地下전쟁―제2땅굴을 이렇게 찾았다! (3) : 위성사진으로 땅굴 입구 확인
北의 흉계를 우리가 폭로할 때 부인하지 못하도록, 북한이 DMZ 중앙분계선을 넘어 2km의 남방한계선 부근까지 공사를 진행시키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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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내용은 《한미연합사 창설의 主役-유병현 회고록》 中 ‘땅굴 탐색 작전’ 부분을 발췌한 것입니다.

지하갱도 굴착의 이중적 목적

그들은 많은 인원을 투입해 비무장지대의 지하를 파 내려오고 있었다. 지상과 해상에서 사용한 여러 침투방법이 거의 실패했기에 우리에게 탐지되지 않는 획기적이고 새로운 방법을 개발하려 한 것이 틀림없었다.

적(敵)은 큰 규모의 갱도를 비무장지대 지하로 파 내려와 대부대를 비밀리에 우리 전방 경계부대 후방으로 진출시키려 했다. 북한은 수도 서울로 들어올 主접근로 상의 우리 전방 방어진지 후방에 국군의 군복차림으로 여단규모 병력을 침입시킬 경우 우리의 전후방 방어태세에 일대 혼란을 일으키게 할 수 있다고 구상하였다. 적은 후방으로 침투시킨 무장공비들에게 우리 군복을 입혀 보내면서 그 성과에 대해 이미 시험을 끝냈다.

한밤중에 일제히 봉기시킬 때는 우리 방어선에 큰 혼란을 일으키도록 계획했다. 그때는 적의 다른 주공(主攻)부대가 호응해 옴으로써 우리의 전방 방어지대를 용이하게 무너뜨릴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적이 애써 지하로 땅굴을 파 내려오려는 대전략이었다. 경보병 유격여단을 우리 후방으로 잠입시키면 그 위력은 상상을 초월한다고 김일성 자신이 굳게 믿고 있었다.

폭 4km의 비무장지대에 땅굴을 파 내려오려면 상당한 기술과 지원할 기자재가 소요된다. 아군(我軍)과 대치하고 있는 적의 사단은 물론 인민군 5군단에도 그러한 능력은 없었다. 인민무력부가 당(黨)의 대남(對南)사업 총국과 협의해 특별히 선정된 지하공사 전문기구에 일임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인민무력부 내에서는 항상 김일성 수령에게 충성경쟁을 해야 하고 대남사업은 모험주의자인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이 총괄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나는 제6사단 지역으로 파 내려오는 적 지하갱도를 전방 보병사단이 혼자 대응하게 할 수는 없다고 판단하였다.

사단에는 지하음향의 탐지와 전방경계, 만일의 경우 적이 갱도를 완성해 지상으로 출현할 때 그 출구를 봉쇄하고 침투한 적을 소탕하는 임무를 부여했다. 나의 군단은 예하 6사단을 기술 지원하는 데 전력하고 적 지하갱도의 진행방향과 그 진도를 파악하고 차후 작전 계획을 수립할 책임을 지도록 했다. 비무장지대 내의 작전이란 특수성에 감안해 유엔사와 원활한 협조를 유지해야 했다. 육군본부에는 적절한 방법을 통해 상세히 全 과정을 보고해 나갔다.

敵 땅굴 위치 분석

나는 敵이 철원지역에 땅굴 공사를 시작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첫째는 철원에서 서울로 공격해 들어오는 접근로에 큰 규모의 비밀통로를 만들려고 했을 것이다. 둘째는 제6사단 지역에 땅굴을 파 내려오는 데 양호한 지질인 암반지대를 발견한 것이다. 암반은 굴착하는 데는 힘이 들지만 받침과 갱목들을 별도로 쓰지 않아도 견고하고 유지하기에 편하다. 지형을 분석해 본 결과, 동굴을 직선으로 파 내려오기만 하면 우리의 전방 경계진지 후방으로 출구를 낼 수 있는 상황이었다. 즉 기습의 효과를 최대로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지질 역시 견고한 암반이어서 공사 중 낙반이나 붕괴될 가능성이 적고 지하수(地下水)도 적어 공사의 장애가 그리 크지 않을 것으로 판단되었다.

