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민족의 野性은 어디서 나오는가?
몽골 草原 역사 紀行(2)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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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西安)-진시황(秦始皇)의 꿈
  
   답답한 농경사회
  
  1996년 5월25일 오전 9시25분 우루무치 공항 이륙. 서안(西安)까지의 비행은 오른쪽으로는 눈덮인 天山산맥, 왼쪽으로는 회색빛 타클라마칸 사막, 그 사이로 날아가는 것이었다. 1시간30분을 달려도 사막 상공이었다. 사하라 사막에 이어 세계 제2의 넓이를 가진 사막이다. 유입수로(流入水路)의 고갈, 또는 변화 탓인지 옛날에는 호수였던 곳이 바닥이 드러난 채 사막이 돼 버린 곳도 보였다. 우루무치에서 西安(漢唐시대엔 長安)까지의 이 거친 땅에 난 길을 '비단길'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상당한 시인적(詩人的) 감각이다. 비단길의 출발점인 西安공항에 내려 시내로 들어가는 한 시간의 드라이브는, 잠시 신강의 유목·오아시스 文化에 젖었던 우리로서는 농경사회로의 복귀였다.
  
  우루무치와 天山산맥에서 느꼈던 이국적이고 개방적이며 발랄했던 분위기는 정체된 듯 가라앉아 있는 西安 교외의 농경사회 분위기와 대조적이었다. 馬上의 草原 戰士들은 이런 농경사회의 삶을 경멸하고, 다만 약탈의 대상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안내인 박용길(朴勇吉)씨(24)는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흑룡강성 출신의 조선족 청년이었다. 고향을 떠나 西安의 여행사에 취직한 지 여섯 달이라고 했다. 西安시내로 들어오는 고속화도로 왼쪽으로 산 같은 무덤이 나타났다. 朴씨는 '서안 근방에는 73명의 황제가 묻혀 있는데 무덤은 72기(基)랍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라고 했다. 
  
  '당 고종(高宗)과 그의 부인이자 중국 최초·최후의 여자 황제였던 측천무후(則天武后)를 합장했기 때문이에요. 저 무덤은 한무제(漢武帝)의 무덤입니다.'
  
   漢武帝와 西域
  
  한무제(漢武帝)는 무서운 황제였다. 前漢 5代 황제인 그는 기원전 157년에 태어나 70세를 살았는데 황제로서 재위(在位)기간이 54년이나 되었다. 이 기간에 흉노를 격파하고 서역(신강)을 개척하여 실크로드를 개통시켰다. 서쪽으로 쫓겨난 흉노는 400년 뒤 홀연히 유럽에 나타나(훈족) 게르만族을 서쪽으로 밀어내고, 이 게르만族의 이동이 西로마제국의 붕괴를 유발하였다. 武帝에 의해 궁형(宮刑)(거세하는 벌)을 당한 사관(史官) 사마천(司馬遷)은 고통의 나날들 속에서 과거의 인간들 이야기를 미래의 우리를 향해 남긴 위대한 기록 사기(史記)를 썼다. 세계사적인 의미를 지닌 업적을 많이 남긴 漢武帝는 위(位)에 오르자마자 전례에 따라 자신의 무덤을 짓기 시작했다. 53년간 매년 국민 납세액의 3분의 1을 무덤 건조 및 부장품(副葬品) 매입에 썼다고 한다.
  
  지금 남아 있는 무덤은 높이 46.5m, 4각형인 밑 부분의 둘레는 약 1㎞이다. 원래는 능묘(陵墓) 주변에 성을 쌓아 도시를 만들어 고관들을 살게 했는데 그 인구가 27만 명에 이르고, 능을 관리하는 인원은 5000 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무덤은 나중에 약탈되고 도굴되었다. 이 무덤에서 1㎞쯤 떨어진 곳에 武帝가 총애했던 청년장군 藿去病(곽거병)의 무덤이 있다. 24세에 요절한 藿去病은 무제의 황후(皇后)의 남자 동생으로서 18세에 장군이 되어 북방의 흉노(匈奴)를 격파, 서역으로 통하는 회랑을 안전하게 확보, 무역로를 열었던 인물이다. 그가 죽자 무제는 황제의 무덤을 방불케 하는 큰 무덤을 만들게 했다. 변방에 살고 있던 흉노人들을 소집하여 검은 갑옷을 입게 한 뒤 藿去病의 관을 장안에서 이곳까지 호송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 무덤 주위를 지키고 있었던 기괴한 짐승 모습의 석상(石像)들은 무릉(茂陵)박물관에 옮겨 보존하고 있다. 
  
  '흉노를 짓밟고 있는 말' 등 이들 조각품은 기발하면서도 생동하는 모습으로서 고대 중국을 대표하는 예술품이다. 팽창하던 漢제국의 힘과 국민들의 야성이 담겨 있다.
  
   大宇의 기마군단식 戰法!
  
  이날 저녁 식사를 하면서 박재석(朴在錫) 과장으로부터 大宇의 기업文化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기자는 몽골 유목민의 전략적 시각에서 朴과장의 설명을 듣고, 분석해 보았는데 재미있는 일치점들이 많았다.
  
  ▲기동성이 가장 높은 기업이 大宇라고 한다. 의사결정이 빠르고 관료적 제약이 약해 속전속결식으로 행동에 옮겨진다는 것이다. 대리부터 회장까지 專決 범위가 넓어 일은 벌이고 보자는 풍토란다. '뛰면서 생각해야지 생각한 뒤 뛰면 늦다'는 주의(主義)다. 이런 풍토는 大宇가 60∼70년代에 무역회사를 모태로 하여 성장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무역은 세계를 무대로 삼아 유목민처럼 여기 저기 옮겨다니면서 신속하게 거래를 성사시켜야 하므로 타이밍이 중요하다. 유목 기마민족의 전략이나 大宇의 상술이나 시간과 기동성을 가장 중요시한다는 점에선 일치한다.
  
