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間 全斗煥 연구(1)
가난한 집안인데도 全斗煥 소년은 어머니의 호주머니를 털어 연필 한 타스를 상품으로 사 놓고 동네 소년들을 불러모아 축구시합을 붙여놓고 대장노릇을 즐겼다고 한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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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人間 全斗煥연구
  
  全斗煥 시대의 논리와 인간 全斗煥의 생리
  
  <1990년 2월 월간조선>
  
   지식 콤플렉스가 없는 사람
  
  고 朴正熙대통령과 全斗煥 전 대통령을 사석에서 자주 만나 비교적 솔직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소설가 李炳注씨는 이런 인물평을 했다. 『한 작가의 입장에서 저는 인간 全斗煥을 인간 朴正熙보다 훨씬 좋게 느끼고 있습니다. 朴대통령은 술자리에서도 자신을 좀처럼 열어놓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농담을 해도 그 농담 뒤에 있는 저의를 캐고 있는 듯해서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엘리트 의식은 대단해서 대구사범에 들어간 사실을 자주 자랑합디다. 全대통령은 어떠냐 하면 우직하고 순진합니다. 자신의 무지에 대해서 콤플렉스가 없어요. 대통령 자리에 있을 때도 「제가 경제를 뭐 알아야지요」라는 식이에요. 육군사관학교에 230명중 227등으로 들어간 이야기도 유쾌하게 털어놓고, 「경험도 준비도 없이 대통령을 하다 보니까 시행착오가 많았다」고 실토하는 것이 꼭 구김살 없는 어린아이 같아요.』
  
  全대통령은 연세대 법학과에 응시했다가 떨어진 막내 재만(宰滿)군이 백담사를 찾아 와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너무 실망하지 마! 내가 이렇게 돼 있는데 너만 잘되면 되겠어? 그런 점에서 우리 앞으로 친해보기로 하자.』
  全씨는 백담사를 찾아온 불교신도들과 인사를 하는 자리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여러분들 중에는 전직 대통령이 어떤 꼴로 지내고 있는지 구경하려고 오신 분들도 있을 겁니다. …바깥에서는 재임기간에 나쁜 짓 만 한 사람이라고 저를 욕하고 있는데, 사람이 실수로써도 잘한 일 하나는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소가 뒷걸음치다가 쥐잡는 식으로 말입니다.』
  全씨는 또 그가 말한 바 「손 볼 사람」가운데 랭킹 1위에 있는 것이 분명한, 지난날의 친구 李모 의원이 보낸 과자를 李順子 씨가 내어놓자 『당장 가져가. 혹시 독이 들어 있는지 아나?』라고 역정을 내기도 하였다. 개인적 친분의 차원에서는 솔직하게도 비치는 全 전 대통령은 지난 12월 31일의 국회증언에서는 솔직하게 속을 털어놓지 않았다. 인간으로서 솔직할 수는 있어도 전직 대통령으로서 솔직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全씨는 鄭昇和 전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으로부터 이런 비난을 당해야 했다.
  
  鄭씨는 1월 3일에 발표한 성명서에서 「全씨가 용서를 빌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10년 전 보다는 진실에 가까운 증언을 하리라고 생각했었다」면서 「全씨의 12·12 군사반란사건 관련 증언은 정치인으로서 이미 실패한 그가 군인으로서도,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도 실패작임을 보여준 것이다」고 했던 것이다.
  
