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투르크系 기마군단이 만든 헝가리와 불가리아
몽골 草原 역사 기행(13)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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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본 몽골과 투르크

 1996년 6월말 기자 일행은 유럽으로 건너가 몽골 벨트 취재를 계속했다. 독일-불가리아-헝가리-루마니아-체코-폴란드-러시아를 20여 일간 돌아다니면서 몽골-투르크族이 남긴 유산과 자취를 찾아보려고 했다. 몽골 인종인 기자의 눈에는 친숙한 현상들이 많이 띄었다. 헝가리 사람들 중에는 아틸라(Attila)라는 이름을 쓰는 이들이 많았다. 아틸라는 말할 것도 없이 서기 4∼5세기 바람처럼 유럽에 나타났던 훈族의 왕이다. 훈族은 몽골-투르크族이 중심이 되었던 흉노가 중국 한무제(漢武帝)의 공세에 밀려 西進한 것을 칭한다는 것이 지금은 학계의 정설이 되었다. 훈族은 중부 유럽에 살던 게르만族을 서쪽으로 밀어버렸다. 게르만族의 대이동이 일어났고 이 여파로 西로마 제국이 망하게 된다.

아틸라는 지금의 헝가리 대평원에 본부를 둔 대제국을 건설했다. 서기 6∼7세기에는 유럽의 동·중부에 아바르(Avar)라고 불린 유목민족이 나타난다. 이들도 헝가리 대평원에 중심을 두고 비잔틴 제국을 공격하는가 하면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약탈하고 한때는 큰 판도의 나라를 건설하기도 했다. 이들은 몽골족 가운데 돌궐(突厥)에 쫓겨서 西進한 부족이라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 되고 있다. 헝가리가 여러 유목민족의 이동 목표, 또는 정착지가 된 이유는 기자 일행이 부다페스트에서 교외로 나와 자동차로 달려 본 순간 금방 알 수 있었다. 펼쳐지는 대초원은 우리가 몽골과 카자흐스탄에서 보았던 풍경과 꼭 같았다. 몽골족은 이런 곳에서는 고향을 느꼈을 것이다. 헝가리 대초원만이 대규모의 기마군단을 유지할 수 있을만한 초지(草地)를 공급할 수 있었으리라고 분석하는 학자들도 많다.

 훈-아바르에 이어 유럽에 등장한 북방 유목민족은 불가리아를 건국한 불가리아족(투르크族)과 오늘의 헝가리를 세운 마자르族이었다. 마자르族도 투르크族으로 분류되는 경우가 많은데 헝가리語는 핀란드語와 같은 피노-우그릭語에 속하기 때문에 투르크족설(族說)을 부정하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서기 9세기에 헝가리로 들어왔을 때의 마자르族은 전형적인 몽골·투르크族의 군사 및 정치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기자는 부다페스트에 도착하자마자 시내의 군사 박물관을 찾았다. 서기 9∼10세기의 헝가리 무기들은 신라(新羅) 고분에서 발굴되는 것들과 흡사했다. 군사 박물관의 안내인은 신라식 투구를 가리키면서 『이것을 쓰면 목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고 타격을 받아도 충격을 흡수하는 등 당시의 유럽기사 것보다 훨씬 우수했었다』고 설명했다.

 9세기 당시의 전형적인 마자르족 무사를 상징화로 그려놓은 것을 봐도 얼굴과 무기와 복장이 징기스칸 시절의 몽골 군인과 같았다. 특히 북방 유목민족의 상징물인 활의 발달상은 마자르族의 출자(出自)가 어디인가에 대한 의문을 풀어주었다. 4세기의 훈族, 6세기의 아바르族, 7세기의 불가리아族, 9세기의 마자르族에 이어 13세기에는 몽골族(징기스칸 군대의 구성은 10% 미만의 몽골 장교 그룹과 다수의 투르크 병사로 돼 있었다)의 대침공이 있었다. 이 침공 작전의 목표도 헝가리 대평원이었다. 이때는 그러나 헝가리가 異종족인 유럽의 편에 서서 同族인 투르크-몽골族에 대항하였다. 그 사이 기독교로 改宗하였기 때문이었다.

