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라시키와 오하라 미술관
쿠라시키(倉敷)에 꽃핀 일본의 고급 지방문화. 성공한 기업인이 만든 名所. 엘그레꼬, 고갱, 모네, 르놔르, 마티스, 피카소 등등 대부분이 코지마가 수집해온 오하라의 기초 컬렉션과 그 뒤에 수집된 유럽과 미국의 현대미술가의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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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李淳子
민속예술이나 지방문화는 특정지역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들의 특색있는 삶의 축적이다.

일본의 지방문화가 우리나라에 비해 좀 더 다채롭고 틀이 잡힌 모습을 보여주는 이유는 일본이 역사적으로 오랜 세월을 봉건체제로 각 지방이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비교적 독립된 살림을 유지했었기 때문이 아닐까? 또 현대에 와서는 우리보다 훨씬 먼저 지방자치제를 실시해서 각 지방의 독립성이 강화되었던 점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일본국토내에서는 지방문화를 파괴내지 말살할 정도의 전쟁이나 외침이 없었다는 것도 중요한 요건일 것이다.

오카야마(岡山) 현의 작은 도시 쿠라시키(倉敷)에서 특히 우리는 현대일본의 경제사회사 발전단계와 절묘하게 발걸음을 맞춰 성장하고 자리잡은 지방 문화가 이제는 본격적으로 그 지방 생존의 主役을 맡고 있는 현장을 만나게 된다. 오랜 세월을 지켜온 삶의 터전을 삶의 내용과 함께 고스란히 유지 보존하여 간직한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실리적인 재산이 되었는가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 쿠라시키이다.

일본본토와 시코쿠섬 사이의 바다, 세토나이카이(瀨內海)는 시코쿠가 태평양의 방파제 역할을 하기 때문에 호수같이 잔잔하다. 중간의 작은 섬들이 많아 옛날부터 산이 많은 본토의 陸路보다 해안선을 따라 海運교통이 활발할 수 있었다. 일본 토목기술의 상징인 세토대교가 시코쿠와 오카야마를 연결하고 있고 다리의 본토쪽 끝에서 서남쪽으로 20여분 거리에 쿠라시키는 위치하고 있다.

쿠라시키는 바다에 직접 접하고 있지는 않으나 쿠라시키 가와라는 작은 강을 통해 해안교통의 요지로 옛날부터 발달하였다. 아주 옛날에는 어부들의 집단 주거지로 후에는 쌀을 비롯한 곡물의 집산지로 경제력이 모이기 시작했고 차츰 모든 생필품과 공업제품의 物流유통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쿠라시키라는 이름도 이곳을 중심으로 富를 쌓은 巨商들의 큰 창고가 있는 저택들이 즐비한 동네라는 의미이다.

그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원래는 대지주였던 오하라(大原)집안은 명치유신 이후 적절한 시기에 工業化로의 業種전환으로 방적공장을 쿠라시키에 열었다. 영국의 산업혁명이 섬유산업에서 시작된 것을 일본도 그대로 답습하게 된 것이다. 쿠라시키 방적은 크게 성공하여 면직에서 견직, 후에는 합섬섬유까지 생산하여 대부분을 아시아 여러 나라를 상대로 수출하기에 이르렀다. 20세기에 들어와 일본이 본격적인 자본주의를 표방하고 재벌이 나오기 시작할 때 오하라 一家도 섬유업뿐 아니라 은행, 철도, 부동산, 신문사까지 그 영역을 확대하여 지방의 토호가 아닌 국제적인 사업가로 발돋음을 하게 되었다.

부자가 돈을 제대로 쓰는 법을 익히는데 三代가 걸린다는 옛말이 오하라 집안에도 적용된다. 대지주에서 쿠라시키 방적을 세워 사업가로 변신한 할아버지 오하라 코우시로(大原孝四郞)도 이미 사회사업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지역사회를 위한 여러 가지 일을 했지만 오늘의 쿠라시키를 만든 것은 그 아들 손사부로(孫三郞)와 손자 소이치로(總一郞) 부자라고 할 수 있다.

