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甲濟 식 글쓰기(1)/수사식 보도의 이론과 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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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종이 주는 가슴 떨리는 흥분과 보람뿐 아니라 그것을 위해서 감당해야 하는 고통과 비난을 받아들일 때 '수사식 취재'는 출발하게 된다. 사실보도에 안주하는 기자와 '내가 진실을 알아 보겠다'고 나서는 기자 사이엔 평범과 위대함의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1. 소문과 설(說)을 거부하는 자세

'Investigative Reporting'을 우리 언론학자들은 대체로 '탐사 보도'라고 번역하고 있다. 탐사(探査)란 말은 석유, 석탄과 같은 광물자원에 대한 조사를 뜻하는 말로 많이 쓰여져 왔으므로 '탐사 보도'란 말은 다소 생소하다. 필자는 영어 그대로 '수사식 보도'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Investigative Reporting'에 임하는 기자의 각오나 자세는 범인을 쫓는 형사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의 범인은 '진실'이지만. 필자는 'Investigative Reporting'을 '기자가 수사관처럼 집요하게 진실을 규명해 내려는 취재방식'이라고 定義하고 싶다. '진실의 규명'은 언론의 주된 기능인 '사실의 전달'보다는 한 차원 높은 어려운 작업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암살 배후에는 美CIA가 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는 기사는 사실 보도에 해당한다. 이것을 '수사식 보도'기자가 다룬다면 '과연 美CIA가 암살을 조종했는지 알아 보자'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그 결론은 '美CIA의 조종은 없었다'든지 '있었다'는 쪽으로 나올 것이다. '없었다' '있었다'는 '단정'과 '그런 소문(說)이 있다'는 '중계방송' 사이는 천당과 지옥이다. 그것은 사실과 설(說)의 차이이기도 하다. 설(說), 소문, 신화(神話)를 거부하고 사실과 진실을 지향하는 기자의 자세가 수사식 보도인 것이다.

2. 컴퓨터 부정설의 경우

1987년 12월 16일의 13대 대통령선거에서 金泳三, 金大中 후보가 패배하고 盧泰愚 후보가 당선되자 재야세력과 일부 야당은 개표과정에서 컴퓨터 조작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정의구현사제단이 가장 적극적으로 '컴퓨터 부정설'을 제기했다. 개표과정에서 컴퓨터가 하는 역할은 빠른 집계일 뿐이다. 성능 좋은 주판(珠板)에 불과하다. '컴퓨터 부정설'을 주장한 사람들 중에서 아무도 재개표를 요구하지 않았다. 집계가 조작되었다면 재개표로써 진실을 가리면 될텐데 그런 요구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은 그들 스스로도 자신의 주장을 믿지 않았다는 의심을 갖게 한다. 더 큰 문제는 그 당시 어느 언론기관도 '컴퓨터 부정설'은 사실이 아니라는 보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더 정확한 표현은 '하지 못했다'일 것이다.

대선(大選)개표장에서 뜬 눈으로 밤을 지샌 수많은 기자들은 '그게 아닌데...'라고 중얼거리기만 할 뿐 그렇게 기사를 쓰지 못했다. 고작 재야에선 이렇게 주장하고 방송국측은 저렇게 주장했다는 식의 양시론(兩是論)을 보도할 뿐이었다. 당시 상황은 용기있는 수사식 보도기자를 요구하고 있었다. 우리 기자들의 취재능력으로는 컴퓨터 부정설의 眞僞를 가리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문제는 용기였다. 훌륭한 수사식 보도기자의 제1조건은 재능이 아니라 용기, 호기심, 열정, 정의감 같은 성격이다. 기자들이 방치한 '컴퓨터 부정설'은 그 뒤에도 괴물로 자라 몇 년간 생존했다.

