全斗煥, 궁정동 총성 속에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다!
전두환과 그의 시대(1)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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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오전8시30분쯤 합동수사본부가 된 보안사령부의 회의실로 중앙정보부차장, 검찰총장, 치안본부장 등 우리나라 정보·수사기관의 책임자들이 불려왔다. 이들은 입구에서 삼엄한 몸수색을 당했다. 全본부장은 上席에 앉았다. 『대통령각하께서 서거하셨습니다. 범인은 중앙정보부입니다』 인사말을 겸한 것 같은 全본부장의 말투는 단호하였다. 「범인은 중앙정보부」라는 말 속에는 이 전환기에서 정보부가 무력화될 것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었다.

 ① 全斗煥소장의 10·26 

孫중위는 다시 무전기를 켰다. 승용차가 우회전으로 들어가는데 무전기에서 육성이 나왔다. 보안사령관 비서실 당번이었다. 『사령부로 전화하라.』조심하는 듯한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孫중위가 전화를 걸자 비서실 당직자는 『청와대의 전경환씨가 사령관님을 찾아서 급히 전화해달라는 연락이 왔다』고 말했다.

<1990년 6월 월간조선>

만추(晩秋)의 총성

드르륵 - 드르륵 -. 주인이 집을 비워 적막감이 감도는 만추의 저녁, 청와대 본관에서 들린 총성은 남서쪽이었다. 경호실의 본관 당직과장 함수룡(咸壽龍)씨(경호처 경호과장)는 『오발사고로는 좀 심한데…』라고 생각했다. 곧 본관 입구에 놓인 경호데스크 전화로 여러 초소에서 총성 보고가 잇따라 들어오기 시작했다. 咸과장은 그날 경호과의 1계(係)규모 병력을 본관에 당직조로 배치시켜 놓고 있었다. 그 순간은 강력한 유신체제의 사령부를 지키는 책임자가 된 咸과장이었지만 유신의 심장 대통령은 저녁 6시쯤 궁정동 비밀식당으로 이동하였으므로 청와대 본관은 껍데기에 불과하였다.

咸과장은 경호실내 상황실로 총성 보고를 전달하였다. 상황실에서도 이미 여러 초소로부터 보고를 받고 있었으나 어디서 난 것인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과장이 첫 총성 보고를 접수하기 몇 분 전에 이상한 일이 있었다. 본관 뒷 초소에서 인터폰으로 경호데스크에 연락이 왔던 것이다. 『이상한 물체가 본관 청기와 위에 앉아 있습니다.』 咸과장은 1·21사태를 퍼뜩 연상했다. 북한 공수부대가 청와대를 기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경호원들을 M16소총으로 무장시켜 뛰어 나갔다. 그것은 새였다. 어둠 속에서 독수리 만한 큰 덩치가 지붕 위에 웅크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몸이 오싹해졌다. 이름 모를 이 새가 울음을 몇 번 토하더니 날아가 버렸다. 불길한 예감을 갖고 돌아오자마자 咸과장은 총성을 들은 것이었다.

텅 빈 본관, 어둠 속의 연발 총성, 이름 모를 새… 咸과장은 불길한 느낌이 확 들었다. 갑자기 청와대가 凶家 같이 느껴졌다. 총성의 출처도 확인 안된 불안·혼돈의 속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이번엔 청와대 정문을 지키는 11초소에서 전화연락이 왔다.

『비서실장이 택시를 타고 들어오는데 이상한 모습입니다.』
咸과장은 비서실장이 다른 차를 탔다면 납치된 상태일 가능성도 있다고 판단했다.
『확인한 뒤 통과시켜라!』
『와이셔츠 바람이고 신발도 짝재기로 신고 있습니다. 실장이 틀림없습니다.』
咸과장은 이 순간 『변괴가 났다』고 생각했다. 그는 무장한 경호병력을 본관 앞에 배치시키고 金桂元실장을 기다렸다. 金실장은 본관 앞에서 차를 내리더니 걸어서 올라오고 있었다. 金실장은 마중 나간 咸과장에게 『이재전 차장을 빨리 찾아라!』고 했다. 咸과장은 金실장이 朴正熙대통령과 같은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咸과장은 허둥지둥 본관으로 들어가는 金실장을 쫓아가면서 『지금 총성은 뭡니까』라고 물었다. 金실장은 거기에는 대답하지 않고 『이재전 차장을 빨리 찾아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咸과장은 『총성과 관계 있는 일입니까』하고 재차 물었으나 金실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咸과장은 북한의 남침이 시작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는 직접 李在田 경호실차장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李차장(육군 중장)은 집에 있었다.

장세동(張世東) 대령, 현장으로 뛰다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장 張世東대령은 경복궁내 단장실에서 연발총성을 들었다. 부마사태 이후 그는 營內 생활을 하고 있었다. 3층에 단장실이 있어 총성은 비교적 잘 들렸다. 10시 방향, 즉 서북쪽이었다. 소총소리인데, 한 두발이 아니었다. 수십 발, 아니 백발은 될 것 같았다. 비상대기 중이던 30경비단 전체가 총성의 출처를 확인하는 데 촉각을 곤두세웠다. 세 군데 이상에서 총성보고가 들어오면 발생 장소는 거의 정확히 계산된다. 1·21사태 때 30경비단의 前身인 30경비대대의 작전장교(대대장은 全斗煥 중령)로서 김신조(金新朝)부대의 기습에 대응한 경험이 있는 張대령의 대처는 빨랐다. 총성이 궁정동 식당 쪽이라는 판단이 섰고 그러자 대통령의 현 위치가 궁금했다. 張대령은 바로 車智澈경호실장실로 전화를 걸었다. 부관이 받았다.

『실장님 어디 계십니까.』
『경호실장께서 비서실장과 본관에서 식사하고 계십니다.』
張대령은 경호실장 있는 곳에 대통령이 있기 마련이므로 일단 안도했다. 張대령은 궁정동 식당의 성격을 짐작은 하고 있었다. 張대령은 경비단에 출동대기 명령을 내리고 발동이 걸려 있는 지프차에 몸을 던지듯 실었다. 몇 분 안 걸려 약 300m 떨어진 궁정동 식당 건물 앞에 도착하였다. 골목 저쪽 끝으로 승용차의 꽁무니 신호등이 보이는데 지금 막 궁정동 식당에서 나온 것 같았다. 張대령이 문 쪽으로 혼자서 걸어가는데 어둠 속에서 사복경비원(중앙정보부 소속)이 튀어나오더니 M16소총을 張世東대령 가슴팍에 들이댔다.

그의 전투복에는 레인저 휘장, 경호·공수휘장, 훈장 등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무슨 총 소립니까』
『비상연습…』
『비상연습 하는데 무슨 총소리가…』
『들어가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경비원은 황급히 안으로 들어가더니 철제문을 잠가버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張世東대령은 갖고있던 워키토키로 경호실의 상황실에 현장상황을 보고했다. 단장실로 돌아와서는 다시 경호실장실로 전화했다. 부관은 『본관에서 식사중이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張대령은 수경사령관 전성각(全成珏)소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지휘보고도 올렸다. 張대령은 또 바깥에 나가 있던 경호실 정동호(鄭東鎬)상황실장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주었다. 총성이 난 시간은 퇴근시간이었다. 정부요인들이 이동 중 연락이 잘 닿지 않는 취약 시간대였다. 어쨌든 張대령은 10·26 총성의 출처를 최초로 확인한 사람으로 역사에 기록되게 되었다. 그는 상부로부터 아무런 지시를 받지 못한 상황에서 30 경비단 병력을 계속해서 출동태세로 두었다. 일부 병력은 작전 차에 탄 채였다. 그 날밤 끝내 출동명령은 내려오지 않았다.

전경환(全敬煥) 계장, 다이얼 돌리다

김계원(金桂元)비서실장은 朴대통령의 屍身을 국군서울지구병원 응급실에 모셔놓고는 청와대로 돌아와 헐레벌떡 본관 2층 자신의 사무실로 올라갔다. 따라온 4∼5명의 경호원들에게 『최총리와 장관들에게 연락해서 청와대로 들어오도록 전하라』고 지시했다. 이때 한 건장한 경호원이 金실장에게 꾸벅 인사를 하더니 말했다. 『저는 전두환 사령관의 동생인 전경환입니다』 金실장은 『아, 그런가』라고 인사를 받고는 『자네 권총에서 실탄을 좀 꺼내 줘』라고 했다.

金실장은 사무실에서 자신의 권총을 찾아 갖고 가려다가 보니까 실탄이 없었던 것이다. 金실장은 실탄 여섯 발을 빌어 자신의 권총에 장전하였다. 운명의 그 날밤 본관 당직 근무조로서 이 역사적 현장에 서 있었던 全敬煥 경호계장이 맨 처음 한 일은 국군보안사령부 비서실로 전화 다이얼을 돌리는 것이었다. 26일 국군보안사령관 全斗煥소장은 사령부를 떠나지 않았다. 며칠 뒤로 일정이 잡힌 朴대통령 앞 단독 보고에 대비하여 보고서를 검토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全소장은 부마사태로 10월18일 새벽0시를 기해 부산에 비상계엄령이 발효되자 헬리콥터 편으로 부산에 내려갔었다. 부산지구 보안부대장은 권정달(權正達)대령이었다. 權대령한테 들렀다가 최석원(崔錫元)부산시장을 만나러 갔다. 마침 그때 崔시장은 金載圭정보부장을 만나고 있었다. 全소장은 시장을 만나지 못하고 나와서는 부산지역에 투입된 공수부대와 해병대의 지휘부를 방문한 뒤 올라왔다. 全소장은 부마사태의 현장감각을 얻은 직후 허화평(許和平)비서실장을 실무책임자로 하여 時局수습방안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지시했다.

許대령은 사무실 문을 안에서 걸어 잠그고 부하들을 지휘하여 며칠 밤샘을 한 끝에 「중요보고서」를 만들었다. 보고서는 보안을 위해 筆耕으로 작성되었다. 全소장은 이 중요보고를 대통령께 할 수 있는 일정을 잡기가 매우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10·26사건 직전에 보안사는 권력면에서는 역사상 가장 약한 상태에 있었다. 정보부와 경호실의 견제를 동시에 받아 그 기능이 위축돼 있었다. 정보부는 보안사의 민간활동을 금지시켜 놓은 데다가 보안사에 대한 감사까지 하고 있었다.  그때 보안사에선 대통령에게 올리는 보안사의 모든 정보보고는 일단 차지철(車智澈)경호실장의 눈을 거쳐간다고 믿고 있었다.

