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느냐, 죽느냐” — 유엔군의 再반격이 시작되다!
《6·25전쟁의 현장》(10) / 유엔군이 중공군과의 대결에서 거둔 최초의 승리, 砥平里(지평리) 전투 이야기

鄭淳台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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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황의 好轉(호전)은 즉각 미국의 정책도 변화시켰다. 한국에서 마지막까지 버틴다는 정책을 확인했다. 이런 자신감은 바로 유엔 참전국으로 번졌다. 군사적 가능성이 있는 한 정책은 부단하게 추구된다. 군사적 패배에 의해 結束(결속)이 어지러워지고 있었던 참전 16개국은 또다시 어깨를 나란히 했고, 유엔은 중공을 ‘침략자’로 규정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끝까지 싸우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1951년 1월30일의 변화였다.

毛澤東의 過信과 욕심
 
1951년 1월 중순, 중공군은 승리자의 입장을 즐기고 있었다. 어림잡아도 50만의 대군이 漢江(한강) 이남의 땅으로 내려와 있었다. 더욱이 유엔군은 중공군을 神秘視(신비시)하는 경향도 없지 않았다.

따라서 이때 중공이 유엔의 제안을 받았다면, 그후 한국의 실질적인 영토는 북위 37도선 이하 지역으로 축소되었을 것이다. 또한 停戰(정전)을 위한 정치회담에서 공산군 측은 승리자로서 임하면서 유엔군 측에 대폭적인 양보를 강요했을 것이다.

핵을 쥔 북한이 '서울 불바다'를 외치는 지금도 그렇다. 이 시점에서 우리의 自救策(자구책)을 훼손하거나 제한하는 제3자의 행위는 非논리적이며, 正義도 아니다. 누가 무슨 소리를 하더라도, 歸責(귀책)사유가 없는 一國의 안전보장이 냉엄한 국제정치의 희생물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단언컨대 오늘의 중국이 방어무기인 사드(THAAD·高高度 미사일 방어체계)의 한국 배치에 대해 왈가왈부할 명분과 권한은 없다.

1951년 1월 당시, 중공이 만약 유엔의 제안을 받았다면 유엔군의 조기 철퇴가 불가피해졌을 것이다. 미국은 체면만 살릴 수 있다면 오히려 한국 주둔을 고집하지 않았을 터이다. 왜냐하면 상당한 增援(증원)을 하지 않는 한 37도선에 설정된 진지의 계속 확보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또 臺灣(대만) 문제와 유엔 가입 및 안보리 상임이사국 지위 획득 문제도 중공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때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인지조차 의문이 든다. 북한의 인구는 두 배 이상 늘어나고, 한국은 3분의 1 이상의 인구를 상실했으므로, 설사 유엔과  李 대통령이 주창해온 한반도에서의 총선거를 시행했더라도 북한에 오히려 유리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1년 1월17일에 도착한 중공의 회답은 유엔군에 대해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① 교섭의 결과로써 휴전한다
     → 작전을 하면서 교섭한다. 즉, 부산을 점령할 때까지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뜻임.
 ② 교섭 개시와 함께 중공의 유엔 가입을 인정한다
     → 대만을 대신해 安保理 상임이사국이 되어, 거부권을 가지고 교섭을 유리하게
         진행시키겠다는 뜻임.
 ③ 교섭 참가국은 蘇·英·美·佛·인도·이집트·중공으로 하고 회의 장소는
     중공 내 영토로 한다.
     → 균형이 이뤄진 듯 보이지만, 당사국인 한국과 북한은 포함되어 있지 않음.
         결국 한반도를 중공의 위성국으로 삼으려는 속셈임.
 
결국 한반도를 ‘먹겠다’는 의지를 명확히 한 것이다. 중공이 6·25전쟁에 개입했을 때, 그 정치목적이 어디까지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중공은 그것에 대해 발표한 적은 없다.

