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伊桑을 어떻게 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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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작곡가 尹伊桑이 작곡한 고교 교가를 부르면서 자랐다. 그가 동백림간첩단 사건의 핵심 인물로 지목되어 독일에서 붙들려와 와서 징역 10년의 선고를 받은 뒤에도 그가 작곡한 고교 교가는 계속 불리워졌다. 이런 일이 통영 출신 尹伊桑이 조국이라고 믿었던 북한에서 가능했을까. 대한민국엔 '예술엔 국경이 없다'는 말이 통했다. 동시에 '예술가에겐 국경이 있다'는 말도 통했다. 대한민국이 법치국가였으니까. 북한은 尹伊桑의 예술적 명성을 對南 공작을 은폐하는 우산으로 이용했다. 그는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다. 진정한 전향과 반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최근 그를 기념하는 행사가 한국내에서 열렸다. 기념해야 할 것은 그의 예술이지 그의 국가반역적 행위는 아닐 것이다.
  국정원이 동백림 사건을 재조사하고 있다. 동백림 사건 수사에서 독일의 주권을 정보부가 침해했고 가혹행위가 있었던 것은 사실일 것이다. 이 사실이 尹伊桑에게 면죄부가 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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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 글은 [근대화 혁명가 박정희 전기: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서 인용.
  
  
  
  1. 1959년 6월 하순, 유학생 趙明勳(조명훈)이 林錫珍의 기숙사로 찾아왔다. 구수한 전라도 억양에 술을 좋아했던 趙明勳은 지난 1988년 5월 북한 방문 에 이어 한국에 들어와 북한 방문기를 펴낸 바 있으며 이때 북한 사회를 통 렬히 비판, 독일 교민사회에서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林錫珍을 만난 趙明勳은 이렇게 털어 놓았다.
  
  『하루는 尹伊桑 선생이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날 오라고 전화를 했어. 자가 용이 생겼다는 거야. 그 어려운 형편에 차를 어떻게 샀을까 궁금했지. 같이 드라이브를 하자고 하더라고. 겸사 겸사 베를린에 갔더니 날 태우고 여기 저기 다니다가 차를 세웠는데 거기가 東베를린 도로데아슈트라세 4번지의 북한 대사관이야. 尹선생은 날더러 「趙君. 여기가 북한 대사관인데, 이 사 람들과 만나 얘기를 나눠보면 좋을 거야. 같이 들어가세」하고 날 끌고 들 어갔지. 조금 있다가 尹선생은 가버리고 나 혼자 남은 거야. 그런데 거기 대접 한 번 후했어. 밤새 술을 마실 수 있었으니까. 만나보니 다 같은 우리 민족이더라고. 尹선생이 생활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 와주고 있는 것 같더라니까. 하긴 尹선생은 수입이 아무것도 없는데 車도 사준 것 같았어. 자네도 한 번 가봐』
  
  당시 독일 교민사회에서 한국 유학생이 자가용을 몰고 다닌다는 것은 꿈 같 은 시절이었다. 趙明勳은 북한 대사관 주소를 적어 林錫珍에게 건네주었다 . 林錫珍의 회고.
  
  『東伯林 사건의 원점은 尹伊桑에서 시작되고 있었던 겁니다. 그가 바로 첫 통로를 연 사람이었고 趙明勳도 이 사람 밑에 있었으며 나도 거기에 끌려 들어간 사람이었습니다. 尹伊桑은 1956년에 파리에 유학와 이듬해엔 베를린 으로 유학지를 옮겨 버렸습니다. 북한 대사관이 지척이었지요. 프랑스의 李應魯 화백은 부인 때문에 순진하게 북한에 말려 든 경우였습니다. 그때 독일에 유학 온 학생 대부분은 가난했습니다. 북한은 우리보다 경제사 정이 좋아 유학생이 찾아가면 술도 대접하고 돌아 올 때면 생활에 보태 쓰 라며 돈도 집어주는 겁니다.
  
