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킹과 노르만 紀行(5)/시실리의 노르만 王國
우리는 흔히 좋은 경치를 보면 “그림 같다”는 말을 한다. 2013년 3월 중순 시실리의 동해안 도시 타오르미나의 그리스 극장 관람석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았을 때 무심코 나온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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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를 타고 산길을 달려 ‘어금니’ 城(카스텔 몰라)에 도착했다. 해발 600m를 넘는 산이라 에트나 화산이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이 산꼭대기 마을에도 성당, 호텔, 그리고 맛있는 커피점이 있다. 골목을 걸어가다가 LG 상표가 붙은 에어컨을 발견했다. 이젠 한국인이 노르만처럼 세계를 싸돌아다닌다는 증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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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시실리 페리船에서 찍은 에트나 火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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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실리의 타오르미나에서 바라본 山頂 도시 카스텔 몰라. ‘어금니’란 뜻이다.

리는 흔히 좋은 경치를 보면 그림 같다는 말을 한다. 2013년 3월 중순 시실리의 동해안 도시 타오르미나의 그리스 극장 관람석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았을 때 무심코 나온 말이기도 하다. 청명한 하늘, 正面엔 연기를 내뿜는 에트나 화산의 꼭대기(3300m)가 보였다. 왼쪽으로는 높이 200m의 해안 절벽 위에 만든 2700년 역사를 가진 도시 타오르미나, 그 뒤편엔 깎아지른 절벽 위에 쌓은 성벽과 어금니라는 뜻을 가진 山頂 마을 카스텔 몰라. 타오르미나에서 내려다 본 이오니아 의 색감은 코발트 블루이다. 여러 번 빤 청바지 색깔이다.

양쪽에 늘어선 상점들과 교회를 지나 약
1.5km, 타오르미나 중앙로를 걷다가 절벽 위에 조성한 작은 광장에 섰다. 낙차 약 150m 아래 해안의 모래사장이 빛난다. 타오르미나는, 보는 이들의 뇌리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映像(영상)을 남긴다. 화산, 바다, 해안, 절벽, 유적, 마을, 교회, 수도원, 城砦(성채), 하늘, 꽃밭이 어우러진 에덴동산의 이미지이다나는 16세기 수도원을 개조한 상 도메니코 팰리스 호텔에서 묵었다. 절벽 위에 있는데 영화 '그랑 블루'의 무대가 된 호텔이다. 타오르미나 해안에서 벌어진 세계 프리 다이빙 대회에 참석한 선수단이 머무는 곳으로 나온다

타오르미나를 유럽의 인기 관광지로 만든 이는 독일 화가 오토 겔렝과 文豪(문호) 괴테이다. 괴테는 이탈리아 여행에서 타오르미나의 경관을 격찬하였다. 베를린이 고향인 게렝은 나이 스무 살 때 시실리를 여행하다가 타오르미나에 매혹되어 겨울을 지내면서 이 도시의 환상적 모습을 畵幅(화폭)에 담아 가 독일과 프랑스에서 전시하였다. 그림을 본 유럽의 미술 평론가들은, “空想(공상)이 심하다고 비판하였다. 겔렝은 타오르미나를 가보라. 만약 내가 과장을 하였다면 경비를 물겠다고 선언하였다.

타오르미나는 감수성이 좋은 많은 예술가, 문학가들을 끌어들였다. 특히 방랑벽이 있는 사람들이 이 도시에 머물면서 그들의 인생을 바꿀 작품을 남겼다. 영국의 D.H. 로렌스와 미국의 트루먼 카포테는 폰타나 베키아라는, 17세기 빌라에서 장기 투숙하면서 작품을 썼다.

택시를 타고 산길을 달려 어금니(카스텔 몰라)에 도착했다. 해발 600m를 넘는 산이라 에트나 화산이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이 산꼭대기 마을에도 성당, 호텔, 그리고 맛있는 커피점이 있다. 골목을 걸어가다가 LG 상표가 붙은 에어컨을 발견했다. 이젠 한국인이 노르만처럼 세계를 싸돌아다닌다는 증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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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극장에서 본 타오르미나. 타오르미나 뒷산의 꼭대기엔 노르만 山城(산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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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0년 간 종교 시설로 계속 사용되는 시라쿠사 성당(촬영: 韓五洙)