여러 억측은 있지만, 1951년 1월17일의 시점에 있어서 중공은 한반도의 무력적 공산통일을 꾀했던 것이 확실하다. 물론 이 정책은 무력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흐루시초프는 그의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기록보관소에는 彭德懷(팽덕회·중공군총사령관)가 毛澤東에게 보낸 상황보고의 문서가 발견되었다. 彭(팽)은 미군에 대한 상세한 전투계획을 기록한 장문의 전보를 썼다. 그는 단정적으로 “적은 포위되어 결정적인 측면공격에 의해 섬멸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彭이 毛에게 보내고, 毛로부터 스탈린에게 回送(회송)된 이들 전황보고에서는 미군은 몇 번이나 궤멸당하고, 전쟁은 몇 번이나 끝나 있었다.>

따라서 중공 수뇌부는 필승을 믿고,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던 것이다. 아마도 戰場(전장)의 實相(실상)이 알려지지 않은 채 자기의 힘을 과대평가하고 미국의 힘을 과소평가하여, 힘으로 부산까지 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史料(사료)는 없지만, 결과로부터 보아 그렇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北進 때 미국이 범했던 교만함과 똑같았던 것이었다.

실은 毛澤東의 강경함과 반대로 38선 남쪽 60∼100km까지 진출하고 있던 중공군은 이미 공격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당시 중공의 국력으로써는 압록강으로부터 460km나 떨어진 37도선 부근에서 공세를 취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혹한의 기후에, 더욱이 被(피)제공권 아래 인력 및 畜力(축력)에 의지한 兵站(병참)이 제1선 부대를 뒤따를 수 없었던 것이다.

또 상상을 뛰어넘은 미군의 화력과 機甲力(기갑력)은 중공군의 돌격력을 크게 삭감하고 있었다. 견디기 어려운 타격을 받고, 굶주림과 추위, 그리고 피로와 질병에 허덕이던 중공군 장병들은 그간의 잇단 공세로 체력과 기력을 잃고 있었다. 前線(전선)의 중공 병사들은 이미 탄환을 다 쏘아버렸고, 兵糧(병량)의 부족으로 굶주리고 있었다.

결과로부터 중공군의 작전능력은 현실과 커다란 갭(gap)이 있었다. 일본의 戰史 연구가 사사키 하루다카(佐佐木春隆) 교수는, “팽덕회 등 한국전쟁에 참가한 중공의 장군들 대부분이 그 후 무슨 형태로든 숙청당했던 것은 毛澤東의 정치적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한 책임과 무관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고 지적했다.

결국 중공의 ‘무조건 항복 요구’는 停戰(정전)의 골든 타임을 스스로 던져버린 셈이 되었다. 중공은 1951년 1월 중순에 있어 최대의 군사적 성과를 정치적 열매로 전환시키지 못했다. 사람의 욕심에는 끝이 없다지만, 毛澤東의 욕심은 너무 過(과)했다.


美를 자극한 中

중공의 과도한 요구는, 오히려 미국의 자존심을 자극시켰다. 미국은 끝까지 싸울 결의를 굳히고 한국으로부터 내쫓길 때까지 최대의 저항을 불사한다는 결의를 새롭게 다짐했다.

유엔군은 37도선 진지에서 敵의 南下를 기다렸다. 중공군의 다음 공세는 1월20일 경으로 예측되었다. 그러나 중공군은 공격해 오지 않았다. 유엔군은 정찰과 접촉을 개시했다. 하지만, 적의 경계막만 쳐져 있을 뿐으로, 主力의 위치는 알 수 없었다. 정찰은 威力偵察(위력정찰)로 변했고, 1월25일에는 攻勢로 발전하고 있었다. 再반격의 개시였다. 참고로 위력정찰이란 적의 병력, 배치, 능력과 강도를 탐색하고, 첩보를 획득하기 위해 실시하는 정찰활동을 말한다. 

유엔군은 우선 서부전선에서 北上하고, 이어 눈에 쌓인 중·동부전선에서도 반격을 개시했다. 그러자 중공군의 戰力(전력) 한계가 차츰 명백하게 드러났다. 중공군은 현대 병참을 모르는 군대였다.

전황의 好轉(호전)은 즉각 미국의 정책도 변화시켰다. 한국에서 마지막까지 버틴다는 정책을 확인했다. 이런 자신감은 바로 유엔 참전국으로 번졌다. 군사적 가능성이 있는 한 정책은 부단하게 추구된다. 군사적 패배에 의해 結束(결속)이 어지러워지고 있었던 참전 16개국은 또다시 어깨를 나란히 했고, 유엔은 중공을 ‘침략자’로 규정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끝까지 싸우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1951년 1월30일의 변화였다. 유엔이 전면 항복의 뜻을 비친 지 3주도 지나지 않았던 시점이었다.

