訪韓하는 習近平에게 중공군의 한국전 不法개입에 대한 반성을 요구해야
일본의 반성을 요구하는 같은 잣대로 방한하는 중국의 習近平 주석에게 韓國戰에 不法개입, 한반도의 자유통일을 막고, 수백만의 이산가족을 초래한 데 대하여 사과를 요구해야 한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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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제대로 된 나라라면 종군위안부에 대하여 일본의 반성을 요구하는 같은 잣대로 방한하는 중국의 習近平(습근평, 중국어 발음은 시진핑) 주석에게 韓國戰(한국전)에 不法(불법)개입, 한반도의 자유통일을 막고, 수백만의 이산가족을 초래한 데 대하여 사과를 요구해야 한다. 정부가 하지 못하면 언론이라도 중국의 역사적 과오를 상기시켜야 한다. 지금 언론은 習近平 칭송경쟁을 벌인다. 이런 사태를 바라보는 미국과 일본 지도부의 한국에 대한 생각은 복잡할 것이다.
  
   소설 三國志(삼국지)에서 周瑜(주유)가 한탄했던 방식으로 이야기한다면 한국인으로선 “트루먼을 내신 하늘이 어찌 毛澤東(모택동)을 같이 내셨는가”라고 부르짖게 된다. 北進(북진)하는 유엔군 앞에서 북한군이 일패도지하고 통일이 눈앞에 다가온 1950년 10월, 맥아더가 크리스마스를 고향에서 보내도록 하겠다고 미군들에게 약속했던 그 순간 北京(북경)에선 毛澤東의 음모가 분주하게 진행중이었다. 스탈린이 6.25 전쟁의 최종연출자, 金日成(김일성)이 최초 실행범이라면 毛澤東은 후반전의 主役(주역)이 된다. 1950년 10월부터 6.25 전쟁은 트루먼 對 毛澤東의 구도로 전개되는 것이다.
  
   毛澤東은 중국의 赤化(적화)가 끝나지 않았던 1949년 4월 말 북한의 민족보위副相(부상) 金一(김일)이 金日成의 편지를 가져와 중공 인민해방군에 소속된 조선족 장병을 귀환시켜달라고 요청하자 이를 승낙했다. 그는 해방군의 東北軍區(동북군구) 소속 164, 166 사단을 장비와 함께 북한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이해 여름에 북한으로 돌아온 이 2개 사단은 북한군 5, 6사단으로 재편되었다. 북한군은 약 2만3000명이 늘었고 3개 사단이 5개 사단으로 증편되었다. 바로 이 무렵 미국은 한국이 전략적으로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고 약 4만5000명의 주한미군을 철수시켰다. 남북한의 군사력 균형이 무너진 셈이다. 金日成은 이때부터 방어적 자세에서 벗어나 남한 공격을 목표로 세운다.
  
   1950년 1월 毛澤東은 金光俠(김광협) 부수상이 찾아와 金日成의 요청을 전달하자 인민해방군 제4야전군 소속의 조선인 장병 1만4000명을 무기를 갖고 귀환하도록 해주었다. 이들은 4월18일 원산에 들어와 북한군에 편입되었다. 전투경험을 가진 약 3만5000명의 해방군 출신들이 북한군의 핵심이 되어 남침 때 앞장선다.
  
   1950년 3월30일 金日成과 朴憲永(박헌영)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4월25일까지 머물면서 스탈린과 세 차례 만나 남침을 허락받고 자세한 전쟁계획을 지도받았다. 스탈린은 그 1년 전엔 남침을 허가하지 않았었다. 그 사이 중국이 공산화되고 소련이 핵무기를 보유하게 된 것이 전략상황을 急變시켰다. 스탈린은 남침을 허가하면서 조건을 달았다. 毛澤東을 만나 동의를 받으란 것이었다. 金, 朴은 5월13일 北京에서 毛澤東을 만났다. 毛澤東은 남침에 동의하면서 만약 미군이 참전하면 중공은 군대를 보내 도와주겠다고까지 약속했다. 金日成은 “참전할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미국은 중국에서도 싸우지 않고 물러갔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그래도 毛澤東은 “미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는 일이 생기면 중공군을 반드시 보내겠다. 그 전에 3개 군단을, 압록강을 따라 배치해두겠다”고 말했고 金日成은 “파병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고 했다.
  
