普天堡(보천보) 전투와 가짜 金日成의 實體(上)-36
前 CIA 요원 마이클 리의 現代史 秘話-36/보천보 전투로 日人이 피해를 본 것은 주재소 순사(순경) 1명이 부상당하고, 주재소에서 잠자던 일본 순사의 두 살짜리 딸이 유탄에 맞아 사망한 것, 우연히 거리에 나왔던 일본인 음식점 주인이 총에 맞아 죽은 것 등을 제외하고 피해자가 모두 우리 韓人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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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는 우리 민족의 시련기
  
  우리 민족은 일제식민 통치하에서 36년 동안 고난에 시달렸고, 해방된 이후에도 공산주의 사상으로 시련을 겪어야 했다. 거의 1세기 동안 지구상에 돌풍처럼 휩쓸고 지나간 공산주의 사상은 그 바람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의 문명을 파괴했고, 북한은 아직도 그 시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신음하고 있다. 1919년 독립만세 사건 이후 좌절과 실의에 빠진 우리 민족에게 역사의 악순환으로 공산주의 사상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프롤레타리아 해방’, ‘약소민족의 해방’과 같은 구호는 나라를 빼앗긴 사람들에게 상당한 매력이 있었다. 1925년에 드디어 서울에 조선공산당이 조직되었고 이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한 사람들은 대부분 이념적 구조나 이론을 이해하거나 소화하지도 못한 채 오로지 투쟁 구호와 행동방침만을 앞세우고 뛰어들었다.
  
  불과 3년에 걸친 일본의 대대적 검거로 조선공산당은 와해가 되고 8·15광복 때까지 재건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활동은 국내에서 지하로 들어갔다. 그 주역들은 朴憲永(박헌영), 吳琪燮(오기섭), 朱寧河(주영하), 李康國(이강국), 金三龍(김삼룡), 李舟河(이주하), 李承燁(이승엽), 許成澤(허성택) 등이다. 한편, 조선공산당 滿洲總局(만주총국)에 가입했던 韓人(한인) 공산주의자들은 중국공산당의 一國一黨(일국일당) 원칙에 따라 중국공산당 滿洲省委員會(만주성위원회) 산하 각급 조직에 가입했고, 그 이후 만주에서는 韓人들의 독자적인 공산당 조직이 영원히 사라졌다. 국내에서는 지하에 들어갔던 공산당이 8·15광복 이후 朴憲永을 주축으로 재건됐고, 1946년 11월에 남조선노동당(남로당)으로 바뀌었다.
  
  나라를 빼앗겼을 때 우리 민족은 국내·국외에서 여러 형태로 독립투쟁을 전개했다. 특히 민족주의자들의 독립투쟁은 3·1운동을 계기로 새로운 박차를 가하게 됐다. 후세에까지 그 용명을 떨친 인물로는 만주에서는 金佐鎭(김좌진) 장군, 洪範圖(홍범도) 장군, 그리고 시베리아에서는 金日成(김일성) 장군을 거론할 수 있다. 물론 이때의 金日成 장군은 본명이 金光瑞(김광서)이며 북한의 金日成이 아닌 별개의 인물이다.
  
  지금부터 언급되는 김일성은 진짜 김일성인 金光瑞가 아니라 가짜 김일성이다. 북한의 김일성(본명 金聖柱)은 가짜 김일성 가운데 한 사람이다. 만주에서의 항일투쟁은 수십만의 韓人동포들을 기반으로 여러 지역에서 독립군이 활동했으나 대부분이 上海(상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군대임을 표방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나 민족주의자들의 항일투쟁은 고난에 찬 가시밭길이었으며, 내외의 역사·정치적 여건에 따라 여러 형태의 도전을 받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웠던 일은 1925년 전후해 중국의 韓人사회에 공산주의 운동이 침투되어 조국광복을 일념으로 하는 민족주의자들과 세계 공산화 또는 중국 공산화를 궁극의 목적으로 하는 공산주의 혁명 노선과의 대립이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민족주의자들의 활동은 만주지대에서 소강상태에 들어갔고 중국 본토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변으로 행동 무대를 옮겼으나 당시의 역사적 여건은 너무나 복잡했다. 1930년을 전후해 江西省(강서성)을 중심으로 활발해진 중국 공산당 세력은 蔣介石(장개석)이 이끄는 국민정부로 하여금 새로운 對共戰線(대공전선)을 형성하게 했고, 1931년 9월18일 일본이 滿洲事變(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 땅을 강탈함으로 중국의 항일투쟁은 너무 힘에 겨웠다.
  
