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즈벡의 자랑인 티무르와 고려인 이야기
몽골 草原 역사 기행(5)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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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무르의 등장
  
  

중앙아시아는 징기스칸의 아들 차카타이에 의해 통치되었다. 차카타이 칸國은 후계자들에 의해 서쪽의 트란속시아나와 동쪽의 투르키스탄으로 나뉘어졌다. 660년 전인 서기 1336년 사마르칸트 부근에서 티무르가 태어났다. 그는 징기스칸의 직계 후손임을 자처하면서 몽골제국의 재건을 선언했다. 위대한 전략-전술가인 티무르는 40세 때부터 정복전쟁에 나섰다.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부근을 점령한 뒤 페르시아, 인도, 러시아 서부, 중국으로까지 쳐들어갔다. 1393년에 바그다드를 점령하여 이슬람세계의 패권을 잡았고, 2년 뒤엔 모스크바를 점령했다. 아나톨리아 반도로 진격, 신흥 오스만 터키군을 무찔렀다.
  
  이로써 유럽은 터키 군대의 침공을 50년 이상 지연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티무르는 점령지의 학자·문학인·예술인·기술자들을 사마르칸트로 끌고 왔다. 그들의 힘을 빌어 사마르칸트는 중앙아시아 최대의 문화·예술도시로 건설해 갔다.   
  티무르의 후손들도 그의 문화·예술적 취향을 이어받았다. 손자 울루벡이 만든 천문대는 1948년에 발굴돼 복원되었다. 사마르칸트 시내에 있는 이 천문대는 1428∼29년에 건설되었다. 대리석으로 만든 지름 40.21m의 섹스턴트가 있다. 이에 의해 관측된 약 1000 개의 별에 대한 자료는 유럽에 소개되어 천문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 천문대가 측정한 1년의 길이는 오차가 58초로 20세기에 관측한 것처럼 정확했다고 한다. 섹스턴트(六分儀)에는 10분의 1초까지 측정할 수 있는 장치가 붙어 있다.
  
  불볕더위 속이지만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하늘 아래에서 티무르와 그의 자손들이 건설한 사마르칸트 시내를 돌아 다니는 감회는 서정적이었다. 사마르칸트는 알렉산더 大王, 징기스칸, 티무르라는 세계 3大 정복자의 말발굽을 다 견뎌냈다. 실크로드의 가장 중요한 도시로서 상업의 전통을 지켜오면서 물건을 사고 판다는 경제행위의 위대한 힘을 증언하고 있는 이 도시의 바자르(시장)에 갔더니 고려인 할머니들이 쌀과 채소를 팔고 있었다. 기자의 손을 잡고 따뜻한 눈길을 보내는 할머니들의 주름진 얼굴은 사마르칸트만큼이나 수많은 격변을 견디어낸 어머니의 얼굴이자 민족의 얼굴이었다.
  
  이슬람의 근본을 느끼게 해주는 15∼16세기 건축물-모스크·레기스탄(신학대학에 해당)·왕족의 무덤들은 이 종교가 가진 순결·철저·단순·질박한 본질을 드러내고 있었다. 神에 대한 순결한 복종과 헌신을 형상화한 사마르칸트의 이슬람 건축물들은 최근 정치적 이념으로 이용되어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이슬람의 부정적인 면에 가려진 이 종교의 진면목을 엿보게 했으며 10억 인구가 선택한 이 종교의 위대성을 짐작하게 만들었다. 사마르칸트의 건축물에 얽힌 전설은 또한 으스스하고 애잔하기도 했다.
  
   티무르의 무덤에서
  
  티무르는 1405년 중앙아시아를 통일한 뒤 明을 쳐부수어 징기스칸의 몽골제국을 재현하겠다는 야심을 갖고서 20만의 원정군을 동쪽으로 발진시켰다. 출발 직후 그는 急死했다. 터키원정 때 전사한 손자를 위해 자신이 만들었던 무덤(굴 에밀 : 지배자의 무덤이란 뜻)에 묻혔다. 이곳을 찾아갔더니 일반에게 공개되는 것은 티무르의 가묘(假墓)이고 진짜는 지하에 있었다. 관리자에게 부탁하여 진짜 무덤을 볼 수 있었다. 티무르의 후손들이 묻힌 7개의 석관이 안치돼 있었다. 울루 벡의 석관도 여기에 있다.
  
