 날, 육상은 조용했으나 해상은 거칠었다. 동해2호는 울산을 출항한 지 스무 엿새 만에 이날 정오 미나 알 아하마디 외항에 巨體(거체)를 드러내고 입항수속을 마쳤지만 초속 15미터의 강풍 때문에 해상 부두 시 아일랜드에의 접안 허가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동해2호는 시 아일랜드 남쪽 해저에 닻을 내리고 1만2000킬로미터의 뱃길을 달려온 고달픈 몸뚱이를 하잘것없는 풍파에 잠시 내맡겨야 했다. 아하마디의 南부두에서 저녁 7시에 겨우 출국 소속을 끝낸 우리는 통선 선원들의 대기소에서 바다가 조용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열 두서너 명의 선원들은 모두 젊은 이란인들. 우리가 들어섰을 때 그들은 빙 둘러앉아 저녁을 먹고 있었다. 저녁상은 조촐하였다. 방 한복판에 마분지 조각을 깔고 그 위에 된장을 닮은 콩 반죽 양념 접시와 이스트를 넣지 않은 납작한 빵 무더기. 빵을 조각조각 찢어 콩 반죽에 찍어 먹고 있던 그들은 우리 두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고 빵 몇 개를 안겨주었다. 속이 빈 우리는 손가락을 수저로 삼고 그들의 만찬에 기꺼이 동참했다. 짧은 영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은 예쁘장하게 잘 생기고 잘 웃어제끼는 청년뿐이었다. 그는 우리와 그의 동료들 사이의 통역을 자청하고 나왔다. 모두가 3, 4년 전에 쿠웨이트로 일자리를 구해 나왔다는 것. '부자들만 감싸 온' 팔레비보다는 호메이니를 더 좋아한다는 것, 한국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건설 노동자'와 올림픽 개최(예정) 정도라는 것, 지금 시 아일랜드까지 통선이 나가기에는 너무 바다가 험하니 이 방에서 푹 주무실 생각을 하라는 충고 따위의 의사표시를 왁자지껄하게 늘어놓았다. 모두가 '유쾌한 청소년들'처럼 웃고 장난치며 아무런 경계심 없이 우리를 대해주었다. 필자가 영어판 코란을 보여주면서 이슬람교에 대해 연구를 하고 있다고 했더니 옆에 앉았던 깡마른 청년은 만지작거리고 있던 염주를 내 손에 꼭 쥐어주며 '진실한 모슬렘 교도가 되라'고 당부했다.
  
   한 시간 반쯤 지났을까. 쿠웨이트 국영 유조선 회사 직원이 우리를 데리러 왔다. 시 아일랜드 방향의 통선이 났으니 편승하라는 것이었다. 시 아일랜드에서 내일 출항할 KOTC 유조선이 하나 있는데 오늘 밤 여기에 타야 하는 쿠웨이트 선원들이 '위험하다'는 통선 선원들을 억누르고 한 척을 징발한 것이었다. 우리는 책과 사진기재로 꽉 찬 여섯 개의 가방을 파도에 나부끼는 통선으로 옮겼다. 통선이 南부두의 잔교와 아하마디 정유공장의 불꽃을 어둠 속에 파묻으며 시 아일랜드로 출발한 것은 밤 9시쯤. 거추장스럽게 펄럭이는 아랍 전통 옷차림의 쿠웨이트 선원들이 여섯 명, 서너 달 전에 부산과 울산항에 들렀었다는 사관이 둘 있었다.
  
   해안의 불빛이 멀어지고 해상 대기중인 유조선들의 불야성이 가까워지면서 통선은 칠흑의 밤바다에서 놀기 시작했다. 길쭉하고 민듯한 너울에 얹혀 10톤 남짓한 작은 배가 가웃가웃 미끄럼 타기를 계속했다. 물거품이 튀어 올라 선교의 앞창을 때리고 船體(선체)를 상하좌우로 부르르 흔들어 놓았다. 쿠웨이트 하급 선원 한 사람은 멀미에 취해 바닥에 드러눕더니 곧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맞바람을 뚫고 꾸역꾸역 한 시간쯤 달려 통선은 한 유조선의 뱃전에 접근했다. 빈 유조선이었다. 검고 붉은 철벽이 황파에 미동도 않고 아득하게 뻗어 있었다.
  
