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골짜기’에서 당한 ‘인디언 笞刑(태형)’ - ⑥
《6·25전쟁의 현장》(6) / 트루먼의 原爆 사용 암시, “보유하는 여러 兵器(병기)를 사용할 용의가 있다”

鄭淳台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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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 제113사단은 사전에 협곡지대를 선점했다. 하지만, 제2사단 정찰대의 사전 정찰에도 불구하고 이를 확인하지 못했다. 미 제2사단 主力(주력)이 전차·야포 및 각종 차량과 함께 좌우가 산으로 에워싸인 약 15km의 골짜기로 접어들자, 양쪽 山中(산중)에 매복하고 있던 중공군 38軍 예하 제113사단이 일제히 포위공격을 가했다. 미 제2사단 主力은 불과 반나절 동안 무려 3000여 명의 사상자, 3000여 명의 포로와 실종자를 냄으로써 이 골짜기에서 사실상 와해되고 말았다. 이 최악의 참사를 미국 戰史(전사)는 ‘인디언 笞刑(태형·Gauntlet)’이라고 부르고 있다. 인디언은 敵軍 포로나 범법자를 처벌할 때 용사들이 두 줄로 나란히 선 다음에, 그 사이로 이들을 들여보내 통과할 때까지 흠씬 때리는 형벌을 가했다고 한다. 당시, 미 제2사단이 처한 상황이 바로 이러했다.

묘향산 기슭에서 와해된 국군 제2군단

중공군은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의 자신감에 찬 공격 발표가 나오자, 공격의 길목을 노리고 있다가 逆攻(역공)을 하려 했다. 크리스마스 공세를 개시하고 난 바로 다음날인 1950년 11월25일, 후속부대의 집결로 36개 사단으로 증강된 중공군의 제2차 공세(1950년 11월25일∼12월10일)가 시작되었다. 중공군은 중부 산악지대에 새로운 부대를 집결시켜 눈사태와 같이 쏟아져 나왔다.

전선의 붕괴는 미 8군의 最右翼(최우익)인 묘향산 남쪽 기슭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德川(덕천)과 寧遠(영원)으로 진출한 국군 제2군단 예하 제7·제8사단이 중공군의 포위 공격 개시 하루 만에 무너졌다. 국군 제2군단은 중공군 1차 공세에서 상당한 타격을 받아 전력이 크게 약화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력 증강 대책을 세우지 않은 채 가장 취약한 右翼(우익)의 산악지역을 맡게 함으로써 산악전에 능숙한 중공군에게 대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여파는 곧바로 인접 부대인 미 제9군단에 미쳐 제8군의 右翼(우익) 전선이 차례로 무너지는 ‘淸川江(청천강) 도미노 현상’이 시작된 것이다. 중공군의 공격요령은 날개 쪽과 정면으로부터 계속 공격하는 동시에 유엔군의 退路(퇴로)에 미리 병력을 매복시키는 것이었다. 유엔군은 火力으로 이를 분쇄하려 했다. 하지만, 밀물처럼 몰려오는 人海(인해)의 파도에 휩쓸려 陣地(진지)는 잇달아 붕괴되었다.

1950년 11월 말, 유엔군은 한반도에서 東西(동서)의 폭이 가장 좁은 肅川(숙천)∼順川(순천)∼成川(성천)∼陽德(양덕)∼元山(원산)으로 이어지는 平壤(평양) 방위선에서 중공군의 진격을 저지하기로 작심, 각 부대는 절대적인 制空權(제공권) 아래 중공군과의 접촉을 끊고, 이 방위선으로 후퇴하게 했다.

국군 제1사단이 평양 북쪽 25km지점인 永柔(영유) 지역으로 철수한 지 이틀 후인 11월30일은 미군으로서는 잊을 수 없는 치욕의 날이었다. 마지막까지 전선을 지탱하던 미 제9군단 예하 미 제2사단이 軍隅里(군우리·지금의 개천)를 버리고 順川(순천)을 향해 철수하다가 빚어진 비극이었다.


‘죽음의 골짜기’에서 당한 ‘인디언 笞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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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우리 전투 상황도


미 제2사단은 당시 미 제9·제23·제38연대, 4개 포병대대, 1개 전차대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터키여단과 국군 제3연대도 배속되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7년에 창설된 미 제2사단은 지금 경기도 평택과 의정부에 주둔하고 있다. 애칭은 Indian head(인디언 머리). 그것으로 도안된 부대마크를 부착하고 있다. 

군우리 전투는 미 8군이 청천강에서 중공군에 패해 철수하게 되었을 때, 엄호부대로 미 제2사단이 철수하던 중에 중공군 제38군과 벌였던 사투였다. 미 제2사단은 군우리에서 전투 후 순천으로 후퇴하던 11월29일부터 12월1일까지 3일 동안 군우리∼순천 간 협곡지대에서 중공군의 협공을 받았다.
     
