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킹의 후예들이 시실리에 세운 '태양의 제국'
바이킹과 노르만 紀行(5) 중세 유럽의 가장 개방적이고 풍요로운 文明을 만든 노르만 戰士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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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말피 해안

이탈리아에서 나의 노르만 紀行(기행)은 로마에서 출발, 라벨로, 아말피, 살레르노, 나폴리, 시실리(타오르미나, 노토, 시라큐스, 팔레르모 등)의 경로로 이뤄졌다. 노르만 전사들이 정복하고 통치하면서 남긴 흔적들이 성당, , , 모자이크, 전설로 남아 있는 곳이다. 로마에서 남쪽으로 달리는 도로의 왼쪽은 봄에도 눈이 덮인 산맥이 같이 뻗어 있다.

한 시간쯤 지나 높이
500m 쯤의 산꼭대기에 사진에서 많이 보아 친숙한 수도원이 나타났다. 몬테카시노 수도원이다. 6세기에 세워진 베네딕트 수도원의 본산이다. 9세기에 사라센 해적의 공격을 받아 황폐해진 몬테카시노 수도원은 노르만의 영향권 아래 들어간 1071년에 재건되고 알렉산더 2세 교황에 의하여 헌납되었다. 당시 수도원 건축엔 비잔틴 기술자들이 많이 참여하였다. 몬테카시노는 신학 연구와 靈的(영적)인 권위로 하여 교황청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058년 당시 수도원장인 데시데리우스는 나중에 빅토르 3세 교황이 되는데 약200명의 수도사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노르만 세력은 이 수도원을 후원했고 수도사 아마투스는 노르만에 아주 호의적인 기록을 남겼다. 1944215일 미군은 독일군이 숨어 있다고 판단, 이 수도원을 폭격했는데, 독일군은 없었고 수백 명의 피난민이 죽었다. 戰後(전후) 수도원은 재건되었다.

나폴리를 중심으로 한 베수비오스 산, 폼페이 유적, 소렌토 만, 카프리 섬, 아말피~살레르노 해안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연과 역사의 결합일 것이다. 한국인들은 나폴리의 겉만 보고는 혹평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역사와 문화의 깊이를 들여다 본 뒤엔 겸허해진다. 폼페이 유적을 구경한 다음 산을 넘어 아말피 해안으로 가는 길은 절벽과 협곡을 지난다. 아말피 해안 뒷산에 있는 라벨로라는 작은 산중 마을에서 내려다보는 아말피의 해안 경치가 세계최고라고 평한 사람은 이곳에서 살았던 미국의 소설가 고어 비달이었다.


기사본문 이미지

아말피는 절벽면을 수평 공간처럼 활용하여 도시를 건설하고 미로를 만들어 사라센 해적의 침략에
대응했다.

해안절벽을 깎아 세운 아말피는 10세기 전후 이탈리아의 4대 해양도시(피사, 제노바, 베니스)중 하나로 번영하였다. 이 도시도 12세기 초에 나폴리와 함께 노르만의 지배로 들어갔다. 14세기의 지진으로 도시의 상당부분이 무너져 내렸다. 이 그림 같은 도시의 중심에 있는 성당은 노르만-아랍 혼합의 로마네스크 건축양식이다. 노르만 전사들이 이 도시를 점령한 뒤 세웠다. 아말피~살레르노 해안도로는 S자 연속의 斷崖(단애) 위를 달린다. 구비를 돌 때마다 이 순간 브레이크가 고장 나면?”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르만 건축의 대표작인 살레르노의 성당로 로마네스크 건축인데, 56m의 종탑이 유명하다. 아랍과 비잔틴 기술자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여기엔 중세의 가장 위대한 개혁적 교황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그레고리 7세의 무덤이 있다. 그는 왜 로마가 아닌 살레르노에 묻혔는가?



