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옥, 최은희의 북한 탈출기(上)-21
前 CIA 요원 마이클 리의 現代史 秘話-21/신상옥-최은희 부부는 런던 영화제에서 배우 김지미와 남궁원을 만나 매몰차게 대했다. 이 짧은 ‘연기’로 신상옥 감독은 그 후 많은 것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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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영화감독 신상옥과 배우 최은희와 나는 전혀 상관이 없는 다른 세상의 사람들이었는데 어쩌다 기이한 인연으로 저들을 만나게 됐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두 사람의 납북경위와 북한에서의 행적, 그리고 성공적 탈출에 대해 글을 썼지만 사실과 다르거나 근거가 없는 이야기들이 종종 발견이 된다. 내가 지금부터 기록하는 내용은 그들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 목격한 사실, 그리고 객관적 분석에 근거한 서술이다.

기사본문 이미지
납북된 영화배우 최은희 씨(오른쪽)가 김정일(왼쪽)
주최의 오찬장에서 뱀술을 들여다보고 있다./출처:
신상옥·최은희 비록
신상옥 감독의 본명은 신태익이다. 함경북도 청진 태생(1926년 10월18일~2006년 4월11일)으로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영화계의 거장이었다. 성격이 고지식하고 강한 개성의 소유자로 천재적인 예술 감각을 구사했던 인물이다.

심훈의 장편소설을 각색해 1961년 개봉한 영화 ‘상록수’는 신상옥 감독과 최은희 주연으로 제작됐다. 朴正熙 대통령이 이 영화에서 영감을 얻고 ‘새마을 운동’을 시작했다는 일화도 있다. 그만큼 박 대통령과 신 감독은 끈끈한 인간관계를 유지했으나 견해 차이에 있어서는 서로 양보를 못하는 고집불통의 적수이기도 했다.

나. 박 대통령과 신 감독 사이를 불편하게 만든 사건이 하나 발생했는데, 그것은 1970년 11월13일 오후 2시에 서울 평화시장 앞길에서 평화시장의 봉재공장 재봉사로 일하고 있던 전태일이 분신자살한 사건이었다. 그는 혹사당하는 저임금 노동자들의 분노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22세의 젊은 나이에 목숨을 던졌다. 박 대통령은 그 당시 대한민국의 경제부흥을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었지만, 전후복구도 다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나라의 경제는 아직도 걸음마의 수준이었다. 사회의 구석구석에 비리와 부조리가 지병처럼 도사리고 있을 때인데 전태일의 분신자살은 노동쟁의와 노사분규의 촉매제가 됐다. 그런데 이 사건을 주제로 신 감독이 영화를 제작하겠다고 나섰다. 그것은 불난 집에 모닥불을 피우는 격이 되었다. 박 대통령은 신 감독을 설득하고 영화제작을 만류하려 했으나, 서로 팽팽하게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국 박 대통령은 신 감독의 영화제작 영업 감찰을 박탈하고 말았다.

다. 그 무렵 신 감독은 신인 여배우 오수미와 1973년부터 깊은 관계를 맺고, 아들 상균과 딸 승리를 낳았다. 불임체질의 최 여사와는 1976년 이혼을 했다. 신 감독은 국내에서 영화제작활동을 할 수 없었고 최 여사는 안양 예술고등학교를 세워 운영하고 있었으나 두 사람 모두 은행 빚이 누적되어 고전하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이 슬럼프에 빠져있다는 소식을 북한의 김정일이 들었다. 김정일은 영화광으로서 수천 개의 영화필름을 소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한국의 최고 영화인으로 알려진 신상옥과 최은희를 北으로 납치해갈 생각을 품게 됐다.

김정일의 야심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1972년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 평양을 드나들며 남북화해 무드가 조성되고 있을 때 北에서는 1972년 5월 부수상 박성철이 김일성 밀사로 서울에 왔다. 그가 돌아갈 때 중앙정보부는 흑백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필름을 선물로 주었다. 그가 평양에 돌아간 후 김정일은 이 영화필름을 보고 신상옥과 최은희를 북으로 데려오라고 대외연락부 부부장 임호군에게 지시했다. 북한의 영화는 노동당의 선전선동을 위한 도구로 제작되기 때문에 딱딱하기 그지없고 예술영화를 제작할 만한 사회적 정신구조나 인재가 없는 상황에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같은 애틋하고 순결하며 한국적인 순수 애정영화를 본 김정일의 마음이 들뜨기 시작한 것이었다. 김정일은 당시 노동당의 선전선동담당 비서였다.

