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共軍 개입을 둘러싼 워커 장군의 ‘誤判(오판)’ - ④
《6·25전쟁의 현장》(4) / 劉載興(유재흥) 2군단장에게 날아든 悲報, ‘熙川 정면에 있던 大軍(중공군)이 공세를 개시했다!’

鄭淳台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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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一權은) 워커 사령관에게 “청천강線(선)에서 태세를 정비하고, 중공의 동태를 살펴, 이후의 행동을 결정해야 한다. 북한군은 이미 궤멸했기 때문에 1주일이나 10일의 여유를 준다고 해도 이렇다 할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 만일 중공군이 개입하면 이때까지의 성공이 무너질지 모른다”고 건의했다. 국군 6사단이 청천강변에 도달했던 10월24일 무렵의 일이었다. 그러나 워커는 중공군 개입에 회의적이었고, “중공의 개입은 이미 시기를 잃고 있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楚山 진격전과 이승만의 평양行 

국군의 北進에 대한 북한군의 저항은 예상 외로 미약했다. 1일 평균 26km의 빠른 속도로 북진하여 10월10일에는 원산을, 10월20일엔 평양을 완전 탈환했다.  

10월20일, 평양을 완전 점령했지만, 거기에 도취할 여유는 없었다. 평양 공략은 鴨綠江(압록강)으로 북진하는 작전의 한 마디에 지나지 않았다. 그날, 미 空挺隊(공정대)가 肅川(숙천)과 順川(순천)에 강하했다. 다저스 戰車(전차)대대의 탱크 외벽에 탑승한 국군 제12연대는 順川으로 급행했다. 제12연대장 김점곤 대령은 “평양 공략에서 시종 제1선에 섰던 것도 생애의 영광이었지만, 順川의 ‘링크 업(link up·연결)’ 部隊로 선발된 것도 대단한 명예였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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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0월25일 한국전쟁에서 반격에 나서 초산까지
진격해 들어간 육군 제6사단 7연대 병사가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고 있는 사진.

10월22일, 유엔군이 청천강에 도달했다. 맥아더 유엔군총사령관은 10월24일 국경선을 향한 총공격을 명했다. 전쟁의 종말을 예상한 명령이었다. 국군 제2군단과 미 제1군단의 諸隊(제대)는 10월22∼24일에 걸쳐 淸川江(청천강)을 건넜다. 이제, 압록강에의 1번 도착 경쟁이 개시되었던 것이다. 10월26일, 드디어 육군 제6사단 예하 제7연대가 국경 도시 楚山(초산)에 태극기를 꽂고, 압록강물을 수통에 담아 경무대로 보낼 때는 통일의 꿈이 실현되는 듯했다.    

이에 앞서 이승만 대통령은 평양의 점령을 축하하기 위해 申性謨(신성모) 국방장관, 정일권 참모총장, 白仁燁(백인엽) 육본정보국장을 대동하고 10월24일 09시, 평양에 飛來(비래)했다. 평양비행장에 내린 李 대통령을 수만의 군중들이 열렬하게 환영했다. 

제1사단장 백선엽 준장은 특명을 받고 10월24일의 평양시 시민대회를 조직했다. 권위와 권력에 맹종을 강요당해온 북한의 주민들은 자율적인지, 습관적인지, 새로운 지도자를 맞이하기 위해 구름처럼 모였다. 李 대통령은 시민대회에 참석한 평양시민들에게 통일한국의 포부를 밝혔다.

李 대통령 일행은 24일 밤을 평양에서 지내고, 다음날인 25일 제각기 임지로 떠났다. 그러나 그날 밤부터 異變(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통일의 좌절을 불러오는 중공군의 개입이었다. 유엔군의 예상과 달리 중공의 大軍은 이미 국군과 유엔군의 등 뒤에서 기습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중공군의 개입―  워커 장군도 최악의 사태에 대비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국군과 미군은 과연 중공군 개입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일까? 1950년 10월1일자로 육본 정보국장에 기용된 白仁燁(백인엽) 준장은 중공군의 동향을 확인하기 위해 몹시 분주했다. 그는 정보 수집을 위해 정찰기를 타고 제1선을 돌아다니며 그 징후를 찾고 있었지만, 원산(10월10일)·함흥(10월17일)을 점령하고, 평양(10월20일)을 함락시켜도 중공군의 개입 징후는 파악되지 않았다. 그러나 戰場(전장)에서는 합리적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뭔가 불길한 예감, 즉 가슴 두근거림 같은 것이 느껴진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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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共軍 1~3차 공세와 유엔軍의 반격 / 출처: 육군군사연구소 刊 <1129일간의 전쟁, 6·25전쟁>



