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23연대, 사흘간의 血鬪 끝에 중공군 3개 사단을 격퇴하다!
《6·25전쟁의 현장》(11) / 4계급 강등을 自請(자청)해 참전한 몽클라르 장군과 다리에 중상을 입었음에도 後送(후송)을 거부한 프리먼 대령

鄭淳台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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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클라르가 중공군의 꽹과리·나팔 소리를 제압하기 위해 미리 준비한 기막힌 對抗(대항)전술이었다. 프랑스 외인부대 병사들은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참호 밖으로 뛰어나가 코앞에 들이닥친 敵兵(적병)을 찌르고 쏘았다. 어둠 속의 백병전이었다… 중공군 병사들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엄청난 볼륨의 手動(수동) 확성기의 사이렌 소리와 맞닥뜨리자, 아연실색해 모두가 그 자리에서 장승처럼 굳은 모습으로 그냥 서 버렸다. 프랑스 병사가 총으로 쏘고, 착검한 소총으로 찔러대자 중공군 병사들은 본능적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外人部隊의 전설적 영웅’ 몽클라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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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외인부대 장병들. / 출처: 육군군사연구소 刊 <1129일간의 전쟁 6·25>


2월13일 야간전투에서 가장 빛났던 부대는 미 제23연대에 배속된 프랑스 外人部隊(외인부대)인 몽클라르 대대였다. 몽클라르(1892∼1964)는 프랑스군의 현역 中將(중장)이었지만, 한국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무려 4계급 강등을 自請(자청)해 중령 계급장을 달고 대대를 지휘한 전투의 프로였다. 전투복의 머플러는 붉은 색, 견장은 短刀(단도)를 움켜진 굳센 손과 승리의 월계관으로 장식된 외인부대 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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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리전쟁기념관에 전시된 몽클라르의 흉상과 필자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지평리에 가면 프로 군인의 냄새를 물씬 느낄 수 있다. 이 곳에 지평리전투기념관이 있어서이다. 기념관 안에는 제1차·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몽클라르(1892∼1964) 장군에 관한 자료가 있다. 그는 헝가리의 首都(수도) 부다페스트 태생이다. 본명은 마그랭 버르너리.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해 神學校(신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나 그의 모험심과 군인에의 열망은 가출 소년이 되어 프랑스 外人部隊에의 입대를 지원하게 했다. 당시 그의 나이 15세. 외인부대는 너무 어린 그를 歸家(귀가) 조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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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클라르 장군

1912년, 스무 살이 된 그는 프랑스 육군사관학교에 입학, 1914년 졸업과 동시에 소위로 임관했다. 1914∼1918년의 제1차 세계대전 중 그는 일곱 개의 훈장, 열한 개의 표창을 받았지만, 일곱 차례나 戰傷(전상)을 당해 몸에 성한 데가 거의 없는 장애등급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불굴의 정신으로 건강을 회복, 해외(시리아 등) 근무 중에도 탁월한 지휘력을 발휘했다.

外人부대에 전속된 그는 1927년 모로코 전쟁에 참가해 전공을 세웠다. 1940년에는 여단급 외인부대를 이끌고 노르웨이의 나르빅港(항) 북쪽의 제르비크(Bjervik)市에서 나치 독일군과 싸워 이기고, 쌍발 항공기를 포함한 다량의 무기를 노획했다. 그 공로로 몽클라르는, 프랑스 군인으로서는 최고 영광인 ‘드골賞(상)’을 수상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군이 나치 독일군에게 유일하게 승리한 전투였던 것이다.

프랑스 본토가 나치 독일군에게 모두 탈취당하자 부하 50명과 망명, 자유 프랑스군으로 나치 독일군과 싸웠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해인 1946년 그는, 알제리아 주둔 프랑스軍 부사령관, 그 후 알제리아, 모로코, 마다가스카르, 인도차이나 반도에 주둔하는 外人부대장을 역임했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 그는 육군 중장이었다. 프랑스는 한국전쟁에 大隊(대대) 병력 600명만 파병했다. 부대 규모를 고려한 그는 놀라운 제안을 했다.

“파견될 병력이 대대 규모이니, 내가 대대장이라면 문제 될 것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대대장의 계급은 중령, 지금부터 나는 중령이다!”
    
그는 60세였던 1952년 제대해, 1964년 향년 72세로 별세했다. ‘전설적 전쟁 영웅’ 몽클라르의 장례식은 암바리드 肺(폐)병원에서 드골 대통령이 직접 주관하고 당시 駐프랑스 한국대사였던 백선엽 장군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하게 치러졌다. 그의 시신은 파리 앵발리드의 생 루이 성당 祭壇(제단) 아래에 있는 지하묘지에 묻혔다. 이 묘지는 프랑스 육군의 최고 영예로 꼽히는 ‘파리 방위사령관’ 중 武功(무공)이 혁혁한 인물들만 묻히는 곳이다.

2015년 6월10일, ‘지평사모’(회장·김성수 법무법인 亞太 대표변호사) 회원 다섯 명은 몽클라르의 묘를 찾아가 獻花(헌화)했다. <조선일보>는 같은 해 6월13일자에 “이제야 프랑스에 와서 6·25 영웅 몽크라르 장군에게 감사함을 전합니다“라는 요지의 기사를 실었다. 지평사모가 베푼 오찬회에는, 장군의 딸 파비엔느 몽클라르(64세)와 대령 출신 사위인 버나드 듀포(71세), 그리고 몽클라르의 옛 전우들과 미망인들이 참석했다고 한다.


사이렌 소리로 중공군을 겁주다!