라. 최은희의 본명은 최경순이고 1926년 11월20일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1947년에 영화 ‘새로운 맹세’를 통해 영화배우로 데뷔했다. 6·25사변 때에는 北으로 납치되어 청천강 부근까지 끌려갔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하는 고초를 겪었다. 1954년 영화감독 신상옥과 결혼하고 1960년대~1970년대 영화계 황금기에 독보적인 인기를 끄는 배우로 활약했다. 출연 작품인 ‘성춘향’, ‘상록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빨간 마후라’, ‘벙어리 삼룡이’에서 보여준 그녀의 한국적 미모와 연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러나 그의 영화보다도 더 영화 같은 파란만장의 생애를 통해 또 하나 불행의 그림자가 그를 덮치기 시작했다.

1976년 신 감독과 이혼하고 안양에서 고생하고 있을 때, 1978년 정월 연초에 홍콩에서 이상희라는 교포(당시 52세)가 최은희를 방문했다. 당시 최 여사를 포함해 한국사람 그 누구도 이상희가 북한이 홍콩에 심어놓은 대남공작원이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이상희는 최 여사에게 접근해 홍콩의 유력한 재벌가가 운영하는 홍콩의 영화사가 ‘양귀비’라는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최 여사와 합작하기를 원하며, 일이 잘되면 홍콩 영화사가 운영하는 현지 예술학교와 최 여사가 운영하는 안양 예술고등학교가 자매결연을 할 수 있다고 진언했다. 이 말을 들은 최 여사는 하나님이 자기를 도와 살 길을 열어주신다고 믿고, 아무런 의심 없이 기쁜 마음으로 이상희를 따라 1월11일 홍콩에 도착해 ‘푸라마 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 그러나 자신을 만나기를 원한다는 재벌가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상희의 말에 의하면 그분이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 출타 중인데 2~3일 내로 돌아온다고 했다.

마. 1월14일 저녁 늦게 이상희가 급히 와서 지금 그 재벌가가 돌아왔는데 당장 최 여사를 만나기를 원한다며 그가 타고 온 자가용에 최 여사를 싣고 호텔을 떠났다. 최 여사는 핸드백 하나만 들고 따라가며 기뻐서 정신이 없었고 흥분상태에 있었다.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니 “해변가에 있는 큰 호텔에서 그분이 기다리고 계시다”고 했다. 차가 ‘완차이(Wan Zai)’를 지나 나무가 우거진 어느 고갯길을 통과할 때, 이상희를 따라와서 동승했던 그 재벌가의 비서라고 하는 중년남자가 갑자기 흰 수건을 꺼내 최 여사의 얼굴을 덮고 마취시켜버렸다. 그들은 마취된 최 여사를 데리고 해변으로 가서 주변이 캄캄할 때 고속 고무보트에 최 여사를 인계했다. 고무보트는 公海(공해)로 빠진 뒤, 대기하고 있던 북한공작선에 인계했다. 그 공작선은 최 여사를 배 밑바닥 선실에 가두고 어디를 어떻게 통과해 왔는지 1월22일 밤 북한의 남포항에 도착했다. 남포항에는 김정일과 대외연락부 부부장 임호군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바. 국내에서 영화제작을 할 수 없는 신 감독은 일본, 프랑스, 미국을 돌아다니며 새로운 살 길을 찾아 헤매던 중, 홍콩에서 최은희 여사가 北으로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뼈저린 죄책감을 느꼈다. 그와 오수미와의 관계, 이혼, 재정적 어려움 등이 최 여사를 불행하게 만든 원인이라고 생각하고 홍콩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미국에서 홍콩으로 달려갔다. 홍콩에서는 신 감독이 전에 영화필름이나 촬영기자재를 구입할 때 거래하던 김00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를 찾아갔다. 그는 신 감독에게 최 여사를 구출해내는 방법을 모색해보자면서 신 감독이 홍콩에서 새로운 활동을 시작할 수 있도록 협조하겠다고 말하자 순진한 신 감독은 그대로 믿었다. 그런데 세상에 이놈도 북한의 첩자인 것을 아무도 몰랐다. 1978년 7월19일, 신상옥 감독도 최 여사와 똑같은 방법으로, 똑같은 함정에 빠졌고, 동일한 루트를 거쳐 北으로 납치되어 7월 23일 남포항에 도착하였다. 

사. 북한에 끌려간 신 감독은 저들의 집요한 세뇌공작과 설득에도 응하지 않았고, 두 번씩이나 탈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평양시 승호리에 있는 보위부 수용소에 수감되어 3년 10개월간 고생을 했다. 그는 승호리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건강이 나빠졌고 허술한 병원에서 간장 생체조직검사(biopsy)를 했는데, 소독이 잘 안된 기구를 사용했기 때문에 C-형 간염이 감염되어 향후 계속 그 병 때문에 투병하며 살았다.

