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혹한 운명’의 일치: 워커 장군과 蔡秉德의 戰死
《6·25전쟁의 현장》(8) / 중국 본토 공격을 둘러싼 맥아더와 트루먼의 갈등이 고조되는 가운데, 毛澤東과 彭德懷의 不和도 심화되었다.

鄭淳台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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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군사령부에 나타난 리지웨이 장군이 육군참모총장 丁一權 장군에게 던진 첫 마디는 “한국에 와서 함께 싸우게 된 것에 보람을 느낍니다. 함께 갑시다”였다. 2015년 극렬 좌파분자에 의해 테러를 당했던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가 말한 “함께 갑시다”(Go together)의 ‘元祖(원조)’가 리지웨이인 셈이다.

맥아더와 워싱턴의 갈등, 그리고 毛澤東의 督戰

미 8군 관할 서부전선의 전·후방에도 피난민의 대열은 장사진을 이루었다. 평양의 外港(외항)인 진남포에서도 흥남항처럼 군함의 갑판 위까지 월남하겠다는 피난민들로 꽉 차버렸다.

이와 같은 인구 大이동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憧憬(동경), 유엔군에 협력한 데 따른 북한 당국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 중공군의 지배 하에 들어가는 것에 대한 혐오, 상대적으로 따뜻하고 풍요한 南에 대한 기대감 등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300만이라고 하는 숫자는 보통의 숫자가 아니다. 그건 당시 북한 인구의 3분의 1이다. 조상 전래의 땅, 재산, 家財(가재), 친지, 친구, 지위를 버리고 未知(미지)의 남한으로 피난한 이유로서는 전부를 설명할 수 없었을 것 같다.

1950년 11월 하순, 미 8군이 청천강변에서 격파되고, 미 해병사단이 장진호에서 포위되자, 투르먼 대통령은 소위 ‘원폭성명’을 발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와 관련한 소문은 청천강변 및 함경도 전선에서 철퇴 도중의 한국군 장병들도 들었다고 한다. 中共의 <인민일보> 등도 트루먼의 ‘원폭성명’을 보도했다. 그렇다면 트루먼의 원폭성명이 피난민의 규모와 전혀 무관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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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1월 하순의 戰況. 11월24일 중공군 2차 공세가 시작되어, 12월5일 평양이 함락되고, 북한 지역
중심부가 중공군에 의해 돌파당했다.


이 무렵, 워싱턴은 중공군 개입은 限定(한정)된 목적 때문이고, 38도선에서 정지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미국도 전쟁터를 한반도에 한정하고, 原爆(원폭)을 사용하지 않고, 스스로 제한을 두는 범위 안에서 유엔 및 한국에의 信義(신의)를 지키려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다.

東京(동경)의 맥아더 원수는 새로운 전쟁에 대응하는 데는 새로운 정치적 결단이 필요하다며 해·공군을 이용한 만주 폭격, 더 나아가 중국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했다. 臺灣軍(대만군)에 派韓(파한)을 요청하려고도 했다. 그러나 워싱턴의 트루먼 대통령은 이를 거부했다. 이리하여 워싱턴과 맥아더 총사령부 사이에 격렬한 응수가 오갔다.

한편 중공에서도 정치와 軍事, 후방과 전방 사이에 인식의 차이가 빚어지고 있었다. 전선의 彭德懷(팽덕회)는 보급의 한계와 부대의 피로에 대한 정비의 필요를 호소했지만, 毛澤東(모택동)은 “好機(호기)를 놓치지 말라”며 38선을 넘어 남진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중공군 부사령관 洪學之(홍학지)의 회고록에 따르면, 1950년 12월13일 毛澤東은 팽덕회 총사령원(우리의 사령관)에게 보내는 전보에서 이렇게 말했다.           

