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괴군의 戰車부대를 저지한 肉彈 11 용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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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6월25일 기습을 받고도 국군 6사단은 춘천을 사흘간 방어, 북괴군의 전략 그림(서울을 남쪽에서 포위 섬멸)을 바꿔 놓았다. 당시 육탄 11 용사가 나타나 敵(적)의 戰車 부대를 저지하였다. 1999년 월간조선에 소개된 생존자의 증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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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천-홍천간 중앙고속도로는 험준한 강원도 산악지역을 시원스레 가르고 있었다. 커다란 S자를 그리며 높다란 고갯마루로 올라가는 도로는 수많은 교각 위에 얹혀 있었다. 교각 하나의 높이가 웬만한 건물보다 높아 보였다. 趙達珍(조달진)씨는 연신 『이렇게 좋은 길이 뚫릴 줄이야』하며 지난 기억을 끄집어 내었다.
  
   <내가 소속된 6사단 19연대 3대대는 홍천이 위험하다는 소식에 선발대로 6월26일 오후 춘천을 떠나 밤새 이 길을 걸어 6월27일 오후가 되어서야 홍천국민학교에 도착했다. 모두가 행군에 지쳐 기진맥진하고 있는데 연대장(閔丙權 중령)이 『전차 특공대를 편성하려고 하는데 지원할 사람이 없느냐』고 물었다. 지원자가 30명쯤 되었다. 나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죽느니 장렬히 싸우다 죽으면 그래도 祖國(조국)을 위해 뭔가 했다는 보람은 안고 죽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지원했다. 해방되기 전까지 日本(일본)에서 자라 나라없는 설움을 톡톡히 겪은 것도 한 이유였다.
   지원한 30여명 가운데 독자, 결혼한 사람, 老(노)부모를 모셔야 하는 사람 등을 추려냈다. 소대장이나 하사관들은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며 빠져나갔다. 「특공대에 지원하는 것은 제사날을 받는 것이다. 누군 목숨이 아깝지 않는가」 싶어 화가 났지만 속으로 삼켰다. 최종적으로 11명이 남았다. 모두가 일병이었다. 결국 일병 중에서도 선임자인 내가 이들 11명 육탄돌격대의 대장이 되었다.>
   趙 당시 일병의 얘기는 이어진다.
   『연대장이 화랑 담배 1개피와 위스키 한 잔을 주었다. 遺骨(유골)을 대신하기 위해 손톱과 발톱, 머리칼을 잘라 하얀 종이에 싼 다음 이름을 새겨 연대에 남겼다. 트럭에 올라 말고개로 향하는데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얘기를 꺼내는 대원은 아무도 없었다. 술기운이 오르면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 올랐다. 「이게 마지막인가」 하는 생각에 자꾸 고개는 하늘로 올라갔다. 슬펐다. 하지만 「갈 길은 이 길뿐」이라고 다짐하니 후회는 되지 않았다.』
  
   趙일병을 위시한 11명의 육탄돌격대가 배치된 말고개는 6월26일 사단으로부터 『왜 철수만 하느냐』는 질책에 於論里(어론리) 일대에서 무리한 반격전을 펴다 大敗(대패), 허둥지둥 후퇴한 2연대가 홍천 방어의 마지노선으로 택한 곳이었다. 哲亭里(철정리)와 城山里(성산리) 사이의 고개인 말고개(일명 馬峴이라고도 불리는 이 곳은 鄭씨라는 사람이 아버지 묘를 이 고개에 쓰고 난 뒤 사흘이 지나자 갑자기 천둥이 일어나고 묘가 뒤집히더니 그곳에서 龍馬가 나타나 고개를 넘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는 당시에는 전차 1대가 겨우 빠져나갈 정도의 좁은 도로(지금은 2차선 국도가 말끔하게 닦여 있다)를 중심으로 서쪽은 해발 2백30∼3백m의 봉우리가 연이어져 있고 동쪽은 깎아지른 절벽에 그 밑으로 華陽江(화양강)이 흐르는 천혜의 방어 지형이었다.
  
   철수를 완강하게 부인하고 공격만을 주장하던 연대장도 이 지형을 직접 보고서 말고개 방어를 주장하는 金柱亨(김주형) 1대대장과 曺精練(조정련) 연대 작전주임의 건의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6월27일 아침부터 인민군은 자주포 2∼3대를 앞세운 1개 중대 규모로 말고개의 배치 상황과 강도를 탐색했을 뿐 본격적인 공격은 해오지 않았다. 대신에 하루종일 大口徑砲(대구경포)와 전차포를 난사하여 삼림이 울창하던 말고개 일대가 벌거숭이山이 되도록 포격을 해대었다. 洪川 지역을 공략하던 인민군 7사단은 병력의 일부를 춘천 공격에 돌렸기 때문에 전력을 아끼고 있었던 것이다.
  
