全斗煥의 사람들
全斗煥과 그의 時代(4) 全斗煥본부장에 대한 영향력과 정권탄생에 있어서의 기여도는 許和平-許三守-李鶴捧-金振永-張世東 순서가 된다. 이 순서는 全斗煥본부장과 공간적으로 가까운 순번이기도 하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권력은 공간이고, IQ는 지위이며, 능력은 찬스다」는 말이 있다. 인간의 능력은 비슷비슷한데 공간, 지위, 찬스에 의하여 영향력이 규정된다는 의미이다. 권력은 절대권력자와 공간적으로 얼마나 가까이 있느냐에 의해서 결정된다. 인간의 지능(IQ)은 비슷한데 높은 지위에 있을수록 고급정보에 쉽게 접할 수 있어 자연히 지식이 많아진다. 인간의 능력도 그것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발달하게 된다.


5인방

「권력은 공간이고, IQ는 지위이며, 능력은 찬스다」는 말이 있다. 인간의 능력은 비슷비슷한데 공간, 지위, 찬스에 의하여 영향력이 규정된다는 의미이다. 권력은 절대권력자와 공간적으로 얼마나 가까이 있느냐에 의해서 결정된다. 인간의 지능(IQ)은 비슷한데 높은 지위에 있을수록 고급정보에 쉽게 접할 수 있어 자연히 지식이 많아진다. 인간의 능력도 그것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발달하게 된다.

이 원칙을 10·26사건 뒤 全斗煥소장에게 적용해 볼 수 있다. 그는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고朴正熙대통령弑害사건수사권을 한 손에 쥐고 공백이 생긴 권력중심부에 가장 가깝게 위치하게 되었다. 그는 합동 수사본부라는 公的인 조직과 정규육사출신 장교단 및 하나회라는 私조직을 동시에 지휘하고 있었다. 全본부장은 거의 마음대로 崔대통령권한대행, 盧국방, 鄭계엄사령관을 만날 있었다. 공간, 지위, 찬스의 3요소를 두루 갖춘 그에게는 똑똑하고 야심만만한 참모들이 있었다.

10·26사건에서 12·12사태 사이에 全斗煥본부장과 함께 권력에의 의지를 다져가고 있던 핵심측근으로는 다섯 사람을 꼽을 수 있다. 全斗煥이라는 핵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릴 때 가장 가까운 궤도에는 세 사람이 있었다. 허화평(許和平)합수본부 비서실장, 하삼수(許三守)총무국장, 이학봉(李鶴捧)수사국장. 그 다음 궤도에는 장세동(張世東)수경사령부 30단장과 김진영(金振永) 33단장. 이 다섯 사람이야말로 5공화국의 씨앗을 뿌리고 배태시킨 권력의 원천이었다.


張대령은 육사16기, 1金2許대령은 육사17기, 李중령은 육사18기였다. 全斗煥본부장에 대한 영향력과 정권탄생에 있어서의 기여도는 許和平-許三守-李鶴捧-金振永-張世東 순서가 된다. 이 순서는 全斗煥본부장과 공간적으로 가까운 순번이기도 하다. 許和平대령은 합수본부장을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비서실장으로서 공간적으로 가장 가까이 있었을 뿐 아니라 원모심려(遠謨深慮)의 계획입안자 역할을 수행하였다. 감독 全斗煥, 연출 許和平, 실행 許三守, 뒷처리 李鶴捧, 엄호 金振永·張世東의 배역이었다.

