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全斗煥씨야말로 지금 인생의 황금기에 있다."
인간 全斗煥 연구(3) 출세가도를 줄달음치면서 남을 부리고, 남을 젖히며, 남을 조사하는 일에 익숙하였던 全씨로서는 이제 처음으로, 「당하는 사람들의 심정」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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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에서는 해방 뒤 한국의 경제·정치발전을 세계사의 금자탑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해방 당시 우리보다 훨씬 앞에 있었던 아르헨티나, 멕시코, 필리핀은 이제 정치·경제 모든 부문에서 우리 뒤로 처졌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국민 모두는 영웅이고, 우리 시대는 영웅시대여야 합니다. 그러나 영웅을 찾아 주위를 둘러보면 화살 맞은 시체들만 나뒹굴고 있습니다.』

*1990년 2월호 월간조선 게재.

체제의 잘못을 몽땅 쓰게 돼

全대통령을 매일 모셨던 이들은 그가 매우 소심한 면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들은 독재자라고 공격을 받은 全씨를 「너무 국민 눈치 많이 보는 사람」으로 인식할 정도였다. 한 비서관 출신은 『대통령의 눈치를 봐야 할 사람보다는 대통령이 눈치를 봐야 할 사람이 훨씬 많다. 대통령이 만만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들이 청와대 비서관들인데, 이들에게는 신경질을 내기도 하였다』고 했다. 독재체제의 대통령은 권력을 독점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일이 나쁘게 되면 책임도 독점하게 된다. 全대통령이 朴鍾哲군에게 물고문을 시킨 것은 아니지만 국민들의 분노는 결국 全대통령으로 집중되었다.

독재체제에서는 「체제=독재자」이므로 체제의 잘못이 全대통령의 잘못으로 개인화 될 수 있다. 全대통령에 대한 분노가 그토록 컸던 것은 독재체제의 잘못을 그 체제의 대표에게 몽땅 넘겼기 때문이었다. 이런 식의 분노발산이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것은 독재체제는 대통령의 취향에 의하여 이리저리 방향을 조정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새벽에 포장마차집에 들러 주인을 격려하면 공무원들이 포장마차 단속을 중단하고, 대통령이 지나가는 말로 『나는 두부찌개를 좋아한다』고 하면 대통령이 시찰 가는 곳의 식탁에는 반드시 두부찌개가 등장했다. 全대통령이 『왜 두부찌개만 내 놓느냐』고 불평을 했더니, 사라지더란 것이다. 朴대통령이 1970년대 말에 부산을 시찰, 崔錫元시장과 함께 해운대 동백섬을 산책하는데 쥐가 한 마리 나타났다. 朴대통령은 무심코 『저놈 쥐 잡아라!』고 했다. 경호원들이 바위 사이를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결국 쥐를 잡아  내더라는 것이다.

全 전 대통령은 국회증언에서 姜信玉 의원이 간첩조작사건에 대해서 답변을 재촉하자 『그것은 실무자 선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서 모르겠다』는 취지로 답변하였다. 全씨는 증인대기실로 돌아와서는 『도대체 간첩조작이 뭐냐?』고 생전 처음 듣는 말인 듯 의아해하더라는 것이다. 87년초 서울고법의 부장판사는 국군보안사가 적발한 간첩사건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얼마 뒤 법조계에는 『全대통령이 대노했다』는 소문이 쫙 퍼졌고, 그 판사는 불안해 하고 있었다. 全대통령이 판결에 대해 어떤 논평을 했는지 모르지만 무심코 한 한마디라도 경직된 독재체제에선 크게 울려 그 뒤의 재판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단임약속에 대한 순정

全대통령의 머리 속에는 朴대통령이 1인장기집권 때문에 그런 비극을 맞았으므로 대통령단임만 실천하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뿌리를 내리게 된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국민들은 그 단임이란 것을 「형님 먼저 아우 먼저」식의 군사정권 내부의 임무교대로 간파했으므로 단임 약속의 의미를 대수롭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이런 인식 차이 때문에 1985년 이후 全대통령의 생각과 국민들의 요구는 타협점 없이 평행선을 달리다가 6월 사태를 맞은 것이었다. 全대통령은 수 십년 친구인 盧泰愚씨를 5공화국 출범 때부터 후계자로 지목하여 경력관리를 시켰다. 정무장관, 내무장관,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 민정당 대표라는 그의 경력에 안기부장이란 자리가 삽입되었더라면 盧씨는 대통령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2인자로 지목된 사람이 한번도 정권을 승계한 적이 없는 한국적 풍토에서 全씨가 당초의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우직한 순정을 반영한 것이리라.

