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급 관심병사의 無사고 제대기'를 끝내면서
*제3부: 선·후임과 同期들의 도움으로 부대 생활에 적응. 함께 생활한 병사들은 제게 싫은 기색을 내지 않고, 오히려 저를 걱정해줘 *군대는 21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까지를 경험할 수 있는 곳

李庚勳(자유기고가)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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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급 관심병사는 일종의 ‘시한폭탄’>
  
   22사단 GOP 총기난사 사건의 용의자 임 병장은 A급 관심병사였습니다. A급 관심병사였던 그가 GOP에 투입될 수 있었던 것은, 투입 전 B급으로 등급이 낮춰졌기 때문입니다. 임 병장 사건 이후, 軍당국은 ‘GOP에 투입된 관심병사들을 철수시키라’고 지시했습니다.
  
   관심병사는 A, B, C등급으로 나눕니다. 軍에서 실시하는 ‘신인성검사’, ‘자살시도 경험’, ‘가정문제’, ‘건강문제’, ‘경제문제’, ‘과거경력’, ‘이성문제’ 등을 바탕으로 등급을 매깁니다. A급은 복무에 가장 큰 어려움을 겪는 병사입니다. 자살 시도, 자살 우려자, 사고 유발 高위험자, 자해 등 극단적인 행동을 보이는 병사들입니다. B급에는 결손가정, 신체결함, 경제적 빈곤자, 구타유발자 등이 선정됩니다. C급에는 주로 自隊(자대) 전입 100일 미만의 신병과 허약 체질자들이 지정됩니다. 저는 건강문제로 ‘B급 관심병사’였습니다.
  
   저희 부대는 선발된 병사로만 구성돼, A급 관심병사는 없었습니다. A급 관심병사에 대해 잘 아는 모 병사에게 A급 병사들은 어떤지 물었습니다. 그는 과잉 행동을 하거나, 자해를 하고, 동료 병사에게 총을 겨누거나, 갑자기 발작하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일어나지 않을 부정적 妄想(망상)을 하는 병사들도 많았습니다. 건전지를 먹고 자살을 시도하는 행동, 정신과 진료 후 약물을 다량 복용하는 사례도 있었고, 유서를 작성했다가 지휘관에게 적발된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어떤 병사는 자신의 부모가 조폭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 다른 병사는 시계를 먹고 죽으려고 했습니다. 계단에서 구르려 시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정신 이상 증세를 보여 샴푸를 먹기도 하고, 목을 매 자살을 시도하고, 침낭 속에서 자위행위를 하는 병사도 있다고 합니다. 지능 지수가 낮아 생활이 힘들었던 병사도 있었습니다. 한 A급 병사는 감기가 걸려 재채기를 계속 했습니다. 밥을 먹다가 재채기가 멈추지 않자, 그 자리에서 울어버렸습니다. 이 병사는 부대에서도 관심을 많이 받는 이였습니다.
  
   부대 적응을 잘하지 못해 轉出(전출)도 여러 번 다녔던 A급 관심병사가 있었습니다. 부적응자의 부대 생활을 돕는 ‘비전캠프’에도 다녀온 병사였습니다. 한 번은 지휘관에게 ‘PX병’으로 보직을 임명해 달라고 했는데, PX병이 되지 않자 자살을 했습니다. 관심병사는 지휘관들에게는 일종의 ‘시한폭탄’입니다. 터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터진다면 언제 터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관심병사들의 특징>
  
   관심병사들의 특징은 결손 가정이거나, 불우한 유년 시절, 초·중·고교 시절 집단 따돌림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입대하기 전의 경험이 軍복무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이들은 심리적으로 대단히 불안해 보였습니다.
  
   軍당국은 사지가 멀쩡하고 생각이 바르더라도 결손 가정이나 경제적 빈곤자는 관심병사로 지정합니다. 이는 결손 가정 출신이 관심병사의 主流(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손 가정의 병사라고 모두 문제 있는 병사는 아니지만, 문제가 있는 병사는 결손 가정 출신이 많으니, 이런 식의 방법을 사용한 것 같습니다.
  