 ⓵ 미국·영국 등 각국은 아군(중공군)을 38선 이북에 머물도록 요구하고 있음. 그러나 이와 같은 요구는 시간을 벌어 다시 전쟁을 일으키려는 수작임. 따라서 아군(중공군)은 반드시 38선을 넘어 남진해야 함. 38도선 이북에서 일단 정지한다면 정치적으로 엄청나게 불리해질 것임.
 ⓶ 이번 남진에서 開城(개성) 남쪽과 북쪽 일대, 즉 서울과 멀지 않은 곳에서 적을 섬멸할 기회를 갖기 바람. 그 다음 상황을 살펴, 만일 적(국군·유엔군)이 엄청난 역량으로 서울을 固守(고수)할 경우 아군 主力은 개성 線과 그 이북 일대로 잠시 물러나 휴식을 취하면서 서울 공격을 준비할 것.
 ⓷ 아군(중공군)의 몇 개 사단을 한강 중류 북쪽 기슭으로 접근시켜 인민군(북한군)이 한강을 도하, 한국군을 섬멸하는 작전을 지원할 것. 敵(유엔군)이 서울을 포기할 경우에는 아군의 서부전선 6개 軍은 평양∼서울 사이에서 일정기간 휴식한 뒤 다시 전투를 계속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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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덕회(左)와 모택동



'38도선 以南 작전은 무리'라고 판단한 彭德懷

모택동의 전보를 받은 뒤 彭德懷(팽덕회)는 중공군이 공격을 계속하는 것이 합리적인가를 놓고 여러 차례 토의를 거듭했다. 팽덕회는 군사적인 각도에서 볼 때 당장 공격을 재개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다. 다음은 이어지는 洪學之 부사령관의 증언.
 
<아군(중공군)은 조선(한반도)에 들어온 지도 1개월 여가 되었고, 이미 잇달아 두 차례의 戰役(전역·전쟁, 난리)을 치르면서 38선에 이르렀다. 전쟁 속도가 이렇게 빠를 줄은 우리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우리들 현지 지휘관들이 판단하기로는 휴식과 병력 보충이 절실했다. (중략) 동부전선에 있는 제9兵團(병단)은 곤란이 커졌다. 인원, 탄약, 식량이 크게 부족한 형편이었다. 따라서 지금 당장의 공격 재개는 무리라는 것이 지휘관들의 공통된 견해였다.>  

중공군 지휘부는 유엔군이 38선으로 총 퇴각하긴 했지만, 主力은 역량을 보존하고 있다고 보았다. 또한 유엔군의 38선 퇴각에는 역량 보존을 위한 이유 외에도 다음 두 가지 원인이 있다고 분석했다.
 
 ⓵ 그들(유엔군)은 38선 이북에 방어선이 없었다. 평양 以南∼38선 以北에는 험한 산이 별로 없는 구릉 또는 평야지대이므로 지형적으로 방어선 구축이 불가능했다는 점이다. 또 계절적으로 겨울이기 때문에 땅이 얼어붙어 임시 방어선을 구축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반면에 38선 以南은 전부터 한국군의 방어선이 있었으므로 방어에 유리하다.
 ⓶ 미군이 두 차례의 연이은 패배로 사기가 떨어져 再정비의 기간이 필요했다. 미군은 우리(중공군)와의 접촉에서 벗어나 38선 以南 진지에서 병력을 再정비하려 한 것이다. (중략) 상대가 그렇게 빨리 철수한 것은 이미 설치해 놓은 진지를 차지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팽덕회는 유엔군이 미리 쳐놓은 그물 속으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모택동에게 복종했다. 군사적 측면에서는 공격 재개가 무리이지만, 모택동의 지시를 어기기 어려웠던 것이다. 팽덕회는 “군사는 정치에 종속돼야 한다”는 최종 결론을 내리고 제3차 공세의 준비에 들어갔다.     


워커 8군사령관과 채병덕 장군의 戰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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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커 장군과 충돌한 국군의 스리쿼터 차량.

1950년 12월23일, 워커 사령관이 교통사고로 순직했다. 워커 사령관은 이날 오전 미 24사단에 들러 전날 銀星(은성)무공훈장을 받은 아들 샘 워커 대위를 만나본 후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의 부대 방문을 준비하기 위해 의정부 북쪽의 英聯邦(영연방) 여단으로 가는 길이었다. 스피드狂(광)인 그는 지프를 과속으로 몰게 했다. 그때, 국군 제6사단 소속의 트럭과 충돌해 병원에 후송되기도 전에 숨을 거두었다. 그의 스승인 패튼 장군처럼 그도 자동차 사고로 순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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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병덕 장군

