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아름다움'-헝가리의 憂愁(우수). 줄을 제일 잘못 선 나라 이야기
기독교 편에 섰다가 몽골군에 짓밟히고, 1, 2차 大戰 때는 敗戰國(패전국) 편에 서더니 공산권으로 편입되어 또 고생!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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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을 여행할 때 한국인들이 가장 마음 편해하는 나라는 아마도 헝가리일 것이다. 헝가리 사람들의 조상이 韓民族(한민족)의 뿌리인 몽골-투르크族과 친연성이 있고, 지금도 태어나는 아기의 등과 엉덩이에는 우리처럼 몽골반점이 있어서만이 아니다. 헝가리는 독일, 프랑스 같은 서유럽 국가에 갈 때의 긴장이나 러시아에 갈 때의 약간의 두려움 같은 것이 필요 없는 곳이다. 사람들은 순하고 생각이 깊고 조용하다.
  
   다뉴브 강의 양쪽으로 발달한 수도 부다페스트(부다와 페스트의 두 구역으로 구성)는 인구가 약 200만, 헝가리 전체 인구(약 1000만 명)의 약 20%가 몰려 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일 것이다. 특히 부다쪽 언덕에서 내려다 본 다뉴브 강변의 夜景(야경)이 기막히다. 부다페스트와 헝가리의 분위기는 悲感(비감)과 哀愁(애수)를 띤다. 그 哀愁도 다분히 동양적이다. 헝가리는 자살률이 한때 가장 높은 나라였다.
  
   헝가리에서 느끼는 '슬픈 아름다움'은 다분히 역사적 産物(산물)이다. 헝가리는 유럽에서 '줄을 가장 잘못 선 나라'로 꼽힌다. 오늘의 헝가리는 서기 896년을 건국 元年(원년)으로 삼는다. 볼가강 남쪽의 草原(초원)에 살던 유목민 출신의 마자르族이 헝가리로 이동해 와서 정착, 국가의 형태를 취했다. 헝가리(Hungary)라는 나라 이름은 영어표기이고 헝가리 사람들은 國名을 '마자르'라고 부른다. 헝가리라는 말은 '오노굴'(열 개의 부족 연합체라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마자르족은 기마민족이었으므로 전투를 잘했다. 9, 10세기 헝가리 기마군단은 西유럽을 휩쓸었다. 스페인까지 쳐들어갔다. 마자르 왕은 서기 1000년에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마자르족이 기독교화된다. 서기 1241년 칭기즈칸의 손자 바투가 이끄는 몽골 원정군이 헝가리로 쳐들어와 그해 4월11일 사조강 가 무히에서 헝가리 군대를 전멸시킨다. 몽골 군대의 약탈, 학살로 200만 명이던 헝가리 인구의 4분의 1 이상이 죽었다. 나는 1996년에 무히에 가보았다. 떼죽음을 당한 헝가리 군인들을 추모하는 동산에 십자가들이 꽂혀 있었다. 몽골 황제 오고데이가 급사하는 바람에 몽골군대는 돌아갔다.
  
   1526년 또 다시 비극이 찾아왔다. 헝가리 군대는 모하크에서 오스만 투르크 군에 大敗(대패)했다. 그 후 약 150년간 헝가리(부다페스트)는 투르크 지배하에 들어갔다. 17세기 말에 해방되자 말자 이번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제국 지배하로 넘어갔다. 19세기에 헝가리는 독립운동을 벌인 끝에 독자성을 어느 정도 확보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공동제국으로 승격했으나 1차 세계대전 때 독일, 오스트리아 편에서 싸우는 바람에 패전국이 되었다.
  
   1920년 트리아논 조약에 의해서 헝가리는 영토의 3분의 2을 잃게 되고 헝가리 인구의 약 3분의 1이 외국에 거주하게 되었다. 지금도 약 500만 명의 헝가리인들이 이웃한 7개국, 즉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우크라이나,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에 흩어져 살고 있다. 헝가리는 이들 나라에 대해서는 아직 영향력이 좀 있다. 東歐(동구)와 中歐(중구)에선 한때 강력했던 헝가리의 권위가 살아 있어 중간 보스 같은 나라이다.
  
   헝가리는 2차 대전 때도 줄을 잘못 섰다. 독일 편에서 對蘇戰(대소전)에 참전했다가 패전국이 되고 공산화되어 西歐(서구)와 단절되었다. 헝가리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56년 헝가리 사람들은 反共(반공) 봉기를 일으켰다가 소련군의 침공으로 진압당했다. 2만 명 이상이 죽고 20만 명 이상이 해외탈출했다. 1989년 여름 헝가리는 그동안 당했던 소련의 압제에 대해서 일거에 복수를 한다. 민주화를 결심한 헝가리 정부가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을 개방한 것이다. 東獨사람들이 이 국경을 통하여 오스트리아로 탈출하도록 방치함으로써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동구 공산국가의 붕괴가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1989년 한국과 맨처음 수교한 동구 국가도 헝가리였다.
  
