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난민 10만을 軍艦(군함)으로 철수시킨 세계史 최초의 쾌거!” - ⑦
《6·25전쟁의 현장》(7) / 흥남철수의 세 主役 玄鳳學과 알몬드, 金白一 장군 이야기

鄭淳台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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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일 장군이 死後(사후)에 이런 수모를 당한 이유는 대략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그가 滿洲國(만주국)의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滿軍(만군)의 위관 장교 시절 만주 지역의 共匪(공비)와 馬賊(마적) 토벌에 유능했다는 점, ▲1946년 10월에 올린 그의 결혼식이 호화스러웠다는 점(그것이 호화스러웠으면 과연 얼마나 호사스러웠을까?)이다. 그것은 조국을 위한 戰功(전공)에 비하면 그야말로 사소한 것들이었다. 김백일의 동상을 쇠사슬로 묶는 짓은 그가 지켜낸 대한민국을 모욕하는 행위이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

11월30일, 국군 제1군단의 前線은 白岩(백암)∼부령(두만강변 국경도시. 회령 남쪽 45km)∼富居洞(부거동)선이었다. 보급만 뒤따르면 단숨에 두만강에 도달할 기세였다. 하지만, “해상으로 철퇴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생각지도 않던 철수 명령이었다.

국군 제3사단 主力은 城津(성진)에서 철수선에 승선했고, 군단 주력은 미 제10군단의 엄호 아래 흥남으로 집결했다. 진정한 友邦(우방)인지, 어떤지는 비상시가 아니면 알 수 없지만, 흥남으로부터의 해상철수에 즈음해 미 제10군단장 알몬드는 그 眞價(진가)를 나타냈다. 국군 제1군단에 근무했던 장군들이 알몬드 장군에게 높은 평가를 서슴지 않는 것은 이 비상시기에 동맹군인 국군 제1군단의 철수를 먼저 배려한 그의 결심 때문이었다. 반면, 서부전선의 제8군은 전투에 지친 한국군을 後衛(후위·후방을 지키는 부대)로 지정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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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남항 주변에 모여든 피난민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모습.

興南港(흥남항)에서는 12월10일부터 海上(해상)철수가 시작되었다. 미 제10군단은 국군 제1군단, 미 제1해병사단, 미 제7사단, 미 제3사단의 순으로 12월24일까지 승선하고, 부산항과 그 인접 항을 향해 출항했다. 이 敵前(적전) 해상철퇴에는 191척의 선박을 동원해, 장병 10만5000명, 화물 35만 톤, 그리고 南下를 희망했던 북한 주민 9만8000명을 승선시켰다.

제1군단 참모장 金鍾甲(김종갑) 장군의 회고에 의하면, 군단사령부가 江陵(강릉) 앞바다를 지날 무렵에 오키나와로 航進(항진)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강릉에 상륙해서 다시 동해안 작전에 임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강릉 앞바다를 그대로 통과하자, 여러가지 루머가 들끓었던 것이다. 패전의 쇼크는 갖가지 비극적 억측을 나돌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국군 제1군단 장병이 승선한 LST들은 강릉 앞바다를 통과한 지 1시간쯤 후에 接岸(접안)했고, 곧 상륙 명령이 떨어졌다. 三陟(삼척) 북쪽의 동해시 墨湖港(묵호항)이었다. 군단사령부는 묵호에서 강릉으로 북상해, 동해안의 38선 일대를 방어하고 있던 제9사단(사단장 吳德俊 준장, 참모장 朴正熙 대령), 그리고 함께 묵호에 상륙했던 수도사단을 지휘, 다시 동해안 정면 방어에 임했다.

그렇지만, 제1군단의 지휘부를 오키나와로 옮긴다는 헛소문이 돌았다. 상륙지점이 극비였기 때문인지, 전황의 급격한 변화 때문인지, 혹은 맥아더 사령부가 전황을 悲觀視(비관시)했던 데 대한 반응인지, 아무튼 그것 중 하나의 이유 때문에 그런 소문이 돈 듯하다. 확실한 것은 중공군의 본격 개입에 의한 쇼크 때문임이 틀림없었다.   