  그러나 1943년 11월 카이로 선언에서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와 영국 수상 처칠, 그리고 중국총통 장개석이 합의한 對日戰略宣言(대일전략선언)은 한반도를 자유 독립국가로 일제에서 해방시키겠다는 약속이었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보장한 첫 번째의 역사적 공약이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장개석 총통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의 깊은 교감, 그리고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자들의 집요한 항일투쟁이 있었다.
  
  민족주의자들은 해방 후 조국에 돌아와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참여했다. 임정의 초대 대통령을 지냈고 歐美委員部(구미위원부) 책임자였던 李承晩은 미국에서, 金九(김구), 李始榮(이시영), 金奎植(김규식), 李範奭(이범석), 李靑天(이청천), 趙素昻(조소앙), 申益熙(신익희), 金弘壹(김홍일), 崔用德(최용덕) 등 임시정부와 광복군(光復軍) 요인 수십 명이 중국에서 돌아왔다.
  
  그들의 항일투쟁 전통과 정신이 1948년에 민주공화국으로 새로 세워진 대한민국에 계승되었으며, 인적 요소라든가 國號(국호)의 동일성뿐만 아니라 1948년 7월17일 공포된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서도 ‘기미년 3·1운동으로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자주독립 국가를 재건’했다고 명시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이렇듯 선열들의 고귀한 피와 불굴의 애국정신을 바탕으로 세워졌으며 UN이 승인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적인 국가로 탄생했다.
  
  국내외 공산주의자들의 활동
  
  1931년 9월18일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중국 내에서는 국민정부나 중국 공산당 모두 항일 무력투쟁에 박차를 가했다. 1933년에는 중국공산당이 동북인민혁명군을 조직해 많은 韓人 공산주의자들이 가담했다. 1936년 동북인민혁명군은 동북항일연군으로 개칭 및 개편되었고, 第1路軍(제1로군)은 東南滿洲(동남만주)에, 第2路軍(제2로군)은 東北滿洲(동북만주)에 배치되고, 第3路軍(제3로군)은 北滿洲(북만주)를 작전지역으로 했는데 총병력은 약 2000명 정도였다.
  
  그들에게는 엄격한 軍律(군율)이나 기강이 없었고, 중앙보급이 없었던 관계로 산림지대에 野營(야영)하면서 항일투쟁보다는 인민약탈이 더 빈번했다. 결국 인민의 敵(적)으로 전락해 1940년경에는 동북항일연군이 붕괴되어 약 300명이 蘇聯(소련)의 블라디보스토크 지역으로 이동했다.
  
  이외에도 韓人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의 한 줄기는 중국 국민정부 관할 지역인 華北(화북)에서도 발생했는데, 延安(연안)에 있던 중국 공산당의 韓人 간부들을 중심으로 1941년 1월 조직된 華北朝鮮靑年聯合會(화북조선청년연합회)가 바로 그것이다. 이 조직은 1942년 7월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으로 발전했다. 조선의용군은 韓人들을 규합하고 중국공산당의 第8路軍(제8로군) 산하 각 부대에 배치되어 직접 항일투쟁에도 참가하고 많은 전사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들의 항일투쟁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민족주의자들의 그것에 비해 소규모에 그쳤다.
  