  티무르는 유언으로 『돌에 내 이름만 새겨라』고 했다. 티무르의 관은 당시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큰 玉石이었다. 中國産이라 전한다. 1740년 이곳으로 쳐들어온 페르시아의 나딜 샤는 티무르의 석관을 약탈해 가져가다가 떨어뜨려 두 동강을 냈다. 어두운 곳에선 검게 보이지만 아침에 창문을 통해 햇빛이 직접 닿으면 비취색으로 빛난다고 한다.
  
  이 석관의 바닥에는 『내가 여기서 일어나는 날 세계가 진동하리라』는 묘비명이 새겨져 있었다는 얘기도 있다. 이 전설을 무시하고 1941년 6월22일 밤 러시아 인류학자 미하일 제라시모프가 관뚜껑을 열고 티무르의 유골을 조사했다. 그 순간 조수가 뛰어들어오더니 『독일군이 러시아를 침공했다!』고 소리쳤다. 이 조사에 의해 그는 오른쪽 다리가 불구였음이 확인되었다. 서양에서는 티무르를 테머레인(Tamerlane)이라 불렀는데 불구자라는 뜻이다.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역사·전통·문화에 대한 자각·자긍심이 대단하다. 몽골-투르크族이 침입하기 이전에도 페르샤, 그리스 文明의 영향을 받았으며 중앙아시아 이슬람 文化의 중심지(사마르칸트)였고 티무르와 나보이(15세기의 시인)같은 자랑스러운 민족영웅을 가졌다는 자의식이 강하다. 무엇보다도 몽골族의 침입으로 부하라, 사마르칸트, 히바같은 도시가 파괴되고 수십만 명이 학살된 기억이 남아 있다.
  
  실크로드를 따라서 번성했던 오아시스의 상업·농경문화는 징기스칸 같은 야성의 유목 기마문화를 인정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은 그 대신 티무르를 미화하고 숭배함으로써 한때 세계적인 대제국을 만든 민족의 후예라는 점을 과시하려고 한다. 티무르가 인종적으로는 몽골系이긴 하지만 사마르칸트를 수도로 삼아 찬란한 문명을 건설했다는 점에서 「문명의 파괴자」징기스칸과 구별짓고 싶은 것이다.
  
   동방연구소에서
  
  티무르 재평가의 중심이 되고 있는 우즈벡 대학원 산하 동방 연구소 소장 무자파 M.카이룰라예프 박사를 찾아가 인터뷰를 가졌다. 이 동방연구소에는 「아부 라이칸 베루니 연구소」가 부속돼 있다. 베루니 연구소는 이슬람 관련 古文書를 세계에서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다. 9∼10세기에 쓰여진 책들이 보통도서처럼 꽂혀 있었는데 보존상태가 좋았다. 카이룰라예프 소장은 티무르에 대한 관심의 증대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것은 정치적 변화 때문입니다. 우즈벡이 소련 연방에 속했을 당시 우리는 노동자·농민의 역사 연구에 치중했고 우리 민족의 역사를 연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소련연방의 붕괴와 동시에 그런 역사관도 붕괴했습니다. 티무르 연구도 다시 시작되었어요. 소련시절에는 티무르 연구가 정치적으로 제한되었어요.』
  
  카이룰라예프 소장은 통역자 옆자리에 앉은 60대 남자를 가리키면서 『저분은 티무르에 대해 연구하다가 혼이 났다』고 했다.
  
  ―티무르를 부각시키는 것은 티무르가 했듯이 중앙아시아 5개국을 통합하려는 움직임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데?
  