   그것이 방파제, 뱃전 아래는 잔잔한 해면이 되어 있었다. 유조선 갑판에서 굵은 줄에 매달린 선박 부품들이 주렁주렁 내려왔다. 쿠웨이트 선원들은 울렁거리는 갑판 위에서 이것들을 잽싸게 받아냈다. 가끔 통선이 성벽 같은 유조선의 뱃전과 부대껴 퉁퉁 퉁기기도 했다. 이 유조선은 KOTC 소속의 36만 톤짜리라고 했다. 부품을 받아 실은 통선은 다시 시 아일랜드로 출발했다. 한 시간쯤이나 더 걸린 항해 끝에 통선은 시 아일랜드에서 기름을 받고 있던 KOTC 유조선 알 파이아 호의 우현에 당도했다. 통선을 뱃전에 바짝 붙여놓고 쿠웨이트 선원들은 부품을 먼저 배 위로 달아 올렸다. 풍랑은 먼젓 번 유조선에서보다도 더 심해져 인양 작업은 난항을 거듭했다.
  
   통선이 한 곳에서 머물며 롤링을 해대는 바람에 우리도 속이 메스껍게 뒤틀려왔다. 30분쯤 만에 부품 인양작업이 끝나자 선원들은 줄사다리를 타고 한 사람씩 갑판 위로 올라갔다. 멀미에 취해 뻗어 있던 선원도 비틀비틀 일어나더니 일단 사다리를 붙들자 원숭이처럼 날렵하게 뱃전을 기어올랐다. 이제 통선에는 우리 두 사람과 선원 두 사람만 남게 됐다. 선장격의 깡마른 사나이는 나에게 염주를 선물한 이란 청년. 그는 어디로 가겠느냐고 물었다. '코리아 동해 넘버 투!'라고 했더니 그 배가 어디에 닻을 내리고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시 아일랜드 주위에는 대기중인 유조선들과 LPG 운반선들이 수십 척 떠 있었다. 불빛만 가지고는 동해 2호를 알아낼 도리가 없었다.
  
   달도 없는 암흑 속 거친 파도 위에서 우리는 미아가 된 기분이었다. 무턱대고 나는 VHF 무전기를 잡고 선박에서 쓰는 공통 채널 16번으로 다급하게 불렀다.
   "코리아 동해 넘버 투, 하우 두 유 리드 미, 오버?"(동해 2호 감도가 어떠합니까?) 반가운 한국인의 목소리가 바로 나왔다.
  
   "여기는 동해 2호입니다. 말씀하십시오, 오버."
  
   동해 2호의 당직사관은 자기들 배가 시 아일랜드에서 남서쪽 1.5해리 떨어진 곳에 있다고 알려왔다. 통선 선장에게 영어로 위치를 알려 주었다. 그러나 이 청년은 '사우스 웨스트'를 알아먹지 못했다. 박상원 기자는 종이에다가 방위표를 그려놓고 고함을 치면서 손짓을 해대자 뱃머리를 돌렸다. 남서쪽으로 나갈수록 바다는 더욱 험해졌다.
  
   통선은 이제 파도의 골 속으로 자맥질을 해댔다. 뱃머리에 부딪친 파도가 통선을 통째로 덮어 눌렀다. 물세례를 거푸 받는 창을 통해서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이 낡은 통선에는 신호등이 없었다. 할 수 없이 회중 전등을 껐다가 켰다가 하며 이 통선이 제 길로 가고 있는지를 동해 2호 항해실에 확인시켜야 했다. 30분쯤 걸려 우리는 동해 2호의 우현 아래에 이르렀다. 이란 승무원 두 사람은 파도에 흠뻑 젖은 몸으로 자기들끼리 악을 써가며 통선을 동해 2호의 뱃전에 밀어붙이려고 했다. 통선은 번번이 퉁겨 나왔다. 동해2호의 검붉은 뱃전은 꿈쩍 않고 버티고 있었으나 울렁거리는 파도가 둘을 계속 갈라놓고 있었다.
  
