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가 제2의 무갈帝國이 되는 날
몽골 草原 역사 기행(11)세계의 가장 거대한 민주주의 국가가 경제대국이 되는 날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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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化와 평화가 정통성의 근거

 무갈제국은 이슬람을 믿는 몽골-투르크族의 군사집단이 토착국가를 점령하고 인도에 건설한 나라였다. 그런데도 힌두교도가 다수인 인도에서도 무갈帝國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영국식민지 시대를 부끄럽게 생각하는 인도 사람들은 많지만 이슬람화된 몽골(무갈)의 식민지였던 시대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는 인도인은 만날 수가 없었다. 이교도의, 이민족의 지배를 왜 그리워하고 자랑하는가.

 7월24일 오후 인도 뉴델리 시내 네루대학의 무갈제국 전공 역사학자 하즈반스 무키아 교수를 만나 물어보았다. 자택에서 기자를 맞은 무키아 교수는 『무갈제국의 창건자 바부르는 「원래 우리 할아버지 티무르大帝가 인도를 점령했었는데 그 뒤를 이어받아 내가 다스리는 것은 당연하다」는 식으로 제국의 정통성을 확립하려고 했었다』고 운을 뗐다.

『그러나 3代 아크바르 황제는 정복이 아닌 문화적인 기반에 제국의 정통성을 뿌리박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정의, 화목, 평화가 정통성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원래 무갈제국의 지배층은 57%의 몽골-투르크族과 나머지는 이란人으로 구성돼 있었습니다. 아크바르는 지배층을 확대 개편하면서 어떤 종족도 4분의 1이 넘지 않도록 했습니다. 이슬람을 힌두교도에게 강요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힌두교의 문화와 관습을 궁정에서 많이 받아들였습니다. 인도를 통치했던 前 왕조와 다른 점이 바로 이런 현지화(現地化)였습니다. 이런 정치적 통합과 폭넓은 참여 위에서 문화가 꽃피게 되었습니다.

 무갈제국을 세운 바부르는 詩人이자 작곡가, 또 작가이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자서전은 名文입니다. 그를 이은 무갈제국의 황제들도 문학-학술-그림-건축에 대단한 열정과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분들이 경쟁적으로 건축한 놀라운 모스크, 정원, 기념물들이 지금도 우리의 자랑거리입니다. 이런 文化的 건설이 또한 무갈제국의 정통성을 강화시켰습니다. 영국통치 시절인 19세기에 인도에서 反英봉기가 일어났을 때도 정신적인 지주는 무갈王祖였습니다. 그때는 허수아비가 돼 있었지만…』

 그러나 그런 文化的 번영은 어디까지나 강력한 군사력에 의해서만 보장된다는 점에서 무갈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바부르는 몽골-투르크의 전통을 이어 받은 騎馬軍團에다가 오스만 터키에서 도입한 총포부대를 별도로 편성했습니다. 군대조직도 10진법으로 잘 돼 있었고 전술도 독창적이었습니다. 바부르의 1만2000 기마군단은 10만이나 되는 적을 예사로 무찔렀습니다. 좌익과 우익, 그리고 중앙 이외에 항상 예비대를 편성해놓았습니다. 敵과의 정면 충돌은 피하고 기습·매복·유인전술로 적을 피로에 지치게 한 뒤 생생한 예비대를 최후에 투입하여 전투를 끝장내는 식이었죠.』

무갈제국 인구 2억 추정

 무키아 교수는 『초대 황제 바부르는 몽골族의 용모였지만 3代 아크바르는 어머니가 이란 여자였으므로 서양인의 용모를 다소 닮았다』고도 했다. 바부르는 고향인 우즈베키스탄을 늘 그리워했는데 특히 우즈벡의 맛있는 과일을 먹고싶어 했다고 한다. 전투를 한창 하고 있을 때 부하가 사마르칸트에서 수박을 갖고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전투를 잠시 중단시킨 뒤 수박을 먹어치웠다고 한다.

