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들을 위한 스페인 이야기
왜 관광 1등국인가?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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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립 2세의 功過
  
   서양사에서 16세기는 ‘스페인의 세기’라고 일컬어진다. 17세기는 新해양강국 ‘네덜란드의 세기’, 18세기는 ‘英佛의 세기’, 19세기는 ‘英獨의 세기’, 20세기는 ‘미국의 세기’, 21세기는 아마도 ‘美中의 세기’가 될 것이다.
   1492년 스페인 남부의 그라나다가 기독교 軍에 함락됨으로써 770년에 걸친 스페인의 이슬람 시대가 끝났다. 이 해에 스페인 王家에서 후원한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이 이뤄졌다. 스페인은 포르투갈과 함께 ‘대항해 시대-식민지 개척시대’를 열었다. 스페인의 모험가들(피사로, 코르테츠)은 南美의 아즈텍, 마야, 잉카 文明을 파괴-접수했다.
   신대륙에서 채굴된 은이 스페인으로 흘러들면서 거대한 國富가 쌓이기 시작했다. 1556-1598년 사이 42년간 왕위에 있었던 펠리페(영어로는 필립) 2세가 스페인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1508년에 그는 포르투갈의 王位까지 차지하여 서양의 2대 해양국을 통합했다. 그의 治下에서 스페인은 지금의 포르투갈, 베네룩스 3국, 南美, 中美, 플로리다 지역, 멕시코, 캐러비안 海 주변지역을 차지했다.
   그는 신교도와 터키 군대로부터 가톨릭을 수호하는 챔피언을 자임했다. 1571년 스페인-베니스 연합함대는 지중해의 레판토 해전에서 이슬람의 챔피언 터키 해군을 격퇴하여 지중해 제해권을 지켜내고 이슬람의 東進을 저지했다. 1588년에는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를 징벌하러 갔다가 거의 전멸하여 스페인의 衰亡期(쇠망기)를 열기도 했다. 펠리페 2세는 네덜란드 독립전쟁을 진압하는데도 실패했다.
   스페인이 짧은 전성기를 뒤로 하고 유럽의 후진국으로 전락하는 데는 약 400년이 걸렸다.
   스페인의 地主와 귀족들은 전성기 때도 상공업을 기피했다. 아메리카 대륙과의 무역은 외국인에 의해 이뤄졌다. 스페인의 지배층은 아메리카 경영으로 생긴 國富를 주로 전쟁과 건축에 썼다. 펠리페 2세가 지은 궁전 에스코리알은 마드리드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데 화강암으로 만든 ‘여덟 번째의 불가사의’라고 불린다. 스페인 사람들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들여온 銀(은)을 돌로 바꿨다는 평을 듣는다.
  
   유태인 축출의 부작용
  
   스페인의 17세기는 건축과 예술의 세기였다. 국가 소득의 약 5%를 매년 건축(교회, 기념물), 그림, 조각 등에 썼다고 한다. 요사이 보통나라의 국방비 비중보다 더 많은 돈이 문화, 예술에 투자됐다. 이렇게 생긴 문화유산들이 지금 스페인을 세계 1등가는 관광 大國으로 만들고 있다.
   17세기 스페인의 地主, 귀족, 교회는 국가 생산물의 약 10%를 차지하여 부유한 생활을 누렸으나 농민들과 평민들은 그러지 못했다. 이슬람 세력을 추방하고 스페인을 수복한 기독교세력이 잘못한 게 있었다. 유태인과 이슬람 교도를 박해한 것이다. 이 두 세력은 유럽 사람들보다 개화됐고 돈과 기술이 있었다. 스페인은 종교 재판소를 만들어 개종하지 않는 유태인과 이슬람 사람들을 추방했다. 약 100만 명의 알짜배기 인력, 즉 당시의 중산층들이 외국으로 빠져나간 뒤 스페인은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착취와 반발의 관계로 대립하게 되었다. 여기에 정치 불안과 內戰(내전)의 씨앗이 뿌려졌다. 스페인 지배층은 귀족층, 軍 장교, 교회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상공업보다는 종교, 문화에 탐닉했고, 농민, 평민층은 열심히 일할 동기를 찾을 수 없었다. 16세기에 벌어놓은 國富를 까먹으면서 스페인은 정변, 전쟁, 내란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갔고, 그 클라이맥스가 1936년~1939년의 스페인 내전이었다.
   1701년 합스부르그 王家의 카를로스 3세가 스페인 왕위를 프랑스 계통의 부르봉 王家 펠리페 5세에게 넘겨주자 유럽의 열강들이 개입하여 11년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벌였다. 프랑스 대혁명 직후에는 스페인이 나폴레옹의 프랑스 편이 되어 두 나라 연합함대가 영국을 치려다가 트라팔가 해전에서 패배했다. 이로써 300년에 걸친 스페인의 해양강국 시대는 막을 내린다.
  
   內戰의 나라
  
   스페인 지배층은, 18~19세기 유럽이 산업혁명과 부르조아 혁명을 거치면서 혼란 속에서도 발전을 계속하고 있을 때 이런 新사조에 눈과 귀를 닫고 中世的 침체 속을 헤맸다.
   나폴레옹이 1807년에 스페인과 함께 포르투갈을 兩分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고 스페인 왕을 밀어내고 동생을 앉히자 스페인 민중은 오랜만에 지배층과 손잡고 게릴라전으로 대항했다. 영국의 웰링턴 장군이 이 對프랑스戰을 승리로 이끌어 나폴레옹의 몰락을 재촉했다.
   그 뒤 스페인은 王位 쟁탈전에 휩싸인다. 1830년대와 1840년대 그리고 1870년대 세 차례 12년간의 內戰이 일어났다. 두 번째 內戰 끝에 스페인은 공화국이 되었으나 지방의 반란으로 1년을 채우지 못하고 군대가 다시 알폰소 1세를 복위시켰다.
   스페인 內戰에서는 귀족, 왕가, 地主, 군대가 항상 한 편이 되고, 농민, 지식인, 노동자, 사회주의자, 분리주의자가 반대편에 섰다.
   19세기 말부터 러시아 무정부주의자 미하일 바쿠닌의 사상이 스페인 노동자들 사이에 퍼지기 시작했다. 착취만 하는 정부는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다.
   사회주의도 서서히 퍼지기 시작했다. 이들은 러시아 공산당식 계급혁명을 반대했다. 동시에 바스크와 카탈루니아 지방(바르셀로나가 수도)에서 분리운동이 일어났다. 스페인은 계급적으로, 지역적으로(인종적으로) 갈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더구나 지금의 모로코 주민들이 독립전쟁을 일으켜 스페인 군대는 苦戰했다. 1923년 프리모 데 리베라 장군이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뒤 6년간 온건한 독재를 했다. 알폰소 王은 1931년 지방선거에서 공화파가 압승하자 이탈리아로 망명했다. 제2공화국이 들어섰다.
   정권은 좌파와 우파 사이를 오고갔다. 파시스트 정당이 생기고 노동자들이 경찰과 군대를 공격했다. 카탈루니아는 독립을 선언하고 암살, 테러가 사회를 휩쓸었다. 스페인은 左右로 갈라졌다.
  
