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유목 제국 오스만 터키
몽골 草原 역사 紀行(8)황금 속에서 피비린내 나는 토카프 궁전, 모스크가 된 소피아 사원, 3대륙에 걸친 대제국으로 유럽을 위협하였던 유목민족의 大長程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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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유목제국 오스만 터키

중량감 넘치는 역사·지리·인간

1996년 6월5일 오전 9시30분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공항을 이륙한 터키 항공 소속 보잉 737-400 여객기는 기수를 곧 正西쪽으로 돌렸다. 아랄海 남쪽-카스피海 상공을 가로질러 이륙 3시간만에 터키공화국 영공으로 진입했다. 노아의 방주가 어딘가에 박혀 있다는 눈 덮인 아라라트山(해발 5165m)을 오른쪽으로 내려다 보면서 날아도 날아도 설산(雪山)의 연속이었다. 아나톨리아 반도 전체를 점유한 터키의 면적은 75만5천㎢로서 한반도의 3.5배쯤 된다(인구 약8000만). 유목 기마민족 가운데 대제국을 가장 많이 건설하고 정복했던 투르크族의 西征이 이 아나톨리아에서 오스만 터키帝國을 건설함으로써 하나의 피날레를 장식하였다.

1299∼1922년 사이 623년간 존속한 오스만 터키는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에 걸친 대제국을 세웠다. 지금의 불가리아, 유고슬라비아 연방, 헝가리, 루마니아까지 지배했고 두 번 유럽문명의 심장이던 비엔나까지 호위하였다.

오스만 터키는 몽골-투르크系 유목민족 최후의 제국이었을 뿐 아니라 유목민족의 농경민족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마지막까지 유지했던 나라이다. 유럽의 해양문화권 국가가 식민지 개척과 산업혁명을 통해서 유목 기마민족에 도전하던 16∼20세기에도 몽골-투르크系는 3大제국을 유지하였다. 인도 대륙에서는 무갈제국(무갈은 몽골을 뜻하는 이란語), 중국에서는 여진族이 세운 淸, 그리고 오스만 터키. 이 3大 제국은 해체 과정에서 서구 열강의 半식민지가 되었으나 오스만 터키는 대제국의 사령탑이던 아나톨리아에서 터키 공화국의 본체를 유지하였다.

이것은 오로지 케말 파샤(아타 투르크)라는 위대한 근대화 혁명가의 지도력 덕분이었다. 오스만 터키가 1차 세계 대전 때 독일―오스트리아 편에 섰다가 해체되자 20여 개국의 독립국이 생겼다고 한다. 투르크族은 약 2천년에 걸친 제국건설사에서 철기 문화와 기마전술, 그리고 개방적인 통치술을 구사하여 16개의 대제국과 100개가 넘는 소국가를 세웠다. 흉노, 훈, 돌궐, 위구르, 셀주크, 호레즘, 맘루크(이집트), 티무르, 무갈, 오스만 터키…. 그들은 유라시아 草原, 중앙아시아, 中東, 東유럽이란 캔버스에다가 엄청난 나라들을 그렸다가 지웠다가 또 그리는 일을 2000년간 계속해 왔다.

그런 그림의 흔적 중 아직도 뚜렷이 남아 있는 것이 터키이다. 다소 희미해졌지만 투르크 문화권으로 회색을 칠한 만한 곳은 중앙아시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이란, 中東,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아, 발칸반도, 東유럽에 걸쳐 있다. 웬만한 민족은 그들이 세운 제국의 멸망과 운명을 같이한다. 사라지든지 노예가 되든지. 그러나 투르크-몽골系는 예외였다. 그들은 제국의 명멸과 무관하게 항상 지배집단으로 남았다. 피지배계급이나 노예로 전락한 적이 거의 없는 민족이 투르크族이다.