정보기관의 힘은 대통령을 그 기관장이 얼마나 자주 만날 수 있느냐로 결정된다. 1979년 3월에 보안사령관으로 임명된 이후 대통령에 대한 단독 보고기회를 한 번도 잡을 수 없었던 것이 10·26직전의 全소장이었다. 全소장은 시국에 관한 이 중요보고의 내용을 일반적인 것으로 위장하여 요약한 뒤 이를 미리 車실장에게 보여 안심시켰다. 그런 뒤 최광수(崔侊洙)의전수석과 박근혜(朴槿惠)씨를 통해서 10월29일(28일이라는 설도 있다)에 대통령을 면담하기로 일정을 받았다고 한다. 중요보고의 내용에는 車실장의 전횡에 대한 지적과 인사문제에 대한 건의도 포함돼 있었다고 한다. 全소장의 한 참모는 『그 보고는 그분의 자리가 걸린 일이었다』고 했다.

全斗煥 차중에서 연락받다

全斗煥소장은 10월26일 저녁 7시30분쯤 연희동 집을 나섰다. 저녁 식사를 막 끝내고 나서였다. 피아트 승용차의 뒷자리에 사복차림의 全장군은 부인 李順子씨와 함께 탔다. 앞자리에는 전속부관 손삼수(孫杉秀)중위가 타고 있었다. 보안사 서빙고 수사분실 직원들에게 갖다줄 사과 두 궤짝도 실려 있었다. 피아트 132는 육군본부앞을 지나고 있었다. 그 동안 일체 말이 없던 全소장이 불쑥 던졌다.

『손중위 권총 차고 왔나.』
『예 차고 왔습니다.』
孫중위는 갑자기 그런 말을 들으니 불안해졌다. 허리에 차고 있던 모토롤라 무전기를 다시 켰다. 孫중위는 全소장의 표정이 너무 침통하여 연희동 집을 나선 이후 무전기를 꺼 놓고 있었다. 피아트 승용차는 육군본부 정문 앞을 지나 크라운 호텔 건너편에 이르렀다. 우회전으로 들어가는데 무전기에서 육성이 나왔다. 보안사령관 비서실 당번이었다.
『사령부로 전화하라.』
조심하는 듯한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孫중위는 全소장의 지시에 따라 차를 타이어 부품상 앞에 멈추게 하였다. 급히 뛰어내려 전화를 좀 쓰자고 했더니 주인은 『안된다』고 했다. 호주머니를 뒤져 2000 원을 던져주듯 하고 수화기를 잡았다. 비서실의 당직자는 『청와대의 전경환씨가 사령관님을 찾아서 급히 전화해 달라는 연락이 왔다』고 말했다. 孫중위는 청와대경호실 경호과 경호계장 앞으로 전화를 걸어 全씨를 찾았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 전화를 받는 사람은 몹시 허둥대는 느낌이었다. 孫중위는 피아트차로 돌아와 자초지종을 全소장에게 보고했다. 全소장은 『빨리 서빙고로 가자!』했다.

저녁 8시를 조금 넘어 서빙고 보안사 분실에 도착한 全소장은 분실장 자리에 앉자마자 『상황실로 연락해서 전방상황을 물어보라』고 지시했다. 孫중위가 보안사 상황실 상황장교인 어느 대위에게 전방상황을 물었다. 『이상 없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그때 사령관비서실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노재현(盧載鉉)국방부장관이 보안사령관실로 전화를 걸어 「全장군을 찾아 육군본부 지하벙커로 출두하도록 하라」고 했다는 전갈이었다. 그 연락을 받고도 全장군은 움직이지 않았다. 군의 정보책임자로서 상황을 파악한 뒤 상관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全소장은 다시 『경호실장 전화대라!』고 했다. 당시의 실력자인 車실장에게 이런 식의 전화는 전례가 없었던 일이었다. 孫중위가 車智澈경호실장 부관 이효진 씨를 찾아 『보안사령관이 통화를 원하신다』고 했다. 李부관은 『기다려라』고 한 뒤 수화기를 놓았다. 몇 분을 기다려도 응답이 없었다. 全소장은 『왜 전화가 안 나오나』고 다그치더니 『전화 끊고 경호실 상황실장에게 전화대라』고 했다.

『보안사령관 전속부관 손삼수 중윕니다. 정동호 상황실장 계십니까.』
『안 계십니다.』
『그 안에 지금 바쁘지요.』
『예, 바쁩니다.』
『안의 일입니까, 바깥일입니까.』
『안의 일입니다.』

『경호차 붙일 수 있나.』

孫중위는 통화 내용을 全소장에게 보고했다. 全소장은 감을 잡은 듯 벌떡 일어섰다. 全장군은 서빙고분실에 도착 즉시 李順子씨를 피아트 승용차 편에 집으로 돌려보냈었다. 全장군은 공용차인 도요다 크라운 편으로 육군본부 벙커로 갔다. 밤9시를 조금 지나서였다. 육군보안부대장 변규수(卞奎秀)준장(종합8기 출신)이 全소장을 안내했다. 지하 벙커는 고위장성들이 왔다갔다  하는 등 부산했다. 복도 양쪽의 사무실 문이 열려 있었고 복도의 끝인 회의실안에는 金載圭중앙정보부장과 이희성(李熺性)육군참모차장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윤자중(尹子重)공군참모총장과 노재현(盧載鉉)국방장관도 보였다. 鄭昇和총장은 궁정동의 정보부장 집무실내 식당에서 김정섭(金正燮) 중정차장보와 식사하다가 총성을 들었다. 그는 허겁지겁 뛰쳐나온 金載圭와 함께 승용차를 타고 밤8시5분쯤 육본벙커에 도착, 盧載鉉국방장관 등 수뇌부에게 비상연락을 취했다. 車실장이 朴대통령을 시해한 것으로 믿고 있던 鄭총장은 경호실 李在田차장과 수도권의 주요 군부대장에게 전화를 걸어 車실장과의 연계여부를 파악하기도 했다. 그는 27일 새벽에 비상계엄령이 발효될 것에 대비하여 계엄군의 출동과 事後 조치에 관하여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하얀 형광등 불빛 아래서 굳은 얼굴을 하고 고독하게 앉아 있는 金載圭는 손삼수(孫杉秀)중위에게는 웬지 살벌하고 생소한 느낌을 주었다. 全斗煥소장도 나중에 『눈인사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김재규한테 섬뜻한 살기를 느꼈다』고 말했다. 회의실 옆방은 수행원 대기실이 돼 있었다. 거기서 孫중위는 金載圭 부장의 수행비서관이며 육사 선배인 박흥주(朴興柱)대령과 마주쳤다. 朴대령은 궁정동 식당에서 대통령 경호원들에게 총질을 하고 나온 지 두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그 사실을 알 턱이 없는 孫중위는 『무슨 일이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나도 모르겠어.』 

 朴대령은 긴장된 자세였고, 말하기도 귀찮다는 태도였다.
『청와대 내부에 이상이 생긴 것이 아닙니까.』
『모르겠어.』

 그러고 있는데 全소장이 복도로 나오는 것이 보였다. 卞奎秀준장과 孫중위가 全소장에게 따라붙었다. 복도를 걸어나가면서 全소장은 『내 차에 지금 경호차 붙일 수 있나』라고 했다. 卞준장은 『지금은 곤란합니다』고 했다. 『알았어! 지금 내가 나갔다는 사실을 아무한테도 알리지 않도록 하라.』 全소장은 재차 다짐을 했다. 크라운 승용차로 보안사령부를 향해 갈 때 全소장은 『전속력으로 가자!』고 재촉했다. 차 중에서 全소장은 『(허화평) 비서실장과 (정도영)보안처장, 그리고 (남웅종)대공처장을 대기시켜라』고 지시했다. 孫중위는 무전기를 통해서 陰語로 이 지시를 사령부로 전했다.

대통령과 흰 반점

10월26일 오후 5시쯤 서울지구 국군통합병원장 김병수(金秉洙)준장(공군)은 朴대통령이 삽교천 행사를 마치고 청와대로 돌아왔다는 보고를 받고 정시에 퇴근하였다. 동부 이촌동 현대아파트의 자택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난 직후 당직 군의관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비서실장이 환자를 데리고 왔는데 위독하다』는 것이었다. 金원장은 그 전에도 金桂元실장이 중환자를 데리고 온 적이 있었으므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으나 『위독하다』는 말이 마음에 걸려 병원에 나가보기로 했다. 병원에 도착하니 당직 군의관이 마중 나와 『환자가 사망했다』고 보고했다. 金원장은 『야, 이 친구야, 죽었는데 뭣 한다고 연락을 해!』라고 짜증을 부렸다. 현관에 이르니 분위기가 이상했다. 金桂元실장은 돌아가 버렸다고 하고, 경호실 직원인 듯한(실제는 중앙정보부 직원) 두 사람이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으며 군의관들은 주눅이 들어 있었다. 金원장이 그 환자가 있는 응급실로 들어가려고 해도 그 두 사람이 막는 것이었다. 『원장이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金원장은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가 私服을 군복으로 갈아입고 가운을 걸쳤다. 그리고 나서 응급실로 들어가니 막지 않았다. 환자는 병상에 누인 채였고 하얀 시트로 덮여 있었다. 얼굴도 흰 타월로 덮여 있었다. 金원장은 몇 번이나 『누구냐』 『어떻게 된 거냐』고 해도 두 사람은 무조건 모른다고 했다. 『사망진단서를 끊으려면 내가 알아야 한다』고 해도 안 통하는 것이었다. 그러는데 金桂元실장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 金원장이 『돌아가셨다』고 하니까 金실장은 『대통령 입원실에 정중하게 모셔라』고 했다. 金원장은 화가 나서 『실장님 지금 무슨 말씀하시는 겁니까』라고 했더니 金실장은 우물우물하다가 전화를 끊었다. 잠시 뒤 金실장이 또 전화를 걸었다. 『아직도 응급실에 있다』는 얘기를 듣더니 『그러면 청와대 내 병실로 모실까』라고 했다. 金 원장은 또 『그 무슨 말씀을…』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끊고 나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감시자들은 그림자처럼 金원장을 따라다녔다. 金원장이 『누구인지 알아야겠다』고 조르니까 한 사람이 환자의 얼굴을 덮은 타월을 반쯤 들어 보였다. 金원장은 그래도 누구인지 짐작이 가지를 않았다. 金원장은 『가슴에 총상이라니 자세히 보자』면서 시트를 제끼고 와이셔츠를 헤쳐 배를 드러내 보았다. 배에 흰 반점이 퍼져 있는 게 아닌가. 눈에 익은 반점들이었다. 金원장은 그 전에 청와대 의무관으로 있었다. 朴대통령을 수행하여 진해 별장으로 여름 휴가를 간 적이 있었다. 수영복을 입은 朴대통령은 金씨를 보더니 『야 이 친구야 이것 좀 고쳐주지 않을래?』라고 하면서 배를 가리켰다. 희끗희끗한 반점이 곰팡이 피듯 퍼져 있었다. 이 반점은 곰팡이의 일종인 티니아 벨시코라(Tinea Velsicora)균인데, 金씨는 별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대통령의 배에 약을 발라주기도 했으나 죽을 때까지 없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뎃?』『예스』

죽어 있는 환자가 대통령이란 것을 확인하는 순간 金원장은 『무아지경이 돼 버렸다』고 했다. 『그 순간 그저 멍해지고 나의 존재는 없어졌어요. 한 2분간 정신 나간 상태로 있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생각했습니다. 우선 이 사실을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金桂元실장은 돌아가 버리고, 내 주위에는 감시자가 붙어 있다. 외부로의 통로는 보안사뿐이다…』

감시자 두 사람은 金원장을 졸졸 따라다니며 외부로 전화를 못하게 했다. 金원장은 집무실 내 응접실에 가 앉았다. 탁자에는 세 대의 전화가 놓여 있었다. 일반전화, 청와대 직통전화, 그리고 보안사 경비전화. 누가 전화를 걸어주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보안사 경비전화가 울렸다. 수화기를 드니 보안사 참모장 우국일(禹國一)준장이었다. 禹준장은 金원장 집무실에 자주 놀러와 구조를 잘 알고 있었다. 禹준장은 『예스, 노만 하라』고 속삭이듯 말했다.