  종교는 피보다 진하다

 이어서 14세기부터 오토만 투르크(오스만 터키)의 유럽 침공이 시작된다. 그 전의 훈, 몽골 침공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오토만의 중심세력인 투르크族이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는 데 있다. 그들은 조직적으로 장기간에 걸쳐, 그것도 기독교도를 개종시킨다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유럽의 기독교 문명권에 도전했다. 이 오토만 투르크도 헝가리를 主목표로 하여 진격을 한 것을 보면 유목민족이 가지고 있는 숙명적인 지연(地緣)감각을 느낄 수가 있다. 14세기부터 17세기에 걸친 오토만 투르크의 유럽침공과 그것의 成敗는 서양과 동양, 기독교 對 이슬람, 농경민족 對 유목민족의 승부라는 세계사적인 의미를 지닌다.

 오토만 투르크는 전통적인 기마군단 전술에다가 직업군인 조직인 예니세리 보병과 총포병까지 결합시켜 막강한 군사력을 갖추었다. 여기에다가 이슬람의 성전(聖戰)의식으로 무장했으니 유럽군대가 상대하기에는 벅찬 것이었다. 오토만 투르크는 16세기 슐레이만 大帝 시절의 전성기에 지금의 그리스, 불가리아, 옛 유고슬라비아(세르비아,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등), 루마니아, 헝가리를 지배하였다. 따라서 동부 및 중부 유럽 쪽에서 본 몽골-투르크는 피해자의 시각인 경우가 많다. 러시아의 역사학자들은 러시아의 후진성을 약 300년에 걸친 몽골의 지배에 돌리고 있었다. 몽골의 지배 때문에 선진된 西유럽의 문물(文物)을 받아들이는 데 수백년간 뒤늦었다는 이야기이다. 러시아뿐 아니라 헝가리는 몽골 침공에 의한 국토의 피폐를 가지고 후진성의 변명으로 삼고 있으며 불가리아도 500년에 걸친 오토만 지배를 동네북으로 삼고 있다.

터 키의 서구화-유목문화의 패배

 프랑크푸르트에서 기자 일행은 독일의 오토만 투르크 전문가들을 만나 보았다. 그들은 독일과 지금 터키와의 관계는 오토만 시절까지 거슬러 오른다고 했다. 오토만 투르크는 西歐의 先進 문물을, 주로 독일을 모델로 하여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1차 세계대전 때는 동맹국 사이였기에 터키 사람들의 취업도 용이했었다는 것이다. 독일에는 약 200만 명의 터키인들이 살고 있다. 이들은 이른바 3D 직종에 종사하고 있다. 新나치세력들은 이들을 상대로 테러를 자행하는 등 인종차별을 하고 있어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이들이 송금하는 외화는 터키 경제를 뒷받침하고 있는데 터키에서는 마르크貨가 달러貨보다도 더 위력이 있다. 독일에 대한 터키의 의존은 왜 몽골-투르크 세력권이 서구(西歐)세력에 지고 말았느냐 하는 話頭를 제공한다.

 17세기부터 총이 전쟁에서 일반화되면서 말과 활이란 유목민족의 主力 무기가 그 우위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18세기부터 시작된 산업혁명과 부르주아 혁명은 草原의 野性만 가지고는 존립할 수 없는 조건을 만들었다. 러시아는 18세기에 먼저 피터 大帝에 의한 서구지향 개혁 정책에 성공하여 그 바탕에서 팽창정책을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러시아의 南進정책은 흑해에서 투르크와 충돌하게 되었다. 18세기부터는 투르크 제국의 주적(主敵)이 합스부르크 王家에서 러시아로 바뀌게 된 것이다. 유럽의 중심도 바뀌고 있었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 등 중부 유럽을 지배하고 있을 때 주전장은 중부 유럽과 지중해였다. 15세기부터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같은 해양국가가 지리상의 대발견들을 통해서 신대륙의 식민지 개척에 나서면서 유럽의 중심은 西유럽과 대서양쪽으로 이동하였다. 베니스, 투르크,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같은 지중해권 국가는 2류권으로 밀려나게 된 것이다. 세계사의 무대가 바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투르크는 역대 유목민족 국가 중에는 가장 발달된 중앙집권적 관료제도와 法治의 전통을 확립하여 세계 제국 역사상 로마에 이어 두 번째로 긴 수명(600년)을 이어갈 수가 있었다. 이 장수의 비결 중에서 눈여겨 볼 만한 것은 개방성과 관용성이다. 오토만 투르크의 사전에는 「종교차별」이 없었다. 유럽에서 학살당하고 핍박당한 유태인들 중 상당수가 투르크로 피난 와서 요직에 등용되었다. 지금도 이스라엘과 터키는 거의 군사적 동맹관계라고 할 정도로 친밀한데 거기에는 그런 배경이 있는 것이다.