항상 이동하는 기마군단 조직 그 자체였던 투르크族은 농경민족처럼 땅에 애착을 갖지도, 국경이나 언어·종교에 구애받지도 않았다. 그들이 믿는 것은 군사력이었다. 셀주크族처럼 중앙아시아에서 밀려나면 이란에서, 이란에서 일이 원만하게 이뤄지지 않으면 아나톨리아 반도로 옮겨가 현지 王朝를 무너뜨리고 정착 농경민족을 복속시킨 뒤 새 나라를 세우면 되는 것이었다.

터키에 대해서는 기자는 여행 전문가들로부터 「지구상에서 가장 인심이 좋은 곳, 특히 한국 사람에게」라는 촌평을 들어왔다. 짧은 여행기간이었지만 그런 촌평이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 민족성의 원인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기자는 몽골-투르크系의 유목민족이 가진 공통점(손님에 대한 非타산적 친절) 이외에도 지금의 터키 민족이 한 번도 식민지가 된 적이 없고 항상 지배 계층이었다는 점이 중요하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지배를 당한 민족은 피해의식에서 우러나는 의심과 요령을 터득하게 된다. 터키人들은 다소 가난하지만 당당하고 너그럽고 정직했다. 높이 10㎞ 상공에서 내려다 본 엄청난 중량감을 가진 국토, 오스만 터키 제국의 거대한 역사, 터키人들의 건장함이 합쳐진 이 나라는 또한 그리스-로마시대 유적이 그리스나 이탈리아보다 더 많고 성서유적은 이스라엘보다도 더 많다는 평을 듣고 있다.

천막같은 궁전

5시간만에 여객기는 유럽쪽 이스탄불市의 상공으로 들어갔다. 황토색 지붕을 가진 집들이 나타났다. 이스탄불 공항에 착륙, 비행기에서 내리는데 동양인 소녀가 기자에게 다가오더니 몇 마디 하다가 얼굴을 붉히며 달아났다. 그 소녀를 동행한 서양인에게 『웬일이냐』물었더니 『알마타에서 오는 카자흐人을 찾고 있다』는 것이었다. 기자의 얼굴이, 투르크族에 속하는 카자흐人과 비슷했다는 얘기다. 공항을 나와 지중해쪽 해변도로를 달려 바로 토카프 궁전 박물관에 도착했다. 흑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보스포루스 해협 쪽으로 돌출한 반도형 언덕에 세워진 오스만 터키帝國 시대의 궁전이다. 궁전을 에워싼 성벽은 5㎞, 면적은 약 30萬坪,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킨 마호멧 2세가 지은 것으로 그 뒤 20여 명의 황제가 이곳에서 살았다.

몽골 초원에서 본 천막(겔)을 그대로 본뜬 지붕이 많다. 궁전이 아니라 유목 기마민족의 야영지 같은 느낌도 주었다. 실제로 오스만 터키의 술탄(황제)들은 19세기까지도 이 궁전 뜰에 천막을 쳐놓고 깔개를 깐 뒤 푹신한 방석 위에 앉아 있곤 했다. 기마에 편하도록 만든 헐렁한 바지를 입고서.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은 화살통과 활집과 골무였다. 헝가리에서 한국까지 몽골 벨트 나라의 상징물로 빠지지 않는 것이 활이다. 이 토카프 궁전 박물관은 황제와 그 가족들이 쓰던 도자기와 장신구, 옷, 의자, 무기, 보석류로 채워져 있었다. 영롱한 다이아몬드, 사파이어, 황금으로 호사의 극치를 보여준다.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사파이어도 진품을 그대로 전시하고 있다.

피비린내

이 토카프 궁전만큼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을 목격한 건물도 인류역사상 흔치 않을 것이다. 투르크-몽골族의 제국의 권력觀은 특이했다. 권력 승계의 규칙이 존재하지 않았다. 누가 王이 되느냐 하는 것은 神의 손에 달렸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인위적인 규칙을 만드는 것은 그런 신의 권한을 침범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황제가 죽은 뒤에는 草原의 법칙에 따라 황족(皇族) 안에서 실력 대결이 벌어지고 승자(勝者)가 황제位에 오르는 날 패자(敗者)들은 저승으로 가야 했다. 무라드 3세가 1574년에 등극한 날 그가 맨 처음 한 일은 다섯 형제들을 교수형시킨 것이었다.

