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유목민으로 돌아 가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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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金弼圭(KPK 통상 대표)
  
  
  북한산(北漢山)의 영봉(靈峰)인 보현봉(普賢峰) 기슭 평창동(平倉洞)에 저희 가족이 보금자리를 틀고 살아 온 지 어언간 사반세기가 흘렀습니다.
  외국인들이 서울에서 가장 부러워한다는 북한산(삼각산) 자락의 평창동, 풍수지리를 생업으로 하는 地官들의 설명에 의하지 않더라도 보현봉을 든든한 주산(主山)으로, 좌측으로(左靑龍) 조선왕족 도읍지의 뒷산인 북악산(청와대 뒷산)과 우측으로(右白虎) 겸재의 걸작 인왕재색도의 인왕산을 좌우로 거느리고 멀리 관악산을 안산(案山)으로 마주보며 그 앞으로 서울의 젖줄인 한강이 유유히 흐르는 말 그대로 명당중의 명당이 바로 평창동입니다.
  
  그러나 나 자신은 풍수지리의 학문적 체계를 세운 전 서울대 교수 최창조님의 말처럼 “자신이 바라보아서 정이 가는 곳, 주변 환경이 깨끗하고 답답하지 않은 땅이 명당”이라는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이라 평창동을 선뜻 저희의 보금자리로 택했고, 한 가지 영향을 받았다면 제가 30초반부터 약 30여 년간을 회사일로 방문한 스위스 사람들이 좋은 주거공간을 hilly한 언덕배기에 잡는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런데 평창동에 대하여는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입에 회자(膾炙)되는 속설이 있으니 “평창동은 기(氣)가 너무 강해서 사업하는 사람에게 안 맞고 문화예술인들에게 잘 맞는 터”라는 것입니다.
  과학적 근거가 없는 낭설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 사람 저 사람에게서 심심치 않게 같은 이야기를 듣다보니 적잖이 신경을 쓰며 살아왔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평창동에서 살아온 내 인생에서 가장 활동적이고 소중했던 지난 25년 동안 가족들 모두 건강했고 아이들도 뜻대로 잘 자라 원하는 학교에서 공부했고, 바라던 대로 자리를 잡았으며, 각각 제 가정을 꾸려 사랑스러운 손자 손녀가 4명으로 늘었고 제가 하던 회사의 일도 모두 순조롭게 운영되었습니다. 특히 부모님의 금혼식(1986년) 그리고 우리 두 아이들의 결혼식(1998년)도 모두 평창동 정원에서 치렀습니다.
  다만 처음 집을 지었을 때 전남 무안에서 상경하신 스님 한 분이 저희 집을 방문하신 후 “참 좋은 터다. 그런데 마당 한 가운데 서 있는 조선시대 석등(石燈)을 동쪽으로 약 15。만 틀어 놓아라”라고 조언하셨고 그 분의 말씀을 꼭 믿은 것은 아니지만 석등을 동쪽으로 15。 틀어 놓았습니다.
  
  후일 경주 석굴암의 본존불이 동쪽으로 15。 틀어져 앉아 있고, 경주 괴릉의 석상(石床)이 역시 동쪽으로 15。 틀어져 놓여 있으며 태평양 건너 멕시코에 있는 아즈덱 시대의 치첸이차(Chichen ltcha) 피라미드도 15。 동쪽으로 틀어져 건조되었음을 알았습니다. 경주 괴릉에서 같이 여행 중이던 유홍준 문화재청장에게 그 연유를 물었더니 그도 확실한 근거를 찾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어쨌든 저는 그 스님의 조언에서 효험을 얻은 탓인지 평창동에서 행복하게 25년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중국 무협소설의 주인공도 아닌 제게 지난해부터 “필규야! 이제 그만 하산하거라”하는 보현봉 산신령님의 말씀이 환청으로 들리는 듯하여 그만 평창동을 떠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것은 우스갯소리이고, 제가 5년 전 새로 집을 짓기 시작했을 때 서울을 방문한 아주 가까운 스위스 친구에게 그 유명한 프랑스의 Jean Michel Wilmott씨의 설계로 새로운 집을 짓고 있다고 속물근성을 보이며 자랑했다가 아주 따끔한 충고를 받고 아차 했으나 이미 집은 한창 공사 중이었습니다.
  
  그 친구의 주장인즉슨 사람은 노후(老後)에는 몽고인들 같이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Base Camp는 조그마하게 만들어 두고 서너 군데 좋은 곳에 작은 거처를 장만한 뒤 그때그때 기후에 맞는 곳으로 이동하며 살아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자신은 Zurich에 있던 집을 줄이고, 봄에는 이태리의 피렌체, 가을에는 스페인의 안다루시아, 그리고 겨울에는 St. Moritz에 있는 스키 Resort에 Time Share용 Condo를 장만하였다고 자랑했습니다.
  
