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갈 帝國의 현장을 가다!
몽골 草原 역사 紀行((9)파키스탄에서 가장 열심히 일하는 이는 어린이, 여자, 당나귀.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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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갈(=몽골)제국의 현장 파키스탄·인도

바부르의 南進路를 따라

1996년 7월18일 기자는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를 두 번째로 찾아가 카리모프 대통령과의 인터뷰를 마친 뒤, 20일에 인도 뉴델리 공항을 거쳐 파키스탄 라호르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 창가에 앉아 내려다 본 지형(地形)은 雪山, 돌산, 사막, 인더스江, 평야, 취락, 대도시로 이어졌다.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인도로 내려간 비행기의 남하(南下)경로는 500년 전 바부르라는 20대 젊은이가 걸었던 길이기도 했다.

자하루딘 무하마드 바부르는 1483년 2월24일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페르가나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페르가나에서 小王國을 지배하고 있었다. 바부르는 父系로는 티무르 大帝의 5代孫, 어머니쪽 혈통으로는 징기스칸에 연결된다고 한다. 그는 몽골-투르크系의 합성이었다. 바부르의 소년기 교육은 그의 위대한 인격(人格)을 키워낸 토양을 만들었다. 그는 투르크語와 페르시아語를 배웠고 戰時에도 시를 지었으며 중요한 사료(史料)인 회고록을 남겼다.

11세에 왕이 된 그는 20代에 지금의 우즈벡을 통일하여 티무르 제국을 회복하려다가 우즈벡(몽골系)族에게 쫓겨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으로 피해갔다. 패전에도 불구하고 1만2000의 몽골-투르크 騎兵이 그를 따랐다. 카불에 본거지를 둔 그는 북쪽으로 재진격하여 실지(失地)를 회복하려 했으나 패전을 거듭했다. 그가 고향 페르가나를 못잊어 한 것은 그 지방이 중앙아시아 전체에서 가장 비옥하여 과일과 곡식이 풍성하게 산출되었던 것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1512년 우즈벡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 바부르는 北進을 단념하고 파키스탄, 인도쪽으로 南進하기 시작했다. 이 南征의 막장은 1526년 4월12일 뉴델리 근교 파니파트에서 벌어진, 로디 王朝의 아이브라힘王이 지휘하는 10만 군대와의 결전이었다.

이때 바부르의 병력은 2만도 안되었으나 전형적인 유목 기마전술에다가 총포부대를 결합시켜 10만 병력을 섬멸했다. 그는 몽골기병을 좌익과 우익의 맨 끝에 배치하여 전진하는 敵의 主力을 배후로 돌아서 포위, 등 뒤에서 공격하게 하는 한편, 중앙에 배치한 총포부대는 일제사격으로 정면을 공격케 했다. 포위 섬멸된 적은 4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 전투는 인도의 역사를 바꾸었다. 몽골系 무갈제국을 탄생시킨 전투였다.

바부르는 인도 북부를 점령했으나 더운 날씨에 질려버렸다고 한다. 부하들도 시원한 아프가니스탄의 산악지대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그러나 이 땅을 차지하기 위해 바친 수많은 희생들을 생각하니 그럴 수가 없었다. 그 대신 바부르와 그 후손들은 가는 곳마다 페르시아式 정원을 만들어 그들이 두고 온 녹색지대를 상상하면서 스스로를 달랬다.

파키스탄-인도는 10세기부터 19세기까지 약 1000년간 이슬람化된 몽골-투르크族의 지배를 받았다. 한국인들은 무갈제국의 5代王이 먼저 죽은 아내를 추모하려고 지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타지마할은 잘 알지만, 그것을 세운 王朝가 한국인과 비슷한 종족인 몽골-투르크族이었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기자의 파키스탄-인도 취재는 따라서 무갈제국에의 탐험이었다.

다니 박사의 역사 이야기

7월21일 기자는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아하마드 하산 다니 박사(76)를 인터뷰했다. 중앙아시아-西南아시아-실크로드 분야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학자로 알려져 있다. 역사·고고학자로서 수많은 著書를 남긴 다니 박사는 파키스탄 국민들에게 친숙한 인물이다. 그는 아주 곱게 늙은 「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大學者답게 재미있고 간략하게 파키스탄-인도와 유목민족의 관계사를 설명해 갔다. 다니 박사는 서기 5세기에 북쪽에서 쳐들어온 훈族이 200년 동안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을 지배한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말했다.

