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의 등장: 계엄사 합동수사본부
全斗煥과 그의 時代(2)하룻밤 사이에 이루어진 합수본부의 起案과 탄생은 몇 달되지 않아 정권의 탄생으로 이어지게 된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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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사로 넘어간 권력은 그러나 鄭昇和사령관에 의하여 장악되지는 못했다. 鄭昇和 총장의 인품이 우선 주어진 권력을 전폭적으로 행사하려는 유형이 아니었다. 그는 온건한 원칙주의자였고 군 본연의 임무를 입버릇처럼 강조하는 비정치적 야전군인이었다.

제2장 계엄사와 합수본부

권력공백의 징조들

고 朴正熙 대통령 國葬준비의 실무작업을 지휘하고 있던 최택원(崔澤元)총무처차관은 권력의 진공상태를 실감할 수 있었다. 국장의 式場에 정당대표를 초청하는데 신민당 대표를 누구로 할 것이냐가 문제로 대두되었다. 그때 법원은 金泳三신민당총재의 직무를 가처분 형식으로 정지시키고 정운갑(鄭雲甲)씨를 총재 직무대행으로 임명하여 놓고 있었다. 崔차관은 이 문제를 申鉉碻부총리와 상의하였다. 申부총리는 崔圭夏대통령권한대행이 결정할 문제라고 했다. 崔대행에게 보고했더니 부총리와 상의해서 결정하라는 것이었다. 애가 탄 崔차관은 정진우(鄭鎭宇)법제처장에게 유권해석을 내려달라고 했다.

鄭처장은 『이것은 법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이므로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하지 않을 까』라는 태도였다. 그래서 유혁인(柳赫仁)대통령 정무수석 비서관에게 전화를 걸어 『이 문제에 대한 공화당과 유정회의 견해를 타진해 달라』고 했다. 柳수석은 『그것은 내각에서 결정할 문제이니 내각에서 알아서 하라』고 했다. 崔차관은 헌법상으로는 권력에 공백이 생긴 것도 아닌데 이런 사소한 문제에 대해서도 國政의 최고엘리트들이 책임을 안 지려고 하는 게 몹시 안쓰러웠다고 한다. 崔차관은 다시 崔圭夏권한대행을 찾아가 의논했다. 崔대행은 자신의 생각을 밝히지 않았는데 옆에 있던 김성진(金聖鎭) 문공부장관이 『그런 문제라면 金泳三, 鄭雲甲 두 사람을 다 부르면 되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그래서 정당대표 문제는 전·현직을 다 초청하는 것으로 겨우 해결이 되었다.

全斗煥본부장의 한 핵심측근은 10·26∼12·12사이의 분위기를 이렇게 증언했다.
'군장성들의 기회주의적 성향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전방에서 외출 나온 일부 장성들은 육군본부와 합수본부 양쪽을 오가며 눈치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양쪽을 이간질시키는 말을 하고 다니기도 하고. 어느 쪽에든 확실히 소속돼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까 불안감과 소외감을 느끼는 것 같았습니다. 합수본부 비서실로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보를 얻으려고 기웃거리는 장교들이 모여들기도 했습니다. 관료들도 합수본부의 통제를 자청해 와서 우리는 본의 아니게 행정적인 일이나 정치적인 일에 간여하게 되었습니다. 경찰도 합수본부에 예속을 자원해 오고 있었습니다. 磁石에 빨려들 듯이 합수본부로 저절로 힘이 쏠리고 있었습니다. 나라가 이렇게 되면 망하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全斗煥본부장의 다른 참모는 『10·26직후 각료들의 회의에 참석한 적이 있는데 방향감각도 없이 갑론을박하는 것이 꼭 어린아이들 모아 놓은 듯했다』고 기억한다.

계엄사에 힘 쏠려

鄭昇和씨도 이렇게 말했다. 『박대통령이 사고로 돌아가신 데 불과한 것이지 憲政이 중단된 것이 아닌데, 계엄사령부가 마치 혁명이나 일으킨 혁명사령부인 것처럼 착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심지어 문교부 같은 데서까지 대학생들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계엄사령부가 대학총장들에게 무슨 지침을 내려달라고 하지 않나…. 제가 노재현 장관에게 건의했어요. 행정부에서는 포고령에 관계된 사항에 대해서만 계엄사의 지휘를 받으면 되는데 모든 업무에 대해 통제를 요청해오고 있다. 그러니 국무회의 때 다른 장관에게 말씀을 드려달라고 했습니다.』

행정부서의 그런 태도는 꼭 기회주의적인 행동으로만 볼 수 없는 것이, 계엄법에 계엄사의 권한이 어마어마하게 규정돼 있기 때문이다. 10·26사건 뒤에 선포된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 비상계엄령은 1964년의 6·3사태나 1972년의 10월 유신 때 선포된 비상계엄령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그때는 朴대통령이 권력의 중심을 잡고 있는 상태에서 선포된 것으로 계엄군은 대통령의 장악 하에 있었을 뿐 아니라 정보부의 견제를 받고 있었다. 10·26사건 뒤의 비상계엄령은 권력에 공백이 생긴 시기에 선포된 데다가 정보부가 무력화돼버려 계엄사령부로 자연히 힘이 모이게 돼 있었다.