전쟁 초기, 육군참모총장으로 서울방어전에 실패한 책임을 지고 해임된 후 有名無實(유명무실)한 ‘영남편성구사령관’이란 보직을 받았던 蔡秉德(채병덕) 장군은 1950년 7월 전라도를 우회해 섬진강을 건너온 북한군 제6사단을 河東(하동)고개에서 막으려다 전사했다. 敗將不兵言(패장불병언·패장은 병법에 대해 할 말이 없다는 뜻)일까? 채병덕은 최후의 순간에 유언 한 마디조차 남기지 않았다. 청천강 패전 후에 의정부 부근에서 事故死(사고사)한 워커, 開戰 초기 방어전에 실패한 채병덕― 두 사령관에게 가해진 가혹한 ‘운명의 일치’ 였다.  

1889년에 태어난 월튼 H. 워커는 제1차 세계대전 때 기관총대장,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제4기갑군단장으로서 武名(무명)을 떨쳤다. 특히 電車用兵(전차용병)의 大家 패튼 장군의 愛제자로 그는 ‘機甲(기갑) 돌파전술의 권위’로 평가받았다. 戰場(전장)에서의 용맹·과감한 모습은 그의 短軀(단구)와도 연관되어 ‘불독’이라는 별명을 얻게 했다.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워커 장군은 일본 주둔 미 8군 사령관이었지만, 그의 지휘 하에는 定員(정원)도 채워지지 않은 4개 사단뿐이었다. 6월30일, 맥아더 원수의 명을 받아, 규슈(九州) 북단의 고쿠라(小倉)에 사령부를 둔 미 제24사단에 출동명령을 하달했는데, 이것이 미 지상군 최초의 전투 명령이었다. 워커 자신도 아직 정식으로 지휘권이 발동되지 않았던 7월7일, 한국에 날아와 상황 파악에 노력했다.

그러나 미 8군 휘하의 부대들은 점령지 일본의 치안부대에서 전투부대로의 전환이 그리 쉽지 않았고, 장비도 舊式(구식)이었다. 兵家(병가)의 禁忌(금기)인 逐次投入(축차투입·차례차례 병력을 투입)의 형태로 전투에 가입하지 않을 수 없었던 미군은, 그래도 한국군과 협력하여 戰略遲久(전략지구·지연전략)를 구사했다. 하지만, 소련製 신예 장비를 보유한 북한군의 初戰(초전) 맹공에 고전했다.


가슴에 수류탄과 야전붕대를 찬 리지웨이

1950년 12월24일, 후임 미 8군사령관은 미국 육군참모차장으로 있던 매튜 리지웨이 중장이었다. 리지웨이 사령관은 즉시 워싱턴을 출발, 도쿄(東京)를 거쳐 한국전선에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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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지웨이 장군

리지웨이 장군이 8군사령관 취임한 것은 맥아더 원수의 요청 때문이었다고 한다. 1920년대, 리지웨이 대위가 웨스트포인트(美 육군사관학교)에 근무했을 때, 맥아더는 그 학교의 교장이었다. 맥아더는 신임 미 8군사령관 리지웨이에게 前任者(전임자)인 워커 장군과 비해 막강한 권한을 부여했고, 12월27일에는 미 제10군단도 리지웨이의 예하에 편입시켰다.

1895년 生인 리지웨이는 미 육군 空挺部隊(공정부대·낙하산, 헬리콥터 등으로 공중으로부터 敵地에 투입되는 부대)의 ‘아버지’이다. 제82보병사단을 미군 최초의 낙하산 降下(강하)부대로 재편, 1943년 7월 시실리島를 시작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유럽 전선에서 空挺(공정)작전의 태반을 지휘했고, 제18공정군단장으로 終戰(종전)을 맞았다.

리지웨이는 싸움터의 勇者(용자)라는 분위기를 풍기는 장군이었지만, 동시에 理智的(이지적)인 군인이었다. 리지웨이 장군이 일본 東京의 맥아더 사령부를 거쳐 한국에 도착한 것은 12월27일 이른 아침이었다.

제8군사령부에 나타난 리지웨이 장군이 육군참모총장 丁一權(정일권) 장군에게 던진 첫 마디는 “한국에 와서 함께 싸우게 된 것에 보람을 느낍니다. 함께 갑시다” 였다. 2015년 극렬 좌파분자에 의해 테러를 당했던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가 말한 “함께 갑시다”(Go together)의 ‘元祖(원조)’가 리지웨이인 셈이다.