이 5명은 하나회라는 공통점 이외에 全斗煥소장과는 깊은 인간적 유대를 쌓은 사이였다. 張대령은 월남전 때부터 死線을 같이 넘어 온 관계였고, 金대령은 全소장과 세 번이나 같은 부대에서 근무하였다. 2許·1李는 고참 보안사 요원으로서 全소장이 국군보안사령관으로 부임함으로써 처음으로 같이 일하게 되었으나 인간적 유대는 그 훨씬 이전부터였다. 1979년 3월초 全斗煥소장은 국군보안사령관에 취임하자 육본 특명검열단에 있던 許和平대령을 불러 들여 비서실장에, 許三守수도군단 보안부대장을 인사처장에 임명하여 두 심복을 핵심부서에 심었다. 보안사는 다른 부대에 비해서는 정규육사 출신이 약한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許三守, 李鶴捧씨는 군생활의 거의 전부를 보안사의 對共수사부문에서 보냈었다. 許和平대령은 보병사단의 중대장, 대대장도 해본 보안사 수사요원 출신이었다.

10월27일 全장군이 朴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기로 돼 있었던 시국수습 대책안의 기안책임자도 許실장이었다. 그 내용은 당시 상황에서는 당돌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車智澈경호실장과 金載圭정보부장의 교체를 건의한 것은 물론이고 1980년 5월에 설립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이른바 개혁조치 내용과 비슷한 건의가 이 보고서에 포함돼 있었다고 한다. 물론 그런 비상조치의 목표는 유신체제의 보존이란 전제 아래에서 국민의 지탄을 받는 인물들과 부정요인을 제거하여 국정을 쇄신한다는 것이었다.

심모(深謨)의 인간형 許和平

 한 관계자는 『朴대통령이 10월27일에 全斗煥사령관으로부터 그 보고를 받았으면 그 뒤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다』고 했다. 朴대통령이 그 보고서의 건의를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이 보고서의 작성경험은 자연스럽게 許씨의 머리에 입력되었고, 그것은 10·26사건 뒤 일련의 집권 계획으로 출력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許和平씨는 육군대학 졸업성적이 1위였다. 보안사 출신 장교가 그런 성적을 보였다고 하여 화제가 됐었다고 한다.

현대사회연구소 許和平소장은 1989년 5월 盧泰愚대통령이 일본 중의원에서 한 연설문안을 기초하였다. 許소장은 청와대비서실의 부탁을 받고 약 한달 간 직접 연설문 작성 작업을 했다고 한다. 이 연설문초안은 이수정(李秀正)청와대 대변인에 의해 盧대통령의 스타일로 고쳐지기는 했지만 뼈대는 거의 그대로 채택되었다고 한다. 盧대통령의 일본 국회연설은 일본에 대해서도 좋은 충고와 비전을 제시했다고 하여 호평을 받았었다. 許和平씨의 직속부하였던 한 육사출신 장교는 『그분은 부드럽고 예의바르면서도 과묵하고 사안에 대한 소견이 뚜렷하였다』고 기억한다. 許和平씨는 군장교로서는 드물게 술과 담배를 거의 하지 않았다. 신경성 변비에 좋다고 해서 시작한 중국 차 마시기가 그의 유일한 기호였다는 것이다.  출근할 때 중국 차를 큰 보온병에 넣어서 가져오기도 했다. 그는 잡기가 별로 없다.

1981년에 청와대측의 부탁을 받고 12·12사태를 취재하고 있었던 소설가 千金成씨는 許和平정무수석으로부터는 증언을 듣지 못했다. 다른 관계자들은 공 다툼하듯 신나게 자신의 행동을 미화하고 과장했지만 許수석은 『내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을 통해 들었을 테니까…』라면서 입을 닫아버리더란 것이다. 千씨는 이렇게 말했다.
『그 시점에서 12·12사태가 앞으로 언젠가는 말썽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이가 許和平씨와 盧泰愚장군 정도였습니다. 盧 당시 보안사령관도 자신이 9사단 병력을 불러들인 부분만은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안병호(安秉浩)비서실장이 그 사실을 저한테 자랑하니까 盧사령관은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라」고 핀잔을 주더군요. 다른 분들은 자신의 행동을 극화하기 위해 일부러 근사한 대사를 만들어내는 등 안달이 나 있었지요.』

5공화국 출범 뒤 청와대에서 근무할 때도 許和平정무수석(처음에는 청와대 비서실 보좌관)은 許三守사정수석이나 李鶴捧민정수석보다 한 수 위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는 허문도(許文道), 박철언(朴哲彦), 최창윤(崔昌潤)씨 등 이른바 「수석급 비서관」들을 휘하에 두고 단단히 장악하였다. 그의 판단력이나 분석력, 문장력이 뛰어나 이 비서관들을 실력으로 승복시킨 덕분이었다. 朴哲彦씨는 6공화국 실력자이던 때도 許和平씨를 「브라이트한 분」이라고 평하였다.