  『우리 대통령이 그런 통합 의견을 제시한 적이 있습니다. 중앙아시아 5개 국가는 언어 문화 종교 면에서 비슷한 점이 많아요. 그러나 그런 통합제의가 구체화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티무르는 14세기의 중앙아시아를 몽골치하에서 해방시켰을 뿐 아니라 유럽 역사에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물론 자신의 역할을 티무르는 당시에 몰랐겠지요. 골든 호르데(러시아 지역을 통치하던 몽골제국)를 물리쳐 러시아를 구했고 오스만 터키 군대를 견제, 유럽을 안전하게 만들었지요.
  
  15세기 중앙아시아 문화가 최고조에 이른 것도 티무르 덕분입니다. 그 티무르가 망각되고 핍박당했어요. 1968년에 무미노프라는 학자가 티무르의 역사적 역할에 관한 작은 책을 썼지만 그 책은 1973년 6월까지 모스크바에서 사상 검토를 당하다가 결국 햇볕을 보지 못했고, 그는 74년에 죽었습니다. 이때 우리 동방연구소의 아삼 우룬바예프 박사도 티무르에 관한 책을 썼다가 20년 동안 연구금지를 당했습니다. 1973년 6월 책은 인쇄공장에서 불태워졌는데 이것은 소련의 범죄 행위였습니다.』
  
  우룬바예프 박사는 용케 보존된 문제의 큼직한 책을 들고 와서 보여주었다. 그가 편집한 책인데 「티무르시대 예술에 관한 유네스코 심포지엄 발표 자료집」이란 제목이었다. 티무르 연구는 1991년 9월1일 소련 연방 해체와 우즈벡 공화국 독립 이후 자유로워졌다.
  
  『그때는 민주시대가 아니었다.』
  
  『티무르는 法治를 편 사람입니다. 그가 반포한 法은 국가의 운영과 종교와 정치의 관계를 규정했습니다. 티무르는 69년간 살면서 35년간 왕 노릇을 했고 그의 후손들이 100년간 중앙아시아를 지배했으며 티무르 제국 붕괴 뒤에도 인도에 세운 무갈 제국은 332년간 존속되었습니다.』
  
  기자가 『우리가 역사책에서 배운 티무르는 잔학한 정복자였다』고 하니까 우룬바예프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봉건시대에서 다른 나라를 제압하는 것은 당시의 법이었죠. 민주시대가 아니었습니다. 내가 안치면 그쪽에서 나를 치던 때죠. 징기스칸의 몽골이 황폐시킨 중앙아시아를 회복시킨 분이 티무르이고 그가 정복한 이란에서도 티무르는 「문화의 회복자」로 추앙 받고 있어요.』
  
  역시 티무르 시대 역사 전문가인 유수로바 일로람 누노쏩브나(女) 박사는 『티무르는 정복지에서 역사적 건물, 과학 건물, 종교건물은 절대 부수지 못하게 했습니다』라고 했다. 티무르 사망 이후 우즈베키스탄을 점령한 것이 우즈벡 칸(1282∼1342년)系였다. 그는 한 몽골부족 수장으로서 러시아 볼가강에서 살다가 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 우즈벡 부족은 카자흐스탄을 거쳐서 15세기에 우즈베키스탄에 나타나 히바에 왕국을 세웠다. 이 왕국은 1920년 볼셰비키 러시아에 합병될 때까지 존속되었다. 이 우즈벡族이 중앙아시아에서 티무르 후손들을 몰아냈다. 그 중 한 사람인 바부르는 1만2000 명의 충직한 기마대를 이끌고 남진하여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을 차례로 점령한 뒤 16세기 초에 드디어 인도 북부 델리에 당도하였다. 티무르 제국과 맞먹는 무갈 제국의 시작이었다.
  
  기자는 이번에 사마르칸트, 라호르(파키스탄), 뉴델리를 돌면서 티무르와 그 자손이 세운 2大 제국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유적·건축물은 규모와 예술성에서 당시 유럽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草原 유목민족의 기상과 이슬람 문화의 청결성이 어우러지고 현지의 토착문화와 접합된 티무르-무갈 문명은 몽골-투르크族이 결코 전쟁만 아는 사람들이 아니었음을 입증한다.
  