두더지 찾아내기

군사운용(運用)의 요결은 치밀한 사전계획과 과감한 집행 그리고 철저한 사후관리이다. 매사가 계획에서 시작하고 시행단계를 거쳐 사업의 목적달성 여부를 빠짐없이 확인함으로써 매듭짓는다. 군에서 지휘관은 명확한 계획 지침을 참모에게 부여하면서 그 책임이 시작되는 바, 당면한 비무장지대 안에 있는 땅굴의 소탕작전은 통상적인 군사작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서 그 성공여부가 나라를 지키는 데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측되었다.

敵이 비무장지대 내에서 땅굴공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다음 할 일은 그 흉악한 짓의 물증을 확보하는 것이었지만 그것을 보이지 않는 땅속에서 찾아내야만 했다. 이 작전계획의 어려움은 가시적(可視的) 상황을 설정해 계획의 지침을 하달하고 실행 상황을 감독하는 데 있었다.

예하 사단이 청음을 하고 그 위치와 공사의 진도를 알아내려 노력하고 있을 때, 상급 지휘관인 나는 가용한 기술력을 모아 제공하고 군단 나름으로 적 땅굴의 앞머리에 대한 판단을 해야 했다. 나는 땅굴을 파헤칠 때 있을 수 있는 적의 방해 행동을 봉쇄하면서 어김없이 끄집어낸 실상을 만천하에 확인시켜야 하는 등의 후속 작전 구상을 짜나가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흉계를 우리가 폭로할 때 부인하지 못하도록 가급적 비무장지대의 남쪽 멀리 유인하는 것이 바람직했다. 북한이 비무장지대의 중앙분계선을 훨씬 넘어 2km의 남방한계선 부근까지 공사를 진행시키도록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 했다.

나는 5·16군사혁명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농림담당)으로 임명된 일이 있었다. 그때 나는 연이은 가뭄을 극복하기 위하여 수자원공사로 하여금 지하에서 수맥(水脈)을 찾아내어 지하수를 뽑아 올려 활용하게 하였다. 그때 그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새로 도입한 지하굴착기 덕분이었으며 5~7cm 직경으로 100m 이상의 암반을 뚫어 내려가서 수맥을 찾아냈다. 나는 수자원공사의 굴착기를 사용해 지하 수맥 대신 적의 땅굴을 찾아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서울 외출 시에 수자원공사를 찾아가니 6·25 때 나의 부하였던 김 이사가 기술 총책임자로 있었다.

나는 그에게 최전방에 있는 우리 경계초소에 급수의 어려움을 해소하려 하니 차후에 정식으로 요청할 때 기술요원과 굴착 장비를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는 옛 상관의 요청을 흔쾌히 지원해 주겠다고 확약하였다. 이와 같은 판단과 적과의 대치 과정에서 나의 귀중한 경험은 말할 수 없이 매우 유용한 참고자료가 되었다.

나는 군단장으로 보직되기 직전까지 2년 반을 육군본부의 작전참모부장으로서 국가지하비상지휘소 건설과 운용을 담당하는 주무 참모를 했다. 이 국가지하비상지휘소는, 김일성이 1972년에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는 일방 다른 한편에서는 수없이 많은 무장공비를 전국 도처로 침투시키고 특공대로 청와대를 기습공격까지 감행하고 있을 때 적절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박 대통령은 당시 유비무환(有備無患)을 강조하며 대북(對北) 전면전에도 대처할 굳은 결심을 하고 정부와 군의 통합 전장 지휘소의 건설을 지시한 것이다. 나는 전임자의 뒤를 이어서 국가지하비상지휘소의 건설과 운용개념을 세워 완성한 바가 있다. 전시에 적의 핵과 화학전 공격을 방어하면서 외부의 지원 없이 상당한 기간 동안 유엔군과 협력하면서 국가적 총력전을 지휘 수행할 만큼 대규모 시설이었다.

또한 나는 미국 콜로라도 산중에 있는 국가지하비상지휘소를 두 번이나 시찰한 경험이 있는 유일한 한국군 장성이었다. 그 시설은 3개월간 외부의 지원 없이 핵전쟁을 지휘 운용할 수 있는 경이적인 규모의 첨단 시설물이었다. 당시 북한군 지휘관 중에 지하시설의 공사와 운용 면에서 나만 한 지식과 경험을 가진 자도 별로 없었을 것이다. 나는 국가지하비상지휘소를 건설할 때 군 기술 공병(工兵)의 전 역량은 물론 현대건설 등의 기술력과 중장비를 총동원하였다. 민간 및 군의 기술력 향상을 위해서 스웨덴과 스위스까지 시찰단을 보내기도 하였다.