  ▲大宇의 업무방식은 박종환(朴鍾煥)식 축구와 닮은 공격 위주이다. '공만 잡으면 하프라인을 넘는다'는다는 식으로 골키퍼만 남겨두고 전원이 공격에 가담하는 식이다. 逆攻을 당하면 수비에 구멍이 생겨 혼이 나지만 그래도 공격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大宇사람들은 일상적 업무나 내근을 싫어하는 이들이 유달리 많고, 모험적 기질을 높이 사는 분위기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도 기마군단의 戰法과 일치한다. 기마군단은 공격하는 군대이지 성벽 뒤에서 수비하는 군대가 아니다. 전원 공격은 농경사회의 보병중심 군대의 개념에는 없다. 대우는 보급부대와 전투부대, 즉 후방과 일선을 가르는 농경군대 방식이 아니라 조직이 일선 중심으로 되어 있어 생산성과 기동성이 극대화 될 수 있는 조직형태라고 한다.
  
   다국적軍의 장점
  
  ▲大宇는 다국적軍과 비슷한 조직이다. 22개 계열사 중 반 정도가 인수, 또는 합병에 의하여 大宇 소속이 되었으므로 기업文化가 다른 다양한 조직이 되었다. 이런 다양성이 위화감이 되어 1980년대에는 노사분규로 시끄러웠다. 1990년대에 들어 조용해진 것은 여러 기업 문화가 하나의 질서 속에서 공존하는 법을 배워 이질감이 아닌 다양성으로 존재하게 되었기 때문이란 것이다. 김우중(金宇中) 회장은 8人의 회장을 중심으로 하여 업무를 맡겨, 일종의 연방제처럼 그룹을 운영하고 있다. 학연, 지연별 파벌도 별로 없다고 한다. 유목민족은 전투(기업의 인수·합병에 해당)는 잔인하게 하지만 종교적 차별과 탄압은 하지 않았다. 북방 초원에서 다양한 민족과 싸우고 화해·정복·동화되는 과정에서 개방과 관용의 미덕을 배운 것도 그들이었다.
  
  ▲金宇中 회장은 1995년에 200일을, 올해는 5월말 현재 넉 달을 해외에서 보냈다고 한다. '세계경영'이란 구호를 내걸고 大宇가 본격적으로 해외기지 건설에 착수한 지 4년, 현재 고용인원은 국내가 10만, 해외가 10만 명, 2년 내로 매출액도 국내와 해외 부문이 대등해질 것이라고 한다. 이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외에 흩어져 있는 현지법인을 통합관리 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로마, 영국 같은 식민지 宗主국가의 관리방식뿐 아니라 징기스칸 몽골제국의 관리방식도 하나의 시사점을 줄 것이다. 몽골은 제국의 판도가 넓어지면서 군대는 다국적군으로, 식민지 통치는 배후조종식으로 했다고 한다.
  
  다국적군의 장교단과 식민지국가의 지휘부는 몽골족이 차지하고 그 이하의 기층人力은 다양한 출신으로 구성하여 소수의 인력으로 다수를 통치했다고 한다. 해외 건설현장을 몇 군데 다녀본 기자의 소감은 우리 민족도 징기스칸의 몽골제국처럼 소수의 人力으로 다양한 국적의 다수 인력을 관리하는 장악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이었다. 한국인의 군대 경험이 좋은 효과를 내고 있었다. 작업 현장을 군대조직처럼 관리, 외국인이 한국어로 '충성!' '안전!'을 외치며 거수 경례를 하도록 훈련시켜 놓고 있었다. 유목文化와 해양文化는 공통점이 많다.
  
  해양국가가 무역과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중심세력이었음은 잘 알려져 있지만, 징기스칸의 몽골제국도 내부적으로는 칸(황제나 王에 해당하는 최고 지도자)의 직접 선출 등 여러 가지로 민주적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유목, 해양 문화는 또 무역을 존중·보호했다. 상업이란 것은 실리(實利)를 추구하는 인간활동이므로 교조화, 관념화와 같은 경직된 경향성과는 대치된다. 농업위주의 前근대사회에서는 상업이 합리성을 키우는 유일한 기반이 돼 왔었다. 반대로 朱子學이란 관념철학을 종교화한 조선시대에는 士農工商이라 하여 실리를 추구하는 상업을 가장 경멸스러운 직업으로 놓았다. 근대적 합리성의 씨앗(상업)이 자라지 못했으니 근대화를 내재적(內在的) 사상과 힘으로 해 낼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해방 후 우리는 해양문화권에 편입되면서 자연스럽게 유목적=상업적 기질을 회복하여 세계를 草原으로 보고 기업을 말로 삼아 뻗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진시황릉(秦始皇陵)
  
  유목민적 기질과 비슷한 기업文化를 가진 大宇가 유라시아 대륙을 800년 전에 먼저 관통했던 징기스칸의 길을 달리고 있다는 사실도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5월26일 오전에는 서안에서 동쪽으로 80㎞쯤 떨어진 진시황릉과 병마용을 구경했다. 세계 8大 불가사의가 되었다는 병마용은 농경사회에 바탕을 둔 중국식 전제정치의 힘과 잔혹함을 상징한다. 진시황(秦始皇)은 생전에 70만 명의 노동력을 투입하여 아방궁과 자신의 무덤 여산릉(驪山陵)을 건설했다. 진시황릉의 규모는 높이 115m(지금은 풍화돼 45m로 낮아져 있다), 능의 둘레 2.5㎞, 그 주변에 여러 건물이 숲을 이루었다. 이 부속건물군(群)까지 포함한 능원(陵園)은 한 변이 7.5㎞로서 총면적은 큰 도시와 같은 56㎢였다고 한다.
  