마호멧 3세는 1595년에 등극한 날 19명의 형제들을 처형했다. 그는 여러 아들 중 후계자로 지목한 아들만 남겨두고는 남은 아들들을 토카프 궁전 내의 카페(kafes : 새장이란 뜻)에 가두어 그곳에서 살게 했다. 여자와 마약은 허용되었으나 출산은 허용되지 않았다. 매일 처형의 공포 속에서 살아야 하는 이들은 정신병자가 되거나 폐인이 돼갔다.

1687년 슐레이만 2세는 왕자 시절 이 「새장」에 갇혀 있다가 황제로 추대되었다. 그를 모시러 온 사람을 사형집행인으로 착각한 그는 『제발 신에게 기도를 드린 뒤에 죽을 수 있도록 해다오. 나는 여기서 40년간 살면서 매일 조금씩 조금씩 죽어갔으니 차라리 단번에 죽는 게 편하겠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새장에서 끌려나가다시피 하여 황제 자리에 올랐다고 한다. 몽골-투르크 제국이 권력승계 과정의 내분으로 바람처럼 사라져 버리는 일이 잦았던 것은 권력승계의 제도화가 돼 있지 않았다는 것이 그 중요한 이유이다. 더구나 유목기마민족 제국은 예외 없이 여러 부족의 연맹체이므로 권력의 중심부가 흔들리면 해체의 속도도 빠를 수밖에 없다. 그래도 오스만 터키가 유목제국 사상 가장 오래인 600년 이상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권력 투쟁이 황족인 오스만家 안에 한정돼 있었고, 역대 황제들이 무자비한 숙청을 통해서 후계자에 방해가 되는 혈족들을 제거해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로마를 무너뜨린 훈족

서양문명의 저수지이자 본류인 로마제국은 西와 東이 모두 몽골-투르크族에 의하여 멸망되었다. 西로마제국은 훈(흉노)族의 유럽침입이 일으킨 게르만族의 이동에 의해, 東로마제국은 투르크族 이 세운 오스만 터키에 의해 무너졌다. 이는 세계사의 氣가 理를 꺾었다는 것을 뜻한다. 

일찍 유목의 전통을 버리고, 농경화, 과학화(科學化)되었던 몽골族 국가 일본과 한국이 19세기말부터 공업화를 시작, 20세기 후반기에는 英·美와 겨룰 만한 경제력을 쌓아가고 있다. 몽골―투르크族 역사상 전혀 새로운 장(章)이 지금 열리고 있는 것이다. 1453년 5월29일 오후 서양문명의 한 중심이자 동방정교회의 본산이며 로마제국의 마지막 촛불이던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20代의 젊은 황제 마호멧 2세는 곧바로 소피아 교회당으로 들어왔다. 한 병사가 교회당 바닥을 깨부수고 있었다. 황제는 물었다.

그 병사는 『이건 敵의 성당이니까 부수고 있다』고 했다. 마호멧 2세는 칼을 뽑아 그 병사를 베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너희들에겐 여자와 약탈물이 제격이다. 이 건물은 내 것이다.』

마호멧 2세는 소피아 성당 옆에 미나렛(코란을 낭독하여 기도시간을 알려주는 원형탑)을 건설하여 이 성당을 회교 모스크로 고쳐 쓰게 했다. 기자가 소피아 성당을 흔적이 아닌 원형 그대로 구경할 수 있게 된 데는 마호멧 2세의 너그러움이 있다. 全面의 돔이 황토색으로 은은하게 드러나 보이는 이 건물은 로마의 베드로 성당보다도 약 900년이 앞서는 건물이다.