 무키아 교수는, 전성기인 16∼17세기에 무갈제국의 國力은 오스만 터키나 어느 유럽나라들보다도 충실하여 사실상 세계 최대의 제국이었다고 주장했다. 당시 무갈제국의 인구는 1억∼2억명 선으로 추산된다. 경제력이 충실해진 것은 무갈제국이 상인들을 지식인보다는 위에, 무사 다음의 제2계급에 놓을 정도로 우대하여 무역이 번창했고 인도 북부의 농촌이 높은 생산성을 발휘한 덕분이란 것이다.

『단위면적당 수확량은 유럽의 거의 열 배나 되었습니다. 6월에 땡볕이 내리쬘 때 유기물을 태운 뒤 비가 오니까 부패가 일어나 땅이 기름질 수밖에 없지요. 17세기에 유럽 나라들이 앞다투어 인도로 몰려 온 것은 무갈제국의 경제적 번영을 노린 것이었습니다.』

 무키아 교수는 『무갈제국은 인도의 미래에  대하여 낙관하게 하게 하는 역사적 근거가 되고 있다』고 했다.

『인도는 자연的, 人的 자원이 풍부하므로 무갈제국과 같은 좋은 조직경영자를 만나면 크게 발전할 것입니다.』

◎ 蘇秉用 대사 인터뷰

 뉴델리에 있는 駐인도한국대사관은 건축가 고 김수근(金壽根)씨가 설계한 벽돌색의 아름다운 건물이다. 소병용(蘇秉用)대사(62세)는 1994년에 부임하였는데 『1991년(라오前총리 시절)부터 시작된 인도의 개방정책은 이제는 궤도에 올랐으며, 어떤 정당이 집권해도 거꾸로 돌릴 수 없게 되었다』고 했다.

『이번에 좌파를 포함, 12개 정파가 연립한 새 정부가 예산안을 발표했는데 前정부보다도 더 개혁·개방적이라 기업인들이 안도하고 있습니다. 1947년에 독립한 뒤 91년까지는 영국식 사회주의 계획 경제를 추진하면서 국영기업 위주로 갔는데 이제는 민영화되고 있고 소비재 생산을 늘리며 외국자본을 적극적으로 유치하고 있습니다. 94년부터 年6%의 GNP성장률을 유지하고 있습니다(1인당 GNP는 346달러).』

 蘇대사는 한 통계 자료를 보여주었는데 올해 1∼4월 사이에 인도에 투자를 결정한 국가별 순위에서 한국은 미국을 누르고 1위였다(7억 달러). 인도―한국 무역액은 지난 해 약 20억 달러(수출은 11억 2300만 달러), 1997년엔 30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 실망한 한국 기업들이 인도로 몰리는 경향도 있다. 중국에는 법률과 제도의 기반이 허약하고 외국인에게는 불리하게 작동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장기적인 예측을 어렵게 하는데 인도의 경우는 法治와 정치시스템이 건전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 강점이다.

 한 한국기업은 『여기 인도사람들은 全, 盧 두 대통령의 구속에 대하여 놀라지 않았다』고 했다. 「법대로」에 익숙해 있는 데다가 故인디라 간디 여사도 총리직에서 물러난 뒤 두 번 감옥살이를 했고, 라오 前 수상도 지금 독직혐의로 수사대상에 올라 있다.

게임의 규칙이 유지되는 나라

『겉으로는 혼란스럽게 보이지만 게임의 규칙이 지켜지고 있는 나라입니다. 민주주의 경험은 영국식민지 시절로 거슬러 오를 정도지요. 선거는 시끄러워도 사실상 정치가 안정돼 있는 나라입니다. 560개의 왕국이 있었다는 나라이기 때문에 지방자치를 넓게 허용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가족계획 같은 사업이 한국처럼 일률적으로 집행될 수 없습니다. 중앙정부가 나서서 꼭 맞는 옷을 입힐 수가 없어요. 헐렁하고 풍성한 옷을 입고 있는 것이 인도입니다. 이곳의 법치는 외국 투자가들이 의지할 만한 수준입니다. 힌두교는 다신교(多神敎)이고 이슬람은 일신교(一神敎)가 아닙니까. 힌두교가 본질적으로 일신교보다는 민주적인 것 같습니다.』

 蘇대사는 『이곳의 엘리트들은 한국의 개발모델, 특히 중화학공업 건설이 성공한 과정에 대해서 관심이 많다』고 했다. 인도는 1960년대에 중화학 공업을 추진했으나 실패한 축에 속한다. 