『운디드(Wounded)?』
『노우.』
『뎃(Dead)?』
『예스』
『車실장입니까?』
『노우.』
『코드 원입니까?』
『예스.』


전화가 끊겼다. 옆에서 지켜 서 있던 한 감시자(나중에 중앙정보부 궁정동 사무실 운전원 柳成玉으로 밝혀짐)가 『어디서 온 전화냐』고 물었으나 적당히 얼버무렸다. 禹國一씨(국일자문서비스 대표 역임)는 『그 전에 보안사 직원을 병원으로 보냈는데 屍身이나 원장에게 접근이 되지 않는다는 보고를 받았다. 비서실장이 데려 온 환자라고 해서 나는 대통령이라는 直感을 갖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은 것이다. 대통령 시신이 다른 병원으로 갔으면 신원확인이 어려웠을 것이고 그 뒤 사태가 다른 방향으로 갔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全斗煥사령관의 보안사가 정부 내 정보기관 중 대통령의 죽음을 최초로 확인한 것은 全장군과 보안사가 혼돈 속의 그 뒤 상황을 주도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하게 된다. 金원장은 두 감시자를 안심시키기 위해 비상소집된 군의관들 중 필수요원만 남기고 퇴근시켰다. 그리고는 간호부장을 불렀다. 『대통령이 돌아가셨으니 대통령실로 정중히 모셔라』고 지시했다. 다른 직원들에게는 『대통령의 지시이니 저 屍身을 대통령실로 모셔라』고 했다. 金원장은 간호부장과 함께 응급실에 있던 대통령의 屍身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대통령의 눈도 감겨드렸다. 잠자듯 평온한 표정이었다. 오른쪽 귀 쪽에서 들어간 권총 알은 왼쪽 광대뼈까지 와서 살 속에 박혀 있었다. 탄환이 만져졌다. 머리에서는 출혈이 거의 없었다. 얼굴은 창백했으나 붓지는 않았다. 얼굴을 덮은 타월은 피가 많이 묻어 있었다. 金원장이 『이분 외투를 달라』고 했더니 감시자는 『가져오지 못했다』고 했다. 넥타이는 맨 채였다. 등뒤로 손을 넣으니 가슴을 꿰뚫은 총탄으로 출혈이 많았던 듯 끈끈한 피가 만져졌다. 金원장은 대통령의 사망 시간을 저녁7시55분 정도로 일단 추정하였다. 즉, 金桂元 씨가 대통령을 차에 태워 병원으로 옮기던 도중에 사망했다는 것이다. 金원장은 『허파를 관통한 제1탄은 치명상이 아니었고 머리의 제2탄이 치명상이었다. 제1탄만 맞은 상태에서 병원으로 옮겨졌다면 살아났을 것이다』고 했다.


그 자리는 대통령의 선택

10월26일 저녁 궁정동 식당의 마지막 만찬은 순전히 朴正熙대통령의 선택이었다. 朴대통령은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 행사를 마치고 오후 2시30분쯤 청와대로 돌아왔다. 본관1층 집무실까지 따라왔던 이들은 金桂元비서실장, 車智澈경호실장, 千炳得수행과장이었다. 朴대통령은 집무실로 들어가면서 대단히 만족한 표정으로 이들에게 『수고했으니 쉬어라』는 취지의 이야기를 했다. 오전에 지방출장 행사가 있던 날은 오후에는 청와대 내에 머무는 것이 상례이기도 했었다. 車실장도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와서 부하들에게 『수고했어. 쉬어!』라고 했다.

오후 4시, 李在田 경호실차장은 車智澈실장실에서 가벼운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이때 인터폰이 울렸다. 車실장은 통화가 끝나자 부관에게 『정보부장 대라!』고 했다. 金載圭부장한테 車실장은 『오후6시에 각하와 만찬이 있다』고 말했다. 그 무렵 金桂元실장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유정회 최영희(崔榮喜)총무를 맞아 잡담하고 있었다. 군 선배인 崔총무는 『저녁식사나 같이 하자』고 했다. 金실장은 『조금 더 기다려 보시죠. 각하께서 찾으실지 모르니까요』라고 했다. 오후 4시30분쯤 車실장한테서 인터폰이 걸려 왔다. 통화가 끝나자 金실장은 웃으면서 『이래서 제가 약속을 못합니다』고 했다.

車실장은 천병득(千炳得)과장 등을 불러 경호준비를 시키면서 『오늘은 쉬시지…』라고 좀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이날 朴대통령은 모처럼 평온하고 풍요해 보이는 추수기의 농촌나들이를 하고 와서 최상의 기분이었다. 그는 그 좋은 기분을 연장할 방법을 청와대 안에서는 찾을 수가 없었다. 오후 6시에 2층의 내실로 퇴근하면 거기에는 적막한 홀아비의 침실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오후 4∼6시 사이 朴대통령은 청와대에서의 마지막 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특별한 외부손님을 맞지 않았고, 집무실 안에만 있었다. 오후5시를 조금 넘어 朴대통령은 임방현(林芳鉉)청와대 대변인에게 인터폰을 걸었다.

『연두기자 회견은 어떻게 돼 가나?』
『이미 착수했습니다.』
『참 잘 했어, 아주 잘 했어.』
朴대통령은 기분이 좋아 있었다. 오후 6시 조금 전에 車실장은 朴대통령을 모시러 가려고 대통령 부속실로 올라 왔다. 부속실직원 이광형(李光炯)씨는 그때 비로소 만찬 약속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朴대통령은 집무실을 나서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군, 나 경호실장하고 저녁 먹고 올 테니 서재 문 잠그고 퇴근해. 근혜를 찾았는데 어디서 손님을 만나고 있는지 연락이 닿지 않아. 늦을 테니 먼저 식사하라고 전해주게.』 본관 앞에는 비공식행사 때 쓰는 크라운 슈퍼 살롱이 시동을 건 채 대기하고 있었다. 본관 당직책임자 성수룡(咸壽龍) 경호과장이 승용차의 문을 열고 있다가 朴대통령을 배웅하였다. 車실장은 朴대통령 옆자리에 탔다. 咸과장은 그 열 시간 뒤  시체가 돼 돌아오는 대통령을 마중하게 된다.

보안사는 車실장 의심

밤9시를 조금 넘어서 全소장이 육본에서 보안사령부에 도착했다. 全소장은 孫杉秀중위에게 경호병들을 대기시키도록 지시하고 2층 집무실로 올라갔다. 당직사령을 맡고 있던 이상연(李相淵)감찰실장(안기부장 역임)과 禹國一참모장이 따라 들어왔다. 부마사태 이후 보안사는 비상근무 중이었으므로 처장급 이상의 다른 간부들도 신속하게 소집되었다. 禹준장은 『코드 원이 서거하신 것 같다』고 보고했다. 그는 金秉洙병원장과 통화한 내용을 설명했다. 全敬煥계장이 보안사 비서실로 전화를 걸어 『全斗煥보안사령관을 경호실로 오시도록 하라』고 여러 번 전화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禹준장은 『경호실로 가시지 말고 육군본부로 가시는 게 좋겠다』고 했다.

禹준장도 당시의 여러 고위층 인사들과 같이 車실장이 백색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판단을 했다고 한다. 『全사령관이 車실장과 통화라도 하게 되면 인간관계 때문에 어떤 영향을 받을까 우려돼 전화도 걸지 않도록 했습니다. 全사령관도 그 시점에서는 車를 의심했을 것입니다.』 全소장은 사령관실에서 군작업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는 다시 육본벙커로 출발했다. 크라운 승용차가 경복궁 앞 동십자각 부근을 지날 때 全소장은 거울을 보더니 『야, 경호병이 안 탔잖아』라고 했다. 孫중위는 全소장의 지시를 받고 유도와 사격에 능한 경호병 4명을 소집, 대기시켰었다. 경호차 운전병에게 『사령관 차를 절대로 놓치지 말라』고 다짐을 해두었었다. 사령관 차가 출발하자 경호차 운전병은 서둘다가 경호병들을 태우지도 않고 따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孫중위는 사령관 차에서 내려 뛰어가 경호차 운전사에게 『빨리 경호병들을 태워서 오라』고 신경질을 냈다. 육본에 거의 다 왔을 때 경호병을 태운 경호차가 따라 붙었다.