그는 북한을 탈출한 뒤 후일 서울에 왔을 때에 간 이식수술을 받았으나 결국 그 병 때문에 2006년 4월11일 서울대학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고집이 센 신 감독을 설득하기가 힘들다고 느낀 김정일은 방법을 바꾸었다. 그를 바로 석방해 자신의 별장에서 최 여사와 상봉하게 했다. 그때까지 최 여사는 신 감독도 자기처럼 납치되어 평양에 와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 눈물겨운 재회를 통해 신 감독은 여생을 최 여사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겠다는 속다짐을 하게 됐다. 그들의 재회 이후 김일성과 김정일은 그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최대한 배려를 했고, 북한의 영화를 국제수준으로 창달해 줄 것을 주문했다. 그리고 그들을 자주 만나고 중요한 연회석이나 가정모임에 초청해 격의 없는 대우를 했다. 

아. 신 감독은 아주 현명한 사람이었다. 자기와 최여사가 살아남는 길은 오직 김일성, 김정일 두 독재자들의 마음에 들도록 행동해 신임을 얻은 후 운신의 자유가 확대되었을 때 무슨 일이고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저들의 요구에 따르기로 결심하고 본격적으로 영화제작 활동을 개시했다. 김정일은 ‘申(신)필름 영화촬영소’를 지어주고 자금도 노동당의 어떤 과업보다도 우선순위로 지원했다.

신 감독과 최 여사는 북한 영화예술에 새로운 바람을 불게 하였다. 모든 영화배우들이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그들을 따랐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그들의 작품을 보고 환호성을 올렸다. 인민들이 신 감독과 최 여사를 더 좋아해서 김정일이 질투를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들이 在北(재북) 기간 중에 총 17편의 영화를 제작하였다고 하니 얼마나 혹사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중에 ‘탈출기’, ‘소금’, ‘불가사리’, ‘돌아오지 않은 밀사’는 외부 세계에도 알려진 작품들이며, 특히 구한말 고종황제의 밀사로 화란의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갔다가 할복자살한 이준 열사를 주제로 제작한 ‘돌아오지 않은 밀사’는 1984년에 체코 ‘카를로비바리’ 영화제에서 신 감독이 특별감독상을 수상했다. ‘소금’은 1985년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최 여사가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그들의 작품이 국제영화제에서 각광을 받기 시작해 그들의 위상이 높아졌고 김 부자의 신임과 배려가 더 좋아졌다.

자. 북한의 신상옥, 최은희에 대한 감시는 계속 철저했다. 절대로 부부가 동반하는 외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최 여사가 부다페스트에서 담석 수술을 받을 때에도 혼자 다녀왔다. 신 감독이 부다페스트와 비엔나와 프라하에 자주 갔지만 늘 경호감시원이 따르는 단독 여행이었다. 그런데 1984년 런던 국제영화제에 신 감독과 최 여사가 처음으로 부부 동반으로 참석하게 됐다. 그때 한국에서는 영화배우 남궁원과 김지미가 참석했는데 그들이 신 감독과 최 여사를 보고 너무 반가워서 인사를 했다.

신 감독과 최 여사가 어찌나 쌀쌀맞게 그들을 대했는지 김지미는 섭섭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北에서의 생활이 어떠냐’고 질문하자 그 두 사람이 “우리는 위대한 수령님의 따뜻한 배려로 세상에서 부러울 것이 없이 잘 지내고 있으며, 영화제작 활동도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黨(당)의 지원을 받고 있고 최대한으로 자유분방한 예술 활동을 할 수 있는 곳은 지구상에서 북조선 공화국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남궁원과 김지미에게 이상한 생각을 품고 자기들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경계했다. 이처럼 엄청난 거짓말을 해 놓고 신 감독은 속으로 울었다. 자기의 조국을 배신하는 말과 행동을 뻔뻔스럽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짧은 한 토막의 연기로 그는 후에 많은 것을 얻어내게 됐다.

그들을 따라온 4명의 북한 경호감시원들이 평양에 가서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김일성 부자는 신 감독과 최 여사가 이제 완전히 자기들의 사람이 되었다고 믿게 되었다. 그러나 저들의 의심과 감시가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었다. 한편, 한국에 돌아온 남궁원과 김지미는 런던 영화제에 가서 신 감독과 최 여사를 만났던 이야기와 저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김일성의 사람이 되었는지를 언론에 퍼뜨렸다. 독자들은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그러나 저들의 진심을 몇 사람이나 눈치 챘을까. 이 사건 이후 김일성 부자가 신 감독과 최 여사를 대하는 태도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자유스러운 부부동반 해외여행이 허락되었으며 김정일은 북한이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 개설한 금별은행에 230만 달러를 신상옥 구좌로 예치해 놓고 영화 사업과 제작 기자재 구입에 마음대로 사용하라고 선심을 베풀었다. 이때부터 신 감독은 본격적으로 탈출계획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계속>

[ 2014-10-15, 14:0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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