   프랑코 등장
  
   1936년 총선에서 공산당이 앞장선 좌파연합 인민전선이 근소한 차이로 민족전선(우파연대)을 꺾고 승리했다. 폭력 사태는 계속됐다. 무정부주의 회원이 100만 명을 넘었다. 농민들도 반란을 준비했다.
   1936년 7월17일 봉기한 것은 군대였다. 북아프리카 주둔 스페인 군대가 좌파 정권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본토 군대도 동조했다. 다섯 장군이 주동한 군사반란의 지도자는 키가 작은 프랑코였다.
   프랑코 세력은 스스로를 ‘국민(민족)세력(Nationalist)’이라고 불렀다. 스페인의 국가적 통합과 존립을 위해 싸운다는 명분 아래서 붙인 이름이었다. 반대편 좌파는 ‘공화파(Republican)’라고 불렸다.
   미국과 서구의 지식인들, 사회주의자들은 의용군을 보내 공화파를 지원했다. 소련도 공화파에 군대와 장비를 보냈다.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프랑코 군대를 지원했다. 좌파 편을 민 국제의용군은 약 2만 명, 이탈리아는 약 7만 5000명, 독일은 약 1만 5000명의 병력을 보냈다. 스페인 내전은 국제전쟁으로 변질됐다.
   세계의 좌파 지식인(헤밍웨이 등)이 공화파를 편들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프랑코는 惡, 공화파는 善으로 치부되고 있지만 여기 스페인에서 듣는 여론과 사실은 다르다. 공화파는 약 7000명의 성직자(수녀, 신부 등)를 학살했다.
   공화파 내의 암살, 처형은 더욱 참혹했다. 1937년 5월에 공화파의 거점 바르셀로나에서는 소련의 앞잡이들이 좌파 內 무정부주의자들과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숙청하기 위한 시가전을 벌여 수많은 동료를 학살했다. 공화파 편에서 참전했던 영국 소설가 조지 오웰이 좌파의 실상을 목격한 뒤 공산주의자들은 파시스트보다 더 악질이라고 판단하여 스탈린주의를 고발한 ‘동물농장’과 ‘1984년’을 썼다.
  
   프랑코의 功過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파가 끝까지 버틴 곳은 2大 도시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였다. 1938년 독일-이탈리아의 지원 하에 프랑코 군대는 10만의 병력, 1000대의 전투기, 150대의 탱크로써 대공세를 폈다. 소련은 1938년 9월에 철수했고 이듬해 1월 바르셀로나가, 3월 28일에 마드리드가 함락되었다. 수십만의 공화파는 프랑스로 달아났다. 스페인 내전에서 약 35만 명이 죽었다. 프랑코는 승리한 뒤 공화파 사람들을 처형, 투옥하여 약 10만 명을 더 죽였다.
   프랑코의 승리 직후 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히틀러의 군대는 6주 만에 프랑스를 정복했다. 프랑코는 자신의 승리를 있게 한 히틀러 편을 들어 참전하는 것이 당연해 보였다. 히틀러는 프랑코와 만나 참전을 요청했다. 프랑코는 도와주겠다는 말만 하고 날짜를 못 박지 않았다. 2차 대전 동안 프랑코는 끝내 스페인의 중립을 지켰다. 이 역사적 결단이 그와 스페인을 구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스페인은 NATO와 UN에 가입하지 못하고 미국이 주도한 경제봉쇄를 당했다. 1940년대 말부터 東西 냉전이 시작되자 미국은 스페인內에 4개 군사기지를 두고자 했다. 프랑코는 이에 동의했고 미국 원조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1955년 스페인은 UN에 가입했다. 프랑코 治下에서 스페인은 경제발전을 성공시켰다. 미국의 원조와 관광 붐이 자금源이 되었다. 朴正熙 시대처럼 스페인도 ‘先경제발전 後민주화’의 길을 걷게 된다.
  
  ‘게르니카’ 앞에서
  
   2005년 11월 필자가 尙美會(상미회) 여행단과 함께 버스 편으로 마드리드 근교의 펠리페 2세 궁전 에스코리알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에스코리알 바로 옆 돌산 꼭대기엔 높이 140m의 세계최대 돌십자가가 박혀 있고 이 바위산 속으로 동굴처럼 생긴 스페인 內戰 희생자 묘지가 파여 있다. 우리 버스가 진입로로 우회전하는 순간 깜짝 놀랐다. 깃발을 흔드는 차량 행렬이 도로를 꽉 메우고 있었다. 거의 젊은이들이었다. 다음날(20일)이 프랑코 사망 30주년인데, 그의 무덤이 있는 돌산 동굴로 몰려가는 지지자들의 행렬이었다. 축구팀 레알 마드리드를 응원하러 가듯이 독재자를 추모하러 가는 선진국의 젊은이들!
   이 며칠 사이 스페인 언론들은 프랑코의 유산을 다루는 특집 기사들을 내보냈다. 한 신문은 ‘그는 독재자인가, 국민 영웅인가’라는 제목을 달았다. 프랑코가 1936~1939년 사이 스페인 내전을 주도하고 수십만 명을 죽게 했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한국에서 朴正熙 정도로 높다. 프랑코가 반란을 일으켜 좌파 정부를 타도하지 않았더라면 스페인은 공산화되고 여러 나라로 분열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에서부터, 프랑코가 生前에 지금의 카를로스 王을 후계자로 키워 死後의 민주화를 준비해 주었다는 평가도 있다. 요사이 스페인 언론은 특히 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스페인이 독일, 이탈리아 편에 서지 않은 사실을 많이 다루면서 이 결단으로 오늘의 스페인 번영이 가능해졌다는 시각을 보이고 있다.
   프랑코는 약 40년 간의 독재 기간 중 朴正熙처럼 ‘先경제 발전, 後민주화’ 전략을 밀어붙여 지금 유럽에서 가장 잘 나가는 스페인의 토대를 만들었다(경제성장률이 유럽 최고). 그 비결은 미국과의 準동맹관계, 군부통제에 의한 정치안정, 성공적 산업화 정책이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프랑코의 功過를 비교적 편안하게, 객관적으로 보려고 한다. 어떤 정치세력도 프랑코 시절의 사건들을 선동의 소재로 이용하지 않는다.
   나는 마드리드 소피아 미술관 2층 6호실에 있는 피카소의 명작 ‘게르니카(GUERNICA)’ 앞에 섰다. 이 흑백 大作은 反프랑코, 反戰의 상징적 그림이다. 피카소의 그림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아마도 20세기를 대표하는 단 하나의 그림을 꼽으라면 이것이 뽑힐 것이다. 공산당에 입당했던 피카소는 스페인 內戰 때 공화파의 부탁을 받고 1937년 파리 세계 박람회에 출품할 그림을 구상하고 있다가 나치 공군이 스페인 북쪽 바스크 지방의 게르니카 마을을 폭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 名作을 그렸다. 피카소는 생전에 스페인이 민주화 된 뒤에 이 그림을 조국 스페인에 가져가서 전시하도록 유언했었다. 그 사이 이 그림은 뉴욕의 현대미술관에서 전시되었다. ‘게르니카’는 1981년에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으로 왔다가 10여년 전 소피아 미술관으로 옮겼다.
   죽은 아기를 안고 부르짖는 어머니, 말, 소, 부러진 칼의 이미지가 보는 이들을 생각 속으로 밀어넣는 이 그림에 대해 이런 評이 있었다.
   “고야는 개인주의적인 관점에서 전쟁의 비참함을 사실적으로 그렸으나 피카소는 전쟁의 본질과 의미를 추상화하여 시대를 뛰어넘는 보편적 이미지를 만들었다.”
   스페인은 프랑코와 피카소를 다 포용하고 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과거사 캐기, 조국의 약점 뒤지기를 하는 정치인들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돈키호테 이야기
  