마비된 경호실 지휘부

대통령경호실의 李在田차장은 연락을 받고 곧바로 청와대로 들어왔다. 아마도 밤8시30분 전후였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집무실 바로 옆에 붙은 실장 부속실의 부관이 車실장의 권총을 넣어 다니는 작은 가죽 가방을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빨리 실장을 찾으라』고 했다. 부관은 어디로 전화를 걸어보더니 『장소를 옮겼다고 한다』는 것이었다. 경호실 당직사령 강태춘(姜泰春)정보처장을 불러 물어도 상황을 모르는 것 같았다고 한다. 이런 혼돈 상태에서 金桂元 비서실장은 李차장에게 『지금 車실장이 지휘를 할 수 없게 되었으니 당신이 경호실을 장악하고 경거망동하지 않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咸과장은 李차장으로부터 『지시 있을 때까지 정상근무하라』는 이야기를 듣고도 답답하여 경호과 병력 중 쉬고 있던 다른 1계(係)병력 15명까지 무장시켜 30여 명을 본관 주위에 배치시켰다. 張世東대령이 『궁정동 安家에서 총성』이라고 경호실 상황실에 보고했지만 상황실 근무자들은 궁정동 안가의 성격과 대통령이 거기에 갔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었으므로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날 청와대 직원들 중 대통령이 궁정동에 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이는 車실장 부관들과 千炳得수행과장뿐이었을 것이다. 밤9시를 조금 넘어서 이재전 경호실 차장에게 육군본부 지하벙커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鄭昇和총장이었다. 그 통화 내용은 대강 이러했다고 鄭씨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썼다.
『당신 지금 어디서 전화를 받고 있소?』
『집무실입니다.』
『청와대 안에 아무 이상이 없소?』
『이상이 있는 것 같기도 한데…무슨 일입니까?』
『이 장군, 청와대 내에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해서 부득이 수경사로 하여금 청와대를 포위하도록 명령했소. 이 장군과 전성각 수경사령관은 동기생이니까 직접 연락해서 충돌이 없도록 하시오. 내 명령 이외에 움직이지 말고 특히 외부와 접촉하지 말도록…』
鄭총장은 朴대통령의 죽음이 車실장에 의한 쿠데타 기도가 아닌가 의심했었는데 李차장과 통화해 본 느낌으로는 경호실의 조직적인 행동은 아니라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李차장은 곧 전성각(全成珏)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수경사의 병력 배치 상황을 물었다. 李차장은 이날 군의 선배인 비서실장과 육군참모총장으로부터 똑같이 『경호실 병력을 움직이지 말라』는 지시를 받아두었던 것이다. 이것이 그날 李차장의 행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날도 車智澈경호실장의 부관 이석우(李錫雨)씨는 車실장이 朴대통령을 수행하기 위해 사무실을 떠날 때 권총을 건네주었었다. 그러나 車실장은 『갖고 있으라』면서 되돌려 주었다. 李부관은 그 권총을 도시락상자 같은 가죽가방에 집어넣었다. 李부관은 그 전에도 車실장이 궁정동 식당으로 갈 때는 늘 권총을 건넸으나 車실장은 되돌려 주기만 했다. 李부관은 그래도 『대통령을 모시는데 권총이 없으면 안된다』는 생각에서 계속해서 권총을 건했었다. 뒤에 남양주시 시장을 역임한 李씨는 『그 전에는 車실장이 권총을 차고 갔었는데 79년 중반부터 차고 가지 않게 되었다. 대통령한테서 말을 들은 것 같았다』고 했다. 다른 경호실 관계자는 『설사 대통령이 그런 지시를 했다고 하더라도 경호실장은 권총을 숨겨서라도 갖고 다녔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李錫雨씨는, 車실장이 권총을 차고 갔었더라도 그날의 大勢에는 영향이 없었을 것이라는 견해다. 『술자리에서는 웃옷을 벗었을 것이고, 그때는 車실장이 권총을 차고 있음이 알려졌을 것이며, 金載圭는 다른 방법을 강구했을 것입니다.』

『궁정동을 장악합시다.』

그날밤 車智澈실장 집무실을 지키고 있던 李錫雨부관은 궁정동의 총성을 듣지는 못했었다. 『효자동 근방에서 총성이 난 것 같다』는 보고는 곧 들어왔다. 그날 경호실 당직사령인 강태춘 처장이 李부관에게 『실장의 거취가 확인되지 않느냐』고 물었다. 李부관은 궁정동 식당으로 전화를 걸었으나 아무도 받지 않았다. 그의 복무수칙은 車실장이 궁정동으로 갔을 때는 그쪽에서 먼저 전화를 걸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었다. 李부관은 車실장 신변에 이상이 생겼다는 직감을 갖게 되었다. 경호실장, 경호처장, 경호부처장 등 경호실의 핵심간부 3명이 한꺼번에 無力化되었기 때문에 대통령 경호실의 지휘부는 일순간 마비되었다. 李在田차장이 실장을 대행하여야 했지만 그는 궁정동 식당의 존재 자체도 모르고 있을 만큼 경호실의 고유업무에는 어두웠다. 다른 처장들도 자신의 업무 이외에는 관심도 지식도 권한도 없어 비상시에 마비된 지휘부를 대신할 사람이 없었다. 이런 경우를 예상한 계획도 훈련도 돼 있지 않았다.

朴대통령의 근접경호는 경호처 수행과 소관 임무였다. 천병득(千炳得)수행과장은 車실장이 대통령을 모시고 궁정동으로 떠난 뒤 퇴근했다. 시내에서 친구와 식사를 하고 있다가 저녁 10시쯤 집으로 전화를 했더니 그의 아내가 『총성이 들렸고 경호실에서 찾는 전화가 오고 있다』고 하는 것이었다. 千과장은 청와대 근방의 경호원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千과장은 車실장이 간 곳을 알기 때문에 궁정동 식당으로 갔다. 불이 꺼져 있었다. 『(정인형)처장님이 여기 계십니까?』 안에서 경비원이 당황한 말투로 『이동하셨습니다』고 했다. 千과장도 직감적으로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그는 청와대로 들어가 경호실장실에 들렀다. 부관들도 車실장의 행방을 모른 채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차장실에 갔더니 李在田중장이 있었다. 千과장은 『우리 병력을 보내 궁정동을 장악합시다!』고 했다고 한다. 『뭘 머뭇거리십니까』하고 재촉을 했더니 李차장은 『당신은 나가서 정위치 하고 있으시오!』라고 소리쳤다.

정보부족의 청와대

金桂元 비서실장의 보좌관은 대한일보 정치부기자 출신인 권숙정(權肅正. 천안공전 학장 역임)였다. 그는 저녁6시에 퇴근하여 친구들과 함께 남산 헬스 클럽에 나가 운동을 한 뒤 저녁식사를 하고 밤10시35분쯤 성북동 집에 도착했다. 초인종을 누르니 아내가 뛰쳐나와 『청와대에서 5분 간격으로 당신을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고 하는 것이었다. 權보좌관은 金실장이 찾는 줄 알고 『어차피 늦었으니 숨 좀 돌리고 보자』면서 침실에 들어와 옷을 벗는데 청와대에서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의전비서실 행정관이 『빨리 나오셔야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실장은 어디 계십니까?』
『국방부로 가셨습니다.』
權보좌관은 순간적으로 휴전선에서 비상한 사태가 발생했다고 생각했다. 權보좌관이 청와대에 도착한 것은 10시48분쯤이었다. 비서실장실에 들어갔더니 서석준(徐錫俊)경제수석, 高建행정수석, 崔侊洙의전수석 등 수석비서관들이 모여 있는데 분위기가 납덩이처럼 침통하였다. 權보좌관은 늦게 도착한 데다가 분위기마저 무거워 입도 못 떼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한 10분쯤 지나니 감이 잡히는 것이었다. 수석비서관들도 확실한 정보를 얻지 못한 채 추측들을 하고 있었다. 權府의 핵심인물인 유혁인(柳赫仁)정무수석은 金실장과 함께 국방부로 갔으므로 실장실에 모인 수석들도 1차적인 정보를 접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단 대통령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다는 쪽으로 추리가 진행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車실장과 金載圭부장이 언쟁을 벌이다가 사고가 난 것이 아닌가란 데까지 발전하였다.

車실장이 성격이 훨씬 난폭하니까 車실장이 金부장을 쏜다는 것이 대통령을 다치게 한 게 아닌가 하는 이야기도 나왔다. 밤11시30분쯤 되자 대통령이 다치셨다면 어디서 치료를 받고 있을 것이니 상황을 점검해 보자고 누군가가 이야기했다. 徐경제수석은 『金실장이 대통령 각하 곁에 있지 않고 국방부로 갔다면 다 끝난 것 아닌가』라고 분석했다. 그때부터 최악의 상황이 거론되고 車실장을 욕하는 말들이 자주 튀어나왔다.

밤12시에도 청와대 안에서는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朴대통령이 숨을 거둔 지 다섯 시간도 지나지 않아 권력의 중심부는 이미 국방부 쪽으로 이동해 있었던 것이다. 밤12시20분쯤 金桂元실장이 국방부에서 청와대로 돌아와 수석비서관 회의를 소집했다. 이 자리에서 비로소 金실장은 대통령의 죽음을 알렸다. 李在田 당시 차장은 『나는 이때 처음으로 대통령이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았다. 그 전에는 대통령이 토사곽란으로 입원한 줄 알았다』고 했다.

지리멸렬한 행정부의 대응

朴대통령 부속실 부관 李光炯씨는 朴대통령이 궁정동으로 떠난 직후(오후 6시쯤) 집무실 출입문을 잠그고 부속실의 당직실로 물러났다. 복도에서 朴槿惠씨를 만나 『대통령께서 만찬을 나가시면서 오늘은 늦겠으니 먼저 식사하시라고 합디다』고 말을 전했다. 李씨도 7시40분의 총성을 듣지 못했다. 본관 경호 데스크로부터 『총소리가 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단순 오발사고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심상치 않은 일들이 잇따라 일어나고 있었다. 金桂元실장이 와이셔츠 바람으로 들어왔다가 崔圭夏총리와 함께 황급히 나갔다는 얘기가 들리더니 정인형(鄭仁炯)경호처장의 차가 경부고속도로 양재톨게이트 근방을 달리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들어오기도 했다.

李씨는 본관 2층의 비서실장실로 갔더니 수석비서관들이 모여 있었다. 崔侊洙의전수석이 『큰 영애한테는 보고 안 드렸지. 만약 부르시면 각하께서 늦으신다고 먼저 주무시라고 말씀드려』라고 하는 것이었다. 누구보다도 대통령을 가까이서 모시는 부속실 직원으로서 李씨는 자정 무렵까지도 상황을 파악할 수가 없었고, 다만 대통령 신변에 이상이 생겼다는 감만 잡고는 별의별 상상을 다하고 있었다. 鄭昇和총장·全斗煥보안사령관으로 대표되는 군 조직의 신속한 대응과는 대조적으로 崔총리를 정점으로 하는 행정조직과 정보부·경호실의 대응은 지리멸렬이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崔총리가 밤 9시쯤 金桂元실장으로부터 접수한 「金부장 총에 朴대통령이 서거했다」는 정보가 다른 장관이나 기관에 전혀 전파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김치열(金致烈)법무, 노재현(盧載鉉)국방장관 등 몇 사람은 「朴대통령의 서거」 정도는 알고 있었으나 밤늦게 급히 연락을 받고 국방부로 온 다른 장관들은 사망사실도 몰랐다. 사망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도 그 사실을 전파하지 않고 독점하고 있었다. 상황이 너무 유동적이라서 입 조심을 해 가며 서로 눈치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혼란 상황에서는 정확한 정보를 가져야 자신 있게 행동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데 우리의 문민행정조직은 그 최상층부에서 이미 기능이 마비돼 있었다. 군 조직의 신속한 대응과 문민조직의 지리멸렬상은 5·16때 이어 10·26때도 되풀이되었고 이것은 그 뒤의 사태발전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청와대로부터 연락을 받고 밤9시 직전에 비서실장실로 달려 온 崔圭夏 총리에게 金桂元실장은 『車실장과 金부장이 싸우다가 金부장 총에 맞아 각하가 돌아가셨습니다』고 보고했다.  『崔총리는 의자에 앉아 있다가 상체가 축 늘어지더니 막 흐느끼더라』는 것이 金씨의 증언이다. 밤9시쯤 육본벙커에 가 있던 金載圭는 金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崔총리를 모시고 육본으로 오라』고 했다. 崔총리는 잠시 주저하다가 『갑시다』면서 일어섰다. 崔총리와 金실장은 金載圭가 군을 장악했다는 판단을 했고, 바로 그 군의 지휘부로 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문민관료 출신인 崔총리는 이런 비상사태 하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에 대해서 준비도 훈련도 돼 있지 않았다. 崔총리의 위축된 심리상태를, 金桂元씨는 「판단력의 不在와 공포감」이라고 설명한 적이 있었다. 10·26사건의 초장에 벌써 崔총리는 심리적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이런 심리상태는 이날 밤과 그 뒤의 전환기에도 지속된다.