   관심병사들만 모아 놓은 부대도 있습니다. GOP에 병력을 투입하는 연대(2000여 명 규모)는 3개 대대를 갖고 있으며, 이 중 1개 대대가 6~8개월 가량 GOP에 투입되고, 나머지 두 개의 대대는 휴식 및 교육 훈련을 합니다. GOP에 투입되지 않는 대대에는, 부대 운영에 부담되는 관심병사만 모아 놓은 중대가 있었습니다. 이곳에 이른바 문제가 되는 병사들을 모아 놓고 집중 관리를 했습니다. 재채기가 멈추지 않자 울어버린 병사도 이 부대에 속해있었습니다.
  
   관심병사와 관련된 업무를 봤던 한 병사는, 현재의 관심병사 제도가 너무 포괄적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때문에 세밀한 관찰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으면 정신 異常(이상)의 범주에, 가정에 문제가 있으면 가정 문제의 범주에, 건강에 문제가 있으면 건강 문제의 범주에 포함해 세부적으로 관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현역복무 부적합심사>
  
   軍복무 기간을 다 채우지 않고도 제대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依家事(의가사) 제대, 依病(의병) 제대, 현역복무부적합심사(現不審, 현부심)를 통한 제대입니다. 의가사 제대는 가정사 때문에 예정보다 일찍 제대하는 것입니다. 의병 제대는 軍복무를 계속하기 어려운 병에 걸렸을 때, 軍병원의 심의를 받고 제대를 하는 것입니다. 현역복무부적합심사는 군복무에 상당한 제한이 있으면, 상급 부대의 심의를 받은 뒤 병역심사대 심사를 거쳐 공익근무요원으로 남은 기간을 복무하거나 제대를 하는 것입니다.
  
   현역복무 부적합심의를 받는 병사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건강상 제약이 있음에도 의병 제대를 할 수 있는 신체 등급에 이르지 못했을 때와 軍생활 부적응 등 부대 운영에 부담되는 병사를 내보낼 때입니다. 저는 前者의 경우로 ‘現不審(현부심)’을 하길 원했지만, 부대에서는 ‘현부심’ 대신 수월한 보직을 받고 軍생활을 계속하는 것으로 일단락됐습니다.
  
   저는 자대 배치 후 얼마 되지 않아 휴가를 사용해 민간 병원에 다녀왔습니다. 검진 결과가 좋지 않자 어머니는 부대까지 저를 데려다 주셨고, 부대장과의 면담에서 눈물을 보이셨습니다. 어머니와 저는 제대를 시켜달라고 했지만, 早期(조기) 제대를 위한 신체 등급에 미치지 않아 부대장은 제대를 시켜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현부심 관련 업무를 담당했던 병사는, “지휘관이 現不審을 잘 시켜주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문제가 있는 병사라도 끌고 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병사를 제대시켜주는 것이 지휘관 입장에서는 지휘력 부족으로 보일 수도 있다고 합니다. 또 現不審을 통해 병사들을 쉽게 제대시켜줄 경우, 유사 사례가 발생할 수 있어 조심스럽다고 말합니다.
  
   現不審(현부심)을 진행하는 절차 또한 복잡합니다. 중대 또는 대대급 부대에서 서류를 작성하고, 연대를 거쳐 사단에서 심사합니다. 사단에서는 주로 참모장이 심사위원장이 돼 ‘현역복무부적합심사’를 진행합니다. 사령부의 중령급 참모, 의무대대장 등 약 6명 정도의 위원이 모여 현부심 대상 병사에 대해 투표를 합니다. ‘현부심’을 통과하면, 병역심사대에 입소하게 되고, 그곳에서 다시 심사를 거쳐 제대 또는 공익근무요원으로 남은 기간을 복무합니다. 대체로 사단에서 ‘현부심’을 통과한 경우 병역심사대에서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통과한다고 합니다.
  