군우리에서 順川(순천)에 이르는 도로는 두 갈래다. 安州(안주)를 거쳐 서쪽으로 우회하는 도로와 직행하는 동쪽의 非포장 좁은 길이 있었다. 그러나 비교적 안전한 서쪽 우회도로는 철수하는 유엔군 부대들의 긴 행렬로 인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카이저 少將(소장)의 미 제2사단은 동쪽의 非포장의 좁은 길을 택했다. 그것이 직행도로이기는 했지만, 이 곳은 그야말로 ‘죽음의 골짜기’로 변모했다.

중공군 제113사단은 사전에 협곡지대를 선점했다. 하지만, 제2사단 정찰대는 사전 정찰에도 불구하고 이를 확인하지 못했다. 미 제2사단 主力(주력)이 전차·야포 및 각종 차량과 함께 좌우가 산으로 에워싸인 약 15km의 골짜기로 접어들자, 양쪽 山中(산중)에 매복하고 있던 중공군 38軍 예하 제113사단이 일제히 포위공격을 가했다. 미 제2사단 主力은 불과 반나절 동안 무려 3000여 명의 사상자, 3000여 명의 포로와 실종자를 냄으로써 이 골짜기에서 사실상 와해되고 말았다. 이 최악의 참사를 미국 戰史(전사)는 ‘인디언 笞刑(태형·Gauntlet)’이라고 부르고 있다.

인디언은 敵軍 포로나 범법자를 처벌할 때 용사들이 두 줄로 나란히 선 다음에, 그 사이로 이들을 들여보내 통과할 때까지 흠씬 때리는 형벌을 가했다고 한다. 당시, 미 제2사단이 처한 상황이 바로 이러했다. 미 제2사단의 와해는 엄청난 결과를 빚고 말았다. 平壤(평양)방어선의 동쪽이 텅 비게 된 것이었다. 미군 참전 이래 최대의 손실이었다. 

1950년 11월 하순부터 12월 상순까지 약 2주간에 걸쳐 실시된 중공군의 제2차 공세는 중공군의 기본전술에 대한 無知(무지)와 맥아더가 이끄는 유엔군의 중공군 輕視(경시)에 의한 작전실패였다. 중공군은 미 제8군과 미 제10군 사이에 80km에 달하는 空隙(공극)지대에 2개 군(중공군 제38군과 제42군)을 돌입시켰다. 이어 그 일부(중공군 제38군의 제113사단)을 남하시켜 11월28일, 미 제8군의 평양을 향한 퇴로인 청천강 부근의 三所里(삼소리)를 앞서 점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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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표창을 받은 뒤 촬영한 터키군 장병들의 모습


중공군 제2차 공세로 국군 제2군단이 무너지고 중공군이 덕천·맹산으로 진출하게 되자, 미 제8군 전체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제, 청천강 남쪽의 군우리와 순천 일대의 확보 여부가 미 제8군의 정상적 철수의 사활이 달려 있었다. 미 8군사령관 워커 장군은 터키여단에게 덕천으로 이동해 중공군을 저지하라고 명했다.

터키여단(여단장 타신 야지시 준장)은 11월26일 군우리를 출발하여 덕천 방향으로 이동하다가 와원 일대에서 중공군 제38군과 조우했다. 1950년 10월17일 부산항에 상륙하여 참전한 이래 최초의 전투였다.

용맹한 터키 장병들은 그들 병력의 네 배가 넘는 중공군을 맞아 여단의 全장병(5000여 명)이 한 덩어리가 되어 11월27일부터 29일까지 3일 동안 처절한 혈투를 거듭했다. 이들의 선전으로 군우리∼용원리 협곡에 갇힌 미 제2사단에 대한 중공군의 공세를 저지하는 데 기여했다. 터키여단은 참전 유엔군 최초로 美 대통령으로부터 부대 표창을 받았다. 지금도 터키가 한국을 ‘형제의 나라’라고 일컫는 것은 이런 血盟(혈맹)관계 때문이다.


트루먼의 原爆 암시: “보유하는 여러 兵器를 사용할 용의 있다”

1950년 연말은 유엔군의 최대 위기였다. 11월24일, 유엔군은 ‘크리스마스는 본국에서’라는 표어로 압록강∼두만강에의 진출을 시도했지만, 이것이 중공군의 제2차 공세와 정면으로 충돌하고 말았던 것이다. 유엔군의 공세는 저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공군의 人海戰術(인해전술)에 먹혀버리는 위기적 상황에 빠졌다.