   통선이 동해 2호의 선측에 부딪칠 때마다 가냘픈 통선은 우지끈 소리를 내며 요동을 쳤고 우리의 가방들이 나뒹굴었다. 동해 2호의 선원들은 우리를 맞기 위해 쇠다리를 Z자로 船側(선측)에 내려놓고 있었다. 노란 헬멧을 쓴 한 선원이 손전등을 들고 쇠다리 끝에서 우리를 향해 안타까운 손짓을 하고 있는 게 보였다. 쇠다리 끝은 아득하게 멀리 위에 붙어 있었으나 거기에 줄사다리를 매달아 늘어뜨려 놓고 있었다. 통선이 바짝 뱃전에 붙었을 때 줄사다리 끝을 잡으려고 손을 뻗어 보았으나 1미터 이상의 간격이 있었다. 통선이 파도에 차올려지는 순간을 잡아 뛰어오르면 잡을 수는 있을지 몰라도 실패하면 통선과 유조선의 철벽 사이에 끼여 중상 아니면 즉사할 판이었다.
  
   더구나 동해 2호는 우리가 울산에서 선보았던 납작한 그런 배가 아니었다. 空船(공선) 상태라 船體(선체)는 6층 높이로 까마득하게 높이 솟구쳐 있었다. 파도에 씻기는 검붉은 뱃전과 군데군데 칠이 벗겨져 흉터처럼 드러난 철판은 인간의 체력을 비웃는 철옹성 그것이었다. 우리는 그래도 '한번 더!' 하며 통선 선원들을 내몰았으나 그들은 '노굿!'을 연발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동해 2호 상륙을 일단 단념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다시 두 시간 동안 흔들리며 쿠웨이트 뭍으로 돌아갈 마음은 도저히 내키지 않았다. 우리는 시 아일랜드 상륙을 모험해 보기로 했다. 통선을 돌려 시 아일랜드의 잔교 밑에 이르렀을 때는 벌써 밤 11시30분을 넘고 있었다. 시 아일랜드의 잔교에는 쇠 계단이 海面(해면) 바로 위까지 내려와 붙어 있었다.
  
   여기서는 통선에서 계단으로 뛰어 건너게 돼 있었다. 5년 전에 시 아일랜드 근무자가 이곳에서 발을 헛놓아 바닥에 떨어졌다가 통선과 잔교 사이에 눌려 압사했다는 것을 우리는 뒤에 알았다. 우리를 태우고 온 통선 선장은 바로 다섯 달 전에 통선이 전복되는 사고를 일으켜 자신은 헤엄쳐 살아났으나 그 배에 타고 있던 승객 한 명은 익사하고 말았다는 것도 뒤에 알았다. 그런 불길한 사정을 몰랐던 우리는 다급함과 오기를 추진력으로 삼고 시 아일랜드로 도약, 무사히 상륙할 수 있었다. 두 이란 청년은 웃옷을 벗어 젖혀 알몸을 드러내놓고는 나뒹구는 조각배를 수십 번이나 잔교로 밀어 붙여 우리 가방들을 건네주고 받도록 해 주었다.
  
   세 시간이란 짧은 시간이지만 파도 위에서 비틀거리다가 든든한 육지-그것이 비록 쇳덩어리로 만든 人工(인공)섬일지라도-에 두 발로 확실하게 선다는 것은 하나의 쾌감이자 안도였다. 폭풍 속에서, 어둠 속에서, 절해고도 속에서 불빛과 사람의 웃음소리와 기계 돌아가는 소리를 확인하고 파도 위에 허옇게 떼지어 앉아 둥둥 떠다니는 갈매기들에게 냅다 고함을 질러 보이고, 아랍 노무자들과 뒤섞여 히히덕거리곤 한 것은 속이 후련해지는 경험이었다. 우리는 울부짖는 밤바다에 더는 겁을 먹지 않고서 아랍 노무자의 합숙소에서 그들이 데워주는 홍차와 '걸레빵'으로 밤참을 즐기고 있었다.
  
