地下전쟁―제2땅굴을 이렇게 찾았다! (4) : 敵의 땅굴을 관통!
평양의 수뇌들은 내가 수맥을 찾는 시추기로 그들 만행의 덜미를 잡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柳炳賢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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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내용은 《한미연합사 창설의 主役-유병현 회고록》 中 ‘땅굴 탐색 작전’ 부분을 발췌한 것입니다.

제2단계 탐색작전 구상

나는 인공위성 사진으로 적의 땅굴 공사의 실재성이 확증된 만큼 다음 단계 작전을 진전시켜 나갔다. 그것은 적(敵 땅굴이 지하 어느 깊이에 있으며 그 공사의 앞머리가 어디까지 왔느냐는 판단이었다. 군단의 5·1공사반을 시켜 적의 땅굴 공사 입구서부터 예상 출구(出口)로 연장선을 그려 보았다. 적은 암반 지하 50~100m 깊이로 땅굴을 파 내려오고 있었다. 그 공사의 앞머리를 측정하는 방법은 지상에서 하는 청음초소의 보고뿐이었다. 한의사가 진맥하는 방식으로 청음병들의 보고를 종합하여 잘 분석 판단해야 했다. 그 책임은 오로지 지휘관에 있었다.

지역방어 책임을 지고 있는 정명환 6사단장의 조급함을 말리고 나는 가급적 적을 비무장지대 내 우리 지역 깊숙이 유인하고자 하였다. 그러한 판단에서 앞으로 할 작전의 첫 단계는 적의 땅굴을 지하에서 확실히 잡아내고 다음 단계에서 우리가 역으로 갱도를 파 내려가서 적의 땅굴과 마주치는 것이었다. 두 단계 모두 우리의 과학과 기술을 잘 종합해야 성공할 수 있는 것이었다.
제1단계는 전부터 구상해 온 수자원공사의, 지하에서 수맥 찾는 굴착기를 산 위로 올려놓고 작전을 시작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적의 땅굴을 지하에서 잡아내면 우리가 역으로 갱도를 파 내려가서 적의 어리석은 만행을 실제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 단계에서는 사실상의 국가비상지휘소인 육군의 지하지휘소를 건설했을 때 협력해 준 현대건설의 기술진과 기계를 도입하려 했다. 그러한 두 단계의 작전을 하는 데는 상당한 시일이 예상되었다. 또한 우리의 대응 공사는 적의 관측으로부터 탐지되지 않는 지형에서 해야만 하고 그 공사장은 경계와 유사시 방어가 쉬워야 했다. 나는 6사단의 탐지작전을 방문할 때마다 그러한 조건을 충족시켜 줄 지형을 찾고자 노력하였다.

나는 사무실 뒷방에 부착한 확대된 땅굴작전 현지의 지도와 단면 지형도를 검토하다가 상기한 조건을 충족시켜 줄 이상적인 지형을 찾아냈다. 적의 경계초소로부터 흘러내려오는 능선은 우리의 경계초소를 넘어오면서 남방한계선상에 있는 경계대대의 관측소 사이에 동서로 넘어가는 산말랭이에 30~40m 폭의 자연스러운 평지가 조성되어 있다. 그곳은 우리의 경계초소가 적의 경계초소로부터 관측 당하는 것을 차단하고 있었다. 그곳까지 올라가는 굽은 길은 200~300m 정도만 적 지대로부터의 관측이 열려 있었으나 이미 1973년 말에 위장망을 쳐서 관측을 차단해 놓고 있었다. 지상 작전은 지리, 지형의 활용이 관건인바 천우신조(天佑神助)라 할 정도의 좋은 지리가 우리를 도와주었다.

대응 공사기획단의 발족

적의 지하 갱도를 탐지했다고 하여 그것을 굴착해 내는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와 같은 대규모의 공사작전은 우리 군은 물론 동서의 전사(戰史)에도 없는 어려운 특수한 기술 작전일 것이다. 전방 방어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제6사단에 이 중대한 일을 추가로 부담하게 하기에는 너무나 과중하였다. 군단의 전후방 全 지역에서 공병지원을 하고 있는 공병여단에 전방으로 들어가 적 땅굴을 캐내라고 추가적 임무를 부여하는 것 역시 능력에 초과하는 일이었다.