평양 점령 직후, 백인엽 정보국장은 정보수집의 제1요점으로 ‘중공군의 동향에 대하여’라는 문서를 올려 결재를 요청했다. 정일권 참모총장은 “이제는 아마 (중공군 개입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全세계에 정보망을 펴고 있는 미군도 중공군이 지금 새삼스럽게 개입할 리 없다고 판단한다. 杞憂(기우)라고 생각하지만…”이라면서 싸인을 해 주었다.

압록강과 두만강의 1번 점령을 경쟁하고 있던 각 사단은 중공군의 개입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맹렬한 진격을 계속하고 있었다. 중공군의 개입 예측에 대해 정일권 총장은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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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커 美8군사령관

<마음 속에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고 있었다. 특히 만주에 100여 만의 조선족이 남아 있는 것을 고려하면, 이들을 동원해 북한에 보내는 것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공군 개입에 대해 우리도 美8군처럼 “이 시점에서는 있을 수 없다”는 판단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미국 측의 자료는 풍부하고, 그 판단은 합리적인 것으로 비쳤고, 또한 “중공군 개입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우리의 일방적 바람도 겹쳐져 있었다.
 원래, 군인은 항상 최악의 사태를 생각하고, 최소한 마음의 준비만큼은 해 두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워커 8군사령관은 중공군이 대거 출현해 그것을 확인할 때까지, 결국 최후까지 최악의 사태를 생각해 대비하지 않았다.>

   

또 정일권 장군은 연합작전의 어려움을 회상하고, 평소의 협동훈련을 강조했다. 그가 좋은 보기로 거론했던 것이 청천강변의 패전이다. 丁 장군에 의하면, 당시 한국군으로서는 청천강을 추격의 한 매듭으로 보고 있었다고 한다. 10월1일의 周恩來(주은래·中共 수상) 성명과 중공군의 동향, 臺灣(대만) 소식통으로부터의 정보, 한국의 특수정보망이 가져온 징후, 동양인 특유의 육감, 상대를 알고 있는 지혜라고 할까, 아무튼 이대로 우쭐거리고 추격하면 터무니없는 일이 벌어진다는 예감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워커 사령관에게 “청천강線(선)에서 태세를 정비하고, 중공의 동태를 살펴, 이후의 행동을 결정해야 한다. 북한군은 이미 궤멸했기 때문에 1주일이나 10일의 여유를 준다고 해도 이렇다 할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 만일 중공군이 개입하면 이때까지의 성공이 무너질지 모른다”고 건의했다. 국군 6사단이 청천강변에 도달했던 10월24일 무렵의 일이었다. 그러나 워커는 중공군 개입에 회의적이었고, “중공군 개입은 이미 시기를 잃고 있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정일권 장군이 말하는 ‘평시의 협동훈련’이라는 것은 연대 및 사단급의 統·聯合(통·연합)작전 훈련의 필요뿐만 아니라 최고 레벨의 협동훈련의 필요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그 내용은 지휘의 수순 및 방법의 연습훈련, 그리고 상호간에 신뢰와 서로 돕는 정신을 釀成(양성·어떤 분위기나 기분을 자아냄)하고, 또 상대의 입장 및 사고방식을 이해하는 것 등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 같다. 중공군 개입에 대한 당시 美軍의 일반적인 생각을 美 고문관 하우스만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 바 있다.