1991년 1월에 필자가 金大中 당시 평민당 총재를 인터뷰했을 때도 그는 컴퓨터 부정설을 옹호하고 있었다. '마녀사냥'이 유행한 중세에서나 있었을 법한 컴퓨터 부정설이 한국 사회의 양심세력으로 불리던 인사들의 판단력을 왜 흐리게 했는지는 하나의 탐구과제일 것이다. 기자들이 說을 방치하면 우리 사회에 쓸데 없는 불신을 확산시켜 국론의 분열과 국력의 낭비를 가져오게 된다는 교훈도 '컴퓨터 부정설'에서 얻을 수 있다.

3. 이수근(李穗根)은 간첩이었나

나는 1989년 3월호 월간조선에 '이수근은 간첩이 아니었다'는 기사를 썼다. 1967년 귀순했던 李씨(당시 북한 조선통신사 부사장)는 2년 뒤 홍콩으로 탈출했다가 붙들려 와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필자는 1986년에 이대용(李大鎔)씨(월남 패망 당시 주월대사관 공사)를 만나서 다른 취재를 하다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사이공의 탄손누트 공항에서 이수근씨를 잡았는데 그는 간첩이 아니예요. 자꾸 그를 괴롭혀서 달아나게 만든거지...'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이 말을 기억해 두었다가 1989년 2월에 취재에 착수했다.

취재를 끝낼 무렵 필자의 판단도 이수근은 위장간첩이 아니라 진정으로 귀순한 사람이었다는 쪽에 서 있었다. 정보부에서 그를 잘못 관리함으로써 李씨가 '남쪽에도 자유가 없기는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갖게 하여 스위스行 탈출을 결심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 필자의 취재결론이었다. 당시 정보부 수사관들은 필자의 이런 판단에 대해 이견과 반론을 제기했고 李穗根씨의 관리책임자는 명예훼손 혐의로 필자를 고소했다(수사결과 무혐의 처리). 다른 정보부 관계자들은 '그는 간첩이 아니었다'는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했다.

그 2년 뒤 필자는 북한 사회안전부 간부로 있다가 귀순한 김정민(金正敏)씨를 만났다. 그는 '우리 집과 이수근의 집은 가까이 있었다. 이씨가 남쪽으로 탈출한 뒤 그의 가족은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 갔다. 李씨가 사형된 뒤에는 당에서 간부들을 대상으로 '변절자의 말로는 이렇다'는 비밀강연회를 연 적도 있다'고 말했다(1997년에 황장엽 선생과 함께 탈북했던 김덕홍씨도 같은 증언을 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 과거사 위원회는 이수근은 간첩이 아니었다는 결론을 냈고, 이에 따라 공범으로 무기징역형을 받았던 조카 배경옥 씨가 재심을 신청, 무죄 판결을 받았다.  

4. 기존 관념과 사회적 통념에의 도전

'기존 관념에의 도전'은 수사식 보도의 중요한 영역이다. 특히 잡지저널리즘의 거의 독보적인 영역이다. 신문이나 방송이 숨가쁜 취재 경쟁과 마감시간 속에서 남기고 간 오보들을 추적하여 바로잡는 데 적합한 매체는 숨이 길고 취재시간의 여유가 있는 월간지일 것이다. 일본에서도 문예춘추(文藝春秋)같은 월간지는 신문 방송을 견제하는 기능을 고유한 권리인 것처럼 행사하고 있다. 언론과 사회에서 '사회적 통념'으로 정착시켜 놓은 사실을 뒤집어 버린 대표적 '수사식 보도'로서는 '6.29선언의 진실'을 추적한 월간조선의 일련의 보도가 있다.

5. 수사식 보도엔 시간이 걸린다 - '6.29선언의 진실' 취재의 경우

1989년 6월호에 실린 '6.29선언은 전두환(全斗煥)작품이다'라는 기사는 전두환 대통령이 아니라 그 측근들의 증언을 토대로 삼은 것이라 증명력엔 다소 문제가 있었다. 1992년 1월호에 月刊朝鮮은 '전두환의 육성증언1 - 6.29 전야'를 특종으로 게재했다. 이것은 5공화국 청와대의 사관(史官)역할을 했던 김성익(金聲翊) 당시 공보비서관이 기록한 全 당시 대통령의 미공개 대화록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이 6.29 선언을 발상하여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표를 설득해 간 과정이 全 대통령의 육성으로 자세히 설명되어 있었다. 이 자료는 한국현대정치사상 가장 중요하고도 극적인 순간으로 기록될 6.29 선언의 가장 깊은 이야기에 해당한다.