미국 동부시간으로 11월30일, 트루먼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세계적인 動員(동원)을 호소했는데, 질의응답의 도중 충격적인 발언이 튀어나왔다.

“보유하는 여러 兵器(병기)를 사용할 용의가 있다… 原爆(원폭)의 사용에 대해서는 항상 적극 고려를 하고 있다.”

기자회견 후 報道(보도) 관계관이 대통령 발언의 해명하면서, “핵병기의 사용은 가볍게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물 타기’를 했지만, 원폭 사용이 임박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돌았다.

트루먼의 발언에 충격을 받은 나라는, 소련으로부터 보복공격을 받을 공산이 가장 높다고 느낀 西유럽 참전국들이었다. 애틀리 英國(영국) 수상은 워싱턴으로 날아가, 트루먼 대통령으로부터 핵병기 不사용의 언질을 받음으로써 소동은 대충 수습되었다.

트루먼 발언의 배경에는 1950년 11월 말의 단계에 있어서 핵병기의 전술적 사용에 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동시에 그것은 북한을 꼬드겨 전쟁을 도발시킨 소련과 제한적 在來戰(재래전)으로 미군을 코너로 몰고 있는 중공에 대한 경고였다.


丁一權, “자주적인 군사력 개발을 서둘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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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 및 북한군, 유엔군의 攻防을 나타낸 지도(1951년 1월2일~2월28일)


제8군에는 평양과의 유일한 연결로인 청천강 부근의 三所里(삼소리)가 11월28일 중공군에게 점거되었음은 앞에서 썼다. 중공군은 총공격을 개시해 제8군은 총 붕괴의 위기에 몰렸다.   
    
1950년 12월3일은 유엔군이 6·25전쟁에서 승리하겠다는 목표를 포기한 날이었다. 이날, 平壤(평양)방위선의 중앙부에 위치한 成川(성천·평양 동북방 16km)이 중공군에게 탈취되어, 이 돌파구로부터 大軍이 눈사태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항공기의 정찰에 의하면 중공군의 파도는 끝없이 이어져 山河(산하)를 가득 매우고 있는 듯했다. 이때 중공군은 병법상의 企圖秘匿(기도비닉)보다는 스피드를 重視(중시)해, 오로지 南進(남진)을 서둘렀다. 미 8군은 포위되었다. 유엔군이 처한 최대의 위기 중 하나였다.

여기에 이르러 맥아더는 다시 38선에의 총퇴각을 결단했다. 그리고 미 제10군단을 海上(해상)으로 철퇴시켜, 38선으로 후퇴하는 미 8군을 지원토록 지령했다. 이리하여 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군사 전문가들은 유엔군의 크리스마스 공세에 대해 ‘철저한 오판’에 의한 ‘재난을 향한 눈 먼 행진’이라고 혹평했다.

1950년 12월3일, 워싱턴으로부터 “현재의 상황에서 제1로 고려해야 할 것은 귀하(맥아더)가 지휘하는 군대의 안전이다. 군대를 海岸堡(해안보)에 집중시키려는 귀하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지령이 내려왔다. 

이리하여 미군은 군사적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상황 하에서 정치목적의 좌절도 어쩔 수 없었다. 한반도에서의 전쟁 목적을 다시 변경, 어떻게 그들의 군대를 안전하게 보전하는가에 전념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국군의 상황은 참담했다. 미 군사고문단의 로버트 카메론은 한국군의 형편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한국군 사단에는 輕裝備(경장비)뿐이었다. 박격포와 기관총은 정상 수준의 일부만 지급받았고, 사단마다 1개씩의 105mm 輕砲大隊(경포대대)를 보유하고 있을 뿐이었다. 군단에는 포병이나 장갑차조차 없었고, 미군 지원부대도 全無(전무)했다.>
 
이때, 국군 제2군단 예하 3개 사단의 사단장들 중 두 명이 작전 실패의 책임을 지고, 군법회의에 회부돼 극형을 언도받았다. 얼마 후 사면돼 軍에 복귀되긴 했지만, ‘북진통일’의 꿈이 무너지는 가운데 발생했던 일이었다.

미 제2사단장 카이저 少將도 해임되었다. 국군과 유엔군의 士氣(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이런 와중에 “미군이 한국을 포기하고 일본으로 철수한다”는 풍문까지 나돌기 시작했다. 후퇴 중 황해도 沙里院(사리원)에서 白善燁(백선엽) 제1사단장을 조우한 ‘多富洞(다부동) 전투의 전우’였던 미 제27연대장 마이켈리스 대령은 ‘철수 소문’에 대한 白 장군의 물음에, 이렇게 털어놓았다고 한다.

“미군이 철수할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태를 너무 비관하지는 마십시오.”