<6·25 전쟁 발발 직후 南중국으로부터 北上 중인 中共의 대군이 발견되었고, 그들은 8월경부터 9월 초순에 걸쳐 安東(지금의 丹東)의 압록강교 북안에 집결중이라고 보고되고 있었다. 그러나 情報(정보) 평가의 결론은 부대의 교대라든가, 국경의 경비를 강화하고 있다든가 하는 것 등으로, 개입을 예측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一抹(일말)의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고문단장 파로 준장(유럽 주둔 제7군사령관 역임)은 나에게 “중공군은 만주에 집결하고 있다고 듣고 있지만, 그들은 바보가 아니지 않는가?”라고 말했다.> (佐佐木春隆 著 《朝鮮戰爭 韓國編》에서 인용)  


국군 제2군단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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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0월25일부터 1951년 1월15일까지의 戰況. 중공군의 파죽지세로 남하, 경기도 안성-충북 단양-
강원도 삼척으로 이어지는 축선까지 진격해 내려왔고 유엔군은 후퇴를 했다.


그렇다면 실제상황은 어떠했는가? 국군의 평양 점령보다 하루 앞선 10월18일 저녁, 彭德懷(팽덕회)가 지휘하는 中共軍(중공군)의 先遣(선견·먼저 파견된)부대가 극비리에 鴨綠江(압록강)을 渡河(도하)했다. 중공군은 평안북도 동부 산악지대(지금 북한에서는 慈江道라고 부름)에 숨어들어, 반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국군 제2군단 사령부가 황해도 谷山(곡산)으로부터 평안남도 成川(성천)에 진출하자, 예하 제6사단으로부터 보고가 들어왔다. 그것은 “평안북도 熙川(희천)에 들어간 제7연대가 중공군과 접촉하고 있다”는 놀라운 전보였다. 林富澤(임부택) 대령이 지휘하는 제7연대가 점차 격렬해지려는 저항을 뿌리치고 희천을 공략한 것은 10월22일이었다.

劉載興(유재흥) 제2군단장은 있을 수 있는 일로 판단하고 육본에 急報(급보)했지만, 육본의 반응은 “중공군이 개입했다는 징후는 인정되지 않는다. 믿을 수 없는 일이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姜文奉(강문봉) 육본 작전국장은 “정보국장(注·백인엽 준장)으로부터 개입에 관한 얘기는 들었다. 그러나 확인된 것은 아니었고, 당시, 미군의 일반적 분위기가 그렇고 해서 그것이 믿어지지 않았던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중공의 개입을 확인했던 순간의 놀람이라고 한다면 6월25일 아침과 마찬가지였다”고 증언했다.

10월24일, 제6사단은 제19연대로 熙川을 확보케 하고, 제7연대를 압록강변 楚山(초산)으로 돌진시켰다. 그리고 제2연대는 역시 압록강변인 碧潼(벽동)으로 돌진시키기 위해 청천강 북쪽의 온천고을인 溫井(온정)으로 진출 중에 있었다.

또 제8사단은 평안남도 동부 산악지대인 孟山(맹산)과 寧遠(영원)을 점령한 뒤 德川(덕천)에 진출 중이었고, 제7사단은 美8군의 예비부대가 되어 청천강 하구 남안의 安州(안주)에 집결 중이었다. 결국 제2군단은 육본의 명령에 의거해 縱橫(종횡)으로 분산해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희천으로부터의 보고는 갈수록 危急(위급)을 告(고)하고 있었다. 희천에 진출한 제6사단장 金鍾五(김종오) 준장은 “적어도 4개 사단의 중공군이 전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보고했다. 유재흥 제2군단장이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다음날인 10월25일, 제2군단 사령부에는 잇달아 悲報(비보)가 날아들었다.
  
― 熙川 정면에 있던 大軍(중공군)이 공세를 개시했다. 我軍 부대는 이제 포위되고 있다.
― 온정으로부터 西北進한 제2연대의 선두는 大부대에 포위되어 분산중이고, 主力은 즉시 구원에 나섰다.
― 제7연대는 檜木洞(회목동)에 진출했다. 그러나 그 연락로는 차단되어 있다.

이런 前線(전선)으로부터의 정보를 종합하면 중공군은 5∼6개 사단 이상으로 판단되었다. 유재흥 제2군단장은 희천으로 급행해, 敵情(적정)을 살폈다. 명확히 북한군과 다른 대군이 희천을 포위 중에 있었다. 劉 군단장은 제6사단장 김종오 준장에게 만일의 경우 제2군단 사령부가 있던 군우리(청천강 南岸 개천 지역)로 후퇴할 것을 명하고, 오후 늦게 사령부로 돌아오자, 2개의 명령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는 美8군으로부터 온 것으로, 雲山(운산)의 상황을 통보한 다음, 청천강과 九龍江(구룡강)의 중간지대에 새 戰線(전선)을 구성해서 공세를 지속하라고 명령한 것이었다. 또 하나는 육본으로부터의 人事(인사)명령으로, 유재흥 군단장을 “육군참모차장에 轉補(전보)한다”라고 쓰여 있었다. 劉 군단장은 일순 눈을 의심했지만, 李翰林(이한림) 참모장 및 李周一(이주일) 작전부장이 “승진을 축하합니다”라고 인사했다.