6.29 선언은 노태우 단독 작품이 아니라 '전두환 연출. 노태우 주연'의 공동작품 이란 사실을 밝혀낸 이 취재로 해서 월간조선은 오해를 받기도 했다. '누구를 음해하고 누구를 이롭게 하기 위해서 누가 흘린 것'이라는 식의 음모적 시각은 큰 정치적 특종기사에 늘 따라 다니는 것이다. 수사식 보도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이 뭐냐' 하는 것이지 ' 이 사실로 해서 누가 유리하고 불리한가'하는 계산이 아니다. 주장 앞에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으나 사실 앞에서는 아무도 고개를 저을 수 없다는 것이 우리 언론인의 가장 큰 위안이다. 수사식 취재보도에는 지속적인 관심과 시간이 필요하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필자는 명예욕, 호기심 그리고 약간의 정의감이라고 생각한다.

기자의 명예욕이란 곧 특종에 대한 의욕으로 나타난다. 특종욕심이 천박한 곳으로 흐르지 않게 해주고 격을 부여하는 것은 기자의 가치관과 안목일 터이다. 이런 취재가 의무나 고통이 아니라 기회와 즐거움이 되도록 하는 것은 기자의 천진난만한 호기심이 아닐까. 특종욕심, 순진한 호기심, 좋은 안목과 가치관은 그대로 수사식 보도기사의 조건이기도 하다. 우리가 흔히 기자의 '끈질긴 집념'이라고 하는 것이 의무감이나 강박관념이라면 한두번은 몰라도 수사식 보도기자가 되기엔 적합한 덕목이 아니다.

수사식 보도기자에겐 열정과 신바람이 있어야 하고 이런 성질 위에 기량이 쌓여야 한다. 아마추어의 순진성 위에 프로의 철저함이 서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수사식 보도는 시켜서 될 일이 아니다.

6. 10년 걸린 007 항로이탈 미스터리 특종

1983년 9월 1일 새벽 사할린 상공에서 소련 전투기에 의해서 격추된 대한항공 007편 보잉 747기에는 269명의 승객과 승무원이 타고 있었다. 전원이 몰사한 007 격추사고에서 가장 큰 미스터리는 007편이 왜 항로를 이탈하여 소련 영공 깊숙이 들어갔느냐 하는 것이었다. 필자가 이 수수께끼에 관심을 갖게 된 데는 공군의 항공관제분야에서 3년간 근무했던 경험과 유관하다. 1984년 초에 필자는 대한항공의 안전관리 문제를 심층 취재하여 그 해 4월호에 'KAL에 칼을 댄다'는 제목으로 장문(원고지 250장)의 기사를 쓴 적이 있다.

이때 관성항법장치(INS)와 관련된 몇 가지 사고사례를 알게 되었다. 대한항공의 일부 조종사들로부터 '007은 관성항법장치를 끄고 나침반 운항을 한 것 같다'는 견해도 들을 수 있었다. 이때부터 필자의 뇌리에는 '007의 항로 이탈 원인'이란 화두(話頭)가 입력되었다. 조종사들을 만날 때마다 이것을 주제로 하여 캐묻고 토론했다. 다행히 필자의 공군 근무경력은 전문가 집단인 조종사들과 대화에 필요한 기초 지식을 제공해 주었다. 조종사들과 대화는 그러나 하나의 참고자료일 뿐이다. '수사식 보도'엔 반드시 결정적 고리와 결정적 정보 그리고 결정적 정보소지자가 필요하다.

