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터키: 몽골벨트의 極東과 極西
몽골 草原 역사 기행(9)한국전에 파병된 터키 군대는 가장 무섭게 싸운 군대였다. 포로가 되어서도 軍紀를 유지하였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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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크族의 유럽 침공

오스만 터키는 제국으로서 운동방향을 비잔틴 제국과 유럽쪽으로 설정했다. 서기 1389년 무라드 1세 황제는 발칸으로 진출, 코소보 전투에서 발칸 동맹군을 격멸시켰다. 불가리아, 마케도니아, 세르비아를 수중에 넣고 보스니아, 알바니아, 그리스, 벨그라드를 위협하게 되었다. 오스만 터키의 전성기는 슐레이만 大帝 시절이었다. 그는 헝가리와 트란실바니아(지금의 루마니아)를 점령한 뒤 1529년엔 비엔나를 포위했다가 撤軍(철군)했다. 지금의 오만과 아덴 지역을 점령, 인도양의 制海權도 장악했다. 오스만 터키는 유목기마 민족 국가로서는 이례적으로 강력한 해군을 육성, 베니스와 지중해 제해권을 놓고 쟁패하다가 레판토 해전에서 스페인+베니스 연합함대에 패배하였다.

슐레이만 大帝는 1520년부터 46년간 在位했다. 오스만 터키는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 3대륙에 걸친 대제국으로서 그 면적은 중국보다 더 컸다. 몽골-투르크族 제국사상 슐레이만 大帝는 유럽의 정치에 가장 깊숙이 개입한 황제가 되었다.

유럽의 반격

오스만 터키의 東유럽 점령은 4∼5세기 훈族, 13세기의 몽골 침공에 이은 몽골-투르크系에 의한 세 번째의 본격적 서구 침공이었다. 이것은 또한 몽골-투르크族과 유럽 문명의 대결에서 몽골-투르크系의 상한선을 의미했다. 16세기 이후 서구는 수학·과학·기술과 산업혁명, 그리고 항해술·무역·식민지 개척을 기반으로 하여 군사력의 우위를 유목 기마민족으로부터 빼앗게 된다. 소총과 내연기관의 발명은 말의 기동성과 활의 파괴력을 무력화시켰다. 18세기에 들어서자 오스만 터키군대는 기마민족의 오랜 전술을 버리고 유럽식 군사제도를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유럽의 문화적·정치적·군사적 우월성을 인정하기 시작하면서 터키의 지배층도 서구를 지향하고 서구화의 길을 근대화로 생각하게 되었다. 1877년 발칸 반도를 둘러싼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오스만 터키가 패한 것도 유목 기마민족사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몽골군의 러시아 침공 이후 300년간 몽골의 속국이었던 러시아가 도리어 군사적 우위에 서게 되었고 유라시아 내륙(內陸)의 패권을 유목민족으로부터 빼앗아 갔던 것이다. 유목·기마민족의 고향인 중앙아시아는 러시아에 병합될 운명이었고 몽골은 러시아의 보호국 처지로 전락한다.

서구화

1차 세계대전 때 오스만 터키는 결정적 이해관계가 없는데도 독일-오스트리아 편에 섰다가 패전국이 되었다. 1920년의 세브르 강화조약에 의해 오스만 터키는 해체 당하고 터키 본토에서마저 그리스 군대가 이즈미르를 점령하는 형편이 되었다. 제국 정부가 무기력하게 대응하는 사이에 그리스 군대의 만행이 계속되자 농민군의 저항이 발생했다. 이런 분위기를 이용하여 명장 케말 파샤(터키에선 아타 투르크로 불린다)가 그리스 군대를 상대로 독립전쟁을 일으켜 승리했다. 이런 武力을 바탕으로 하여 터키는 1922년 로잔느(스위스) 강화회의에서 굴욕적인 세브르 강화조약을 폐기하는 대신 터키 본토의 주권을 인정받았다.