   ‘現不審’을 위해 제출되는 서류도 수백 장에 이릅니다. 이 서류를 본 적이 있는데, 약 300장 정도 돼 보였습니다. 여기에는 부대 생활 기록, 진단서와 지휘관 의견서, 동료 의견서 등이 포함됩니다. 주로 A급 병사들이 ‘現不審’을 받습니다. ‘現不審’은 사단의 관심 사안이어서 兵 인사 업무를 맞는 참모가 주로 일을 처리합니다. 現不審으로 조기 제대를 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저희 사단도 올해 8월 기준으로 약 5명 정도가 ‘現不審’으로 제대를 했습니다.
  
  
  <관심병사가 21개월을 채워 나갔던 이야기>
  
   저는 논산 육군훈련소로 입대할 때 너무나 기쁜 마음으로 웃으며 軍門(군문)을 통과했습니다. 오래 전부터 꿈꿔왔던 장교로 입대하진 못했지만, 국가 안보의 일선에서 젊음을 바친다는 것이 설렜습니다. 매일 아침 일어나 애국가를 부르는 것도 매우 좋았습니다. 아침·저녁으로 복창하는 ‘복무 신조’를 외칠 땐 힘찬 목소리로 외쳐댔습니다. ‘복무 신조’의 내용은 <우리는 국가와 국민에 충성을 다하는 대한민국 육군이다. 하나, 우리는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며 조국통일의 역군이 된다. 둘, 우리는 실전과 같은 훈련으로 지상전의 승리자가 된다. 셋, 우리는 법규를 준수하고 상관의 명령에 복종한다. 넷, 우리는 명예와 신의를 지키며 전우애를 굳게 단결한다> 입니다. 흔히 말하는 ‘짬밥’도 아주 맛있었습니다. 政訓(정훈) 교육 때는 어떠한 내용을 배우고, 自隊(자대)는 어디로 갈지 궁금해하며 軍생활을 시작해갔습니다.
  
   훈련을 받던 중 전염병에 걸렸고, 제가 소속된 훈육 부대에서는 관심도 두지 않은 채 저를 방치했습니다. 훈육 중대에서는 제가 훈련을 받지 못해 교육 이수 부족이라는 이유로 留級(유급) 통보를 내리곤, 자기네 할 일은 다 끝났다는 식으로 나왔습니다. 軍병원에서도 誤診(오진)을 했는데, 자신들의 잘못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리곤 부모님에게는, “이경훈 훈련병이 부모님 전화번호를 몰라서, 군병원에서 부모님께 전화를 못 드렸다”고 했습니다.
  
   어머니 손에 이끌러 軍병원에서 제대로 받지 못한 치료를 민간 병원에서 한 달여 동안 받았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제게 “네가 입만 열면 자랑하고 옹호했던 군대의 실체이다. 직접 당해보니 어떠냐?”고 말했습니다. 저는 몸이 다친 것보다, 제 마음이 더 많이 다쳤습니다. 훈육 중대와 軍병원이 잘못한 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끝까지 책임을 회피하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민간 병원에서 치료를 마치고, 두 번째로 육군훈련소의 문을 통과할 땐 처음 입대할 때의 감정과는 달랐습니다. 이곳에서 남은 날들을 어떻게 버텨나갈지 까마득했습니다. 그곳에서 저의 유일한 희망은 함께 훈련을 받는 훈련소 동기들뿐이었습니다. 훈련소 동기들을 의지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나갔습니다. 밥을 세 번 먹으면 하루가 지나간다는 것과 주말에 교회를 다섯 번 가면 훈련소를 수료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서로 비슷한 환경에 놓인 훈련병들은 훈련 기간을 함께할 동반자들이었고 버팀목이었습니다.
  