그러한 全대통령도 1986년말 安賢泰 경호실장에게 이런 말을 하더라고 한다.
『아무래도 다음 대통령은 민간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安실장은『각하 그 말씀은 안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것은 각하의 고독한 결단이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때 全대통령은 盧 민정당 대표와 함께 盧信永 총리를 후계자로 검토하고 있었다는 것이 측근의 증언이다. 全대통령은 퇴근 뒤 盧총리의 공관에 몇 번 들러 각별한 신임을 나타내기도 했다. 全 전 대통령은 백담사에 간 뒤 자신이 盧泰愚씨를 후계자로 지명한 이유가 『분단상황에서는 군을 잘 아는 지도자가 아직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고 말한 바 있다. 全 전대통령은 어쨌든 나름대로의 항심(恒心)으로 단임약속과 盧泰愚 후계자 구도를 바꾸지 않았다. 全 전 대통령은 백담사를 찾아 온 손님에게 최근 『내가 4·13호헌조치를 통해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거부한 것은 盧대표가 직선제로는 도저히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지 나를 위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全 전 대통령은 1987년 6월사태로 민심이 완전히 돌아서자 『이런 분위기 아래서는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가 오히려 불리하다. 선거인단에 야당 의원이 대거 당선될 수도 있다』는 판단을 했다고 한다.

챠우셰스쿠의 말로 맞을 뻔?

全씨의 국회증언이 시작되기 전 국회 5공비리조사특위의 황명수(黃明秀)위원장은 서두의 연설을 통해 루마니아 대통령 차우셰스쿠의 末路에 대해서 언급했다. 이때 全 전 대통령은 꽉 다문 입에 힘을 주었고 의자 손잡이를 잡은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全斗煥대통령이 차우셰스쿠와 같은 말로를 맞고 한국이 루마니아로 변할 수 있는 위험이 있기는 있었다. 6월 사태가 절정으로 치닫고 있던 6월 19일에 全斗煥 대통령이 부산에 계엄령을 펴고 군3개 사단을 투입했더라면 한국은 파국으로 치달았을 것이다.

한 예비역 소장은 이렇게 말했다.

『군대는 경찰과 근본적으로 다른 조직이다. 전경은 시위대에 항복하고 뺨을 얻어맞을 수도 있지만 군대는 그럴 수 없다. 일단 군대가 나오면 사태를 철통같이 장악해야 한다. 6월사태 때 그런 목적을 달성하려면 광주사태의 몇 배나 되는 피를 흘려야 했을 것이다. 루마니아 사태에서 실증되었듯이 전체국민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수 있는 군대란 존재하지 않는다. 군대는 결국 국민 편에 서서 총부리를 全정권 쪽으로 돌렸을 것이다.』

 朴대통령이 자신의 운명을 재촉했던 것은 경찰력으로 막을 수 있었던 부산사태에 비상계엄령을 선포, 권력층 내부의 갈등을 심화시켰기 때문이었다. 全대통령은 『재임기간에는 계엄령을 절대로 선포하지 않겠다』는 생각에서 일찍부터 전투경찰을 늘려 놓았었는데, 이 경찰병력이 6월사태 때 끝까지 버팀으로써 「경찰이 계엄령을 막았다」는 말까지 나오게 되었다. 6월19일에 全대통령이 일단 군 출동명령을 내렸다가 치안본부장의 「경찰력으로 막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쉽게 그 결심을 번복한 것은 朴대통령과는 판이한 의사결정 방식이다. 이런 점 때문에 全대통령은 즉흥적이라는 비판도 받았으나 납득할 만한 다른 이유가 발견될 때 자신의 고집을 꺾을 수 있다는 것은 대파국을 예방할 수 있는 德性이기도 했을 것이다.