   毛澤東은 전쟁의 전개과정을 살피면서 김일성에게 인천 등지에 대한 상륙전을 조심하라는 충고를 하기도 했다. 毛澤東은 미군의 반격이 시작될 것으로 보고 여름엔 林彪(임표)가 지휘하는 最强(최강)의 제4야전군 병력의 상당수를 뽑아 만주지역으로 보냈다.
   1950년 9월28일 서울 중앙청에 태극기가 다시 올라가던 날 김일성은 노동당 정치국 전체회의를 열고 소련과 중공에 지원을 요청하기로 결의했다. 10월1일 金日成은 북한주재 중국대사관의 紫成文(자성문) 참사관을 만나 “압록강 對岸(대안)에 배치된 중공 제13 집단군을 출동시켜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
  
   毛澤東, 반대론 꺾고 파병 결정
  
  
   毛澤東은 10월1일, 2일에 서기국 회의를 열어 파병문제를 토의하기 시작했다. 외교 책임자인 周恩來(주은래) 수상은 중공군을 파병하는 데 반대했으나 毛에 정면으로 맞설 입장은 아니었다. 그는 중국주재 인도대사를 불러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北進(북진)하면 중공도 개입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는 메시지를 미국에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트루먼 행정부는 이를 공갈로 치부했다. 10월3일 오전 毛澤東은 북경주재 소련대사 로시친을 통해 스탈린에게 電文(전문)을 보냈다. 毛澤東은 “미국과 중국이 충돌하면 소련도 같이 휘말려들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하면서 “지금 개입하는 것보다는 사태를 지켜보면서 힘을 비축해야 한다”고 신중론을 전개했다. 중국공산당 서기국 회의에서 다수가 개입반대론을 폈던 것을 반영한 내용이었다.
   毛는 또 “조선 군대는 게릴라 전으로 전환하여 계속 싸워야 한다”고 했다. 黑海(흑해)의 소치에서 휴가중이던 스탈린은 이 電文을 받자마자 답신을 보내 중공의 참전을 毛澤東에게 촉구했다.
  
   스탈린은 “미국이 대규모 전쟁을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일본에선 군국주의가 부활되지 않고 있어 미국을 지원할 수가 없다”고도 했다. 스탈린은 또 “조선이 미군에 점령되면 蔣介石(장개석)과 일본의 교두보가 될 것이다”고 경고하면서 “우리는 미국과 일본보다 강하지 않은가”라고 毛澤東을 자극했다. 스탈린을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자로 모시는 마음이 강했던 毛에게 이 電文은 상당한 심리적 압박이었다.
  
   10월3일 북한 내무상 朴一禹(박일우)가 金日成의 편지를 갖고 와서 毛澤東을 만나 의용군 형식의 파병을 요청했다. 연안파 출신인 朴은 중공의 수뇌부와 친면이 있었다. 10월4, 5일 북경에선 중국공산당 정치국 확대회의가 열려 참전문제를 토론했다.
  
   4일 회의에세 참전을 찬성한 사람은 毛澤東뿐이었다. 周恩來와 중공군 사령관으로 내정된 彭德懷(팽덕회)는 중립, 나머지 7명은 적극 반대였다고 한다. 周恩來는 10월3일에도 중국주재 인도대사 파니카를 만나 미국측에 공개적인 메시지를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周는 “한국군만 38선을 넘으면 중국은 개입하지 않지만 미군이 침입하면 반드시 중공의 저항에 직면할 것이다”고 말했다.
  
   중국의 6.25 전쟁 연구자들은 毛澤東이 한국군만의 北進을 저지하기 위해서도 파병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다만, 이때는 수십만 병력이 아닌 수만 병력을 보냈을 것이고 북한군으로 위장시켰을 것이다.
   10월5일 중국공산당 정치국확대회의는 毛澤東의 설득에 눌려 파병을 결정했다. 彭德懷가 적극적으로 毛澤東 편을 들었다. 참전파가 주장한 이유는 대강 이러했다.
  