그날 밤, 후임인 백선엽 준장에게 20∼30분간 필요한 사항을 급히 인계하고 大邱(대구) 육본으로 출두했다. 하지만, 걱정으로 잠도 자지 못했다. 前線(전선)으로부터의 보고는 시시각각 군단이 붕괴되고 있는 상황을 나타내고 있었다. 2∼3일 지난 뒤 신성모 장관과 정일권 참모총장으로부터 “군단장으로 돌아가 달라. 예삿일이 아니다”라는 명령을 받았다. 즉시 연락機를 타고 군단 사령부로 복귀했다. 10월27∼28일경이었다.
 
그 무렵, 美8군은 東京(동경)으로의 凱旋(개선)을 준비하고 있던 미 제1기병사단을 雲山(운산)으로 급파해 공세의 再起(재기)를 준비 중에 있었다. 하지만, 국군 제6사단은 거의 붕괴했고, 국군 제8사단은 강한 敵의 압박에 견디지 못하고 있었다. 그날 밤, 워커 8군사령관은 국군 제2군단 사령부를 방문, 다음과 같은 요담을 나눴다. 

 “맥아더 원수로부터 총 추격의 명령을 받고 있다. 일각이라도 빨리 압록강에 도달할 것을 기대한다.”
 “곤란하다. 전에 보고한 것처럼 확실히 중공군이 들어와 있다. 희천 正面만으로도 4개 사단(후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중공 제38군의 3개 사단)이 확인된다고 보고받았다. 만일 중공군 개입이 사실이라면, 이대로의 돌진은 회복 불능의 사태에 빠지고 만다. 만약 개입이 虛報(허보)라고 해도 이대로의 돌진 지속은 위험하다. 보급도 바닥을 치고 있다. 지금은 청천강변에서 태세를 정리해야 하는 단계라고 생각한다.”
 “실은 나도 그렇게 생각해서 東京(동경)에 조회했더니, 거꾸로 총 추격의 명령을 받았다. 그래서 귀관의 의견처럼 청천강에서 태세를 정비해야 할 시기라고 다시 건의했지만, 맥아더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무리지만, 추격을 계속해 달라.”
 “보급이 계속되지 않고 있다. 희천의 제6사단은 벌써부터 탄약과 휘발유의 보급을 호소하고 있다.”
 “空輸(공수)한다. 걱정 말라!”
 “가능성이 없다. 너무 위험하다.”
 “책임은 내가 진다. 가 달라. 빨리 제8사단을 江界(강계·당시 김일성의 도피처)로 向發(향발)시킬 것을 기대한다.”

이때 劉 장군은, 현실의 敵情(적정)과 맥아더의 督戰(독전) 사이에 낀 워커가 매우 안쓰럽게 보였다고 한다. 東京에 있는 점령군사령부의 안락의자에 앉아서 생각하는 것과 현지에서 일어나는 전황과의 사이에는 헤아릴 수 없는 차이가 있었다. 최소한 맥아더 원수가 지휘소를 서울이나 평양으로 전진시켰다면, 이와 같이 무모한 돌진을 명하지는 않았을 터이다. 東京은 전쟁터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청천강변으로 몰린 我軍