1951년 2월 중순, 서부전선에서는 한강 유역으로 북상하여 서울을 바라보았고, 중부전선은 砥平里(지평리)∼橫城(횡성)선으로 북상했다. 바야흐로 밀물의 시기였다. 위력정찰의 결과 중공군의 실제 戰力(전력)은 현저하게 저하되어 防勢(방세)로 이전되고 있었다. 미국은 다시 싸울 결심을 굳히고, “침략자(중공)를 한국으로부터 격퇴한다”는 당초의 목적으로 되돌아갔다

사실, 이때 급속한 南下로 兵站線(병참선)이 갑자기 길어진 중공군은 기진맥진해 있었다. 국군 제1사단은 華僑(화교) 청년들로 이뤄진 수색대를 편성·운용했는데, 그들이 敵 점령지인 金良場(김량장·지금의 용인시 김량장동) 부근에 침투해 중공군 38군 113사단 소속 병사들을 몇 명을 붙잡아 왔다. 중공군 포로들은 “兵糧(병량)이 오지 않아 사흘을 굶었다”, “凍傷(동상)에다 장티푸스까지 번졌다”는 등의 고통을 호소했다.

   
“중공군 공세는 열흘을 지속하기 어렵다”

1950년 12월26일, 미 8군사령관에 착임한 리지웨이 중장은 한동안 냉정하게 중공군의 특징을 연구하고, 그 공세의 실체에 바탕한 대비책을 세웠다. 1주일분의 식량·탄약 밖에 휴대하지 않고, 후방지원이 거의 없는 중공군에 그 공세의 초기에만 버티면, 그 후 逆(역)공세로 전환해 식량도 탄약도 부족한 중공군에 이긴다는 것이었다. 

또 중공군의 병참지원은 작전지역이 뻗을수록 저하하고, 그 후방 수송라인을 空爆(공폭)으로 때리면 중공군의 남하는 한층 더 어려워진다는 점도 파악되었다. 미군을 한때 공포로 몰아넣었던 運動戰(운동전)과 포위섬멸전이란 전술에 대해서도, 아군의 후방으로 적이 침투하는 틈새를 주지 않고, 탱크·대포·보병을 집중 사용하면, 포병과 보병의 링크[link·連携(연휴)]조차 원활하지 않고, 근대적 병기도 갖추지 않은 중공군의 공격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분석했다.

37도선으로 후퇴했던 유엔군은 서쪽으로부터 미 제1군단(미 제3사단·미 제25사단, 영연방 제239여단, 국군 제1사단), 미 제9군단(미 제24사단, 국군 제6사단, 영국 제27여단), 미 제10군단(미 제2사단·제7사단, 국군 제2·제5·제8사단), 국군 제3군단(제7사단·제9사단), 국군 제1군단(수도사단)을 제1선에 배치했다. 또 미 해병제1사단과 국군 제11사단 등 제8군 직할 부대에게는 태백산맥 및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 소탕작전을 맡겼다.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 중장은 敵軍과의 접촉을 회복하기 위해 미 제1군단과 미 제9군단 그리고 국군 제1군단과 국군 제3군단에 대해 威力偵察(위력정찰)을 명했다. 

유엔군의 위력정찰은 1951년 1월15일을 기해 전개되었다. 작전 명칭은 ‘늑대’. 이즈음 중동부전선에서는 폭설이 내리고 있었다. 이 폭설의 와중에서도 국군 제1군단과 제3군단은 이틀에 걸쳐 정찰대를 내보냈으나 폭설에 가로막혀 전방 24km까지 밖에 나아가지 못했고, 그 24km 이내에서는 적을 탐지하지 못했다.

미 제9군단은 위력정찰을 위해 1개 연대를 北上시켰지만, 공산군의 경계부대인 듯한 小부대와 조우했을 뿐이었다. 미 제1군단 예하 미 27연대는 1개 전차대대와 3개 포병대대를 증강시켜 오산 → 수원 방면을 향해 적의 主저항선을 탐색하는 위력정찰을 전개했다. 병참선이 길어져 보급에 실패한 때문인지 중공군은 사기가 저하되어 도주하기만 했다.

1951년 1월24일, 리지웨이 8군사령관은 패트리지 美 5공군사령관과 T6機(기)에 약 2시간 탑승, 前線(전선)을 시찰했다. 敵의 움직임은 발견되지 않았다. 리지웨이 사령관은 위력정찰과 공중정찰의 결과를 바탕으로 1951년 1월25일 마침내 총공격을 명했다. 작전명은 선더볼트(번개). 공격 목표는 한강 以南線(이남선).