   1996년 6월25일에 필자는 아라파드 괸츠 대통령을 인터뷰하기 위하여 페스트쪽의 국회의사당으로 갔다. 1904년에 완공된 이 고딕식 건물은 헝가리에서 가장 큰 건물이고 유럽의 의사당 건물로는 두 번째로 크다. 길이 268m, 너비 123m, 높이 90m에 방이 691개이다. 부다쪽은 언덕인데 길다란 궁정건물이 있다. 강을 사이에 두고 궁전과 의사당이 마주보고 있다. 두 건물 모두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다. 대통령 집무실이 의사당에 있는데 엘리베이터쪽으로 갔더니 한 老人(노인)이 배가 불룩한 가방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노인은 단추를 누르곤 필자 일행을 향해서 먼저 타라고 했다. 그가 바로 괸츠 대통령이었다. 그는 작가이기도 했는데 헝가리 봉기에 가담했다가 종신형을 선고받고 6년 옥살이를 했었다.
  
   그는 인터뷰에서 '부다페스트 거리에서 흘린 피가 있었기에 평화적인 체제전환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공산당 세력을 몰아낸 민주투사들도 보복을 일체 하지 않았다. 고생을 많이 하여 성숙해진 사람들이다.
   헝가리는 유럽에서 가장 넓은 草原지대를 갖고 있다. 훈족, 아바르족, 몽골족, 투르크족이 늘 헝가리를 탐냈던 1차적 목표물도 말을 기르는 데 필요한 草地였다. 지금도 말을 이용한 쇼가 볼거리이고 흥겨운 음악이 음식점마다 흘러 넘친다. 부다페스트의 고급 음식점에선 종업원들이 총출동하여 노래를 불러주는데 프로급이다. 安益泰(안익태) 선생도 부다페스트에서 공부했고, 그가 작곡한 애국가에도 헝가리적인 정서가 들어 있다고 한다.
   2004년 가을 尙美會(상미회) 여행단은 부다의 성 안에 있는 호텔에 들었었다. 저녁을 먹고 성벽을 산책하는데 달이 훤했다. 달빛에 젖은 다뉴브강을 바라보면서 노래를 합창했던 기억이 새롭다. 헝가리의 슬픈 아름다움에는 月光(월광)에 물든 강물과 한국인의 노래, 리스트의 피아노, 브람스의 랩소디가 제 격일 것이다.
   이 헝가리가 민주화 이후 급성장을 하고 있다. EU, NATO, OECD에도 가입했고, 1인당 국민소득도 구매력 기준으로 2만 달러를 넘어 한국을 바짝 쫓아오고 있다. 수입 면에서 세계 15대 관광大國이기도 하다. 헝가리의 憂愁(우수)도 옛말이 될지 모른다.
  
   기자는 1996년 6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서쪽으로 유명한 戰跡地(전적지)인 무히까지 자동차 편으로 달려 본 적이 있다. 부다페스트를 빠져나가자마자 大平原(대평원)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밀밭 보리밭 과수원 草原은 기자가 거쳐온 몽골 벨트 지역에서 이미 눈에 익은 장면이었다. 헝가리는 몽골-투르크族의 캔버스인 유라시아 草原의 서쪽 끝이다. 동쪽 끝은 만주-한반도이다.
  
   1241년 겨울 징기스칸의 손자 바투는 20년 전에 러시아 원정을 한 적이 있는 老將(노장) 스부데이를 사령관으로 삼아 우크라이나 서쪽에 10만 기마군단을 집결시켰다. 리델 하트에 따르면 이 원정의 목표는 헝가리였다. 당시 헝가리 지배층은 몽골-투르크族 계통의 마자르族이었고, 몽골 제국에선 헝가리를 자신들의 통치권 바깥에 있는 유일한 同族(동족) 집단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결전장 무히까지 3시간 동안 달리면서 기자는 몽골 군대가 비록 유라시아 초원의 동쪽 끝에서 왔다고 해도 헝가리 草原에서 크게 이질감이나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으리라는 상상을 할 수 있었다. 초원은 바다와 같아서 어디를 가나 비슷한 분위기와 생활 양식을 요구하는 것이다. 바다를 지배하여 제국을 건설할 수는 있어도 바다에 제국을 세울 수는 없는 것과 꼭같이 이 북방 초원은 문명과 종교와 상품과 과학과 기술이 매개되는, 또 권력과 국가가 만들어지는 무대이자 産室(산실)이었지 어떤 국가나 이념의 틀에 속박 될 수 있는 그런 공간이 아니었다.
  