장관들의 눈치보기

金실장은 그 순간 국가원수가 된 것이나 다름없는 崔총리에게 경호팀을 붙일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당시 경호실의 한 간부는 『대통령 경호실은 인간 朴正熙의 생명을 보호하는 임무 외에도 국가통치권의 보호라는 임무를 갖고 있었다. 朴대통령의 有故가 확인된 즉시 경호실은 崔총리경호로 전환했어야 했다. 崔총리가 아무런 보호 없이 육본으로 간 것은 우리 경호실의 수치였다』고 지적했다. 崔총리 일행은 밤9시30분쯤 육군본부 벙커에 도착하여 金載圭와 함께 事後대책을 논의하다가 비상국무회의를 소집, 계엄령을 펴기로 하고 국방부장관실로 옮겨갔다.

총무처 차관으로 그때 비상국무회의 소집의 연락책임자였던 최택원(崔澤元)씨는 이렇게 말했다. 『국무회의가 열린 것은 26일 밤 11시50분께였다. 국방부 장관실에 있던 최총리는 상황실에 나타나 정좌하자, 「국무위원이 아닌 분은 나가 달라」고 했다. 나는 총무처장관 심의환 씨가 그 며칠 전 별세하여 그를 대신해 참석, 시종일관 그 국무회의를 지켜볼 수 있었다. 이 비상국무회의에 관해서 지금까지 씌여진 거의 모든 기사는 국무회의 벽두에 최총리가 「대통령께서 유고이십니다」고 했고, 盧국방이 비상계엄령 선포 안건을 상정했으며, 다른 국무위원들이 「유고의 이유를 밝혀라!」고 들고 일어났다고 되어 있다.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崔총리의 말을 기억하고 있다. 그는 「지금 국가안위에 관한 중대한 사태가 발생하였으므로 국무회의를 소집하게 되었습니다」고 했다. 서거, 유고 등의 말은 하지 않았다. 뒤이어 盧국방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 선포를 제안했다. 두 사람 모두 「대통령 유고」란 표현을 쓰지 않았고 「중대 사태」라고만 했다. 그래서 그때까지도 나는 대통령이 弑害된 것을 모르고 있었다. 국무위원들이 유고의 사유를 밝히라고 대들었다는 것도 사실과 다르다. 그때 국무위원들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고갔는지 나는 잘 알고 있으나 여기에 밝힐 뜻은 없다. 다만, 내가 비애를 느꼈다는 것을 말해 두고 싶다. 인간의 약점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김성진 문공부장관이 停會를 건의했다. 10분간의 정회가 30분, 40분간 길어졌다. 새벽 1시가 넘어 崔총리, 申부총리 등 일행이 다시 들어와 국무회의가 속개되었다. 박대통령의 유해가 안치된 국군 서울지구병원에 갔다 온 것을 알았다. 최총리는 「대통령께서 서거하셨고, 우리가 가서 확인했다」고 말했다. 일부 기록에는 「대통령께서 피격 당해 서거하셨다」고 최총리가 말한 것으로 적혀 잇는데 피격이란 말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사태를 잘 모르는 국무위원들 중에는 그때까지도 대통령이 병사한 것으로 알고 있었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김재규가 범인이란 사실도, 그가 이미 체포당한 사실도 국무회의에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국가의 위기 때 나는 비애를 느꼈다.』

金載圭를 정보부 정동분실로

盧국방과 鄭총장은 밤11시쯤 국방장관보좌관실에서 金桂元비서실장으로부터 대통령 시해범은 金載圭라는 이야기를 처음으로 듣게 된다. 그 이후의 조치에 대해서 鄭총장은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헌병감으로 하여금 체포토록 한 뒤 보안사령부로 인계시킬 계획이었다. 범인을 보안사로 인계시키는 것은 보안사령관이 헌병감보다 계급이 위고, 보안사는 육해공군에 병력이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계엄이 선포되면 보안사령부를 합동수사본부로 삼으려 했기에 거기로 김재규를 인계하려 했던 것이다. 나는 김실장의 귀띔을 듣고 곧 조약래 보좌관 책상 앞에서 전화로 김진기 헌병감을 찾았으나 연락이 되지 않았다. 나는 헌병감을 육본벙커로 오도록 전하라고 한 뒤 먼저 벙커로 내려갔다. 곧 벙커로 온 김진기 준장에게 나는 체포방법과 신병처리 지침을 시달했다. 헌병감이 명령을 받고 준비하러 나가자 곧이어 전두환 소장이 총장실에 도착했다.

『부르셨습니까?』
나는 이희성 참모차장과 이야기를 하다가 중단하고 全소장에게 김계원 실장으로부터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提報를 받은 사실과 헌병감을 시켜 체포토록 한 뒤 범인을 보안사령관에게 인계시킬 계획을 설명하고 보안사령관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하겠음을 미리 알려주었다. 곧 헌병감과 협조하여 범인을 인수한 뒤 보안사가 가진 시내의 안가에 수용한 뒤 유능한 수사관을 붙여서 수사에 차질이 없도록 하고 그러나 흥분하여 범인을 마구 다루지 않도록 주의하도록 당부했다. >

헌병과 보안사 수사관이 합동작전으로 붙든 金載圭를 보안사 수사팀이 호송하는 과정에서 해프닝이 있었다. 金載圭가 탄 차보다 경호차가 너무 빨리 달린 것이 원인이었다. 뒷차 운전병은 보안사 정동분실에 가본 적이 없었다. 그는 金載圭를 태운 차를 보안사 정동분실 바로 옆에 있는 정보부 정동분실 앞에 세웠다. 조선일보 뒷편 보안사 정동분실에 먼저 도착한 경호차 속에서 이 장면을 보고 기겁을 한 보안사 요원들이 사태를 수습했다.

鄭昇和씨는 이렇게 적고 있다.

<새벽 2시쯤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이 국방부에 있는 나를 찾아와 쪽지에 적은 것을 보여주었다.
『김재규가 안가로 호송 중 차안에서 수사관에게 횡설수설한 걸 보아 범인이 틀림없습니다.』
종이 쪽지엔 김재규가 했다는 말이 이렇게 적혀 있었다.
『세상은 바뀌었다. 좋은 세상이 될 것이다. 박대통령이 너무 심했어.』
전두환 보안사령관도 김재규가 대통령 저격 범인이라는 데 크게 놀라고 있었다.
『세상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범인이라니…』
전두환 소장은 좀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어 그는 김재규의 수용상태와 앞으로의 수사계획을 보고했다.


3헌병대 보안사에 배속

全斗煥소장은 보안사에 다시 육군본부벙커로 갔다가 崔총리·盧載鉉 국방장관과 金載圭부장 등이 국방부로 옮긴 것을 알고 따라 갔었다. 그는 직속상관인 盧국방장관으로부터도 金載圭를 체포하라는 지시를 받았던 것 같다. 全소장은 비상국무회의 관계로 장관들과 고위장성들이 뒤섞여 부산하게 움직이는 국방부장관실을 피해 국방부 보안부대장실로 옮겼다. 이 사무실은 장관실과 같은 층에 있었으나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할 수 있었다. 여기서 그는 金載圭체포·호송 작전을 지휘했던 것이다. 새벽2시를 넘어 全소장은 지휘부를 국방부 보안부대장실에서 다시 육군본부내의 별개 건물인 육군본부 보안부대장실로 옮겼다. 김복동(金復東)경호실작전차장보는 작업복 차림으로 여기로 왔다. 한 10분 全소장을 만나 상황을 물어보고 나갔다. 목격자에 따르면 金소장은 술을 마신 듯 얼굴이 상기돼 있더라고 한다.

우국일(禹國一)참모장은 새벽 1시쯤 全斗煥사령관에게 청와대 경호실 직속인 33헌병대 병력을 보안사가 배속 받아 궁정동 식당을 접수하고 보안사의 자체 경비에 쓸 것을 건의했다. 全사령관은 鄭昇和총장에게서 허락을 받았다. 이 33헌병대는 12·12사태 때는 鄭총장의 공관을 기습하게 된다. 27일 새벽2시 조금 지나 보안사 수사관 5명이 33헌병대원 20명의 호위 아래 궁정동 안가로 진입, 중정경비원들을 무장해제 시키고 현장을 접수하였다. 새벽4시를 조금 넘어 全斗煥소장은 孫杉秀중위에게 『집으로 전화 걸어 내가 이상 없다고 이야기하고 새벽 라디오 뉴스를 들으라고 전하라』고 했다. 孫중위가 연희동 집으로 전화를 하니 당번병이 받았다. 그는 『이 시간에 어떻게 깨우느냐』고 했다. 孫중위가 『그래도 괜찮다』고 하여 李順子씨와 통화가 되었다. 李씨는 『예, 그랬어요. 다행이네요』라고 했다.

『정보부 기능을 정지시켜라』

全斗煥소장은 10·26사건 이전부터 비상사태 하에서 보안사의 역할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1979년 여름 全소장은 을지연습을 기하여 참모들에게 계엄령 하에서 보안사가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연구하여 案을 올리도록 지시했다. 이때 기안된 것이 합동수사본부의 조직에 관한 내용이었다고 한다. 계엄 하에서 보안사가 중심이 돼 합수본부를 조직하고, 이 기구가 다른 정보·수사기관까지 지휘하도록 한 것이었다.