기사본문 이미지
일본에서 작성된 1951년 1월24일의 戰況圖. 중공군의 正月공세 때문에 유엔군이 남쪽으로 밀려나 37도선에 전선을 구축한 상황이다. 이튿 날, 리지웨이 8군 사령관은 중공군이 주둔하고 있던 한강 이남을 겨냥,
총공격할 것을 명령한다.

미 1군단 소속 미 3사단·미 25사단·국군 1사단은 김포·영등포·이천 방향으로, 미 9군단 소속 미 제1기병사단·미 24사단·국군 6사단은 이천·양평·여주 방향으로 진격했다. 제1선 부대를 늘려 5개 사단을 竝進(병진)시킨 것이었다. 당초의 위력정찰은 대규모 공세로 발전하고 있었다.

1951년 1월 말, 중공군의 저항도 격렬해졌다. 중공군은 한강 南岸(남안)에 6개 사단을 배치해 방어태세를 강화했다. 전세의 역전이었다. 1월26일에는 수원비행장, 2월7일에는 경기도 안양을 탈환했다. 2월10일에는 미 제1군단 선두가 한강 南岸에 진출해 김포비행장을 탈환했다. 하지만 후퇴 시의 유엔군의 파괴가 극심해 비행장은 사용 불능이었다.

응급수리로 수원비행장에서 제트機의 이·착륙이 가능해진 것은 1951년 3월6일이었다. 제트기는 한국전쟁에서 실용화한 ‘新세대 전투기’였다. 1951년 2월부터 유엔 공군은 야간에 근접 항공지원 작전을 할 때 처음으로 레이더를 사용해 공격하는 방법을 개발해 성과를 올리게 되었다.  

이 사이, 중부 산악 정면의 미 제10군단에서도 1월31일부터 위력정찰을 개시하고, 2월5일에는 부대를 증강했고, 국군 제3군단도 가세하는 대규모 공세로 발전했다. 이를 ‘라운드업(몰아서 치기) 작전’이라고 했다. 처음엔 공산군의 저항을 받은 일이 거의 없었지만, 강원도 홍천  부근에서 강력한 저항을 만나 진격은 한때 停滯(정체)되었다.

유엔 지상군의 北上에 따라 일본 등지로 철수했던 미 공군도 한국 내의 비행장으로 복귀했고, 압록강 주변 상공에서는 미그(Mig)기와 F86기 사이에 공중전이 벌어졌다. 미그機는 韓滿(한만)국경이라는 ‘聖域’(성역)을 이용해 공격의 시기와 장소를 選定(선정)하는 게 가능했지만, 아직 적극적으로 F86에 대항해 공중전을 걸지는 못했다. 미 공군은 이를 중공 파일럿의 훈련도가 아직 낮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했다.

공중전의 새로운 페이지를 개막시킨 전투기의 제트化였다. F86과 미그15의 성능을 비교하면 高高度(고고도)에서는 미그기가 오히려 우세했다. F86이 失速(실속)하는 高度에서도 유유히 상승을 계속했지만, 그러나 中高度(중고도)에서는 F86의 성능이 우세했다. 미그기가 적극적으로 공격을 개시했던 것은 1951년 4월부터였다.        


“사느냐, 죽느냐” — 美 23연대의 死鬪

눈사태처럼 몰려오는 중공군의 공세에 의해 중부전선의 요충 砥平里(지평리)는 완전히 포위되고 말았다. 고립무원 속에 미 제23연대의 死鬪(사투)가 이틀간 계속되었다. 그것은 한국전쟁 중 중공군에 대해 유엔군이 거둔 최초의 승리였다.

1951년 2월5일,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3군단은 라운드업 작전을 개시했다. ‘라운드업(몰아붙치기)’ 작전은 중동부 전선으로 진격하는 작전이었다. 유엔군사령관의 직접 지휘에 있던 미 제10군단이 1950년 12월27부로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 중장의 지휘 下에 편입되었다.
 
1951년 2월11일, 중공의 제4차 공세(2월 공세)가 개시되어 2월18일까지 계속되었다. 공산군은 중부전선의 강원도 횡성 정면에서 중공군 2개 군단과 북한군 3개 군단, 즉 합계 14개 사단을 집중시켜 공세로 전환했던 것이다.