  진시황릉의 비탈면은 석류 과수원으로 이용되고 있을 정도로 황량했다. 봉분의 地下에 진시황이 건설한 궁전은 도굴도 발굴도 면한 채 2200년간 잠들어 있다. 청동을 녹여 부어 땅바닥을 굳힌 뒤 수백m 깊이의 지하궁전을 만들고 거기에 진시황이 사후(死後)에도 지하에서 통치할 수 있도록 수많은 시설과 신하들의 조각상을 설치했다고 기록돼 있다. 도굴에 대비하여 침입자에게 쏟아 부을 화살과 함정, 수은의 江도 설치돼 있다고 한다. 현존 발굴기술로서는 이 지하궁전을 손댈 수가 없어 후대의 작업감으로 방치하고 있다.
  
   병마용(兵馬俑)
  
  진시황릉 동쪽 1.2㎞에 위치한 병마용(兵馬俑)은 1974년에 한 농민에 의하여 우연히 발굴된 것이다. 진시황릉을 호위하는 1개 사단 규모의 병사·전차·軍馬가 진형(陣型)을 갖추고 무기를 들고 말을 탄 채 실물 크기의 조소상(彫塑像) 모습으로 파묻혀 있었다. 이들은 원래 큰 건물 속에 들어 있었다가 진시황의 死後 내란이 일어났을 때 불에 탔고 방치된 뒤 땅속에 묻혀 버린 것이다. 시커멓게 불에 타고 흙 속에 파묻힌 서까래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약 7000 坪의 면적에 3개의 陣(左·右軍과 지휘부)이 있었고 고대의 포진법에 따른 병력의 배치가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천하를 통일했던 秦나라 군대의 부활이며, 당시의 병법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는 살아 꿈틀거리는 현장자료이다.
  
  발굴된 군인들의 얼굴은 하나도 같은 사람이 없다. 그 표정은 한결같이 위풍당당하다. 북방 草原의 흉노 기마민족과 맞서 만리장성을 쌓은 秦始皇의 신임을 받을 만한 힘과 기개를 느끼게 해준다. 실물 크기대로 만들어진 말은 높이 1.54m, 길이 2m인데, 기자가 天山산맥에서 탔던 말과 같은 모습이었다. 이것은 황하의 서쪽, 즉 西域지방에서 나는 말이라 하여 하서마(河西馬)라고 했다. 군마용(軍馬用)으로서는 최고의 능력을 가졌다고 사서(史書)에 적혀 있다. 콧구멍이 큰 것은 폐활량이 커 멀리 달릴 수 있다는 증거이다.
  
  제주도 조랑말과 흡사한 이 말은 몽골馬로서 신강, 몽골, 카자흐스탄 지방에서 볼 수 있었다. 속력은 아랍말에 뒤떨어지지만 지구력과 운반능력이 뛰어나 기마군단의 실전용으로는 최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西安에서 구한 秦始皇 관련책자는 진시황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중국을 통일한 뒤 노예제도를 타파하고 법률과 지방제도를 정비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적 체제를 구축한 것은 역사를 진전시킨 것이며 이에 반대한 수구세력인 유생(儒生)들을 파묻고 책을 불태운 것은 개혁작업의 불가피한 결과였다는 것이다.
  
  '한국 관광객은 교양이 부족'
  
  5월26일 오후 4시30분에 西安을 떠난 중국민항(中國民航) 보잉 767은 1시간40분만에 북경에 도착했다. 1년5개월만에 다시 찾은 북경은 또 달라져 있었다. 도시는 더 높게 올라가고, 더 깨끗해져 있었다. 조선족 출신 중국 국적의 안내인은 경북 안동 출신 집안의 27세 청년이었다. 요녕성에서 북경으로 와서 月11만원짜리 방 한 칸 아파트를 빌어 獨身생활을 하면서 여행사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아주 예절이 바르고 얌전하게 보이는 그는 한국인들에게 불만이 많았다.
  
  『일본 관광객에 비교해서 가이드를 대하는 태도가 너무 다르더군요. 가이드가 설명을 잘못한 경우, 일본인들은 끝까지 들은 뒤 조용히 따로 불러 물어보는데, 한국인들은 가이드의 설명을 중단시키고 창피를 줍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가이드에 대한 손님들의 신뢰가 떨어져 여행이 참 어렵게 됩니다. 한국인들은 사람 차별을 하는 것 같아요. 자존심이 상할 때가 많아요. 저희들을 거지 취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자는 안내인에게 '물론 그런 한국인도 있겠지만 조선족의 경우에도 얼굴도 같고 말도 같은 한국인에게 同族이라고 너무 기대하고, 때로는 맞먹으려 하여 기분을 나쁘게 하는 이들도 있는 것이 아니냐'고 지적해주었다. 안내인은 '그래도 자존심이 상해서…'란 말을 계속했다. 하여튼 한국인에게서 이 자존심을 빼면 무엇이 남을지? 이 자존심으로 해서 경제가 발전하고, 이 자존심으로 해서 마음도 상하고, 이 자존심으로 해서 열등감과 자만심이 자라나고….
  
  밤늦게 캠핀스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6∼7세쯤 돼 보이는 눈 먼 소년을 안고 있는 여인이 손을 내밀었다. 10元짜리(1000원에 해당)를 주었다. 이걸 시작으로 하여 어둠 속에서 거지아이들이 하나씩 나타나 돈을 받아 갔다. 2∼5원씩 주다가 다섯번째 꼬마에게 10원짜리를 주었다. 이걸 본 다른 꼬마는 갑자기 달려오더니 내 다리를 붙들고 늘어지면서 '나도 10원을 달라'는 뜻으로 엉겨 붙었다. 길을 건너는 데 엉엉 소리 내 울면서 따라 왔다. 
  '사람은 가난은 견디지만 불공평은 못 견딘다'는 중국 선현의 말이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통일기에 우리 민족이 당면할 최대 과제도 결국은 불공평과 자존심이란 말이 될 것이다.
  