집안의 사상관계로 곤혹

許和平씨가 5공초기에 밀려나고 6공에서는 국회의원 공천을 받지 못한 데 대하여 盧대통령의 한 측근은 『全斗煥, 盧泰愚 두분은 許씨의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좀 거북하게, 또는 어렵게 생각하는 것 같더라』고 말했다. 許和平씨가 88년에 현대사회연구소 소장으로 부임하자 노조가 그를 배척하는 집단행동을 벌였다. 노조원들의 농성이 계속되는 가운데 그를 찾아가 만난 한 기자는 『고립무원의 상황에 있으면서도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로 딱 버티고 있던 그가 퍽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知的인 분위기를 풍기고 깔끔·소심하면서도 담대한 인상이었다』는 것이다. 許씨는 그런 고립무원의 상태 속에서 노조를 제압하였다.

김진영(金振永)과 張世東

합수본부장 비서실장으로서 許和平대령은 보안사·정보부 ·경찰에서 올라오는 정보보고를 읽고서 중요정보를 분류하고 요약하며 全본부장에게 올리는 일도 했다. 그때 합수본부참모장은 우국일(禹國一)준장이었다. 정규육사 출신이 아니고 곧 전출될 예정이었으므로 참모장 역할을 적극적으로 하지 못했다. 반면에 許和平실장이 참모장 역할을 하고 있었다. 許三守씨는 솔직·충직·결벽·저돌적인 장교였다. 업무를 떠나서는 무골호인이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구김살이 없는 순진한 면을 보이기도 하였다. 李鶴捧중령은 몸집이 좋고 덜렁덜렁하는 호인의 분위기를 풍기지만 위기때는 동물적인 기민한 판단력과 임기웅변으로 정확하게 대처하는 사람이었다. 金振永당시 수경사33경비단장은 육사17기 생도시절부터 許和平, 許三守씨와 절친하였다. 호탕하고 친화력이 강한 金대령은 따르는 후배가 가장 많은 장교로 꼽혔다.

全본부장의 측근 2許1金1李는 모두 경상도(경남3, 경북1) 출신이었는데 張世東씨는 전남출신이었다. 張씨는 全본부장과 개인적 친분에 주로 의존하고 있었다. 경상도 출신이 주류인 다른 全씨 측근들과는 인간적으로 크게 가깝지는 못했다. 全斗煥씨를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도 許三守·許和平·李鶴捧씨가 비교적 덜 딱딱하고, 張世東씨가 경직돼 있었다. 앞의 세 사람은 분위기가 비교적 자유로운 보안사 출신이고, 張씨는 야전부대 출신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이들도 있다.

許三守씨는 요사이도 『全斗煥씨와 제5공화국의 비극은 우리 같은 주도세력이 중도에서 떨어져나갔기 때문에 빚어진 것이다』고 공공연히 이야기하고 있다. 『정권을 창출한 사람들이 핵에 남아 있어야 주인의식을 갖고 정권의 문제점을 수정하며 뒷마무리까지 생각하게 되는데, 그런 책임의식이 없는 사람들이 국정을 요리함으로써 권력을 즐기기만 했을 뿐이다』

張世東 전 안기부장이 권력의 핵에 머물러 있지 않았느냐는 반론에 대해서 한 주도세력 인사는 『그는 全대통령에게 直言을 할 줄 몰랐다』고 했다. 5공 출범기에 2許1李의 핵심보다 한 수 멀리 있었던 張씨는 정권창출의 기획자라기 보다는 실천자라는 시각이 주도세력 사이에는 굳어 있다. 5·16때도 그랬지만 쿠데타를 기획한 사람들이 병력을 직접 동원한 이들보다 쿠데타가 성공한 뒤에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이 하나의 법칙이다.