중공군의 제4차 공세로 미 10군단에 배속된 국군 제8사단은 강원도 횡성 서북쪽에서 와해됐고, 국군 제5·제3사단도 큰 타격을 받았다. 유엔군의 ‘선더볼트(번개) 작전’에 대항하여 발동된 중공군의 제4차 공세는 전력의 집중으로 유엔군의 진지를 돌파해 縱深(종심) 깊게 파고들려 했던 것이다. 종심(Depth)이란 어떤 隊形(대형)이나 陣地의 전방으로부터 후방에 이르는 간격을 말한다.

횡성 북쪽의 국군 제3사단은 공산군 10개 사단에 의해 돌파되었다. 미 제10군단은 미 제2사단 主力에게 原州(원주)를 확보케 하고, 그 엄호 하에 한국군 제2·제5·제8사단을 후퇴시켰는데, 이때 한국군은 큰 출혈을 강요당했다. 태백산맥에 따라 배치된 국군 제3군단은 배후의 적에 挾擊(협격)되어 대혼란에 빠졌다. 리지웨이 제8군사령관은 그의 회고록 《한국전쟁》에서 중공군의 횡성전투 승리를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중공군의 공격 前面(전면)에 있었던 미 제2사단은 처음 용감하게 맞섰으나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우선, 대포의 손실이 엄청났다. 이러한 손실은 한국군 제8사단이 지나치게 서둘러 철수하는 바람에 발생했다. 한국군 제8사단은 적의 야간공격을 한 차례 받더니만 완전 붕괴되어 미 제2사단의 측면을 그대로 노출시켰다.>

횡성을 점령한 중공군은 계속해서 강원도 원주에 맹공을 가했고, 원주를 우회하여 堤川(제천) 북쪽까지 남하했던 북한군 제5군단도 동시에 원주와 제천에 압력을 가해 왔다. 미 제10군단의 위기였다. 더욱이 이때 미 제9군단과 미 제10군단의 접촉부인 양평군 지평면 砥平里(지평리)에서는 미 제23연대가 중공군 3개 사단에 의해 포위되어 生死(생사)의 기로에 섰다. 지평리가 함락되면 측방이 노출된 아군은 다시 37도선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는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된다. 

기사본문 이미지
지평리 전투는 유엔군이 처음으로 대규모 공세를 물리치고 진지를 고수한 전투였다. 이 전투로 중공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고 제4공세에 실패하게 되었으며, 유엔군은 재반격의 틀을 다지게 되었다. 이후 유엔군은
중공군의 공격에 자신감을 갖게 되어, 38도선 회복을 위한 반격작전도 수행할 수 있었다.


유엔군의 반격을 저지하기 위해 중공군은 1951년 2월 횡성과 지평리 일대로 대규모 공세를 계속했다. 중공군의 1951년 2월 공세(제4차 공세)가 시작되자, 미 제10군단은 즉각 原州(원주)∼堤川(제천)으로 밀려나 砥平里(지평리·지금의 양평군 지평면)의 미 제23연대는 고립하고 말았다. 지평리의 한자를 보면, 숫돌 砥(지), 편평할 平(평)을 써 땅이 숫돌처럼 편평하다는 뜻이다. 과연, 지평리는 해발 300∼400m의 산들로 뺑 둘러싸인 꽤 넓은 평야다.

연대장 프리맨 대령은 철수를 요청했고, 미 제10군단장 알몬드 소장도 동의했지만, 리지웨이 8군사령관은 이를 허가하지 않았다. 지평리를 잃으면 중부전선에 큰 구멍이 생겨 서울 정면의 미 제9군단도 우익으로부터 위협을 받게 된다는 것이었다.


“증원해서라도 지평리를 死守하라!”

리지웨이 8군사령관의 嚴命(엄명)이었다. 연대에 대한 명령을, 사단장 및 군단장을 제치고 8군사령관이 직접 내려야 했을 만큼 지평리는 死守(사수)해야 할 요충이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미 제23연대는 3개 보병대대(제1·제2대대와 프랑스 대대), 輕砲(경포) 1개 대대(155mm 포×6문), 고사포 1개 중대, 탱크 1개 중대(21대)의 규모에 불과했다.

프리맨 연대장은 地形(지형)과 소수의 병력에 어울리게 직경 1.6km의 圓陣(원진)을 구성했다. 미국 서부 개척시대에 개척민들이 인디언 부대의 습격을 받으면 으레 마차를 빙 둘러 세워놓고 방어를 했던 전통적 四周防禦(사주방어·All rond defense)의 布陣(포진)이었다.