우직한 도박―經協요구와 올림픽

全 대통령은 준비와 경험 미숙으로 의사결정과정에서 결심과 번의를 되풀이하였지만 몇 가지 國政의 기본방향에 대한 기조는 바꾸지 않는 우직성을 보였다. 물가안정, 서울올림픽, 단임약속, 盧泰愚 후계자 구도 등이 그것이다. 1985년 2·12총선 직전에 민정당에서는 긴축 예산과 공무원 봉급동결을 풀어줄 것을 全 대통령에게 요구했으나 全대통령은 『민정당과 물가안정 중에 택일하라면 물가안정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버티었다고 한다. 한 경호관 출신은 『全대통령이 자주 단임약속의 실천의지를 公言한 것은 자신에 대한 다짐이기도 하였다. 정권연장의 유혹을 뿌리치려는 몸부림처럼 느껴졌다』고도 했다. 서울 올림픽은 朴鐘圭씨가 준비해온 아이디어를 全대통령이 경제 각료들의 반대를 누르고 채택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었다. 朴, 全 두 사람은 「간 큰 일을 저지를 기질」의 소유자로서 의기투합하여 엄청난 일을 해낸 셈이었다. 일부에서는 서울올림픽이 정권연장에 이용될 것이라는 시각을 가졌으나 6월사태 때는 오히려 군동원을 억제하는 작용을 해 결과적으로는 민주화의 보장조건 역할을 했다.

이런 秘話가 있다. 1980년 여름 全씨가 아직 국가보위상임위원장이던 시절에 일본 이토추 상사의 세지마 류조 상담역이 일본政界의 密使임무를 띠고 한국에 와 全씨와 단독 면담했다. 세지마씨는 이때 『한국이 올림픽을 개최하십시오. 그리고 일본에 대해 경제협력차관 제공을 요구하십시오』라고 권했다. 日帝 때 대본영의 작전참모 출신인 세지마씨는 서울올림픽과 경협차관이 한반도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며 이는 결국 일본의 안전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일본정부가 가만히 있는 한국에게 차관을 제공해주겠다고 나설 수도 없어 한국정부가 차관을 요구하면 못 내키는 척하고 건네주겠다는 작전이었던 것이다. 全씨는 대통령이 되자 「느닷없이」 60억 달러의 경협차관 요구를 일본정부에 최후 통첩하듯이 냈고, 결국 나카소네 총리의 고문역을 맡고 있던 세지마씨가 중간에 나서서 權翊鉉 민정당 사무총장과 담판, 40억 달러로 낙착 지었던 것이다.

全·盧 팀웍의 비결

6·29선언은 물리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던 대치 상황을 정치력으로 일거에 수습하고, 그 바탕에서 민주적인 방법을 통한 정권연장을 성공시켰다는 점에서 해방 이후 최대의 정치적 승부수였다. 12·12사태 날의 밤에 全씨가 보여주었던 동물적인 감각의 승부기질은 이 정치적 결단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이 대도박에서 全斗煥·盧泰愚 콤비는 승리를 거두었다. 全·盧콤비는 독재체제에서는 1인자와 2인자가 결코 공존할 수 없다는 통설을 깨고 끝까지 팀웍을 유지했지만, 金大中·金泳三 두 金씨는 全·盧의 계산대로 대권을 눈앞에 두고 분열하며 정권인수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全·盧콤비의 팀웍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朴正熙 대통령의 통치술과 비교할 때 더욱 돋보인다. 朴대통령은 군지휘관 시절부터 부하들을 상호 견제시켜 조직을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방법을 애용하였다. 심할 때는 이간질을 붙인다는 비난을 들을 정도였다. 10·26사건은 車智撤 경호실장과 金載圭정보부장의 상호견제가 감정문제로 폭발한 것이었다. 全대통령은 권력집단 내부의 인간적 단결에 신경 써 심각한 내부균열이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盧泰愚씨가 조심하며 독자적인 기반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던 것도 그런 단결의 한 요인이다. 許三守사정수석과 許和平정무수석비서관이 1982년 말에 그만두었지만 권력핵심의 단결에는 영향을 주지 않았다. 두 許씨가 밀려난 이유는 李哲熙·張玲子 사건 때 강경한 수사를 건의했고, 이것이 全씨 부부의 반발을 산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全씨는 백담사에서 『두 許씨가 장관까지 부르는 등 越權이 심해 잘랐다』고 얘기했으며 李·張사건에 대해서는 『그 사건은 법률적으로 처리해야 할 것을 정치적으로 확대시켰다』고 하며 李圭光씨의 구속은 불필요한 과잉조치였다는 뜻의 말을 했다고 한다.