군단은 그동안 소수 기술요원으로 제6사단의 청음보고를 재분석 평가·판단하기 위해 비밀리에 5·1공사반을 운용해 왔다. 군단사령부 자체가 이 난공사를 떠맡아 수행한다고 할 때는 어느 참모부서에도 임무를 부여하기가 어려우며 보안의 어려움도 있었다. 숙고한 끝에 나는 이 특수임무를 수행해 성공시키기 위해 잠정적으로 태스크포스(Task Force) 격인 특수임무 수행기구를 설치해 운용하기로 결심하였다. 그 조직의 명칭은 ‘5·1공사기획단’으로 하였다. 그리하여 그 구성 요원은 멀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군단의 우수자원을 선발해 충원하기로 하였다.

백기진 공병여단장은 부여단장인 장희성 대령을 단장으로 한 5명의 기획단 요원을 추천하였다. 그들의 경력과 자질을 검토한 후, 1974년 10월 17일에 신고를 받고 공사계획단을 발족했다. 단원들에게는 예상도 경험도 하지 못한 임무였겠지만, 나는 그들을 믿고 임무를 부여했다. 나는 그들의 애국심에 호소하고 공병 특유의 희생정신으로 반드시 임무를 완수할 신념과 의지가 요구됨을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이 특수작전을 완수하기 위해 끊임없는 면구심과 창의력을 발휘해 올바른 판단을 해나갈 것을 요구하였다.

기획단은 우선 기존 5·1공사반의 업무를 인수하고 자체의 능력을 발전시킬 계획을 작성 건의하게 하였다. 그들은 처음으로 비무장지대 안에 들어가서 현장을 답사하고 사단의 청음초소 운용을 살펴보면서 관계되는 각 제대 지휘관들과의 협조체제도 수립하였다. 이렇게 군단 내의 업무실태에 익숙해지자 대외활동에 나섰다. 그동안 이 땅굴작전에 협조해 준 군 내의 각 기관을 비롯한 KDI 등의 연구기관과 자문에 응해 준 학자들과의 학문적 지식 교환이었다. 나의 위임장을 소지하고 수자원공사와 현대건설의 기술책임자들과 실무협조 체제도 완성시켰다. 이상과 같이 계획단은 모든 준비를 갖추고 비무장지대 안으로 들어가 암반 밑 깊숙이 파내려오는 적과 격돌할 태세를 갖추었다.

적 땅굴작전을 위한 태스크포스의 자립적 기능을 강조한 것은 나의 군단장 재임기간 중에 모든 작전을 완료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도 기인했다. 국가 안보에 중대한 작전은 지휘관의 교대에 영향을 받게 할 수 없다. 나는 이 작전을 무질서하고 혼란한 상태로 후임자에게 인계하려 하지 않았다. 모든 작업과정이 순조롭게 전개되어 ‘공사기획단’을 전방으로 추진해 현장에서 적 땅굴의 시추와 굴착을 하는 단계까지 무난히 작업을 진척시키게 되었다.

地下전쟁 준비

국방장관과 육군 참모총장은 군단이 하려는 적 땅굴 시추 및 발굴 계획의 성공을 격려해 주었다. 따라서 나는 본격적으로 적의 지하갱도를 찾아내기 위한 시추작업에 들어갔다. 이 작업은 큰 암반산 밑에서 침투해 오는 굴을 찾아내는 시도인 만큼 건조된 사료 짚더미 속에 숨겨진 바늘을 찾는 격이었다.

우선 앞으로의 준비공사계획의 복안을 공병여단장에게 설명하였다. 들어갈 공사단 숙영지에서부터 예정된 굴착공사장 밑까지 차량도로를 열어 주는 공사를 지시하였다. 도로의 개설공사는 때로는 암반에 부딪쳐 쉽지 않았지만 20일 만에 무난히 완료되었다. 그런 다음 적의 관측이 차단된 지형을 찾아 기획단과 수자원공사의 숙영지를 시추공사장에 가깝게 설정하였다. 다가올 혹한을 이겨내기 위해 천막들의 보호공사를 했다. 비무장지대 내 활동의 어려움을 모르는 민간 기술진의 안전보호를 위해 철조망으로 둘러싸고 출입구 한 군데만을 열어놓았다.