교황과 황제의 갈등

11~12세기 독일의 신성로마 제국 황제는 로마의 교황과 늘 갈등하였다. 교황은 유럽 기독교 세계의 정신적, 종교적 수장인데, 세속 권력 면에서도 힘을 쓰고 싶어 했다. 반면,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교황의 정신적 지도력을 인정하면서도 관할지 교회에 대한 통치권, 특히 인사권을 확보하려고 했다. 당시 교회, 수도회 등 유럽 全域(전역)에 모세혈관처럼 퍼져 있던 교황 지휘하의 가톨릭 조직은 단순한 종교집단이 아니었다. 주교들은 영주처럼 땅을 소유하고 사법권 및 군대를 보유한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교황에 복종할 뿐 世俗(세속)권력으로부터는 독립성을 유지하려 했다.

초기의 神聖(신성)로마제국 황제는 교황과 주교들을 멋대로 교체할 힘이 있었지만 11세기에 들어서면 교회 안에서 개혁운동이 일어난다. 교황 입장에선 세속 권력이 성직자들을 임명하는 한 부패를 청산할 수 없다고 믿었다. 황제가 자격 없는 자들을, 돈을 받고 主敎(주교) 등 성직자로 임명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황제 입장에선 막대한 재산을 관리하는 고위 聖職(성직)에 측근들을 임명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래야 자기 () 사람들을 교회 기관에 취직시킬 수 있었다. 중세 유럽의 가장 큰 행정조직은 가톨릭 교회였고, 일자리도 가장 많았다. 主敎(주교) 임명권은 수많은 일자리를 만드는 인사권을 잡는 것을 뜻했다. 교황과 神聖로마제국 황제는 이 문제에서만은 타협이 어려웠다.

1059년 교황측은 종교회의를 열고, 교회법에다가 추기경 회의가 교황을 선출하도록 규정하여 황제의 영향력을 차단할 수 있게 하였다. 이렇게 뽑힌 교황이라야 황제의 측근이 아니라 가톨릭 세계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교황 측은 같은 해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대결할 수 있는 장치를 더 만든다. 로버트 기스카르가 지휘하는 노르만 戰士 집단이 이탈리아 남부를 정복한 것을 公認(공인)해주는 대신 그들로부터 교황에 대한 충성 서약을 받았다. 1066년 노르망디의 윌리엄이 잉글랜드로 쳐들어갈 때 교황청의 실력자는 노르만 성향의 힐데브란드(나중에 그레고리 7)였다. 그는 윌리엄의 로비를 받고는 교황을 움직여 잉글랜드 왕 해롤드를 파문했다. 파문 이유는 해롤드가 윌리엄에게 했던 약속(왕위 양보)을 깼다는 것이지만, 실제론 윌리엄공이 잉글랜드 정복에 성공하면 교황에 절대 충성할 것을 맹세하였고 세속적 영향력의 확대를 노린 교황청의 계산과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헤이스팅스 전투 직전 해롤드는 자신이 파문된 사실을 알고 크게
傷心(상심), 결전 날에는 아주 소극적인 지휘를 하다가 戰死(전사)하였다. 왕이 파문되면 그에게 충성하는 부하들도 같은 벌을 받게 된다. 해롤드는 자신이 파문 당한 사실이 부하들에게 알려지기 전에 서둘러 결전의 날을 잡았다는 해석도 있다. 윌리엄은 잉글랜드 정복이 성공한 이후엔 교황청에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大同團結(대동단결)의 전통이 강한 노르만 전사들은 교황을 이용하는 데 익숙했고 파문도 겁내지 않았다.