편안한 시라쿠사 성당

기원전 480년 카르타고의 공격을 물리친 시라쿠사 왕의 명령에 따라 아테네 신을 모시는 도리아式 神殿(신전)이 교회 자리에 세워졌다. 기원 전 415년 펠로포네소스 전쟁 때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편에 선 시실리의 시라쿠사를 공격하였다가 패전한다. 기원 전 398년 플라톤이 시라쿠사를 방문, 이상향이라고 칭찬했다. 사도 바울은 로마로 선교 여행을 할 때 시라쿠사에 도착, 기독교를 시실리에 소개했다. 기독교 공인 후 그리스 신전은 교회 건물로 개조된다. 시실리는 로마 멸망 후 반달, 고트족의 공격을 받다가 로마제국, 즉 비잔틴의 지배로 넘어갔다. 서기 878년 아랍이 시라쿠사를 점령, 이 교회 건물을 모스크로 改造하였다. 1085년 노르만이 아랍세력을 몰아내고 시라쿠사를 수복한 뒤 모스크를 성당으로 바꾸었다. 성당의 관할권은 로마 교황으로 넘어갔다. 노르만은, 성당을 확장, 木造(목조)지붕을 올리고, 모자이크를 붙였다. 1693년 대지진 때 많이 부서져 正面(정면)을 바로크 양식으로 바꾸었다. 2500년간 중단 없이 그리스 신전, 이슬람 모스크, 기독교의 교회로 사용된, 역사의 숨결이 멈추지 않는 건물이다. 일본인 역사 저술가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 멸망 후 지중해 세계'라는 책(한길사)에서 시라쿠사 성당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시라쿠사 성당은 기독교 교회로 돌아간 뒤에도 아랍 색채가 전혀 보이지 않고, 교회가 되기 전에 古代 신전이었던 前歷(전력)이 지금도 압도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강력하게 다가온다. 시라쿠사는 기독교 세계가 되든 이슬람에 굴복하든 상관없이 고대 그리스를 줄곧 질질 끌면서 살아왔다는 느낌이 든다. 고대 그리스 조각처럼 쓸데없는 요소를 모두 제거한 뒤에 흐르는 고요함과 편안함으로 가득 차 있다. 꼭 필요한 최소한의 것밖에 없는데도 더 없는 풍요로움을 느끼게 한다. 이런 느낌의 서재를 갖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마음을 사로잡았다.>

軍事(군사)에 취미가 있는 필자가 노르만 紀行에서 가장 편안하게 느낀 곳은 달걀이란 뜻을 가진 나폴리 만의 카스텔 델오보 海城(해성)이었다. 시실리 왕국(시실리와 남부 이탈리아 지배)의 전성기를 연 노르만族 루제로 2세가 12세기 초, 나폴리를 점령한 뒤 지은 성인데, 수백 명이 들어가서 살 수 있는 우람한 城砦(성채)이다. 루제로는 한때 이 성에 머물렀다. 파도를 맞으면서 버티어온 당당한 성벽을 바라보니 바다에서 기른 힘으로 문명을 파괴하다가 기독교화한 이후엔 문명 수호자로 돌변한 바이킹의 이미지와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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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의 노르만海城 카스텔 델오보의 성벽

바이킹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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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고틀란드에서 발견된 바이킹 그림. 피의 독수리 방식의
사형 집행 장면이 새겨져 있다
.  

미국 히스토리 채널의 연속 드라마 바이킹엔 잔인한 장면이 많이 나오지만 史實(사실)에 충실하다. 특히 그들의 독특한 법의식이 잘 표현되었다. 바이킹-노르만은 정복지를 잘 다스려 一流 국가로 만드는 비상한 재주가 있었다. 이들이 다스린 나라들은 예외 없이 부국강병의 법치국가가 되었다. 잉글랜드, 시실리 왕국,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아이슬란드 등. 그런 비결의 핵심은 이들의 法治(법치) 정신이었다. 야만 상태에서도 法的(법적) 제도와 전통을 유지, 발전시켜간 점이 신비롭기까지 하다.  

바이킹-노르만의 ()에 대한 관점이 독특했다. 그들은 법을, 正義(정의)를 구현하는 수단으로 보지 않았다. 공동체를 유지하는 질서로 여겼다. 그들의 법 집행은 증거와 證人(증인)重視(중시)하고, 매우 실용적이었다. 바이킹은 나쁜 행위가 반드시 나쁜 사람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殺人(살인) 행위에 대한 처벌도 슬기롭게 했다.  

사람을 죽여 놓고도 일정한 時限(시한)에 자수하면 정상을 참작하였다. 바이킹 법은 살인한 자는 행위를 한 뒤 만나는 첫 번째 사람에게나, 세 집을 지나치기 전에 자수를 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살인을 한 뒤 적절한 조치를 취하였을 경우엔 추장이 재판장 역할을 하는 주민회의에서 피살자 가족에 대한 배상을 하는 조건으로 死刑(사형)을 면제해주기도 했다.  