   이렇게 고백했다면…
  
  全 전 대통령의 국회증언 내용을 듣고 『아직도 정신 못차린 것 같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全씨가 이렇게 고백하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다.
  『저는 정권장악의 장애물인 鄭昇和장군을 거세하기 위해서 12·12 사건을 주도하였습니다.』
  『저는 일찍부터 정치장교의 길을 걸어 왔고 정치적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서 하나회라는 정규육사출신 장교들의 私組職을 키워왔습니다.』
  『저는 대통령이 되기 위한 前 단계 조치로서 5·17 전국계엄확대조치를 실행했습니다.』
  『광주사태를 초기에 강경하게 진압하도록 제가 직접 나서서 공수부대 여단장들을 독려했습니다.』
  『저는 퇴임 후에도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하여 일해재단을 만들었습니다.』
  『골프장 하나를 허가해 줄 때마다 수 십억 원씩의 정치자금을 뜯었습니다.』
  『대통령선거 때 민정당에 수 천억 원의 선거자금을 지원해주었으며 야당후보 ○○○씨에게는 여러 기업체를 시켜 상당한 규모의 자금을 간접지원 하였습니다.』
  『저는 퇴임 때 550억 원의 잔여 정치자금을 盧대통령에게 인계하였습니다 盧대통령이 너무 일찍 경제계와 유착하지 않도록 배려한 것입니다.』
  『6·29선언의 진실에 대하여 말씀드릴 것 같으면…』
  『저는 스위스 은행에 수억 달러를 비밀 예금해 두었으며, 호주에도…』
  『따라서 저는 죽을죄를 지었사오니 국민들이 죽음의 약사발을 내리신다면…』
  
  이런 기대치를 全씨의 증언은 만족시켜 줄 수 없었다. 全씨의 증언 내용 중엔 고백도 없고 뉴스도 없었다는 얘기다. 용서를 비는 말은 있는데 무엇 때문에 비는 것인지 사실의 뒷받침이 없었을 뿐 아니라 많은 국민들이 기정사실로 믿고 있었던 부분에 대해서도 「건방지게」 해명을 시도하였다고 하며 많은 국민들은 기분이 상한 것이었다. 全 전 대통령의 한 측근은 이렇게 말했다.
  
  『全 전 대통령은 88년 11월 23일에 백담사로 떠나면서 이미 5공화국 때 일어난 모든 비리의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그 책임이란 것은 정치적, 도의적 책임을 뜻합니다. 사실관계는 별도의 문제입니다. 국회증언이 사실관계의 성격을 띠기 때문에 잘못 알려진 부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러다 보니 변명처럼 느껴지기도 했겠지요. 그렇다고 하지도 않은 발포명령을 「내가 했다」고 꾸미는 식으로 책임지는 자세를 취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12·12사태 날을 토요일이라고 하는 등 명백한 사실 왜곡이 있지 않았느냐』고 기자가 따지자 그 측근은 이렇게 말했다. 『요일의 착오는 全 전 대통령의 기억이 잘못되었고, 측근에서 그것을 잡아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1주일만에 원고지 300장분의 증언문을 써내자니 물리적으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허문도(許文道) 전 통일원장관, 안현태(安賢泰) 전 경호실장, 김병훈(金炳薰) 전 의전수석, 민정기(閔正基) 비서관, 그리고 全 전 대통령의 큰 아들 재국(宰國)씨가 문안작성에 참여했는데 혼란이 심했습니다. 31일 새벽에 백담사를 떠날 대 全 전 대통령은 3분의 2밖에 읽어보지 못했으니까요. 그러나 명백한 거짓말은 없다고 봅니다. 정치자금 대목도 문맥을 잘 음미해 보십시오.』
  