38선에의 총퇴각 작전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총 3만6000명의 병력 손실을 냈다. 그 중 미군의 인적 손해는 중공 측의 발표로는 2만4000명, 미군 측의 발표는 1만7000명이었다. 美 합동참모회의 의장 브래들리는 그의 회상록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이것으로써 한국전쟁은 승리로부터 급속히 패배로 전환되어 우리 軍은 史上(사상) 최악의 굴욕적인 패배를 맛보았다.”

당시의 육군참모총장 정일권 장군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北進의 열기에 들떠, 참모총장인 나 자신부터 전반적인 事後 관망과 냉철한 정세판단에 소홀했던 점을 후회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전략적으로 북진 좌절의 원인을 따진다면, 맥아더의 전략을 억제했던 당시 워싱턴 당국의 책임으로 돌려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분석과 自省(자성)은 나에게 뚜렷한 主見(주견)을 안겨주었다. 그것은 국가적으로 부여된 여건 下에서 최대한으로 자주적인 군사력 개발을 서둘러야 한다는 것이다.”    
 

北 주민 300만이 한국을 선택

6·25동란 때 南下(남하)한 피난민은 북한 인구의 3분의 1인 300만이었다. 이것은 남북의 체제 경쟁에서 대한민국의 승리이자, 세계 공산주의 진영의 패배였다. 1950년 12월5일, 유엔군은 平壤(평양)의 주요 시설을 철저히 파괴하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때는 중공군의 추격이 없어 이탈에 성공했다.

그러나 중부 산악지대로부터의 공산군 진격은 예상 밖으로 재빨랐다. 制空權(제공권) 下에 서해안 도로를 따라 차량으로 후퇴하는 유엔군보다 중부 산악지대를 도보로 남진하는 중공군 쪽이 오히려 앞섰다. 이 때문에 유엔군은 항상 옆구리와 등 뒤로부터 위협을 받으며 후퇴해야만 했다. 중부 산악지대에서 제2전선을 구성하고 있던 북한군 게릴라가 중공군의 南下를 유도하고, 도로를 보수하며, 식량 등을 제공했기 때문이었다.

이 무렵, 유엔군의 후퇴에 따라 약 300만 명의 북한 주민이 남하했다. 300만 명이라면 당시 북한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다. 찬 겨울바람과 얼음이 떠다니는 대동강을 건너는 대열은 거의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피난민에게 이것은 미군이 지금 당장은 敗走(패주)하지만, 언젠가 다시 반격에 나설 것이라는 믿음이 없었다면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위기로부터 탈출한 유엔군은 12월15일, 38선으로 후퇴, 태세를 再정비했다. 이때 국군과 유엔군은 2주 동안 무려 300km나 후퇴했다.


위기 때 빛난 美 해병대의 엘리트 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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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군은 장진호 근처의 하갈우리로부터 고토리, 진흥리로 빠져 나오는 철수작전에서 불굴의 용맹성을
보였으나, 이 기간 중에 全병력의 50%가 손실을 입는 苦戰을 치렀다.


드디어 동부전선에서도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이 닥쳐왔다. 10월26일, 원산에 상륙한 미 제1해병사단은 북한의 임시수도인 江界(강계)를 점령하고, 서부전선의 부대와 연결하기 위해 장진호 북방으로 진출하던 중에 영하 40도이라는 極寒(극한) 속에서 중공군 12개 사단에게 포위되었던 것이다.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1950년 12월1일∼12월11일에 걸쳐 미 제1해병사단은 柳潭里(유담리)로부터 興南(흥남)에 이르는 125km의 한 가닥 隘路(애로·어떤 일을 함에 있어 생기는 장애)를 복병의 공격을 뿌리치면서 돌파, 후퇴작전을 성공시켰다. 

물론 중공군의 전술적 拙劣(졸렬)함과 동계 장비의 빈약, 그리고 미 항공기의 보급품 투하 및 폭격 등 공중지원에 힘입어 虎口(호구)를 벗어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죽어도 무릎은 꿇지 않는다는 프라이드와 엘리트 의식, 戰友(전우)를 버리지 않는다는 鐵則(철칙)에 바탕을 둔 미 해병대의 鬪魂(투혼)이 위기 극복의 정신적 支柱(지주)가 되었던 것은 확실하다. 미 제1해병사단은 중공군이 매복한 유담리 → 하갈우리 → 도토리 → 진흥리를 빠져나오면서 全병력 중 50%인 6000명의 人命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미 제1해병사단의 탈출작전의 결과, 중공군의 함흥-흥남 진출이 2주간이나 지연됨으로써, 동부전선의 我軍 부대들은 흥남으로 집결할 수 있는 시간을 얻게 되었으며, 곧이어 개시된 흥남철수 작전을 가능하게 했다. (계속)

[ 2016-06-16, 17:4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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