리지웨이 사령관의 복장은 특이했다. 가슴에 수류탄과 야전 붕대를 달고 있었다. 미 공정부대의 전투복 차림이었다. 그의 인상은 강렬했고, 패기와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그는 붕괴 직전의 미 8군을 재건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맥아더 원수의 후임으로 유엔군사령관에 취임한 후에는 맥아더와 달리 워싱턴의 의중에 따라 한국전의 휴전을 서둘렀다.  

彭德懷의 비극적 최후
 
중국지원군 총사령원인 彭德懷(팽덕회)는 어떤 인물일까? 그는 湖南省(호남성)의 貧農(빈농) 출신으로서, 어릴 때 가난에 찌들려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다. 8세 때 어머니와 死別(사별)하고, 10세 때 소에게 풀을 먹이러 다녔고, 13세 때 탄광에서 물 긷는 노동을 했으며, 15세 때 날품팔이가 되었다.

18세가 된 1916년에 군벌인 湘南軍(상남군)의 사병으로 입대했다. 그후 湖南軍官講武堂(호남군관강무학당·우리의 사관학교 개념)에 입학해 蔣介石(장개석) 휘하의 지휘관이 되었으나, 1927년 장개석이 국민당 좌파 및 공산당을 숙청하자 장개석에게서 떨어져 나와 1928년 공산당원이 되고, 군인으로서의 길을 걸어왔다. 중국공산당의 長征(장정)에도 참여했다.

1950년 국군과 유엔군이 38도선을 돌파해 북진하자, 모택동은 중앙인민혁명위원회 위원으로서 한반도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滿洲(만주)에 군사적 기반을 갖고 있던 林彪(임표)를 중국지원군 총사령원에 임명하려 했지만, 그는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취임을 거부했다. 임표가 제시했던 ‘세 가지 이유’는 건국 초기 中共의 형편이 비교적 잘 드러나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⓵ 中共정권은 이제 막 성립해, 잔류 國民黨軍(국민당군) 및 土匪(토비)의 토벌 등 내부문제가 많아 외부를 돌아볼 여유가 없다. 설령 ‘중국의 한쪽 팔’인 北조선이 떨어져 나가더라도 참전에 의해 中共정권의 존립이 위협받는 길을 택할 것이 아니라 中共정권 유지를 優先(우선)해야 한다.  
 ⓶ 강력한 유엔군의 해·공군에 비해 중공군은 아직 해·공군도 없다. 또 유엔군 步兵(보병)의 기본병기는 칼빈총·기관총 등인 것에 비하여 중공군의 무기는 주로 보병총과 中日전쟁 및 國共內戰(국공내전)에서 노획된 규격 不통일의 자동소총 등의 혼합장비뿐이다. 또 미군 1개 보병사단은 口徑(구경) 70밀리 이상의 火砲(화포)를 470∼500門(문) 보유하고, 1개 군단은 1400문 이상을 보유하고 있는 데 반해 중공군 1개 군단이 보유한 화포는 겨우 190문이다. 이것은 미군 1개 보병사단의 화력이 중공군 1개 군단의 화력보다 훨씬 강하다는 말이다.
 ⓷中日전쟁에서 얻은 戰傷(전상)으로 신경을 다쳐 본인(임표)은 바람·빛·소음에 약하다[이를 증명하기 위해 임표는 衛生副部長(위생부부장)인 傳連(부련)이 발급한 진단서를 동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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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표

위의 세 가지 이유 중 ①과 ②는 당시 중공군의 實相(실상)을 솔직하게 피력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 처해 있던 중공군이 제1차·제2차 공세로 청천강 北岸(북안)∼동해안 淸津(청진)에 主전선을 형성한 국군과 유엔군을 불과 2주일 만에 38도선까지 밀어낸 것은 戰場(전장)에서 士氣(사기)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웅변해 주고 있다. ③은 임표 자신의 건강문제이지만, 毛澤東은 이런 임표에 대해 “지나치게 신중하고, 담력이 부족하다”고 평했다.
  