케말 파샤는 1923년 帝政을 폐지, 공화국을 발족시켰다. 초대 대통령이 된 케말 파샤는 이슬람 세계의 종주국이던 터키의 정치를 종교와 분리하는 근대화 개혁을 단행했다. 이슬람 세계에서 최초의 세속(Secular) 국가가 탄생한 것이다. 그는 서구화를 근대화의 정치철학으로 삼음으로써 사실상 脫이슬람 노선을 선택했다. 스위스 民法을 도입, 여성에게도 평등권·참정권을 주었다. 교육의 균등·종교의 자유 허용·언론 자유의 보장뿐 아니라 터키語를 라틴 알파벳으로 표기하도록 하는 문자개혁을 통해 현대 터키語를 창제했다.

이런 엄청난 개혁을 그는 큰 유혈사태 없이 해냈다. 케말 파샤는 케말主義의 담보세력으로서 군대를 의식화했다. 그의 死後에도 터키군대는 국방뿐 아니라 케말리즘이 터키사회에서 잘 지켜지는가를 감시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국가가 혼란에 처하자 두 번 정치에 개입, 정치판을 정리한 뒤 兵營으로 복귀했다. 요사이도 정치권은 항상 군대의 눈치를 보고 있다. 터키 군대는 또 국민들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받고 있다.

朴正熙가 1963년에 쓴 「국가와 혁명과 나」에는 케말 파샤의 근대화 혁명 사례를 상당히 흥분된 어투로 소개하고 있다. 朴正熙는 「혁명은 거사하기도 힘들거니와 그 성공은 더 어렵다」면서 「그것은 곡예와도 같아 단 한번 실수로도 생명을 잃는다. 따라서 혁명은 강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朴正熙는 '혁명은 당시 사회의 안정이라기보다는 내일의 사회를 위하는 것'이라며 따라서 '혁명을 맞은 당대는 희생할 수밖에 없다'고 썼다.

케말 파샤는 독립·건국·근대화를 혼자서 해낸 人物이다. 그의 이념적 지향점이, 기자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저 유럽쪽이었다는 점은 몽골-투르크系 유목 기마민족이 군사적 우위와 함께 정신적 우위도 상실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몽골-투르크系는 항상 군사적 우위로써 세계를 제패했으나 그것이 상실되었을 때 대체할 만한 문화적, 경제적, 사상적 힘을 비축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북방 유목 기마민족의 3大 마지막 제국-오스만 터키·무갈제국·淸은 모두 영국으로 대표되는 해양 세력으로부터 치명타를 맞았다.

유목민족도 유라시아 草原이라는 일종의 內海에서 말이란 배를 이용하여 유럽과 러시아를 약탈하고 정복해간 일종의 해양세력이었다. 그러나 內海가 아니라 大洋, 말이 아니라 증기기관이 힘을 쓰는 과학과 기술의 시대는 다른 모습의 주인공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몽골 宗主國」 한국의 부상(浮上)

한국에서 터키까지 아시아의 허리를 가로지른 몽골벨트의 세계에서 새로운 宗主國이 떠오르고 있으니 그것은 한국이다. 일본도 몽골族이 다수이지만 섬이란 특수성으로 해서 역사적으로, 또 심리적으로 몽골 세계로부터는 떠나버린 나라이다. 중국에 붙어 있으면서도 몽골族의 순수성을 지켜온 한국은 몽골 벨트의 국가 중 경제력에선 1위요 군사력에선 터키와 버금갈 것이다. 한국의 기업들은 의논하고 계획한 것도 아닌데 이 몽골 벨트 지역(중앙아시아+東유럽+西南아시아+베트남)으로 무섭게 진출하고 있다.

이 한국 기업인들이 한결 같이 하는 이야기는 『여기(몽골 벨트)에 오면 고향처럼 마음이 편하다』는 것이다. 같은 인종적 뿌리에서 나오는 文化的 동질성이 안도감을 주는 것이다. 서로 뭔가 통하는, 궁합이 맞아 떨어지는 관계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 한국민족과 몽골 벨트라는 새로운 공간인 것이다.