  ◎ 鄭鍾旭 대사 인터뷰
  
  정종욱(鄭鍾旭) 駐 中國 대사는 '지난 4년간의 한국-중국 협력관계는 '연간 무역 규모 170억 달러, 연간 여행인구 50만(한국→중국이 40여 만, 중국→한국이 약8만), 한국기업의 중국內 투자 20억 달러'의 단계에까지 왔으나 요즈음은 냉각기에 접어든 느낌이다'고 말했다. 鄭대사는 '한국인들도 이제는 중국의 해안지방에서 내륙과 서부지역으로 관심을 돌릴 필요가 있을 것이다'라고 충고했다. 
  
  '강택민(江澤民) 주석, 이붕(李鵬) 총리를 만나보면 그렇게 자신만만할 수가 없습니다. 중국이 21세기에 강대국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강대국이 돼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지방의 성장(省長)들도 모두가 기업체 회장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해외투자를 유치, 지방의 소득을 일으키느냐 하는 문제에 열성이 대단해요. 중국 전체가 하나의 巨大한 붐타운입니다. 지금 중국은 21세기를 향해 3大 국책사업을 추진중입니다. 양자강의 상류를 막는 삼협댐 건설, 북경-구룡반도 철도건설, 남수북인(南水北引), 즉 양자강의 물을 북쪽으로 끌어오는 일종의 대운하(大運河)공사가 그것인데 이런 프로젝트에 한국기업이 장기적인 관점에서 참여했으면 합니다.'
  
  鄭대사는 또 '50여 개의 다민족으로 구성된 중국은 같은 처지의 미국보다도 더 어려운 처지에 있다'고 했다. 
  
  '미국은 바다에 의해 고립돼 있으므로 자국내의 민족분쟁을 자극하는 외부세력이 없으나 중국은 사방이 외국으로 둘러싸여 있어 영토보존에 대해서는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는데, 최근의 대만사태가 그런 예이다'라고 했다. 鄭대사는 또 '중국의 인권문제를 자꾸 거론하는데 천안문(天安門) 사건 이후 그들도 노력하고 있으며, 아직도 이 나라의 선결문제는 기본적 생활의 보장이란 점도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한-중 관계가 이렇게 밀접해졌는데도 중국 정부는 북한과의 관계를 전통적 우방, 한국과의 관계를 협력 관계로 정의 내리고 있음을 눈여겨보면서 대처해야 한다' 고 주의를 주었다.  
  
  기자가 북경에서 만난 상사맨과 기업인들은 거의가 '올 때보다 나갈 때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인상이 나빠진다'고 했다. 한 상사 주재원은 '중국사람들은 자신들을 상대로 하여 이익을 남기는 것을 두고 보지 못하는 성격을 갖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4. 몽골高原-징기스칸 시스팀 연구
  
  5월27일 오후 3시 북경공항을 출발한 몽골항공사(MIAT) 여객기는 사막과 황무지를 3시간 동안 날아간 뒤 시골역 같은 울란바토르 공항에 도착했다. 이틀 동안 우리 일행을 안내해 주면서 통역을 맡게 될 두 몽골 여성을 만났다. 몽골 외국어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엘덴바트 바예르체체 교수와 駐韓 몽골대사관에 근무했던 아버지를 따라와 서울에서 4년간 생활했다는 S 살룰라양(孃)이었다. '몽고의 하늘이 어디로 갔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초원의 불이 아직 꺼지지 않아 연기 때문에 맑은 하늘이 흐리게 보인다'는 대답이었다. 연기가 안개와 섞임으로 해서 공항에 착륙하지 못하고 가까운 러시아 공항에 내린 비행기도 많았다고 한다.
  
  20代인 두 몽골 여성의 한국말은 발음, 어휘선택, 말의 리듬에서 거의 완벽하였다. 일부러 정신을 차려야 한국인이 아니라는 눈치를 챌 정도였다. '한국말은 몽골語와 문법과 어순(語順)이 거의 같기 때문에 단어를 대입만 하면 돼 쉽게, 빨리 배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뒤 3일 동안 이 두 사람의 통역을 통해서 여러 몽골 관료-학자·유목민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외국인과 이야기한다는 긴장감이 풀어지고 의사전달이 쉬웠다. 정보가 공통된 감정의 흐름을 타고 교류될 때 상호이해가 빨라지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몽골語, 투르크語, 만주語, 한국語, 日本語는 같은 알타이어군(語群)으로 분류된다. 이것은 이 언어를 쓰는 민족들이 한때 인접공간에서 살다가 갈라졌다는 뜻이다. 언어구조가 비슷하다는 것은 사고방식과 감정, 그리고 그 표현방법이 비슷하다는 얘기이다. 기자가 이번 여행에서 접촉해본 몽골人, 카자흐스탄人, 우즈벡人, 터키人의 민족성은 여러 모로 한국인과 비슷했다.
  
  ① 부모와 상사에 대한 존경과 복종심
  ② 감정적 행동양식
  ③ 노래와 춤을 좋아하는 것
  ④ 외래인에 대한 친절
  ⑤ 솔직성
  ⑥ 가족중심주의 등이 공통점이리라.
  
  西安에서 만났던 서북대학교(西北大學校) 주위주(周偉洲) 교수(西域史 전문)는 '한민족이 몽골人이라는 데는 찬성할 수 없다. 중국 漢族과의 혼혈이 더 많았을 것이다'라는 견해를 보였었다. 기자는 '우리는 몽골반점이 있지만 漢族들은 그런 게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었다. 몽골에 와 보니 몽골人과 한국人이 같은 종족이란 것은, 복잡한 논리 이전에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본능적 차원의 문제였다. 몽골인과 한국인 사이는 표현의 電流가 통하는데 중국인과는 그런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韓民族의 고향은?
  