흥남철수의 상황은, 몇 년 전 1400만 관객을 모은 흥행영화 <국제시장>의 도입 부분에 잘 그려져 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상세히 거론할 것이다. 그 시절 흥남 철수 피난민의 애절한 심경을 표현한 강사랑 作詩(작시), 박시춘 작곡의 가요 <굳세어라 금순아>는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부산의 영도다리 입구에 들어가면서 길바닥에 박힌 버튼 하나만 밟으면 자동적으로 흘러나왔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 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를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1·4 이후 나 홀로 왔다.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 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다
금순아 ! 보고 싶구나 고향 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승달만 외로이 떴다.


흥남철수의 주역: 玄鳳學과 알몬드 군단장

“닥터의 말은 알아들었다. 나(알몬드 제10군단장)는 피난민 문제와 관련한 닥터의 말에 전면적으로 찬성한다. 다만 敵은 흥남 남쪽 원산으로 急進(급진)하고 있다. 지금 단계에서 무엇 하나 확약할 수는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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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국제시장>의 한 장면. 현봉학이 흥남철수 당시,
알몬드 장군을 설득하고 있는 장면이다.

영화 <국제시장>의 첫 장면에 등장하는 흥남철수 작전의 모습은 매우 감동적이다. 그 다급한 상황에서도 자유를 찾는 피난민들을 선박으로 南下(남하)시켰던 일은 미국으로서도 두고두고 자랑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런데 흥남철수 때, 북한 피난민 9만8000명을 미군 LST에 실어 남하시키기 위해 미 제10군단장 알몬드 少將을 설득했던 인물이 누구인지 영화는 자세히 밝히지 않았다.

그가 바로 玄鳳學(현봉학)이라는 이름의 함흥 태생의 의사이다. 영화 <국제시장>에는 알몬드 군단장 옆에 서서 뭔가 간절히 호소하는 듯한 한국인 얼굴의 인물이 등장하지만, 그의 이름과 경력 등은 모두 생략되었다. 세브란스 醫專(연세대 의대의 前身) 출신 의사로, 미국 유학 후에 귀국해 국내 최초로 임상병리실을 개설했던 현봉학은 기묘한 인연으로 미 제10군단에 근무하게 된다. 그 사연은 매우 운명적이었다.
 
1950년 6월28일 서울 함락 때, 그는 歸家(귀가)할 여유조차 없어 그냥 피난민 대열에 섞여들었다. 그는 피난지 부산에서 해군에 입대했다. 미국 유학에서 귀국한 지 3개월, 그는 의사로서 보다도 고급 영어를 하는 통역관으로 重用(중용)되었다. 같은 해 10월 중순, 현봉학 통역관은 미 제10군단장 에드워드 M. 알몬드와 처음 만났다. 알몬드가 마침 38선 북쪽 금강산 남쪽인 강원도 高城(고성)에 주둔했던 우리 해병대사령부를 방문, 申鉉俊(신현준) 해병대사령관과 회담할 때 현봉학이 통역으로 배석했다. 그때 해병대는 해군참모총장의 지휘 하에 있었다.

현봉학은 알몬드의 이름을 알고 있었지만, 맥아더의 심복이라는 정도의 인식 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 무렵 알몬드는 仁川(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고, 이어 西海(서해) → 南海(남해)를 빙 돌아서, 동해안에 상륙한 다음 북한군을 추격하던 시기였던 만큼 그 위엄이 하늘에 닿아 있었다.

맥아더는 한국 전선을 둘로 나눠 서부 전선을 워커 중장에게, 동부전선은 알몬드 소장에게 맡겼다. 개성이 다른 2人을 통괄해 북진통일을 이룩하겠다는 맥아더 構想(구상)은 ‘1개 戰線(전선), 2인의 지휘관’이라는 兵法上(병법상)의 과오를 범했음을 앞서 지적한 바 있다. 