『그들(훈族)은 쿠샨王朝를 무너뜨리고 후나(HUNA)제국을 건설하여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인도 북부를 통치했습니다. 터키학자들은 이 훈族을 투르크족이라고 분류합니다. 서양학자들은 이들을 파괴자로 말합니다만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그들은 봉건영주제도를 우리나라에 소개했습니다. 제가 우리나라라고 하는 것은 아프가니스탄을 포함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두 나라가 분리된 것은 18세기였으니까요.

훈族은 수많은 부족의 연맹체였습니다. 우리나라를 점령한 뒤엔 각 부족에게 땅을 나눠주어 독자적인 통치를 하도록 했는데 이것이 봉건영주 제도로 정착하였습니다. 1996년 현재까지도 파키스탄엔 봉건제도가 남아 있습니다. 大地主들이 각 지방에서 사실상 행정을 장악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국회의원들도 地主출신이고 군대도 지주들의 아들들이 장교가 되어 장악하고 있습니다. 이게 모두 5세기에 훈族이 정착시킨 제도입니다.』

다니 박사의 설명은 계속된다.

『8세기에는 투르크族이 중아시아쪽에서 쳐들어와 200년간 우리나라를 지배했는데 이들은 이슬람교도가 아니었습니다. 10세기에 비로소 이슬람 교도가 된 투르크族이 우즈베키스탄에서 쳐내려와 우리나라와 인도 사람들 중 일부를 이슬람화시켰습니다. 이때는 非이슬람 先住 투르크族과 이슬람 투르크族이 싸웠습니다.』

다니 박사는 아랍인들은 海路를 통해서, 투르크族은 중앙아시아에서 남하하여 파키스탄-인도 대륙에 이슬람敎를 전해주었다고 했다. 

『아랍인들은 아랍語와 상업, 중앙아시아인들은 이슬람 성직자(수피)제도와 페르시아語를 갖고 왔습니다. 파키스탄과 북부 인도는 10세기 이후 중앙아시아의 이슬람문화를 닮게 되었습니다. 10세기에서 18세기까지 우리나라의 공용어는 페르시아語였으니까요. 몽골-투르크族이 건설한 무갈제국조차도 공식어로는 페르시아語를 사용했습니다.』

파키스탄人의 피의 62%는 투르크系

같은 문화권이던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된 것도 파키스탄이 투르크族에 의해 이슬람화 된 데 대해 인도에서는 힌두교가 다수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다니 박사는 파키스탄人 피 속의 62%는 투르크人의 피로 본다고 말했다. 몽골의 세계 정복에 대해서 다니 박사는 재미있는 설명을 했다.

『그들의 힘은 호스파워(Horsepower=馬力)에서 나왔지요. 말을 전쟁에 처음 쓴 사람들은 아리안系로서 4000년 前부터였습니다. 서기 前 2세기경에는 아리안系의 스키타이 유목민이 발걸이(등자)를 발명했습니다. 그러나 안장과 발걸이 등 마구(馬具)를 정교하게 발전시킨 것은 몽골族이었습니다. 이 馬具를 바탕으로 독특한 군사기술을 발전시켰습니다. 몽골人들은 말을 번식시키는 데 비상한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말의 숫자가 많아야 전투력의 원천인 馬力이 증가할 것 아닙니까. 종마(種馬)를 아주 귀하게 여겨 족보까지 만들어 관리했습니다. 이 種馬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唐나라에까지 들어가서 힘세고 지구력이 강한 몽골 말이 확산되었습니다.』

다니 박사는 징기스칸 이후 몽골族이 파키스탄과 인도로 많이 들어와 지금도 파키스탄의 라호르 근방, 캐시미르, 페샤와르 지방에 살고 있다고 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무갈」(몽골의 이란 어 표현)이라고 부른다. 징기스칸의 몽골군대는 서기 1229년과 1241년 두 차례 중앙아시아→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인도 북부 푼잡지방까지 침공하여 1270년까지 주둔하였다. 인도대륙이 1000년간 이슬람化된 투르크族의 지배下에 있었다는 것은, 몽골-투르크族의 지배지는 넓이에서  아니라 피지배국의 인구수에 있어서도 항상 중국(인도와 인구가 비슷)을 능가하는 세계 최대규모였음을 뜻한다.