모택동은 야전지휘관으로 명망이 높았던 임표 대신에 자신의 同鄕(동향) 출신인 팽덕회를 중국지원군 총사령원 겸 政治委員(정치위원)으로 임명해 한국전쟁에 출전시켰다. 어떻든 팽덕회 元帥(원수)는 한국전쟁에서 세계 최강인 미군과 대등하게 싸운 ‘전쟁영웅’인 것만은 틀림없었지만, 그의 죽음은 독재자 밑 功臣(공신)의 末路(말로)가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를 말해 준다.


死後에 再평가된 彭德懷

1958년 7월의 中共중앙군사위원회 및 일명 廬山會議(여산회의·중국 공산당 제8기 중앙 위원회 제8차 총회)에서 모택동은 중공군의 근대화·정규화를 추진해 온 팽덕회를 ‘부르주아 계급의 黨內(당내) 대변자’라고 격렬히 비판하고, “해방군이 나를 따라 오지 않으면 紅軍(홍군)을 찾으러 가겠다”고 極言(극언)했다. 모택동의 눈밖에 벗어난 팽덕회는 그 이후 죽음에 이르는 비참한 내리막길을 걷는다.
 
1966년, 上海(상해)의 <文匯報(문회보)>에 <新編(신편) 역사극 海瑞罷官(해서파관)을 평한다>란 제목의 글이 실렸다. 姚文元(요문원·중공 四人幇 중 1인)이란 사람이 썼다. 해서파관이란 1960년 당시 북경 부시장이었던 오함(吳唅)이 쓴 중국 경극의 대본으로, 모택동은 이 해서파관을 극찬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요문원은 자신이 쓴 글에서 팽덕회를 비롯해 모택동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劉少奇(유소기), 鄧小平(등소평) 등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이 글이 발표된 것을 기점으로 약 10년간 중국 인민을 공포에 빠뜨렸던 소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었다. 문화대혁명에 관해서는 필자가 <月刊朝鮮> 2004년 4월호와 5월호에 연재한 바 있는 만큼 여기서는 팽덕회의 비극적 최후에 대해서만 간단하게 언급하기로 한다.
 
1966년 12월, 팽덕회는 드디어 北京衛戍區(북경위수구)의 영창에 감금되어 냉엄한 訊問(신문)과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그는 이미 직장암에 걸려 있었지만, 입원이 가능했던 것은 1973년이었고, 이듬해 11월29일 북경에서 사망했다.

그의 명예회복은 그로부터 5년 후인 1979년 12월의 中共 11期 3中全會에서 이뤄졌다. 6·25전쟁 참전시의 교훈 때문에 중공군의 근대화·正規化(정규화)에 노력하다가 모택동에게 밉보여 ‘부르주아 分子’로 비판되었다가 모택동 死後(사후)에야 재평가되었던 것이다.

1990년 중국공산당 중앙문헌연구실에서 발간한 《건국 이래 黨의 몇 가지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에서“모택동은 팽덕회를 잘못 비판하였다”는 題下(제하)의 결정문의 핵심 부분이다.
      
<(前略) 여산회의 후반기에 있었던 팽덕회에 대한 비판과 全黨的(전당적)으로 전개한 反右派(반우파) 투쟁은 건국 이래 우리 黨이 수행해 온 정치활동 가운데 가장 중대한 과오였다. 정치적인 면에서 볼 때는 중앙에서 基層(기층)에 이르기까지 당내 민주주의 활동에 중대한 손실을 입혔다. 담대하게 實事求是(실사구시)를 하고 실제상황을 당에 반영하며 비판적인 의견을 제기하는 많은 동지들을 잘못 공격하였다. 허풍을 치고 거짓말을 하는 불량한 경향을 지지하였으며, 모택동의 1인 獨斷(독단) 풍조와 당내의 개인숭배 현상의 확대를 조장하였다.> (계속)

[ 2016-06-23, 16:27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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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호     2016-06-24 오후 6:39
마오쩌뚱의 많은 과오에도 불구하고 덩 샤오핑은 공과를 7:3 이라 평했는데 이는 공산주의자들의 셀프 평가였다. 대약진 운동 실패로 3천만의 인민을 아사 시키고, 문화혁명으로 수백만의 지식인들을 죽인 마오의 공과는 4:6 으로 보는것이 객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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