카노사의 굴욕

1073년 개혁정신에 불타는 그레고리우스 7세가 새 교황이 되었다. 그레고리 7세는 교황이 되기 전부터 여러 교황의 보좌관으로 일하면서 실력자 역할을 했다. 힐데브란드로 불린 그는 특히 노르만 전사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아베르사의 리처드가 제공한 300명의 노르만 戰士(전사)들을 지휘, 베네딕트 10세 반대 교황(antipope)을 몰아내고 니콜라스 2세를 등극시킨 것도 그였다. 1061년 알렉산더 2세를 교황으로 선출할 때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075년 그레고리 7세는 드디어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를 상대로 대결을 선언한다. 종교회의를 소집, 황제가 주교를 임명하는 것을 금지시킨 것이다. 이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하인리히 4세와 그 추종자를 파문하겠다고 경고하였다. 황제가 거부하자 교황은 황제를 파문하고, 황제에 대한 영주들의 충성서약이 무효라고 선언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독일의 교황측 영주들이 들고 일어나, 期限(기한)을 정하여 그 안에 파문이 해제되지 않으면 황제를 폐위시키겠다고 결의하였다. 하인리히 4세는 일단 전략상 후퇴를 결심하였다. 1077년 그는 눈 덮인 알프스 산맥을 넘어와 교황이 묵고 있던 이탈리아의 카노사 ()에 도착했다. 이때의 모습을, 그레고리 7세는 이렇게 묘사하였다.

<그는 아무런 敵意(적의)도 불손한 마음을 보이지 않고서, 자진하여 수 명의 종들을 데리고 내가 묵고 있던 카노사에 왔다. 그는 왕의 복장을 다 벗고는 3일간 성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울면서 再考(재고)를 호소하였다.>

이를 보고 그레고리 교황은 파문을 해제하고 하인리히를 황제로 복직시켰다. ‘카노사의 굴욕이라고 알려진 이 에피소드는 황제권에 대한 교황권의 승리를 상징하지만 그 후의 사태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하인리히는 독일로 돌아가자마자 보복에 나선다. 그에 반기를 들었던 영주들을 처단하고 독일 전체에 대한 통치권을 회복한 것은 1080년이었다.

그는 독일에 있는 교회 성직자 회의를 소집, 그레고리우스 교황의 폐위를 결의하게 하고, 이듬해 이탈리아로 쳐들어갔다. 황제는 그레고리우스를 쫓아내고 꼭두각시 교황을 세웠다. 3년간 이탈리아에선 교황군과 황제군이 死鬪(사투)를 벌였다. 황제군은 1084년에 수개월간 로마를 점령했고, 교황은 로마 내의 요새인 상안젤로 성으로 피신, 저항하였다. 이때 남쪽에서 기스카르가 지휘하는 노르만 援軍(원군)이 도착, 황제군은 저항도 하지 않고 로마에서 물러갔다. 로마를 탈환한 노르만군은 시내를 약탈하였다. 로마 사람들은 화가 나서 교황을 미워하게 되었다. 노르만군이 철수할 때 교황도 더 머물 수가 없게 되어 노르만군을 따라나섰다. 그는 노르만이 지배하던 살레르노로 피신, 다음해(1085)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이 위대한 개혁 교황은 죽은 뒤 살레르노 성당에 안치되었다. 이 성당은 1076년에 로버트 기스카르가 기공, 1084년에 그레고리 7세에 의하여 봉납되었다. 살레르노 대성당의 그레고리 7세 모비명은 '나는 정의를 사랑하였고 부정을 미워하였으므로 망명 중에 죽는다'이다.


무법자들이 법치와 문명을 건설하다

하인리히 4세도 勝者(승자)가 아니었다. 친교황측 영주들이 독일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후임 교황들은 이들을 지원하였다. 황제는 이탈리아에서 얻은 성과를 유지할 수도 없었다. 1106년 그는 파문당한 상태에서 사망하였다. 1122년 독일의 보름스에서 교황과 황제측이 타협했다. 독일에서 성직자 선출은 교회법에 따르기로 한 것이다. 다만, 황제나 황제의 대리인이 참석,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황제와 교황의 대결에서 일단 승리한 쪽은 교황이었다. 황제의 성직자 임명권을 제한하는 데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신성로마제국의 역대 황제들은 교황과 대립, 이탈리아 문제에 개입하느라고 정작 본거지인 독일 내부의 통치는 소홀히 하였다. 프랑스와 스페인, 그리고 영국에선 중앙집권적 王權이 강화되어 가는데도 독일은 여러 도시와 公國(공국)으로 분열되어 통일국가를 만들지 못하였다. 그런 사정은 이탈리아도 마찬가지였다. 독일과 이탈리아가 유럽에서 정치적 후진국이 되는 길이 열린 셈이다.

