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군 大勝의 현장 헝가리 무히에서
몽골 草原 역사 기행(15)<헝가리와 다른 나라에서 참전한 기사들은 헝가리 왕과 함께 야만族으로부터 기독교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가 여기서 목숨을 바쳤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무히에서

무히에 도착했다. 풀밭 가운데 작은 동산이 있고 나무 십자가가 수십 개 꽂혀 있었다. 무히 大會戰 750주년을 맞은 1991년에 세운 「무히 전투 기념물」이다. 패전을 기념하는 건축물답게 참담하고 스산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이 기자 같은 몽골族에 대한 원한처럼 느껴졌다. 사조강변(江邊)에 자리잡은 이 무히 전투에 대하여 이 기념관에선 이렇게 적어놓고 있었다.

<타타르(몽골族을 지칭)는 헝가리 군대 집결지를 향해 활을 쏘기 시작했다. 타타르의 화살은 멀리서 날아오는데 헝가리의 활은 짧게 날아 敵陣에 이르지 못하니 절망, 무력감, 그리고 자포자기 상태가 되어 도망자가 속출하게 되었다.>

이런 碑銘(비명)이 새겨져 있다.
<헝가리와 다른 나라에서 참전한 기사들은 헝가리 왕과 함께 야만族으로부터 기독교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가 여기서 목숨을 바쳤다.>

바투와 스부데이에 의한 헝가리 정복전쟁은 20세기의 기갑부대에 의한 大기동전을 방불케 하는 규모와 속도로 진행되었다. 몽골軍은 4개 군단으로 갈라진 다음 부챗살처럼 서쪽으로 질주하기 시작하였다. 맨 먼저 출발한 것은 진행 방향으로 봐서 맨 오른쪽인 북군(北軍)이었다. 이 군단은 주력군이 되는 나머지 3개 군단을 엄호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1241년 3월 폴란드로 쳐들어간 북군은 비스롤라江을 건너 스지들로우에서 폴란드 군대를 격파하였다. 4월에는 리그니츠에서 폴란드-독일 연합군을 대파(大破)했다.

한 달만에 북군은 두 번의 결정적 승리를 통해서 폴란드와 지금의 체코 지역을 정복했다. 약 600km를 한 달만에 주파한 몽골군은 오스트리아 군대의 개입을 사전에 봉쇄하기 위하여 비엔나 직전에서 거대한 우회전을 한 뒤 남하(南下)하면서 주력군의 헝가리 정복전을 안전하게 감싸안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3개 군단으로 구성된 주력군은 좌군(左軍)과 우군(右軍)이 원호를 그리면서 먼저 뻗어나가고 그 방어선의 한 가운데로 중앙군이 직선으로 질주하는 작전을 폈다. 이 3개 군단은 4월4일 부다페스트 부근 다뉴브 강변에 집결했다. 중앙군의 선봉은 3일 만에 눈덮인 적국 지역을 300km나 돌파하는 기록을 남겼다. 바투와 스부데이는 여기서 전략적 후퇴를 하게 된다. 다뉴브강을 건너서 헝가리 군대와 결전하는 것은 무리일 뿐만 아니라 몽골 기마군단의 장기를 살릴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약 8만의 몽골군이 6일간에 걸쳐 천천히 후퇴를 하니 헝가리군은 추격해 왔다. 도시와 강이란 천연의 방어선을 포기한 채 몽골군의 장기인 유인책에 걸려들고 만 것이다.

4월10일 몽골군은 야간에 좁은 사조江을 건너 헝가리군을 기습하였다. 우회, 유인, 기습은 기동력에 자신을 가진 몽골군의 전형적인 전술이었다. 이 3중주에 걸려든 헝가리군은 이날 섬멸되었다. 7만의 전사자를 냈다. 헝가리 왕은 아드리아海쪽으로 달아났다. 몽골 군대는 벨라 4세를 추격하여 지금의 발칸지방에 이르니 왕은 지중해의 한 섬으로 달아났다. 이때 몽골군대 사령부에 오고데이 황제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바투는 주력군의 철군을 명령했다. 이것이 유럽을 구했다.