신기루

7월22일 지프차를 타고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를 출발하여 大宇건설이 닦고 있는 이슬라마바드-라호르 구간 6차선 고속도로(334㎞)를 따라 남쪽으로 달리는 길은 20세기말에서 中世 봉건사회로의 회귀였다. 깨끗한 행정수도 이슬라마바드만 보면 파키스탄은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고 평화로운 田園국가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슬라마바드에 모여 있는 이 나라의 파워 엘리트들도 그런 자기 최면에 빠지지 않을까. 인간은 자신이 체험하는 범위 안에서 사고(思考)하는 버릇이 있다. 이 습관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로 기득권을 버리는 자기 혁신이다. 이 자기 혁신이 어느 나라의 지배층보다 더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는 파키스탄의 정치·행정 엘리트들이 빈곤과 바닥에 있는 파키스탄의 현실과는 絶緣한 채 신기루 같은 이슬라마바드에서 과연 민중을 위한 정책을 구상하고 추진할 수 있을까?

大宇가 1992년 4월1일에 착공, 1997년 12월31일까지 완공하기로 돼 있었던 고속도로 공사는 9억8700만 달러짜리. 이 공사대금의 33.7%만 파키스탄 정부가 대고 66.3%는 大宇가 댄 뒤 상환을 받게 돼 있었다. 외환이 부족한 파키스탄은 이런 BOT(Build·Operation·Turnover) 방식의 공사를 선호하고 있었다. 2512대의 각종 차량과 중장비가 常時 동원되고 있는 이 공사현장에서는 약 6000명이 매일 일하고 있다. 95.6%가 파키스탄 노동자, 2.9%인 169명이 한국인, 필리핀人이 1.4%, 영국사람도 4명이 일하고 있었다.

현장관리를 책임지고 있는 김광수(金光洙)상무는 『하청공사分까지 포함하면 파키스탄 사람 10만 명(가족 포함)이 이 공사 덕분에 먹고산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파키스탄 건설 노동자들은 현장 부근에 천막을 쳐놓고 합숙하면서 일을 하고 있었다. 월급을 받으면 한 달에 한 번쯤 집에 갔다가 오고 일요일도 없이 거의 쉬지 않고 일한다. 金상무는 『이들의 노동효율은 한국 노동자의 80%쯤 된다』고 했다. 임금은 한국건설노동자의 약 20분의 1이다. 대체로 성실한 편이라고 한다. 노동자들을 뽑을 때 간부후보로 軍에서 제대한 하사관들을 찾아내 많이 채용했다고도 한다.

기자의 짧은 파키스탄 취재 인상은, 순박한 파키스탄 민중을 이 나라의 대다수 엘리트들이 계도의 대상이 아니라 착취와 경멸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었다. 파키스탄에서 일하는 한국 기업인들은 자신들이 상대하는 정치인·관료들이 너무 애국심이 없다고 불평하고 있었다.

『한국으로 기술자들을 연수 보내 주겠으니 계획을 짜달라고 해도 별 무반응입니다. 이 나라에는 아무래도 朴正熙 같은 지도자가 나와야 발전할 겁니다.』

이슬라마바드-라호르 고속도로는 장차 중앙아시아와 카라치(파키스탄의 인도양쪽 항구)를 연결시켜 주는 더 긴 고속도로를 위한 첫 단계 사업이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물론 아프가니스탄에 평화가 와야 가능한 사업이다. 5시간에 걸쳐 이 공사현장을 달렸는데 이 도로는 푼잡 평야를 관통했다. 푼잡이란 인더스江의 지류인 다섯 강이 흐르는 지방이라는 뜻이다. 파키스탄과 인도에 걸쳐 있는 이 평야는 세계에서 가장 비옥한 농경지로 꼽힌다. 인도와 파키스탄 인구 약 15억이 이 평야에 기대어 생존하고 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닐 정도이다.

소년·여자·당나귀

이 평야지대를 달려보니 定形化된 풍경화가 반복되었다. 넓디넓은 논·밭 사이엔 큰 나무들이 듬성듬성 서 있었다. 그 나무 그늘에서 윗통 벗고 한가롭게 쉬는 이는 남자들이고, 그들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땡볕 농토에서 열심히 육체노동을 하고 있는 사람은 여자들이었다. 작은 당나귀가 집채만한 짐을 진 채 요령부리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뒤에서 나무 작대기를 휘둘며 쫄쫄 따라오는 이는 소년들이었다. 끙끙대는 당나귀의 표정은 한국의 가난한 할머니들 인상처럼 슬프기도 고맙기도 했다.