극비리에 진행되고 있었던 비무장지대 내 지하 공사 작전은 일당독재의 북한과, 군(軍)과 민(民)의 가용 기술자 인력을 유연하게 활용하는 우리와의 두뇌와 기술의 치열한 경쟁이기도 하였다.

청음 기자재와 기술

적이 비무장지대 안에서 모종의 지하공사를 하고 있는 것이 거의 확실했으므로 표고(標高) 300~400m의 산 밑을 파 내려오는 지하갱도의 정확한 소재 위치를 알아내고 그것이 무슨 공사인지를 신속히 알아내야 했다. 그러나 그러한 비정상적인 임무를 담당할 수 있는 부대도 없었고 그와 같은 작업을 해낼 장비도 전무한 상황이었다.

지상에서 수행하는 對포병전은 적 포병의 위치를 먼저 잡아내야 승자(勝者)가 된다. 들려오는 소리, 비쳐지는 광선, 떨어지는 적 포탄의 방향과 각도 등을 기준하고 적 포병의 발사 위치를 정확하게 찾아내어야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어느 나라 포병에도 지하음을 찾아내는 장비는 없었다. 군의 야전 및 건설 공병도 마찬가지로 지하음을 탐지할 수 있는 기능이 없었다. 주한미군을 샅샅이 뒤져보아도 마찬가지였다.

비밀리에 국방과학연구소에 탐문해 보아도 참고가 될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급한 나머지 국립지진연구소에 공병기술 장교를 보내보았더니 진원지를 수십 m 이내로 축소해 잡을 수는 없으며 광산 등에서 일어나는 작은 진동소리는 찾아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제6사단 지역에서 장병들이 심혈을 기울여 청음하고 있는 곳은 평지가 아니라 기복이 심한 산지(山地)로 지질도 일정하지 않았다. 사람이 귀로 듣고 몸으로 느끼는 진동을 여러 여건의 차이를 감안할 때 얼마나 정확하고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가용(可用)한 수단을 다하여 김일성의 만행을 만천하에 폭로하고 저지해야 하는 사명을 부여받은 군이었다.

우선 청음초소를 증가해 훈련된 요원을 배치하였다. 다음으로는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들리는 소리의 강도를 1에서부터 5로 분류해 기록하고 여러 초소의 보고를 확대한 지도상에 표시해 나갔다. 날이 감에 따라 청음 기술이 향상되어 갔고 가장 강하게 들리는 ‘강도 5’의 중심이 500m에서부터 점점 축소되어 갔다. 그러나 이렇게도 큰 적의 야망을 정확하게 탐지할 기계가 없으니 김일성의 무모함을 입증할 수 있는 최선의 장비는 우리 장병의 성실한 근무태도뿐이었다.

위성사진으로 땅굴 입구 확인

나는 드디어 홀링스워드 미 제1군단장에게 부탁한 미국의 인공위성 사진을 입수할 수 있었다. 나는 제6사단의 땅굴 탐색작전을 수행하는 데 적측에 있을 그 땅굴의 입구를 반드시 알아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그 일이 홀링스워드 장군을 통해서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사진들을 통해 적의 땅굴 굴착 작업장의 입구를 찾아낼 수 있었다. 적이 불법으로 비무장지대를 지하로 뚫어 내려오는 땅굴 공사에 대한 객관적인 자료가 입수된 것이다. 그러나 이 자료만으로는 적을 굴복시킬 수 없었고, 온 세계에 대해서도 아직 설득력이 약했다. 그들의 만행을 땅속으로부터 끄집어내야 했다. 이 위성사진들의 입수로 제6사단 지역의 적 땅굴 탐색작전은 한층 더 가속을 내었다.

지하갱도 공사의 입구는 내가 예측한 곳에서 1km를 벗어나지 않았다. 평강에서 구불구불 내려오는 2차선 도로는 의심지역에 제일 가까운 적의 경계초소 후방에서 끊어져 있고 그 부근에는 불필요하게 큰 막사 2동이 서있었다. 장기간 촬영한 사진을 비교 분석해 보니 지하갱도 공사에서 나오는 퇴적물을 숨기기 위하여 흙을 덮고 잡목들을 심어 위장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인공위성 사진의 분석정보는 대단히 귀중해 사진 분석정보 배포를 엄격히 제한하기로 약속하였다.