10·26뒤에 나타난 합동수사본부의 운영방침은 全장군의 머리 속에 그 이전부터 이미 정리돼 있었던 셈이다. 全소장은 10·26사건 직전에도 어느 참모에게 『긴급 사태 하에서 정부와 보안사가 취할 수 있는 조치에 대해 연구, 보고하라』고 지시한 바 있었다. 보고를 받은 全장군은 『취할 수 있는 긴급조치가 꽤 많군』이라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합동수사본부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79년10월18일 부산에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 비상계엄령이 내려지면서였다. 부산지역계엄사에 합동수사본부가 생겼으나 정보부 부산분실에 눌려 제대로 활동을 하지 못했다. 27일 아침5시쯤 全소장은 국군보안사령부로 돌아왔다. 새벽4시를 기해 발효된 비상계엄령에 의해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이 된 全소장은 우국일(禹國一)참모장에게 『정보부, 치안본부, 검찰 책임자를 아침 7시30분까지 소집하라』고 지시했다. 全본부장은 또 계엄하의 포고령 기안에 대한 지침을 주었다. 全본부장은 『중앙정보부의 기능을 정지시키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또 중앙정보부의 국장급 이상 간부들을 합수본부로 출두시켜 조사할 것을 지시했다.

27일 오전에 발표된 계엄공고 제5호는 全사령관의 지침과 보안사의 복안에 따라서 합동수사본부의 업무한계를 「모든 정보수사기관(검찰, 군검찰, 중앙정보부, 경찰, 헌병, 보안)의 업무조정감독」이라고 규정함으로써 권력 공백기에 중심을 잡기 시작했다. 全소장은 참모들에게 긴급지시들을 던져 놓은 뒤 궁정동 식당으로 갔다. 참극이 벌어진 현장에서는 현장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朴대통령의 시신을 빼고는 차지철(車智澈)·정인형(鄭仁炯)·안재송(安載松)·김용태(金容太)·김용섭(金鏞燮)씨의 屍身이 최초 상태대로 있었다.

방바닥은 피가 흥건하였고 문갑, 텔레비전 등이 뒤집혀져 있었다. 車실장은 문갑을 잡고 피하다 총격을 당했는데, 그 문갑 옆에 뻗어 있었다. 全소장은 돌아오는 길에 孫杉秀중위에게 『경호병력을 배치할 걸 그랬다』고 했다. 全본부장은 이  밤 자신의 경호에 신경을 많이 썼다. 이  밤 全본부장은 아마도 지뢰밭을 걷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사람을 만나도 이 사람이 누구편일까 하는 생각을 먼저 해야 할 형편이었다. 金載圭가 범인으로 밝혀졌지만 보안사령관 출신인 그와 연계된 조직이  보안사 안에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27일 오전8시30분쯤 합동수사본부가 된 보안사령부의 회의실로 중앙정보부차장, 검찰총장, 치안본부장 등 우리나라 정보·수사기관의 책임자들이 불려왔다. 이들은 입구에서 삼엄한 몸수색을 당했다. 全본부장은 上席에 앉았다. 『대통령각하께서 서거하셨습니다. 범인은 중앙정보부입니다』 인사말을 겸한 것 같은 全본부장의 말투는 단호하였다. 「범인은 중앙정보부」라는 말 속에는 이 전환기에서 정보부가 무력화될 것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었다. 

모든 수사정보기관 장악

이날 회의에서 보안사의 법무참모는 미리 全본부장으로부터 지시를 받아둔 바에 따라 각 기관의 업무지침을 전달했다. 일방적 통고가 돼버린 이 브리핑에서 합수본부측은 『중앙정보부는 앞으로 일체의 예산을 집행해선 안된 다. 단 합동수사본부의 허가를 받아서 집행할 수 있다』고 다짐을 놓았다. 이 항목은 全사령관이 특별히 지시한 것이었다. 어떤 조직도 예산집행권이 박탈되면 힘을 못 쓰게 된다는 것을 全본부장은 꿰뚫어보았다. 全본부장은 또 『앞으로 모든 정보보고는 오후5시, 오전8시 두 차례 합동수사본부에 제출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합수본부로 파견할 인원에 대한 지시가 있었다.

검찰에서는 이 지시에 따라 정경식(鄭京植) 이건개(李健介) 주광일 등 10여명의 검사들을 합수본부로 파견했다. 이들 검사는 10·26사건 수사와 정치문제에 관한 보좌 역할 등을 수행하였다. 며칠 뒤 全斗煥사령관은 직접 崔圭夏대통령에게 건의하여 보안사의 對민간활동도 부활시켰다. 이 합동수사본부 관계자 회의에 배석했던 한 참모는 『全본부장이 과거의 상급자들을 앞에 두고 좌중을 제압하면서 상황을 간단하게 장악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이 참모는 『사람이 갑자기 커 보일 정도로 자연스럽게 달라진 것은 단순히 합수본부장으로 격상되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고 했다.

『10·26사건의 상황을 신속하게 파악하여 주체적으로 대처한 자신감에다가 평소에 이런 사태에 대비한 계획을 발전시켜 왔기 때문에 모든 지시가 정확히 떨어졌습니다. 무엇보다도 전장군의 인간적 잠재력이 컸기 때문에 그런 역할을 무리 없이 수용한 것입니다.』

27일 새벽 金秉洙 국군서울지구 병원장에게 궁정동 식당의 현장을 조사하던 보안사 수사관으로부터 『꿈틀거리는 사람이 있다』는 연락이 왔다. 金원장이 직접 뛰어갔다. 주방의 여기저기에 그릇이 깨지고 걸상이 넘어져 엉망진창이 돼 있는데 경호원 박상범씨가 허벅지에 관통상을 입은 채 정신을 잃고 신음하고 있는 것을 수사관들이 발견한 것이었다. 朴씨는 응급치료를 받고 목숨을 건졌다. 그는 全斗煥대통령 시절에는 경호실 수행과장으로 있으면서 아웅산 폭발사건이 났을 때는 버마까지 갔었다. 盧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경호처장, 김영삼 정부 때는 보훈처장을 지냈다.  

27일 아침에 李錫雨경호실장 부관과 경호실 직원들은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궁정동 식당으로 갔다. 車실장은 눈을 뜬 채였다. 李부관은 눈을 감겨 주었는데 손을 놓으면 또 눈이 떠지는 것이었다. 몇번이나 그랬다. 車실장의 표정은 비교적 편안하였다고 한다. 경호원 대기실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鄭仁炯 경호처장은 고통스러운 표정이었다. 혀가 말려 있었다. 鄭처장은 총을 뽑기 전에 친구 朴善浩의 일격을 받았으므로 권총을 찬 채였다. 鄭처장은 대기실 안쪽에서 총을 맞고도 문턱까지 피를 흘리며 기어갔는데, 그 핏자국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安載松부처장은 권총을 뽑다가 박선호(朴善浩)의 선제 총격을 받았었다. 그 권총은 시신 옆에 떨어뜨려져 있었고, 그는 큰 대자로 누워 있었다.

명사수의 최후

朴善浩의 법정진술에 따르면 두 사람의 최후는 이러했다. 7시40분쯤,
「탕!」
첫 총성이 울렸다. 金載圭가 車실장을 쏜 것이다. 이 순간 식당 대기실의 세 사람, 朴善浩정보부의전과장, 鄭仁炯경호처장, 安載松부처장은 서로 얼굴을 쳐다봤다.
또 「탕!」
金載圭가 일어나면서 대통령을 쏜 것이다. 朴善浩는 재빨리 38구경 권총을 뽑았다. 鄭, 安 두 경호원을 겨누며 소리쳤다.
『우리 같이 살자!』
鄭처장이 권총을 뽑으려고 했다.
『꼼짝 마라. 움직이면 쏜다.』
朴善浩가 경고하자 鄭처장은 한순간 포기하는 표정이었다.
『같이 살자.』
朴이 재차 소리쳤다. 鄭처장은 朴과 해병대 동기고 安부처장은 후배였다. 安과 鄭씨의 눈이 마주쳤다. 安載松부처장은 번개같이 몸을 일으키며 총을 뽑아 들었다.
『탕!』
朴善浩가 安부처장을 향해서 발사했다. 安씨가 쓰러지는 것과 동시에 鄭처장의 손도 권총으로 갔다.
탕! 탕!
朴은 뒷걸음질치면서 두 방을 쏘았다. 鄭처장이 쓰러졌다. 그 순간 朴善浩도 문지방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두 사람이 동시에 달려들었다면 朴善浩가 당했을 것이다. 朴이 『같이 살자』며 총을 겨누고 있었던 순간은 불과 15초 정도였다. 그러나 이들 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安부처장은 첫 총성이 울리기 불과 몇 분 전에 화장실에 갔었다. 朴善浩는 安씨가 빨리 돌아오지 않자 가슴이 조마조마했었다고 한다. 명사수 安씨가 화장실에 있을 때 金載圭가 총격을 시작했다면 상황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새벽 네 시쯤 대통령 부속실 부관 李光炯씨는 백석주(白石柱)육사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각하께서 지만 생도를 급히 찾으십니다. 아무한테도 알리지 마시고 지만 생도를 교장님 차에 태워 지금 곧 청와대 본관으로 보내주십시오.』 李씨는 朴대통령의 서거 사실을 보안에 붙이려고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본관 현관 앞에서 차를 내린 志晩생도는 병풍이 쳐지고 빈소가 차려지고 있는 것을 보고는 너무나 의외의 사태에 직면하여 잠시 정신이 혼미해진 듯 비틀거렸다. 李光炯씨가 부축하면서 『각하께서 서거하셨습니다』고 하니까 志晩생도는 쓰러지는 것이었다. 얼른 그를 병풍 뒤로 끌어갔다.

일단 金載圭가 범인임을 확인한 뒤 全소장은 합수본부장으로서 전광석화처럼 상황을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유신의 심장이 멈춰진 권력의 진공으로 맨 먼저 진입한 것이 全斗煥의 보안사였다. 全본부장은 특히 정보부를 장악하는 데 신속하였다. 27일 아침 8시30분에 그는 보안사 기조처장 최예섭(崔禮燮)대령을 정보부통제관으로 임명, 정보부의 예산·인사·일상업무를 지휘하도록 하였다. 아침9시에는 보안사의 전국 지구부대로 하여금 그 지역의 정보부 지부를 접수, 통제하도록 지시했다. 막강한 정보부 서울분실은, 보안사 감찰실장 이상연(李相淵)대령으로 하여금 통제관이 되어 접수토록 하였다.

정보부·경호실 초토화

오전 10시부터는 김포공항의 상주 정보기관들을 보안사가 지휘하게 되었다. 법무부 출입국관리소를 접수한 것은 보안사의 한 문관이었다. 그는 바로 金致烈법무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접수사실을 통보했다. 金장관은 이 문관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하니 마음대로 하라』고 말하더란 것이다. 이보다 앞서 27일 오전6시30분에는 합수본부 수사2국장으로 차출된 우경윤(禹慶允)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이 정보부 제2차장실로 가서 사건당시 궁정동 안가에 있었던 김정섭(金正燮)차장보를 연행해 왔다.