  「본인」이 안 준 것일 뿐…
  
  全씨는 국회증언에서 『민정당 이외의 특정인에게 본인이 정치자금을 준 사실이 있느냐는 질문이 있었으나, 그러한 사실이 없었음을 분명히 밝히는 바입니다』고 증언했었다. 이 부분에 대한 국회 5공비리조사 특위의 질문서 원문은 이렇다.
「항간에는 증인이 조달한 정치자금중 일부가 야당에도 전달되어 야권분열에 사용됐다는 얘기도 있는데 사실여부를 밝혀 주시고……」
  全씨는 이 질문내용을 「본인이 정치자금을 준 사실이 있느냐는 질문이 있었으나…」라고 변조해놓고 개조된 질문에 대한 답을 하는 식으로 머리를 썼다. 즉 全씨의 답은 「본인이 (직접) 준 사실은 없다」는 의미이다. 全씨는 증언 때 「본인이」라는 말에 유달리 힘을 주었었다. 대통령 본인이 「직접」 야당에게 정치자금을 줄 리야 만무한 일이다. 중간에 사람을 넣어 주든지, 기업체를 시켜서 자연스럽게 돈을 만들어주는 방법이 있는데, 全씨는 이런 간접 전달을 부인하지는 않았고, 全씨 측근도 그 점을 확인했다. 全씨는 언젠가 회고록을 쓸 때 「나는 그때 직접 정치자금을 야당에게 건네주지는 않았으나 ○○○을 시켜…」식으로 털어놓을 수 있는 기술적인 탈출구를 만들어 두었으며 이 대목이 全씨 측근에서 답변서를 준비할 때 가장 고심했던 부분인 것이다. 1989년 12월 31일 이날 기자는 국회의 민주당 총재실에 나와 있던 金泳三총재가 보충질의자로 지명된 金光一의원을 불러 『「본인」의 의미를 추궁하라』고 지시하는 것을 봤다.
  
   태어나서는 안 될 정권
  
  全 전 대통령이 일반의 기대치에 맞추어 솔직한 증언을 했더라면 그는 며칠간 『정말 참회했구나』 『진실을 이야기해주어 속이 후련하다』고 칭찬을 받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뱉어놓은 엄청난 『진실들』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정치자금을 준 기업주 명단, 그것을 비실명의 단기성 예금으로 관리한 내막, 그것을 받은 與野 정치인 명단만 놓고도 政界는 뒤끓을 것이다. 全씨가 솔직하게 『12·12는 군사반란이었다』고 하면 그와 그의 동지들은 당장 군형법상의 반란죄 피해자가 될 판이다. 全씨가 헌납한 139억 원의 내역이 공개되면…?
  이런 상황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1盧3金씨들은 제도적으로 그런 폭탄선언을 배제하는 안전 장치를 몇 겹으로 해놓았던 것이다. 무리한 연내 증언 추진, 1문1답 식 증언 배제, 보충질문 시간 및 회수제한, 증언 마감시간 설정, 박찬종(朴燦鍾)의원(무소속 광주특위)을 특위에서 일방적으로 해임한 것, 그날 있었던 잦은 소란과 停會 등등. 그날 야당이 진실로 全씨를 코너로 몰 수 있는 방법은 있었다. 그것은 보충신문의 기회를 살려 全씨의 증언이 가진 허구성을 직접 국민에게 고발하는 방법이었다. 3야당이 협력만 하면 보충질문 시간을 연장하여 밤 12시까지 全씨를 증언대기실이 아닌 증언대에 세워놓고 비지땀을 흘리게 할 수도 있었다. 그 장면이 바로 5공 청산의 역사적 통과의례가 되었을 것이지만, 특위위원들은 서둘러 全씨를 백담사로 돌려보냈다. 터뜨리지 않은 폭탄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 全씨는 일정한 정치적 영향력을 보유한 상태 그대로인 것이다.
  