이곳 당나귀는 자기 집을 찾아가는 데 능력이 발달돼 있다. 짐을 싣고 혼자서 하염없이 길을 걷는 당나귀들도 많이 보였다. 金光洙 상무는 『파키스탄에서 제일 고생 많이 하는 이들이 당나귀, 어린이, 여자이다』고 했다. 시골의 초등학교들을 몇 군데 지나쳤다. 학교 사무실만 있고 교실은 없었다. 교실은 큰 나무 밑 그늘이었다. 문맹률 약 70%의 현장이었다. 학교 취학률이 낮으니 어린이들이 노동현장에 많이 고용된다. 파키스탄의 어린이 노동 문제는 지금 국제적인 관심사가 되고 있다. 기자가 이곳에 있을 때도 EU(유럽공동체)에서 조사관을 보냈다는 뉴스가 신문에 났다.

노예와 봉건영주

어린이들은 손길이 섬세한 덕분에 카핏 제조공장에 특히 많이 고용된다고 한다. 파키스탄 언론에서도 이런 어린이를 「노예」라고 표현하고 있을 정도였다. 파키스탄의 英子신문들은 지방 토호(〓地主)를 「봉건영주」란 의미의 「Feudal lord」라고 표기하고 있다. 21세기의 문턱에 있는 나라, 원자폭탄을 만든 나라, 그리고 金泳三 대통령이 「동지적 민주투사」로 칭송했던 부토 여사가 총리로 있었던 나라, 5·16직후엔 한국이 본받고 싶어한 나라, 최고(最高)의 인류문명과 최대(最大)의 곡창지대를 가진 나라에서 아직도 中世的 용어가 예사로 쓰여지고 있다.

지난 50년간의 파키스탄 역사에서 파키스탄 민중에 대한 동정심을 깔고 진정으로 개혁을 하려고 했던 거의 유일한 지도자로서는 아유브 칸을 꼽는 파키스탄인들이 많았다. 그는 1958∼69년 사이 집권했다. 평민출신 장군 아유브 칸은 파키스탄의 정치가 대혼란에 빠지자 등을 떠밀리다시피 하며 집권했던 사람이다. 그는 1965년 캐시미르를 둘러싼 인도와의 전쟁에서 사실상 패배한 뒤 알리 부토를 비롯한 직업 정치인의 도전을 받았다. 反정부 시위로 행정기능이 마비되자 1969년에 정권을 후배 장군 야하 칸에게 이양하고 下野했다. 그는 하야 직전의 술회에서 이런 고백을 했다.

『파키스탄은 구조적으로 어려운 나라이다. 아마도 나는 우리나라를 너무 세게 근대화 쪽으로 밀어붙인 것 같다. 나는 정권을 이양하려고 민간정치인들과 접촉했으나 가장 큰 실망은 단 한 사람도 이기심을 뛰어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우리 정치권이 선량한 지도자를 장기간 활동하도록 내버려둘지에 대해선 의문을 가진다. 그래도 우리가 군대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하느님께 감사해야 한다. 내가 이 나라를 10년간 통치해온 것은 한 바구니에 여러 마리의 개구리들을 넣고 들고 가는 기분과 같았다. 두 개의 파키스탄에는 희망이 없다. 東파키스탄(지금의 방글라데시)은 그들의 길을 가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守舊세력과 군대

아유브 칸의 절망은 개선되지 않았다. 이 나라의 지배 엘리트가 수구(守舊)세력이 되어 변화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地主계급은 그 엄청난 농업소득에 대해 세금을 면제받아왔다. 농지세를 내도록 하려는 압력이 일어나 4개 주 가운데 두 군데에서 법안이 통과되었으나 최대 곡창 지대인 푼잡州 정부는 거부하고 있어 사실상 實效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地主계급이 정치뿐 아니라 아들들을 장교로 보내 군대까지 장악하고 있으니 5·16쿠데타와 같은 개혁 지향적 군사 개입도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파키스탄은 1996년까지 세 번의 군정(軍政)을 겪었으나 한국처럼 경제개발을 이루지도 못했다(그 뒤에도 한 번 더 있었다. 무샤라프 정권).