이런 가운데 남부 이탈리아와 시실리를 정복, ‘시실리 왕국을 만든 노르만 전사들은 유능한 행정가로 변신, 이 왕국을 당시 유럽에서 가장 번성하는 나라로 만들었다. 비잔틴과 아랍 사람들에게 종교와 通商(통상)의 자유를 허용하고, 문화와 예술 진흥의 후원자가 되었다.

노르만이 남부 이탈리아와 시실리를 통일하는 데는 100여 년이 걸렸는데, 마무리를 한 이는 로버트 기스카르, 그의 동생 루제로(영어론 로저) 1, 그의 아들 루제로 2세였다. 기스카르는 한때 지금의 크로아티아 지방까지 공략, 비잔틴을 정복하려고 했다. 시실리 왕국은 전성기엔 북아프리카도 점령했다. 기스카르의 아들과 윌리엄 정복왕의 아들은 1차 십자군의 선봉이었다. 노르만 전사들은 전투의 귀신이었지만 통치의 達人(달인)이기도 했다.

이탈리아 남부에 남아 있는 수많은 노르만-로마네스크 식 성당, 궁전, , 모자이크 등이 이들의 예술적 안목과 지배자로서의 수준을 보여준다. 서기 800년경에 시작된 바이킹의 해적질과 약탈은 서기 900년경부터는 노르만 시대로 넘어갔다. 노르망디에서 실력을 쌓은 戰士(전사)집단은 정복사업에 나서, 잉글랜드의 노르만 王朝와 시실리 왕국을 거의 동시에 탄생시켰다. 문명파괴로 시작한 바이킹 시대는 노르만 시대를 거치면서 문명건설로 마무리된다. 유럽을 무법천지로 만들었던 그들이 법치를 발전시킨다. 세계사에서 보기 힘든 위대한 逆轉(역전)이었다.


지중해의 진주시실리의 엄청난 역사

이탈리아를 여행하면 한국에서 교과서로 알았던 역사와 현지에서 알게 되는 역사가 달라 혼란에 빠진다. 이탈리아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두 文明(문명)-로마와 르네상스의 고향이지만 현재의 이탈리아라는 국민국가는 1861년에 반도가 통일되면서 建國(건국)되었으니 매우 젊다.

서기
5세기에 西로마가 무너진 후 19세기까지 1400년 동안 이탈리아 반도는 한 국가나 王朝(왕조) 아래로 통합된 적이 없다. 여러 王國公國(공국)과 도시국가, 그리고 교황 직할령 등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이런 분열상이 프랑스, 독일, 스페인, 비잔틴, 아랍, 노르만 등 외세의 침략과 개입을 불렀다. 이탈리아가 통일되기 전에 이 반도에서 가장 큰 나라는 11~12세기 노르만의 정복사업에서 비롯된 나폴리 王國(왕국)이었다. 로마 남쪽의 반도와 시실리를 다스린 나라였다. 이 왕국의 수도는 초기엔 시실리의 팔레르모, 나중엔 나폴리였다.