  그는 어쨌든 1980년대의 마지막 말로써 80년대를 「하루의 더도 덜도 없이」 꽉 채웠던 全斗煥시대를 마감하였다. 이제 우리는 인간 全斗煥과 그의 시대를 하나의 온전한 모습으로 관찰하고 스케치할 수 있게 되었다. 全씨의 증언 중 12·12사태관련 부분은 全씨의 인간됨과 그의 논리체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全씨와 그의 정권에 대한 평가의 출발점은 12·12사태이다. 10·26사건 이후 온 국민들이 민주화에 합의하여 은인자중하고 있을 때 일단의 정치장교집단이 느닷없이 일으킨 이 유혈사태는 全斗煥정권을 「태어나서는 안될 정권」, 全씨를 「도저히 마음속에 받아들일 수 없는 지도자」로 낙인찍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인식은 그 뒤의 5·17조치와 광주사태에 의해 더욱 보강되었다. 손에 피를 묻히며 등장한 全씨에 대한 이런 汎국민적인 증오심을 全씨는 무마할 수 없었다. 「고운 사람 치고 미운 놈 없고, 미운 놈 치고 고운 사람 없다」는 것이 人之常情일진대, 그 뒤 대다수 한국인들은 全씨의 모든 행동을 밉게 보게 되었고, 그런 시각은 그의 증언에까지도 계속되었다. 全씨가 불평한 바, 『바깥에서는 내가 7년 동안 한 일이라고는 나쁜 짓 한 것밖에 없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는 말은 사실인 것이다. 12·12사건을 해명하는 데 있어서 全씨 진영에서는 「어차피 변명할 수밖에 없으니 기존 입장을 오히려 강화하는 식」으로 방침을 굳혔던 것 같다. 鄭昇和씨의 지적대로 全씨는 10년 전의 시각에서 몇 걸음 더 나아간 논리로써 12·12사태의 당위성을 설명하였다.
  
   鄭昇和의 결백 안 全소장
  
  12·12사태는 全斗煥 소장을 중심으로 한 정치장교집단 하나회가 군부내의 패권장악을 위해 鄭총장을 제거한 군사변란이었다. 全소장은 이 변란의 명분을 鄭총장이 故 朴대통령 시해사건에 연루된 혐의가 있어 이를 조사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하였다. 당시에 일반 사회와 군대 안에서 鄭총장에 대한 의혹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鄭총장이 金載圭와 아무런 공모관계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먼저, 소상히 알 수밖에 없었던 이가 시해사건수사책임자 全소장이었다. 당시 계엄사 합수본부의 金載圭담당 수사국장 白東林씨(당시 대령)는 최근 『수사초기에 이미 鄭총장이 이 사건과 관련이 없음을 확인하여 全소장에게 보고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全합수본부장은 『옛날 상관이라 적당히 수사하지 말라』고 당부까지 했는데 金載圭와 鄭총장이 白씨의 옛 상관이었음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白씨는 『우리 局의 수사결과를 全소장이 납득하였으며, 鄭총장을 연루시키는 쪽으로 몰아가라는 지시도 없었다. 鄭총장은 우리의 수사에 협조적이었다』고 했다. 10·26사건 전모발표 때 『미 CIA와 鄭총장은 이 사건과 관련이 없다』고 말한 이도 全斗煥소장 자신이었다.
  
  全斗煥 전 대통령과 육사11기 동기생이자 하나회의 회원이었던 한 인사는 최근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12·12사건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십 수년간 하나회가 꿈꾸어 왔던 야망의 결실이었습니다. 이 야망의 시작은 1963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朴正熙최고회의의장은 장충동 공관으로 육사11기출신 장교들-全斗煥, 權翊鉉, 鄭鎬溶, 孫永吉 소령 등을 불렀습니다. 朴의장은 민정 이양과 관련하여 번의를 거듭하고 있을 때인데, 이 장교들에게 「자네들이 군부의 중심이 돼 이 나라를 이끌고 가야 한다」고 비장한 당부를 했습니다. 그 뒤 하나회가 조직되었고, 朴대통령의 묵인 아래서 全斗煥씨를 회장으로 하여 성장해 갔던 것입니다. 12·12사태는 하나회의 귀결점이었습니다.』
  
  이 인사는 또 『10·26사건 뒤 全斗煥 장군 등 하나회 그룹에서는 鄭昇和, 申鉉碻 두 사람 중 한 사람을 지도자로 업는 방안을 검토한 적도 잇다. 鄭총장은 군의 정치적 중립을 공언하는 등 全장군 그룹의 생각과 다른 방향으로 가는 바람에 희생된 것이다. 하나회에서도 鄭총장을 군인으로서 존경하고 있었다』고 했다. 鄭씨는 『그때 정규육사출신들이 나에게 「우리가 중심이 돼 총장님을 받들겠습니다」는 말을 해 온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鄭씨는 『육사출신들에게 너무 파당적으로 행동하지 말라고 오히려 꾸짖었다』고 말했다.
  