  이날 밤 두 교수를 인터뷰했다. 몽골 국립사범대학의 세계적인 언어학 교수인 D 투물토구 교수와 역사학 교수인 투물 오치르 남질 교수. 두 교수는 몽골인으로서는 드물게 안경을 끼고 있었다. 초원에 사는 몽골인들은 푸른 초원과 하늘, 그리고 멀리 보면서 생활하는 덕분에 視力이 4.0까지 나갈 정도이다. 두 교수는 고비사막에서 태어나 학자가 된 뒤에는 벽과 빌딩, 그리고 책만 읽다가 시력이 나빠졌다고 했다.
  
  남질 교수는 '몽골고원에서 퍼져 나간 인종들이 세계를 정복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몽골人은 아시아, 유럽, 아메리카 대륙에 넓게 분포돼 있다'면서 '세 번에 걸쳐 몽골族의 대이동이 있었는데, 한반도에 들어간 몽골인들은 두 번째 이동의 파도를 타고 4천년 前까지 대략 이주를 끝낸 것으로 본다'고 했다.
  
  한국인의 선조가 된 부족들은 지금의 바이칼湖 남동쪽에 살고 있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고 했다. 남질, 투물토구 두 교수는 징기스칸의 대제국 건설은 몽골부족이 갖고 있었던 우수한 사회·군대조직에 의하여 가능했었다는 주장을 폈다. 몽골군 기마군단은 10人을 기본단위로 하여 백인대장, 천인대장(千人隊長), 만인대장(萬人隊長)식의 피라미드型으로 조직되었다. 이 피라미드의 꼭대기에는 징기스칸이라 부를 때의 칸(王)이 있었다. 몽골 기마군단이 타민족(또는 부족)을 점령하면 적의 우두머리만 처리한 뒤 정복된 군인들을 똑같은 조직원리로 흡수 통합해 버렸다. 몽골 기마군단은 정복지가 넓어질수록 병력 수에서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였다. 눈덩이처럼 구를수록 커지는 몽골 기마군단의 폭발성으로 초원지대에서는 대제국(대군단에 의해 지탱되는)이 홀연히 일어났다가 홀연히 사라지곤 했다.
  
  다국적군을 한 덩어리로 묶는 것은 엄격한 군율과 장교-사병의 차별이 없는 동고동락(同苦同樂)의 끈끈한 인간관계 및 약탈에 의한 노획물의 공평한 분배였다. 몽골 기마군단이 이동할 때는 그 가족들이 뒤를 따랐다. 이 가족은 보급부대의 역할을 했으므로 따로 그런 부대를 둘 필요가 없었다. 군인들은 항상 가족 속에 있으므로 심리적으로도 안정되는 이점(利点)이 있었다. 軍民일체의 이런 조직은 全주민을 全군인으로 쓸 수 있는, 동원력이 극대화된 조직으로 볼 수 있다.
  
   연대책임에 기초한 軍律
  
  징기스칸의 세계제국을 가능하게 한 3大요소는 인간, 말, 초원이란 자연적 조건과 이 조건을 효율적으로 결합시킨 그의 지도력이었으리라. 징기스칸의 일대기(一代記)인 원조비사(元朝秘史)를 읽으면 논어(論語)를 읽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느낄 때가 있다. 징기스칸이 몽골인들에게 강조하는 덕목은 君主에 대한 충성, 부모에 대한 효도, 친구·형제·戰友에 대한 의리, 그리고 정직성이다.
  
  <예 : 밤에 보초를 서다가 잠을 잔 두 명의 기병이 붙잡혀 왔는데 그들은 자신의 과오를 솔직히 인정하여 처형되었다. 이를 본 한 페르시아人이 자신들이 처형될 것을 알면서도 왜 자신의 죄를 순순히 인정하였는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자 몽골인 지휘관은 '너희 타지크人들은 그런 경우에 거짓말을 한다. 그러나 몽골人은 천명의 목숨이 달려 있더라도 거짓말 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한다'고 했다>([라츠네프스키 저(著) 징기스칸])
  
   평등과 충성심
  
  징기스칸은 몽골을 통일한 이후에 '요순' '야싸'라는 법령을 발표했다. 여기서 규정된 군율은 연대책임을 지우는 것으로 엄격하다. 10인대(隊)에서 4명 이상 달아나면 나머지 6명도 사형, 공격 또는 퇴각시 앞사람이 떨어뜨린 무기·안장을 줍지 않아도 사형, 10인대에서 포로가 생겼을 때 구해내지 못한 생존자는 사형…. 몽골군대 안에서 장교는 사병과 같은 음식을 먹었다. 장교로서의 명예와 권한은 지녔으되 특권은 없었다고 한다. 부족내에서의 간통은 사형이지만 다른 부족과의 간통은 묵인되었다.
  
  징기스칸은 또 자신을 지키는 친위대원에 대한 처벌권을 독점하여 다른 장군들이 손대지 못하게 했다. 끈끈한 인간관계와 엄격한 군율이 몽골군의 충성심과 전투력의 기반이었다. 몽골유목사회에는 또 노예나 귀족 신분이 없고 이웃만 존재했다고 한다. 남질 교수는 이런 특성은 유목생활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 유목생활의 기초단위는 가족이다. 가족내의 윤리도 중요하지만 이웃 가족과의 상호부조는 재난을 극복하기 위해 인간의 힘을 모으는데 꼭 필요하다. 남질 교수는 [한국과 몽고의 가정에 대한 연구]라는 책을 쓰고 있다. 그는 가정의 구성, 방의 배치, 가정內 교육법이 매우 닮았다고 했다.
  