  개방과 관용과 경쟁

 몽골-투르크의 개방과 관용은 이 종족 집단이 어떻게 그토록 장기간 군사적, 정치적 활력을 유지할 수 있었느냐 하는 의문에 대한 하나의 해답을 제공한다. 개방과 관용과 경쟁의 전통은 조직의 경직과 노화(老化)를 방지한다. 영원한 젊음은 경쟁이 가져다주는 긴장과 안간힘 속에서 생겨나는 법이다. 로마의 유럽 제패는 1000년간 계속되었으나 몽골-투르크族의 유라시아 제패는 1700년쯤 계속되었다. 로마의 성공에 대한 연구는 수도 없이 많지만 몽골-투르크의 성공에 대한 연구는 많지 않다. 서구 학자들이 그들의 성공비결을 야만적 군사력에만 돌렸기 때문이다. 1700년간 압도적인 군사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한 몽골-투르크의 사회적, 경제적, 종족적 특질이 궁금한 것이다. 이번 기사는 그런 숙제에 대한 답장이기도 하다.

 18세기부터 오토만-투르크 황제들 중에서 오토만 투르크를 서구식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8세기 말 황제 셀림 3세는 프랑스 대혁명을 관찰하고는 프랑스式 군사제도 특히 포병제도를 도입하여 군대를 개혁하는 한편, 이것을 시작으로 하여 관료제도 및 국정 전반을 뜯어고치겠다고 「신질서」라는 야심찬 청사진을 내놓았다. 그 뒤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이슬람 국가를 서구식으로 근대화한다는 것은 대단한 모험일 뿐 아니라 개혁가들이 생명을 부지하기도 어려운 상황을 조성한다. 근위부대인 예니세리와 이슬람 종교지도자들이 술탄(황제 겸 이슬람교회 수장)을 反이슬람 분자로 몰아 궁정 쿠데타를 일으켰다. 셀림 3세는 유폐되었다가 나중에 살해되었다. 투르크의 황제는 이슬람의 교황을 겸하고 있었으므로 이슬람교도들의 눈에는 술탄의 서구적 개혁이 기독교도에 대한 항복이자 이슬람에 대한 배신으로 비쳐졌을 것이다.

 유라시아 유목민족 제국의 정통을 이어받은 투르크의 서구지향은 기원 前後부터 계속된 몽골-투르크族의 농경-정착민족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포기한 상징적 사건이었다.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키지 못한 유목민족은 기본적으로 동물(말과 사람)의 육체력에 의존하였던 군사력을 기계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전환시키는 데 실패하였던 것이다. 오토만 투르크는 1차세계대전 때는 과거의 숙적이었던 오스트리아 및 독일 편에 서서 싸우다가 패전과 동시에 제국이 해체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 나타난 영웅 케말 파샤(아타 투르크)의 지도하에 신생 터키는 확실하게 서구화의 길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정책은 이슬람과 정치를 분리함으로써 종교가 국가 발전에 저해 요인이 되지 못하도록 하면서 동시에 군대를 서구적 근대화의 보루로 삼은 점이다. 터키는 이슬람권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성공적으로 서구식 근대화를 한 나라로 꼽혀왔으나 올해(1966년) 들어서 심상치 않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즉, 이슬람 근본주의 당인 복지당이 선거에서 1등을 차지하여 제3당인 보수노선의 정도당과 손잡고 정권을 장악한 것이다. 복지당 출신의 수상은 이란, 리비아를 방문하고 脫유럽, 親이슬람 정책을 공개적으로 천명하고 있다. 1923년에 터키 공화국이 선포된 이후 처음으로 이슬람의 반동이 시작된 것이다. 터키는 그러나 이란이나 알제리는 될 수 없는 구조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다. 케말 파샤의 서구적 근대화 사상을 수호하도록 헌법에 의해 그 역할이 규정되고 있는 60만 군대가 건재하고 이 조직은 아직 이슬람 근본주의로부터 안전하게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두 번 그랬던 것처럼 사회와 정치가 혼란에 빠지면 군대가 나서서 정리를 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집권세력도 그들의 한계를 알고 있다. 터키에서 이슬람 근본주의가 득세한 한 이유로는 西유럽으로부터의 냉대를 꼽는 이들이 많다. 냉전시대에는 소련을 견제한다는 전략적 위치로 해서 西歐로부터 많은 원조도 받고 일찌감치 NATO에도 가입했으나 소련의 붕괴 이후에는 그런 원조도 중단되고 오히려 인권 문제 같은 것으로 해서 서구로부터 당하는 입장이 된 것이다.