   鄭昇和씨의 반론
  
  全斗煥소장은 鄭총장이 金載圭와 무관함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12·12사태에 대비한 동지의 포섭 때는 鄭총장에 대한 의혹을 선동의 미끼로 이용했는지도 모른다. 시해사건 수사정보를 독점하고 있었던 그는 그런 자리를 이용하여 鄭총장에 대한 의혹을 과장함으로써 차규헌(車圭憲), 황영시(黃永時), 유학성(兪學聖)중장 등을 포섭할 수 있었던 것이다. 全씨는 국회증언에서 이 12·12사태를 변론하면서 재미있는 논리를 구사하였다. 이 논리는 비록 강변이라 하더라도 그의 사고체계를 엿보게 하는 좋은 자료였다.
  
  全씨는 『시해사건에 대한 조사권은 대통령의 사전결재를 받지 않아도 되는 합수본부장의 포괄적인 고유권한이었다』고 했다. 이에 대해 鄭昇和씨는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은 계엄사령관인 본인의 지휘통제하에서 권한위임을 받은 범위 안에서 수사를 하고 있었지 3부의 통제권 밖에서 수사권을 전횡하도록 만든 기관은 아니었다. 본인에게 혐의가 있다고 판단될 때에는 국방부장관을 거쳐 대통령의 재가를 득하여 계엄사령관을 연행할 수 있는 것이다. 全씨는 시해사건의 용의점만 있다면 그가 계엄사령관이든, 국방부장관이든, 대통령이든, 그 누구이든 그 누구의 결재도 없이 체포 구금할 수 있다는 논리인 바, 그렇다면 합수본부는 일순간에 정부기능을 무력화시키는 쿠데타권도 갖고 있었다는 이야기밖에 되지 않는다. 
  
  全씨는 또 『일단 용의자로 지목되면 상관이니 하위자의 관계는 없어지고 용의자와 수사책임자의 관계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누가 용의자라는 판단을 내리는가이다. 全씨는 합수본부가 그런 판단권을 갖고 있다는 태도인데, 그렇다면 합수본부의 자의적 판단으로써, 그 판단이 그 뒤에 설사 잘못된 것으로 밝혀지더라도, 누구나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체포 구금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의심나면 일단 체포 조사한다』는 이런 全씨의 단세포적 태도에서 5공화국 치하의 인권유린사태가 빚어졌음을 우리는 그의 증언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全씨는 또 『시해사건 직후 육군본부에 같이 도착한 자리에서 정총장은 김재규에게 부대 배치 상황을 보고하고 김재규의 지시에 따라 제9공수여단을 육군본부로 이동시켰는데 군의 주요부대 이동은 국방장관과 대통령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그런 절차를 밟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이 증언은 全씨가 군복을 입고 있으면서도 군 본연의 임무에 어두운 사람이었음을 스스로 폭로하는 것이었다. 육군 참모총장은 대통령이 서거한 것과 같은 비상시에는 독자적 판단에 따라 군부대의 이동을 명령할 수 있는 합법적 권한을 갖고 있다.
  
  全씨는 『鄭총장 측근에서 계속 위협을 가해 왔기 때문에 안보상 필요한 조치를 취한 가운데 제한된 규모의 에비병력을 동원하여 사태를 수습하게 되었다』고 증언했다. 『정총장 측근』이란 육군본부를 말한다. 육군본부의 합법적 명령과 조치를 「위협」이라고 표현한 것은 全씨의 그날 행동이 군형법 제1장 5조가 규정한 바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하고 반란한 죄』에 해당하는 것을 스스로 고백한 셈이다. 반란죄의 수괴는 사형에 처하도록 못 박혀 있다. 당시 육군본부 측에서는 북괴남침과 국군내부의 무력충돌을 우려하여 일선부대를 동원하지 않았으나 全씨측은 『안보상의 치명적인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소신을 법 위에 두어
  