   스페인을 대표하는 문학인은 미구엘 세르반테스이다. 마드리드와 그 남쪽 라만차 지역에 가면 ‘라만차의 돈키호테의 모험’이 조각으로, 관광상품으로, 이야기꺼리로 만들어져 사람들을 불러들인다.
   톨레도에서 남쪽 그라나다로 가는 길에 尙美會 여행단을 실은 버스 운전사가 “좋은 곳이 있다”면서 안내한 곳은 언덕 위의 풍차였다. ‘콘수에그라’라 불리는 마을인데 ‘돈키호테’의 무대이기도 하다. 언덕 꼭대기의 풍차는 관광용으로 만든 ‘돌지 않는 풍차’였다. 올라 보니 대만, 일본 관광객들을 태운 버스가 先着(선착)하여 ‘돌지 않는 풍차’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내가 보기엔 그들이 돈키호테처럼 보였다.
   우리 일행 중의 60代 기업인 한 분은 “여행을 떠나기 전 다시 한 번 돈키호테를 읽었는데 정말 위대한 문학임을 실감했다”고 말했다.
   “인간의 심리를 꿰뚫어보고 쓴 이 소설은 요사이 한국에도, 그리고 나에게도 해당된다고 보았습니다. 직원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나 자신도 돈키호테적인 면이 있는 게 아닌가, 나뿐 아니라 인간 모두가 돈키호테적인 면이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세르반테스는 16-17세기에 걸친 스페인의 전성기(주로 펠리페 2세 시절)에 살았던 사람이다. 그의 一生은 돈키호테 이상으로 드라마틱하다.
   당시 스페인은 이슬람 세력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몰아내고 통일국가를 만든 뒤 國力의 대폭발을 경험하고 있었다. 아메리카 대륙 경영, 이탈리아 침입을 단행하고, 오토만 투르크와 싸워 西유럽을 지켜내고 루터의 종교개혁 바람으로부터 정통 가톨릭을 수호하려고 한 것이 스페인이었다. 이런 시대 배경 속에서 세르반테스는 군인이 되어 이탈리아 遠征(원정)에 참전했고, 1571년에는 지중해 레판토 해전에서 스페인+베니스 연합 함대가 오토만 투르크 함대를 격파할 때도 전투 현장에 있었다. 이 해전에서 부상하여 한 팔을 잃은 그는 투르크 사람들에게 납치되어 北아프리카로 팔려가 4년간 노예생활을 하다가 구출되었다.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를 쓴 것은 58세 때였다. 인생의 쓴 맛 단 맛을 다 본 그는 돈키호테와 산초라는 인간型을 통해서 시대를 뛰어넘어서도 生動하는 희극적이고도 비극적이며, 웃고 나면 쓴 맛이 나는 매우 철학적인 소설을 쓴 것이다. 예컨대 돈키호테가 풍차를 ‘巨惡(거악)의 괴물’이라고 착각(또는 단정)하고 돌격하다가 뻗어버리는 장면은, 盧정권과 그 지지자들이 대한민국과 美國을 향해서 창끝을 겨누고 달려드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스페인의 대표작가 세르반테스는 1616년 4월23일 69세로 영국의 대표작가 셰익스피어와 같은 날 죽었다.
  
   카를로스 王과 노무현
  
   2005년 11월20일은 스페인을 40년 간 통치하면서 오늘의 번영과 민주화의 토대를 놓았다고 평가되는 독재자 프랑코가 사망한 지 30년이 되는 날이었고 22일은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즉위한 지 30년이 되는 해였다. 후안 카를로스 王에 대한 지지도 조사가 이날 발표됐는데 79%였다.
   카를로스 王은 프랑코의 産物이다. 프랑코는 자신의 후계자로 스페인 부르봉 王家의 왕자인 카를로스를 찍어두고 자신의 死後엔 스페인이 立憲군주제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11세인 카를로스 왕자를 직접 후계자로 교육시키기 시작했다. 1969년 7월22일에는 프랑코가 지켜보는 가운데 카를로스 왕자를 장래의 국가원수로 선포하는 의식을 치렀다.
   1975년 11월 20일에 프랑코가 죽자 37세의 카를로스 王이 등장하여 그 후 30년 동안 스페인의 민주화와 경제발전을 뒷받침했다. 1981년 2월23일 민주화에 반대하는 군부 쿠데타 시도가 있었을 때 카를로스 왕은 직접 군사령관들을 설득하여 이 기도가 실패하도록 했다. 카를로스 왕과 소피아 왕비는 소탈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스페인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영국, 네덜란드, 일본, 스페인과 같은 立憲君主制(입헌군주제) 국가는 국가의 정통성과 정체성의 상징으로서나 국민통합의 ‘정신적 중심’에 王을 놓고서 수상 이하 내각은 실무 정치를 주관한다. 政爭 때문에 국가가 분열되고 국민들이 內戰상태로 빠지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이스라엘과 독일 같은 나라는 입헌군주제 下의 왕이 하는 역할을 대통령에게 맡긴다.
   
   스페인을 紀行(기행)하면서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이곳 사람들의 표정이 밝고 대화를 즐긴다는 점이었다. 나라가 잘 되니, 즉 국민의 증오심과 질투심을 선동하는 지도자가 없으니 국민들끼리의 인간관계도 좋은 것 같았다.    
   