비무장지대(DMZ)는 유엔사의 관할

우리나라의 독립과 자유를 지켜 주기 위해 16개국으로 편성된 유엔군과 북한 및 중공군 사이 혈투였던 6·25전쟁은 3년 2개월 만에 휴전이 되었다. 정전협정은, 휴전기간 중 피아간의 군사적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두 교전군 사이에 폭 4km의 비무장지대를 설정하였다. 그 중앙에 분계선을 표시하고 각각 자기 측 폭 2km의 경비구역 내에서 정전협정의 위반여부를 감시·감독하게 되었다. 우리 측에서는 유엔군사령관이 유엔본부의 지시에 따라서 정전협정 이행에 관하여 총체적인 책임을 지며 맡은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유엔본부는 한반도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유엔군사령부를 직접 지시감독하기가 어려워 그 권한을 미국에 위임하기로 결의, 미 국무부가 유엔을 대리해 정전 협정의 차질 없는 운영과 관리 책임을 지게 되었다. 휴전선에 연해 전방을 지키고 있는 우리 사단들은 유엔사의 휴전업무를 지원하기 위해 담당 방어지대 전방 비무장지대의 경비 임무를 분담하고 있다. 정해진 소수의 병력은 비무장지대 안에서 민정경찰(DMZ Control Police·CP)의 완장을 차고 소화기만 휴대한 채 그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따라서 제6사단 전방 비무장지대 안에서 근무하는 우리 장병(CP)은 유엔사의 근무요원이다.

나의 군단이 의정부에 있는 한미 야전사의 작전통제 하에 있어서 필요할 때마다 제6사단 땅굴에 관한 정보를 보안상 참모를 거치거나 문서화하지도 않고, 내가 직접 홀링스워드 장군에게 알려 주고 비무장지대 내 작전에 대한 협조를 구했다.

미국 대사의 방문

땅굴작전을 수행해 나가는 데 절대적인 이해와 협조가 필요한 또 한 사람은 유엔군사령관인 스틸웰(Richard G. Stilwell) 대장이었다. 그는 6·25 참전용사이면서 친한파(親韓派) 인사였다. 미국에 닉슨 정부가 들어서면서 주한미군 1개 사단을 감축시킬 때 우리 두 사람은 한미 양국 육군의 작전참모부장으로서 업무를 처리한 상대역이었다.

공병(工兵)병과 출신인 그는 제6사단 지역의 땅굴정보를 보고 받고는 지극한 관심을 표명하였다. 나에게는 서울로 외출할 때에 자기 사무실에 들러 군단의 탐색작전 진행 상태를 직접 설명해 달라고 했다. 당시 땅굴의 탐색은 암호명 ‘밤낚시’ 작전으로 호칭되었으며 어느 정도 진척이 있었다. 스틸웰 장군은 이 작전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여 본국에 직접 전문기술자를 요청했고 그를 연락관의 자격으로 현장으로 보내 주었다. 그러나 그 역시 이와 같은 상황이 처음이어서 우리에게 크게 도움이 되는 조언은 해주지 못했다.

이렇게 땅굴작전이 진전되자 본국의 지시를 받은 주한 미국 대사 스나이더(Richard L. Sneider)가 클리블랜드(Paul Cleveland) 참사관을 대동하고 군단을 방문해 왔다. 미 대사가 전방으로 찾아오는 일은 특이한 일이라서 군단 후방지역에서 지프차에 갈아 태우는 등 철저히 보안에 유의하였다. 철원 평야의 한복판에 있는 다른 VIP 안내 길의 관측소에서 일반사항을 설명해 준 다음 별실에 들어가 내가 직접 두 미국 외교관에게 땅굴작전의 진상을 설명해 주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겨우 보이는 땅굴작전을 미 대사에게 상세히 알려 준 사실을 장병들에게도 모르게 한 것이다.

미 대사의 이 방문 결과보고는 키신저(Henry Kissinger) 국무장관에게 상보되어 장차 천인이 경악할 이 작전의 전말을 미 국무부로 하여금 유엔에 상정할 준비에 들어가게 했다. 이렇게 유엔군과의 긴밀한 협조연락을 중요시 한 것은 자칫 남북 간에 자주 발생하는 충돌 사건으로 간주되기 쉬운 우리 군의 작전을 유엔군의 작전으로 격상하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김일성의 적화통일 야망을 유엔의 이름으로 세계만방에 규탄하고 만행의 재발을 억제하기 위함이었다.


(계속)

[ 2015-04-06, 17:28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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