6 00년간 이슬람 세계의 宗主國이었던 터키의 향방은 세계사의 흐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에서 라빈 수상의 암살 이후 평화정착 노력이 유대 원리주의자들의 반동으로 암초에 부딪치면서 중동의 이슬람 세력이 뭉치는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는 데다가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인 학생군 탈레반이 득세하고 있는 등 이슬람圈 전체가 서구 문화에 대한 대치국면을 그리고 있다. 동서 이념 대결 시대에는 이념갈등에 의하여 덮여졌던 종교, 문화적 갈등이 폭발하고 있는 것이다.

  불가리아의 최초 탈북자(脫北者)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출발하여 2시간 남짓한 비행 끝에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 공항에 내리니 꼭 시골 간이역에 도착한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뉴스도 암담한 것이었다. 불가리아가 외환 부족과 인플레 및 은행의 不實로 사실상의 파산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이었다. IMF도 금융개혁을 하지 않으면 구제대출을 해주지 않겠다고 선언하여 수십 개의 은행과 國營기업이 정리대상이 돼 있다는 것이다. 외환보유고는 작년의 12억 달러에서 올해는 지난 10월 현재 5억 달러로 줄어들었다. 청년공산당 조직가 출신인 현 비데노프 수상 정부는 국영기업의 民營化를 늦추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었다. 올해는 선거의 해이기 때문에 대량 실업을 부르는 국영기업 정리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실업률이 거의 20%에 육박하고 있다. 物價는 월평균 인상률이 두 자리 숫자이다.

 3일간 불가리아 문화부 장관 이반 마라조프, 외무부 대변인 카라시메오노프, 필립 디미트로프 前 수상, 소피아 대학 교수 드라간 드라가노프氏들을 만났다. 불가리아가 건국된 지 1300년 동안 고난의 길을 걸어와서 그런지 한결같이 생각이 깊고 신중하며 인내하는 인상들이었다. 고통이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성숙시키기도 한다는 것을 이번 동구 여행에서 실감했다. 마라조프 문화부 장관은 『나는 터키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에서 성장했는데 어떤 차별의식도 갖지 않고 자랐다. 우리 헌법에는 소수민족이란 말까지 금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남한과 거의 면적이 비슷한 이 나라의 인구는 약 900만 명인데 약 9%가 터키系 사람들이다. 그들은 정당도 갖고 있다.

 불가리아에서 우리를 안내한 崔東俊씨는 脫北人이었다. 함흥이 고향인 崔씨는 1956년에 친구 세 명과 함께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 대학에 유학을 왔다. 수리공학과(水理工學科)에 다니다가 졸업을 열흘 앞둔 1962년 초 駐불가리아 북한대사 임춘추의 호출을 받았다. 대사는 내일 즉시 귀국하라고 명령하는 게 아닌가. 네 학생은 처벌이 기다리고 있다는 판단을 했다. 당시 불가리아는 충직한 친소(親蘇) 공산국가였지만 북한에 비하면 天國이었다. 네 청년은 金日成이 말하는 평등이 얼마나 허구인가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자유의 바람이 든 네 청년은 자신들에 대한 정보 보고가 평양으로 올라갔기 때문에 소환되는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고는 소피아 근교 산 속으로 숨어버렸다. 그 산은 소피아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비토샤山이었다. 기자 일행은 崔씨와 함께 비토샤산에 올라가 소피아 시내를 내려다보면서 회고담을 들었다. 나라는 망해도 山河는 아름답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수려한 풍광을 감상하면서 듣는 절박한 옛 이야기는 기자의 가슴을 시리게 만들고 있었다.