   콧수염을 길러 마흔 살쯤 되어 보이는 쿠웨이트 청년 후세인씨(23세)와 아랍, 코란, 그리고 한국을 토론하며 몇 년 전에 죽은 전설적인 이집트 여가수 칼솜의 아랍송을 소개받고 사람을 날려보낼 것 같은 바람에 비틀대면서도 시 아일랜드를 자정에 관광한답시고 싸돌아다닌 것은 또한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엮고 있는 든든한 끈을 재확인하는 일이기도 했다. 시 아일랜드는 해저 석유 채굴 플래트폼을 닮은 철 구조물. 수심 30미터의 바다 밑에 다리를 박고 있는 철교 같은 잔교의 길이는 약 500미터, 너비는 10∼30미터. 그 가운데 우뚝 솟은 통제실의 높이는 해발 30미터. 30만톤급 이상의 슈퍼 탱커 두 척이 잔교 양쪽에 동시 접안할 수 있으나 원유적재는 한 번에 한 탱커만 할 수 있다.
  
   동해 2호가 입항하기 하루 전에 접안한 알 파히아호는 시 아일랜드의 송유관으로부터 시간당 1만 톤씩 기름을 받아 마시고 바다 속으로 서서히 하체를 가라 앉히고 있는 중이었다. 통제실에 올라갔더니 7층 높이의 이 방은 흔들흔들 움직이고 가끔 바닥이 지진을 탄 듯 들들 흔들리고 있었다. 야간 당직자인 잔교 감독 오말 슐리만씨(36세)는 '원유가 폭포수처럼 탱커로 쏟아져 들어가는 충격으로 섬 전체가 이렇게 떨린다'고 설명했다. 통제실의 풍속계는 30노트를 가리키고 있었다. 시 아일랜드는 1968년 9월에 완공된 것으로 아하마디 항구의 육상 부두에 접안할 수 없는 초대형 유조선들에 기름을 실어 주는 일을 하고 있다. 쿠웨이트 수출 原油(원유)의 약 3분의 2가 여기에서 실려지고 있다. 바다 한가운데 이런 접안 시설을 만들기로는 세계에서 첫 시도였다.
  
   그 뒤에 사우디 아라비아의 라스 타누라, 주아이마, 이라크의 시트 알 아랍 수로 앞, 이란의 카그 아일랜드 등지에서도 비슷한 시설이 만들어졌고 한결같이 '시 아일랜드'로 불려지고 있다. '시 아일랜드'는 고유명사와 보통명사를 겸하고 있는 꼴이다. 우리가 잠을 포기하고 시 아일랜드의 구석구석을 탐험하고 있는 사이 동해 2호는 새벽 1시에 닻을 감아 올리고 접안 준비에 들어갔다. 먼저 시아일랜드 전속 도선사 세리 프 사우디 씨(37세)가 전용 통선으로 동해 2호에 올라왔다. 이어서 힘센 두 척의 예인선이 어둠과 풍랑을 무릅쓰고 동해 2호 뱃전을 향해 달려와 바짝 붙었다.
  