4·19직후의 혼란기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송요찬(宋堯讚)육군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되었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때도 宋사령관은 일부 정치인과 군인들에 의해 대권을 잡으라는 유혹을 받았었다. 계엄사령부 치안처장이 되었던 김진기(金晋基) 당시 헌병감(준장)은 『戰時나 사변도 아니라서 행정조직이 번듯이 살아 있는데도 계엄령이 선포되자 행정기관이 계엄사령부 눈치를 보기 시작하고 자신들이 알아서 처리해야 할 일도 일일이 계엄사의 허가를 받으려 하는 바람에 군이 저절로 國政의 중심을 잡게 되더라』고 했다.

金씨는 또 『계엄령 하에서는 대통령의 권위도 약화되는구나 하는 실감을 갖게 되었고, 군이 대통령의 권위를 세워주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헌병1개 소대를 보내 崔대행의 경호를 맡게 했었다』고 말했다. 金씨는 『군에 너무 포괄적인 권한을 주는 계엄법이 재검토돼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더라』고도 했다. 당시 계엄법 제4조는 「전쟁 또는 전쟁에 준할 사변에 있어서 敵의 포위공격으로 인하여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된 지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10·26직후의 한국상황은 비상계엄령이 선포될 만한 혼란상이 아니었다. 대통령은 피살되었지만 敵의 포위공격 하에 있는 상황은 아니었던 것이다.

판이한 두 인간형

계엄법 제11조는 「비상계엄령 선포와 동시에 계엄사령관은 계엄지역내의 모든 행정사무와 사법 사무를 관장한다」고 했다. 13조는 또 「계엄사령관은 계엄지역 내에서 군사상 필요할 때 체포, 구금, 수색, 거주이전, 언론, 출판, 집회 또는 단체행동에 대하여 특별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했다. 계엄사령관에게 일종의 비상대권을 부여하게 되는 비상계엄령은 그 선포의 조건을 엄격히 지키지 않으면 정권을 군부에 합법적으로 이양하는 결과를 빚게 되는 것이다. 전국 계엄일 때는 계엄사령관이 직접 대통령의 지시를 받지만 부분계엄일 때는 국방장관을 통하여 지시를 받는다.

10·26비상국무회의에서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을 계엄지역으로 한 것은 노재현(盧載鉉)국방장관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실제로는 국방장관이 계엄사령부를 감독·조정할 기구도 인력도 없이 계엄사령관이 주도적 역할을 하고 국방장관은 협의나 보고를 받는 정도였다. 대통령과 장관이 군부를 조종할 수 있는 별도의 채널과 참모(예컨대 정보부 같은 견제 기관)를 거느리지 못할 때는 실무조직의 책임자인 계엄사령관이 실질적인 권력을 잡게 되는 것이다.

계엄사로 넘어간 권력은 그러나 鄭昇和사령관에 의하여 장악되지는 못했다. 鄭昇和 총장의 인품이 우선 주어진 권력을 전폭적으로 행사하려는 유형이 아니었다. 그는 온건한 원칙주의자였고 군 본연의 임무를 입버릇처럼 강조하는 비정치적 야전군인이었다. 10·26사건이 반란이었다면 鄭총장은 과단성 있게 사태를 제압하여 자연스럽게 强者로 떠올랐을 것이다. 그러나 10·26은 살인사건이었고 그 수사업무를 맡은 합동수사본부가 국내의 모든 수사·정보기관을 지휘하면서 계엄업무의 중심적 부분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 우두머리는 鄭총장과는 전혀 반대인 권력 지향적 인간형이었다. 鄭사령관은 야심만만한 全斗煥의 합수본부를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을 갖지 못했다. 합수본부장이 총장 직속으로 돼 있어 헌병감실이나 군검찰 등 다른 기관이나 참모를 이용하여 견제시킬 수도 없었다. 견제기구로 쓸 만한 헌병·군검찰·정보부는 일찌감치 합수본부 지휘하에 들어가 있었다. 따라서 계엄사에 쏠린 권력의 대부분을 실제로 행사하게 된 것이 합수본부였다.

禹國一합수본부참모장은 이렇게 증언한다. 『그때 행정부 쪽에는 국방차관이 주재하는 차관회의가 있었고 합수본부에는 내가 주재하는 국·처장급 회의(행정부의 국장 및 합수본부의 처장급이 참여)가 있었습니다. 국·처장회의에서 결정된 것이 차관회의의 결정을 뒤엎고 실행되는 판이라 나중에는 차관회의는 왜 하는지 의문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鄭총장은 자기 앞에서는 고분고분하고 간혹 핀잔을 듣기도 하는 全본부장을 자신이 통제하고 있다고 안심했는지는 모르지만 계엄사의 하부 실무조직과 행정기관은 합수본부의 영향권 아래에 들어가 계엄사령관은 겉돌고 있었다.