   한 번은 육군훈련소의 교육대장(소령)이 정신 교육을 했습니다. 그는 戰時(전시)에 敵과 싸울 수 있도록 만드는 힘은 戰友愛(전우애)라고 했습니다. 거창한 국가관, 애국심, 가족 때문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옆에서 同苦同樂(동고동락)한 전우를 보며 적과 싸운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이 더욱 와 닿았습니다. 그때 당시 의지할 곳은 간부도 아니었고, 오직 함께 훈련받는 동기들뿐이었습니다. 훈련소에서 이들과 5주간의 시한부 만남을 끝내고 前方(전방) 상비 사단으로 자대 배치를 받았습니다.
  
   自隊(자대)에 오자마자 의병제대나 ‘현부심’을 통해 早期(조기) 제대를 하려고 했습니다. 훈련소에서 발생한 질환이 치료되지 않았고, 만성화됐기 때문입니다. ‘더 나빠지면 어떡하나’라는 걱정도 있었습니다.
  
   자대에 오니, 선임들은 생각지도 못 한 新兵(신병)이 들어와 놀랐습니다. 저희 부대는 면접을 보고 선발된 병사들만 올 수 있었습니다. 저는 면접도 보지 않고 이곳에 오게 됐습니다. 저의 바로 윗선임인, 맞선임은 예상도 못 했는데 후임이 와 놀랐다고 합니다.
  
   자대 배치를 받자마자 휴가를 써서 민간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습니다. 몸 상태가 더 안 좋아졌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제게, 부대는 의무대 입원을 권유했습니다. 입원 기간이 길어지자 의무대에서도 저를 꾀병으로 보곤 “자대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자대로 돌아오니 가시방석이었습니다. 소대원들에게 미안했습니다.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 조기 제대를 하고 싶었는데, 상황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제 관물대와 침대도 없어졌습니다. 한동안은 옷과 같은 생활용품을 흔히 말하는 ‘더플백’에 넣어서 사용했고, 잠은 휴가 나간 병사의 자리에서 잤습니다.
  
   분대장에게 제가 처한 건강 상태를 있는 그대로 이야기했습니다. 분대장도 제 고충을 알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줬습니다. 꾀병인 줄 알았던 다른 병사들도 저를 걱정해줬습니다. 선·후임과 동기들의 도움으로 부대 생활에 적응했습니다. 후임인 제가 해야 할 일도 선임이 대신했습니다. 맞선임이 저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경계 근무를 나가야 하는데도, 몸이 성치 않아 나가지 못했습니다. 항상 미안한 마음이었습니다. 함께 생활한 병사들은 제게 싫은 기색을 내지 않고, 오히려 저를 걱정해줬습니다.
  
  
  <작지만 한 조직의 리더도 잠시나마 경험>
  
   시간이 흘러 제게 도움을 줬던 선임들이 제대했습니다, 저도 후임을 두게 됐습니다. 후임들에게 잘 해주는 것이 선임들에게 받은 은혜를 갚는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軍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계급이 높아지니 해야 할 일도 많아지고, 주도적으로 나서는 일도 생겼습니다. 만성 질환으로 인해 신체는 온전치 못했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열심히 했습니다. 軍생활에 재미가 붙었습니다.
  
   조직 생활을 경험한다는 것은 앞으로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을 줍니다. 군대는 누구에게나 기회가 주어지는 곳입니다. 계급이 낮을 땐 선임병을 따르는 법을 배우고, 계급이 올라가면 후임병을 통솔해야 할 때가 옵니다. 제가 후임병일 때는 선임이 시키는 것을 어떻게 잘 해낼지 고민해봤습니다. 남에게 이것저것 시키는 게 싫었던 저도 계급이 오르니 후임병들에게 지시를 내려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어색했습니다. 지시하고 통솔하는 것에 익숙해지자 ‘후임병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도 고민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존중하면서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을까도 생각했습니다.
  
   제가 지시한 내용을 잘 따르고 집단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열심히 따르는 후임들이 대견했습니다. 여기서 재미도 느꼈습니다. 작지만 한 조직의 리더도 잠시나마 경험해본 것입니다. 계급이 주는 권위를 배우고, 이 계급에 맞게 행동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어떠한 용어를 사용하고 어떻게 지시해야 효율적인지 생각했습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 것입니다.
  