007사건의 경우 그런 결정적 취재원은 007편보다 15분 뒤에 알래스카의 앵커리지 공항을 이륙하여 같이 서울을 향해 비행했던 대한항공 015편의 박용만(朴容萬)기장이었다. 그는 퇴직하여 비교적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다. 서울 상도동에 있는 그의 집을 자주 찾아가 함께 생각하고 토론했다. 박씨도 왜 007이 항로를 이탈했느냐 하는 의문에 집착하여 나름대로 많은 추리를 하고 있었다. 박씨는 007편 뒤를 비행하면서 자꾸만 예정 통과 시간보다 늦어지는 보고를 하는 007편의 천병인(千炳寅) 기장과 '최후의 대화'를 나눈 적도 있었다. 이 짧은 대화는 007편의 수수께끼를 이해하는 데 단서가 될 만하다는 게 박씨의 말이었다.

1986년 12월호 월간조선에 실린 기사는 박씨의 증언을 토대로 하여 007은 관성항법장치를 끄고 비행했다는 주장을 담은 것이었다. 이 기사는 국내보다는 미국의 뉴욕 타임즈 등 외국의 언론에 더 크게 보도되었다. 007편이 관성항법장치를 끄고 나침반에 의존하며 비행한 이유에 대해서 박씨는 그럴 듯한 추리를 했다. 그것은 복잡한 내용이라 여기서는 생략한다. 관성항법장치를 끈 나침반 비행은 위법이다. 밤에 북태평양을 그런 원시적인 비행방법으로 건넌다는 것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런 모험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조종실과 조직의 분위기가 있었다는 것을 기자는 감지할 수 있었다. 비행계기가 발달하고 자동화될수록 조종사는 '기계점검자'로 변하며 소외돼 가고, 조종실에 탄 3명의 인간관계도 서먹해질 수 있다. 대부분의 비행기 사고 뒤에는 항공사 조직의 경직성과 조종실의 인화(人和)결핍이 있다는 것도 007 취재를 통해 알 수 있었다.

10년에 걸쳐 007 취재를 하면서 여러 번 기사를 썼고 이런 기사를 매개로 하여 많은 조종사들을 만날 수 있었으며 그러는 사이에 저절로 항공전문기자로 성장해 가는 나를 느낄 수 있었다. 태평양을 횡단하는 점보기의 조종실에 들어가 우주선을 탄 것처럼 가깝게 보이는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면서 조종사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순간들은 지금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한국과 러시아 수교후 1992년 러시아 정부가 사할린 근해의 바다 밑에서 건져 올린 007편의 블랙박스(조종실 대화 녹음장치 + 비행자동기록장치)를 우리 정부에 인도했을 때 필자는 가슴을 두근거렸다. 6년 전에 쓴 기사가 심판을 받는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1993년 6월 프랑스연구소에서 블랙박스를 분석한 결과 007편은 관성항법장치를 끄고 나침반으로 비행했음이 확인되었다. 필자는 이 정보를 ICAO(국제민간항공기구)의 공식발표 전에 입수하여 조선일보가 특종보도를 하는 데 일조했다. 1984년부터 1993년까지 10년 걸린 특종이었다. 아직도 왜 관성항법장치를 껐느냐 하는 부분은 미스터리이다. 천병인(千炳寅) 기장이 부활하지 않는 한 이 수수께끼는 영원히 풀리지 않은 채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7. 수사식 보도의 지향점

흔히들 사실((fact)과 진실(truth)은 다르다고 한다. 장님이 코끼리 코를 만진 뒤 ' 이 동물은 고무 호스처럼 생겼다'고 하는 것은 사실보도는 될지언정 진실보도는 아니다. 1981년의 이철희(李哲熙).장영자(張玲子)사기사건 때 어느 은행장이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었다. 재판과정에서 이 은행장은 그 뇌물을 받았다가 되돌려 주었다는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다. '은행장이 뇌물을 받았다'는 기사는 사실보도이긴 했지만 진실보도는 아니었다. 진실은 단편적 사실들을 종합, 재구성할 때 드러나는 총체적인 모습이다. 코끼리를 만진 여러 장님들의 견해를 종합하면 코끼리의 전체상을 그릴 수 있다.