『며칠 전에 라오 전 총리를 찾아뵈었더니 인도에 투자하여 물건을 만들기만 하면 팔리니 걱정 말고 투자하라고 그럽디다. 9억5000만의 大國이 이제는 성장쪽으로 관성이 붙었으니 산아제한을 못하듯 성장제한도 못하게 될 겁니다. 이곳은 가난하다는 것이 자산입니다. 그만큼 발전의 여지가 크다는 뜻이지요.』

공사장의 어린이 학교

 인구 약 2000만 명의 루마니아에 약 300만 대의 자동차가 있는데 인구가 그 50배인 인도에도 약 300만 대의 자동차가 있을 뿐이다. 이는 거꾸로 인도가 엄청난 시장이란 뜻이 된다. 大宇의 경우, 1994년에 트럭생산공장 DCM-도요타社의 경영권을 합작 투자 방식으로 인수, 11억 달러를 투자하여 年産 20만대 승용차 공장-年産 30만대의 엔진·트랜스미션 공장으로 확충할 계획을 맹렬하게 추진중이다. DCM 대우는 지난해부터 씨에로의 생산을 시작하여 앞으로 1년간 5만 대를 팔아 중형차 시장의 50%를 점유할 전망이다.

 내년엔 매출액이 8억3000만 달러, 2001년엔 38억5000만 달러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일본의 스즈키는 인도에서 年 27만 대의 소형차(마루티)공장을 운영하고 있는데 대우와의 혈전이 예상된다. 뉴델리 교외에 있는 DCM대우 공장의 확장 공사장에 가 보았다. 약 6000 명의 인도 건설 노동자들이 개미떼처럼 몰려와서 일하는데 거의 기계와 기구를 쓰지 않는 순수 육체 노동이었다. 그런데도 워낙 人力이 많으니까 공사진척은 빠르다는 것이다. 홍수 피해를 본 인부(人夫)들은 아예 가족을 데리고 와 공사장 한 구석에 거처케 해놓고 있었다. 밥솥을 걸어놓고 취사중인 옆에서는 어린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수업을 받고 있었다.

 바싹 마르고 작은 체구의 인도사람들이었지만 시키는 대로 묵묵히, 착하게 일하는 모습이 애처롭기도 하고 무섭게도 보였다. 저 다수(多數)의 힘이 무갈제국 때처럼 좋은 정치지도자를 만나 조직화되면 엄청난 질적 전환을 가져 올 수도 있으리라. 기자는 先 경제발전 後 정치발전이 개발도상국의 성공적인 개발모델이라고 믿어왔는데 인도의 경우엔 「先 정치발전 後 경제발전」의 전략이 성공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DCM대우의 인도인 사장 S.G.아와스티氏는 『산업기능노동력의 숫자로는 인도가 세계에서 1位다』라고 했다.

 해마다 약2000만 명의 인구가 늘어(즉, 매년 호주 같은 나라가 인도에서 하나씩 생기는 셈) 21세기에는 중국 인구보다 더 많아질 것이라는 인도의 미래를 예측하는 데 있어서는 쓰레기더미 같은 빈민굴을 잣대로 삼는 방법도 있지만 무갈제국과 타지 마할, 라호르의 城 같은 역사, 즉 인도 민족의 이력서를 근거로 삼을 필요도 있다. 한 인간의 이력서가 그가 가진 잠재력과 발전 가능성을 점치게 해 주듯이 한 나라의 역사 또한 그러하다.

 16∼18세기에 세계 최대·최강·최선의 무갈제국을 건설한 인도의 저력을 우리는 알 필요가 있다. 몽골고원에서 이역만리 인도까지 내려온 몽골-투르크族의 어떤 능력과 심성과 조직과 전통과 관습이 무갈제국을 건설하고 운영할 수 있게 하였는지를 탐구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몽골族의 그런 힘은, 분명히 우리 몽골系(또는 투르크系)의 韓民族도 공유하고 있을 것이며 그것을 찾아내어 21세기의 한국 경영에 활용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 그 자체일 테니까. 

[ 2016-05-24, 17:2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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