그야 아무튼 申鉉俊 해병대사령관과의 회담이 끝나자, 알몬드의 화제는 玄鳳學 통역관을 향했다. 영어를 제대로 말하는 한국인이 그리 많지 않았던 시대였던 만큼 당연한 관심이었다.

“貴君(귀군)의 고급영어에 깜짝 놀랐다. 어디서 배웠는가?”

현봉학은 이때 28세. 알몬드는 그 두 배의 연령이었다.

“貴國(귀국)의 버지니아州 리치몬드에서 배웠습니다.”

현봉학은 세브란스 의전에서 病理學(병리학)을 배운 후 미국에 2년간 유학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알몬드는 이렇게 말했다.

“놀랄 일이네. 나는 루레이(Luray) 출신, 같은 버지니아州이지. 州都(주도) 리치몬드로부터 그리 멀지 않아. 유명한 鍾乳(종유·탄산칼슘 성분이 흘러내려 만들어내는 형체)동굴이 있는 곳이야.”

“루레이의 종유동, 저도 그 곳을 알고 있습니다.”

“굉장하다! 수만리 떨어진 한국 땅에서 내 출신 州의 대학에서 공부한 청년이 있다니… 그럼, 貴君(귀군)은 버지니아州立大 의대에 다녔겠군.”

“그렇습니다.”

참모부장 에드워드 포니 大領(1965년 別世)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흥남철수 때 포니 대령은 ‘搭載(탑재)참모’를 겸했는데, ‘한국의 쉰들러’ 현봉학을 친절하게 도와주는 역사적 인물이 되었다. 후일, 탑재참모로서 그는 ‘피난민 탑재를 위한 기술적 代案(대안)’을 작성해 알몬드 군단장을 설득했다.

“貴君의 출신지는?”

“함경남도 함흥입니다.”

“뭐라고? 우리는 영어를 잘 하면서 함경도를 잘 아는 사람을 찾고 있어. 貴君이 딱이야!”

함흥에 사령부를 설치할 계획인 미 제10군단은 영어를 하는 현지인이 없어 몹시 난처해 하던 참이었다. 알몬드 군단장에게 현봉학의 등장은 안성맞춤이었다. 알몬드는 신현준 사령관에게 강청해, 현봉학을 미 10군단의 民事部 顧問(민사부 고문)으로 스카웃했다.  
    
당시, 알몬드는 陣中(진중)에서 매우 사치스러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심지어 물 마시는 컵도 極上品(극상품)이었다. 삼시세끼도 고급 레스토랑 수준이었다. 누가 이런 호화스러운 食器(식기)와 寢具(침구)를 가져다주었는지, 알몬드의 私物(사물)을 운반하는 데만 1∼2소대가 동원되었다고 한다. 검소한 목사 가정에서 자란 현봉학은 씀씀이의 차원이 다른 미국 장성의 모습에 아마도 문화적 쇼크를 느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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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현봉학 씨

현봉학은 1922년 함흥에서 현원국 목사의 네 아들 중 차남으로 출생, 함흥고보를 졸업했다. 함흥은 함경남도의 도청 소재지이며, 당시 북한에서는 평양에 이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西洋風(서양풍)의 도시라는 점에서는 평양을 오히려 능가했다.
 
그의 부모 형제는 함흥이 공산 치하에 들어간 직후에 서울로 도피해 왔다. 그의 4형제 중 맏형은 이화여대 문리대 학장을 지낸 신학자 故 玄永學(현영학) 교수, 두 동생은 在美 소설가 피터 玄과 故 玄時學(현시학) 해군 제독이다.