기자의 추산으로는 이 몽골 벨트에 이미 투자되었거나 투자 계획이 확정된 한국기업들의 사업은 100억 달러어치를 넘을 것이다. 이 막대한 돈이 국내를 떠났지만 더 큰 돈이 되어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한국의 미래가 걸린 질문이 될 수가 있다. 그것은 세계에 퍼진 한민족의 사령탑이 있는 서울의 엘리트들이 걱정해야 할 큰 주제이다. 투르크-몽골세계의 본부인 몽골공화국은 지금 빈곤의 극치를 달리고 있다. 몽골을 떠나 세계로 퍼진 유목 기마민족과 항구적 유대관계나 명령계통을 맺는 데 실패하였기 때문이다.

패기에 넘친 부족들은 몽골을 떠나서 엄청난 富와 나라를 만들고 쌓아갔지만 그것은 본국으로 환류되지 않았다. 해외 몽골族에 대한 본토몽골의 지도력이 상실된 것은 떠난 이들을 뒤돌아보게 만드는 어떤 가치·즐거움·보람·아름다움·신뢰가 본부엔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은 그런 가치를 만들 수 있을까?

◎ 兪炳宇 한국대사 인터뷰

유병우(兪炳宇) 駐터키대사를 앙카라의 대사관저에서 만났다. 외무부 아주국장 출신인 兪대사는 오늘날 터키가 당면한 문제들을 이렇게 정리해 주었다.

『터키어로 의사가 통하는 인구가 2억이라고 합니다. 소련 붕괴 이후 이 나라는 터키系 사람이 많이 사는 중앙아시아를 영향권 아래에 두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련 붕괴와 더불어 터키도 보스포루스 해협의 자리값을 못 받게 되었습니다. 舊소련의 목줄을 죄는 이곳의 전략적 가치가 약화되면서 나토의 지원과 미국의 원조가 줄었습니다. 이라크→터키 송유관에 의한 수입도 이라크에 대한 석유 금수조치로 끊어졌어요. 냉전체제 붕괴 이후 가장 큰 손해를 본 나라가 터키인데 그 액수가 총 200억 달러에 이른다는 통계도 있어요.』

터키와 이란의 중앙아시아 쟁패

터키와 이란의 중앙아시아에 대한 쟁패는 세속회교주의와 근본주의의 대결이란 중요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터키는 최근 보스니아의 정부군(회교)을 터키에 데려와 훈련시켜주는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미국이 약 3억 달러에 예산을 대고 있는 이 훈련계획은 보스니아內 세르비아系 군사력에 대응할 만한 군사력을 보스니아 정부측에 건설해 주어 균형을 이루려는 계산에서 출발하였다. 터키는 오스만 제국 시절에 이미 舊유고슬라비아가 있는 발칸지역을 통치한 경험이 있다.

터키의 입장에선 보스니아에 대한 이란 근본주의자들의 개입을 차단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터키는 또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같은 중앙아시아에서 약 2000 명의 장교들을 받아 훈련시키고 있다.

『600년 계속된 오스만 터키 제국이 사라진 지 70년이 지났지만 그 뒤처리가 안 끝났다는 느낌이 듭니다. 주변 국가간의 관계와 터키 국민으로서의 정체성 문제가 대두되고 있습니다. 아타 투르크(케말 파샤)는 유럽지향의 근대화를 통해 세속적 회교주의의 기치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터키 사람들은 「우리는 유럽인인가 이슬람인가」 하는 고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98%가 이슬람교도이지만 여름에 배꼽을 내놓는 셔츠가 유행이고 미국 도색잡지 펜트하우스 현지어판이 팔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터키는 유럽의 파트너는 될 수 있어도 그 일원으로 들어가기는 어렵다는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근본주의의 도전

이런 터키의 딜레마를 틈타서 이슬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복지당이 최근 총선에서 제1당이 됨으로써 정치위기가 시작되었다. 제2, 제3당의 제휴로 제1당인 복지당의 집권은 저지되었으나 이번엔 제2, 제3당끼리의 원초적 싸움이 악화돼 6월6일엔 총리가 사퇴했다. 6월 말 복지당이 제2당(正道黨)과 손잡고 집권, 터키 역사상 처음으로 이슬람 근본주의 정권이 들어섰다. 복지당이 집권하면 군사 쿠데타는 불가피하다는 말들이 나왔으나 聯政 파트너인 정도당이 견제를 잘 하고 있는지 아직은 무사하다.