오하라 손사부로는 거의 동년배의 화가 코지마 토라지로(兒島虎次郞, 1881-1929)의 천재성을 일찍이 알아보았다. 그는 코지마를 빠리로 유학을 보내 서양화의 본거지에서 공부하며 당시 그곳 畵壇(화단)을 풍미하던 인상파 화가들과 교류하도록 절대적인 지원을 하였다. 그의 畵風은 자연히 당시의 인상파 前後期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일본에 본격적인 서양화 기법을 드려온 第一세대의 서양화가로 자리를 굳혔다. 두 사람의 우정은 평생 지속되었고 코지마는 오하라를 위해 당시 유럽의 화가들의 작품을 사들여 일본의 지방도시에 서양화 컬렉션을 구축하는 데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1930년에 문을 연 오하라 미술관은 앞서 간 친구 코지마를 기념하기 위해 오하라 손사부로가 세운 것이며 그후 그의 아들 소이치로가 계속 확장시켜 오늘의 쿠라시키를 대표하는 문화시설로 키운 것이다. 이오니아식 석주가 바치고 있는 정문 양편에 로댕의 조각이 서있는 현대식 건물인 본관에는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초의 서양화가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엘그레꼬, 고갱, 모네, 르놔르, 마티스, 피카소 등등 대부분이 코지마가 수집해온 오하라의 기초 컬렉션과 그 뒤에 수집된 유럽과 미국의 현대미술가의 작품이다. 이 작은 지방도시에서 이런 세계적인 명품을 볼 수 있는 미술관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후에 증축한 分館에는 현대 일본을 대표하는 서양화가와 조각자들의 작품이 수장되어 있고 바로 옆에 연결된 공예관과 동양관은 원래 米穀창고로 쓰였던 건물을 개조하여 일본의 도자기, 나염, 민화 등을 전시하고 있었다.

오하라 미술관 主건물들과는 조금 떨어진 곳에 코지마 토라지로 기념관은 따로 또 있었다. 그 곳에는 그의 작품과 그가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여러 가지 예술품을 전시하고 있다. 이 기념관의 건물은 원래 구라시키 방적의 공장건물 일부를 개조하여 만든 것이다. 사방으로 긴 건물이 內庭을 가운데 둔 쿠라시키 방적의 옛날 공장 주건물이었던 빨간 벽돌집. 이제는 운치있게 담장이 넝쿨이 덮여 이곳을 아이비 스퀘어라고 부른다. 이 건물은 현재 지역문화센터의 문화교실이나 工房으로 쓰이고 있고 가운데의 넓직한 사각 마당은 시원한 야외 까페이며 언제나 즉석 공연장이 될 수 있게 무대와 조명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쿠라시키에는 이 많은 미술관외에도 시립미술관, 민예관, 향토완구관, 고고관(考古館) 등이 있고 부호의 전통가옥인 오하라가 저택, 오하시(大橋)가 저택이 잘 보존되어 있다. 이는 원래부터 문화재에 대한 선각자적인 안목을 가졌던 오하라 소이치로의 필생의 노력의 결과이다. 그는 쿠라시키가 몇 개 남아 있지 않은 일본의 옛도시라는 사실을 주민들에게 인식시키고 그 자신이 도시원형을 보존시키려는 운동에 앞장 섰다. 그는 家門 소유의 공장부지를 기증하고 또 주위의 많은 땅을 사서 시에 기증하면서 도시의 일부인 이 지역을 쿠라시키 美觀지구로 지정하여 엄격하게 보존관리를 하도록 衆智를 모았다. 이제 이 미관지구는 백여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 시점에서 외형상 시간을 멈추게 하고 그대로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수양버들이 늘어진 쿠라시키 강 양쪽으로 늘어선 저택과 점방, 창고였던 건물들이 전통 일본 목조 건축양식의 기둥, 문창살이며 하얀 회벽 등 옛날 일본도시 번화가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강이라고는 하지만 서울의 청개천 정도의 크기에 수표교 정도의 돌다리가 몇 개 있다. 돌계단으로 된 부두에는 나룻배 크기의 배들이 지금은 한가하게 비어서 매어있다. 옛날에는 물이 좀 깊었을까? 지금은 바닥이 보이는 맑고 얕은 물에 팔뚝만한 비단잉어가 관광객이 돈주고 사서 던져주는 모이를 따라 몰려 다닌다.

옛날의 미곡이나 생필품을 팔던 가게나 창고는 예쁜 부띡이나 음식점으로 바뀌어 관광객을 유혹한다. 전통 일본우동, 메밀국수, 과자, 어묵, 절임야채 등 작지만 말끔하게 차려놓은 고풍스러운 가게들을 보기만 해도 재미있다. 이 지방의 전설로 내려오는 모모타로(桃太郞)의 얘기에 나오는 수수경단을 지방의 특산물로 정해서 온갖 재주를 부려 현대인의 입맛과 눈에 맞는 전통과자로 만들어 놓았다. 일본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패스트푸드점은 이 지역에서는 얼씬도 못했고 이제는 슬그머니 일본음식이 되어버린 돈까스도 여기서는 먹을 수 없었다.