중요한 것은 무거운 시추기를 설치하는 공사장을 만드는 일이었다. 정밀측량을 한 표고 415지점은 우리 경계초소 언덕에 가로막혀 적의 관측을 피할 수 있었다. 테니스장 두 개만 한 평지를 만들어 급성 시멘트를 써서 무거운 시추기를 운용할 기반을 조성했다. 도로를 확장해 그곳까지 시추기를 쉽게 운반할 수 있게 했다.

시추기로 암반을 뚫어 갈 때는 윤활수가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숙영지 바로 옆에 흐르는 시내 밑에 집수정(集水井)을 팠다. 다행히 여단에 있는 9,000갤론짜리 고무통을 그 옆에 설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집수정과 시추 공사장의 고도차가 80m를 넘었다. 중간에 두 대의 양수펌프기를 설치하면 되지만 시추기에는 아무리 추워도 온수(溫水)를 주입해야 하므로 아래에서 올려 보내는 물을 데워 주는 온수기를 앞에 설치하기로 했다.

철원의 추위는 매우 심한 편이어서 그곳부터 시추 공사장까지 올라가는 약 200m 길이의 호스가 얼지 않도록 깊이 땅속으로 파묻었다. 암반지대를 지나 올라갈 때는 대단한 난공사였다. 비무장지대 안에서 다이너마이트를 폭파시켜 적을 긴장시킬 수 없어서 새로 개발한 LNG 공법을 썼다. 또한 그 송수(送水) 호스를 왕겨와 지푸라기로 싸고 흙을 덮어 주었다. 나는 이러한 작업들을 적이 탐지해 수상히 여길까봐 북한군에는 유엔사의 군사정전위를 통해 우리가 경계초소로 보내는 상수도공사를 한다고 통보해 주었다.

한편 이러한 준비공사를 진행할 때에 기획단 요원들에게 예측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식을 얻고 협조체제를 구성하게 하였다. 그 대상은 국방과학연구소, 수자원공사, 지질연구소와 학계들이다. 전진(前進) 숙영지에는 발전기도 설치되었으니 공사기획단을 그곳으로 진주시켜 공사통제단으로 개칭해 앞으로의 모든 공사를 통제 감독하게 하였다.

나는 이 기간 중에 공병의 공사 진행을 확인하면서 내 판단이 적절한지 되풀이하여 생각해 보았다. 나는 옳은 판단을 했다고 자신했다. 평양의 수뇌들은 내가 수맥을 찾는 시추기로 그들 만행의 덜미를 잡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공사를 하고 있을 때에도 적의 지하공사는 여전히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어리석은 김일성아, 너의 머리는 이 정도냐, 나하고 겨루어 보자’고 외쳤다.

시추 공사에 돌입

공사통제단은 마침내 1974년 11월 27일 모든 시추 준비 공사가 완료되었다고 보고해 주었다. 아래에 있는 집수정의 물이 얼지 않게 시추장까지 올라와서 더운 물로 모든 작업을 시험해 보았다는 것이다. 12월 5일에 도착할 예정인 수자원공사의 기술진을 수용할 준비도 모두 갖추었다. 이때에 내가 공병여단장과 공사통제단에게 당부한 말은 임무의 중대성을 명심하고 기필코 적의 땅굴공사를 분쇄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해달라는 것뿐이었다.

수자원공사가 보유한 시추기의 전량인 8대를 12월 8일에 보내주어 시추장에 설치하였다. 수자원공사의 기술진은 유능한 양 소장이 인솔하는 기사 3명과 기능공 47명 등 51명이었다. 기술이사인 김 이사가 책임을 지고 엄선해 준 일원들이었다. 그들은 비무장지대 내에서의 작업이라는 특수성에 긴장을 풀지 못하는 듯하였으나 돋보이는 양 소장의 지휘로 작업에 진전을 보이기 시작했다. 시추기 한 대당 세 명의 기능공과 우리 사병 4명이 한 조가 되어 3교대로 주야 계속하는 작업편성을 하여 공사통제단장의 지휘 장악 하에 들어갔다.