四周防禦란 방어의 주력은 敵의 공격방향에 지향시키고, 어느 방향으로부터의 적 위협에도 대처할 수 있도록 방어 편성을 하는 것을 말한다. 또 3개 보병대대를 사이에 틈새가 생기지 않게 배치하고, 포병과 전차를 그 圓陣(원진) 내부에 두었다. 그리고 참호를 깊게 파고, 陣前(진전·陣地의 앞)에 對人(지뢰)와 조명용 네이팜彈(탄)이 든 드럼통을 매설하고, 火砲(화포)의 試射(시사)를 끝내고, 탄약·식량을 비축했다.

중공군 총사령원 겸 정치위원 彭德悔(팽덕회)는 즉각 副사령원 鄧華(등화)에게 지평리의 미군을 섬멸하라고 명령했다. 등화는 중공군 제39군과 제42군 일부를 再정비해 지평리 포위작전에 나섰다.

1951년 2월13일 아침, 前方(전방)에 파견된 斥候(척후)로부터 “大縱隊(대종대)가 접근 중”이라는 보고가 들어왔고, 정찰기로부터도 같은 연락이 들어왔다. 미 제2사단은 제38연대를 지평리에 증원·파견했지만, 미 제38연대는 그날 오후 도중에 중공군에게 저지되어 증원에 실패했다.

드디어 지평리에 날이 저물었다. 지평리를 포위한 3개 사단 규모의 중공군이 박격포와 야포로 공격준비사격을 실시한 후 새까만 개미떼처럼 미 제23연대 진지로 다가왔다. 남쪽의 望美山(망미산)으로부터 下山하는 횃불들이 보이고, 곧 서쪽으로부터도 횃불들이 다가왔다.

이제, 미 제23연대는 怒濤(노도)와 같이 몰려오는 중공의 대군에 완전히 포위되고 말았다. 이미 도주할 길은 없었다. 사느냐 죽느냐, 기로에 선 제23연대의 사투가 시작되었다. 유엔군의 치열한 砲·爆擊(포·폭격)에도 완강한 공세를 계속하는 중공군. 이후 雪中(설중)의 야간격투는 이틀간 전개되었다. 

미 제23연대를 포위한 중공의 제39군은 四周攻擊(사주공격)을 개시했다. 연대는 화포로 彈幕(탄막)을 쳤지만, 그것을 재빨리 빠져나온 중공군은 기관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졌으며, 그 뒤로부터는 박격포탄을 날렸다. 미 제23연대가 이를 기관총 사격으로 격퇴하면, 후방의 중공군 부대는 陣前(진전) 100m에서 전개해 着劍(착검)하고, 피리와 나팔을 불면서 진지를 향해 돌격을 감행했다.

미 제23연대는 全 화력을 집중하여 진지 주변에 빈틈없는 彈幕(탄막)을 구성했다. 이날 밤, 23연대가 보유한 포 1門 당 평균 250발을 중공군에 집중 발사하여 가공할 위력을 발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도 연대 지휘소 주위에 300발의 포탄을 발사했다. 이로 인해 제23연대장 프리만 대령이 다리에 박격포탄의 파편을 맞아 부상했고, 군수참모가 전사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중공군은 2월14일 새벽에 제115사단의 2개 연대가 추가로 투입해 공세를 강화했다. 날이 샐 때까지 미 제23연대의 인명손실은 100 명에 달했다. 그러나 날이 밝아오자, 중공군의 기세는 미군의 空爆(공폭)에 의해 대번에 꺾여버렸다. (계속)

[ 2016-07-04, 18:0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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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배     2017-11-19 오후 9:48
중국 입장은 이렇다.

1. 한반도 핵반대; 남은 협조하고 북은 협조 안함
2. 사드 반대; 대안 없음

사드를 반대하려면 북 핵을 못하게 하든가, 남한사람 핵 공포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든가
남한이야 핵 맞든말든 무조건 사드반대란 주장을 한다. 여기서 그들의 합리사고 부족, 휴머니즘 무지를 느꼈다.
중국은 한국보다 의식수준이나 합리성이 떨어진다. 다만 힘만 센 곰같은 존재란 걸 보여주었다. 실망이다.

중국 사드 대처는 정말 불쾌하고 분하다.
미국과의 동맹을 더욱 공고히 하자

유머강사1호 김진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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