사람을 죽이고도 신고하지 않거나 밤에 몰래 죽이는 행위는 용서하지 않았다바이킹은 보다는 명예와 수치심을 法治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다. 정정당당한 행동을 했느냐의 與否(여부)가 유무죄를 판단하는 데 잣대가 되었다. 예컨대 누군가가 사고를 만나 죽어가는 것을 보고도 가족에게 알리지 않은 행위는 살인죄에 준하여 처벌했다. 회식 장소에서 살인이 벌어지면 모든 참석자들은 가해자를 체포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런 의무를 다하지 않은 자는 피살자 유족들에게 배상해야 했다도둑질을 하다가 발각된 절도범은 죽여도 죄가 되지 않지만 강도를 죽여선 안 된다. 절도는 피해자 몰래 하지만 강도는 面前(면전)에서 이뤄지므로 피해자에게도 최소한의 방어 수단은 보장된다고 판단한 결과이다.  

사소한 절도에 대한 처벌법은 통로를 만들어 지나가게 해놓고 마을사람들이 돌을 던지는 것이었다. 이 집단 폭행에서 빠지는 주민에겐 벌금을 물렸다. 범죄자 처벌을 공동체의 의무로 규정한 것이다. 從北세력에 대해서도 한국인이 이런 法的 의무를 지도록 하면 문제 해결이 쉬울 것이다.  

법치엔 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천재지변이 잦고 농사를 망치고 바다에서 물고기가 잡히지 않아 주민들이 굶게 되면 ()에게 황소를 잡아 바쳤다. 효과가 없으면 산 사람을 祭物(제물)로 바쳤다. 이것도 소용이 없으면 왕을 祭物(제물)로 바쳤다


‘피의 독수리
 

바이킹은 피의 독수리라는 잔인한 死刑(사형) 집행 의식을 유지하였다. 바이킹이 남긴 와 그림에 소개된 방법은 이렇다<히스토리 채널 시리즈 바이킹에선 그 장면이 생생하게(처참하게) 재연되었다.> 이 사형 방식은 왕이나 주교, 또는 추장과 같은 자가 重罪(중죄)를 범했을 때 적용하였던 것 같다.  

사형수의 등을 칼로 갈라 가죽을 벗기고, 등뼈를 드러낸다. 갈비뼈를 부러뜨려 날개처럼 펼친다. 상처엔 소금을 뿌린다. 허파를 등 뒤로 잡아 당겨 어깨 위에 얹어 놓는다. 이 모습이 피로 그린 독수리와 비슷하다고 한다. 이렇게 칼질을 해도 사형수는 비명을 지르지 않아야 한다. 입을 다물고 침묵으로 버티면서 죽어야 오딘 ()을 만날 수 있다. 한번이라도 소리를 질렀다가는 죽어서 좋은 데를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잉글랜드의 캔터베리 대주교, 잉글랜드의 노슴브리아 왕, 노르웨이의 왕자가 이런 형을 받아 죽었다고 전한다.  

노르만 戰士(전사) 집단의 이탈리아 남부 정복 역사를 다룬 책 北人’(The Normans in the South, 1016-1130) 著者(저자) 존 율리우스 노르위치(John Julius Norwich)는 유럽에서 無法(무법)천지를 만든 노르만과 바이킹이 法治를 세우는 일에 전념하였다는 것은 하나의 파라독스라고 표현했다. 아무리 파렴치한 노르만 지배자라도 아주 독창적인 법과 제도를 만들어내곤 하였다는 것이다. 노르만 戰士들은 국가를 세우는 데는 법이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법치를 강화하는 것이 정권을 강하게 만드는 길이라고 계산하였다.

이들은 법을 도덕적으로 보지 않고 실용적으로 인식하였다
. 잉글랜드의 노르만 왕 헨리 2세와 시실리의 노르만 王朝 건설자 루제로 왕은 치밀한 법적 제도를 갖추는 데 총력을 경주하였다. 그들은 법을, 관념적 理想(이상)이나 正義(정의)라고 착각하지 않았다. 노르만은 법을 주인이 아니라 노예로 여겼다. 노예는 튼튼할수록 도움이 된다. 법치도 튼튼하게 만들어야 지배자와 공동체에 유리하다고 본 것이다야만의 바이킹이 유럽 문명의 위대한 遺産(유산)法治에 기여하였다는 것은 세계사에서 가끔 발견되는 경이로운 逆轉劇(역전극)의 한 ()이다.