이렇게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을 때 유엔군사령관인 스틸웰 장군과 한미군단장이 ‘밤낚시’ 공사장을 방문했다. 내가 공사의 진행사항을 직접 설명하고 공병 출신인 스틸웰 장군의 기술적 질문에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시추 공사장으로 올라가서 시추공을 파는 계획에 관해 질문하기에 나는 무작위로 파기 시작한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는 시추 공사를 2~3일만 기다려 달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이 중대한 비무장지대 내에서 이루어지는 상황을 유엔군사령관으로서 상부는 물론 미 국무부에도 보고할 여유를 달라는 뜻이었다.

드디어 시추공을 파기 시작하였다. 지질이 암반이라서 다이아몬드 24캐럿짜리 팁으로 하루에 6~8m의 진도로 파 내려갔다. 그래도 8대의 시추기가 동시에 가동하니 합치면 하루에 50~60m를 파 내려간 것이다.

애국심만을 갖고 현장을 떠나다

1974년 12월 16일 국방부가 나를 합동참모 본부장으로 발령하여 21일에 군단장 직을 후임자 이건영(李建榮) 장군에게 인계하게 되었다. 나는 군단장에 30개월간 재직하여서 특별히 정이 많이 들었던 예하의 4개 사단과 4개 여단급 부대를 고별 방문하였다. 그 후 18일에 비무장지대 내 굴착공사장에 들렀다. 공사통제단장으로부터 마지막 공사 진행보고를 받고 시추장으로 올라가보니 여러 대의 시추기가 잘 작동하고 있어서 매우 만족스러웠다. 내가 결심하고 설치한 이 시추기들이 시추공의 자리를 옮겨가면서 작업하면 반드시 적 땅굴의 덜미가 잡힐 것이라 생각했다. 그 땅굴로 갱도를 역으로 파고 들어갈 공사를 담당할 현대건설의 기술진과도 협조가 잘 성립되었다.

공사 현장을 떠나면서 나는 공사통제단장과 수자원공사 기술반장 그리고 공사에 참여하고 있는 전원에게 다시 한 번 그들 임무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나라를 위해 애국심을 발휘해 이 공사를 성공시킬 자신감과 신념을 가지고 임무에 임해야 한다는 점을 각인시켰다. 나는 송별하는 백기진 공병여단장과 장희성 공사통제단장에게 뒷일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물이 빨려 내려간다!

1974년 말에 합참본부장으로 자리를 옮기자 바로 1975년 새해가 되었다. 나는 업무 파악에 분주한 한편, 철원에 남겨놓은 적 땅굴 탐색작전이 하루 빨리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였다. 내가 떠난 뒤 그 현장 통제단의 지휘는 공병여단장인 백기진 대령이 맡았다. 제6사단장은 그동안을 기다리지 못해서 예상되는 출구를 파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폭약을 쓰지 않아 그 공사음이 적에게 들리지 않았다.

드디어 내가 군단을 떠난 지 10일 만에 여덟 개 시추공 중 한 군데에서 이물질이 나오고 윤활수가 빨려 들어가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것은 암반 아래에 단층이 있어서 나타나는 현상일 수도 있겠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그 얼마 후인 1월 15일에 다른 시추기가 급작스럽게 쑥 떨어져 내려갔다. 그곳에서 채취된 모래와 나무뿌리들은 암반 속에서는 절대로 나올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들은 외부에서 가지고 들어간 것이 틀림없었다. 우리가 작업하고 있는 시추공을 적이 알고 급하게 시멘트나 나무 막대기로 막아보려는 행동일 가능성도 있었다.