全씨가 12·12주체세력의 내부단결을 유지한 비결은 두 가지였다. 인사면에서 全씨는 안기부장, 육군참모총장, 보안사령관, 국세청장, 감사원장 등 권력의 중추부에 주로 하나회 출신의 측근을 임명하여 정권의 고삐를 단단히 잡았다. 정치자금 면에서는 그 자신이 루트를 독점하였다. 朴대통령 밑에서 李厚洛, 金鍾必, 金成坤, 朴鐘圭씨등이 독자적 파벌을 만들어 각축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각기 따로 정치자금 루트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全대통령은 스스로 음성적 정치자금 모집과 배분의 단일 창구역할을 맡았다. 그는 월급 주듯 이 돈을 민정당 운영비나 선거자금으로 나눠주면서 퇴임 때까지 영향력을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7년 단임을 예고하고도 권력 漏水 현상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은 인사권과 정보 수집권, 그리고 자금루트를 양보하지 않고 장악한 덕분이다. 

철저한 인계·인수

민주당에서는 이원조(李源祚)의원이 정치자금모집의 대리창구였고 야당분열공작에 관계했다고 의심하고 있는데 全씨의 측근중의 측근이었던 ㄱ씨는 이렇게 말했다.

『全대통령은 정치자금을 직접 받았습니다. 기업체 대표가 수 십억 원의 정치자금을 낼 때 대통령을 직접 만나 부탁도 하고 고맙다는 인사를 들어야지 대리창구를 뭣 때문에 이용하겠습니까. 국회의원 선거 때 보니까 10만원을 보태주는 사람도 꼭 후보를 만나 직접 주려고 하던데…』

그러나 1987년 대통령 선거 때는 李源祚의원이 盧후보를 돕는다는 명목으로 자금조달에 적극 관여했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全 전 대통령이 백담사에서 실토한 바에 따르면 李의원은 87년 대통령선거전에 자신을 찾아와 『이제부터는 盧후보를 도와주어야겠습니다』고 하기에 『그렇게 하라』고 승낙했다는 것이다. 全 전 대통령이 李의원에 대해 유감을 갖고 있는 것은 친인척 비리에 대한 정보를 李의원이 盧대통령의 측근에게 제공하였고, 그 정보가 언론계 출신 측근에 의해 언론으로 새나갔다는 확신에 기인한 반응이라고 한다.

全 전 대통령의 한 측근은 『全대통령이 퇴임 직전에 남은 정치자금 550억 원을 인계한 것은 그분의 돈관리 방식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全씨는 지금도 사단장 시절에 판공비 20만원을 갈라준 내역을 외고 있다는 것이다. 정보참모에게 몇 만원, 운전병에게 몇 천 원씩으로 갈라주었으며 후임자가 처음 부임하여 상당기간 돈에 궁할 것에 대비하여 그럴 때 쓰도록 남은 돈도 인계하여 주었는데, 550억원도 그런 성격이란 얘기였다. 다른 옛 비서관은 『파출소장이 관내로부터 들어 온 촌지들을 모았다가 집으로 가져가면 도둑놈이 되지만 파출소 운영비에 쓰고 부하들에게 나누어주면 한국적 현실에서는 이해될 수 있지 않겠는가. 全대통령이 그런 스타일이었다』고 했다. 여러 증언으로 미루어 全대통령은 군지휘관 시절이나 대통령 때 돈을 모으는 일보다는 나눠주는 일에 더 쾌감을 느꼈던 것 같다.

全대통령은 집권말기에 퇴임 뒤 자신의 격하운동에 대해 어느 정도 예측했었다는 증언은 많다. 『여기서 죽느냐 나가서 죽느냐, 이것이 문제인데 나가서 죽는 것이 나라에 보탬이 되겠지?』라고 말하기도 했고 『권력이란 것은 부자간에도 나눠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오히려 민정당에 의해 당할지도 모른다』는 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盧泰愚 대통령 당선자 측에서는 全씨가 퇴임 후에도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것으로 보았던 것 같다. 1988년 2월 총선을 치르면 全대통령의 입김이 많이 들어가므로 이를 피하려고 4월 총선 쪽을 택했다는 것이다. 퇴임 뒤 全씨가 미국을 방문하여 닉슨 전 대통령을 만났다. 닉슨은 全씨에게 『政敵들이 당신에게 많이 짖어대기는(Bark)하겠지만 물지는(Bite) 못할 것이다』고 일러주더라는 것이다.
全씨의 한 측근은 최근에 全씨에게 『단임에는 성공했지만 평화적 정권교체에는 실패하셨습니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全씨측에서는 5공 비리 청산문제를 근본적으로 정치 보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李炳注씨가 『全씨에 대한 분노의 폭발은 해방 이후 한 번도 해소된 적이 없이 쌓이기만 하였던 독재정권에 대한 울분의 총량이 한꺼번에 터진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런 뜻에서 全씨는 朴대통령의 몫까지 당하고 있는 것이다』고 한 말은 음미해볼 만하다.