 崔씨와 친구들은 산 속에 숨어살다가 소피아 시내로 빠져 나와 영화구경을 했다. 영화관에서 나오다가 북한 대사관 직원들에게 붙잡혔다. 대사관 5층에 감금되었다. 철사로 꽁꽁 묶인 채였다. 이상종(李尙鍾)씨와 李상직씨는 탈출했다. 李尙鍾씨는 『우리를 감시하던 여자가 아이에게 젖을 먹이려고 옆방으로 간 사이 이불 천을 잘라 끈을 만들어 타고 내려갔다』고 했다. 李씨는 『우리가 귀환 명령을 거부한 데는 6·25의 진실을 알게 된 것도 중요한 이유이다』고 말했다. 이들은 불가리아에 유학 중 인민군 출신 선배를 만났다. 그는 『나는 그때 38선에 배치된 부대에 있었는데 새벽에 깨우더니 남쪽으로 밀고 내려가는 것이었다』고 실토하더란 것이다. 이 네 학생들은 귀환을 거부하는 이유를 편지로 써서 북한 대사관에 부치기도 했다고 한다.

불가리아·북한의 외교 단절로 비화(飛火)

 이상종(李尙鍾)씨는 『대사관에 감금돼 조사를 받을 때 저들은 불가리아 사람들이 사주하여 탈출하게 되었다고 허위자백을 하도록 강요했으나 우리는 끝까지 버티었다』고 회고했다. 당시는 중국과 소련 사이의 이념분쟁으로 소련편인 불가리아와 중국편인 북한은 사이가 좋지 않을 때였다. 먼저 탈출한 두 사람은 불가리아 당국에 신고했다. 탈출 못한 두 친구가 소피아 공항에서 평양行 비행기에 강제로 태워지기 직전에 불가리아 당국의 개입으로 구출되었다. 북한 대사관 측에선 자진귀국이라고 우겼다. 불가리아 측에서는 월맹 대사관 사람을 입회시켜 두 학생의 진의(眞意)를 확인시켰다. 이 자리에서 최동준(崔東俊), 최동성(崔東成)씨는 여권을 찢어 버렸다. 이 사건은 외교문제로 번져 불가리아 정부는 북한 대사를 추방했고 북한도 불가리아 대사를 추방했다. 불가리아 정부는 네 사람에게 國籍을 주지는 않았지만 거주는 허용했다.

 네 망명자가 불가리아 국적을 얻은 것은 공산주의 붕괴 후인 1991년이었다. 현재 대통령 젤레브씨는 네 한국인들과는 소피아 대학 동창으로서 이들의 國籍 취득에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崔東俊씨는 음료수 연구소에서 일하던 중 불가리아 여자와 결혼하여 남매를 두고 있다. 딸은 치과의사이고 아들은 소피아 대학 수학과에 다니고 있는데 수석으로 입학했다고 한다.

『아이들이 태어날 때 엉덩이에 시퍼런 몽골 반점이 있는 것을 보고 아내가 놀라더군요.』

 崔씨는 지난해 우리 정부가 광복 50주년을 맞아 실시한 해외동포 수기(手記) 현상공모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기념식에도 초청받아 조국을 찾았고 청와대에도 초대받았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崔씨는 돌아올 때 배추씨를 갖고 와서 심었는데 사람 몸통만한 배추가 자라 소피아에 사는 한국인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李尙鍾씨는 여행사를 운영하고 있고 李상직씨는 삼성물산 지사장으로 있으며 崔東成씨는 화학공장 副공장장으로 있다.