      
   이태리의 실패, 스페인의 성공
  
  
   스페인은 1990-2004년 사이 15년간 유럽의 최우등생이었다. 이 기간 스페인의 年평균 GDP(국내총생산) 성장률은 2.9%, 독일은 2.6%, 영국은 2.4%, 프랑스는 1.8%, 이태리는 1.4%였다. 스페인을 여행하다가 보니 이 나라의 생동하는 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다.
   국민들이 우선 친절하고 여유가 있으며 너그러웠다. 마드리드, 세빌리아, 코르도바 같은 큰 도시는 온통 공사판이었다. 크레인이 하늘을 가리고 길을 넓히느라고 교통체증이 일어났다. 마드리드에서 남쪽 안달루시아 지방으로 달리니 황토색 大地와 野山은 끝이 보이지 않는, 올리브 나무의 바다였다. 9년 전 왔을 때 놀려놓던 땅들이 모두 올리브 농장으로 변했다. 주로 미국으로 수출되고 있다고 한다.
   尙美會 여행단은 19명이었다. 예약한 식당에서는 기존의 의자 배치를 바꿔서 19명이 다 한 자리에서 식사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유럽의 고급식당에서 이런 배려를 해주는 곳은 흔하지 않다. 마드리드 왕궁앞 카페에 앉아서 옆 자리 스페인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재미 있게 구경했다. 30代 남여 전문직 직장인 모습이었다. 그들의 대화가 그렇게 아름답고 진지하며 편하게 보일 수가 없었다. 나는 음식점이나 술집에서 이런 대화모습들을 그 뒤에도 자주 보았다. 스페인은 대화가 편하게 이뤄지는 사회라는 느낌이 들었다. 지도자가 國論분열에 앞장서지 않고 國論통합에 헌신한 결과일 것이다.
   유럽여행의 成敗는 버스 운전사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번 버스 운전사는 영어를 할 줄 모르는 스페인 기사 미구엘씨였다. 그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여러 도시들을 돌아다니면서 길도 잘 찾고, 우직했으며, 불평이 없었다. 여행객들이 모두 '저 분 때문에 스페인에 대해서 좋은 인상을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
   2005년 11월26일자 영국 '이코노미스트誌'는 이태리 특집을 실었다. 이 기사는 이태리를 실패사례로, 스페인을 성공사례로 소개했다. 이 기사에 따르면 관광분야에서도 이태리는 스페인에 뒤지고 있다는 것이다. 1970년에 세계 관광객의 목적지를 조사하면 이태리가 1위였다. 지금은 이태리가, 프랑스, 스페인, 미국, 유럽에 이어 5등이다. 스페인은 관광수입 면에선 프랑스를 누르고 세계 1위를 계속 하고 있다. 이태리는 관광자원은 많으나 산업적인 면에서 개발이 잘 되어 있지 않고 호텔과 음식값이 터무니 없이 비싸다.
   지중해 연안의 나폴리는 베수비오스 산을 등지고 있는 세계적 관광명소로서 한때는 유럽의 가장 큰 도시였다. 지금은 범죄, 부패, 불결의 이미지를 덮어쓰고, 스페인의 지중해 도시 바르셀로나에 멀리 추월당했다. 바르셀로나는 1992년의 올림픽을 계기로 세계적 관광도시로 올라섰으나 나폴리는 1994년의 G7 정상회의 개최도시로서의 事後관리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
   이코노미스트誌는 이태리의 낙후성이 정치 문화 역사에 뿌리를 박은 구조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했다. 지나친 가족주의, 카톨릭의 너무 큰 영향력, 反기업-反고객-反시장적 풍토, 정경유착, 지나친 중소기업 중심의 경제구조, 벨루스코니 정권의 추진력 부족, 개혁이 안되는 국가체질 등이 구조惡으로 고착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태리는 밀라노, 트리노, 베니스 등 북부지방과 나폴리, 시실리 등 남부지방이 너무나 격차가 심하다. 시실리-나폴리 지방은 소득이 전국 평균의 60~80%, 밀라노 주변의 토스카니 지방은 140~160%이니 한 나라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이다. 시실리에서는 마피아가 아직도 건재하다. 이들은 기업활동에 관여하고 있다. 지금 정권도 이들에 대한 수사를 제대로 지원해주지 않고 있다. 이태리는 실업률이 7.7%, 스페인은 9.3%이지만 이태리는 가족주의와 카톨릭의 영향이 커서 여성취업률이 낮다. 취업률은 네덜란드가 약74%로서 선진국중에서는 가장 높다. 미국은 71%, 독일 66%, 프랑스 63%, 스페인 62%, 이태리는 57%에 불과하다.
   경제성장률에 실업률보다 더 중요한 영향을 주는 것은 취업률이다. 취업률은 주로 여성들의 경제참여 정도에 의해서 결정된다. 대체로 라틴 문화권 나라들이 카톨릭과 가족주의의 영향으로 취업율이 낮고, 게르만 문화권은 신교와 시장경제주의의 영향으로 취업률이 높다.
   스페인 인구는 4300만 명이다. 작년의 경우 인구가 90만 명이나 불었다. 그 가운데 70만 명은 외국에서 들어온 이민자라고 한다. 그만큼 일자리가 많아 사람이 몰려든다는 이야기이다. 스페인의 면적은 50만5000평방킬로미터로서 남한의 다섯 배이다. 1인당 GDP는 약1만9000 달러이다. 스페인은 올해도 GDP 성장률 3.4%로서 유럽 제1위를 유지할 기세이다. 이코노미스트誌는 스페인이 이태리를 바짝 쫓고 있고, 금명간 추월할 가능성도 있다고 분석했다.
   스페인은 16세기 말 펠리페 2세의 전성기 이후 전쟁과 내란과 침체속에서 약 400년을 허송하다가 프랑코 통치기간 때부터 부흥기를 맞게 되었다. 그 비결은 실용적 정치집단의 등장, 국왕의 국민통합 역할, 개방과 관용의 확대로 설명될 듯하다.
  
   스페인이 관광1위국인 이유
  
   세계 觀光대국은 어디일까. 두 가지 통계가 있다. 하나는 외국인 관광객수로 계산하는 방식이다. 최신통계인 2004년의 경우 프랑스로 입국한 사람이 7510만명으로 세계1위였다. 이어서 스페인 5360만명, 미국 4120만명, 중국 4180만명, 이탈리아 3710만명, 영국 2780만명, 홍콩 2180만명, 멕시코 2060만명, 독일 2010만명, 오스트리아 1940만명順이었다.
   외국인이 쓰는 돈, 즉 관광수입으로 계산하는 방식이 있다. 2004년의 경우, 1위는 미국으로서 744억8100만 달러, 2위는 스페인으로 452억4800만 달러, 이어서 프랑스 408억4200만 달러, 이탈리아 356억5600만 달러, 독일 276억5700만 달러, 영국 273억 달러, 중국 257억3900만 달러, 터키 158억8800만 달러, 오스트리아 153억5100만 달러, 호주 130억 달러順이다.
   미국은 너무 넓고 입국자가 비행기로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특별한 경우라고 제외한다면 스페인이 사실상 관광1위국이다. 물론 입국자수로는 프랑스가 가장 많지만 단기 체류자가 많아 수입에선 스페인에 뒤진다. 로마가 있는 이탈리아가 관광1위국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 나라는 물가가 비싸고 불친절하다는 평판으로 해서 최근 관광객이 줄고 있다. 2002년에 3980만명, 2003년에 3960만명, 2004년에 3710만명.
   스페인의 매력은 문화유산이 많고 기후와 民心이 좋으며 자연풍경도 독특하다는 점에다가 전성기의 이슬람 문화유적이 있다는 점들이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 가장 많은 나라는 이탈리아와 스페인이다. 2004년까지는 스페인이 39개로 1위였으나 작년에 이탈리아가 3개를 새로 등록하여 지금은 41개로 1위를 달리고 있다.
   중국과 터키는 관광수입이 급증하고 있는 나라이다. 홍콩과 마카오를 포함하면 2004년 중국의 관광수입은 422억 달러로서 프랑스를 앞지르고 세계3위이다. 2020년에 가면 중국이 관광수입 1위국이 될 것이고, 동시에 중국인들이 해외여행에 가장 많은 돈을 쓰게 될 것이라고 한다.
   큰 나라중에 관광지로 인기가 상대적으로 낮은 나라는 일본이다. 일본으로 입국하는 외국인수는 한때 한국보다 적었다. 2001년의 경우 일본 입국 외국관광객수는 523만9000명이었고 한국 입국자는 534만7000명이었다. 2004년엔 일본 입국자가 613만9000명, 한국 입국자가 581만8000명. 관광수입으로 보면 2004년에 일본이 112억 달러, 한국이 57억 달러였다. 일본입국자가 한국입국자보다 두 배나 많은 돈을 썼다는 이야기이다. 일본 입국 관광객수가 적은 이유로는 물가가 비싸고 섬나라인데다가 일본이 국내관광에 오히려 주력하여 해외관광객 유치에 그동안 소홀했던 점이 지적된다.
  