   무명용사의 玉碎(옥쇄)
  
   6월28일 오전 9시 먹구름이 잔뜩 낀 무더운 날이었다. 철정리 寒溪(한계)마을 북쪽 산모퉁이에 사이드 카 3대가 나타나고 그 뒤를 이어 전차 10여 대와 인민군을 가득 태운 트럭이 줄을 이어 남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인민군이 총공격을 시도하려는 것이었다.
   그들이 寒溪마을의 哲亭橋(철정교)를 통과할 무렵 연대는 말고개 고지에서 집중 포격을 가했다. 인민군은 트럭에서 허겁지겁 내리기 시작, 전투대형을 갖추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 寒溪마을 남서쪽 4백m 지점 개울가에 잠복하고 있던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느닷없는 기습 사격에 인민군이 우수수 쓰러졌다. 이들 기관총 사수와 부사수는 위치를 이동하면서 싸우다 적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했다. 이들 무명용사의 목숨을 건 저항으로 인민군 보병은 앞서간 전차와 합류하지 못하고 말았다. 당시 이들에게 주먹밥을 날라 주었다는 寒溪마을 주민 申萬鎭(신만진), 元承準(원승준)씨는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겼다.
   『전투가 끝나고 그 두 사람의 시신을 찾아 도로변 양지바른 곳에 안장했다. 매년 6월28일이면 그들의 묘에서 祭(제)를 올려 주었다. 그런데 1959년 美 2사단 공병대대가 도로 확장공사 중에 비석도 없는 이들의 묘를 밀어붙여 흔적도 없어지고 말았다』
  
   『여기서 죽을 텐가, 가서 싸우겠는가』
  
   기자가 寒溪 마을을 찾아 申萬鎭, 元承準씨를 수소문해보니 이미 그들은 故人(고인)이 되어 있었다. 주민 辛光鎭(신광진·69)씨가 이들 무명용사들이 싸운 지점을 가리키는 곳을 보니 휴게소 음식점이 덩그렇게 들어앉았을 뿐 그 사연을 알려주는 표식은 어디에도 없었다.
   드디어 인민군 전차가 말고개 입구에 이르렀다. 고지의 병사들이 『전차다. 전차가 온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는데 對전차포중대(중대장 李勳 중위)는 명령도 받지 않고 城山里(성산리) 쪽으로 철수하고 있었다. 격노한 咸炳善 연대장은 헌병대장 崔永喆(최영철) 대위에게 『빨리 가서 돌아오게 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李勳 중위가 도착하자 연대장은 『軍法(군법)에 따라 처벌받겠는가, 나가 싸워 戰功(전공)을 세우겠는가』고 물었다. 李勳 중위는 『죽기를 작정하고 싸우겠다』고 다짐하고 대원들을 이끌고 달려 나갔다.
   이무렵 趙達珍 일병을 위시한 육탄 돌격대에게도 출동 명령이 떨어졌다. 그런데 대원들 중에 그 누구도 먼저 나서는 이가 없었다. 보다 못한 趙達珍 일병이 수류탄을 집어 들었다.
   『여기서 죽을 텐가, 가서 싸우겠는가』
   그제야 대원들은 정신을 차리고 趙일병을 따라 말고개로 나아갔다. 육탄 돌격대는 도로변 배수로에 시체를 가장하여 누웠다.
   『쿠르릉. 쿠르릉…』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며 검은 쇳덩어리가 말고개로 들어섰다. 이 때 對전차포 1번포가 발사되었는데 빗나가고 말았다. 인민군 선두 전차는 전차포를 휘갈겨 1번포를 파괴했다. 對전차포가 제거되자 인민군 선두 전차는 포탑을 열어젖히고 S자 굴곡지점을 통과하려 徐行(서행)하기 시작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말고개에 매복 중이던 對전차포 2번포 사수 金學斗(김학두) 하사는 1탄(철갑탄)을 전차 궤도에, 2탄(철갑탄)을 정면에, 이어 3탄(폭발탄)을 연속해서 명중시켰다. 화염에 휩싸인 선두 전차는 급정차하고 뒤따르던 두 번째 전차가 그 뒷면에 부딪쳤다. 이때 배수로에 누워 있던 趙達珍 일병은 쏜살같이 전차에 뛰어올라 수류탄을 집어 넣은 뒤 벼랑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趙일병은 다행히 소나무 가지에 걸려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뒤따르던 네 번째 전차는 당황한 나머지 華陽江 절벽으로 굴러 떨어졌다. 다섯 번째 전차가 뒤로 빠져나가기 위해 전차장이 포탑을 열고 뒷면을 살필 때 말고개에 매복했던 아군이 쏜 로켓포탄이 포탑 안에 정통으로 꽂혔다. 인민군 전차 10여대는 좁고 굴곡이 심한 말고개 언덕길에 갇혀 꼼짝달짝도 못하게 되었다.
   『전차를 부셨다!』
   『공격이다!』
   2연대와 19연대 3대대 병사들은 앞다투어 전차에 올라타 수류탄을 터뜨렸고 전차 승무원들은 대부분 사살되었다. 趙達珍씨의 회고.
   『특공대로 선발된 다음 M1 소총을 반납하고 81mm 박격포 실탄 2발과 수류탄을 지급받았다. 포탑이 열리는 것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전차에 뛰어 올랐다. 수류탄을 집어 넣은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그 다음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저 멀리 강변을 따라 인민군 전차병들이 「내 죽으라」고 달아나는 모습이 보였다. 공연히 웃음이 나왔다.』
   말고개의 전차 섬멸전은 한국전쟁 개전 이래 한 장소에서 최대의 戰果(전과)를 거둔 전투였다. 무려 11대의 전차를 잃어버린 인민군은 이 타격으로 洪川 점령이 이틀이나 늦어짐으로써 춘천 점령 목표의 차질에 이어 인민군 2군단의 작전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전차 파괴의 戰功으로 2연대 對전차포중대 선임하사 金學斗 하사는 1계급 특진을, 19연대 육탄 돌격대 趙達珍 일병 외 2명은 2계급씩, 元根浩(원근호) 일병 외 7명은 1계급씩 특진을 했다. 특히 趙達珍 일병에게는 한국전쟁 발발 이후 최초로 美 銅星勳章(동성훈장)이 수여되었다.
  
[ 2014-08-08, 11:3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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