   이덕인 선장은 선교에서 워키토키를 만지작거리며 도선사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예인선에서 연락이 들어왔다. 강풍에 밀려 도저히 동해 2호를 밀어붙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터그보트(예인선)의 도움 없이는 잔교 접안이 되지 않았다. 도선사는 '바람이 잘 때까지 기다리자'면서 돌아갔다. 동해 2호는 다시 15톤짜리 닻과 전봇대만큼 굵은 쇠 닻줄을 270미터나 풀어 해저에 박아 놓고 떠 있을 수밖에. 동해 2호에서 막 돌아온 도선사 사우디 씨(37세)를 통제실에서 만났다. 날씬한 몸매에 앳된 얼굴을 갖고 있는 그는 이집트인. 서로 인사가 끝나자 청산유수처럼 달변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슈퍼 탱커를 잔교로 모셔오는 것이 얼마나 우리의 신경을 곤두세우는 일인지 압니까? 나는 導船士(도선사)가 되기 전에는 한 주일에 꼭 다섯 번씩은 아내를 즐겁게 해 주었오. 지금은 두 번밖에 못해요. 신경쇠약 때문이오. 탱커 접안을 유도한다는 것은 여자를 다루는 것만큼이나 기교를 필요로 하는 일이에요. 그것도 아내가 아닌 생판 모르는 여자를 말입니다. 도선사는 늘 다른 상황에서, 늘 다른 유조선과 만납니다. 배 무게가 다르고 원유 적재량이 다르고, 선원들이 다르고, 조류와 해류와 바람이 다르고…. 거기에 따라 탱커의 노는 가락이 다르고, 나는 비행기 조종사 면허도 갖고 있어요. 비행기는 조종사의 눈, 손, 다리, 귀의 각 기능을 기민하게 종합 조정하여 모는 것인데 슈퍼 탱커의 유도는 눈과 경험에만 의존하니 더 어렵지요. 나는 십년 동안 슈퍼 탱커를 도선했는데도 새 배를 만날 때마다 불안한데 비행기 조종은 열흘 만에 자신을 얻었단 말입니다."
  
   "슈퍼 탱커의 도선법은 또 가르치기도, 배우기도 어렵습니다. 이론이 정립된 게 없고 비행기 조종처럼 모의 훈련을 할 수가 없거든요. 경험과 지식의 傳承(전승)이 어려워 발전이 없고 신참은 늘 제로에서 새로 출발하여 시행착오를 통해 요령을 터득하는 수밖에 없단 말입니다. 그건 그렇고 왜 배를 그녀(She)라고 여성명사로 부르는지 아십니까? 첫째, 남자들은 선박에 항상 '올라탑니다.' 둘째, 배는 늘 '요동을 칩니다.' 셋째, 배의 밑바닥은 늘 '축축하게' 젖어 있습니다. 그러니 여자지요, 핫핫핫…"
  
   "내가 만난 탱커 선원들의 평을 해볼까요. 일본 선원들은 가장 능률적이고 조직적이에요. 그리스 선원들은 너무 말이 많습니다. 싸우는지 그냥 대화를 하는지를 분간 못해요. 중국 배에 오르면 누가 선장인지, 누가 말단 갑판원인지 알 수가 없어요. 독일 선원들은 영리하죠. 노르웨이 선원들은 술과 여자에 너무 빠져요. 한국 선원들은 최상급이지요. 아마 국별 선원순위를 내보면 일본 바로 다음쯤이 될 거예요."
  
   사우디 씨는 입술이 붙어 있을 여지가 없을 정도로 쉼 없이 지껄여댔다. 절묘한 비유법과 용어 선택, 폭넓은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듯한 다양한 얘깃거리로 그는 두 시간 동안 우리를 포함한 통제실 근무자들의 귀를 사로잡았다. 새벽 네 시가 되자 그는 통제실 아래층의 자기 침실을 우리 두 사람에게 양보하고는 자기 사진을 멋지게 잡지에 내어달라는 부탁을 잊지 않았다.
  
   시 아일랜드에서 폭풍의 밤을 보낸 우리는 맑게 갠 아침을 맞았다. 15킬로미터나 서쪽으로 떨어져 있는 아하마디의 정유공장과 정유탱크들이 가물가물 보일 정도로 視程(시정)도 좋았다. 바람과 파도도 느릿느릿 누그러지고 있었다. 오전 10시30분. 22만톤의 기름을 실은 알 파히아호가 시 아일랜드의 잔교를 떠나 수평선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이탈리아.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 지브롤터 해협을 통과, 지중해로 들어가는 2만 킬로미터의 港路(항로)가 그 앞에 놓여 있었다.
[ 2014-05-07, 10:5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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