우리의 고향은 몽골고원

 불가리아는 유럽의 동남쪽 변경에 자리잡고 있어 동쪽 아시아에서 밀려오는 몽골-투르크 유목민족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는 지리적 조건을 갖고 있었다. 유라시아 草原의 서남단(西南端)에 위치하기 때문에 비록 산악이 우리나라처럼 많은 지형이지만 초원의 질풍을 막을 수는 없었다. 불가리아라는 국명(國名)은 몽골-투르크族에 속하는 불가르(Bulgar)族에서 유래한다.

 지금의 불가리아는 이 불가르族이 서기 7세기에 카스피海 북쪽 지금의 러시아 남쪽 草原에서 서쪽으로 이동하여 와서 이곳의 정착민인 슬라브族을 정복하여 세운 국가에서 기원한다. 보지다르 디미트로프라는 학자가 쓴 「불가리아人-슬라브族을 개명(開明)시킨 사람들」이란 책에는 불가르족의 원거주지는 몽골고원이었다고 적혀 있다. 예수 탄생 전 수백년 동안 몽골과 중앙아시아에서 강성했던 흉노를 자신들의 선조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석기 시대나 청동기 시대에는 이 몽골에서 한국인의 선조와도 섞여 살았을지도 모른다. 유럽에서 부족명을 국명으로 쓰고 있는 또 다른 나라는 헝가리이다. 헝가리 사람들은 자기들끼리는 국명을 마자르(Magyar)라고 부른다. 마자르族도 유목민족인데 서기 5∼7세기경에는 카스피海 북쪽 초원에서 불가르族과 섞여 살았다고 한다. 불가리아族은 서기 4∼7세기 사이에는 카스피海 북쪽 초원에서 국가(부족국가 형태)를 이루고 살았다. 불가르란 말은 혼합이란 뜻이라고 한다. 부족연합인데다가 인종·종교의 차별을 하지 않는 것이 초원의 법칙이므로 불가리아族은 몽골族에서 아리안族까지 섞여 있는 지금의 아메리카와 비슷한 다종족 사회였다.

불가리아族의 특징은 큰 건축물을 짓는 기술을 갖고 있었고 제철기술(무기를 항상 많이 만들어야 하는 유목민 사회에선 제철기술은 늘 앞서 있었다)과 천문관측기술이 뛰어났었다고 한다. 불가리아 학자들은 이들이 만든 달력은 세계에서도 가장 정확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20여 년 전에는 이 달력을 그대로 세계공통의 달력으로 채택하자는 논의가 유네스코에서 있었다는 것이다. 고고학적인 발굴을 통해서 불가리아族은 장신(長身)이었다는 사실도 밝혀지고 있다. 중세 사람들의 평균 키는 160cm인데 불가리아族은 175cm였다는 주장이다. 이들은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했다. 군율(軍律)도 엄했다. 1∼2년간의 의무복무를 끝내면 軍馬 두 마리와 무기를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출동하는 예비군 체제를 유지했는데 이 군마를 전투가 아닌 사용(私用)으로 부리면 사형에 처했다고 한다.

불가리아族의 西進

 서기 7세기 중반 불가리아族은 다른 유목민족의 공격을 받게 된다. 유목민족 국가의 한 특징은 영토개념이 거의 없으므로 불가항력일 때는 사수(死守)가 아닌 퇴각을 택한다. 그들의 국가는 농경민족 국가처럼 땅에 붙박인 게 아니라 이동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불가리아國의 지도자들은 국가의 이사(移徙)를 결정했다. 主流는 북쪽 볼가강으로 이동하여 국체(國體)를 보존했다. 불가리아 왕자 세 명은 볼가강쪽으로 이동하는 데 반대하여 서쪽으로 무리를 데리고 나아갔다.

  장남은 지금의 독일 남부 바바리아 왕에 복속하기로 했으나 의심 많은 왕은 이들이 잠든 사이 습격하여 몰살시키려 했다. 생존자들은 탈출하여 알프스 산맥을 넘어 北이탈리아 지방 롬바르디에 정착했다. 이들은 현지인들과 결혼하여 곧 민족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된다. 지금도 이곳에는 불가리 또는 불가르니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더러 있는데 이들은 불가리아族의 후손들이라고 한다. 둘째 왕자는 지금의 헝가리서 강성하고 있던 아바르國에 복속하게 된다.