27일 오후2시 全소장은 합수본부 제1차 회의를 소집했다. 간부들에게 全소장은 「국가안전위배·역행 행위 엄단, 각 기관의 자진협조, 사적인 감정의 극복」 등을 복무지침으로 시달했다. 오후3시에는 이 사건의 현장 목격자인 金桂元비서실장과 두 여자를 조사하기로 방침을 굳히고 소재파악에 들어갔다. 金실장은 목격자로서 1차 조사를 받았다. 全본부장은 오후6시45분엔 서울강남구 논현동에 있는 金비서실장의 집을 감시 하에 두도록 지시했다.

28일에 全본부장은 그 동안 정보부가 종합 관장해온 대(對)정부기관 정보보고채널을 합수본부로 일원화하도록 지시하였다. 정보부를 대신하여 보안사가 모든 국가정보기관의 실질적인 중추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아울러 정보부장 판공비를 계엄사의 격려비로 전환 사용하도록 지시했다. 이날 오전10시에는 서울지역에 계엄군으로 투입된 20사단장 朴俊炳소장을 불러들였다. 이날 11시30분에는 全본부장이 禹참모장에게, 정보부가 부마사태에 관련하여 상부로 올린 보고서를 제출 받아 놓도록 지시하였다. 28일 오후3시30분 全본부장은 정보부 예산으로부터 5억4000만 원을 인수, 2억 원을 계엄사로 보내고, 5000만 원은 국방부로, 나머지는 합수본부에서 쓰도록 조치하였다.

28일에 벌써 全斗煥본부장 주변에는 권력에의 유혹을 부추기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었다. 하나회 출신의 육사 13기 모 준장이 보안사를 찾아와 『국방장관과 육군참모총장이 합수본부장을 해임하고 김재규의 입장을 해명해줄 우려가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다녔다. 28일엔 金桂元비서실장, 11월초에는 李在田차장이 합수본부에 구속됨으로써 全소장은 불과 1주일 사이에 정보부, 청와대비서실, 경호실 등 朴정권하의 권력기관들을 모조리 초토화시켰다. 盧泰愚9사단장이 全본부장을 찾아온 것은 11월2일 아침 8시30분쯤이었다.

李공사의 귀국

10월28일 오후3시30분 아주 흥미로운 인물이 김포공항에 도착하였다. 주 프랑스 한국대사관 공사의 직함을 가졌던 정보부 간부 이상열(李相悅)씨였다. 金炯旭 전 정보부장이 10월초 파리에서 실종되었을 때 그 주변에 있었다고 하여 지금껏 의심을 받고 있는 사람이다. 金載圭정보부장은 10월23일에 李공사에게 『오는 27일까지 서울로 들어오라. 부서장직을 주겠다』고 지시했음이 귀국한 李씨의 입을 통해서 밝혀졌다.

李씨는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全합수본부장과 단독 면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全본부장은 李씨를 정보부 전주지부장으로 내보냈다. 李씨는 그 뒤 외교안보연구원 연구위원으로 옮겼다가 84년엔 駐 버마대사, 87년부터는 駐리비아대사로 근무했다. 그는 장교시절 1965년의 「원충연(元忠淵)대령 쿠데타미수사건」때 처음에는 모의에 관련되었다가 뒤에 육군방첩대에 자수, 모의사실을 제보한 전력도 있다.

金炯旭씨가 실종된 이후 그 가족들은 파리에서 金씨의 지인이 한 사람뿐인데 그가 李공사라고 말한 것으로 보도되었었다. 10·26사건 뒤 보안사 마산지구대장에서 합수본부제1국장으로 전보돼 金載圭를 수사했던 白東林씨(당시 대령)는 『金炯旭실종사건을 깊숙이 수사하면 국가이익에 해가 될 것 같아 그만두었다』고 했다. 당시 합수본부의 한 주요간부는 『全본부장은 李공사로부터 중요한 국가기밀을 보고 받았을 것이다. 李공사가 그 뒤 계속해서 특별한 대우를 받은 것은 그가 이 기밀의 소유자인 것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고 했다.

金載圭와 金炯旭실종사건이 관계가 있음을 암시하는 일들이 10·26사건 며칠 전에도 있었다. 정보부 외사국장 조성구(趙誠龜)씨는 10·26사건 나흘 전인 22일에 부하의 해외출장 결재를 받으려고 金부장실에 들어갔다. 金부장은 서류를 보더니 신경질을 냈다.  『프랑스에는 김형욱 실종사건이 나 있는데 왜 거기로 출장을 보내나! 출장지를 싱가포르나 대만으로 바꿔!』 이 사실은 합수본부가 10·26 뒤 趙국장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밝혀진 것이다.

10·26일 바로 그날 오후 2시 金載圭는 남산 부장실에서 재미동포 李모씨를 만났다. 李씨는 예비역 장성출신인데, 金炯旭의 자서전이 출판되지 못하도록 하는 교섭에 있어서 金載圭와 金炯旭의 중개자 역할을 했었다. 金炯旭이 실종된 직후 그는 金부장의 지시로 귀국하여 이날 金부장뿐 아니라 정보부의 해외담당 책임자도 만났다. 李씨는 몇 년 전 사망했는데?년 겨울 기자와 만나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김재규는 김형욱이 자서전을 출판하지 않으면 150만 달러를 주겠다고 하여 파리로 꾀어낸 것이다. 김형욱은 파리에서 50만 달러를 먼저 받아 스위스 은행에 입금시켰다. 나머지 100만 달러를 더 받으러 갔다가 그렇게 된 것이다.』

李씨는 10·26사건이 터지자 27일 아침 김포공항이 폐쇄되기 직전의 첫 비행기편으로 황급히 도쿄로 떠났다.

鄭총장, 조사받기를 자청

이 취재를 하다가 합수본부 측 자료에서 흥미 있는 기록을 발견하였다. 「10월29일 오전10시30분 鄭昇和계엄사령관이 全斗煥본부장에게 2차 중간발표의 필요성을 강조하다. 鄭사령관은 자신도 정식으로 진술서를 받겠다면서 합수본부 수사관 파견요청.」 鄭씨는 회고록에서 「전두환 본부장이 나에게 『궁정동에 가셨던 경위를 간단히 써주십시오』라고 했으나 정식조사를 받겠다고 자청하였다」고 했었는데 이 기록의 진실성이 입증된 것이다.

全씨가12·12사태의 원인이라고 지적한 「鄭총장의 조사 기피, 또는 방해」 주장은 출발점부터 무리인 것이다. 11월1일 金大中씨는 고朴대통령의 빈소에 조문하고 싶다는 뜻을 기관에 전달했던 것 같다. 정보부와 경찰에선 이 뜻을 全斗煥본부장에게 보고했다. 全본부장은 『정치적 시위효과를 노리는 행동으로 판단되니 거절함이 좋겠다』고 했다. 全본부장은 이미 수사 차원 이상의 정치적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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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박정희

*1987년4월에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술회한 내용을 공보비서관 金聲翊씨가 기록한 것이다.
  
  
  전두환: 내가 옛날에 朴正熙 대통령이 최고회의 의장 할 때 나 보고 국회의원 나가라고 하는 걸 안 나갔어요. 張都暎 사건 끝나고 얼마 안 됐을 때였는데 사무실에 오라고 해서 갔었어요.
  나보고 全 대위, 국회의원 출마 안 하겠냐고 그래. 내가 깜짝 놀라 제가 어떻게 국회의원을 합니까 하니, 하면 하는 거지 왜 못 해라고 해. 아닙니다. 저는 군대에 있는 게 좋습니다라고 했어. 군인하려고 사관학교에 갔지, 국회의원 하려고 간 게 아닙니다라고 했어. 朴 대통령이, 자네가 필요하다고 해.
  시간을 달라고, 의논도 해 봐야겠다고 했더니 남자가 하는 일에 상의는 무슨… 하더니 이틀 후에 오라고 해. 내가 尹必鏞 비서실장과 의논했어요. 잘 말씀드려달라고 했는데 朴 의장이 또 불러. 생각해 봤냐고. 돈도 없고 군대에도 충성스러운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라고 했는데 그때부터 朴 대통령이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보는 거야. 내가 어디 가 있어도 골치아픈 일이 있으면 나를 불렀어요. 군대 얘기도 물어 보고 그랬어. 나는 항상 그 양반한테 희망적인 얘기를 많이 했어요. 1년에 한 두 번씩은 부르셨어요. 이 식당, 여기에서 陸 여사도 함께, 분식 권장할 때인데 분식으로 식사도 했어. 陸 여사가 만든 거라고 했는데 별로 맛은 없지만 나는 식성이 좋으니 두 그릇 정도 먹었어요.
  내가 끝까지 국회의원 출마를 거절한 게 인상적이었던 것 같고 참신한 육사 출신으로 본 것 같아.
  
  *퇴직 직전 車智澈 위해 영어로 열변
  
  대통령: 경호실 작전 차장보로 있을 때 내가 계속 나가겠다고 했어요. 車智澈과 내가 사이가 나빴어. 車智澈이 원래 내 밑에 있었어. 그 사람이 육사12기 시험에 떨어지고 그 다음에 포병 학교를 가서 포관이 된 사람이지. 자존심이 강해. 나와 함께 미국에 갔는데 그 사람이 미국 사람과 싸움을 해서 퇴교를 당하게 돼 있었어. 한국 학생장인 나한테 그 사람을 위해서 변호할 시간이 주어졌어요. 내가 대위 때였는데 못 하는 영어지만 열변을 토했어요.
  이 사람이 훈련을 하다가 미국 장교는 10분만에 교대를 시키고 외국 장교는 40분씩이나 교대를 안 시키는 데에 화가 나서 미국 군인을 때린 거야. 폭행을 하면 그 사람들은 큰 잘못으로 쳐요. 그 때 일행이 張基梧 차관, 崔世昌 장군 등이었는데 내가 제일 선임자였어.
  그 때 외국 장교에 대한 차별 대우가 있었어요. 언어 장벽 때문에 모두 고생했어. 車 대위가 외국인의 불만을 대표해서 때린 것이라고 내가 변호를 해서 결국 용서를 받았어. 그 사람이 육사 12기 시험에 떨어진 것을 스스로 비밀에 붙였는데 육사 출신을 매우 싫어했어. 그런 관계였는데 그 사람이 경호실장이 되고 내가 그 밑에 왔어. 내가 사단장 나가야 할 때인데 朴 대통령이 직접 사인을 해서 경호실에 오게 된 거야.
  