   후임 시절에 싫어하는 선임에 대해 ‘저 사람 언제 제대하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막상 제가 선임이 되니, ‘나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없을까’ 고민해봤습니다. 후임일 때는 몰랐는데, 선임이 되니 선임의 고충을 알게 됐습니다. 후임 시절, ‘왜 저 선임은 저렇게 할까’라고 의심도 했지만, 언젠가는 이해를 하게 됐습니다. 군대는 21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까지를 경험할 수 있는 곳입니다.
  
   맨 처음 자대에 가니 입대 順(순)으로 서열판이 있었고, 제가 맨 아랫부분에 있었습니다. 제 앞에 있는 선임들이 모두 다 집에 가야 저도 갈 수 있었습니다. 매우 길 것만 같았지만, 뒤돌아보니 금방이었습니다. 그중에는 힘든 일도 있고, 즐거운 일도 있었습니다. ‘엊그제 같았는데…’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제대하는 선임들이 한결같이 했던 말입니다. “입대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제대를 한다.” 저도 입대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21개월도 더 됐습니다. 지나고 보니 금방이었습니다.
  
   오기 싫은 군대에 억지로 끌려와 다들 불만이지만, 군대를 알고 배우는 것이 훗날 큰 도움을 줄 것입니다. 젊은이들 사이에선 눈앞에 놓인 2년의 시간이 아까워 군대에 대해 좋은 기억보단 나쁜 기억이 더 많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군대는 한 번쯤 다녀와야 한다’는 것을 느끼고, 그곳에서 자신이 성장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말아야 하고, 하기 싫은 것을 해야만 하는 곳에서 ‘자유’의 소중함도 알게 되고 정신적으로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관심병사가 된다고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본인이 열심히 해 선입견을 깨면 됩니다. 군대는 집단생활을 하는 곳입니다. 어려운 병사가 있다면 이를 도와 함께 가는 곳입니다. 본인의 의지도 중요합니다.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면, 선·후임과 간부가 함께 도와줄 것입니다.
  
   ‘회복탄력성(resilience)’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심리학에서 쓰이는데, ‘심각한 삶의 도전에 직면하고서도 다시 일어설 뿐만 아니라 심지어 더욱 풍부해지는 인간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관심병사와 같이 부대에서 적응을 잘하지 못하는 병사들은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은 보이지 않는 상처가 많습니다. 이들은 ‘회복탄력성’이 부족합니다. 이 때문에 자신이 처한 환경을 헤쳐나갈 수 없다고 느끼고 현실 도피의 수단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곤 합니다.
  
   이들이 포기하지 않도록 주변의 선·후임과 동기, 간부가 이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보듬어준다면 이들과 함께 해나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戰友愛(전우애)입니다. 이들에게 애정을 쏟아 부어 軍생활을 같이 하고, 무사히 성장시켜 배출하면 말 그대로 軍隊가 軍大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國力이고, 軍의 신뢰성을 높이는 길입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다윗 왕이 세공 전문가를 불러 반지를 만들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 반지에는 전쟁에 이겼다고 해서 교만하지 않고, 졌다고 해서 좌절하지도 않을 문구를 새겨 달라고 했습니다. 세공 전문가는 이 문구를 수소문했지만, 원하는 답을 얻지 못 했습니다. 그러던 중 마지막으로 솔로몬이 가르쳐줬다는 문구가 바로 '이 또한 지나가리라'입니다.
  
   육군훈련소에서 자살 예방 교육을 받을 때 당시 교육을 주관한 軍宗(군종) 목사 모 중령이 한 말입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는 이 문구를 생각하며 軍생활을 하라고 했습니다. 극단적인 선택은 주변인들에게 잠깐의 슬픔을 줄 순 있어도, 곧 잊히는 허무한 죽음이라고 말했습니다. 군생활의 저의 좌우명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였습니다.
  