11
세기 이후 '시실리 왕국', '두 개의 시실리 왕국', '나폴리 왕국' 등으로 불렸다. 나폴리 이남의 이탈리아 반도와 시실리는 고대 문명이 꽃핀 그리스, 이집트, 중동, 지중해와 인접하여 늘 유럽 文明(문명)의 중심에 있었다. 특히 '지중해의 진주' 같은 시실리는 여러 번 다양한 민족과 文明이 거쳐 가고 섞이고 쌓인 곳이다. 시실리 여행을 하면 장대하고 풍요로운 자연(특히 지금도 噴火하는 에트나 화산)을 배경으로 明滅(명멸)해갔던, 여러 민족이 남긴 문명의 다양성에 경탄하면서 역사의 무게 앞에서 겸허해진다. 기원 전 8세기부터 그리스 사람들이 시실리에 건너와 동쪽의 시라쿠사 등 도시국가를 만들었다.

아프리카
北岸(북안, 지금의 튀니지)에 살던 카르타고 들도 몰려 와 서쪽에 정착하였다. 시실리의 州都(주도)인 팔레르모는 카르타고 사람들이 개척한 식민지였다. 카르타고-로마의 결전인 포에니 전쟁을 거치면서 시실리는 로마 지배로 넘어갔다. 시실리는 지금이나 그때나 농산물과 수산물 생산량이 많았다. 5세기, 西로마 제국이 무너지는 틈을 타서 라인 강 동쪽에 살던 게르만족이 침범한다.

게르만족의 선두 주자 반달족
, 고트족이 이 섬을 점령하고 약탈하더니 6세기엔 지금의 이스탄불(당시는 콘스탄티노풀)에 수도를 둔 로마제국(비잔틴)이 시실리를 탈환, 다시 기독교권으로 흡수되었다. 9세기 초부터는 중동을 석권한 사라센(이슬람 세력) 군대가 아프리카로부터 이 섬을 공략하기 시작, 827년엔 팔레르모를, 878년엔 시라쿠사를, 902년엔 타오르미나를 함락시켜 全島(전도)를 이슬람화한다. 이슬람 지배자들은 유태인과 기독교인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고 상공업을 장려, 시실리는 中世(중세)암흑기에도 번영하기 시작하였다.


노르만의 팔레르모

노르만이 팔레르모를 점령한 1072년부터 프랑스 안주가 시실리 왕국의 통치권을 장악한 1268년까지의 약 200년간은 노르만()의 지배 기간인데, 당시 유럽의 가장 역동적인 문명국가는 프랑스와 시실리였다. 시실리의 노르만 왕조는 세계사에서 굵게 기록되는 두 명의 名君(명군)을 배출하였다. 루제로 2세와 신성로마제국의 페데리코 2세 황제(노르만·독일 계).

<태양의 왕국(The Kingdom in the Sun)>이란 책을 쓴 영국의 존 율리우스 노르위치는 이렇게 묘사했다.

<루제로 1세는 이곳에서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통합이라고 생각했다. 2등 국민은 없어야 한다고 믿었다. 모든 사람들이, 노르만이든 이탈리아인이든, 롬바르드 사람이든 그리스인이든, 심지어 사라센이든 모두가 새 나라에서 할 역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랍말, 그리스말, 라틴어, 그리고 노르만의 프랑스어를 같이 쓰게 하였다. 아랍 사람들의 용어인 팔레르모의 에밀이란 말도 바꾸지 않고 그 官職(관직)에 그리스 사람을 임명했다. 재정 책임자는 사라센 사람이었다. 모스크엔 사람이 붐볐고, 라틴 및 그리스 성당이 많이 생겼다. 아랍사람들로만 편성된 부대도 운영했는데 충성도와 軍紀(군기)가 셌다. 평화가 무역을 활발하게 했다. 해적들을 몰아내니 해운이 발달했다. 1101년 그가 죽었을 때 시실리 왕국은 복합적인 종교와 언어와 인종을 포용하면서도 기독교 지도자에게 충성하는 나라가 되어 있었다. 지중해에서 가장 번영하는 나라의 길이 열렸다.>

아랍인 지리학자 이드리시는 <팔레르모처럼 장대하고 화려한 건축물이 가득 찬 도시는 없고, 팔레르모의 정원만큼 아름다운 경관도 없다>고 칭송했다. 유럽의 야만인이 지중해의 문명인이 된 것이다.