   1. 미국은 대만, 한국, 인도지나 세 방면으로 중국을 치려 한다.
   2. 미국과의 교전이 불가피하다면 일찍 할수록 좋다. 공업시설을 건설한 다음에 하면 시설이 파괴되고 일본과 독일이 부흥하여 불리하게 된다.
   3. 적대세력이 압록강까지 진격하면 1000km의 국경선을 방어하기가 어렵다. 大兵力(대병력)을 常時(상시) 주둔시켜야 함으로 수동적 자세에 빠진다.
   4. 전쟁이 끝나기 전에 참전해야 한다. 끝난 뒤엔 참전의 大義名分(대의명분)을 찾을 수 없다.
   5. 중국과 마찬가지로 미국도 준비 부족상태이다. 그들의 전략적 중점은 유럽이고 한국에 보낼 수 있는 병력은 한정되어 있다.
  
   毛澤東이 이때 중공의 최고지도자가 아니었다면 중공의 參戰(참전)은 없었을 것이라고 보는 학설이 다수이다. 트루먼이란 한 개인의 결단에 의해 구출되었고 맥아더의 천재성에 의해 통일을 눈앞에 두게 되었던 한국인은 魔王(마왕) 같은 毛澤東의 결심으로 다시 지옥의 문턱까지 가게 된다. 參戰을 결정한 毛澤東은 彭德懷에게 아들 毛岸英(모안영)을 데리고 가도록 지시한다. 毛岸英은 그 뒤 유엔군의 폭격으로 죽었다.
  
   10월5일의 정치국확대회의는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는 날을 10월15일로 정했다. 10월7일 맥아더는 金日成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성명을 냈다. 같은 날 유엔은 남북한 통일을 위한 선거의 실시 등을 결의했다. 10월9일 유엔군이 서부전선에서 38선을 넘어 평양을 향해 북진을 시작했다.
   10월7일 참전결정을 스탈린에 통보한 毛澤東은 周恩來와 林彪를 소련으로 보내 무기 및 공군력 지원 등을 협의하도록 했다. 林彪는 파병될 병력이 자신의 제4야전군이므로 당연히 사령관이 되어야 할 사람이었으나 아프다면서 빠졌다. 漢族(한족) 군대로선 唐(당)나라의 삼국통일 개입 이후 1200년 만에 처음으로 한반도를 침략하는 군대가 된 중공군의 지휘부는, 후방지원을 맡은 高崗(고강) 동북군구 사령관 겸 정치위원과 전선사령관 彭德懷였다.
  
   스탈린, “공군 지원은 불가능”
  
   10월8일 毛澤東은 金日成에게도 참전을 통보했다. 북한주재 대사를 수행하여 金日成을 만났던 紫成文 참사관은 이런 증언을 남겼다.
  
   <대사와 나는 모란봉의 지하 지휘소로 갔다. 金日成 수상은 우리가 다가가는데도 누군가와 큰 소리로 다투고 있었다. 상대는 朴憲永 부수상 겸 외상이었다. 朴이 방을 나간 뒤 우리가 들어갔다. 金日成이 일어나 악수하면서 “그는 산으로 들어가 게릴라전을 할 마음 자세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고 말했다. 우리가 중국의 참전방침을 통보하자 金日成은 言爭(언쟁)할 때의 긴장된 표정을 풀고는 웃으면서 “잘 되었다. 참으로 잘되었다”고 소리쳤다. 김일성은 우리 둘의 손을 잡고 홀에 있는 식탁으로 끌고가더니 술잔을 채웠다. 그는 “중국군의 緖戰(서전) 승리를 위해 건배!”라고 소리쳤다.>
   毛澤東이 주도한 중공군 파병결정은 막판에 또 한 차례의 곡절을 겪는다. 10월10일 흑해의 소치에서 휴가중인 스탈린을 찾아가 만난 周恩來와 林彪는 스탈린으로부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는다. 스탈린은 “당장 소련 공군력을 투입하여 중공군을 지원할 순 없다”라고 말한 것이다. 중공군이 남하한 뒤, 즉 두세 달 뒤에는 소련 공군이 그것도 제한적으로 지원할 수 있을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장비가 형편 없는 중공군이 소련 공군기의 엄호 없이 미군기의 공습에 노출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문제는 10월9일 출병 군단 지휘관 회의에서 제기되었던 것이다. 지휘관들은 彭德懷와 高崗에게 소련 공군의 지원이 있느냐고 물었다. 중요한 것을 빠뜨렸다고 생각한 彭德懷는 북경의 毛澤東에게 물었다. 毛는 周恩來-스탈린 회담 결과를 통보받은 뒤 만주에 있던 彭德懷에게 “공군지원은 없다”고 알렸다. 직선적인 성격의 彭德懷는 북경으로 올라가 12일 밤의 정치국회의에 참석하여 “배신당했다. 이런 상태에선 전쟁을 할 수 없다”고 길길이 뛰었다고 한다. 毛澤東은 彭德懷에게 일단 출동준비를 중단하라고 지시했다.
  