一流국가 제조창인 바이킹과 노르만의 그 비결은 용맹성, 뛰어난 조직관리, 종교나 민족을 뛰어남는 포용성, 실력제일주의 등 여러 가지이지만, 가장 중요한 걸 하나만 꼽으라면 '법치주의'이다. 왕조임에도 법의 지배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는 것은, 특히 문명 파괴자로 역사에 등장한 무지막지한 戰士집단이 그러하였다는 것은 세계사의 한 경이이다.

*현기증 나는 시실리의 역사


유럽문명의 십자로인 지중해의 섬 시실리는 대강 15개 민족의 지배를 받았다. 페니키아, 그리스, 카르타고, 로마, 비잔틴, 아랍, 반달, 고트, 노르만, 프랑스, 독일, 스페인, 오스트리아, 영국, 이탈리아. 이들이 남긴 다양한 양식의 성당, 신전, 성채, 도시 등이 수려한 자연을 배경으로 펼쳐져 있다. 무대 장치의 중심은 3300m의 에트나 화산, 늘 연기를 내뿜는다. 유적의 密度(밀도), 문화의 다양성, 자연경관의 수려함을 합산하면 이곳이 아마도 세계 최고의 관광지일 것이다.

 

시실리의 역사 年表(연표)를 본다.

 

1. 기원 전 900-700: 아프리카 튀니지 지방에 살던 카르타고(페니키아) 사람들이 미케네 사람들을 밀어내고 정착.

2. 기원 전 750-215: 그리스인들이 시실리로 건너와 도시를 건설한다. 시라쿠사, 타오르미나, 엘리체, 아그리젠토 등. 올리브와 포도, 그리고 무역으로 번성했다. 아그리젠토와 시라쿠사 연합군이 기원 전 480년에 카르타고 군을 무찌르고 황금기를 연다. 기원 전 415-413년에 그리스 본토에서 아테네 군이 시라쿠사를 쳐들어왔다가 패배, 7000명이 포로가 되어 노예가 된다. 시실리엔 그리스 유적이 많다.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비잔틴도 그리스 문화였으므로 시실리의 문화적 토양은 기본이 그리스이다.  

3. 기원 전 264-211: 카르타고-로마 사이의 포에니 전쟁에 휘말린다. 로마군이 카르타고 세력을 몰아내고, 시실리의 지배자가 된다.

4. 기원 전 218-기원 후 468: 로마 시대. 이때 만들어진 유적들이 로마 대저택과 바닥 및 벽화(Villa Romana del Casale at Piazza Armerina), 타오르미나의 로마식 극장, 카타니아의 로마 극장과 원형 경기장 등이다.

5. 기원 후 468-476: 게르만족의 일파인 반달족이 北아프리카에서 쳐들어왔다.

6. 기원 후 476-535: 게르만 고트족이 시실리를 지배한다.

7. 기원 후 535-827: 그리스 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비잔틴(동로마제국)이 약 300년 간 지배. 시실리에 그리스 문화의 발자취를 덧 씌웠다. 663년엔 잠시 시라쿠사가 비잔틴 제국의 수도로 콘스탄틴노플을 대체하기도 했다. 700년 무렵부터 아랍의 침공이 시작된다 

8. 기원 후 827-1061: 아랍 지배로 들어갔다. 스페인으로 진출한 아랍군과 北아프리카에서 온 베르베르족 등의 연합군 1만 명이 상륙, 832년에 팔레르모를 점령, 수도로 정했다. 아랍 지배 하의 팔레르모는 세계에서 가장 다양하고, 번성한 문화, 通商(통상)의 도시였다. 종교적 관용, 낮은 세금 덕분이었다. 878년엔 시라쿠사까지 점령, 시실리 전체가 아랍 치하로 들어갔다.

9. 1060-1194: 노르만 시대. 1059년 교황 니콜로 2세는 프랑스 노르망디의 오트빌 家門(가문)의 남부 이탈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한다. 조건은 노르만인들이 비잔틴 제국의 침입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1064년에 오트빌 가문의 루제로가 이끄는 노르만 군대가 시실리의 메시나에 상륙한다. 아랍이 비잔틴 세력과 싸우기 위하여 도움을 요청하였기 때문이다.

이후 노르만은 시실리의 지배자인 아랍 세력을 굴복시켜나갔다. 1071년엔 수도 팔레르모를 점령했다. 소수였던 노르만은 개방적이고 너그러운 통치를 했다. 비잔틴(주로 그리스계) 기술자들과 아랍의 관료체제를 결합시켜 시실리를 효율적으로 관리한다. 아랍과 비잔틴 양식이 혼합된 위대한 문화유산을 남겼다. 아랍 말은 이탈리아와 프랑스어로 교체되고, 교회의 구조는 라틴화되어 그리스 영향력이 점차 감퇴한다.