기동성에 대한 철학적 小考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명제는 시간이다. 인간이란 존재는 공간과 시간의 교차점에서 80년 정도의 생활을 허락받고 있다. 공간을 상수로 놓는다면 시간이란 변수가 인간의 활동에 있어서 그 양과 질을 결정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간의 활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활동 시간을 늘림으로써 작업량을 증가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활동 속도를 증가시킴으로써 일의 양을 늘리는 것이다. 활동 속도를 증가시키는 데 있어서도 인간의 공간적 이동 속도를 빨리 하여 일의 양을 늘리는 방법이 있고 인간의 작업 속도를 증가시켜 일의 양을 늘리는 방법이 있다. 인간의 이동 속도를 증가시키려면 말, 자동차, 비행기 같은 운송 수단의 발달이 필요하다. 인간의 작업 속도를 증가시키려면 컴퓨터 같은 사무기구와 통신기구의 발달과 함께 신속한 의사결정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주로 조직 경영의 영역에 속한다.

인간의 이동 속도와 작업 속도를 일단 기동성(mobility)이란 개념으로 종합해 본다. 기동성 개념을 한국 사회에 적용하려면 우선 계층간, 지역간, 조직內 상하간, 신분, 물자, 정보의 이동 속도를 측정해야 한다. 신입사원이 부장이 되는 데 걸리는 기간, 하층민이 중산층에 편입될 수 있는 확률, 이사(移徙)횟수, 해외여행자수, 자동차 평균 주행속도, 보행자 평균 보행속도, 회사와 행정부의 결재 속도, 돈의 흐름속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의사 소통속도 같은 것이 우리 사회의 기동성을 가늠해 주는 통계치가 될 것이다. 기동성이 높으면 일이 많아지니까 일자리도 많아지고 국민총생산도 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반면에 기동성이 높으면 충돌 확률도 높아지기 때문에 사고도 는다. 계층간의 충돌로 노사분규, 학생시위가 늘고 주행속도가 높다 보니까 교통사고가 증가한다.

인류 문명의 발달은 이 기동성의 증가 과정에 다름 아니다. 기동성의 지표는 말-배-자동차-비행기-우주선이다. 군대에 있어서 기동성의 지표는 기마군단-함대-기갑부대-공군으로 발전해 왔으며 결정적 무기도 칼-활-총-탱크-전투기-미사일 차례로 그 기동성을 증가시켜 왔던 것이다. 총이 일반화되기 전인 16세기까지는 말과 활을 가장 효율적으로 결합시킨 몽골-투르크族이 최고의 기동성을 확보하여 세계사의 지배자로 군림해 왔으나 15세기부터 시작된 大항해 시대에서는 총과 함대를 결합시킨 스페인-네덜란드-영국-미국 계열의 해양 세력에 군사적 패권을 빼앗기게 되었다. 동물의 체력에 의존하는 기동력을 생산해 왔던 氣의 민족(유목민)의 시대는 가고 과학과 기계가 만들어내는 기동력을 관리할 줄 아는 理의 민족이 세계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기동성을 통해서 본 한국 역사

기동성을 기준으로 하여 한국의 성쇠(成衰)를 해석해 볼 수 있다. 북한은 세계에서도 기동성이 가장 낮은 곳이다. 자동차 보유수, 철도, 비행기, 선박, 고속도로 같은 운송 수단이 취약한 데다가 여행까지 금지하고 있고 관료주의의 팽배로 결정은 늦다. 맥박이 分당 20회밖에 안되는 사람과 같은 상태이니 생산활동이 제대로 될 리가 없는 것이다. 기동성의 측면에서 볼 때 북한과 가장 비슷한 나라가 朝鮮이었다. 전근대(前近代)의 朝鮮에서 물리력으로서 기동성을 보장하는 것은 말과 배였다.

朱子學을 정치이념으로 받아들인 지배층은 士農工商의 신분계층에 입각하여 武를 경멸하는 정책을 채택하여 야성의 유목민 기질이 흐르고 있는 한국인으로부터 기마(騎馬)의 전통을 삭제해 버렸다. 군사적 기동성이 거의 고갈되게 된 것이다. 漁民들을 멸시하는 신분 제도는 三面이 바다인 나라에서 해양정신을 고갈시켰다. 야성의 한국인을 말과 배에서 내리게 했으니 이동과 기동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다가 신분이동의 길까지 막혀 있었다. 인종적으로, 기질적으로, 또 지정학적으로 기동하고 약동하고 진동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어 놓고서도 정적(靜的)인 길을 선택하고만 것이다.