   15세기부터 大항해 시대가 시작되어 비로소 大洋(대양)이 제국의 고속도로 역할을 하기 전까지 세계사에는 두 개의 진정한 바다가 있었으니 하나는 지중해요 다른 하나는 유라시아 草原이었다. 지중해가 그리스-로마 문명으로 상징되는 서양사의 무대였다면 유라시아 초원은 몽골-투르크 기마군단으로 상징되는 군사력, 권력, 파괴와 창조, 그리고 무역과 문화의 교류로 상징되는 동서양 통합의 무대였다.
   먹물 먹은 지식인이 독점하고 있는 역사 기술은 필연적으로 지식, 즉 문명과 예술을 최고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 더구나 근대 역사학의 방법론이 서양에서 개발된 관계도 있고 해서 세계사는 일방적으로 서양 중심으로 쓰여졌다. 훈, 투르크, 몽골族의 西進(서진)에 의한 피해를 많이 보아온 西歐(서구)학자들에게 객관적 기술을 기대할 수도 없는 일. 이렇게 되어 몽골-투르크族은 야만족 취급을 받아 과소평가를 받는 신세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세계사를 자동차에 비교한다면 유라시아 초원은 그것을 움직이는 트랜스미션이었고 몽골-투르크族은 트랜스미션을 돌리는 엔진이었다. 이 엔진으로 해서 세계사는 빨라졌고 넓어졌으며 새롭게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무히에 도착했다. 풀밭 가운데 작은 동산이 있고 나무 십자가가 수십 개 꽂혀 있었다. 무히 大會戰(대회전) 750주년을 맞은 1991년에 세운 「무히 전투 기념물」이다. 패전을 기념하는 건축물답게 참담하고 스산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이 몽골族에 대한 원한처럼 느껴졌다. 사조강변(江邊)에 자리잡은 이 무히 전투에 대하여 기념관에선 이렇게 적어놓고 있었다.
  
   <타타르(몽골族을 지칭)는 헝가리 군대 집결지를 향해 활을 쏘기 시작했다. 타타르의 화살은 멀리서 날아오는데 헝가리의 활은 짧게 날아 적진에 이르지 못하니 절망, 무력감, 그리고 자포자기 상태가 되어 도망자가 속출하게 되었다.>
  
   이 기념물에 또 이런 비명이 새겨져 있다.
   <헝가리와 다른 나라에서 참전한 기사들은 헝가리 왕과 함께 야만族으로부터 기독교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가 여기에서목숨을 바쳤다>
  
   바투와 스부데이에 의한 헝가리 정복전쟁은 20세기의 기갑부대에 의한 大기동전을 방불케 하는 규모와 속도로 진행되었다. 몽골軍은 4개 군단으로 갈라진 다음 부챗살처럼 서쪽으로 질주하기 시작하였다. 맨 먼저 출발한 것은 진행 방향으로 봐서 맨 오른쪽인 北軍(북군)이었다. 이 군단은 主力軍(주력군)이 되는 나머지 3개 군단을 엄호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1241년 3월 폴란드로 쳐들어간 北軍은 비스롤라江을 건너 스지들로우에서 폴란드 군대를 격파하였다. 4월에는 리그니츠에서 폴란드-독일 연합군을 大破(대파)했다.
  
   한 달 만에 北軍은 두 번의 결정적 승리를 통해서 폴란드와 지금의 체코 지역을 정복했다. 약 600km를 한 달만에 주파한 몽골군은 오스트리아 군대의 개입을 사전에 봉쇄하기 위하여 비엔나 직전에서 거대한 우회전을 한 뒤 南下(남하)하면서 主力軍의 헝가리 정복전을 안전하게 감싸안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3개 군단으로 구성된 주력군은 左軍(좌군)과 右軍(우군)이 원호를 그리면서 먼저 뻗어나가고 그 방어선의 한 가운데로 중앙군이 직선으로 질주하는 작전을 폈다. 이 3개 군단은 4월4일 부다페스트 부근 다뉴브 강변에 집결했다. 중앙군의 선봉은 3일 만에 눈덮인 敵國(적국) 지역을 300km나 돌파하는 기록을 남겼다. 바투와 스부데이는 여기서 전략적 후퇴를 하게 된다. 다뉴브강을 건너서 헝가리 군대와 결전하는 것은 무리일 뿐만 아니라 몽골 기마군단의 장기를 살릴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약 8만의 몽골군이 6일간에 걸쳐 천천히 후퇴를 하니 헝가리군은 추격해 왔다. 도시와 강이란 천연의 방어선을 포기한 채 몽골군의 長技(장기)인 유인책에 걸려들고 만 것이다.
  
   4월10일 몽골군은 야간에 좁은 사조江을 건너 헝가리군을 기습하였다. 우회, 유인, 기습은 기동력에 자신을 가진 몽골군의 전형적인 전술이었다. 이 3중주에 걸려든 헝가리군은 이날 섬멸되었다. 7만의 전사자를 냈다. 헝가리 왕은 아드리아海쪽으로 달아났다. 몽골 군대는 벨라 4세를 추격하여 지금의 발칸지방에 이르니 왕은 지중해의 한 섬으로 달아났다. 이때 몽골군대 사령부에 오고데이 황제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바투는, 철군을 명령했다. 유럽을 살려준 명령이었다.
  
[ 2015-12-05, 13:0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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