권익현(權翊鉉)과 노태우(盧泰愚)

10·26∼12·12 사이에 全斗煥본부장에게 영향을 준 이들로는 측근 부하 이외에 盧泰愚, 백운택(白雲澤), 權翊鉉, 배명국(裵命國.육사14기·중령예편, 민정당 의원 역임), 윤태균(尹泰均.육사13기·한국도로공사 사장 역임)등 하나회출신들과 이원조(李源祚)씨 등 민간인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全본부장을 자주 찾아와 만난 정치정세에 대해 의논했다. 白雲澤준장(당시 방위사단장)같은 이는 적극적으로 全장군을 부추기기도 하였다. 權翊鉉, 裵命國, 李源祚씨는 尹必鏞장군숙청사건 때 연루돼 투옥되거나 현직에서 추방되었던 이들이다.

12·12직전에 全본부장과 자주 만났던 한 인사는 『그때 우리는 직접 나서지 않고 누구를 추대할 생각도 했다』고 말했다. 간판으로 내세울 사람으로 검토된 이들은 崔圭夏, 鄭昇和, 申鉉碻, 盧載鉉, 朴泰俊씨 등이었다고 한다. 그 가운데서도 육군장교단으로부터 존경을 받아온 鄭총장이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어 鄭총장의 뜻을 우회적으로 타진해 보기도 했으나 鄭총장이 군부대를 순시하면서 『군은 앞으로 정치에 개입해선 안 된다』느니 『청와대 경호실·정보부 등에 근무한 정치장교들에 대한 軍內의 반발』에 대해서 공공연히 언급한 것이 全씨 그룹의 鄭총장에 대한 「기대」를 무산시켰다는 것이다.

보안사(당시는 방첩대)가 정치의 막후에서 움직이고 있었던 1960∼70년대에 盧泰愚씨는 정보과장, 權翊鉉씨는 정보처장을 지내면서 현실정치 판에 깊숙이 관계였다. 영관급 장교의 신분으로서 與野정치인이나 군장성을 스스럼없이 만나고 다녔다. 『제3공화국의 정치裏面史를 알려면 盧泰愚, 權翊鉉이 입을 열어야 한다』는 말이 지금도 나돌 정도이다. 盧 전 대통령은 대위시절부터 정치를 한 직업정치인으로 봐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장교시절의 全斗煥, 盧泰愚, 權翊鉉씨에 대해서 한 보안사 간부 출신은 이렇게 말했다. 『보안사시절에는 盧, 權 두 사람이 더 친했던 것 같다. 盧씨가 그때도 가장 신중한 사람이었다. 盧씨는 全, 權씨의 상담역이기도 했다. 동기생들이 의논상대로 盧씨를 자연스럽게 택할 만큼 그의 판단력은 정확하였다. 과격한 생각도 盧씨를 거치면 온건해졌다.』 盧泰愚대위는 다른 고참장교들보다 파격적인 우대를 받아 정보과장이 되었다고 한다. 과장들 모임에서 한 과격한 선배가 盧대위를 가리키면서 『너는 무슨 빽으로 과장이 되었느냐』고 모욕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盧대위는 그 비난에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고 식사만 묵묵히 계속하여 『무서운 사람이다』는 인상을 깊게 심어주었다고 한다.








[ 2016-06-04, 10:58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유신     2016-06-07 오전 2:00
비겁한 인간들
그러니 전두환이 저렇게 몰매를 맞아 역적이 되었는데도
모기 소리도 없지! 등신들!

맨위로월간조선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뉴데일리  |  리버티헤럴드  |  뉴스파인더  |  이승만TV  |  장군의 소리  |  천영우TV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