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와 처칠/부시와 김정일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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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 www.natizen.com>
  한때 김정일의 스승이었던 黃長燁 전 노동당 비서는 김정일이 히틀러를 숭배한다고
  말했습니다. 김정일이 세계를 상대로 벌이고 있는 핵공갈의 패턴을 보면 히틀러가 1930년대에 유럽을 상대로 공갈외교를 벌여 속속 영토를 확장해가던 수법이 생각납니다.
  
  히틀러는 영국과 프랑스의 지도부가 결전의지를 갖지 않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파리에서 '거대한 환상'과 같은 反戰영화가 인기를 끄는 것을 보고는 프랑스 지도층의 정신이 썩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히틀러가 라인란트에 군대를 진주시키고(1936년)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고(1938년) 체코슬로바키아까지 먹어치우고(1939년)한 것은 '이렇게 해도 영국과 프랑스는 무력으로 독일을 저지하지 못할 것이다'는 판단하에서 모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영국과 프랑스의 여론도 전쟁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대중민주정치에선 정치인들이 여론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英佛 지도층의 전쟁의지 박약을 그들에게만 책임추궁할 수는 없습니다.
  
  김정일이 1993년에 이어 작년에 다시 하고 있는 두 차례 핵공갈의 전개과정을 보면 한국과 미국 지도부는 전쟁을 결심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수도권 2천만이 북한군 장거리포의 사정권에 들어 있는데다가 한국내엔 평화세력으로 위장한 김정일 추종세력이 있다, 미국이 아무리 김정일을 치려고 해도 한국이 말릴 것이고 결국은 대화로 나올 수밖에 없다, 이런 생각을 깐 것입니다.
  김정일의 계산이 먹혀들지 않을려면 한국의 여론이 일전불사쪽으로 선회해야 합니다.
  
  英佛의 여론이 전쟁불사쪽으로 선회하기 시작한 것은 1939년 초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의 독일인 거주지뿐 아니라 국토전역을 점령한 것이 계기였습니다. 흥분한 여론을 의식한 영국과 프랑스는 히틀러가 폴란드를 위협하자 뒤늦게 폴란드를 침공하면 선전포고를 하겠다는 공약을 하기에 이릅니다. 이때도 히틀러는 이 약속을 엄포라고 해석했다고 합니다.
  
  여론에 둔감한 독재자들은 상대국의 여론을 무시하다가 혼이 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김정일이 고이즈미 수상에게 일본인 납치에 대해서 고백했다가 일본의 여론과 언론의 역공을 당해 日北 수교 교섭에 제동이 걸린 예가 있습니다.
  
  히틀러를 가장 정확히 알고 연구했던 사람이 윈스턴 처칠이었습니다. 그는 히틀러에 대한 양보는 결국 더 큰 전쟁으로 이어질 뿐이라고 경고했지만 여론과 언론, 그리고 정계에서 따돌림만 당했습니다.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는 실수를 하지 않았더라면 처칠은 수상이 되지 못했을 것이고 전쟁위험을 과장한 우익 정치인의 한 사람으로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요사이 저는 존 루카스가 쓴 '히틀러 對 처칠'이란 책을 읽고 있습니다. 이 책은 1940년 영국 상공의 공중전을 무대로 설정하여 인류의 문명을 건 두 사람의 결투를 다루고 있습니다. 루카스는 이 책에서 처칠이 결국 히틀러를 이기게 된 것은 히틀러가 처칠에 대해서 안 것보다도 처칠이 히틀러에 대해서 안 정도가 훨씬 깊었고 정확한 점과 관계가 있다고 썼습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1940년에 처칠이 히틀러의 제1 라이벌이 된 것은 신의 섭리라고 생각된다. 현대사에서 처칠이 히틀러를 이해한 정도로 외국의 라이벌을 熟知한 경우를 나는 알지 못한다. 그랬기 때문에 처칠은 권력을 잡을 수 있었다.'
  처칠은 히틀러가 집권하기 전 선동가일 때부터 그를 관찰했다고 합니다. 1930년 히틀러 집권 3년 전 처칠은 이미 히틀러가 집권하면 독일의 재무장과 세계 전쟁이 터질 가능성이 있다고 예언했습니다(런던 주재 독일 대사관 참사관이 이런 처칠의 발언을 본국에 보고한 문서가 있다).
  
  역사가가 언젠가 이렇게 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만...
  '2003년에 노무현 대통령이 김정일의 제1라이벌이 된 것은 신의 섭리였다. 현대사에서 노무현 대통령만큼 북한의 지도자에 대해 熟知한 경우를 나는 알지 못한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대통령 선거에서 이겼던 것이다.'
  
  혹은 이렇게 쓰여질지도 모릅니다.
  '2001년에 부시가 김정일의 제1 라이벌이 된 것은 신의 섭리렸다. 전후 현대사에서 부시만큼 북한 지도자의 본질을 熟知하고 있었던 예는 달리 없다. 그랬기 때문에 김정일 정권은 종말을 맞았다.'
  
  '히틀러 對 처칠'에서 필자 루카스는 두 사람의 인간됨을 아주 재미 있게 비교하고 있습니다.
  
  1. 히틀러가 국가주의자였다면 처칠은 애국자였다. 국가주의자는 국가의 敵에 대한 증오심이 주류이지만 애국자는 조국에 대한 사랑이 주류이다.
  2. 히틀러는 처칠을 호전적인 독일인의 적, 시대착오의 반동주의자로 보았다. 처칠은 히틀러가 야만시대 惡의 재현인데, 과학기술로 무장한 야만인이라고 생각했다.
  3. 히틀러는 증오심이, 처칠은 관대함이 성격의 主調였다.
  4. 히틀러는 유머감각이 없었으며 눈물도 보이지 않았다. 처칠은 눈물을 잘 흘렸고 위기 때도 항상 유머 감각을 잃지 않았다.
  5. 히틀러는 남에게 약점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으나 처칠은 약점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6. 두 사람 모두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났다. 두 사람 다 독서를 많이 했다. 히틀러는 말을 중시했고 처칠은 글을 중시했다.
  7. 히틀러보다 처칠은 역사와 전통을 중시했다. 처칠은 '운명의 여신은 관습에 등을 돌리는 사람에게 분노한다'고 쓴 적도 있다. 처칠은 히틀러를 유럽 문명의 파괴자로 보았고 자신을 수호자로 보았다.
  8. 처칠은 현실주의와 이상주의를 교묘하게 융합하고 있었고 히틀러는 독일인 특유의 관념론에 기울었다. 히틀러는 독일군대가 강력한 이유로서 국가사회주의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독일 병사들의 정신력을 들었다. 히틀러가 관렴론자라면 처칠은 원칙론자였다.
  
  이런 비교표를 읽고 있으면 김정일과 히틀러가 비슷해지고 부시와 처칠이 비슷해지는 것 같습니다. 부시가 김정일에 관해 언급한 내용은 짧지만 핵심을 찌르고 있습니다.
  '주민들을 굶겨죽여가면서 핵무기를 개발하고 거대한 정치수 수용소를 운영하는 악의 축, 그 자 이름만 들어도 오장육부가 뒤집어진다'
  
  이런 부시의 대통령 재임중 한국이 김정일에 속아넘어가지 않고 끌려가지도 않고 약점도 잡혀 있지 않은 대통령이 나온다면 최소한의 경비를 지불하고 김정일 정권을 끝장내어 2천만 주민들을 보다 나은 생활로 인도하면서 4500만 한국민들이 편히 잠들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대통령이 노무현 당선자이기를 기대해봅니다.
  
  
출처 :
[ 2003-01-05, 20:3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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