   周恩來와 스탈린은 소치 회담에서 소련 공군의 지원 없이는 중공의 참전이 불가능하다는 데 합의가 이뤄졌다. 이에 따라 金日成에겐 소련측이 “타이밍을 놓치지 말고 중국으로 물러나 게릴라전을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는 연락을 해주기로 했다. 스탈린은 이 회담에서 중공측에 10개 사단분의 무기를 대주고 소련 공군기를 만주 지역으로 전진 배치하는 데는 동의했다.
  
   이 회담에서 스탈린은 “金日成이 중국의 만주지역으로 물러나 게릴라전을 해야 한다”라고 말하자 林彪가 즉각 “김일성은 물러나지 말고 산이 많은 북한에서 게릴라전을 지휘해야 한다”고 반박하는 장면이 있었다. 林彪는 金日成이 만주에 망명정부를 세우면 미국의 공격 목표가 될 것임을 걱정했던 것이다.
  
   周恩來 일행은 10월13일 오후 비행기편으로 소치에서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周恩來는 숙소에 들어가 차를 한 잔 마시고 있었다. 통역으로 따라갔던 師哲(사철)이 북경과의 통신을 담당한 보좌관 방으로 들어갔다.
   “새로운 지시가 들어온 게 있는가”
   보좌관은 “지금 막 電報(전보)가 들어오고 있습니다”고 했다. 師哲이 받아 읽어보니 정치국 회의가 있었고 “소련의 공군지원이 없더라도 우리는 참전하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師哲이 놀라서 周恩來한테 달려 가 보고했다. 周恩來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잘못 읽은 것이 아닌가 라고 말했다. 師哲이 電文을 읽고 있는 사이 周恩來는 소파에 앉은 채 아무 말 없이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깊은 생각에 빠져들고 있었다.
  
   26만 渡河(도하), 깊은 잠에 빠져든 毛澤東
  
   참전을 반대했던 周恩來로선 스탈린이 공군지원을 거부한 것을 이유로 삼아 중공군이 참전하지 않아도 이해한다는 동의를 받아낸 뒤였기 때문에 홀가분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치국 회의가 다시 참전을 결의하여 통보해왔으니 소련측을 상대로 무기 지원 등에 관해 새로 교섭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周恩來는 師哲에게 電文을 러시아어로 반역하여 소련 공산당원 몰로토프에게 전달하여 스탈린에게 보고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毛澤東은 별도로 스탈린에게 13일의 중국공산당 정치국회의가 참전을 재확인했음을 통보했다. 이 전보에서 毛澤東은 중요한 전략의도를 밝혔다. 26만 명이 10월19일에 압록강을 넘어 북한으로 들어가면 공세를 취하지 않고 북부 산악지방에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유엔군의 北進을 기다리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모택동이 소련의 공군지원 없이도 참전하기로 결정한 데 대하여 상당히 감격했다고 한다. 毛澤東이 중국을 적화하는 데 스탈린은 큰 도움을 주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때로는 방해했었다. 이런 자격지심 때문인지 스탈린은 毛가 제2의 티토가 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고 있었다. 毛澤東이 어려운 결정을 내린 데 대해서 스탈린은 전폭적인 무기 지원으로 보답했다. 毛澤東의 참전 결정 뒤엔 비정한 계산이 있었다.
  
   그는 투항한 蔣介石 군대 출신들을 한국으로 많이 출병시켜 소모시키는 代價(대가)로 소련으로부터 무기 및 제조기술의 지원을 받아 중국군을 세계적 强軍(강군)으로 만들고 싶어 했던 것이다. 소련은 중공군이 출병한 지 3주도 지나지 않아 대포 탄약 등 무기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이 무기들은 중공군이 대공세를 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소련 공군기도 1950년 11월 초부터 압록강 상공에 나타나 미군기와 교전하기 시작했다. 소련과 미군은 공중전을 벌이면서도 이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다. 擴戰(확전)을 피하기 위하여 덮어두기로 암묵적 양해가 이뤄진 셈이다.
  