시실리엔 노르만 지배 시절에 건설된 궁전, 성당, 城들이 많다. 팔레르모 일대의 노르만 궁전과 대성당은 세계적인 문화재이다. 시실리 全域(전역)에 세워진 노르만 城과 요새는 규모가 크다. 노르만은 점령하는 곳(영국, 나폴리, 시실리, 노르망디 등)마다 거대한 성과 성당을 지었다. 그들은 파괴자로 시작하여 건설자가 되었다.

기원 전 1130-1154년 사이 시실리 왕 루제로 2세는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노르만 왕국은, 시실리, 남이탈리아, 말타, 북아프리카, 중동에 걸쳐 영토를 확대하였다. 노르만 전사들은, 유럽 세계의 2대 강국인 비잔틴 제국과 신성로마 제국을 동시에 상대하면서 교황을 두 번이나 포로로 잡는 등 영웅적 활약을 하였다. 기원 전 1154-1166년 굴레모 1(영어로는 William I), 1166-1189 굴레모 2세 때 시실리의 노르만 왕국은 전성기를 맞는다. 굴레모 2세가 팔레르모 근교에 세운 몽레알 성당은 노르만 건축의 대표작이다. 1189-1194 년 사이, 노르만 왕국은 굴레모 2세의 사망 이후 분열되더니 독일의 호헨스타우펜 왕가(독일의 스와비아 지방 출신)로 넘어갔다.

10. 기원 후 1194-1266: 호헨스타우펜 가문의 지배시절. 중세 유럽의 名君 중 한 사람인 신성로마제국 황제 페데리코 2세(영어로는 프레데릭, 독일어로는 프리드리히 2세)를 배출하였다.  

11. 
1266-1282: 프랑스 앙주 公家(공가)의 지배. 앙주는 시실리 사람들을 탄압하다가 1282년 부활절 때 민중봉기가 발생, 시실리에서 추방된다 

12. 1282-1516: 스페인 아라공 왕국이 시실리 귀족들의 초빙을 받아 앙주를 대신하여 시실리를 지배하지만 남부 이탈리아는 여전히 앙주 支配(지배)를 받았다. 시실리는 이탈리아 본토 및 유럽 문명과 단절되면서 쇠락하기 시작한다. 노르만은 시실리와 이탈리아 남부를 합쳐서 시실리 왕국으로 다스렸는데, 아라공 家門은 부활절 폭동 이후 시실리만 통치하였고, 남부 이탈리아는 계속 앙주 가문의 지배를 받았다. 1492년 콜럼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 스페인은 시실리에 대한 관심이 약해졌다. 부패한 관료, 가혹한 종교재판이 시실리의 특징이었던 관용과 개방성을 파괴해갔다 

13. 기원 후 1516-1713: 합스부르크 家門이 다스리던 스페인 왕국(아라공 카스틸 등이 통합)의 지배를 받았다. 스페인은 시실리를 착취하였고, 폭동이 빈발하였다. 1669년엔 에트나 화산이 폭발, 카타니아 일대를 황폐화시켰다. 1693년의 대지진 후 도시를 재건할 때 노토, 라구사, 시라쿠사 등에는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바로크 건축물을 지었다.

14. 1713-1720: 스페인이 시실리 통치권을 사보이 가문에 넘겨주었다. 1720, 사보이 가문은 시실리를 오스트리아에 넘기고 사르디니아를 얻었다.

15. 1720-1734: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 지배.

16. 1734-1806: 부르봉 王家(왕가)의 스페인이 다시 시실리를 지배한다. 1799년 나폴레옹이 나폴리를 침략하니 페르디난드 왕은 시실리로 달아났다. 영국의 넬슨이 돕는다.

17. 1806-1815: 영국이 시실리를 통치, 양원제 의회를 설립하고, 봉건적 특권을 폐지하는 등의 개혁을 했다. 1815년 나폴레옹이 워털루에서 패배하자 영국은 시실리를 부르봉 왕가에 돌려주었다 

18. 1815-1860: 스페인 부르봉 왕가의 지배.

19. 1860-1946: 통일 이탈리아 왕국 지배. 1943, 연합군, 시실리에 상륙, 독일군을 몰아내다.

20. 1946년 이후: 이탈리아 공화국

시실리가 이탈리아 지배를 받은 것은 최근 150여 년이고 그 전엔 스페인 지배를 약500년간 받았다. 시실리에 가면 스페인 냄세가 나는 이유이다.

[ 2016-04-04, 12:0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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