  *보안사 가서 보니 朴 대통령 주변 엉망
  
  대통령: 내가 화가 나서 예편해버리려 했어. 朴世直이가 국방 장관 보좌관이었는데 徐鐘喆 장관한테 면담 신청을 해서 저를 예편시키는 겁니까 물으니 대통령이 사인한 메모지를 보라고 해.
  車智澈이가 여러 가지 일을 삐뚤어지게 해. 중령으로 예편하고 국회의원을 한 사람인데 경호실장하면서 꼭 국회의원을 상대하고 높은 장군을 경호실에다 데려다 놓아. 車智澈이가 나한테 경호실장 뺏길까봐 굉장히 신경쓰는 것 같았어. 내가 내보내 달라고 했어. 내가 소장이 되고 나서였어. 朴 대통령과 金載圭, 車智澈, 나 이렇게 골프장에서 저녁을 먹는데 朴 대통령이 사단장 꼭 해보고 싶은가라고 물어서 군의 희망이 사단장 아닙니까 하니 그래, 사단장 해 봐야 될 거야 라고 해. 그래서 사단장으로 나갔어요. 사단장으로 나갔으니 보안사령관으로 갈 수 있었던 거지.
  朴 대통령도 내가 군대를 좋아하고 순수하게 나가니 마음에 드는가 봐.
  사실은 10월26일 돌아가셨지만 10월27일에 내가 보안사령관으로서 보고를 하도록 돼 있었어. 金載圭, 車智澈, 정당 관계 암투가 있어, 朴 대통령이 상당히 위험할 것 같았어. 두툼한 보고서를 만들었어. 朴 대통령은 보고서를 올리면 상대방한테 주어버리는 성격이 있어요. 직접 그 사람을 불러서 보여 줄 용기가 없는 거야. 정치 자금도 車智澈을 통해서 하고 신세를 너무 많이 지니 정면으로는 말 못 하고 보고서를 주어버리는 거지. 보고서 낸 사람만 죽게 돼.
  보안사에서도 陳鍾埰 사령관이 가면서 나한테 보고서를 내지 말라고 했어요. 내면 죽는다고 하면서. 그러면 누가 朴 대통령을 깨우쳐 주느냐, 내가 盧載鉉 국방장관에게도 얘기했어.
  비서실 내부도 엉망이고 友軍(우군) 싸움이 金日成이와의 싸움보다 더 심했어. 망하려니 그런가 봐.
  그래서 내가 10월27일쯤 보고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했어. 몇 번이나 읽어 보고 연습도 하고 보고 준비를 다 했었는데 朴 대통령이 돌아갔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결국은 이렇게 오는구나 하고 생각했어.
  지금은 우리가 강경하게 밀고 나가야 돼요. 그게 더 먹혀들고 국민들한테 안도감을 줄 수 있어요. 모두 역사의식을 가지고 나가야 돼요.
  
  진솔한 회고담
  
 ل·13 담화를 녹화한 후 全 대통령은 배석했던 수석비서관 전원과 함께 식당에서 점심을 들면서 離任의 감회에 젖었다. 4·13은 곧 자신의 이임 절차라는 그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그 때까지의 어떤 모임도 이 때만큼 이임 분위기를 실감나게 한 적은 없었다. 全 대통령 자신도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옛 일과 청와대 식당에서 朴 대통령과 식사하던 일까지 회상했다.
  대통령으로서뿐 아니라 그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 청와대에서의 일을 회상한 것은 청와대에서 떠난다는 것을 실감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얘기를 듣던 수석비서관들 역시 대통령의 퇴임이 자신들의 문제로 다가오는 것을 확연히 느끼는 표정들이었다. 대통령의 어조는 담담했고 진솔했으므로 분위기는 매우 엄숙했다.
  

*전두환 피의자 신문조서(제1회) 1995년 12월3일 안양교도소 

정치보복 

―피의자는 현재 무슨 일로 구속되어 조사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가요

『제가 구속되기 전 저의 변호인인 李亮雨 변호사로부터 듣기로는, 검찰이 1년 2개월에 걸쳐 조사한 후 기소유예 했던 소위 12·12 사태에 대한 軍형법상의 책임을 지고 구속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앞서 말한 12·12 사태의 발생 배경이라든가 진행과정, 그에 따른 피의자의 형사책임 등에 관해 질문하겠는데 순순히 진술에 응하시겠나요.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만, 12·12 사태에 관한 질문은 어떤 사항에 대해서도 답변을 드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피의자는 묵비권을 행사하시겠다는 뜻인가요

『그렇습니다.』

―묵비권을 행사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저는 그저께(95년 12월1일) 오후 저의 변호인인 李亮雨 변호사를 통해 검찰에서 출석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주위 사람들과 상의한 결과, 이번 소환이 저에 대한 정치보복을 위해 행해졌다고 판단, 어제(12월2일) 아침 9시 저희 집 앞에서 국민을 향해 金泳三 대통령의 답변을 촉구하는 담화를 발표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번 검찰 수사는 전직 대통령인 저에 대한 정치보복으로 판단하고 있으며, 특히 이 사건은 검찰에서 조사하여 저와 盧泰愚 대통령 등 모든 관련자에 대해 기소유예 처분을 한 것인데 다시 재론하는 것은 법 집행에 일관성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사건에 관해서는 저의 입장을 밝히는 답변서를 검찰에 제출한 바 있기 때문에 이제 와서 새로 답변에 응할 이유도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관련자의 진술과 상반되는 부분을 확인하려고 하는 데는 협조하겠는가요.

『이미 검찰에 제출한 답변서에서 저의 입장을 모두 밝혔으므로 협조하지 못하겠습니다.』

―피의자가 묵비권을 행사하는 데 다른 이유는 없는가요

『저는 평생을 명예를 위해서 살아온 사람인데, 전직 대통령을 이렇게까지 비참하게 구속하니,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조사에도 응할 수 없는 심정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진술에 응하시겠나요.

『제가 묵비권을 행사하는 것은 이 사건을 맡고 있는 검사 개개인에 대한 불만이 있다거나 검사들이 저를 부당하고 불공평하게 대우하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번 검찰의 재수사 착수 및 저의 구속이 정치보복일 뿐만 아니라 12월2일 제가 성명서를 발표한 데 대한 일종의 보복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2·12 사건 재수사와 5·18 특별법 제정 등 저와 측근들에 대한 일련의 불순한 움직임을 즉각 취소하면 진술에 응하겠습니다.』

―그러면 12·12 사태의 본질적인 내용 이외의 사항에 대하여는 어떻게 하시겠나요.

『그런 사항에 대해서는 순순히 진술에 응하겠습니다.』

―피의자가 보안사령관으로 재직한 것은 언제부터 언제까지인가요.

『1979년 3월5일경 보안사령관에 임명되어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맡게 된 1980년 4월14일경까지 재직 했습니다.』 

'盧載鉉 장관이 추천: 보안사령관 된 것이 인생을 바꾸었다.' 

―피의자는 언제, 누구에 의해서 보안사령관에 임명되었나요.

『1979년 3월5일 당시 국방부장관이던 盧載鉉 장관에 의해 임명되었습니다. 법률상 임명권자는 국방부장관이지만, 내정 과정에서는 대통령이 직접 관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피의자는 누가 발탁했다고 생각하는가요.

『당시 국방부장관이던 盧載鉉씨가 평소에 朴대통령이 저를 총애하는 것을 알고, 저를 적극 추천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피의자가 보안사령관으로 발탁된 배경은 어떤가요.

『당시 金載圭, 車智澈 사이의 관계가 좋지 않은 등 朴대통령 주변 인물 몇몇 분 사이에 권력암투가 있었습니다. 金載圭는 자신의 측근인 문홍구 장군을, 車智澈은 자신의 측근인 이재전 경호실 차장을 천거했으며, 盧載鉉 국방부장관은 저를 추천했는데, 朴대통령이 저를 직접 낙점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피의자는 10·26 사건 발생 직후 합수본부장에 취임했는데 결국 피의자의 당시 보직이 보안사령관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것이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고, 그로 인해 12·12, 5·17 등을 거치면서 대통령이 되고 오늘날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면 피의자의 인생에 있어서 보안사령관으로 재직한 것이 그 후의 인생을 바꾸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인가요.

『저는 그것이 인생에 있어 운명적인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10월26일 저녁 궁정동 중앙정보부 安家 식당에서 朴대통령이 金載圭 중앙정보부장, 金桂元 대통령 비서실장, 車智澈 대통령 경호실장과 함께 만찬을 한다는 사실을 사전에 알고 있었나요.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대통령의 저녁 행사를 보안사령관이 알 리가 있는가요.』

―그날 軍에 비상이 발령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당시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요.

『직원 격려차 서빙고 분실로 가고 있는 중이었으며, 서빙고 분실에 도착하여 비상이 발령된 사실을 알았습니다. 盧載鉉 국방부장관이 즉시 국방부로 오라고 전화를 했다고 해서 국방부로 갔습니다.』

―국방장관과 軍 수뇌부가 陸本 B-2 벙커로 소집되었을 때 피의자도 B-2 벙커에 소집 되었나요.

『국방부로 갔더니 다른 사람이 陸本벙커로 가라고 하여 그리로 갔습니다.』

―朴대통령이 저격당했다는 사실을 언제,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陸本 벙커에서 다시 국방부장관실로 장소를 옮겼더니 그곳에서 盧載鉉 장관이 이야기 해주어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나요

『金載圭를 체포하기 위해 김진기 헌병감이 유인하고 제가 오일랑 중령에게 金載圭 체포를 지시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金桂元 비서실장이 대통령 전용차에 신원을 알아 볼 수 없는 屍身을 싣고 와 국군서울지구병원 대통령실에 안치시켜 놓고 정중히 모시라고 지시한 후 돌아가고, 신원 불상의 남자 2명이 시신을 지키고 있으면서 외부인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사실이 있는가요.

『그런 사실이 없습니다.』

―보안사 참모장, 감찰실장 등 보안사 간부들이 그 시신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여러 차례 병원장 등 병원측과 통화했고, 그 결과 코드 원(대통령)이 서거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하는데 그런 사실이 있는지요.

『그런 사실이 없습니다.』

―고소인들 주장에 의하면 피의자가 즉시 시신을 확인하고 시신을 지키는 자들을 체포하여 추궁했더라면 쉽게 범인을 색출하고 사태를 수습할 수 있었는데, 그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은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면서 눈치를 보았기 때문이며, 따라서 피의자가 내란을 방조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피의자에게 金載圭를 체포하라고 누가 언제 지시했으며, 누가 언제 金載圭를 실제로 체포했나요.

『盧載鉉 국방부장관이 지시했고, 김진기 헌병감이 金載圭를 유인하고 제가 보안사 오일랑 중령에게 金載圭 체포를 지시하여 보안사 직원들이 체포 했습니다.』


[ 2016-05-31, 19:0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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