몽골의 그늘

동아시아가 유럽 제국주의의 영향권 아래로 들어간 것은 19세기 이후이지만 東유럽이 몽골-투르크 영향권에 들어간 것은 4세기 이후 19세기까지이니 군사력을 기준한 대결에선 아시아 유목 기마민족이 대체로 서양보다 우세했다는 얘기가 된다. 불가리아, 옛 유고슬라비아(발칸지역), 루마니아, 헝가리, 러시아는 몽골제국과 오토만-투르크 제국의 식민지가 되어 수백년간 지배를 받았다. 근대 러시아의 등장은 몽골 지배로부터의 독립 과정에서 비롯되었다. 서유럽의 화사한 이미지와 확연히 구별되는 동유럽의 무겁고 심각하며 우울한 분위기는 이 지역에 오랫동안 드리워져 있었던 아시아적 그림자의 잔영(殘影)이다.

몽골-투르크족의 유럽 침략이 가진 스케일 감각을 실감 있게 이해하려면 게르만族이 삼국시대에 만주와 한반도까지 진출하여 고구려와 신라를 식민지로 만든 것과 비슷한 전개임을 머리에 그려볼 필요가 있다. 헝가리(Hungary)란 국명이 훈族에서 유래했다고 잘못 해석해서 지금의 헝가리 사람들을 훈族의 후손들이라고 간단하게 생각하는 한국인들이 많다. 기자도 부다페스트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사람들의 얼굴에서 몽골的인 특징을 찾아보려고 했으나 잘 생긴 유럽인종의 얼굴뿐이었다. 시골에 가면 우리를 닮은 사람들을 볼 수 있고 몽골 반점을 갖고 태어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고 한다. 西유럽 사람들에 비해서 몸집이 좀 작은 것이 눈에 띄었다.

훈과 헝가리

유라시아 초원의 역사에는 흥미 있는 법칙이 있다. 유목민족의 고향인 몽골과 중앙아시아에서 전쟁에서 패배한 부족은 서쪽으로 이동하여 중앙아시아, 중동, 러시아, 동유럽을 휩쓰는 전통이다. 그 1번 타자가 훈이었다. 기원 前 2세기 漢武帝의 북방 공략으로 큰 타격을 받은 흉노의 일부가 서서히 西進하기 시작한다. 이 이동은 징기스칸의 정복전쟁과 같은 군대의 이동이 아니라 민족의 이동이었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렸다. 인간과 말과 가축의 혼성집단인 훈族이 지금의 헝가리 평원에 나타난 것은 서기 4세기경이었다. 유럽 사람들은 그 몰골에서 우선 질려버린다. 당시 기록자들은 이렇게 적고 있다.

<그들은 하도 추하게 생겨 먹었기 때문에 차라리 두 발 달린 짐승, 또는 그루터기를 아무렇게나 파서 만든 조각물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의 얼굴까지도 징그럽기가 이를 데 없었다. 로마군대는 그 모습만 보고도 겁에 질리는 것이었다.>

그 다음으로 그들을 공포로 몰아넣은 것은 훈族의 기마기술이었다. 로마의 암미아누스란 역사학자는 『그들은 마치 몸이 말에 아교칠되어 있는 것 같았다』라고 묘사했고 제롬이란 사람은 『그들은 馬上에서 생활하고 잠자고 한다. 그들은 땅에서는 두 발로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할 정도이다』라고 썼다. 훈이 동유럽에 나타난 것은 동과 서로 분열되어 있었던 로마 제국의 변경 지방을 일대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변경에 살던 게르만族이 훈族에 밀려 로마 영토 內로 몰려들게 되었다. 西로마는 결국 이로써 망하게 되는데 처음에는 훈의 힘을 빌어 게르만族에 대항하는 정책을 썼다. 아틸라가 황제가 된 다음에는 로마제국을 정복하려는 전략을 추진한다. 서기 447년 아틸라는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했다. 동로마 제국은 조공을 바치기로 약조하여 항복을 면했다.

아틸라는 이번엔 西로마로 진격하다가 본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회군했다가 곧 죽었다. 아틸라의 사망 후 훈제국은 유목민족의 전통에 따라 분열하였고 이 틈을 탄 게르만族의 반격을 받고 와해되었다. 훈족의 다수는 러시아 남부 초원으로 돌아갔고 일부는 헝가리에 남아 현지 농경민족 속에 녹아버리고 만다.

 

 

[ 2016-06-22, 12:2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뉴데일리  |  리버티헤럴드  |  뉴스파인더  |  이승만TV  |  장군의 소리  |  천영우TV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