참고 있을 뿐

인간의 가장 강한 본능 중 하나가 자기합리화라고 한다. 全斗煥씨 부부가 백담사에 들어가 참회를 하고 있으리라고 믿었던 사람들은 지난 국회증언을 듣고는 『자기합리화만 하고 있다』고 화를 냈다. 그런 사람들은 1988년 10월 14일에 새세대 육영회회장 李順子씨가 여러 신문에 냈던 「회원과 국민에게 드리는 말씀」이란 글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거니와 저는 『전직 대통령 부인이니까 잘못이 있어도 눈감아 주자』라는 억지 논리와 구차한 비호를 단호히 거절합니다. 파헤치십시오. 철저하게 파헤치십시오. 선입관과 편견을 버리고 냉정하고 공정하게 접근해 간다면 결국 진실은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나타낼 것입니다」
 이런 확신과 오기에 찬 부부가, 그것도 나이 50을 넘어서 자신의 존재가치 전부를 부정하는 그런 참회를 할 수 있다고 믿었던 국민들이나 그렇게 비치도록 노력했던 일부 정치인과 언론에 오히려 문제가 있는 것이다. 김영삼 씨가 『나는 마음을 비웠다』고 한 말이나 金大中씨가 『나는 무엇이 되느냐보다는 어떻게 사느냐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말과 같은 맥락의 허구다. 정치인이 종교인 흉내를 낼 때 허구의 바벨탑은 최대치로 올라간다. 정치와 종교는 시저와 예수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할 명제이다.

全씨는 백담사에서 지나간 재임기간중의 경제성장과 민생치안에 자부심을 느끼고 6·29선언의 裏面史的 역할에 대해 자기만의 보람을 간직한 채 『내가 이렇게 고생하는 것도 국가와 친구를 위한 일이다』는 일종의 순교자적 사명감까지 맛보고 있는 것이지, 태어나지 않아야 할 정권을 태어나게 했다는 데 대한 참회는 조금도 없는 것이다. 「全斗煥씨가 참회하고 있다」는 국민들의 착각과 「지금쯤은 국민들이 이해해줄 것이다」는 全씨의 착각이 교차하여 그 시각 차를 확인한 것이 지난 국회 증언이었다.

全씨는 백담사에서, 89년 봄의 MBC 텔레비전 박경재 시사토론 프로에 나온 朴槿惠씨의 이야기(5공화국이 고 朴대통령을 섭섭하게 대우했다는 취지)를 듣고는 대단히 화를 냈다고 한다. 고 朴正熙대통령 친인척의 비리가 드러나지 않은 것은 자신이 적극적으로 그 부분의 조사를 저지했기 때문인데 『저럴 수가 있느냐』는 반응이었다는 것이다. 全씨는 『접수된 朴대통령과 그 친인척 비리에 대한 신고·진정서만 해도 한 트럭 분은 족히 되었다. 내가 물러나면 저렇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고 말했다고 한다. 全씨 측근에서는 『지금 언론에서는 朴대통령이 친인척 관리를 잘했다고 하는데, 全斗煥대통령이 지금 5공 비리 수사하듯 3공비리를 조사했다면 그 규모가 全 전 대통령의 친인척 비리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엄청났음이 드러났을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全씨는 친인척 비리의 원인을, 『못 살고 못 배운 친인척들이 주위사기꾼들에게 이용되었다』고 파악하고, 『부정을 저질렀다고 하지만 축재목적이기보다는 자신이 소유한 주식회사의 돈을 개인 돈처럼 썼다가 횡령죄로 기소된 식의 법규위반이 주된 것인데 언론에 의해 너무 과장되었다』는 시각이다. 全씨는 또 金復東씨에 대해서 『술만 마시면…』이라고 하는가 하면 『그렇다면 광업진흥공사 사장을 하지 않았어야지』라고 했다. 그러니 全씨는 참고 있는 것이지 참회하고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全 전 대통령은 지금도 盧대통령을 믿고 있다는 게 측근들의 傳言이다. 全 전 대통령은 국회증언 이후 측근에서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하시렵니까?』라고 묻자 『盧대통령과 의논해서 하지』라고 말하더란 것이다. 이 측근이, 盧대통령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듯한 투의 불평을 하자 全씨는 『그래도 어떻게 하나. 40년 친구사이인데…』라고 했다는 것이다.