평소, 그는 어린 시절의 소꼽동무와 高普 동창을 다시 만나는 꿈을 꾸어 왔다. 그 꿈은 이루어졌다. 현봉학은 미 제10군단과 함흥의 민간단체와 사이에 중개역할을 정력적으로 수행했다. 그의 전공분야인 병원뿐 아니라 학교, 기독교 교회와도 깊이 교제를 했다.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 북한군을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로 몰아내기 직전의 유엔군 앞을 중공군이 막아섰다. 비교적 북진이 순조롭던 동부전선에서도 의심스런 양상이 전개되었다. 미 제10군단 사령부에는 이런 얘기가 나돌았다.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으로부터 후퇴명령이 내려왔다. 지금, 서부전선에서는 중공군의 공세로 退路(퇴로)가 끊겨 전멸의 위기에 처해 있다.”


“알몬드에게 直訴하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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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몬드 장군

현봉학은 미 10군단 사령부 내에서 돌고 있는 얘기를 듣고 자기 귀를 의심했다. 유엔군이 떠난 후 공산군이 들어오면 누가 유엔군에게 협력했는가를 철저히 조사할 것이다. 그러면 그의 친지와 친구들은 몰살당할 것이 뻔했다. 그 순간 그는 미 제10군단의 민사부 고문으로 활동한 것을 후회했다. 우선, 현봉학은 민사 부문의 직속 上官인 무어 대령과 만났다.

“대령, 내 말을 반드시 들어 주시오. 이미 함흥의 남쪽은 공산군의 세력 하에 있는 만큼 함흥 시민에게는 도피할 길이 없어요. 유엔군이 떠나고 난 후 공산군은 유엔군 협력자를 색출해 고문·살육할 겁니다. 유엔군이 협력자들을 버리고 간 것이 세계에 전해지면 미국에 큰 치욕이 될 것이오. 대령, 어떻게 하든 함흥 시민을 살려 주시오!”

무어 대령은 이렇게 답했다.

“닥터, 이건 전쟁이오. 전쟁에서는 軍이 우선입니다. 안 됐지만, 흥남항의 설비는 너무 빈약합니다. 나는 지금 우리 제10군단 예하 장병 전원이 탈출할 수 있을까, 어떨까를 고민하고 있어요. 닥터의 입장은 이해하지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면 안 됩니다.”

무어 대령은 자기 임무에 엄정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한 번 안 된다고 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봉학은 물러서지 않았다.
 
“이제는 알몬드에게 直訴(직소·절차를 밟지 않고 윗사람에게 직접 호소함)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알몬드 군단장은 매우 바빠 면담의 기회를 잡을 수 없었다.

“왜 그래, 닥터? 우울한 얼굴을 하고….”

우연히, 포니 대령과 마주쳤다. 현봉학은 함흥 시민의 위기를 호소했다.

1950년 11월30일, 포니 대령이 알몬드 군단장과의 면담을 주선했다. 현봉학은 함흥 시민의 어려운 형편을 설명했다. 알몬드 군단장은 갑작스런 패배의 충격을 견뎌내며 처리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일개 통역의 호소를 끝까지 경청했다.

“닥터의 말은 알아들었다. 나는 貴君의 말에 전면적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지금 무엇 하나 확약할 수 없다. 敵은 함흥을 우회하여 남쪽의 원산 방면으로 急進(급진)하고 있다. 우리 7개 사단, 10만 장병을 우선 탈출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더욱이 시간이 제한되어 있다. 피란민 문제는 앞으로 포니 대령과 상의하라.”

알몬드는 이렇게 대답한 후 대화가 끝났다는 몸짓을 했다. 현봉학은 순간 ‘한 번 더 호소할까’하고 머뭇머뭇 했다. 그때 포니 대령이 현봉학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禮를 표시하고 退室(퇴실)해야만 했다.

“닥터, 알몬드 군단장은 東京(맥아더사령부 소재지)의 양해를 얻지 않으면 할 수 없는 큰일에 부딪친 거야. 그러나 이만큼 호의적으로 대답했으니 너무 걱정하진 말게.” 

포니 대령의 위로에 현봉학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로부터 2주일간, 현봉학의 마음은 절망과 희망 사이로 오락가락했다.