  全씨의 증언에는 그가 鄭총장과의 관계를, 군조직의 생명인 지휘계통상의 상하관계가 아니라 권력투쟁 관계로 파악하고 있었음을 드러내는 대목들이 더러 나오고 있다. 10·26사건 이후 鄭총장이 수도경비사령관에 장태완(張泰玩)소장을 임명한 것을 비판했는데 이런 인사는 하급자의 비판대상이 아닌 육군참모총장의 고유권한인 것이다. 鄭당시 총장에 따르면 全소장은 처음에는 張소장의 임명에 이의를 제기하다가 일단 임명되자 『총장님께서 적격자를 고르셨다』고 태도를 바꾸었다고 한다. 全소장은 합수본부의 권한밖인 부정축재자 조사도 鄭총장에게 건의했다가 퇴짜를 맞았다고 한다. 군인으로서, 또 대통령으로서 全斗煥씨와 그 측근 및 인척그룹의 행동상의 한 특징은 법규와 절차의 중요성에 대한 놀라운 무감각이다. 주관적 소신이나 명령을 법규보다 앞세워 밀어붙이는 방식은 총을 들었을 때는 반란이나 쿠데타로 나타나며 주먹을 들었을 때는 고문과 조작, 돈을 들었을 때는 부정부패로 표현되는 것이다.
  全씨의 실패, 그 가장 큰 요인은 법규로 움직여져야 할 현대사회에서 법규를 무시했다는 점일 것이다.
  
   골목대장 스타일
  
  법규무시와 함께 全씨의 행동상 한 특징으로 드러나는 것은 1차원적인 집단주의이다. 패거리 의식이란 말이 더 솔직한 표현일 것이다. 全씨는 어린 시절부터 패거리의 리더가 되는 데 능했다고 한다. 李順子씨는 백담사로 全씨를 위문 온 어느 손님에게 『저 양반 저러다가는 거지 쪽박 차고 거리로 나앉겠다』고 탄식을 하더라고 한다. 全씨는 자신을 찾아오는 손님이나 과거의 부하들에게 무엇이든지 주고싶어하는데, 가진 돈이 모자랄 때는 친지에게 돈을 빌려오라고 시키기도 한다는 것이다.
  
  全씨의 인격을 골목대장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손쉬운 접근법일 것 같다. 全씨는 지금도 소년 때의 추억을 즐겨 이야기한다고 한다. 가난한 집안인데도 全斗煥 소년은 어머니의 호주머니를 털어 연필 한 타스를 상품으로 사 놓고 동네 소년들을 불러모아 축구시합을 붙여놓고 대장노릇을 즐겼다고 한다. 타고난 보스기질과 부지런함은 그의 知能을 보완하고도 남을 만하였다. 全씨는 『육사입학시험을 쳤는데 성적이 엉망이었다. 수학은 빵점을 받았을 텐데 마침 외우고 있던 피타고라스 정리가 문제로 나와 영점을 면했다』고 말한 적도 있다. 全씨는 육사 11기가 200 명 모집정원에 39명이 추가되는 바람에 227등으로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고 실토한 적도 있다. 일단 육사에 들어간 뒤 全斗煥생도는 남다른 노력을 폈다고 한다. 아침 기상점호 40분 전에 일어나 변소에 들어가 모포를 뒤집어쓰고 공부를 할 정도였다. 全생도는 또 영어는 영어를 잘 하는 생도를, 수학은 수학을 잘 하는 생도를 찾아가 개인지도를 받는 식으로 공부하기도 하였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全생도의 성적은 해마다 조금씩 올랐으나 졸업 때의 성적은 여전히 하위권이었다. 그 뒤 고등군사반, 육군대학을 거치면서도 그의 성적은 계속 올라갔다고 한다.
[ 2016-05-27, 11:3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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