3일 후인 1월 18일, 나에게 새로운 보고가 들어왔다. 암반 속에 있을 수 없는 것들이 발견되었으며 시추 롤이 내려가고 또 시추공 안으로 윤활수가 대량으로 들어간 것을 보면, 그것은 적의 땅굴이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지금부터 할 일은 그 중심부를 찾아내는 일이었다. 높이와 폭이 각각 2m 이상인 갱도의 중심부에 시추공을 틀어서 적의 땅굴의 위치를 확정짓는 일이었다. 그로부터 일주일가량 후인 27일에는 다른 시추공에서 물이 30분간에 약 900개통이나 내려갔다고 한다. 나는 땅속의 적들이 우리의 시추기술을 알아냈는지, 또 그것을 막고 갱도의 존재를 감추려고 어떠한 행동을 하고 있는지 궁금할 뿐이었다.

나는 2월 2일에 이러한 상황보고를 받고 육군본부의 관계참모와 동행하여 철원의 현장으로 달려갔다. 현장에 도착하자 공사통제단은 세밀한 상황을 분석하여 보고해 주었다. 그들은 내가 구상했던 방식대로 탐색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반드시 적의 갱도를 찾아내겠지만, 만일 실패하더라도 나의 책임이라는 각오로 탐색작업을 격려하였다. 나는 어디까지나 이곳의 지휘책임자는 후임 군단장임을 유념하여 더 이상의 말을 아끼었다. 이 방문에 나는 개인적인 상황 판단이나 지시를 하는 일이 일절 없도록 유의하면서 통제단과 기술지원 요원들의 성공을 격려했다. 다음 단계인 逆갱도 굴착준비도 예정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음을 확인하고 철원의 땅굴 탐색작전 현장 방문을 마쳤다.

연막작전

시추작업을 시작한 지 1개월도 안 되어 여러 가지 증거를 얻어냄으로써 적 갱도의 존재와 위치가 확실해졌다. 여러 개의 시추공을 종합해 분석한 결과 그들의 땅굴작업 소음이 분명하게 들렸다. 또한 그 갱도 내에서 수거된 모래나 나무뿌리들은 적이 우리의 시추 공사를 알아차리고 증거를 인멸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음을 암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원 현장에서 그것을 재확인하기 위해 시추공으로 다량의 연막을 주입해 그것이 적측 입구에서 새나오는지 확인하려 했다. 연막의 주입을 적이 도중에 막으려 할 것이니 효과가 의심스러웠다. 그리고 길이가 약 3km나 되는 갱도에 주입할 만큼 많은 양의 연막이 필요한 일이고, 특히 우천 시에는 연막의 효과가 적고 소량의 연막은 갱도 내의 습도가 흡수할 가능성이 매우 커 나는 그 효과에 의문을 가졌다.

이 무렵 나에게 “우리 군이 철원에서 쇼를 벌이고 있다”는 낭설이 종종 귀에 들어왔다. 그것은 철원 현지에서 자문에 응한 민간 전문가의 말이 와전됐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나는 걱정이 앞서 적이 우리의 작전을 사전에 방해하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스틸웰 유엔군사령관은 철원의 적 갱도 탐색의 全 과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내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지하수 시추기로 그 위치를 확인하는 등 전 과정에 아이디어를 내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합참으로 자리를 옮긴 나에게 “나도 미 공병의 기술로 구멍 하나를 더 파 보겠소”라고 알려 주었다. 그 뜻은 한국군만이 아니라 미군도 시추에 참가하여 성공률을 높이고자 하는 데 있었다. 그리고 그 내면에는 유엔사가 비무장지대 내에서 모든 작전의 책임자라는 위신도 세워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逆갱도 굴착에 돌입

지하의 수맥탐지기로 땅속 깊이 시추하기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암반 속에서 적 땅굴의 흔적을 찾아냈다. 그 후 한 달간은 그 실체를 재확인하는 데 소비하였다. 물론 그간에 군단 공병과 현장의 공사통제단은 여러 자문학자와 내방자들을 접대하면서, 지하 51.6m에 있는 적 갱도를 확인하고 끄집어 내는 역사적인 작전을 계획하느라 분주하였다. 그리하여 현대건설의 기술진과 바위산을 옆으로 파고 들어가 적의 갱도와 관통할 현장 정밀설계를 완성하였다.