  우즈벡과 대한민국
  
  중앙아시아 5개국의 이름에는 「땅」이라는 의미의 「스탄」이 붙어있다.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카자흐스탄. 이 5개국의 넓이를 합치면 약 400만㎢로서 한반도의 약 20배이다. 인구는 남한보다 약간 많은 5100만 명이다. 바다가 없는 대신 天山산맥, 힌두쿠시산맥, 곤륜산맥, 파밀고원 같은 세계의 지붕과 카라쿰 사막, 페르가나분지, 그리고 장대한 江이 혼재(混在)하는 드라마틱한 地形이다.
  
  중앙아시아의 문명을 지탱하면서 국경선 역할도 했던 두 강은 남쪽 힌두쿠시 산맥에서 발원(發源)하여 북쪽으로 2500㎞를 흘러 아랄海로 들어가는 아무다리야江과 동쪽 天山산맥에서 발원하여 페르가나 분지를 지나 북서쪽으로 2000㎞를 흘러 역시 아랄海로 유입(流入)되는 시르다리야江이다. 우즈베키스탄은 이 두 江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을 중앙아시아의 중앙으로 부르는 이유는 한 가운데에 있을 뿐 아니라 다른 4개국과 모두 국경을 맞대고 있고 인구도 2200만 명으로 최다이며 文化的 전통은 가장 찬란하기 때문이다.
  
  우즈벡族 2200만 명 중 1400만 명은 우즈벡 안에 거주하고(우즈벡 인구 중 71%가 우즈벡族, 그 외 러시아·고려인 등 소수민족) 나머지는 주변국가에 흩어져 산다. 타지키스탄 인구의 23%, 투르크메니스탄의 13%, 키르기스스탄의 12.9%가 우즈벡族이다. 아프가니스탄에도 200만, 카자흐스탄에도 약 100만 명의 우즈벡人들이 살고 있다. 이로 인해서 우즈벡은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지향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이슬람 카리모프 대통령이 脫러시아 자주노선을 소신 있게 추구할 수 있는 것도 이런 배경이 있어서이다.  
  
  이밖에도 우즈벡은 목화, 천연가스, 금의 산출량에서는 각각 세계5위권 안에 든다. 풍부한 자원과 찬란한 역사적 유산이 카리모프 대통령의 강력한 지도력과 잘 결합된다면 우즈벡은 21세기의 주목할 만한 나라로 떠오를 것이다. 

 중앙아시아는 소련에 흡수된 뒤에도 지도상에 투르키스탄(Turkestan)으로 표기되곤 했다. 중국 영토로 편입된 신강을 東투르키스탄으로 부르기도 했다. 투르키스탄이란 말은 「투르크族이 사는 땅」이란 뜻이다. 중앙아시아의 종족은 약 100이나 되지만 거의가 이슬람을 믿고 있으며 투르크系라는 점으로 따진다면 문화적·인종적·종교적 공통분모도 크다. 타지키스탄만은 全인구의 약 60%를 구성하고 있는 타지크族이 아리안 계통이다. 이 우즈베키스탄은 한국과는 특수한 관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한국과 같은 몽골-투르크 문화권이란 점 이외에 우즈벡엔 22만 명의 고려인(한국교포)이 살고 있으며 최근에는 大宇를 필두로 하여 한국 기업이 많이 진출하고 있고, 카리모프 대통령을 비롯한 국가 지도부 인사들이 朴正熙의 근대화 모델을 열심히 연구하여 체제전환 과정에 적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려인의 성적표
  
  타슈켄트에서 기자가 처음 만난 고려인은 김 표트르氏였다. 그는 「우즈벡공화국의 고려인 역사」란 책을 쓴 학자이다. 22년간 우즈벡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문서검색관으로 일하면서 고려인에 관련된 자료를 수집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한국말은 서툴러 제주도 방언을 듣는 것 같았다.
  