“피난민 10만을 군함으로 철수시킨 것은 세계사 최초의 쾌거”

1950년 12월4일, 미 제10군단은 사령부를 咸興(함흥)에서 동남방 16km의 항구 흥남으로 옮겼다. 12월14일 오후, 현봉학은 “군단장이 소집하는 회의가 열렸다. 닥터도 참석하라”는 무어 대령의 연락을 받고 함께 알몬드 군단장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이미 포니 대령 등 많은 고급장교들이 참석해 있었다. 그 가운데는 국군 제1군단장 金白一(김백일) 장군과 2명의 국군장교도 자리를 함께 하고 있었다.

金白一 장군도 북한시민들의 피난을 위해 身命(신명)을 걸었던 군인이었다. 김백일 장군은 “함흥 피난민들을 LST(대형 양륙함)에 승선시키지 않으면, 국군 제1군단은 피난민들과 함께 陸路(육로)로 철수하겠다”고 極言(극언)을 했다는 것이다. 회의에서 알몬드는 다음의 요점만을 말하고 곧 해산을 선언했다.

“후방인 元山(원산)은 이미 적의 手中(수중)에 떨어졌다. 이제 陸路(육로)에 의한 탈출은 불가능하다. 탈출로는 海路(해로)뿐이다. 함흥에서 흥남으로 운행되는 深夜(심야) 기차에 약간의 여력이 있다. 4000~5000여 명의 함흥시민을 이곳 흥남으로 운송하도록 한다. 조속히 수배하도록! 상황은 한없이 나쁘지만, 최악은 아니다.”
 
朗報(낭보)였다. 꽉 막혔던 가슴이 금세 풀렸다. 현봉학은 16km 거리의 함흥으로 달려가 이 기쁜 소식을 여러 민간단체들과 기독교인들에게 알렸다. 전달을 끝내고 함흥驛(역)에 나가 보았더니, 이미 5만을 넘는 인파가 驛前(역전) 광장에 모여 있었다. 혹한기인데도 미군 헌병은 몰려드는 인파 정리에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결국, 기차에 탑승한 것은 우익인사와 기독교도 등이었고, 나머지 인파는 흥남으로 향하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놀란 미군 헌병이 길을 가로막아 보았지만, 파도처럼 몰려오는 인파를 되돌리지 못했다. 군용 차량의 흐름에 지장을 주는 것 이외에 피난민들 속에 공산당 스파이가 섞일 우려가 매우 컸다. 그래도 인파는 미군 헌병의 저지를 뿌리치고 산길을 걸었다.

흥남항 부두는 피난민들로 흘러넘쳤다. 함흥 시민뿐 아니라 함경북도 방면으로부터 내려온 피난민들도 가세해, 그 수는 대번에 10여 만 명에 달했다. 미 제10군단은 자기들뿐만 아니라 피난민 10만 명의 식량과 숙소 문제에 직면했다. 그 중에는 친지의 가정 및 학교 내에 숙박할 수 있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지만, 태반은 난방도 식수도 취사시설도 없이 주먹밥과 毛布(모포)만으로 영하 10도의 강추위를 견뎌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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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남철수 당시, 피난민을 가득 태운 메러디스 빅토리(Meredith Victory)호의 모습.


12월10일부터 미 제10군단은 해상철퇴를 개시하고 있었다. 한국군 제1군단, 미 제1해병사단, 미 제7사단의 順(순)으로 釜山(부산) 방면을 향해 출항했다. 뒤를 끊는 後衛(후위)부대의 역할은 미 제3사단이 맡았다. 

그러는 사이, 피난민들은 자기들의 차례가 오기를 학수고대 하고 있었다. 凍死者(동사자)도 발생했고, 氷點下(빙점하)에서 아기를 출산하는 여성도 있었다. 사람들의 불안과 의혹은 짙어지고 있었다.


“혹시, 우리를 버리고 가는 게 아닐까?”