   스페인 古都 코르도바 이야기
  
   미국을 제외하고 제1관광大國(관광수입 기준)인 스페인 남부지방은 안달루시아라고 불린다. 이곳의 3大 도시는 코르도바, 세빌리아, 그라나다이다. 무어인(아랍과 아프리카 베르베르족의 혼혈)이 主力인 우마야드 왕조(수도 다마스커스)의 이슬람 군대가 서기 710년에 이곳에 상륙하여 불과 4년만에 이베리아 반도(스페인과 포르투갈) 전체를 점령하였다. 이슬람 세력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1492년에 그라나다에서 철수하여 아프리카로 돌아갔다. 700년이 넘게 계속된 이슬람의 스페인 경영은 찬란한 문화유적을 남겼다. 스페인이 이탈리아와 프랑스보다도 더 많은 관광수입을 올리는 이유도 이슬람 문명의 유적이 많기 때문이다.
   이때 스페인을 경영한 이슬람 세력은 다마스커스를 수도로 삼아 100년간 이슬람 세계를 통치했던 움마야드 王朝였다. 이 王朝는 활발한 포교전쟁으로써 아시아와 유럽 및 아프리카에 거대한 판도를 형성했다. 7세기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일어난 이슬람교는 아랍 기병대의 말발굽을 따라 맹렬한 기세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이 움마야드 王朝는 8세기 중엽 압바시드 王朝에 망한다. 아바시드 王朝는 수도를 바그다드로 옮겨서 1258년 몽골군에 짓밟히기 전까지 약500년간 이슬람 세계를 통치했다.
   움마야드 왕조는 망했지만 왕족의 일파는 스페인으로 피난 와서 코르도바를 수도로 삼아 통치를 계속했다. 당시 이슬람 문명은 과학, 문학, 군사 등 모든 면에서 중세 암흑기를 겪고 있었던 유럽의 기독교 문명을 앞섰다. 이슬람은 또 기독교도나 유태인들을 종교적으로 박해하지는 않았다. 사실 유태교, 기독교, 이슬람은 한 뿌리에서 파생된 종교이다.
   코르도바의 大모스크(메조키트), 세빌리아의 대성당,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은 안달루시아뿐 아니라 세계사를 대표하는 위대한 건축물이다. 움마야다 왕조가 망할 때 코르도바로 피신해 와서 왕이 된 압둘 라만 1세는 바그다드를 수도로 한 압바시드 왕조로부터 독립된 코르도바 왕국을 세웠다. 코르도바 왕조는 이슬람의 문화적 전성기를 스페인에서 꽃피웠다. 스페인에서 볼 수 있는 이슬람 건축물이 아랍 지역에 비교해서 오히려 더 뛰어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코르도바에선 이슬람, 기독교, 유태교가 공존했다. 大모스크에선 세 종교가 함께 예배를 올렸다. 유태교의 시나고그, 카톨릭의 성당, 이슬람의 모스크를 다 겸하고 있는 예배당이었다. 모스크 한 복판에 성당이 만들어져 있다.
   7~13세기의 약500년간 코르도바는 유럽의 빛이었다. 10세기에 코르도바엔 27개의 학교, 50개의 병원, 900개의 공중목욕탕, 6만300채의 고급 주택, 그리고 8만455개의 상점이 있었다고 한다. 인구는 50만 명을 넘었다. 유럽은 당시 교황청이 득세하여 왕권을 누르고 있었다. 글을 아는 사람들은 신부들과 유태인뿐이었다고 한다.
   코르도바는 13세기에 기독교 세력에 넘어갔다. 故地를 탈환한 기독교 세력도 코르도바에서 이슬람과 유태인을 그렇게 박해하지는 않았다(1492년까지). 大모스크도 부수지 않았다. 16세기 초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스페인 왕을 겸했던 카를로스 5세 시절 카톨릭 세력이 大모스크 한 복판에다가 성당을 만들었다. 이 공사가 끝난 뒤 시찰 나온 카를로스 황제는 개탄했다고 한다. 그는 성당측 사람들에게 말했다.
   '당신들은 평범한 성당을 짓기 위해서 세계에서 여기밖에 없는 명물을 파괴했군요'
   평면적이 200X150m 쯤 되는 大모스크는 1230개의 대리석 기둥으로 지탱되고 있다. 기둥의 숲에 들어온 느낌이 든다.
   코르도바를 유럽 최대 도시로 만든 움마야드 왕조 사람들은 전쟁뿐 아니라 건축에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시리아 다마스커스에 있는 움마야드 모스크는 8세기 때 만들어진 걸작품으로 이슬람 문화권 최초의 모스크라고 한다. 이들은 또 예루살렘에다가 바위 돔으로 알려진 모스크를 지었다.
   이슬람 세력이 700년 이상 스페인을 통치하고 있던 시기에 유럽의 기독교 세력은 십자군 전쟁을 일으켜 예루살렘을 점령한 이슬람 세력과 약300년간 싸웠다. 13세기말에 기독교 세력은 예루살렘에서 추방당했지만 이베리아 반도에선 1492년에 기독교 세력이 이슬람을 몰아냈다. 이슬람 세력의 챔피언 자리는 그 뒤 지금의 터키를 중심으로 한 오스만 투르크 제국으로 넘어간다.
   오스만 투르크는 두 번이나 비엔나를 포위했고 헝가리, 발칸 반도를 점령했다. 오스만 투르크는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3대륙에 걸친 대제국을 600년 이상 유지했다. 독일 편에 섰다가 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뒤 이 제국이 해체되니 30개 나라가 독립했다고 한다. 요사이 세계의 골칫덩어리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도 오스만 투르크 해체의 후유증이다. 오스만 투르크가 망한 이후 이슬람 문명은 대체로 퇴조기게 들어섰다. 거기에 대한 이슬람의 반발이 9.11테러 등 문명의 충돌로 나타나고 있다. 인류문명의 2大 라이벌은 기독교와 이슬람의 흥망은 과연 역사는 무엇인가 하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알함브라궁전 이야기    
   
