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을 외치던 문학인들의 비정한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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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의 대다수 주민들이 얼마나 처참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우리가 자세히 알 수 있게 된 이후로 이미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가난한지, 얼마나 극심하게 자유를 억압당하고 있는지, 얼마나 혹독하게 인권을 유린당하고 있는지, 오래 전부터 우리는 다 잘 알고 있습니다.
  북한에는 나치 독일이나 스탈린 시대의 소련에 세워졌던 수용소에 필적할 만큼 잔인한 방식으로 운영되는 강제수용소들이 도처에 있고, 수십만 명이 그 속에 감금되어 있다는 사실도 우리는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있습니다. 보편적 인권의 기준을 가지고 따져 보면, 북한 지역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강제수용소에 다름 아닌 존재로 규정되어 마땅할 지경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도 우리는 오래 전부터 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 거대한 강제수용소에서 견디다 견디다 못하여 목숨을 걸고 탈출을 감행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나오기 시작하다가 마침내 수십만을 헤아리게 된 지도 이미 한참이 지났습니다.
  
  북한 주민들의 실상이 이러하다는 것을 알고,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지 못하는 인도주의의 정신에 입각하여, 이 문제를 고민하고, 이 문제에 대하여 발언하며, 이 문제와 맞붙어 씨름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서 조금씩 나오기 시작하였습니다. 현실적인 어려움이 워낙 많은 까닭에 아직까지 가시적인 성과는 크게 올리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지만, 그들의 소중한 정신만은 높이 평가되어 마땅하다고 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 가운데에는 정치인도 있고, 언론인도 있으며, 종교인도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정치인은 정치의 무대에서, 언론인은 언론의 영역에서, 종교인은 종교의 공간에서 각자 나름대로 성실한 노력을 기울여 오고 있습니다.
  
  만약 이런 사람들 가운데에 문학인이 들어 있다면? 그들의 활동 공간은 당연히 창작의 현장이 될 것입니다. 시인은 시 창작 활동을 통하여, 소설가는 소설 창작 활동을 통하여 북한 문제에 대한 그들의 고민을 밝히고, 그들의 주장을 펴며, 그들의 힘든 씨름을 전개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그들의 노력이 비록 당장에 커다란 가시적 성과를 올리지는 못할지라도, 그들의 정신만은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면서 이 어두운 시대 위에 한 줄기 소중한 빛을 뿌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러한 활동에 나서고 있는―아니, 단 한 번이라도 나선 적이 있는―우리나라의 중요한 시인이나 소설가를 저는 아직 한 사람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난 2000년에 저는 「북한 문제와 한국문학」이라는 제목으로 한 편의 글을 쓴 일이 있습니다. 그 글에서 저는 북한 주민들의 처참한 고통을 정면에서 직시하고 이 주제와 맞붙어 씨름하는 모습을 보여준 우리나라의 시인이나 소설가가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단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아픈 마음으로 지적하고, 이 문제에 대한 제 나름의 성찰을 다각도로 시도해 본 다음, 아래와 같은 말로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앞으로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 누군가 있어 새롭게 한국문학사를 기술하다가 우리 시대의 문학을 다루는 자리에까지 왔을 때, 도저히 침묵 혹은 외면해서는 안 될 문제에 대한 우리 시대 대다수 문학인들의 이 철저한 침묵 혹은 외면이라는 기이한 현상을 발견하고, 과연 어떤 평가를 내릴 것인지, 그 점을 우리 문학인들은 지금부터라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이제는 2005년으로 접어들었으니, 제가 위의 글을 쓴 이후로, 5년이 더 지난 셈입니다.
  
  그 5년 동안, 북한 주민들의 참상을 우리들로 하여금 알게 해 주는 자료는 점점 더 많이 나왔습니다. 그 5년 동안에 북한 주민들의 비참한 상황은 하나도 개선되지 않았음을 분명하게 입증해 주는 자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5년 동안, <우리 시대 대다수 문학인들의 철저한 침묵 혹은 외면이라는 기이한 현상>에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전혀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 땅의 그 많은 시인들과 소설가들은 지금도, 5년 전이나 조금도 다름없이, 북한 주민들에게는 아무 일도 없는 양, 혹은 북한 주민들의 참상에 대해서 그들 자신은 아무 것도 모르고 아무 것도 듣지 않은 양, 하나같이, 완강한 침묵 혹은 외면의 자세를 고수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들이 한결같이 고수하고 있는 완강한 침묵 혹은 외면의 자세를 볼 때, 저절로 떠오르는 『신약성서』 속의 두 인물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0장 30절에서 36절까지에 걸쳐 있는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그 두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이하 생략)
  
  「북한 문제와 한국문학」이라는 글 속에서 제가 거듭 강조한 바 있었던 한 가지 사항을 이 지점에서 다시 언급해 두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저는 우리나라의 문학인들 전원을 향해서 획일적으로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독한 인간 내면의 실존적 차원이라든가 언어 예술로서의 문학이 가지는 미적인 측면이라든가 하는 것들을 집중적인 탐구의 대상으로 삼아 온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문학계에는 많이 있거니와, 그런 부류의 문학인들을 향해, 이제 와서 북한 문제와 맞붙어 씨름해 달라고 주문하는 것은 당치 않은 일입니다. 그 점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대상은 평소에 자유, 인권, 민족, 현실비판 등등의 주제와 대결하는 것을 자신의 주된 임무로 삼고 있노라고 공공연하게 선언해 온 문학인들로 한정됩니다. 그러한 부류의 문학인들에 대해서라면, 지금부터라도 북한 문제와 맞붙어 씨름해 달라고 주문하는 일이 결코 당치 않은 일일 수 없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러한 부류의 문학인들 중 상당수가 보여준 작품들에 대하여, 저는 종종 이의를 제기하곤 했었습니다. 그 이의 제기가 격렬한 공격으로까지 나아간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이의 제기 내지 공격은 어디까지나 그 작품들 속에 나타난 <결론>을 겨냥한 것이었을 따름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맨 처음 자유, 인권, 민족, 현실비판 등등의 주제와 대결하는 길로 나아가게 만들었던 <원래의 마음자리>에 대해서는, 그 초발심(初發心)의 순수성과 진지성에 대해서는, 언제나 신뢰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존경하는 마음까지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슨 말로도 형용이 어려울 만큼 처절한 북한 주민들의 참상이 의심할 수 없는 사실로 드러난 지도 벌써 장구한 시일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요지부동으로 지속되고 있는 그들의 철저한 침묵 혹은 외면을 목도할 때, 저는 그 초발심에 대한 신뢰와 존경이 심각하게 흔들리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 그들은 저에게 알 수 없는 존재로 비칩니다. 알 수 없기 때문에 무서운 존재로 비치기도 합니다. 정말입니다. 이제 저는 그들이 무섭습니다. 그들의 이해할 수 없는 침묵과 외면이 무섭습니다. 그렇게도 열렬하게 자유와 인권과 민족과 현실비판을 외쳐오던 그들의 이해할 수 없는 비정(非情)함이 무섭습니다.
  
  이동하 (서울시립대 국문과 교수)
  
  * 이 글은 자유기업원www.cfe.org에서 전재한 것이다.
[ 2005-05-23, 15:47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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