  이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니 이 친구의 방식으로 내 인생의 후반전을 치루는 것이 정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내가 항상 다시 가보고 싶어 하는 경남의 통영, 풍광이 아름답고 먹거리가 다양한 전남의 담양 그리고 음악, 미술 등 좋은 문화행사를 쉽게 접할 수 있는 해외의 한두 곳에 한두 달씩 머물 수 있는 거처를 마련해 놓고 싶은 생각이 불현듯이 일어났으나 실행하지는 못한 채 세월을 보내면서 다만 최근에 Canada의 Vancouver에 일년에 약 3-4개월간 머물 장소를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저희에게 큰 변화가 생겼으니 그동안 같이 살던 아들 내외와 손자·손녀가 4-5년 예정으로 베이징(北京)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어 집에는 휑뎅그렁하게 아내와 둘이서만 남게 되었습니다. 아들아이의 장래를 위해서는 백번 잘된 일이었으나, 현실적으로는 큰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으니 저희가 집을 비우는 일년에 약 4-5개월간 집에는, 솔직히 이야기하면, 2명의 운전기사와 2명의 가정부가 살아야 하는 형편에 이르렀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이 많을 때 접하게 된 책이 바로 쟈크 아타리(Jacques Attali)의 「호모 노마드(L’homme nomade-유목하는 인간)」란 책이었습니다. 먼저 이야기한 스위스 친구의 충고를 이론적으로 정리한 것 같은 이 책을 읽는 순간 저는 모든 해답을 찾은 듯했습니다.
  쟈크 아타리는 정치·경제·인문·예술 등 학문의 경계를 넘나드는 연구와 저작으로 “파우스트에 가장 근접한 유럽 지식인”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현실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프랑소와 미테랑 불란서 대통령의 특별 보좌관으로 국가 경영을 기획했고 1990년에는 유럽 부흥개발은행의 초대 총재를 지낸 분입니다.
  
  아타리의 호모노마드 이론에 따르면 태초의 인간은 노마드(nomade-유목민)였고 그들이 불·언어·종교·민주주의·시장·예술 등 문명의 실마리가 되는 품목들을 고안해 냈으며 반면 정착민들이 발명해낸 것은 고작 국가와 세금 그리고 감독뿐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초창기 세계 역사는 노마드(유목민)와 정착민간의 투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노마드들이 끊임없는 이동 속에서 문명을 발명하고 제국도 건설했습니다.
  즉 불에서 예술에 이르기까지, 글자에서 야금술에 이르기까지, 농경에서 음악에 이르기까지, 신에서 민주주의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명의 토대는 노마드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인간은 여행을 통해서 태어난다고 할 수 있는데 실제로 全세계 60억 인구중에 10억 이상이 현대적 의미의 노마드(이민자, 해외취업자, 출장자, 여행자)이고 원시적 노마드 또한 수천만 명입니다.
  현재의 인류는 세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으니 첫째, 살아남기 위해서(생존을 위해) 이동할 수밖에 없는 부류(Infra-nomade)와 둘째, 한곳에 정착해서 사는 부류(안정된 직업을 가진 보통사람들)와 셋째, 즐기기 위해 여행하는 부유한 사람들(Hyper-nomade)이 그것입니다.
  21세기의 필연적 패러다임은 노마드입니다.
  
  현대의 사람들은 자의든 타의든 기존의 가치와 삶의 방식을 넘어 끊임없이 새것을 창조해내는 삶을 살 것입니다. 국경은 허물어지고 마지막 정착민 제국은 시장·민주주의·이슬람이란 새로운 노마드 세력 앞에서 위기에 봉착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의 방식 속에서 정착민인 동시에 노마드가 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문명의 미래는 노마디즘과 정착성 사이의 선택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들 모두를 동시에 받아들임으로써 진행될 것입니다.
  
  아타리의 또 다른 충고는 소유에 집착하지 말고 즐기면서 사는 법에 익숙해지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달팽이나 거북이처럼 짓누를 듯한 짐을 등에 지고 고생할 것이 아니라 몸을 가볍게 하고 이곳저곳을 마음대로 여행하며 즐기며 사는 것이 21세기 생활양식의 지혜로운 Model 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이상의 아타리의 노마디즘에 상당부분 공감하면서 특히 人生의 후반전을 즐기기 위해서는 반듯이 소유에 집착하지 말고 버릴 것은 과감히 버리면서 즐겁게 사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소시 적에 읽은 책에서 “중국인들은, 사람은 일생 최소 1만권의 책을 읽고 10년의 여행을 해야 한다”라는 말을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어린 생각에 책은 1만권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았으나 우물 안 개구리였던 나에게 도대체 10년을 여행할 곳은 없을 듯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나이 먹고 세계를 여행하는 기회가 많아지면서 10년도 부족하다는 생각입니다. 이제 평창동을 떠나 base camp로 작은 거처를 마련한 뒤 홀가분한 입장에서 아내와 둘이 국내외의 여행을 늘려 보다 폭넓게 음악·미술 등 문화, 문명을 접하면서 정신적 자양분을 섭취하고 경이로운 세계의 풍물도 찾아다니며 안복(眼福)도 늘려 보겠습니다.
  
[ 2005-04-27, 15:5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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