1950년 10월25일, 중공군의 제1차 공세로 국군과 유엔군은 전혀 새로운 전쟁에 봉착했다.  당시 국군 제1사단 부사단장이었던 崔榮喜(최영희·육군참모총장 역임) 장군은, 雲山(운산)의 이변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10월24일, 사단이 청천강을 건널 때 백선엽 사단장은 李 대통령을 출영하기 위해 평양에 가 있었는데, 왠지 모르지만 이상한 가슴의 떨림을 느꼈다. 중공이 이대로 침묵한 채 보고만 있을까 하는 의심이었다.
 10월25일, 제15연대를 前衛(전위)로 해서 북진, 사령부가 寧邊(영변)에 도착해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중공군인 듯하다”고 하는 제1보가 들어왔다. 雲山(운산)에 급행해서 보니 이제까지의 적과 달랐다. 북한군은 쥐처럼 민첩하고 擧措(거조·말이나 행동의 태도)도 교활했지만, 당면해 있는 적은 ‘만만디’(悠悠하다)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들도 산도 뭔가로 꽉 채워져 있다고 느꼈다. 평양의 시민환영대회를 마치고 돌아온 백선엽 사단장은 일찍이 만주군 중위로 중공군과 싸웠던 경험이 있어 한 눈으로 중공군임을 직감했다. 그런데 사단사령부에는 백선엽 사단장을 제2군단장으로 명한다는 전보가 들어와 있었다. 제2군단에 이미 이변이 일어나고 있다는 통지가 있었기 때문에 白 장군은 바로 부임했다.  
 그래서 내가 후임 사단장에 임명되었지만, 탄약 등 보급품도 별로 남아 있지 않아 고민했다. 어떻든 四周(사주)가 異情(이정·敵의 동향이 서로 다르다)이어서 雲山(운산)을 중심으로 圓形陣地(원형진지)를 짜고, 異變(이변)에 대비했다. 
 美 제1군단으로부터는 돌진을 속행하도록 요망해 왔지만, 보급품, 특히 “탄약이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거절했다. 만약 그때 명령대로 무리하게 공격했더라면 제1사단은 그때 풍비박산했을 것이다.>

 
10월25일, 이렇게 서부전선에서 국군은 중공군과 처음 접촉했다. 이날, 중공군은 淸川江(청천강) 北岸의 雲山(운산)·溫井(온정)·熙川(희천) 정면에서 제1차 공세를 개시했다. 제1차 공세(1950년 10월25일∼11월5일) 때 중공군은 짧게 끊어 치는 打擊(타격)에 의해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을 저지해, 그들의 主力부대가 도착하기까지 시간을 버는 목적을 달성했다.

중공군의 제1차 공세 개시 다음날인 10월26일까지도 전선은 博川(박천)∼雲山(운산)∼長津(장진)∼利原(이원)의 線(선)에서 형성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날, 국군 제6사단 예하 제7연대의 1개 대대는 無人之境(무인지경)으로 달려 압록강변의 楚山(초산)에 도착, 압록강의 물을 담은 수통을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에게 직송하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전쟁이 끝나고 통일이 다가오는 듯했다. 

그러나 11월1일, 중공의 大軍은 본격적인 공세를 개시, 11월5일에는 제8군을 청천강변으로 몰아넣었다. 이리하여 통일의 염원은 갑자기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면 중공군의 무기 수준은 어떠했을까? 제1차 공세 시 그들은 박격포 이외의 중장비는 거의 없었고, 개인화기로는 보병 소총을 휴대했을 따름이었다. 그 소총들은 國共內戰(국공내전)과 패전한 뒤 일본군으로부터 탈취한 것이었다. 반면 탄약은 부족했다.

건국 초기의 중공은 자체적으로 중화기나 탄약을 제조할 만한 기술과 시설이 없었다. 중공군의 화력은 미군에 비해 10% 수준에 불과했다. 제1차 공세에서 성공하자, 중공군은 20개 사단을 장비할 수 있는 무기를 소련으로부터 長期借款(장기차관)으로 확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重火機(중화기)는 턱없이 부족한 상태에서 중공군은 높은 사기를 유지하며 제2차 공세를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동북부 지역에서의 돌진

그러나 동부전선에서는 국군 제1군단이 아직도 돌진을 계속하고 있었다. 제3사단은 10월10∼17일에 점령한 元山(원산)∼咸興(함흥) 지구를 경비하고, 수도사단은 함경북도의 平定(평정)작전을 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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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0월24일~11월24일까지의 戰況. 서부전선에서 유엔군은 운산까지 진격했고, 10월26일 마침내
국군 6사단 7연대가 압록상 초산까지 진격해 압록강 물을 떠 李承晩 대통령에게 獻水(헌수)했다. 그러나
11월 말, 뜻밖의 철수명령이 떨어진다.