관용·개방

소피아 성당은 15세기까지는 세계 최대의 교회 건물이었고, 지금도 성당으로는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크다. 높이 66m, 건물 내부 면적은 7000㎡. 1층 바닥엔 「세계의 배꼽」이란 원형 표시가 있다. 세계의 중심, 비잔틴의 중심, 콘스탄티노플의 중심이란 뜻이다. 그 바로 옆엔 이슬람 황제의 금색 예배실이 누각처럼 세워져 있었다. 이교(異敎)의 본부 속에다가 만든 예배실―회교의 수장을 겸했던 오스만 터키 황제의 이러한 종교적 관용은 주로 서양·기독교의 역사관에 따라 세계사를 배웠던 사람들에겐 혼란을 일으킨다. 꼭 1년 전 기자는 이스라엘에 간 적이 있었다.

예루살렘의 聖地로 기자를 안내하던 한 유태인은 『지금 우리가 이슬람국가들과 사이가 좋지 않아서 그렇지 유태인에게 신앙의 자유를 주었던 것은 회교, 우리를 가장 탄압했던 것은 천주교』라고 말했다. 그는 또 『특히 오스만 터키의 전성기를 연 슐레이만 大帝는 스페인에서 집단학살을 당하고 있던 유태인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해 주어 많은 지식인과 기술자들이 그의 보호下에서 문화를 진흥시켰다』면서 『지금도 우리는 터키 사람들에게 고마워하고 있으며 비록 회교국가이지만 우방처럼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터키 정부는 이스라엘 공군이 터키 상공에서 훈련을 할 수 있도록 허용했고, 이 조치에 격분한 한 광신자로부터 데밀렐 대통령은 저격을 당하기도 했다(경호원이 막아 피살 모면). 징기스칸, 티무르, 마호멧, 슐레이만 大帝 등 유목민족의 지도자들은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는 草原의 전통을 지켰다. 전쟁과 군사 부문에서는 철저한 복수·약탈·파괴의 논리를 실천한 유목민족들이지만 종교·문화·민족 문제에서는 개방과 관용으로 대했다.

이 상반된 두 가지 특징은 농경사회의 폐쇄성을 압도하는 노하우가 되어 유목민족 국가의 대제국化를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전쟁은 잔인하게, 통치는 너그럽게! 소피아 성당 앞에는 서기 970년에 만든 오벨리스크(石碑)가 있는데 거기에 붙어 있던 청동장식품의 뜯겨져 나간 흔적이 흉하게 남아 있었다.

이것은 13세기초에 베니스-프랑스 연합군으로 구성된 제4차 십자군이 聖地해방의 목적에서 이탈,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분탕질을 해간 흔적이다. 그들은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보물들을 가져가고 고문서를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소피아 성당에 창녀들을 잡아와서는 음탕한 파티를 열었다. 지금 베니스 산 마르코 성당에 있는 네 개의 청동말像은 베니스 군대가 이때 약탈해간 것이다. 콘스탄티노플은 기독교도에 의하여 파괴되고, 회교도에 의하여 보존되었다.

당당함

배를 타고 아시아쪽으로 건넜다. 오후 5시, 마이크를 통해 코란을 낭송하는 소리가 도시 전체, 그리고 보스포루스 해협을 뒤덮었다. 터키 전체에 7만개의 모스크가 있고 이스탄불에만 큰 모스크가 800여 개가 있다. 바다에 나서서 도시쪽으로 눈을 돌리니 모스크의 미나렛이 전봇대처럼 거의 숲을 이루고 있었다. 아시아쪽 이스탄불에 도착하여 배를 내리는 데 일곱 살쯤 돼 보이는 소년이 체중기를 길바닥에 놓고 귀엽게 앉아 있었다. 한 뚱뚱한 할머니가 올라서서 몸무게를 재 보더니 돈을 낸다.