두 성당의 전투

남이탈리아와 시실리를 정복한 노르만 전사들이 세운 시실리 왕국은 수도를 팔레르모로 정했다. 역사적 권위가 느껴지는 이 도시는 마피아가 내부 규율을 잡아서 그런지 소매치기 등 좀도둑의 준동이 덜하다고 한다. 팔레르모 오페라 극장에 가서 베르디의 나부코를 구경하였는데, 정장을 하고 온 상류층의 인상은 이탈리아라기보다는 北歐(북구)나 독일 분위기였다. 사람들의 몸이 크고 금발이 많았다. 노르만의 혈통을 받은 이들이 아직도 상류층인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팔레르모엔 노르만 양식의 건축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노르만 궁전 안에 있는 예배당의 화려한 모자이크, 팔레르모 성당과 몽레알레 성당의 로마네스크 양식은 서양 미술사에 늘 기록되는 문화유산이다. 이 세 곳을 다 둘러본 인상은 개방, 육중, 多樣(다양), 그리고 관용과 풍성함이다. 가톨릭, 비잔틴, 이슬람의 건축과 예술이 융합된 덕분이다. 노르만 식 강건함과 지중해 식 화려함이 조화를 이룬다.

팔레르모 성당은 노르만 왕조 시절인 1184년에 기공된 이후 700년간 증개축을 이어갔다.

노르만 로마네스크 양식을 바탕으로 하여 고딕, 스페인, 이슬람, 바로크, 신고전주의 양식이 더해졌다. 건축사의 흐름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더구나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성당이다. 한 도시를 대표하는 성당은 하나가 원칙인데 팔레르모엔 두 개가 있다. 팔레르모 성당과 근교의 몽레알레 성당. 팔레르모 성당의 대주교는 교황의 지원을 받아 노르만 왕을 견제하는 역할을 했는데, 노르만 왕은 그를 견제하기 위하여 몽레알레 성당을 따로 지었다. ‘두 성당의 전투라고 불린다.

팔레르모 성당엔 노르만 왕조의 전성기를 열었던 루제로(영어로는 로버트) 2, 그의 딸 콘스탄스, 그의 남편 하인리히 4(신성로마제국 황제), 두 부부의 아들 페데리코 2(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무덤이 있다. 石棺(석관)앞에 서면 12세기 전후 유럽 역사를 대표하는 노르만 계통의 두 名君(루제로 2, 페데리코 2)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두 사람 모두 르네상스적 인간형이었다. 학문과 예술을 후원하고, 종교적 차별을 거부하였으며, 법치를 세우려 노력하는 과정에서 주로 교황권과 맞섰다.


가톨릭과 이슬람과 비잔틴을 융합한 노르만 예술

팔레르모 시내 한복판에, 루제로 2세가 12세기에 지은 요새 형 궁전이 있다. () 청사로 쓰이는 이 건물은 시실리 지배층의 역사를 이어간다. 카르타고-로마 식 요새 터 위에 아랍 인들이 자신들의 요새를 세웠고, 노르만이 새로운 지배자가 되자 그 요새를 넓히고, 화려하고 육중한 궁전을 올린 것이다.

이 건물 안에 궁전 예배당’(Cappella Palatina)을 지어 봉납한 이는 루제로 2세였다. 코린트 식 화강암 기둥에 의하여 세 神廊(신랑)으로 구분된 聖所(성소)의 벽을 장식한 모자이크가 눈부시다. 金箔(금박) 배경에다가 비잔틴 양식의 이미지와 아랍 양식의 디자인으로 성경 이야기를 표현하였다. 한 지붕 안에서 당시 유럽의 3대 세력이었던 이슬람, 가톨릭, 비잔틴의 문화와 종교가 융합하고 조화를 이룬 점에서 예술의 목표를 다한 건물이란 평가를 받는다.