  『1937년에 우리가 원동에서 강제 이주 당할 때 소련당국은 우리 동포를 카자흐스탄에 8만5000, 우즈벡에 7만5000명을 부렸습니다. 카자흐스탄에 버려졌던 사람들 중에서 우즈벡으로 넘어오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 지금은 카자흐스탄에 10萬, 우즈벡에 22萬명이 살게 되었지요.』
  
  1945년에는 우즈벡 거주 고려인 지식인 260여 명이 소련정부에 의하여 북한으로 보내졌다. 이들은 金日成의 집권을 도왔다. 김 표트르氏느 지난 60년간 고려인이 피·땀·눈물로써 쓴 성적표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우즈벡 공화국에서 노력훈장을 탄 650명중 139명이 고려인, 김병화 농장에서만 24명이 받았습니다. 훈장을 두 번 탄 2중 영웅 4명중 한 명이 고려인, 즉 김병화였습니다.』
  
  고려인들에게는 한글교육이 금지돼 대부분이 한국어를 잊어버렸다. 음식도 한국식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다만 보신탕은 비슷하게 만든다. 민족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데 있어서 중요한 요인인 언어와 음식이 다르기 때문에 고려인과 만나서 통역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하면 동족이란 친근감이 제대로 교환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슬람을 받아들인 고려인은 거의 없다. 요사이 한국교회(주로 신교)에서 수백 명의 선교사를 우즈벡에 보내 주로 고려인을 상대로 포교하고 있다. 타슈켄트에만 그들이 세운 교회가 40개소, 전국에는 100개소를 육박한다고 한다. 불교사찰도 생기고 있다.
  
  『우즈벡人의 은혜를 잊어선 안 된다.』
  
  사마르칸트를 방문한 지난 6월2일은 일요일이어서 중심부에 있는 한 교회에 가 보았다. 1990년에 이곳에 온 李성률 목사가 짓고 있는 4층 규모의 교회인데, 100여 명의 신도들(대부분이 고려인)이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李목사는 『회교도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극빈층과 장애인을 위한 봉사활동을 많이 하여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했다. 회교도들 중에서도 개종해 오는 이들도 있다고 했다. 사마르칸트 고려文化협회 회장 李알렉세이氏는 『열두 살 때 이곳에 왔는데, 그때 우즈벡人들이 고려인에게 빵 주고 집 주고 한 일은 영원히 잊어선 안될 것이다』라고 했다.
  
  李 알렉세이氏는 『우즈벡 사람들의 집구조, 연날리기·고무줄놀이·자치기·제기차기 풍습, 그리고 한국말과 비슷한 단어 등 풍습과 습관이 비슷하다. 요즘은 이곳이 고향처럼 느껴져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별로 나지 않는다』고도 했다.
  
  기자가 우즈벡에서 만난 고려인들은 한결같이 우즈벡人들에 대한 고마움을 이야기했다. 우즈벡人들은 원래 外地에서 온 사람이나 손님에 대한 접대가 극진하다. 1937∼38년의 겨울에 알몸 상태의 고려인이 그런 극진한 대우를 받아 살아 남았다. 집이 없는 고려인에게 자신의 집을 내주고 옆집으로 옮겨간 우즈벡人도 있었다고 한다. 믿기지 않아 다그쳐 물었더니 한 고려인은 화를 냈다. 戰亂의 狂風이 남북, 동서로 쉴새 없이 휩쓸고 지나간 중앙아시아 중에서도 우즈벡은 그런 십자포화를 가장 많이 당한 나라이고 민족이다.
  
  그런데도 우즈벡 사람들이 양순한 심성을 어떻게 유지하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즈벡의 피비린내 나는 역사에 비교한다면 아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 자리잡아 대륙의 천하대란(天下大亂)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할 수 있었던 한반도는 그야말로 태평성대의 역사이다.
  
  우리 민족이 전국적인 참화를 당한 것은 몽골침입, 임진왜란, 병자호란, 6·25동란 등 네 번밖에 되지 않는다. 우즈벡에서는 그런 규모의 전란이 수십 회였다. 한국을 유달리 外侵을 많이 당한 역사로 설명하는 것은 세계사적 안목을 결여한 태도이다.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거주 고려인이 중국 거주 조선족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이곳이 이제 우리 조국이다』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한국이 잘 사는 줄은 알지만 굳이 돌아가기는 싫다는 것이다.
  