 그는 나중에 반란을 일으켜 동조자들을 이끌고는 지금의 마케도니아 지방에 정착한다. 셋째 왕자가 불가리아의 국부(國父)에 해당하는 아스파루 칸(Asparuh Khan)이다. 이 칸이란 명칭은 북방 유목민족 문화권의 중요한 상징어인데 王을 지칭한다. 신라가 아직 부족국가 단계에 있을 때 왕이란 호칭 대신 마립간(麻立干)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는데 이 간(干)은 칸의 한자표기이다. 비슷한 시기에 아시아의 동쪽 끝과 유럽의 남쪽 끝에서 왕을 칭하는 중요한 정치적 용어가 같았다는 것은 몽골-투르크 정치체제의 광범위한 확신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삼국시대의 한국인이 이 문화권과 같이 호흡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군사력이란 자본

 아스파루 칸은 수만 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다뉴브江 하류 삼각주 지방에 정착했다. 그들은 이곳을 불가리아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러니 볼가강변의 불가리아와 다뉴브강변의 불가리아 두 개의 同族 국가가 생긴 것이다. 다뉴브 강변의 원주민은 슬라브族이었다. 그들은 콘스탄티노플에 수도를 두고 있던 비잔틴 제국(東로마 제국)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슬라브 귀족들은 불가리아 부족의 기마군단이 가진 강력한 군사력의 보호를 받는 조건으로 아스파루 칸의 통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소수의 불가리아 군사집단과 다수의 슬라브 민족이 일종의 합작회사를 구성한 것이다. 이 합작회사의 대표는 군사력이란 다수 주식을 소유한 불가리아였다. 사람들의 머리수가 아니라 군사력이 위력 있는 자본이 될 수 있던 시대였다. 이 자본(기마군단)을 잃지 않는 한 기마군단은 어디를 가든지 지배적 위치에 설 수 있었다. 기마군단은 이 시대에는 국가도 살 수 있는 통화이자 자본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미국의 언론이 김우중(金宇中) 회장의 동구권 투자를 징기스칸의 유럽침략에 비교하고 그의 세계경영을 몽골식 전략과 비슷하다고 설명하고 있는 점이다. 영토, 조국, 고향, 조상과 같은 정태적이고 폐쇄적인 고정관념을 깨뜨려버리고 자본(군사력)과 정보(기동력)만 있으면 어디를 가든지 나의 세계(국가나 회사)를 만들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다는 점에서 金宇中식은 전형적인 몽골 기마군단식 기동 전략이다. 이 전략의 요체는 기동력이다. 군사력(자본)을 신속하게 전개시킬 수 있게 했던 말(馬)은 세계화 시대에는 경영자의 빠른 결정과 정보수집 능력에 비교할 수 있다. 金宇中 회장의 행동양식을 분석해 보면 기동성을 그 어떤 요소보다도 중시하고 있다. 金회장은 1988년 서울 올림픽 직전부터 중앙아시아와 동유럽을 돌면서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나라가 있으면 지도층과 담판을 지어 대규모 투자계획을 확정짓는 식으로 전략거점을 선점해 나갔다고 한다.

 金宇中씨는 6·25 때 대구에서 신문팔이 고학을 했다고 한다. 金宇中 소년은 신문이 나오면 무조건 시장 상인들에게 한 부씩 갖다 놓고 시장을 한바퀴 돈 다음에 수금을 하러 다녔다고 한다. 물론 수금을 못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先手를 치는 이 전략이 대체로 적중했다는 것이다. 전쟁이나 경영에서는 전략적 거점을 선점하는 것이 승패를 가르는 결정적 요인이 된다는 것을 그는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체험으로서 터득한 것이다.

 金회장은 회사는 꼭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인수하고 매입하면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농경민족과 제조업 종사자들은 농토와 회사는 만들고 가꾸고 지키며 물려주는 것이란 고착 관념을 갖고 있다. 유목민족과 무역업자와 상업종사자들은 군사력=돈만 있으면 나라는 정복하여 접수하면 되고 회사는 좋은 것을 골라잡으면 되는 것이란 상당히 유연한 발상을 하는 것이 특징이다

[ 2016-05-26, 23:5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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