루제로 2세와 페데리코 2세가 이 궁전의 주인공이었을 때 팔레르모는 유럽에서 가장 자유롭고 번영하는 문화의 중심지였으나 永續(영속)되지는 못했다. 지배층이 안주, 아라곤, 스페인으로 바뀌면서 노르만 식 개방과 관용의 문화가 사라져 갔고 이는 시실리의 오랜 쇠락을 뜻했다. 노르만 지배층은 우수한 제도를 안착시키는 데는 실패한 것이다. 뿌리를 내리게 할 중심 세력이나 사회적 토양이 없었다. 반면 잉글랜드에선 노르만 정복자들이 프랑스의 선진된 제도를 가져와서 토착 앵글로-색슨()의 제도와 융합시키는 데 성공, 노르만의 우수성이 이어질 수 있었고, 대영제국의 번영으로 결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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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레알레 성당(촬영: 韓五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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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에 붙은 수도원의 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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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을 바치는 굴리에모 2세像



시대를 앞서간 페데리코
2

팔레르모 근교 山麓(산록)에 있는 몽레알레 대성당은 노르만 왕조의 굴리에모(영어론 윌리엄) 2세가 세운 것이다. 노르만-비잔틴-아랍식이 혼합된 건축물이다. 13세기 말에 단기간에 완성되었다. 굴리에모 2세가 적극적으로 후원한 덕분에 공사기간이 단축되었다.

굴리에모 2세는 라틴어, 아랍어 등에도 능통하였고, 인문적 교양이 풍부한 온후, 관용, 경건한 성품의 왕이었다. 교황권의 대리자인 팔레르모 대주교가 앉아 있는 팔레르모 대성당이 있는데도, 왕이 나서서 같은 圈域(권역) 안에 또 대성당을 지은 데는, 교황의 간섭을 약화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 몽레알레 대성당 벽면엔 6340 평방미터에 걸쳐 비잔틴 풍의, 성서 이야기를 소재로 한 모자이크 그림이 장식되어 있다.

천지창조에서부터 베드로의 십자가
까지 수많은 에피소드를 그린 것이다. 중세 때는 일반 신도가 성경을 읽을 수 없었으므로 신부가 이 그림들을 보여주면서 설명을 하였을 것이다. 성당을 '돌에 새긴 성경'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이 성당에서 실감할 수 있다. 굴리에모 2세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을 이 성당에 모셔 권위를 더했다. 노르만 왕조의 마지막 왕은 굴리에모 2(영어론 윌리엄 2)인데, 아들이 없어 고모 콘스탄스(할아버지 루제로 2세의 딸)를 후계자로 지명한다. 시실리 왕국의 노르만 왕조는 150여년 만에 가 끊어졌다.

콘스탄스는 독일 스와비아 왕조 출신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바바로사의 장남 하인리히와 결혼하고, 바바로사가 죽자 하인리히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하인리히 6) 및 시실리 왕으로 등극했다. 콘스탄스는 아들을 낳는데, 페데리코 2(영어로는 프레데릭, 독일어로는 프리드리히 2)였다. 독일과 이탈리아 북부 및 지금의 체코, 네덜란드, 헝가리 등지를 관할지역으로 삼았던 신성로마제국은 중앙집권화된 적이 없었다. 느슨한 제후국 연합체였다.

이 신성로마제국에 대하여 18세기 프랑스 계몽사상가 볼테르는 '신성하지도, 로마답지도, 제국 같지도 않다'고 조롱한 바 있다. 페데리코 2세는 독일을 멀리하고 시실리에 머물면서 이탈리아 반도 전체의 통일을 시도하였다. 이탈리아 통일은 교황권과 교황 직할령을 정리하고 외세의 개입을 차단하지 않으면 이뤄질 수 없는 꿈이었다. 페데리코의 통일 꿈은 600년 뒤에야 현실이 된다. 시대를 앞서간 영웅이었다.

 

[ 2016-04-02, 06:3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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