  세계제국의 건설이 군사력 하나만으로 될 수는 없다. 징기스칸의 군사력을 뒷받침한 정신력은 몽고인이 가지고 있었던 가정과 부족내의 인화·화목·질서·단결에서 나왔던 것이다. 3일간 몽골에서 몽골사람들과 접촉한 결론은 '이 사람들은 바탕이 착하다'는 것이었다. 고마워해야 할 때 고마워하고, 미안해해야 할 때 미안해하며, 수줍어해야 할 때 수줍어하는, 인간의 기본도리에 크게 어긋나지 않으려는 사람들 같았다. 행동이 다소 거칠고 덜 세련돼 보일 때도 있지만 인구의 40%가 아직 유목생활을 하고 있는 나라의 사람들에게 서구식의 에티켓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 것이다. 이런 몽골사람들 때문에 다소 부족하고 불만인 점들이 보여도 덮어주고, 변호해주고 싶은 마음이 우러나는 것이었다.
  
  '중국은 싫다'
  
  몽골공화국의 넓이는 한반도의 8배다. 신강성과 비슷한 156만㎢. 인구는 220만 명. ㎢당 1.4명 꼴이다. 세계에서 가장 희박하다. 초원의 불을 끌 만한 人力을 모으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약 40%는 목축업을 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산아제한이 아닌 산아 증가 정책을 쓰고 있는데도 1가구당 평균 가족수는 4명이란 점이다. 흉노제국 시절에도 그랬다고 한다. 1호당 4명이 초원의 섭리에 알맞는 단위인 셈이다. 350만 명의 몽골인은 중국의 외몽골 자치구에 살고 있고 50만 명은 러시아에 살고 있다. 남질, 투물토구 두 교수는 러시아보다 중국을 몽골사람들이 더 싫어한다고 했다. 
  
  '중국사람들과 제일 많이 싸워 본 몽골人들이 아마도 그들을 제일 잘 알 것입니다. 중국인들은 두렵지 않지만 그들의 정책은 두렵습니다. 중국인이 싫고 무서운 것은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없다는 점입니다.' 
  
  투물토구 교수는 그렇게 말하면서 '저는 일본에서 4년간 연구생활을 한 적이 있는데 한국인이 일본인보다 우리 몽골人과 비슷한 사고방식을 가진 것 같았다'고 했다. 울란바토르에서는 가끔 한국인이 중국인으로 오인 당해 뭇매를 맞는 수가 있어 택시를 타면 먼저 '나는 솔롱고스 사람이다'고 말한다고 한다.
  
   草原을 달리다
  
  유럽 아시아 대륙의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유라시아 草原은 만주에서 헝가리까지 연속적으로 뻗어있다. 장애물이 거의 없다. 이 초원의 북쪽은 시베리아의 동토(凍土)가, 남쪽은 다양한 地形(강, 산맥, 밀림)과 文化가 장벽이 되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유라시아 草原은 같은 지형, 같은 생활방식(유목), 거기서 생긴 비슷한 문화로 해서 엄청난 거리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의 동질적인 文化를 유지해 왔다. 그런 동질성을 가능하게 했던 매개체가 말(馬)이었다. 5월28일 오후 우리는 지프를 타고 울란바토르를 빠져나와 북동쪽, 즉 징기스칸이 태어난 고향쪽으로 방향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초원은 완만한 곡선이다. 산과 강물, 자작나무와 양·소·말, 그리고 말을 타고 가축을 모는 소년들….
  
  초원의 풍경은 우리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제주도의 중산간 마을풍경과 흡사했다. 동행한 두 몽골 여성에게 물어보았더니 한국의 자연에서 느끼는 분위기는 몽골에서 느끼는 것과 매우 비슷하더라고 했다. 異國에 온 기분이 별로 들지 않는 것은 우리 선조들이 몽골에서 한반도로 들어와 고향 몽골을 연상시키는 어떤 느낌을 발견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한반도에서 터키까지 몽골系 인종이 살고 있는 자연의 분위기도 비슷했다. 기질에 맞는 땅을 선택하다가 보니 그렇게 된 것인가. 
 말을 탔다. 초원에서 말을 타는 느낌은 天山산맥에서 타던 것과는 또 달랐다. 달리고 싶었다.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안장 위에서 선 기분으로 말을 달려보았다. 초원의 그 부드러운 곡면, 서쪽 끝에서 바예르체체 교수가 말을 달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혼자서 초원을 질주하는 여자의 모습은 아름답고 장엄했다.
  
  바예르체체 교수는 '말을 타면 왠지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기고 지구 끝까지 달려가 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고 했다. 몽골족이 북미, 남미, 인도, 시베리아, 한반도, 일본, 헝가리, 중동까지 뻗어나간 것은 초원과 말에서 연유하는 어떤 본능적 역마살(驛馬煞)과 관계가 있으리라. 馬上에 오르면 지구가 좁게 보인다는 이 심리상태가 유목민을 세계사의 매개자, 또는 창조적 파괴자로 만들었다고 기자는 생각한다. 말은 몽골인에게는 제2의 가족이고 인격적으로 대한다. 바예르체체 교수는 '저녁에 말을 타고 돌아오면 말을 휴식하게 한 뒤 급한 일이 아니면 다시 타지는 않습니다. 웬만한 거리는 걸어갑니다'라고 했다. 
  말에게 근무시간을 보장해 줄 정도란 얘기다. 망아지 시절에 마차용, 승마용, 비육용으로 구별함으로써 탈 말을 끄는 말로 부리는 자존심 상하는 일도 시키지 않는다고 한다. 남질 교수는 몽골말의 우수성을 이렇게 설명했다. 
  
  '차세계대전 때 몽골말을 소련군에 제공했습니다. 사료를 특별히 준비하지 않아도 초원의 풀을 뜯고 눈을 마시면서 베를린까지 갔습니다. 징기스칸이 사마르칸트쪽으로 원정할 때 20萬 마리의 말을 끌고 갔습니다. 말 두 마리를 옆으로 엮고 그 위에 나무판자를 놓아 무기를 운반하였습니다.'
  