   스페인의 남부지방 안달루시아에 있는 고도(古都)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에 대해 설명할 때는 으레 최상급 표현이 동원된다. 미셀린 가이드북은 이렇게 썼다.
   “인간이 만든 가장 위대한 예술적 창조물의 하나이다. 알함브라의 요새는 가장 놀라운 건축물의 하나이고 궁전은 지금 세계에서 현존하는 아랍 궁전중 최고이다. 樂園과 흐르는 물을 결합시킨 설계는 코란의 에덴동산을 구현한 것으로 이런 곳은 이 지구상 어디에도 없다”
   1492년1월2일 스페인을 공동통치하던 夫婦 왕, 카스틸 왕국의 이사벨라 여왕과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왕이 그라나다로 입성함으로써 779년에 걸쳤던 아랍세력의 이 도시 점령기가 끝난다. 이로써 약800년간 스페인에 머물렀던 무어(아프리카의 아랍인)의 시대도 종막을 고하고 이베리아 반도는 기독교세력이 완전히 탈환했다.
   아프리카로 물러난 아랍사람들이 스페인에 남기고 간 가장 유명한 문화유산이 ‘붉은 성(城)’이란 뜻의 알함브라 궁전이다. 그라나다의 열쇠를 스페인 왕에게 넘겨준 마지막 왕 보브딜은 모로코로 떠나는 길에 언덕에 올라 마지막으로 이 궁전을 바라보면서 울었다고 한다. 이 언덕은 ‘무어의 마지막 한숨’이란 이름을 얻었다. 아들이 우는 것을 바라보던 어머니는 한 마디 했다.
   “너는 사나이로서 지키지 못했던 것에 대해서 여자처럼 우는구나. 울음을 그쳐라”
   이 궁전을 점령한 스페인 사람들과 나폴레옹 군대는 인류의 유산을 무시하고, 탄약창고, 감옥, 병원 따위로 썼다. 이 성벽엔 이런 시(詩)의 한 구절이 새겨져 있다.
   “그라나다에서 눈이 먼다는 것보다 더 참혹한 인생은 없다”
   나는 1997년과 지난 11월 두 번 그라나다와 알함브라 궁전을 구경 갔다. 그라나다는 알함브라보다 더 아름답다. 인구 24만명의 이 도시는 시에라 네바다 산맥을 등지고 있다. 지중해가 지척인데도 그라나다를 병풍처럼 싸고 있는 산맥은 눈을 이고 있었다. 이 산맥의 최고봉은 3482m이다(이곳 도로는 유럽에서 가장 높다). 네바다 산맥은 유럽에서 알프스 산맥을 제외하곤 가장 높다. 스페인은 북쪽 프랑스와는 3000m급의 피레네 산맥으로 국경을 이루고, 남쪽으로는 네바다 산맥으로 지중해와 경계를 짓는다.
   그라나다에서 30분만 차를 몰고 아슬아슬한 구비길을 오르면 스키장이 있다. 비가 적은 곳이지만 산에서 녹아내린 눈물로 해서 먹을 물은 물론이고 알함브라 궁전 등의 정원수(水)로도 충분하다.
   그라나다는 스페인을 점령했던 아랍세력이 기독교의 반격으로 밀리면서 마지막까지 버티었던 곳이다. 1238년 나스리드 왕국이 이 도시를 수도로 하여 최후의 254년간을 번성했다. 사람들은 나라가 망해가던 시기에 어떻게 이런 궁전을 지을 수가 있었을까 하고 감탄한다. 그래서인지 알함브라 궁전은 어딘가 애조(哀調)를 띤다. 슬픈 사연과 이야기들이 건물 곳곳에 스며 있다. 왕족들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최후를 예감하며서 그렇기 때문에 더욱 탐미(眈美)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알함브라는 궁전, 정원, 요새로 구성되어 있다. 미로(迷路)로 연결되어 있어 가이드 없이는 길을 잃기 쉽다. 이 궁전은 규모도 엄청나지만 정교함이 더 큰 감동을 준다. 아랍사람들의 美的 감각을 다듬고 갈아서 만든 보석이라고 할 만하다.
  
   유럽의 암흑을 밝힌 빛줄기
  
   알함브라 궁전은 아랍건축술과 미술의 극치이다. 이런 건물이 스페인에 남아 있다는 것은 유럽의 축복이다. 아프리카에서 지중해를 건너와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약800년간 점령했던 이슬람 세력은 전성기의 문명을 유럽에 전했다. 그들은 예술, 문학, 과학에서 당대의 기독교보다 위였다. 서(西)로마제국이 망한 5세기부터 약500년간 유럽은 게르만족에 의한 문명파괴화 게르만족의 기독교화가 동시에 이뤄진 이른바 암흑기였다. 유럽을 여행해보면 이 시기에 지은 건축물이 거의 없음을 알게 된다. 이 시기에 이슬람 문명이 이베리아 반도로 들어와 암흑의 유럽을 밝힌 것이다. 르네상스 운동이 꽃필 수 있었던 씨앗은 이 이슬람 사람들이 전해준 그리스-로마문명의 기억이었다. 이상하게도 암흑기의 기독교 세력은 그리스-로마를 잊고 있었다.
   스페인으로 들어온 이슬람 사람들은 기독교와 유태인을 핍박하지 않았으므로 3대 종교와 문명이 이곳에서 용광로처럼 교류, 융합하면서 암흑시대의 구덩이에 빠져 있던 유럽에 빛줄기를 내렸다. 그라나다와 함께 이슬람 왕국의 오랜 수도였던 코르도바는 한때 인구 50만의 유럽최대 도시였다. 이곳의 대학과 도서관은 세계최대규모였다. 지금 메조키트라고 불리는 건물은 기독교의 성당, 이슬람의 모스크, 유태인의 시나고그를 겸한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곳이다. 세 종교가 동시에 또는 따로 이 건물을 공유하면서 예배를 보았듯이 코르도바는 3대 문명의 학문과 예술이 공존했다. 아랍학자와 유태인 학자들이 코로도바에서 연구한 그리스 철학, 천문학, 의술, 수학이 낙후된 기독교 세계로 퍼져나갔다.
   알함브라 궁전은 건물안팎의 장식이 세부적으로 정확하고 기하학적이다. 벌집모양 장식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바늘구멍 하나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한 문명의 수준을 가늠하는 것은 이런 세부적인 데 기울이는 정성이다. 이 점에서 동양은 서양에 뒤진 경우가 많은데 알함브라는 반대이다. 아랍사람들은 사막출신이라서 그런지 궁전안에다가 정원과 연못을 만들어 나무를 심고 물을 흐르게 하여 에덴동산을 재현하는 데 집착했다. 알함브라 궁전의 가장 유명한 장소는 '사자의 정원'이라고 불린다. 열두 마리의 사자석조상이 돌로 만든 우물 수조(水槽)를 떠받치고 있다. 알함브라 궁전을 소개하는 사진에 자주 나오는 곳이다.
  