뇌물을 받은 행위뿐 아니라 돌려준 과정까지 알아보아야 은행장에 대한 사실적, 도덕적 판단이 가능하다. 한 여자의 뒷모습뿐 아니라 앞 모습까지 알아보아야 미녀인지 추녀인지 알 수 있다. 뒷 모습은 비록 남을 속이지 않아 정직하다고는 하지만 그런 감상과 수사식 보도가 요구하는 엄밀한 검증은 질이 다르다. 수사식 보도의 2대 목표는 사건의 진실과 본질이다. 본질이란 무엇인가. 어떤 사건을 지배한 원칙과 흐름 또는 논리 같은 것이다. 진실이 형식이라면 본질은 내용이다. 어쩌면 사건의 전체상으로서의 진실은 본질에 도달하기 위한 전제조건일지도 모른다. 본질에 도달하려는 자세는 '수사식 보도'로써만은 안된다. 심층취재가 필요하다. 이 심층취재엔 철학 안목 통찰력, 그리고 교양과 독서의 축적 등이 있어야 한다.

8. 역사적 대사건의 뒤안길

1979년 10월 16일 부산에서 일어났던 反정부 시위는 학생 데모에 일반 시민들이 가담했다는 점에서 충격적이었다. 16일 밤 시위대가 중구 남포동 대로에서 경찰차를 뒤집어 놓고 흘러 나온 기름에 불을 지르는 순간 폭음과 함께 솟아 오르는 화염을 바라보면서 필자는 박정희 정권의 종말을 예감했다. 그 열흘 뒤 김재규(金載圭)가 '야수의 마음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김재규의 권총 방아쇠를 당기도록 한 것은 부마(釜馬)사태에 결집되었던 민중의 힘이었다. 필자는 그 뒤 부마사태-10.26사건-12.12사태-광주사태-신군부 집권으로 이어지는 격동기의 내막을 10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취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박정희와 김재규 편, 장승화 편과 전두환 편을 두루 만나면서 저절로 하나의 관(觀)이 정립되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격동기를 관류했던 역사의 흐름이 손에 잡힐 정도로 파악이 되는 것이었다. 그 때 그 자리에서 누구는 왜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는지. 왜 그런 방향으로 사태가 흘러갈 수밖에 없었는지가 이해되는 것이었다. 만나는 취재원이 달라질 때마다 생각과 시각이 달라지는 혼미상황을 여러 번 겪고 나서는 마치 시계추가 좌우로 흔들리다가 중심을 찾아 정지하듯이 관점이 정리되고 고정되는 것을 느꼈다. 예컨대 처음에는 전두환 정권은 태어나서는 안될 反역사적 군사정권이란 생각을 했었다.

취재가 축적되면서 全斗煥 정권이 아닐지라도 군사정권의 재등장은 불가피하지 않았나 하는 쪽으로 생각이 기우는 것이었다. 김재규가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더라도 朴대통령은 1980년에 접어들면 전국적인 反정부 시위에 직면하게 되었을 것이다. 朴대통령의 성격으로 보나 체제의 경직성으로 보나 시위 대응책은 피를 부르는 식이었을 것이고 釜馬사태 이상 가는 전국적인 소요사태로 확산되었을 것이다.

이때 全斗煥 장군 중심의 정치장교집단인 하나회는 혼란 수습과 장기집권을 종료시킨다는 명분을 내걸고 쿠데타를 감행했을 것이라는 게 필자의 판단이다. 그랬었다면 박정희의 최후는 더 비참했을 수도 있었다. 그런 점에서 김재규는 박정희가 영웅적인 죽음을 맞도록 하고 그리하여 국민들의 애도 속에서 땅에 묻힐 수 있도록 도와준 '역사의 손'이 아니었을까 가정해 볼 때가 있다. 박정희의 죽음의 타이밍은 그 자신뿐 아니라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도 다행이었을지 모른다. 박정희가 주도한 경제발전은 두터운 중산층을 만들어냈다.