10월26일, 美 제1해병사단이 元山(원산)에 상륙하자, 국군 제3시단은 두만강 상류 지역으로 向發(향발)하고, 수도사단은 두만강 하류지역을 향해 돌진했다. 仁川상륙작전에 성공한 美 10군단을 인천항·부산항을 거쳐 동해안의 원산항 등에 상륙시킨 맥아더의 戰場(전장) 이원화 전략이 인력·시간· 물자를 낭비한 헛수고였던 데 대해서는 뒤에서 재론할 것이다.   

서부전선에서는 10월25일부터 11월5일에 걸쳐 중공군이 출현해, 작전이 극심한 곤란을 겪었지만, 동북부에서는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金白一(김백일) 제1군단장의 지휘 아래 돌진에 이은 돌진이 계속되고 있었다. 다음은 당시 제1군단 참모장 金鍾甲(김종갑·육군중장, 국방차관 역임) 장군의 회고이다.

<동북전선에서의 북진, 그것은 소위 疾風(질풍)이 낙엽을 말아 날리는 기세였다. 원산에서는 한 번의 전투가 있었지만, 그 이후는 保安隊(보안대)라든가 패잔병과 부딪친 것뿐으로, 吉州(길주)와 淸津(청진)을 탈취할 때도 조직적인 저항은 받지 않았다.
 함흥 점령 때는 1000명 정도의 무장 적병이 투항했다. 이 전쟁을 통해 최대의 집단투항이었다. 제1군단의 참모들은 헌병을 동승시킨 지프 1대로 자유롭게 전선을 왕복하고 있던 상태였다.
 결국, 북한군의 대부분은 국군에 추월 당해, 북한지구에는 지역방위대 및 自警團(자경단) 따위밖에 없었다. 그래서 권위에 맹종하는 것이 익숙한 북한 주민은 자유라든가 민주주의를 동경해서가 아니라 새로 진입해온 권력에 대하여 그냥 복종했다. 
 당시 趙炳玉(조병옥) 내무부장관이 함흥을 방문했는데, 시민동원 요청이 내려왔다. 그래서 함남도청에 명령했더니, 불과 2∼3시간에 3만 명의 시민이 모였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진짜인지 의심해 현장에 가 보고 깜짝 놀랐다. 실제로, 3만 명 이상의 남녀노소가 운집, 질서정연하게 대열을 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때는 영하 10도에 눈까지 오는 날이었다. 群衆(군중)은 두건을 쓰고 외투와 속옷을 껴입으면서도 사열을 받는 군대처럼 몸을 움쭉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김종갑 참모장은 공산주의자는 겨우 5년의 사이에 민중을 이렇게 모질게 단련시켰는지, 毛骨(모골)이 松烟(송연)해졌다고 한다. 그래서 이런 백성을 민주화시키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다는 생각도 들었다고 털어놓았다.   

시간의 문제도 있었지만, 상부로부터는 북한 지역에 대한 기본적인 정책은 무엇 하나 하달되지 않았다. 단지 “동포로서 부드럽게 포용하라”든가 하는 등의 心得(심득)사항만 제시되었을 뿐으로, 어떠한 행정을 시행하라든가, 어떠한 방침으로 민주화하라든가 하는 시책은 내려오지 않았다.

11월12일, 함흥에서 제3사단장이 교대되었다. 李鍾贊(이종찬) 준장은 육본의 兵器(병기)행정본부장으로 전출하고, 후임으로 함경남도 新浦(신포) 출신의 崔錫(최석) 준장이 부임했다. 어떻든 함경도에 들어오면 人情(인정)이 확 바뀐다. 원래 사투리가 거세고, 단결심이 강하며, 서울에 와서도 함경도 사람은 동향인이 경영하고 있는 식당이 아니면 출입하지 않는다고들 했다. 刻苦勉勵(각고면려)해서 한 밑천 마련하는 풍습이 강하고, 克己心(극기심)도 대단해 ‘北淸 물장수’라도 子弟(자제)를 대학에 보내고, 富(부)를 축적한다고들 했다.  