  그들을 우즈벡에 붙잡아 두는 것은 이곳 사람들의 양순한 民心뿐 아니라 한국인을 마음 편하게 하는 비슷한 감정·풍습·습관, 그리고 山河의 풍경일 것이다. 타슈켄트의 농촌은 중국의 농촌보다 더 한국 농촌과 닮아 있었다. 이런 친근성과 마음 편함은 우즈벡과 카자흐族이 고려인과 인종적·혈통적·기질적 특징을 공유하고 있는 몽골-투르크系라는 점과 떼어놓고서는 설명이 되지 않을 것이다.
  
   김병화 농장에서
  
  우즈벡에서 가장 유명한 고려인은 집단농장의 지도자로서 한국인의 근면성을 현지인들에게 입증해 준 김병화이다. 그의 이름을 딴 농장이 타슈켄트 교외에 남아 있다. 김병화 농장은 약 750만 坪으로 여의도의 약 8배 규모이다. 지금은 1200 가구가 살고 있는데 그 중 300 가구가 고려인이다. 농지의 사용권도 가구별로(1∼10㏊씩) 분배돼 지금은 집단 농장이 아닌 협동농장으로 변했다. 고려인 노인 세 분을 만나고 김병화 기념관, 그리고 늪지대를 비옥한 옥토(沃土)로 바꾼 현장을 둘러보면서 김병화의 지도력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 알고 싶었다. 김 니콜라이 변현氏(66)는 『남은 꿈을 꾸는데 그는 해몽을 하고 있었던 사람이다』라고 평했다.
  
  『말이 없고 솔선수범으로 보여주는 사람이었습니다.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고요. 그리고 사람 차별을 하지 않는 겸손한 분이었습니다. 전문가들을 주변에 모아서 그들이 소신껏 연구하도록 밀어주었습니다. 일일이 간섭하지 않고 일단 믿고 맡기면서 「지금부터는 당신이 책임자이고 알아서 한다. 다만 문제가 생기면 내가 책임지겠다」고 합니다. 그러니 누가 열심히 하지 않겠습니까.』
  
  김병화 회장이 엄금한 것은 두 가지였다.
  
  『옷을 더럽게 입고 다니는 것과 도둑질하는 것은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큰 소리로 책망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회의 때 옷을 아무렇게나 입고 나오는 사람은 조용히 불러서 「시간이 바빠서 그런 모양인데 지금 시간을 줄 테니 집에 돌아가 바꿔 입고 오라」고 합니다. 이런 말도 기억나는군요. 「고기는 머리부터 썩는다. 도둑질을 하면 그 도둑질을 생각해내는 머리가 썩는다. 조직에서도 머리(지도부)가 썩지 않도록 신경 써야 한다」 김병화 회장이 죽었을 때 우즈벡 공화국 대통령도 문상을 왔는데 집이 너무 초라해 놀랐습니다. 울타리도 없고 자기 집에 다른 사람들을 불러들여 같이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열심히 했어요.』
  
  駐우즈베키스탄 한국대사관의 서건이(徐健二) 대사는 지난 5월에 타슈켄트의 한 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는 김병화의 부인을 찾아가 위로했다고 한다. 2중 영웅의 아내는 80代 노인이 되어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徐대사는 매달 생활 보조를 해주기로 했다고 전했다. 김병화 회장의 지도력, 그 요체는 자존심이 강한 한국인의 성격을, 사회주의 체제下에서도 잘 살렸다는 데 있는 것 같다. 그 지도력 덕분에 이 농장의 생산량은 항상 계획량보다 50%나 많았고, 2차대전 중 다른 곳에선 굶어죽는 사람도 생기는데 이곳에서는 밥을 먹었다는 것이다.   
  김 니콜라이 변현氏는 『한국인은 일을 안 끝내면 잠도 안 자고 일을 마친 뒤 술을 하는데 러시아인들은 술을 마셔야 일을 하더군요』라고 덧붙였다. 이때 (주)大宇 타슈켄트본부 김진곤 차장이 말했다.
  『김 선생님도 열심히 일했지만 우리도 6·25 동란 뒤 무지무지 일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GNP 규모로 세계 11위랍니다. 그것도 반쪽나라 하나로 말입니다. 21세기에는 세계 7위로 뛴답니다.』
  