이스탄불 관광지에 물건을 파는 소년은 많지만 구걸하는 사람은 볼 수가 없었다. 북경에서 기자의 다리를 붙잡고 늘어지면서 돈을 더 달라고 하던 소년이 떠올랐다. (주)大宇지사장 김학수(金學洙) 차장은 『여기서는 적어도 자동차 유리창을 닦아준 다음에 물건을 사라고 권하고, 거절해도 얼굴을 찌푸리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개방적이고 너그럽고 친절하며 용감하고 감성적인 사람들』이란 것이 터키에 사는 한국인들의 공통된 터키人 평이었다. 이스탄불의 분위기가 활기차게 보이는 것은 지중해의 햇볕 때문만이 아니었다. 터키 사람들의 얼굴이 참 좋았다. 인플레 年 80%, 실업률 10%, 1인당 GNP에서 우리의 4분의 1, 정치불안의 나라이지만 그런 경제형편은 그들의 얼굴에 잘 반영되지 않고, 오히려 세계적인 대제국을 여러 개 건설하면서 유럽의 문명과 정면 대결했던 아시아 유목민족으로서의 품위가 느껴지는 편하고 당당한 표정들이 나라를 넉넉하게 보이게 했다. 관광지나 택시에서도 바가지 씌우기가 거의 없고 민간인의 총소지가 200만 자루를 넘는다는 나라에서 범죄 발생률도 낮다.

아시아에서 유럽을 바라보며

이날 저녁에는 大宇자동차 현지 판매회사 회장인 오마르 오자르군氏의 집으로 저녁식사 초대를 받았다. 그의 2층 저택은 기막힌 경관을 보여주었다. 보스포루스 해협 가운데서도 가장 좁은(폭 670m) 물목을 내려다보는 비탈에 자리잡은 언덕 응접실. 화물선이 쉴 새 없이 흑해와 지중해 방향으로 오가고 夕陽에 물든 하늘과 바다, 그리고 두 대륙에 걸친 이스탄불의 불빛은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두 대륙을 잇는 술탄 마호멧 2세 현수교는 海面에서 높이가 60m. 석양을 등진 다리 위의 차량들은 마치 하늘에 떠서 달리는 것 같았다. 응접실 벽에는 카자흐스탄 알마타의 天山산맥 풍경, 우즈벡의 농촌 풍경을 그린 그림이 벽에 붙어 있었다.

『한국인의 가족 중심적 생활 태도와 외국인에 대한 친절은 우리 터키와 꼭 같습니다. 국가나 기업이나 관계성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렇게 운을 뗀 오자르군氏는 유창한 영어로 외교관처럼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 두 나라는 6·25동란을 통해서 깊은 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800 명이 전사했고 지금도 투병중인 부상자가 있습니다.』

머리가 시원하게 벗겨지고 굵은 테 안경을 낀 오자르군씨는 터키·한국 사이의 혈연·혈맹 관계를 이야기한 뒤 그림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중앙아시아, 모스크바, 알마타, 타슈켄트로는 이스탄불에서 매일 비행기가 뜨고 있어 1일 생활권에 들어 있습니다. 중앙아시아 시장은 너무나 커서 흥분될 지경입니다.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의 풍경화를 저렇게 걸어 놓은 것도, 중앙아시아 시장 개척의 꿈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터키 민족은 결코 작은 민족이 아닙니다. 회교 근본주의자와 극단주의자들이 있지만 전체인구의 20%도 안됩니다. 유럽공동시장과의 관세 통합으로 유럽시장에 진출하는 데도 利點을 갖고 있습니다.』

베란다에 나가 앉아 보스포루스 해협의 夜景을 감상하면서 먹은 터키 음식은, 이곳 사람들이 중국, 프랑스 다음의 세계 3大 요리로 터키요리를 치는 까닭을 짐작케 하였다. 오자르군氏는 터키의 국민가요들을 틀어주었다. 한국의 창이나 판소리를 연상시키는 노래도 있었다. 폐부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가창의 방식과 감정표현도 비슷했다. 그는 「사랑과 용서」라는 노래를 틀더니 『여자와 남자의 관계를 한 차원 승화시키는 힘이 있는 노래다』라면서 『이런 노래를 듣는 데는 아시아 쪽인 여기가 제격이다』라고 말하면서 호탕하게 웃었다.