구비구비 아기자기하게 이어지는 좁은 뒷골목의 일반 주택가도 전통가옥 구조를 그대로 가진 흰회벽의 木造건물이 줄지어 있다. 대부분의 집에는 꽃꽂이, 서예, 도예, 茶道 등의 전통기예를 가르치는 개인교수의 간판이 작게 붙어 있었다. 고급 음식점, 골동품상, 작은 화랑 등의 영업을 하는 곳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주민들이 현지에서 일상생활을 하면서 생업으로 하는 소규모의 장사인듯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였다. 관광지의 한탕주의나 요란스러움은 어디에도 없었다.

미관지구 안에는 오하라 미술관과 백여년 전에 멋을 있는대로 부려 지은 시청건물, 은행건물 등 서양식 건물이 몇 개 있으나 모두 2층 정도로 도시 미관과 어울려서 오히려 그 당시의 현대도시로의 탈바꿈 과정을 자연스럽게 볼 수 있다. 시청 건물은 현재 관광안내소로 사용되고 있다. 이 지역에서 처음으로 지점을 낸 증권회사의 납작하고 어두운 옛날 건물안에서 지금도 증권회사가 영업을 하고 있다. 정문앞에 세워 놓은 칠판에는 얌전한 필체로 ‘오늘의 경제뉴스’가 분필로 깨끗하게 적혀 있었다. 컴퓨터 프린트 아웃으로 끝도 없이 쏟아내는 정보 대신 이렇게 간결하게 욧점만 칠판 한면에 다 담을 수도 있는 것인데... 잃어버린 그 옛날, 단순함의 아름다움을 그리워하게 만든다.

미술관들만을 돌아도 하루해가 모자란다. 차 없는 거리를 마음 편히 어슬렁거리며 강가 수양버들 그늘에 펼쳐놓은 수제공예품 좌판도 그냥 지나치기는 아깝다. 예쁜 선물가게도 구경은 해야 하고 또 맛있어 보이는 즉석 과자나 떡, 단팥죽, 빙수도 좀 먹어 보아야 할텐데... 두 번째 온 길이지만 이번에도 또 못하고 가는 것이 너무 많다.

쿠라시키 미관지구에서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첫째로는 오하라부자의 선견지명이었다. 대지주가 1차산업인 농업에서 適時에 2차산업인 제조업, 즉 방적공장으로 전환했고, 이제는 문화산업과 관광 서비스산업으로 지역 전체를 무리없이 전환시키면서 지역문화 보존과 경제적 활성화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은 것이다.

둘째로는 일본 특유의 지방독립성과 해외 진출성, 또 거기서 오는 자신감이다. 오하라 같은 지방의 기업가가 국내시장이나 중앙의 재벌들과 부딪히지 않고 처음부터 해외시장에서 뛰면서 세계수준의 국제적 사업감각이나 문화소양을 터득한 것. 코지마 토라지로 같은 화가도 당시 일본화와 서양화가 파벌을 만들어 살벌하게 세력다툼을 하던 동경을 중심으로 한 중앙 화단과는 일체 관계하지 않고도 세계무대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화가로 대성한 것. 이 모두가 중앙을 통하지 않고도 세계수준으로 직접 나갈 수 있는 지방의 저력과 자신감, 또 진취성을 입증한 것이 아닐까?

셋째로는 오래 된 것, 헌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살뜰한 마음가짐이다. 곡물창고가 훌륭한 미술관이 되고 공장건물은 연주장, 공방, 문화교실이 되었다. 툭하면 때려 부숴 버리고 새것만을 좋아했다면 오늘의 쿠라시키는 아예 없는 것이다. 조금은 불편하겠지만 고치고 닦아서 용도만을 변경한 옛 건물에는 조상들의 얼과 숨결, 그리고 손때가 있고 거기에 스며있는 지혜와 교훈이 있다. 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현장인 동시에 박물관이다. 또 이제는 값을 메길 수도 없이 엄청나게 귀한 재산이 된 것이다.

여러 사람들에게 꼭 다시 가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했다면 쿠라시키 미관지구 보존운동은 분명히 성공한 프로젝트일 것이다. 우리나라 지방도시에는 언제나 이런 세련된 고급 문화광장이 열릴 것인가?

李淳子(숙명여대 명예교수)
출처 : 상미회
[ 2015-11-26, 11:57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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