  이들을 우리는 延安派(연안파)라고 하고 연안파의 주역들은 金枓奉(김두봉), 武亭(무정), 崔昌益(최창익), 許貞淑(허정숙), 金昌滿(김창만) 등이다. 연안파의 주요 인물들은 해방 후 북한에 들어가 북한정권 수립에 동참했다. 그러나 훗날 북한의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 계열의 업적을 부각하고 역사를 날조·미화하는 과정에서 걸림돌이 되는 연안파, 소련파, 국내파, 갑산파를 反黨宗派(반당종파)로 몰아 모조리 숙청했다. 1953년 봄 국내파 박헌영·이승엽 등을, 같은 무렵에 소련파 허가이·박창옥 등을, 1956년 여름에는 연안파의 김두봉·최창익 등을, 그리고 1967년에는 갑산파의 박금철·이효순 등을 숙청했다.
  
  동북항일연군과 보천보전투
  
  1936년 중국 공산당 산하 동북인민혁명군은 동북항일연군으로 개칭 개편되고 예하 第6師(제6사)의 師長(사장)은 金日成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성명서나 문헌을 살펴보면 중국 공산당의 지휘하에 있던 이들의 목표는 일제를 몰아내고 東北失地(동북실지)를 회복하는 데 있었으며, 코민테른 지령에 의한 국제 공산주의 노선이나 중국 공산당의 排日(배일)정책에 보조를 맞췄다. 따라서 이들의 목표는 조선독립이나 민족해방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거의 韓人만으로 구성된 第6師 같은 부대는 중국 공산당의 外人部隊(외인부대)에 지나지 않았다.
  
  第6師는 長白縣(장백현) 오지인 密營(밀영)을 두고 활동했다. 문제의 김일성 부대(第6師)는 항일투쟁보다는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長白縣 일대와 甲山郡(갑산군) 일대에서 주로 韓人 농촌을 기습, 약탈, 방화, 살인, 납치를 자행했다. 이들은 공산당 특유의 극단적이고 잔인무도한 만행으로 당시 그 지역 사람들을 극도로 괴롭혔다. 그때나 지금이나 공산주의자들의 일관된 특징은 공산주의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 단체, 주장을 무조건 敵(적)으로 취급하고 무자비한 투쟁의 대상이며 敵과 대결하는 방법은 언제나 잔인무도한 폭력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의 敵은 계급투쟁의 대상이 되는 지주, 부르주아, 지식인, 자본주의, 공산주의를 거부하는 국가 등이며, 심지어 항일투쟁에서도 계급혁명에 반하여 민족해방과 독립을 지상목표로 투쟁하던 민족주의자들도 敵으로 간주했다. 일례로 1930년 1월24일 민족주의 항일투사였던 金佐鎭(김좌진) 장군이 공산주의자에 의해 피살된 사건을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공산주의자들은 항일투쟁에서도 민족주의자들과 합류하지 못하고 끝까지 자신들의 길을 갔다. 그 결과 오늘날 한반도는 분단의 비극과 민족상잔의 피비린내 나는 체험을 해야 했으며 아직도 고난을 겪고 있다.
  
  普天堡(보천보)와 그 일대의 韓人 동포들을 공포와 비탄 속에 몰아넣었던 보천보 습격사건의 자초지종은 아래와 같다.
  
  1937년 5월21일 동북항일연군 소속 第4師 부대가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 보태리 上興慶水(상흥경수) 부락을 기습해 대대적인 약탈 납치를 자행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국경 일대의 일본 경찰이 총동원되어 第4師 부대 추격에 나섰다. 보천보 작전을 위해 사전에 현지답사를 끝내고 작전준비를 했던 김일성은(이 인물은 북한의 김일성이 아님) 上興慶水 사건 때문에 보천보에 치안 공백이 형성된 틈을 이용, 1937년 6월2일 대원 약 90명을 거느리고 밀영을 떠나 다음날 강을 건너 보천보에 접근했다. 김일성은 6월4일 밤 대원들을 6개 조로 편성하고 부락의 전화선을 절단한 후 기습을 개시했다.
  