   건강이 걱정되고 몸도 좋지 않아 조기 제대를 하고 싶었지만 나갈 방법이 없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복무를 계속했습니다. 지나고 보니 힘든 것을 참고 이겨내 晩期(만기) 제대를 하길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질병에 걸리지 않고, 무사히 軍생활을 시작하고 끝냈으면 좋았겠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좋은 사람들을 만나 예비역 병장이 됐습니다. 모두 다 저를 도와준 선·후임과 동기, 그리고 좋은 간부들 덕분입니다.
  
   누군가 군대를 ‘삭막한 곳’으로 표현하면, 다른 이들은 ‘군대도 사람 사는 곳’이라고 말합니다. 엄격하고, 힘들 것만 같지만, 그 속에는 人情(인정)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이 人情 때문에 軍생활을 잘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으론, 사람 사는 곳이기 때문에 사건·사고가 일어나고 피해자와 가해자도 생기기도 합니다.
  
   갓 스무 살을 넘긴 앳된 병사들이 신병으로 자대에 온 모습을 보면 측은한 감정도 듭니다. 이 아이들이 21개월 뒤에는 늠름해져서 사회로 나오는 것입니다. 사회에서도 군필자를 선호하는 이유는, 군에서 흔히 말해 볼 것, 안 볼 것 다 참아낸 이들의 인내를 認定(인정)하는 것입니다. 성인이 된 남성이 이 과정을 통해 성숙해지고, ‘인간’에 대한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온몸으로 경험하는 2년이라는 시간은 가치가 있습니다. 병사들끼리 시한부 만남의 가치를 알고 서로에게 잘 대하기를 바랍니다. 전우애를 바탕으로 가족과 같은 생활을 한다면, 어떻게 구타와 가혹행위가 있겠습니까. 유사시 나의 억울함을 풀어줄 이들이 내 옆에 있는 선·후임, 戰友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대 후, 저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한 맞선임을 만났습니다. 좋은 맞선임을 만나 軍생활을 잘할 수 있었습니다. 맞선임은 저보다 다섯 살 어립니다. 웃으며 함께 했던 선·후임이 생각납니다. 요즘은 이들을 만나는 재미로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흔히들 군대에서 만났던 사람은 사회에서 잘 안 본다고 합니다. 저는 군복무 시절 함께 했던 사람을 만나는 게 즐겁습니다. 이들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지금의 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군대는 제게 병도 주고 약도 준 것 같습니다. 몸은 예전 같지 않지만,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도록 맺어줬고, 제가 그토록 사랑했던 군대의 민낯을 알 수 있게 해줬기 때문입니다.
  
  <조금씩 바뀌길 바라며>
  
   글에는 제 출신 부대를 밝히지 않았지만, 사단장 以下(이하) 주요 간부들이 제 글을 보았다고 합니다. 몇몇 知人(지인)을 통해 연락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제게 “실망했다”, “네가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軍복무 경험을 글로 정리하기 전에 걱정했던 것이 ‘후임 병사들이 저 때문에 피해를 보진 않을까’였습니다. 실제로 일부 간부들은 자신의 부하들이 제게 정보를 제공한 것으로 오해해, 엉뚱한 병사가 의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또 다른 걱정은 ‘자신의 임무를 묵묵히 해내고 있는 많은 군인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을까’였습니다. 軍에 좋지 않은 사건·사고가 많을 때라 ‘軍 때리기’로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 글을 읽은 몇몇 병사들은 “말하고 싶었지만, 말할 순 없었던 내용”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다고 달라지겠습니까. 달라질 것이라면 진작에 달라졌지”라고 했습니다. 군의 특성상 급격한 변화는 어려울 것입니다. 30년 전의 군대와 오늘날의 군대가 다르듯, 시간을 갖고 복무 여건을 향상시킨다면 제 아들이 군대 갈 때쯤이면 더 좋은 군대가 돼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 2014-08-26, 09:3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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