이와 같이 끈끈한 지역사회여서 국군이 함경도에 들어가자, 이르는 곳마다 “함경도 출신의 ○○ 장군이 왔다!”는 벽보 및 깃발이 걸리는 등 대환영이었다고 한다. 함경도 방면을 맡은 국군 제1군단장 金白一 소장은 함경북도 明川(명천) 출신. 당시의 육군참모총장 정일권 장군의 고향은 함경북도 두만강변의 국경마을 慶源(경원)이었다. 당시, 국군 내부에서는 함경도 인맥을 ‘알라스카’라 불렀다.

국군 제1군단, 눈보라 속에서 두만강으로

11월5일, 서부전선의 美8군은 청천강 연안에 몰려있었지만, 동부전선의 국군 제1군단 예하 제3사단은 함경북도 吉州(길주)로 진격했다. 북한의 겨울은 빠르고, 눈으로 山河(산하)가 덮힌다. 그러나 장병들은 아직 夏服(하복)을 입은 채였고, 군화 밑바닥은 닳아빠져 있었다. 사단은 보급을 기다렸다.

제3사단은 吉州로부터 함경산맥을 넘어 合水(합수), 白岩(백암)으로 향발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지만, 이대로의 차림으로 함경산맥을 넘는다면 전원이 얼어 죽게 마련이었다. 백암은 북한의 핵실험장인 길주군 풍계리에 인접한 한 곳으로 최근 진도 4.2∼5.1 규모의 지진이 발생했고, 原子病(원자병·방사능 被爆에 의한 질병)이 의심되는 주민도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뒤늦게 防寒(방한)외투가 도착함과 함께 제1군단 부군단장 李俊植(이준식) 준장이 방문해, 丁來赫(정래혁) 제3사단 참모장에게 “귀관은 제22연대의 선두에 서서 合水(합수)에 돌진하라”고 엄명했다. 소위 督戰(독전)이었다. 사단장을 향해 직접 독려하면 감정문제로 발전하기 때문에 야전에서 흔히 사용되던 방식이었다.

이준식 부군단장은 김백일 군단장으로부터 엄명을 받고 온 듯했다. 평소 온화했던 李 장군의 모습은 아니었다. 고향 明川(길주 북쪽 30km)에의 錦衣還鄕(금의환향)을 고대했던 김백일 군단장은 곧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해서 최후의 독전을 했을 것이다.

수도사단이 富寧(부령) 및 羅津(나진)을 거쳐 茂山(무산), 회령, 穩城(온성), 경원 등의 두만강線에, 제3사단이 합수로부터 普天堡(보천보)로 북진해 백두산을 향하면, 전쟁이 끝날 것이었다. 서부전선의 청천강 연변에 이변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10월29일부터 11월4일에 걸쳐 利原(이원)에 상륙한 동부전선의 美 제7사단은 압록강 상류 惠山鎭(혜산진)으로부터 하류로 향하게 되어 있었다. 지기 싫어하는 김백일 군단장이 예하 사단에 독전의 기합을 넣었던 것 같다.

정래혁 참모장은 명령을 받은 대로 선두에 서서 北進(북진)의 途上(도상)에 올랐다. 추위와 눈과 지형이 大敵(대적)이었다. 북한군은 載德(재덕) 부근에서 약 1개 중대가, 合水 부근에서 약 1개 대대가 가벼운 저항을 시도했을 뿐이었다.

11월22일, 제22연대는 白岩(백암)에 들어갔다. 맥아더 원수가 크리스마스 공세를 發令(발령)하기 이틀 전이었다. 그 무렵, 정래혁 참모장은 과로와 추위로 폐렴을 앓고 있었다. 그는 특별기로 후송되었지만, 부대의 雪中(설중) 진군은 계속되었다. 11월30일, 제1군단의 前線은 백암∼富寧(부령·두만강변 국경도시 회령 남쪽 45km)의 선으로 형성되었다. 이때쯤 보급도 받아 사기가 드높았다.

하지만, 뜻밖의 명령이 내려왔다. “美 제10군단의 지휘下에 들어가 해상 철수하라”는 명령이었다. 국군 제3사단 主力은 吉州 남방 城津(성진)에서 승선했고, 국군 제1군단 주력은 미 제10군단의 엄호 아래 興南(흥남)으로 남하했다. (계속)

[ 2016-06-13, 17:2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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