  당시 100달러면 우리 같은 유학생들에게는 아 주 큰 돈이었으니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데 거의 결정적이었습니다』
  
  2. 尹伊桑은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 일제시대에 한국과 일본에서 음악교육을 받 았다. 통영여고, 부산사범학교, 부산고에서 음악교사로 재직하다 1954년부 터 서울의 여러 대학에서 강사생활을 하던 중 1955년 「현악 4중주 1번」과 「피아노 3중주곡」으로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고, 1956년 프랑스 파리 음악원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가 東베를린 북한 대사관과 가까운 베를린 대 학으로 유학지를 옮긴 것은 1957년, 이때 이미 북한과 연계되었다는 것이 당시 수사관과 현지 교민들의 증언이다. 1959년 베를린 음대를 졸업할 무렵 그는 이미 독일 사회에서 유명해져 있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 음악가이 지만, 북한이 「길렀다」고 자부하는 음악가이기도 하다.
  
  1967년 6월, 중앙정보부에서 바라본 尹伊桑은 여러 모로 거물이었다. 현지 에서 음악가로서 이미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내사 단계에서부터 그의 이름은 항상 계보 맨 위에 위치해 있었다. 1967년 6월17일, 尹씨는 베를린 슈판다우의 한 아파트에서 광복절을 즈음한 대통령의 초청이라는 中情요원 들의 말에 속아 서울로 拘引되었다. 尹伊桑은 이문동 중앙정보부 본청 지하 실에서 조사를 받았다. 당시 中情 수사과장 李龍澤의 증언-.
  
  『尹伊桑은 이미 1960년경부터 북한을 드나들었고, 北쪽에서도 그의 사회적 명성이 지하당 공작에 유리하다는 판단하에 그를 위해 끔찍하게 지원해 주 었던 것 같습니다. 예술만 알던 사람이니 정치적인 관계를 해석하는 데 서 툴러 그들과 엮이게 되었을 거란 짐작은 갔지만, 그 한 사람으로 인해 수십 명이 북한 공작에 이용됐다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었습니다』尹伊桑은 독일 작가 루이제 린저가 쓴 「尹伊桑-루이제 린저와의 대담(상처 입은 龍)」에서 자신이 북한 사람을 처음 만난 것은 1959년의 일이고 북한 을 처음 방문한 것은 1963년이라고 말하고 있다.
  
  尹伊桑은 본에 있던 한국 대사관에 유인된 직후 라디오를 크게 틀어 놓는 소음 고문을 받았다고 「상처입은 龍」이란 책을 통해 밝히고 있다. 서울에 와서도 상상을 초월하는 모진 고문 끝에 「나는 북한에 봉사하는 공산주의 자이다」라는 자백을 했다고 한다. 구타와 고문을 견디다 못해 자살을 시도 했고, 재떨이로 자신의 머리를 내리쳐 중상을 입었고 오랫동안 입원 치료를 받아야 했다는 것이다.
  
  李龍澤 당시 수사과장은 『고문은 없었다고 믿는다. 저 사람들이 법정 투쟁 을 하기 위해 고문받았다고 허위 주장을 했던지, 실제로 나 모르게 수사관 들이 고문했을 가능성은 있다』고 했지만, 현장에 그 자신이 항상 있었던 것은 아니어서 이 증언은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東伯林 사건에 연루되어 조사받은 194명 중에는 고문과 관련하여 두 부류로 나뉘어 있었다. 林錫珍과 그의 동생들처럼 당국에 자수하여 조사에 순순히 응했던 사람들과 청와대 등 상부의 요인과 관계있는 사람들은 거의 고문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반면, 尹伊桑처럼 혐의를 많이 받은 사람들일수록 고 문의 강도가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尹伊桑의 경우, 재떨이 자해사건은 요모조모로 알려져 왔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東伯林 사건의 수사 속도가 늦춰지는 계기가 되었다. 전후관계를 李龍澤 당시 수사과장의 증언으로 再조합해 보았다.
  