그러던 12월17일, 세 척의 LST(대형양륙함)가 흥남항에 입항했다. 이어 6∼7척의 수송선도 들어왔다. 12월19일, 피난민의 승선이 시작되었다. LST의 통상 승선 정원은 2000 명인데, 무려 5000명이나 탔다. 미국적 화물선인 메레디스 빅토리아호는 7600중량톤(dwt)인데, 1만4000여 명이나 승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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뱃머리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수는 줄어들지 않았다. 중공군의 접근에 따라 피난민의 자꾸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안도르號·미라號 등은 거제도를 향해 출항했다. 1950년 12월24일, 승선을 완료하면, 미군은 흥남항을 철저하게 파괴했다. 흥남 탈출 후 포니 대령이 현봉학에게 말했다.

“닥터, 우리는 10만 명의 피난민을 철수시켰다! 이건 세계사에서 유례가 없는 쾌거야! 이것이야말로 한국판 ‘모세의 기적’ 아닌가!”
     
현봉학은 감격으로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한참 동안, 포니 대령의 손을 꼭 잡고 있을 따름이었다. 휴전 후, 현봉학은 本業(본업)으로 돌아가 임상병리학자로 활약하다가 2007년 별세했다. 에드워드 포니 대령은 少將(소장)으로 전역한 후 1965년 별세했다. 그의 증손자 벤 포니는 2009년, 전남 木浦(목포)의 영흥중학교에서 原語民(원어민) 교사로 부임·재직했고, 현재는 서울대 국제대학원에서 修學(수학)하고 있다.


金白一 장군의 동상을 모욕한 좌파세력

흥남철수 때 10만 북한 동포의 피난에 身命(신명)을 걸었던 또 한 사람은 金白一 장군이다. 그는 함경북도 明川(명천) 출신이다. 서울 普成(보성)중학교를 졸업하고 滿洲(만주)로 가서 奉天(봉천)군관학교에 5期로 입교했다. 丁一權(정일권) 장군과 동기생으로 봉천군관학교에서 성적 1∼2위를 다투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시 滿軍(만군) 대위로 복무하고 있었다.

흥남철수로부터 3개월 뒤인 1951년 3월28일의 사건이지만, 미 8군은 예상된 중공군의 4월 공세에 대처하기 위해 大邱(대구)에서 군단장 회의를 소집했다. 김백일 장군은 이 회의를 마친 후, 기상악화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歸隊(귀대)하다가 탑승했던 경비행기가 태백산맥 發旺山(발왕산)에 충돌, 34세 젊은 나이에 순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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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일 장군 동상에 검은천을 뒤덮은 모습. /ROTC
중앙회 홈페이지 캡처

김백일 장군의 동상은 이북5도민들의 성금으로 현재 ‘거제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 세워져 있다. 그런데 2011년 7월과 11월 두 차례에 걸쳐, 거제 지역 10여 개 좌파단체 모임인 ‘거제시민단체연대협의회’가 민족문제연구소(소장 임헌영)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김백일 장군의 이름이 올라 있다는 이유 등으로 그의 동상을 검은 천으로 덮고 쇠사슬로 묶는 만행을 저질렀다. 좌파들의 동상 철거 집행 작업은 참전용사들의 몸싸움에 의해 봉쇄되었다. 왜 김백일 장군은 좌파들에게는 ‘증오의 심벌’인가?

김백일(1917∼1951)의 원래 이름은 金燦圭(김찬규)였으나 “온 세상이 붉게 물들어도 나 하나는 청천백일 같이 살겠다”는 뜻에서 金白一로 개명하고, 1945년 12월에 동기생 丁一權(정일권) 등과 함께 38선을 넘어 월남했다. 1946년 2월 말, 軍事英語學校(군사영어학교) 졸업 후 중위로 임관하자, 전북 裡里(이리·지금의 익산시)에서 창설된 제3연대의 연대장 要員(요원)으로 부임했다.