  '별일 없습니까'
  
  말을 타고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는 100∼200㎞이다. 순간 시속 40㎞도 가능하지만 평균속도는 시속 10∼20㎞ 수준이다. 이 말 덕분에 초원에서 인간의 이동은 빨라졌고, 따라서 정보의 이동도 빨랐다. 요사이 말로 하면 초원은 고대에도 정보화 사회였다. 몽골사람들은 초원에서 처음 만나 인사한 다음 두 번째 질문은 반드시 '별일 없습니까'라고 한다. 이 '별일'은 영어로 번역하면 뉴스인데 몽골어의 신문은 '별일'이란 단어를 제호로 사용하고 있다. 투물토구 교수는 '우리는 옛날부터 '新聞 없습니까'라고 인사할 정도로 정보에 민감했다'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징기스칸의 전법에서 신속한 정보수집과 심리전은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다. 도시를 공격하기 전에 스파이를 파견하여 몽골軍의 잔학성을 퍼뜨려 공황상태를 유발하기도 했다. 駐 몽골 한국대사 김정순(金正舜)씨는 '미국·일본이 중심이 된 對몽골원조사업단이 구성돼 올해의 경우 2억1000만 달러를 지원하고 있는데 우리 나라도 40만 달러를 냈다'고 했다.
  
  지난해 한국과의 무역액은 3800만 달러로서 한국에서 수출한 것이 약 2000만 달러, 수입이 1500만 달러였다. 보따리 장수에 의한 무역은 통계로 잡히지 않아 실제로는 더 많을 것이라고 한다. 울란바토르 시내에서는 스텔라 택시를 자주 보게 된다. 이것은 신라택시라는 한국회사가 가져온 50대(120대 목표)에 속한다. 지입제로 하여 사납금을 하루 20달러씩 거두고 있는데 잘 걷히지 않는다고 한다. 삼일무역이란 회사에선 지방버스 노선에 쓸 버스 5대를 가져올 계획이란다. 모세, 시온사라는 2개 봉제 회사도 가동중이다. 金대사가 마련한 현지교민 및 대사관 직원 회식자리에 초대돼 갔더니, 몽골 사람들에 대한 친근한 이야기가 꽃을 피웠다. 몽골사람들은 밤에 바깥에서 이슬을 맞으면서 자도 끄떡없을 정도로 자연과의 친화력이 강하고 비가 오면 옷을 돌돌 말아 꼭 끼고 앉아서 몸으로 옷을 보호한다는 것이다. 7월에 열리는 '나담'이란 축제에 와서 말달리기 대회를 보아야 몽골기마군단의 위용을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6천 마리의 말이 뛰는데 초원에 피어오르는 먼지 구름과 지축을 흔드는 말발굽 소리는 정말 가슴을 뛰게 합니다.'
  
   문화부차관 인터뷰 : '박정희를 배운다'
  
  몽골 공화국의 다그바돌진 체렌돌 문화부차관은 미국 콜럼비아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는 40代로서 그의 말에서는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는 어떤 열정이 느껴졌다. 한국에는 네 차례 왔었다고 한다. 
  
  '지난 겨울에 제주도에 가 보았는데 몽골과 한국은 같은 뿌리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한때 1만 명의 몽골병이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제주도 조랑말은 영락없는 몽골말이더군요. 돌하루방도 우리 나라에 있는 것하고 똑같고, 무엇보다도 우리 두 나라 사람들은 무엇이 옳고 그르다는 가치판단의 감각이 같은 것 같아요.'
 
 차관은 '한국이 박정희 대통령의 영도 아래에서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 발전해간 경험은 우리에게 커다란 자극과 용기를 준다'고 했다. 그는 朴正熙의 발전전략을 길게 설명하면서 '정책에 관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박정희를 연구하는 이들이 많다'고 했다. 
  
  '나는 특히 경제개발을 뒷받침하기 위해 전력개발을 해간 과정과 朴正熙가 교육에 관심을 가진 점을 눈여겨보고 있습니다. 그는 도지사 다음 자리에 교육감을 앉힐 정도로 교육자를 존경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박정희의 지도에 의해 한국인들은 오늘과 같은 성격을 갖게 되었다고 봅니다. 제가 서울에 가서 본 한국인들은 부지런하고 가만있지를 못하며, 자기 일에는 성실하고 주인의식이 강하니 나라가 발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기자가 '나는 박정희의 전기를 쓰고 있다'고 말하면서 '박정희의 가장 중요한 결정은 수입대체 정책이 아니라 수출입국 정책을 채택하여 처음부터 세계시장에 팔 수 있는 우수한 상품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분위기를 만든 것이다'고 했다. 차관은  '그러니 지금 한국에선 외국상품이 잘 안팔리고 한국제만 팔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국내시장만 겨냥하여 적당히 만들지 않고 세계시장에서 경쟁하다가 보면 제품의 질이 높아지고 이제는 국내 시장을 지키고 있는 것이죠'라고 라고 말했다. 오는 7월11∼13일 울란바토르에서는 몽골제국 건국 790주년 행사가 여러 가지 축제·경기와 함께 대규모로 열린다. 차관은 '이런 행사가 열리게 된 것은 지난 10년간 노력한 결과이다'라고 했다. 몽골이 淸의 지배下로 들어가면서부터 징기스칸에 대한 기념행사는 금지되었다. 1921년 소련 영향下에서 공산국가로 독립한 몽골에서도 징기스칸을 거론하는 것은 민족주의자로 몰리는 위험을 자초하는 것이었다. 징기스칸 기념일을 만들자는 제안을 한 당 간부는 反혁명분자로 몰려 숙청되었다는 것이다. 1990년 몽골의 자유화 이후 비로소 몽골은 징기스칸을 복권시킬 수 있었다.
  
  1992년에 [元朝秘史] 발간 750주년 행사가 치러졌고, 올해엔 대통령의 명령에 의해 건국 790주년 행사조직위원회를 구성, 큰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朴正熙는 징기스칸의 후손? 
  