합수본부가 실무 장악

합수본부의 조직에 관한 규정은 계엄법에 있는 것이 아니고 육군본부의 비상사태 조치게획인 총무계획의 「합수본부를 둘 수 있다」는 단 한 줄의 규정에 근거를 두었다. 10·26이후 이 간단한 규정을 근거로 삼아 全斗煥장군은 보안사를, 국내의 모든 수사·정보기관을 감독·조정하는 강력한 권력기관으로 변모시킨 것이었다. 합동수사본부의 조직과 권한을 제도화한 것은 10월 26일 밤에 비상소집 돼 나온 보안사 법무참모(소령)였다. 그는 1979년 여름에 全사령관의 지시로 합동수사본부의 조직을 기안해 본 경험자였다. 釜馬사태가 터지자 全사령관은 그 조직 안을 갖고 부산에 내려가 부산지구계엄사령부내에 합동수사단(단장 權正達부산보안부대장)을 설치, 운영함으로써 실험을 해본 셈이었다.

법무참모는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아무런 자료도 참고하지 않고 육군본부 보안부대에서 즉석 기안을 하였다. 그는 합동수사본부의 위치를 계엄사령관 직속으로 하고 정보부·경찰·보안사는 물론이고 헌병과 군검찰 까지 감독 하에 두도록 해버렸다. 계엄사의 치안처장은 육군 헌병감이 맡도록 돼 있었는데 그의 부하들이 합동수사본부의 지휘하에 들어가 버림으로써 치안처가 실질적으로는 합수본부의 영향권 안에 들게 되었다. 12·12사태 때 헌병감의 두 직속 부하인 성환옥(成煥玉)기획처장과 이종민(李鍾民)육군본부 헌병대장은 합수본부 측에 가담, 鄭총장 연행을 도왔다.

全斗煥소장은 법무참모가 기안한 조직 안을 그날 밤 鄭계엄사령관에게 들고 가 결재를 받아왔다. 하룻밤 사이에 이루어진 합수본부의 起案과 탄생은 몇 달되지 않아 정권의 탄생으로 이어지게 된다. 합수본부의 중앙조직은 감독관실·본부분실·기획조정실 등 3실, 안전처·정보처·총무처 등 3처, 1단(수사단)으로 돼 있었다. 인력은 보안사 출신 379, 경찰 37, 검찰 8, 정보부 출신 6명 등 모두 497명이었다. 보안사의 정보처는 金載圭정보부장 시절에 對민간 사찰이 금지되자 방위산업체의 보안업무를 담당하는 防産보안처로 바뀌었다. 全본부장은 對민간 사찰을 부활시키면서 방산보안처를 정보처로 복귀시켰다.

정보처에는 4개 과가 있었다. 1과는 정치, 2과는 언론, 3과는 경제, 4과는 노조를 맡았다. 정보요원들은 120여명. 문관이 절반 가량을 차지하였다. 정보처는 기능이 부활되어도 그 동안의 공백기로 해서 정보의 체계적인 수집·분석을 독자적으로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정보부와 경찰을 적극적으로 부리고 정보부와 경찰이 보존하고 있던 정보철을 가져와 이용하기도 하였다. 보안사는 이때 정보부의 정보 수집실태를 낱낱이 엿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예산을 타기 위한 허위 보고사례나 현직 정보부장에 의한 자신의 신상기록 변조 사례 등이 밝혀지기도 했다.

합수본부는 10·26사건 이후 정보처의 기능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정치에 개입할 수 있게 되었다. 全斗煥합수본부장은 鄭계엄사령관에게 『崔圭夏권한대행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90%이상의 지지를 얻을 수 있도록 우리 요원들을 시켜 공작을 하겠습니다』고 했다가 거절당한 적도 있다. 그런 鄭총장도 국무위원들의 부탁을 받고, 공화당이 金鍾泌총재를 통일주체국민회의에 대통령후보로 내 보내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데 대하여 반대의사를 전달하는 「정치적 행동」을 보였다. 권력의 공백기에서 주위 사정이 군을 정치와 끊임없이 연루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10·26사건 뒤 국민들 사이에는 『군은 이제 그만』이라는 공감대와 민주화는 역사의 大勢라는 확신이 퍼져 있었고 수준 높은 질서의식을 보여 겉으로는 안정 그 자체였다. 이런 압도적 사회 분위기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모의가 소수 정치장교들에 의해 추진되고, 또 성공할 수 있었다는 점이 흥미거리다. 한 합수본부 간부는 1979년 10월26일에서 1980년 5월 사이에 이루어진 정권탄생의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정권이란 것이 몇 사람에 의해서 이렇게도 만들어질 수 있구나』하는 허무감을 느꼈다고 했다.

[ 2016-06-02, 11:0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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