  李과장은 그날 담당 계장이 尹伊桑에게 崔德新 대사에 관한 심문을 하는 장 면을 관찰하다가 올라와 2층 야전침대에서 눈을 붙이고 있었다고 한다. 새 벽에 담당 계장이 흔들어 깨웠다.
  
  『왜?』
  
  『尹伊桑이가…』李과장은 직감적으로 尹伊桑이 죽은 줄 알았다고 한다.
  
  『그는 주범이었습니다. 입구에는 헌병 둘을 배치해 두고 있었는데 담당 계 장이 화장실 간 사이에尹씨는 책상 위에 있던 네모난 사기 재떨이를 깨 자 기 머리 오른쪽을 몇 차례나 찍었습니다. 계장의 보고에 놀라서 뛰어내려가 보니 4평 정도 되는 취조실 바닥이 피로 물들었을 정도로 많은 피가 흘렀 습니다』
  
  이미 尹伊桑은 후송되고 있었고 벽에는 손가락에 피를 묻혀 쓴 글이 있었다. 「崔德新은 결백하다」
  
  李과장은 현장보존을 지시하고 사진을 찍어 두었다고 한다. 1999년 9월19일 MBC 텔레비전에서 방영된 「이제는 말할 수 있다-끝나지 않 은 東伯林 사건」에서 尹伊桑의 처 이수자는 이런 증언을 했다.
  
  『…피가 흘러서 흐르는 걸 갖다가 손가락에 찍어 벽에다 「우리 아이들에 게 아버지는 간첩이, 간첩이 아니다」라고 쓰고…』
  
  다시 李龍澤 당시 수사과장의 입장으로 돌아가 본다. 그는 즉시 尹伊桑이 후송된 청량리 파티마 병원으로 달려갔다. 의사가 면도칼로 尹伊桑의 머리 털을 깎고 있었다. 尹씨의 손과 발은 침대에 묶여 있었다. 李과장과 尹씨의 대화.
  
  『尹선생, 정말 죽고 싶어요?』
  
  『내 자신을 저주했습니다. 저는 참 어리석은 놈입니다』
  
  『죽는다고 일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내 종교는 불교입니다. 자살도 살인입니다. 살고 싶습니까』
  
  『예, 살고 싶습니다』 의사는 『생명에는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自殺 미수가 아니라 自害로 보입 니다』라고 소견을 말했다.
  
  이 사건으로 尹伊桑에게 강제수사를 할 입장이 못 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외교적인 압력이 가해지기 시작하고 정보부에서의 구속기간 20일이 만료되 어 감에 따라 증거 포착에 많은 애로가 따랐다. 이런 요인들이 이 사건을 未完의 수사로 만들었다고 한다.
  
  尹씨는 1967년 말, 제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968년 제2심에서 15년 징역형으로 감형처분받고 1969년 제3심에서 10년 형으로 다시 감형받았다 . 이 해 2월 尹씨는 형 집행 정지를 받고 출감해 서울에서 약 1개월간 머물 다 독일로 돌아갔다.
  
  당시 독일 정부와 세계적인 예술가들이 그의 석방을 위해 노력했고 이면에 서는 북한의 공작도 한 몫을 했다. 그는 이러한 정치 외교적 협상의 결과로 다시 독일로 돌아간 것이다.
  
  1995년에 사망한 尹伊桑은 東伯林 사건 이후 한국땅을 한번도 밟지 않았지 만 북한은 여러 번 방문하고 金日成과도 만나는 등 北측과는 활발하게 접촉 했다. 북한은 수시로 尹伊桑 음악제를 개최하는 것은 물론, 1984년에는 尹伊桑음악연구소를 설립해 그의 음악을 집중 연구하고, 그 자신도 북한에 몇 달씩 체류하면서 교향악단과 합창단을 지도하기도 했다.
  
  
  
  
  
  
  
[ 2005-03-29, 23:2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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