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騎馬 軍團의 기동성
몽골 草原 역사 紀行(14)말과 활로 세계를 제패한 비결은 스피드.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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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기마군단의 기동성 연구

20세기의 대표적 전략사상가인 영국의 리델 하트는 그의 고전 「전략」(Strategy)에서 끊임없는 군대의 기동성이 쌍방간 최소한의 희생으로써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기동성을 최대한 활용하여 세계사를 바꾼 인물로서 세 사람을 들었다. 징기스칸, 나폴레옹, 히틀러. 리델 하트는 1927년에 벌써 「위대한 지휘관 연구」라는 책에서 징기스칸과 그의 부하 명장 스부데이의 유럽 침공 작전을 자세히 분석하는 장을 맨 앞에 실었다. 하트는 서기 1241년에 있었던 헝가리-몽골의 무히(Muhi) 대회전(大會戰)을 이렇게 분석했다.

<현대의 전사가(戰史家)들은 두 가지 면에서 큰 감명을 받는다. 첫째는 몽골 군대가 은밀하게, 기동성 있게, 그리고 기계적 정확성으로써 부대를 배치 완료하는 점이다. 둘째는 무서운 일제 사격. 1세기 뒤 영국에서 활이 전략적으로 활용되기 전까지는 중세의 유럽 군대는 주로 돌격-백병전에 의존하였다. 몽골 군대는 활의 일제 사격으로 적의 말과 병사가 피로에 지쳤을 때만 접근하여 백병전을 전개하였다. 몽골 군대는 사상 처음으로 일제 사격으로써 돌격의 길을 개척하는 전법을 도입하였다.>

하트는 또 『유럽만이 군사적 천재들의 산실(産室)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환상이다. 몽골 군대의 성공비결은 현대전에서도 응용될 수 있다』고 했다.

<중무장(重武裝)한 유럽 기병들이 돌격하면 몽골군은 후퇴하면서 흩어졌다. 먼 거리에서 재집결한 그들은 다시 공격을 감행하고, 이런 전술을 되풀이하여 적을 지치게 만든 뒤 비로소 결정적인 돌격을 가하여 승부를 결정지었다. 그들은 전쟁에서는 기동성이 최고라는 교훈을 남겼다. 기동성(mobility)이 충분하면 가벼운 무장으로써도 중무장 군대를 꺾을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전투력은 무장력에 기동력을 곱한 것이다. 이 기동력이야말로 어떤 무장보다도 유리한 방어인 것이다.

유럽에서는 기병은 반드시 보병의 보호와 지원을 받아야 한다는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기본적으로 방어적인 보병에 달려 있는 날개에 불과했던 것이다. 몽골 군대는 전원(全員)이 기병이었다. 따라서 조직이 단순하여 전장에서 운용하기가 간편하여 기동성을 더욱 강화하여 주었다.

부대의 성격과 능력이 각각 다른 부대를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 하는 숙제가 풀린 것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가. 세계 대전(1차 대전을 의미)에서 우리의 취약점은 기동력의 부족이었다. 이제 탱크가 등장했다. 이것이야말로 몽골 기병의 현대판인 것이다. 몽골 군대의 전원기병(全員騎兵) 제도를 본따서 보병의 일부가 아닌 독립된 기계화 부대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 글이 담긴 책은 당시 영국 기계화 부대의 교과서로 쓰였다. 독일군이 이 리델 하트의 논리에 영향을 받아 기갑부대를 이용한 전격전의 논리를 발전시켰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먹물 먹은 사람들의 역사

기자는 1996년 6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서쪽으로 무히까지 자동차 편으로 달려 본 적이 있다. 부다페스트를 빠져나가자마자 대평원(大平原)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밀밭 보리밭 과수원 草原은 기자가 거쳐온 몽골 벨트 지역에서 이미 눈에 익은 장면이었다. 헝가리는 몽골-투르크族의 캔버스인 유라시아 초원의 서쪽 끝이다. 동쪽 끝은 만주-한반도이다. 1241년 겨울 징기스칸의 손자 바투는 20년 전에 러시아 원정을 한 적이 있는 노장(老將) 스부데이를 사령관으로 삼아 러시아 남부에 10만 기마군단을 집결시켰다. 리델 하트에 따르면 이 원정의 목표는 헝가리였다. 당시 헝가리 지배층은 몽골-투르크族과 비슷한 마자르族이었고, 몽골 제국에선 헝가리를 자신들의 통치권 바깥에 있는 유일한 동족 집단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결전장 무히까지 3시간 동안 달리면서 기자는 몽골 군대가 비록 유라시아 초원의 동쪽 끝에서 왔다고 해도 헝가리 초원에서 크게 이질감이나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으리라는 상상을 할 수 있었다. 초원은 바다와 같아서 어디를 가나 비슷한 분위기와 생활 양식을 요구하는 것이다. 바다를 지배하여 제국을 건설할 수는 있어도 바다에 제국을 세울 수는 없는 것과 꼭같이 이 북방 초원은 문명과 종교와 상품과 과학과 기술이 매개되는, 또 권력과 국가가 만들어지는 무대이자 産室이었지 어떤 국가나 이념의 틀에 속박 될 수 있는 그런 공간이 아니었다.

15세기부터 大항해 시대가 시작되어 비로소 해양이 제국의 고속도로 역할을 하기 전까지 세계사에는 두 개의 진정한 바다가 있었으니 하나는 지중해요 다른 하나는 유라시아 초원이었다. 지중해가 그리스-로마 문명으로 상징되는 서양사의 무대였다면 유라시아 초원은 몽골-투르크 기마군단으로 상징되는 군사력, 권력, 파괴와 창조, 그리고 무역과 문화의 교류로 상징되는 동서양 통합의 무대였다.

먹물 먹은 지식인이 독점하고 있는 역사 기술은 필연적으로 지식, 즉 문명과 예술을 최고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 더구나 근대 역사학의 방법론이 서양에서 개발된 관계도 있고 해서 세계사는 일방적으로 서양 중심으로 쓰여졌다. 훈, 투르크, 몽골族의 서진(西進)에 의한 피해를 많이 보아온 서구(西歐)학자들에게 객관적 기술을 기대할 수도 없는 일. 이렇게 되어 몽골-투르크族은 야만족 취급을 받아 과소평가를 받는 신세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세계사를 자동차에 비교한다면 유라시아 초원은 그것을 움직이는 트랜스미션이었고 몽골-투르크族은 트랜스미션을 돌리는 엔진이었다. 이 엔진으로 해서 세계사는 빨라졌고 넓어졌으며 새롭게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 2016-06-22, 10:3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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