  한 손을 묶인 채 다른 한 손으로써만 싸워 온 50년간의 경제 대전에서 11위를 한 한국, 그 일선의 소대장 격인 金차장이, 선배 세대의 고려인 앞에서, 광활한 우즈벡 평원을 배경으로 하여 한 마디 한 것이다. 당당한 두 한국인의 자랑스런 상호보고-콧날이 시큰해지는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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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 槪觀(개관) 자료: 주우즈베키스탄 한국 대사관 작성

•국명 : 우즈베키스탄공화국(Republic of Uzbekistan)
•면적 : 44만 7,400㎢(한반도의 약 2배)
•인구 : 3,048만명(2013년 기준)
※민족 : 우즈베키스탄인(80%), 러시아인(5.5%), 타지크인(5%), 카자흐인(5%), 유태인(0.3%), 고려인(0.9%, 약 17만 5천명)
•수도 : 타슈켄트(인구 약 250만 명)
•언어 : 우즈베키스탄어(공용어), 러시아어(통용)
•종교 : 이슬람교 88%(수니파 70%), 러시아 정교 9% 등
※헌법상 정치와 종교를 엄격히 분리

•정부형태 : 대통령 중심제(임기 5년)
※카리모프 대통령(’00.1. 5년 임기로 재선, ’02.1. 임기 7년으로 연장, ’07.12.23 대선에서 88.1% 득표하여 7년 임기 재선)
※2011.12월, 차기 대통령의 임기를 5년으로 단축하는 헌법개정
•행정구역 : 12개 주𔆇개 자치공화국𔆇개 특별시
•의회 : 상‧하 양원제(상원 : 100석, 하원 : 150석 / 임기 각 5년)
※2004.12월 단원제를 양원제로 전환

•경제지표(2013년 기준)
-GDP : 567.8억불
-1인당 GDP : 1,880불(EIU)
-경제성장률 : 8.0% / 물가상승률 : 7.2%(EIU)
-실업률 : 약 4.9%(2014년 현재 약 64만 명)
-교역 : 총 242억불(수출 128억불 / 수입 144억불)(EIU)
-환율 : 1 USD = 2,284 UZS(우즈베키스탄 숨)(14.5월 현재)
•군사력 : 총 5만 5,000명(지상군 4만명 / 공군 1만 5,000명)
•기후 : 고온건조한 사막성 기후

■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 국가 유지
• 카리모프 대통령은 1991.12월 취임한 이래 국정 모든 분야에 영향력 행사
- 1995.3월, 2000.1월 대선에서 압도적 지지(91.9%)로 재선, 2002.1월 ‘대통령 임기
7년 연장’ 국민투표 지지 등을 바탕으로 대통령 권한을 강화
- 2007.12.23 득표율 88.1%로 7년 임기 3선에 성공함으로써 강력한 통제력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적 안정이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있으며, 최근 매년 평균 8%대의
경제성장세가 정권안정의 기반으로 작용
- 사마르칸트 출신으로서 권력기관에 사마르칸트와 타슈켄트 양대 세력을 균형 있게
등용하고 있으며, 양대 세력 및 경제 외교 테크노크라트간 견제
• 카리모프 대통령은 경제 발전과 민주화 노력을 강조하고 있으며, 2010.11월 “시민사회
설립 및 민주개혁 구상”을 발표하였으나 오히려 대통령의 권한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개혁이 추진되고 있다는 평가
- 민간 부문 확대 등 시장경제 강화, 정당입지 강화 방안 마련 제안 등