   1492년이란 해의 의미
  
   지난 11월 필자 일행은 스페인 여성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궁전과 정원을 둘러보았다. 약3시간 걸렸다. 방마다 전설 같은 일화들이 많아 가이드의 설명을 따라가려면 구경을 제대로 못한다. 미리 알함브라에 대해서 책자를 통해서 읽어놓고는 현장에 와서는 될 수 있는대로 많이 돌아보면서 온몸으로 느꼈두었다가 생긴 의문점들을 나중에 책을 통해서 알아보는 방식을 나는 권장한다.
   알함브라 궁전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19세기 초 스페인 주재 미국대사를 역임했던 워싱턴 어빙이다. 그는 퇴락한 알함브라 궁전의 한 방을 빌어 살면서 '알함브라의 이야기들'이란 책을 썼다. 이 책과 함께 유명한 기타곡 '알함브라 궁전'을 담은 테이프나 CD를 기념품으로 사가는 사람들이 많다. 알함브라 궁전은 여성적이고, 밤에 와서 느껴야 제 맛이 난다고 한다.
   알함브라 궁전 앞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로스 5세의 궁전이 있다. 한복판이 비어 있어 도너츠처럼 생긴 원형건물이다. 카를로스 황제는 합스부르그 왕조 출신이었지만 복잡한 정략 결혼의 결과로 16세기 초 스페인까지 다스렸다. 그는 김영삼식으로 알함브라 궁전을 부수지 않고 그 앞에다가 자신의 궁전을 만들도록 하여 이슬람의 영화(榮華)를 가리려고 했다. 이 카를로스 황제 궁전이 다른 곳에 있었으면 큰 감동을 주었을터인데 알함브라 바로 앞에 있어 주목을 덜 받는다. 이 궁전의 건축가는 미켈란제로의 제자이기도 했던 페드로 마추카이다. 어딘가 로마 냄새가 많이 나는 대단한 건물이다. 이 건물을 짓는 세금을 낸 것은 이슬람 왕국이 망한 뒤 스페인에 남아서 살던 아랍사람들이었다.
   그라나다는 알함브라 궁전 이외에도 볼 것이 많다. 이 궁전이 서 있는 언덕과 마주한 산비탈엔 알바이싱이라고 불리는 아랍인 거주 구역이 있다. 아랍사람들이 이 도시에 정착할 때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주택과 골목이 남아 있어 알함브라와 함께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기독교 세력이 그라나다를 탈환하여 800년에 걸친 국토수복운동을 끝낸 1492년은 세계사에서 의미 있는 해였다. 그라나다를 차지한 이사벨라 여왕은 이 해 여름에 이탈리아의 제노바 사람 콜롬버스가 세척의 배로써 대서양을 건너 인도를 발견하겠다는 개척항해를 지원했다. 이사벨라-페르난도 부부(夫婦) 왕은 또 종교재판소를 설치하여 유태인과 아랍사람들의 개종(改宗)을 강제했다. 돈뿐 아니라 전문지식과 기술이 많던 유태인 수십만 명이 아프리카와 오토만 투르크로 탈출하는 바람에 스페인 쇠망의 길이 열린다.
  
   이사벨라-페르난도 부부왕의 무덤
  
   그라나다를 탈환한 기독교 세력은 이 상징적 도시에 성당을 짓기 시작하여 200년만에 완성한다. 돌산처럼 육중한 이 성당에 붙어 있는 '왕족 교회'가 특별하다. 이사벨라와 페르난도 두 사람의 무덤을 모신 교회이다. 교회안으로 들어가보면 지하에 부부왕의 석관(石棺)이 있고 1층에는 딸과 사위의 석관이 있다. 이사벨라는 1504년에, 페르난도는 1516년에 죽었다. 이 무덤 교회는 1506년부터 15년간 지은 고딕식 걸작품이다. 두 왕은 그라나다에 매료되어 이 도시에 묻히기를 원했다고 한다.
   스페인을 통일하고 신대륙을 발견케 했으며 스페인 전성시대의 막을 올린 세계사적 대인물이 여기에 묻혀 있다고 생각하니 역사의 무게에 눌리는 기분이 들었다. 두 왕이 썼던 왕관, 칼, 수집했던 미술품도 여기에 진열되어 있다. 이사벨라 여왕의 보석함도 있는데, 콜럼버스에게 이를 건네주면서 보석을 팔아 항해경비로 쓰라고 했다는 것이 가이드의 설명이었지만 이는 확인을 요한다. 이사벨라와 페르난도는 금슬도 좋았다고 한다. 이 또한 드문 사례이다. 근대 정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마키아벨리는 페르난도를 이상적인 통치술을 행사한 영명한 군주라고 평가했다.
  
  
  스페인의 혼 에스코리알 궁전 이야기
  
  
   중세의 유럽에서는 왕들이 정략 결혼을 통해서 국토를 넓혀가는 일이 잦았다. 당시는 국가가 왕의 私物이었다. 결혼에 따라 국가가 이 王家 저 王家로 소속이 바뀌었다. 유럽 여행을 하다가 보면 잘 이해할 수 없는 역사와 만나게 된다.
  