  당시 보천보는 韓人 280여 호, 日本人 26호, 中國人 2호, 합계 300여 호의 면사무소 소재지로 주재소(경찰 파출소), 보통학교(초등학교), 소방서, 우편소 등이 있는 비교적 큰 부락이었다. 30분가량 집중사격을 가한 후에 주재소 무기고를 부수고 경기관총 1정, 장총 6정, 권총 2정, 실탄 1170발과 기타 물품들을 탈취했다. 그리고 농사시험장과 소방서 등을 약탈하고 면사무소, 학교, 우편소 등을 방화했다. 시가지에 들어가서는 주택, 상점, 병원 등을 털어 현금과 물자, 의료 기기와 약품, 곡물과 의류 등을 닥치는 대로 약탈한 뒤 철수했다.
  
  第6師가 항일전투부대라면 당연히 일본의 관서나 일본 경찰, 혹은 일본군 등을 상대로 작전을 해야 했다. 절대로 동포들에게는 피해를 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작전에서 일인이 피해를 본 것은 주재소 순사(순경) 1명이 부상당하고, 주재소에서 잠자던 일본 순사의 두 살짜리 딸이 유탄에 맞아 사망한 것, 우연히 거리에 나왔던 일본인 음식점 주인이 총에 맞아 죽은 것 등을 제외하고 피해자가 모두 우리 韓人들이었다. 그들의 작전 목적이나 방법은 물자 약탈이 목적이었지 항일전투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1937년 8월23일에 김일성 부대는 만주 임강현 5道溝(도구)에 있는 채목장을 습격해 인부 5명을 납치했다. 9월3일에는 갑산군 운흥면 중평리에 있는 광산 세 개를 털어 사금과 금품을 강탈했다. 보천보 사건과 그 후 잇달아 벌인 약탈로 혜산경찰서는 第6師에 대한 비상경비 태세에 들어갔다. 김일성과 내통하는 국내인사들을 색출하고 權泰國(권태국), 金錫泰(김석태), 趙信濟(조신제) 등을 체포해 第6師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혜산경찰서는 60명의 특별 수사반을 조직해 장백현에 파송하고 김일성을 지원하는 조직망 11명을 체포했다. 그 결과 국내에서 각종 공산당 조직에 관련됐던 162명, 장백현에서 60명, 모두 222명이 체포됐다. 그 후 9월과 10월에 朴達(박달), 金成演(김성연), 李龍述(이용술) 등 279명이 더 체포되고 1·2차 검거에서 체포된 자가 모두 501명이나 되었다. 이것을 역사에서 惠山事件(혜산사선)이라 한다.
  
  혜산사건 피의자들의 심문조서에는 국경지대를 소란케 했던 第6師長(제6사장) 김일성의 신원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다. 그는 당시 나이 36세(1901년생)로 모스크바 공산대학 출신, 함경남도 태생이었다. 이 사람은 절대 북한의 김일성(1912년생)과 동일 인물이 아니었다.
  
  보천보 사건이 발생 5개월 후 1937년 11월13일 그가 만주의 撫松縣(무송현) 楊木頂子(양목정자)에서 부하 약 100명과 함께 휴식하고 있을 때, 일본의 滿軍(만군) 보병 제7단 제1영의 포위 공격을 받고 부하 8명과 함께 사살됐다. 쓰러진 김일성의 시체는 항일연군 측이 회수하지 못했고 인근 주민들이 그의 얼굴을 보고 김일성이 틀림없다고 확인했다. 1937년 11월18일자 <京城日報> 조간 7면에 그의 사망 기사가 “공산비적 김일성이 사망, 朝滿국경지대 주민들이 이제 근심을 덜었다”고 보도됐다.
  
  <계속>
[ 2014-11-06, 17:0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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