정치와 회교를 분리한 아타투르크 이념(케말리즘)을 계승하고 있는 군부가 이란의 영향을 받는 회교 근본주의자들의 집권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란 이야기는 끊이지 않아 이것이 오히려 복지당을 온건화 시킬지도 모른다.

兪炳宇 대사는 『여기 언론은 군대·기업과 함께 기득권 세력을 이루고 있고 농민 빈곤층에서 근본주의 세력이 확대되고 있다』면서 『그들이 영향력을 넓혀 나갈 때 사회적 갈등과 정치불안이 커질까 우려된다』고 했다.

이슬람 文化圈에서 서구화를 추진하면 반드시 회교 근본주의의 반격이 개시된다.  호메이니의 도전으로 이란의 팔레비 정권은 붕괴했고 알제리는 피를 피로 씻는 內戰에 휩싸였다. 그러나 터키에선 군대가 확고부동하게 아타 투르크의 서구화 정책-케말리즘으로 무장하여 그것의 실천을 감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도시에선 메카를 향해 기도하는 모습을 좀처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국민들의 생활도 세속화되었다. 따라서 서구화에서 회교화로 돌아서는 일은 없을 것이지만 터키로서는 배후에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란, 시리아, 이라크에 신경이 쓰인다.

한국과 터키

한국과 터키 사이 무역액은 수출입 합쳐서 1995년에 약 7억 달러를 기록했다. 한국이 터키의 열두 번째 교역 대상국이다. 두 나라는 아시아 대륙 양극에 위치하여 수송거리가 멀고 物流비용이 많이 먹히는 악조건下에 있다. 兪炳宇 대사는 『금년 가을에 서울-이스탄불 사이에 정기항로가 열리게 되면 양국의 경제 교류는 민족적·문화적·정치적 유대관계 위에서 급속도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트로이의 木馬로 유명한 트로이의 유적이 발굴된 곳이 터키이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에베소 등 聖바울의 전도 여행 유적도 터키에 가장 많다. 이탈리아에 있는 기독교신도들의 地下교회 카타콤을 보고 나서 터키 카파도키아에 있는 지하도시를 구경한 사람들은 後者의 장대한 규모에 놀란다.

이탈리아나 스페인에 못지  않는 이 나라의 관광명소가 아직도 한국인들에게 생소한 것은 서울에서는 유럽의 공항을 거쳐야 이스탄불에 들어갈 수 있는 불편 때문이다. 兪대사는 『적어도 정기 여객기가 週 2편 정도로 날아야 할 만큼 관광객이 몰려들 것이다』고 장담했다. 터키 사람들 사이에는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터키를 3일간 보고서 아는 척하는 사람에게는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인사하고 3년 동안 보고도 아쉬워하는 사람에겐 『또 오십시오』라고 인사한다는 것이다.

兪대사는 『아타 투르크 이후에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꼽히는 오자르 수상 시절에 「룩 이스트」(Look East)란 말을 써 가면서 한국의 발전 모델을 배우자는 분위기를 고취한 적도 있었다』고 했다. 터키에서 보는 한국은 한국에서 보는 터키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기자는 체감할 수 있었다.