■ 개헌을 통한 의회 권한 강화 등 최근 동향
• 2014.4월 헌법을 개정하여 △의회의 승인을 통해 총리를 임명토록 하고, △사회 경제
부분 주요사안 관련 내각의 의회에 대한 연례 보고를 의무화 했으며, △의회의 내각
불신임권을 인정하고, △선거관리위원회를 의회가 구성토록 규정
- 동 개정헌법에 내각은 경제 사회 재정 금융 통화 부문 정책이행 및
과학 문화 교육 보건 발전 프로그램 수행 등 사회 경제 분야에 대한 책임을 진다고
규정하는 등 내각의 권한을 확대하고 명확화
• 상기와 같은 개헌을 통해 의회의 권한 강화 방안이 지속 추진되고는 있으나, 아직까지
의회의 정부에 대한 견제는 미약한 상황
- 총선시 당선된 무소속 또는 야당 의원들이 총선 후 친여 입장을 표명하는 등 의회 내
야당 세력은 거의 전무한 상황
• 현재 자유민주당 등 총 4개의 정당이 활동 중이나, 모두 친정부 성향
- 자유민주당 : 2003년 설립, 2009년 총선에서 최다석인 53석 획득, 2007년 카리모프
대통령이 자유민주당 대선후보로 출마
- 인민민주당 : 우즈벡 공산당이 전신으로 1991년 독립 당시 설립, 지난 총선에서
32석 획득, 2007년까지 카리모프 대통령이 당대표직 수행

외교관계
• 2007년 중반부터 미국의 對아프가니스탄 수송로 확보와 주재국의 지나친 對러 의존도
탈피라는 兩國의 전략적 필요성에 따라 상호 관계 정상화를 도모하면서 주재국은 미국
및 러시아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실용적 외교노선 추구
- 2009년 투르크메니스탄-우즈벡-카자흐-중국을 연결하는 가스 파이프라인 완공(연간
약 100억 입방미터의 가스 수송)으로 에너지 수출 관련 對러 의존도에서 탈피
• 이슬람국가와의 관계 강화 노력, 회교 근본세력 차단, ‘근대적 세속국가’ 건설 목표
- 내륙국가로서 인도양 페르시아 만 출구 확보를 위해, 이란 아프간 파키스탄 등과의 관
계 증진 추구하고 있으며 이와 관련 ‘우즈벡-투르크멘-이란-오만’ 교통회랑 구축을
추진 중

<對러시아 관계>
•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탈러 독자외교’를 추구 하였으나
현실적으로 러시아의 정치 경제적 영향력으로부터 완전 탈피 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하는 한편, 2005년 안디잔 사태 이후 미국 등 서방의 정치개혁 및 인권개선 압력
경험 후 러시아와 서방간 균형적 실리외교 노선 경주
• 2012년 양국은 2014년 미국 및 NATO의 아프간 철수 이후 테러,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
확대, 마약 및 불법 무기 거래 등 지역 안보를 위협하는 위험 요소에 대응하여 공동
노력하고, 우즈벡이 러시아 주도의 CIS FTA에 가입하는 등 경제 협력 중심으로 양국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기로 합의
- 러시아는 가스田 개발 등 에너지 분야 협력 확대를, 우즈벡 측은 IT, 석유 화학 등
비에너지 분야 협력 확대를 희망
※ 양국은 상호 관심분야는 상이하지만 상대국을 주요 경제협력 파트너로 인정하고 있는 만큼 경제협력 확대를 위해 지속 노력할 것으로 예상
• 그러나, 우즈벡은 2012.6월 러시아 주도 CIS 국가 중심의 CSTO 잠정 탈퇴를 선언하고
우즈벡 내 최대 이동통신사였던 MTS(러시아 회사)의 우즈벡 내 영업을 정지시키는 등
양국관계는 다소 소원
- 2012.12 CSTO 정상회의에서 우즈벡의 활동 중단 승인
※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은 우즈벡의 CSTO 활동 중단에 대해 유감을 표하면서 우즈벡이 여전히 러시아의 동맹국으로 남아있을 것임을 강조
• 2013.4월 양국은 카리모프 대통령의 러시아 방문 계기 등을 통해 MTS, CSTO 등
문제에도 불구하고 상호 협력 파트너로서 공동 인식하고 있음을 천명

[ 2016-05-02, 21:3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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