   중국과 소련은 이후 밀월기로 들어간다. 1953년부터 시작된 중국의 제1차5개년계획을 소련은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10월13일 밤 金日成은 슈티코프 대사를 통해서 스탈린으로부터 電文을 받고 혼비백산했을 것이다. 중공군의 참전통보를 받고 안도했던 그에게 스탈린은 “중국은 파병을 거부했다. 귀하는 중국이나 소련으로 전면적 철수를 준비하지 않으면 안된다. 부대와 무기를 전부 철수시켜야 한다”고 지시했던 것이다. 金日成은 놀라더니 “참으로 받아 들이기 어려운 일이지만 이런 권고를 받은 이상 따르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 직후 스탈린의 또 다른 電報가 도착했다. “중국군은 장비가 불충분하지만 조선의 동지들에게 군사적 지원을 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었다.
  
   10월19일 彭德懷는 4개 보병군단과 3개 포병사단의 압록강 渡河(도하)를 명령했다. 그 자신은 저녁에 참모 1명, 경호원 2명, 무전기 한 대를 실은 지프차로 압록강 철교를 넘었다. 毛澤東은 반대자들을 설득하여 참전을 결정한 이후 고민에 빠졌다. 10월17일엔 출병부대에 대해서 渡河 대기선으로의 進軍(진군) 속도를 늦추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동안 생각을 다시 해봐야겠다”는 이유에서였다. 최종적으로 渡河 명령을 내린 19일 毛澤東은 수면제를 먹고 나서도 잠이 오지 않아 침대위에서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聶榮臻(섭영진) 참모총장 대리가 보고차 왔다. 毛澤東은 옷을 갈아 입고 접견실로 나왔다. 聶 장군이 경례를 붙이고는 “주석에게 보고드립니다. 의용군은 지금 압록강 渡河를 개시하였습니다”고 했다. 聶이 30분간의 보고를 끝내고 돌아가자 毛澤東은 “지금부터 잔다”고 하더니 눕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이 순간 한국인의 운명이 또 다시 바뀐 것이다. 통일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그해 여름처럼 또 다시 국가적 생존을 건 투쟁의 시기를 맞게 된 것이다. 유엔군의 퇴각, 서울 함락, 북한주민의 대거 남하, 맥아더와 영국의 한국 포기 건의에 이어 트루먼 대통령의 두번째 결단이 있었다.
  
   "미국은 친구가 어려워질 때 버리는 나라가 아니다. 한국을 버리면 우리를 믿고 싸웠던 사람들이 다 죽을 것이다."
  
   習近平의 모택동의 역사적 과오를 이어가는 중국의 지도자이다. 1992년 노태우 정부는 중국과 수교할 때 중국의 한국전 불법개입에 대하여 사과를 요구하지 않았다. 정부는 물론이고 어느 언론도, 어느 학자도, 어느 정치인도 그런 요구를 한 적이 없다. 중국 지도부는, 그러한 한국을 조공 바치던 조선처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북한군과 중공군의 침략으로부터 한국을 살리기 위하여 5만4000명의 미군이 죽는 참전 및 포기 거부 결단을 내린 트루먼과 미국. 이 恩人(은인)들을 싫어하고 筆舌(필설)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韓民族에게 가져다 준 중국의 習近平을 숭배하는 (일부) 한국인!
  
   미국과 일본은 韓民族의 멸망을 가져올지 모르는 北核(북핵) 제거를 위하여 애쓰는데, 중국은 막을 수단이 있음에도 北核을 눈감아 주고 있다. 일본은 동맹국 미국의 친구이고, 중국은 敵(적)인 북한의 동맹국인데, 일본보다 중국을 더 좋아하면 韓美동맹이 견딜 수 있을까? 眞僞(진위)구분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善惡(선악) 및 敵-동지 분별력도 마비된다. 한반도의 자유통일로 나아가는 한국이 자유통일을 막은 前科(전과)를 반성 않는 중국의 도움으로 통일을 이룰 수 있을까?
  
  
[ 2014-06-29, 14:4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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