터키 사람들이 6·25 참전을 못 잊어 하는 것에 대해서 兪대사는 『1차 대전 때 독일-오스트리아 편에 섰다가 패배한 뒤 처음으로 마음껏 싸운 전쟁이었고 이것이 원래 尙武정신이 강한 터키 사람들의 기분을 풀어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고 했다. 터키에서 국제경쟁력이 있는 산업은 건설업이다. 해외에서 한국과 경쟁할 정도이다. 섬유도 국제수준이다. 그 이외에는 이렇다 할 산업이 없다. 문맹률이 30%나 되고, 철도가 발달하지 않은 것이 고도산업의 발달을 저해하고 있는 요인이다.

6·25 참전 터키軍 이야기

한국 참전 토이기 기념탑은 터키 수도 앙카라市內 한국공원 안에 있었다. 4층 석탑 모양이다. 한글로 쓰여진 건립 취지문―.

<이 탑은 토이기군이 자유를 수호하기 위하여 한국전에 참전, 혁혁한 전공을 세운 바를 영원히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되다. 앙카라市의 적극적인 협력을 얻어 세워지게 된 이 탑은 토이기 공화국 건립 제50주년 기념일을 기하여 한국정부가 토이기 국민에게 헌납하다. 1973.10.29>

1950년 10월18일에 부산에 상륙한 터키군은 1개 여단(4500명)규모였다. 3년 전쟁기간의 戰死者는 731명, 부상자는 3000여 명, 실종자 200여 명, 미송환 포로 195명. 전쟁기간 동안 파견된 연인원이 1만2000여 명인데 약 3분의 1이 死傷했다는 얘기다. 터키군이 이처럼 사상률이 높은 것은 한 지휘관이 『후퇴하라』는 UN군 측의 명령을 거부하고 끝까지 싸우다가 중공군에 포위 당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북한 포로수용소에서의 생환율은 터키군대가 가장 높았다고 한다. 북한측은 포로들 사이를 이간시키려고 사병포로에게 지휘책임을 맡겨 장교를 부리도록 했는데, 터키군에는 그런 하극상의 유도가 통하지 않고 끝까지 상하의 지휘계통을 유지한 덕분에 생존율이 높았다는 것이다. 駐터키 대사관 金상원 무관은 터키군대의 軍紀와 전투능력을 높게 평가했다.

『무기체제만 뒷받침된다면 세계 최강의 군대일 것입니다. 군인들의 사생관(死生觀)이 뚜렷하여 죽음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는데다가 회교 특유의 성전(聖戰)의식으로 무장돼 있습니다. 기마민족의 전통이겠지만 작전개념도 기동과 공격을 중시하며, 집중과 분산을 조화시키는 전쟁교리를 갖고 있습니다. 밥그릇 수가 아닌 계급 위주의 지휘를 하며 지휘관의 의도를 파악하여 적극적으로 상관을 따르려는 자세입니다. 부상자에 대한 철저한 구조, 대령의 월급이 대학교수 월급과 같을 정도의 우대 등 이들의 상무정신은 제도적으로 뒷받침되고 있습니다.』

兪炳宇 대사는 『터키는 안보상의 위기가 없는 나라』라는 표현도 했다. 「나라를 위해 싸우자」는 명분만 내걸면 순식간에 단결이 되는, 상무정신과 애국심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말을 타고 뒤로 활을 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럴 수 있는 민족은 세계에서 몽골-투르크族뿐이라고 하더군요. 강력한 상비군과 상무정신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국민들이 좀 못살아도 넉넉하게 처신해요.』

귀국하여 국방부 측의 이야기를 들었더니 터키군부에서는 한국군과 긴밀한 협력체제를 구축하기를 원하고 있다고 한다. 곧 양국군 사이에 정기적인 정책협의가 이뤄질 것이라고 한다. 訪韓한 터키군 고위장성들도 『우리 양국 국민은 원래 같은 뿌리다』라고 하면서 친근감을 보이려고 애 쓴다고 한다. 터키에서도 우리 조상인 예맥族과 투르크族의 관련성을 연구하는 학자가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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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移動(이동)에는 풍부함이 있다'

터키 사람들이 즐겨 인용하는 말이 있다.
 'harekette bereket var.' 
 