그는 휘하에 金鍾五(김종오·후일 육군참모총장), 李翰林(이한림·후일 1군사령관, 건설부 장관), 白仁基(백인기·대령 때 戰死), 丁來赫(정래혁·국방장관, 국회의장) 소위 등을 거느리고 中隊(중대)를 창설하고, 이어 大隊(대대) → 聯隊(연대)로 확장시켜 초대 연대장에 취임했다.

1948년 10월19일 麗順(여순)반란이 발발하면, 즉각 제5旅團長(여단장)대리로 임명되어 順天(순천)에 이어 麗水(여수)를 탈환해 반란 진압의 주역이 되었다. 1949년 1월, 原州(원주)의 제6여단장에 임명되었다. 그해 5월4∼5일, 春川(춘천) 주둔 제1대대장 表武源(표무원) 소령과 제2대대장 姜太武(강태무) 소령이 부대를 이끌고 월북하는 반역사건이 일어나 引責(인책), 사직했다.

그러나 甕津(옹진)지구의 무력충돌이 확대되던 1949년 6월5일, 옹진지구 전투사령관으로 출동하여 북한군을 물리쳤다. 또 38선을 뚫고 남하한 북한 게릴라가 지리산 일대에서 준동하자, 落葉(낙엽)의 시기에 토벌한다는 작전에 따라 그는 1949년 9월28일부로 지리산지구 전투사령관에 기용되었다. 약 3개월간에 걸친 지리산 토벌작전을 마친 그는 1950년 1월1일 大邱(대구)의 제3사단장으로 영전했다. 그는 野戰(야전) 스타일이었다.

그런 그가 6·25 남침전쟁 발발 2개월 전에 육본 행정참모副長이란 要職(요직)으로 전출되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미국에서 군사시찰 중이던 丁一權 작전참모副長의 대리로, 작전참모副長도 겸임했다.

낙동강 방어전 때는 제1군단장으로서 東正面(동정면)을 맡았다. 그는 제1선의 彈雨(탄우) 속에서 지휘 능력을 발휘했다. 1950년 9월 중순, 국군과 유엔군이 攻勢(공세)로 移轉(이전)하면 그의 제1군단은 보름만인 9월30일 38선에 1번으로 도착했다.

이어 10월10일에는 元山(원산)을, 11월 하순에는 고향 明川(명천)을 거쳐 淸津(청진)을 공략해 두만강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에 의해 흥남으로부터 海上(해상) 철퇴가 불가피해졌다. 흥남철수 때에는 미군 LST에 피난민을 실어주지 않으면 국군 제1군단도 해상철수를 하지 않고, 피난민과 함께 陸路(육로)로 南下하겠다고 강력하게 버텼다.

10만 명의 피난민을 군함으로 남하시킨 흥남철수로 유엔군은 도덕적인 면에서도 공산군을 압도했다. 그 후 대한민국의 경제적·정치적 성공에 의해 6·25전쟁은 미국 등 우방국들에게 ‘잊혀진 전쟁’ 또는 ‘잊고 싶었던 전쟁’이 아니라 ‘승리한 전쟁’으로, 세계 속의 한국은 ‘자유민주세계의 자랑스런 쇼윈도’로 자리매김했다. 그때의 월남 피남민들은 그 ’쇼윈도 속의 꽃‘이 되었다.
  
김백일 장군이 死後(사후)에 이런 수모를 당한 이유는 대략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그가 滿洲國(만주국)의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滿軍(만군)의 위관 장교 시절 만주 지역의 共匪(공비)와 馬賊(마적) 토벌에 유능했다는 점, ▲1946년 10월에 올린 그의 결혼식이 호화스러웠다는 점(그것이 호화스러웠으면 과연 얼마나 호사스러웠을까?)이다. 그것은 조국을 위한 戰功(전공)에 비하면 그야말로 사소한 것들이었다. 김백일의 동상을 쇠사슬로 묶는 짓은 그가 지켜낸 대한민국을 모욕하는 행위이다.

[ 2016-06-21, 10:1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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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배     2017-11-19 오후 9:28
흥남부두 민간인 철수 고맙습니다

유머강사 1호 김진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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