이들은 빵문제가 해결되니 자유를 요구하게 되었다. 그런 요구에 제대로 부응할 수 없었던 5.16세력은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지고 패기만만한 40대의 신군부에 깃발을 넘겨 준 셈이 되었다. 국민은 아주 적기(適期)에 말을 바꿔 탄 셈이었다. 반면에 북한의 김일성은 너무 오래 집권하는 바람에 인민의 짐이 돼버렸다. 인민은 그 무거운 짐을 감당할 수가 없어 야위어 갔다. 그래서 필자는 '대한민국의 행복은 박정희의 단명이고 북한의 불행은 김일성의 장수'라고 말하곤 한다.

10.26사건으로 한국의 권력구조는 공백기를 맞았다. 헌법상의 막강한 대통령 권한은 崔圭夏 대통령에게 넘어갔다. 권력은 반드시 권한을 따라가지는 않는다. 박정희란 카리스마, 즉 정신적 권위가 사라진 공간에서 물리력, 즉 군부의 비중이 자동적으로 강화되었다. 문제는 누가 군부의 대표세력이 되는가였다. 여기서도 권한은 국방부장관과 육군참모총장에게 가 있었다. 권력은 정규 육사출신 장교단과 그 지도자인 전두환 소장쪽으로 모이고 있었다. 12.12사태는 실질적인 권력이 명목상의 권한을 제거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수사식 보도의 종착역이 반드시 '진실'이란 보장은 없다. 취재의 결론이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만 진실은 하느님만이 아실 것이다' 로 돼버리는 경우가 많다. 특히 억울하게 사형집행이 되었다는 사건을 취재하면 그런 결론에 이르는 경우가 더러 있다. 이 경우 수사식 보도는 실패했는가. 그렇지 않다. 진실에 도달해 보려는 노력, 철저한 취재정신, 그것을 통해 드러나는 또 다른 진실, 이런 것들이 수사식 보도의 진정한 성취일 것이다. 수사식 취재가 성실하게 진행된다면 거기엔 실패가 없다. 무고하게 사형되었다는 사람의 무고함을 증명하는 데는 실패한다 하더라도 취재과정에서 재판의 문제점, 오판의 가능성, 수사의 非인도성을 확인하고 고발한다면 '수사식 보도'는 성공한 셈이다. 수사식 보도의 성패는 결국 성실성의 문제로 귀착된다.

9. 특종의식이 곧 '수사식 취재'

'수사식 취재'란 사건과 사물의 진실과 본질에 접근하려는 취재자세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 '수사식 취재'의 방법론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은 이유가 있다. '수사식 취재'란 기술의 문제라기보다는 성품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머리의 문제라기보다는 가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기자가 온 몸을 던져서 사건과 부딪쳐 보겠다는 열정이 있으면 취재방식이야 저절로 터득된다. 결국 '수사식 취재'는 특종에의 욕심과 연결될 때 지속적일 수 있다. '특종 같은 것쯤이야'라는 식으로 정열과 욕심이 식어버리면 '수사식 취재'란 불가능해진다. 특종에 대한 욕심은 기사를 통한 한 기자의 존재확인 이고 특종에의 의욕이 빠져버린 기자는 신기록에 대한 도전을 포기한 운동선수와 같다.

특종이 주는 가슴 떨리는 흥분과 보람뿐 아니라 그것을 위해서 감당해야 하는 고통과 비난을 받아들일 때 '수사식 취재'는 출발하게 된다. 사실보도에 안주하는 기자와 '내가 진실을 알아 보겠다'고 나서는 기자 사이엔 평범과 위대함의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 2015-05-24, 23:1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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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고시게노리     2017-03-26 오전 12:27
선생님 옥고를 깊이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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