 '하레케테 베레케트 발'은 '移動(이동)에는 풍부함이 있다'는 뜻이다. 유목민족인 투르크 족이 세운 오스만 터키의 후손들답게 '이동'의 생산성을 요약한 말이다. '이동'의 또다른 의미는 '자유'이다. 인간의 자유는 이동을 통하여 표현된다. 공간적 이동뿐 아니라 계층 이동, 의식 구조의 변화, 직업 선택의 자유 등 정신적 이동도 포함된다. 개혁의 본질도 좀 더 나은 수준으로 옮겨가려는 노력이므로 이동의 일종이다.
 
 대한민국이 조선조나 북한보다 잘 사는 이유는 더 자유롭고 더 많이 이동한 덕분이다. 미국, 영국, 네덜란드, 스페인, 포르투갈이 세계를 이끈 힘도 이동에서 나왔다. 물론 '이동'의 또 다른 의미는 무역, 식민지 개척, 정복이다.

 올해 89세인 전 유엔대사 朴槿(박근) 선생이 '자유 민주 보수의 길'(기파랑, 1만3500원)이란 책을 냈다.  지난 달 애국활동가 모임에서 朴 대사는 '나라가 걱정이 되어서 이 나이에도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진주사범, 서울대 철학과 출신인 老외교관은 자신의 책을 설명하면서 '요사이 중국에 대한 과대평가가 한국 지식인 사회에서 유행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 되었다' 고 했다. 그는 과학 기술력의 한계와 자유의 제약이 중국의 결정적인 약점이라면서 절대로 세계 지도국이 될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朴 대사의 책 뒷 면엔 이런 문장이 있다.
 
 <구름같이 희미해지면서 사라져가는 각종 집단 위에 밤하늘의 별과 같이 반짝이는 것이 있다. 바로 인류 역사의 주인공인 자유로운 개인이다.>

 朴 대사는 名言을 남겼다. 
 '세계 역사를 훑어보면 당대의 패권국가는 가장 자유로운 나라였습니다. 아테네, 영국, 미국을 보세요.'

 아테네, 로마, 唐, 사라센, 몽골, 스페인, 네덜란드, 무굴(인도), 프랑스, 영국, 미국의 역대 최강국은 각각 當代의 가장 자유로운 나라였다. 한반도에서도 두 번의 전성기를 연 통일신라와 대한민국은 當代의 가장 자유로운 나라였다. 몽골도 전쟁은 잔혹하게 하지만 통치는 너그럽게 하였다. 부패한 나라와 깨끗한 나라가 싸우면 前者가 이기고, 자유로운 나라와 부자유한 나라가 싸우면 자유로운 나라가 이기는 경우가 많다. 미국이 소련에, 영국이 독일에, 신라가 고구려에 이겼다.  

 국가에서 자유는 몇 가지 행태로 표현된다. 자유의 속성인 개방, 경쟁, 관용, 기동성이다. 개방하고 경쟁하면 외국과 교류하면서 돈을 벌게 된다. 돈이 있어야 强軍(강군)을 유지할 수 있고, 강군이 있어야 자유와 독립을 지킨다. 富國强兵하는 나라는 과학기술과 행정력이 발달하고 국민들도 실질 강건해진다.

세계사는 말을 잘 타는 민족(몽골, 투르크 등)과 배를 잘 모는 민족(바이킹, 네덜란드, 영국 등)이 정복전쟁이나 무역을 통하여 패권을 이어갔다. 속도를 장악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 그 속도는 말, 배, 소총, 전투기, 미사일, 인터넷으로 표현 방법이 변해갔지만 본질은 같다. 속도는 시간과 공간을 장악하게 하는 媒質(매질)이다. 속도는 자유가 없으면 달성할 수가 없다. 
 역사의 주인공이 된 '자유로운 개인'은 다 존엄한 존재이다. 北에는 존엄한 존재가 한 사람이지만 남한엔 5000만 명이 있다. 50,000,000 vs 1의 대결구도이다.


[ 2016-05-14, 22:0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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