내가 군단을 떠난 지 1개월 반 만인 1975년 2월 12일, 드디어 공병여단장이 역갱도의 공사장 입구의 정지작업에 들어갔다. 그곳에 현대건설의 중장비들이 속속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한 중장비들은 내가 육군의 지하지휘소를 굴착할 때 투입된 것 이외에 권양기가 추가되어 있었다. 우리의 역갱도작업은 처음에는 바위산의 경사갱도로 시작하여 52m 깊이에서 수평갱으로 바꾸고 적 갱도로 관통하는 설계였다.

우리 군의 작업이 진전을 보이자 유엔사령부 사령관은 나에게 우리의 공사가 희망적이어서 미 8군 공병의 시추 공사를 중지하기로 했다고 알려 주었다. 나는 그에게 특별히 우리의 역갱도가 적의 땅굴을 관통했을 때 그 성과를 널리 온 세계에 알려 주도록 요청했다. 그날에는 유엔사령부도 우리와 함께 대대적인 홍보행사를 개최하고 즉시 판문점 정전위를 소집하는 준비를 하기로 했다. 아울러 미국도 이 문제를 유엔안보리에 회부해 북한의 만행을 세계적으로 규탄하기로 했다.

사령관은 이와 같은 제의에 동의하면서 공병 병과 출신인 동맹국 영국 무관과 수 명의 외신기자를 엄선, 미군으로 가장해 일찍이 공사현장을 방문하게 했다. 영국 무관은 판문점에서 우리 측을 대표하게 하고 외신기자들에게는 보도 통제 하에서 철원작전을 사전에 심층취재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적의 땅굴을 관통!

우리의 앞선 기술과 중장비들은 실력을 여지없이 발휘하였다. 예정된 일정대로 적의 갱도를 정확히 관통하였다. 서울 합참에 있던 나도 그 순간 현장의 긴장과 성취감을 공감하면서 감회가 깊었다. 적의 갱도 안으로 들어가 보니 예상한 대로 2m 사방의 대규모 공사였다. 적은 우리의 신속한 대응작전에 당황한 흔적을 갱내(坑內)에 남겨놓은 채 급히 퇴각하였다. 그곳에는 낡은 북한제 공구들과 퇴적물 운반용 철로들이 산재해 있었다. 관통지점 남쪽 100여 m에는 마지막으로 준비했던 폭파장치에 폭약을 꽂아 놓은 채 도망갈 정도로 다급하였다. 땅굴 북쪽으로 얼마 가지 않은 곳에 방어용 돌벽을 급조해 놓기도 하였다.

스틸웰 유엔군사령관은 우리의 역갱도가 그대로 적 갱도를 관통한 데 찬사를 아끼지 않으면서 마치 본인이 적의 악랄한 남침 흉계를 차단한 것처럼 기뻐했다. 판문점에서는 우리가 확고부동한 증거물을 제시하였는데도 적은 우리가 날조한 것이라고 어색하게 생떼를 썼다. 그 자리에 북한 측 대표와 동석한 중공대표는 유구무언(有口無言)으로 일관하였다. 그렇게 작전이 성공한 후 나는 국방장관을 수행하여 적의 땅굴을 방문하였을 때 마음속으로 ‘어리석은 김일성아, 나한테 잘못 걸렸지 너는 또다시 남침할 망상을 버려라’고 외쳤다.

이건영 후임 군단장은 땅굴 탐색과 굴착을 성공시킨 상훈계획을 세울 때 나의 참여업적을 생각한 듯 나에게 전화를 하였다. 그때 나는 단호하게 “나는 훈장을 받을 만큼 받았어요. 그러니 현장에서 애쓴 여러분들을 생각해 주어요. 상후하박(上厚下薄)이 아니라 하후상박(下厚上薄)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 작전에 공을 세운 민간인 기술자들도 포상 대상에 포함시켜 주어요”라고 나의 뜻을 말하였다. 아울러 나는 철원의 땅굴 현장을 잘 보존해 이 작전을 성공시킨 우리 군의 애국심과 적의 악랄한 의도를 국민에게 널리 알리는 역사적인 교육장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였다.


(마침)

[ 2015-04-07, 15:2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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