  차관은 '징기스칸은 전설상의 영웅이 아니라 실재했던 영웅이며 아직도 그 영향 속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역사를 기념하는 것은 과거의 역사가 오늘날 그 형식을 달리하여 되풀이되고 있는 점을 찾아내 교훈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고 했다. 
  
  기자가 덧붙였다. 
  
  '박정희와 징기스칸은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몽골 민족이 가진 특성과 잠재력을 효율적으로 동원하여 큰 나라를 만드는 데 성공한 점에 있어서는 몽골인 출신의 두 지도자는 비슷하고 두 사람을 비교연구하면 새로운 것을 많이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차관은 '우스개로 받아주십시오'라면서 말했다. 
  
  '1206넌 징기스칸이 몽골제국의 창건을 선언한 직후 주변 국가에 사신을 보냈습니다. 고려에서는 징기스칸 제국을 승인한다는 뜻을 담아 공주를 보냈습니다. [흘랑]이라는 이 여인이 징기스칸의 네 왕비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박정희가 그 자손인지 누가 압니까.' 
  
  지난해 몽골을 찾은 한국인은 약 6000 명. 그 중 1000 명은 공식 방문, 나머지는 주로 관광객들이었다. 이 숫자는 몽골과 고려가 가까웠을 때의 年교류 인원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한다. 몽골에선 한국을 [솔롱고스]라고 부른다. 투물토구 교수는 [무지개가 뜨는 동쪽 나라]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솔롱고스
  
  몽골국립대학 역사학과 과장 후켄바타르 교수는 '[솔롱고스]란 말의 뿌리를 찾아올라 가면 [새벽의 밝은 빛], 즉 朝鮮이란 말뜻과 만나게 된다'면서 흥미 있는 주장을 했다.
  
  '고구려와 동쪽 몽골 지역은 접경하고 있었습니다. 몽골족과 고구려 사람들이 서로 결혼을 하여 [미르키트 송골로스] 부족이 생긴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종족은 징기스칸의 장남 주치의 영토 안에서 살고 있었는데 서쪽으로 원정을 갈 때 동원돼 볼가江 남쪽의 초원에 정착했습니다.'
  
  후켄바타르 교수는 '몽골과 한국의 관계는 서기 13∼15세기 때가 가장 좋았습니다. 명나라가 건국된 이후 끊어졌다가 1990년 이후 다시 연결되니 참 좋습니다'라고 했다. 그는 '최근 두 나라 관계가 정상화 된 이후 역사적으로 두 나라의 교류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아졌으므로 새로운 발견이 많이 나올 것이다'라고 했다. 그도 '인종적으로 몽골과 가장 가까운 종족은 거란·여진도 아닌 한국인이라고 본다'고 했다. 전날 밤에 만났던 투물토구 교수는 '한글을 만들 때 몽골문자 드루찐의 모양을 참고로 한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었다.

[ 2016-04-19, 16:3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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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리슨 김     2016-04-21 오후 2:57
사농 우대하다가 조선이 망했다고 봅니다.
입으로만 떠드는 사, 울타리 넘어 딴 세상을 거부하고 가족과 동네에 집착하는 농...

대한민국 현주소를 보는 것 같습니다.
정치인,학자,기자,판.검사...
여전히 나라 망하게 할 재수없는 넘들이었습니다.
   얼핏보다가     2016-04-20 오후 11:01
감상문....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문명국 개념을 많이 주장하는 조갑제대표가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유목민족의 야성....
이 野性 이란 문명과는 정반대로 향한 단어이다. 야성이란 생존이란 근본 상황하에서, 일차원식/막무가내식/개인주의/동물에 가장 근접한 인간들이 가질 수 밖에 없는 개념일리라. 이런 북방유목민족의 강인하면서도 반 문명적 DNA가 내포된 한국사람들이, 여러곳에서 눈쌀 찌푸리게 하는 행동거지가 '많음'도 이해(?)가 안되는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런 행태가 선진국들에서는 ' 비굴한 제노포비아 '( Xenophobia -외국인 혐오증. 원래 의미는 베트남 사람들의 서방국가에 대한 혐오 감정에 경외의 의미도 포함) 위축되면서, 상대적으로 약해보이는 후진국에서는 안하무인격하는 행동인데...이건 정말 고쳐야 하는 /야성 중에서도 특히 저질인/'양아치 근성"이 아닐 수 없다.
그런 것이 여러나라에서 벌어지는 졸부들의 성매매/돈자랑에서부터, 필리핀/ 코피아노나 베트남/라이따이한을 만든 사례 일것이며, 그동안의 국내 불법체류자에 대한 업신여김과 정확히 맥이 닿아 있다

( 이런 점은 일본사람이 아닌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 제노포비아/서방에 대한 동경-심리적 위축은 엄청 심해서, 그곳에서의 행동은 너무 고분고분하지만, 약소국 사람들에 대한 배타적 행태는 한국사람들과 차이점이 전혀 없고, 어쩌면 거의 '한수위/선배'격이라 보면 될 듯 )

정말 선진국/문명국으로 향하고 싶다면, 우리의 과거/환부를 일부러라도 드러내고/반성하고/보상하는 그런 국가가 되어야, 진정으로 문명국/선진국으로 가는 첫째 관문을 통과하리라 본다.
   지평선     2016-04-20 오후 6:23
'한국 관광객은 교양이 부족'!!!!!
이하 동문 입니다. 안바도 비디오?
예의도 없고 교양도 없는 지식인들이 너무 많아 , 황당!
돈과 명예만 찾아 다니는 불나비의 하루살이 인생들이 너무 많은 나라 .
염치도 없고 뻔뻔함 마저 서슴치 않으니, 기대 할것이 없습니다.
기대 할것 없는 , 역사는 그들에게 대답 할 것 입니다 .패자라는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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