이곳 정치인들은 민중에 대한 애정이 결여된 상태에서 단순히 정치인을 위한 정치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하는 느낌마저 주었다. 1996년 7월20일자의 영자신문 돈紙(DAWN)에 실린 기사들은 파키스탄의 상황을 단면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의사들, 그들의 소득에 물품세를 과세하기로 한 데 반발하여 스트라이크 결의.
·야당, 내일 총파업 호소
·EC관리, 어린이 노동 문제 논의하기 위해 방문.
·봉건영주들(Feudal lords), 다두 지방의 수사에 압력.

이슬라마바드에서 만났던 다니 박사는 『인도는 독립 직후 네루가 농지개혁으로 지주계급의 권력을 축소시켰는데 우리는 그것을 하지 못했다』고 한탄했었다. 문맹률을 70%대로 유지하는 것도 지주계급이 민중들을 다스리기 편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을 하는 이들이 많다. 파키스탄의 초등학교 중 2만470개가 건물이 없는 야외수업 학교이다. 문맹률은 특히 여성에서 심한데 약 80%나 된다. 파키스탄은 인구가 약 1억3000만 명(1996년 현재)으로서 세계 8위인데 인구증가율은 약 3%로서 세계 최고수준이다. 23년 내에 인구는 배로 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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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부르 이야기

 '당신을 배신하는 자는 운명에 맡겨주어라. 운명은 당신의 복수심 가득한 忠僕(충복)이거늘.'
  (Entrust to fate him who does you ill, for fate is a vengeful servant of yours.)
  바부르는 자신이 카불을 비운 사이에 반란을 일으킨 자를 체포했으나 그가 친족이라서 풀어주었다. 이 반역자는 고마움을 모르고 바부르에 대한 악담을 하고 다니다가 다른 영주에 의해 처형되었다. 바부르가 회고록에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1483년 바부르는 지금의 우즈베키스탄에서 티무르의 후손으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나 권력투쟁에 밀려났다. 그는 충성스러운 1만2000명의 기병을 데리고 南征 길에 오른다. 그는 지금의 타지크스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을 차례로 평정하면서 드디어 인도의 북부지방에까지 진출하여 1526년엔 무갈제국을 연다. 약332년간 계속된 무갈제국은 19세기에 영국에 멸망할 때까지 지금의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지를 통치했다. 무갈은 몽골이란 뜻의 이란어이다. 무갈제국을 세운 바부르는 자신들이 징기스칸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무갈제국은 당시로서는 최고의 문명과 국력과 생산력을 자랑했다. 타지마할이 무갈제국 시대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문화재이다.
  
  이 무갈제국을 세운 바부르는 알렉산더나 나폴레옹과 견줄 만한 교양 있는 영웅이었다. 47세에 죽은 그가 남긴 회고록은 솔직하고 정확하며 문학적이고 드라마틱하다. 이슬람 문명권에서 최초로 나온 회고록이라고 한다.
  이 회고록은 그의 생애를 건 大長征의 기록인데 군데 군데 감동적인 장면과 詩가 발견된다. 겨울의 아프가니스탄에서 부하들과 눈보라 속을 헤쳐나가다가 동굴을 발견했을 때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동굴은 너무 작았다. 나는 동굴 입구에서 삽으로 눈을 파고 앉았다. 몇 사람이 나만 동굴에 들어가라고 했으나 나는 거절했다. 내 부하들이 눈보라를 맞고 있는데 나만 동굴에 들어가서 잔다는 것은 남자답지도 못하고 동지적이지도 못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고통이 크더라도 나는 부하들과 함께 그 고통을 견딜 것이다. 페르샤의 속담이 생각났다. '친구와 함께 하는 죽음은 축제이다.' 눈보라는 계속되었고 나의 등과 귀는 눈에 덮였다. 귀는 동상에 걸렸다. 밤 기도 시간에 동굴 속으로 들어가 조사를 하고 나온 부하가 소리쳤다. '동굴이 아주 큽니다. 모두 다 들어갈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 소리를 듣고나서야 나는 눈을 털고 부하 戰士들을 불러 모아 굴속으로 들어갔다. 40-50명이 편하게 앉을 만한 넓이였다. 모든 사람들이 식량과 휴대품을 갖고 들어왔다. 심한 추위와 눈보라 속에서 이렇게 따뜻하고 안전한 공간을 발견하다니!>



[ 2016-05-23, 10:37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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