全씨는 국회증언에서 盧대통령과 야당지도자에 타격을 줄 만한 폭탄선언을 하지 않았다. 全씨의 측근 가운데서는 이 폭탄선언을 무기로 삼아 盧대통령으로부터 몇 가지 보장을 받아 두자는 제의를 했으나 全씨는 『盧대통령이 신세진 사람이 수백 명이나 되는데 그럴 여유가 있겠느냐…』고 설명하면서 거절했다고도 한다. 全씨는 회고록에서 소상히 밝힐 때까지는 계속해서 비밀정보라는 폭탄을 안고 있을 것이며, 그 덕분에 기성정치판에 대해서 일정한 영향력을 유지해갈 것이다. 盧대통령부터가 全씨를 어려워하고 있으므로 여권 내에서 全씨가 완전히 무력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인생의 황금기

그러면 역사는 全씨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역사는 全斗煥씨를 다는 저울의 한 쪽에 12·12사태, 5·17쿠데타, 광주사태, 5공비리를 올려놓을 것이고 반대쪽에는 물가안정, 서울올림픽, 경제성장, 단임실천 등을 올려놓을 것이다. 저울이 어느 쪽으로 어느 각도로 기우느냐 하는 것은 보는 이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주관적 인식의 문제일 것이다.

현재로서는 全씨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强勢이지만 이런 소수의견도 있다. 李炳注씨는 『유신체제가 민주화되는 과도기의 지도자로서 全씨는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면서 『한국의 민주화 방식과 루마니아의 방식을 비교해 볼 만하다. 군사정권의 자체적인 궤도수정이 다른 나라에 그 예가 있는가』라고 말했다.

한 경제학자는 『국제적 비교를 해야 한다』고 했다. 『외국에서는 해방 뒤 한국의 경제·정치발전을 세계사의 금자탑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해방 당시 우리보다 훨씬 앞에 있었던 아르헨티나, 멕시코, 필리핀은 이제 정치·경제 모든 부문에서 우리 뒤로 처졌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국민 모두는 영웅이고, 우리 시대는 영웅시대여야 합니다. 그러나 영웅을 찾아 주위를 둘러보면 화살 맞은 시체들만 나뒹굴고 있습니다.』

 이 경제학자는 李承晩·朴正熙, 그리고 全씨를 「화살 맞고 죽은 영웅」으로 표현하고 싶은 모양인데, 全씨는 아직도 기가 죽지 않고 백담사에서 팔팔하게 살고 있다. 줄곧 출세가도를 줄달음치면서 남을 부리고, 남을 젖히며, 남을 조사하는 일에 익숙하였던 全씨로서는 이제 처음으로, 「당하는 사람들의 심정」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경험은 인간 全斗煥을 성숙시키게 될 것이다. 60을 바라보는 나이에 무엇을 배운다는 것은 복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한 스님은 『全斗煥씨야말로 지금 인생의 황금기에 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이 기사 이후 전두환 전 대통령은 김영삼의 소위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을 통하여 반란과 내란 수괴로 斷罪되어 징역 2년을 살고 나왔고 박근혜 정부 시절에는 또 가족들의 은닉 재산에 대한 검찰 수사가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기가 꺾이거나 낙망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비록 경호원의 보호를 받는 상태이지만 모임에 자주 나가고 산책도 한다. 그가 일반 시민들로부터 봉변을 당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결혼식, 개막식, 생일 잔치 등에서 여러 번 전두환 전 대통령을 보았지만 참석자들의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정치와 언론이 전하는 全斗煥과 국민들의 가슴 속에 있는 전두환은 많이 다르다. 역사적 평가도 지금보다는 많이 달라질 것이다.

그는 손에 피를 묻히면서 집권하였지만 단임실천과 직선제 개헌으로 한국의 민주주의를 발전시켜놓고 살아서 청와대를 떠났다. 백담사 은둔에 이어 감옥 생활도 하였지만, 한때 '군사 독재자'로서 증오와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그가 지금은 우리 곁에서 한 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 민주주의의 위대한 성취를 증거한다. 그는 동네북이 되었지만 잘 버티고 있다.  

[ 2016-05-29, 17:1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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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白丁     2016-05-29 오후 8:51
여러 統領 治下에 살아보니 그 이후 나왔던 여섯 명 다 합쳐도 全대통령 발꿈치에도 못 미칩디다. 아직 80代 이시니 次期 한 번 더하셔서 대책없이 망가져버린 이나라 바로 잡아주셨으면...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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