   16세기에 왜 스페인이 멀리 떨어진 시실리 왕국과 나포리 왕국을 지배하였는가, 왜 신성로마제국의 칼5세는 스페인에서는 칼1세로 불리고, 그는 어떻게 해서 스페인뿐 아니라 네덜란드, 사르디니아, 밀라노, 오스트리아, 시실리, 이탈리아 남부, 보헤미아(지금의 체코), 모라비아(지금의 체코), 독일 도시국가 등 프랑스와 영국을 뺀 거의 全유럽을 지배했던가. 칼1세의 아들 필립은 왜 오스트리아를 지배하지 못했던가.
   이런 사정을 이해하려면 유럽 왕가의 복잡한 결혼관계와 이에 따른 국경의 변경을 알아야 한다.
   유럽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정략 결혼은 칼1세와 필립 2세를 배출하게 되는, 지금의 오스트리아를 근거지로 하고 있던 합스부르그 왕조의 한 걸작품이다. 1477년 합스부르그의 프리드리히 3세는 아들 맥시밀리안을 프랑스의 부르고뉴 公國의 공주 마리아에게 장가보냈다. 마리아는 아버지 '용감한 찰스' 대공이 죽자 프랑스의 루이 11세의 침공으로 영토를 많이 빼앗겨 합스부르그 왕가의 보호를 받으려 했던 것이다.
   마리아와 맥시밀리안 사이에서 난 왕자가 필립이다. 마리아는 부르고뉴의 영토를 아들 필립에게 넘겨준다. 그때 부르고뉴 공국은 지금의 베네룩스 3국(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그)이 있는 네덜란드 지역까지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필립은 자동적으로 이 지역의 지배자가 되었다. 필립은 1496년에 스페인의 공주 조안나와 결혼한다. 조안나는 스페인을 공동 통치하던 페르디난드 왕과 이사벨라 여왕 사이에서 난 딸이었다. 필립과 조안나 사이에서 난 아들이 칼(영어로는 찰스) 1세였다.
   페르디난드 왕이 죽자 그의 손자인 칼1세가 1516년에 스페인 왕이 된다. 칼1세는 부르고뉴와 네덜란드에 더해서 스페인의 거대한 영토를 상속받는다. 즉, 스페인, 나폴리, 시실리, 사르디니아, 그리고 막 개척되고 있던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가 그의 소유가 된 것이다.
   이뿐이 아니다. 그의 할아버지인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맥시밀리언이 1519년에 죽자 그가 통치하던 독일, 오스트리아도 칼1세의 통치하에 들어간다. 칼1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로서는 칼5세로 불리었다. 이렇게 해서 칼1세는 프랑스와 영국과 포르투갈을 뺀 거의 全유럽을 통치하게 되었다.
   스페인 왕 칼1세 겸 신성로마제국 황제 칼5세는 마틴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과 잇따른 신구교의 종교전쟁을 수습하는 데 골치를 썩여야 했다. 칼5세는 중세의 정신적 권력을 잡고 있던 교황권에 도전한 루터를 침묵시키려고 했으나 독일의 많은 영주들이 루터 편에 서는 바람에 성공하지 못했다. 종교개혁이 시작된 1517부터 30년 전쟁이 끝나는 1648년까지 약130년간 유럽 전체가 신구교 갈등으로 전쟁, 학살, 암살, 파괴, 혁명이 휩쓰는 아수라장으로 빠져들었다.
   신성로마제국(독일과 오스트리아 중심의 연합체) 황제로서 칼5세는 1555년 독일 아우구스부르그에서 신구교간의 분쟁을 일단 봉합하는 평화협정을 신교측과 맺는다. 이 협정에 의해서 영주들이 신구교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개인에게는 종교선택의 자유가 주어지지 않았다). 칼1세는 결국 종교혁명의 진압에 실패한 것이다. 그 1년 뒤(1556년) 칼1세는 퇴위하여 수도원에 들어가버린다. 그는 아들 필립2세에게는 스페인의 왕위를, 동생 페르디난드 1세에게는 오스트리아와 독일을 통치하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자리를 넘겼다. 이로써 합스부르그 왕가는 스페인과 오스트리아로 양분되었다.
   여기서 16세기를 대표하는 인물인 필립2세가 등장한다. 필립 2세는 칼1세로부터 상속받은 스페인, 네덜란드, 부르고뉴, 나폴리, 밀라노, 아메리카 식민지에다가 1581년엔 포르투갈까지 병합한다. 필립 2세는 신교와 오토만 투르크의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카톨릭의 정통성을 수호하는 역할을 자임했다. 그는 검소하고 경건하며 신실한 신도였다. 카톨릭 세계의 수호자인 그의 관심은 유럽 각국에서 봉기하는 신교도 세력을 진압하는 데 집중되었다.
   그는 아메리카 식민지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富(부)를 전쟁에 썼다.
   처음에는 필립 2세가 유럽의 주도권을 쥐는 듯했다. 1557년 그는 프랑스 군대를 센트 퀜틴에서 대패시켰고 이를 기념하여 마드리드 근교에 에스 코리알이라 불리는 거대한 궁전 겸 교회당 겸 가족무덤을 짓기 시작했다. 그는 수도를 톨레도에서 마드리드로 옮겼다. 1571년 필립 2세는 베니스-교황청과 연합함대를 만들어 지중해를 위협하는 오토만 투르크의 함대를 레판토 해전에서 격멸시켰다.
   필립 2세는 네덜란드에서 신교도들이 독립전쟁을 일으키자 2만 군대를 보내 이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그는 포르투갈을 병합하여 신대륙의 식민지를 獨食했다. 하지만 1588년 필립2세는 결정적인 타격을 받는다. 네덜란드 독립전쟁을 사주한 영국을 치기 위하여 그가 보낸 무적함대가 영국해군에 의해 전멸되고 만 것이다. 네덜란드의 신교도들도 영국의 도움을 받아 결국은 스페인을 물리치고 독립을 쟁취하고 영국에서 카톨릭 세력은 엘리자베스 1세의 탄압을 받아 소멸하고 만다. 國富를 전쟁에 때려넣어 국가를 파산상태로 몰고간 필립2세는 에스 코리알 궁전에서 1598년 71세에 죽었다. 필립 2세는 16세기의 최강국 스페인의 전성기를 만들었으나 쇠퇴기를 열기도 했다.
   16세기는 스페인 필립 2세의 세기, 17세기는 네덜란드 해양인들의 세기, 18세기는 프랑스 루이 14세의 세기, 19세기는 大英제국의 세기, 20세기는 미국의 세기, 21세기는 중국의 세기가 아닐까.
   지금부터 필립 2세의 숨결이 남아 있는 에스 코리알 궁전을 탐험해보자. 마드리드에서 약30km 떨어진 산중에 있는 이 화강암 궁전은 화려한 맛보다는 필립 2세의 성격을 반영하여 장중하고 엄격하다. 이 건물은 1563년부터 1584년까지 21년에 걸쳐 집중적으로 건축되었기 때문에 그 양식이 통일적인 점이 특징이다. 1200개의 문과 2600개의 창을 가진 이 건물은 206X161m의 크기이다. 교회당의 돔은 높이가 91m이다. 궁전, 교회당, 가족무덤, 도서관의 용도를 가진 복합건물이다. 필립 2세는 이 도서관에서 책 1만권을 소장했다고 한다. 이 건물은 근엄하기 이를 데 없어 베르사이유 궁전이나 마드리드에 있는 스페인(부르봉 왕조) 왕궁의 호화스러움과 대비된다. 에스코리알의 장중한 멋은 독일계통 합스부르그 왕조의 고유 분위기이기도 하다. 에스코리알 궁전은 필립 2세의 혼이 서려 있는 역사적 유산이고 유네스코 지정 세계 문화 유산이지만 한국인 관광객들은 잘 가지 않는다.
   이 궁전의 필립 2세 집무실은 뜻밖에 작고 검소했다. 필립 2세가 썼던 중국제 접는 의자는 아무 장식이 없이 딱딱하다. 그의 침실은 예배당 바로 옆에 붙어 있어 일하다가도 언제든지 예배를 올리기 위하여 들릴 수 있게 설계했다. 그는 통풍으로 죽어가면서도 이 방 침대에 누워 교회의 성찬대를 바라보았다고 한다.
   필립 2세는 카톨릭의 개혁을 주도했던 제수이스트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보니 그 자신도 금욕적 생활을 보낸 것이 아닌가 느껴졌다. 19세기 스페인 철학자 미구엘 우나무노는 '무슬림 신도들이 메카를 순례하듯이 스페인 사람들은 에스코리알을 찾아가야 스페인의 혼을 느낄 수 있다'고 썼다. 이 건물의 내부도 군대 사령부처럼 엄숙하여 구경꾼들의 마음을 짓누른다. 구경을 끝낸 뒤 건물 바깥으로 나오면 해방감을 느낄 정도이다.
   스페인은 미국을 제외하면 외국 여행객들이 가장 많이 오는 나라이다. 관광수입도 연간 약400억 달러이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 문화유산수도 38개로 가장 많다. 에스코리알 같은 장엄한 독일적 건물이 있는가 하면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처럼 동양적인 이슬람 문명의 정수가 있고 스페인 왕궁처럼 화려한 라틴문명의 숨결도 느낀다. 동서양의 혼재, 서양적인 것중에서도 라틴적인 것과 게르만적인 것의 혼합, 현대적인 것과 중세적인 것의 공존이 스페인의 매력이다. 스페인을 여행하고 나면 뇌리에 찍힌 殘影(잔영)이 아주 오래 간다.
   에스코리알에서 약15분 거리에는 '죽은 자의 계곡'으로 불리는 동굴 무덤이 있다. 스페인 내전 때 죽은 4만 명의 양측 시신을 묻었다. 동굴을 262m 파고 들어가서 만든 추모회랑 끝에는 철권 통치자 프랑코의 무덤이 있다. 프랑코는 뭇솔리니와 히틀러의 지원을 받아 스탈린의 지원을 받던 공화파를 무너뜨리고 스페인을 재통합했다. 헤밍웨이 같은 1930년대의 서구 지식인들이 공화파를 지지하는 바람에 프랑코의 이미지는 매우 나쁘지만 적지 않는 스페인 사람들로부터는 존경을 받는 편이다. 필자가 방문했을 때도 그의 무덤 위에는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이 동굴무덤이 파인 岩山 위에는 시멘트로 만든 높이 125m, 너비 46m의 돌 십자가가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크다고 한다. 스페인의 문화재는 일단 스케일이 대단하다. 
  
[ 2015-12-10, 17:3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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