셀주크族의 大長征

아시아의 끝에 앉아 1㎞밖에 떨어지지 않은 유럽을 바라보면서 기자는 오자르군氏로 대표되는 투르크系의 대장정을 상상해보았다. 지금의 터키를 세운 오자르군氏의 직접 조상은 오우즈族으로서 투르크系의 한 부족이었다. 10세기경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동쪽 시르다리야江 부근에서 부족 국가를 세움으로써 역사에 등장한다. 이때 이들의 생김새는 한국인과 더 비슷했을 것이다.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백인종의 피로 많이 희석되었는데도 터키 동쪽 지역에 가면 지금도 몽골 반점을 갖고 태어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서기 1000년 경 오우즈국이 멸망하면서 세계사의 흐름을 바꿔 놓는 사건이 이어진다. 오우즈族과 동맹 관계에 있던 셀주크族이 이탈하여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서기 1040년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에 터잡고 있던 가즈나王朝(투르크系)의 군대를 격멸하여 인도 쪽으로 내쫓은 셀주크族은 2년 뒤 지금의 이란을 점령함으로써 중앙아시아와 中東을 통일하여 이슬람 세계의 覇者가 되었다. 기독교 聖地 팔레스타인 지역까지 手中에 넣는 바람에 聖地탈환을 명분으로 한 십자군 원정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에서 중세 유럽 군대는 번번이 참패했지만 이슬람의 先進 과학·수학·문학과 접하게 되었고 이것을 가지고 돌아간 것이 유럽 르네상스의 불씨가 되었다.

서기 1071년 8월26일 셀주크 군대는 지금의 터키 동부 말라즈기르트에서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삼아 기독교 문명의 수호자를 자처하던 비잔틴 제국 군대와 결전했다. 비잔틴 황제 디오게네스가 이끈, 유럽 연합군 20萬에는 프랑크, 노르만 용병도 끼여 있었다. 셀주크군은 5만의 기병으로 이 大軍을 격파했다. 유목기마 민족 특유의 매복·기습·우회작전으로써 정면승부에만 익숙한 유럽식 군대를 끝장냈다. 디오게네스 황제와 많은 사령관들이 생포됐다.

셀주크族의 이 승리는 비잔틴 영향권이던 아나톨리아 반도로 투르크系가 대거 이주하여 오스만 터키 제국을 건설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한편 셀주크 王朝는 내분으로 이라크 셀주크, 키르만 셀주크, 시리아 셀주크로 3分 되었다. 元셀주크 왕족 출신인 슐레이만 샤는 아나톨리아 동쪽으로 진출, 1078년에 셀주크 터키를 창건했다.

그 165년 뒤인 서기 1243년 징기스칸의 손자 바투의 원정군은 셀주크 터키 군대 8만 명을 쾨세다의 전투에서 격파하고 이 나라를 사실상 속국으로 만들어 버렸다. 북방 草原의 전투력 서열을 보면 투르크系는 몽골系와 같은 기마전술을 구사했지만 몽골군대에 늘 참패했다. 몽골군은 참패한 투르크 군대를 흡수하여 더 커진 군단을 형성, 눈덩이처럼 굴러갔다. 몽골군대는 중국의 金과 싸우면서 공성(攻城) 기술을 익혔기 때문에 전통적인 平原전투 기술만 가졌던 투르크군 보다는 늘 한 수 위였다.

기마민족은 문명화될수록 농경 문화의 영향을 받아 군사력이 떨어지는 경향을 보이는데 몽골族은 먼저 西進한 투르크族보다는 더 야성적이었고 유목기마 민족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셀주크 터키가 몽골군에 의하여 와해된 폐허 위에서 서기 1299년, 오우즈族의 오스만 베이가 오스만 터키의 주춧돌을 놓았다. 오우즈族은 셀주크族이 갈라져 나간 뒤 다른 경로로 西進했다. 흑해 부근을 지나 아나톨리아 반도로 진입한 이 유목 민족은 여기서 셀주크族과 디시 만난다.

[ 2016-05-11, 18:38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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