몽클라르 대대는 지평리 서쪽인 지금의 지평중학교 자리를 대대본부로 삼고, 바로 그 남쪽의 중앙선 철로 연변에서 서북방 송곡까지 제1·제2·제3·제4중대의 진지를 차례로 構築(구축)했다. 서북쪽의 제3중대의 송곡 쪽의 진지는 연대 전체의 진지에서 젖꼭지처럼 돌출되어 있어 敵이 제일 먼저 다가올 만한 지형이었다.   

과거의 戰傷(전상)으로 다리를 절었던 몽클라르는 지휘봉 대신 지팡이를 짚고, 참호와 참호를 돌며 부하들에게 속삭이듯 명령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흰 고래에게 다리 하나를 잃고 그 고래를 잡으려는 집념으로 일생을 바친 소설 《모비딕(白鯨·백경)》의 포경선 선장 에이하브를 방불케 했다.

1951년 2월13일 자정이 가까워 오던 지평리. 어둠을 타고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나팔 소리, 꽹과리 소리, 북 소리, 피리 소리. 그날 밤에도 중공군들은 변함없이 야릇한 분위기로 상대를 으스스한 공포에 휩싸이게 한 다음, 저승사자나 된 듯이 人海戰術(인해전술)을 전개했다.
 
중공군은, 기원 전 3세기 楚漢戰(초한전)의 결전인 ‘垓河(해하)의 싸움’에서 승패를 결정지은 四面楚歌(사면초가)의 수법을 20세기의 한국전쟁에서도 傳家(전가)의 寶刀(보도)처럼 구사해, 그동안 엄청난 재미를 보아온 터였다. 그 모든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이제 중공군은 참호 앞 20m까지 접근했다. 몽클라르 대대장은 외쳤다.

“일제 사격! 全 대원, 공격 앞으로! 한 놈도 남지지 말라. 쏴 죽여!”

몽클라르의 날카로운 명령에 뒤이어 고막이 찢어지게 울려대는 사이렌 소리. 그 진원지는 프랑스 진영 안이었다. 

“웨에에엥, 웨에엥, 웽웽∼∼∼”

이것은 몽클라르가 중공군의 꽹과리·나팔 소리를 제압하기 위해 미리 준비한 기막힌 對抗(대항)전술이었다. 프랑스 외인부대 병사들은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참호 밖으로 뛰어나가 코앞에 들이닥친 敵兵(적병)을 찌르고 쏘았다. 어둠 속의 백병전이었다.   

그동안의 연전연승으로 방자해졌던 중공군 병사들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엄청난 볼륨의 手動(수동) 확성기의 사이렌 소리와 맞닥뜨리자, 아연실색해 모두가 그 자리에서 장승처럼 굳은 모습으로 그냥 서 버렸다. 프랑스 병사가 총으로 쏘고, 착검한 소총으로 찔러대자 중공군 병사들은 본능적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진지 앞 논바닥을 가득 메웠다가 후퇴하는 중공군 병사들을 향해 일제사격을 가하고, 추격해 수류탄을 던지기도 했다. 중공군이 버리고 간 꽹과리, 북, 피리 등이 논바닥에 무더기로 팽개쳐져 있었다. 敵들의 간담을 서늘케 한 사이렌 소리는 아직도 울려 퍼지고 있었다. 시각은 2월14일 새벽 2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격투에 이은 격투― 제2일차 전투

2월14일, 黎明(여명)과 함께 미 제23연대는 진지를 강화하고, 陣前(진전)에 잠복하고 있던 중공 패잔병들을 토멸했다. 공군기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낮에는 중공군의 공격은 없었다.

이날 오전에는 강풍과 敵의 박격포 및 야포 사격으로 인해 부상병의 헬리콥터 후송마저 어렵게 되었다. 또한 강설로 인해 기상이 악화되어 유엔 공군의 항공지원도 어려웠다.

그러던 중 오후 들어 기상이 호전됨에 따라 14시30분부터 유엔 공군 전폭기가 진지 남쪽 망미산 일대에 집결한 중공군을 공격했다. 그리고 15시에는 일본에서 발진한 수송기 24대가 3시간에 걸쳐 미 23연대 집결지에 보급품을 투하했다. 이에 중공군은 간헐적인 박격포 사격에만 의존하면서 주간 공격을 단념했다.

밤이 되자, 중공군은 또다시 신호탄을 올리고, 피리와 나팔을 불며 또다시 夜襲(야습)을 개시했다. 전날 2개 사단이 동시에 공격하여 실패한 중공군은 이날 밤 2개 사단을 추가하여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중공군의 이틀째 야간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중공군은 한강 이남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지평리를 반드시 확보해야만 했기 때문에 무모한 공격을 계속하고 있었다. 병력수 9만여 명이 3000여 명의 유엔군과 血戰(혈전)을 벌였던 것이다. 보유한 화력은 미약했지만, ‘인간’이란 자원은 넘쳐나는 듯했다.

제23연대는 전날 밤처럼 奮戰(분전)했지만, 적의 거듭되는 인해전술로 인한 피로 때문에 남쪽의 제2대대 G중대의 진지가 탈취되었다. G중대는 豫備小隊(예비소대)의 증원을 받아 逆襲(역습)으로 전환했지만, 稜線(능선)을 확보한 중공군에게 저지되어, 역습에 실패했다.

G중대는 후방의 능선에 새 진지를 설치해 부상자를 수용했다. 中砲(중포)중대는 진지에 그대로 머물렀다. 드디어 G중대의 진지를 점령한 중공군이 능선을 넘어 지평리의 거리를 향해 공격을 시작하자, 中砲중대는 이곳에 黃燐彈[황린탄·화학성분인 燐(인)으로 만든 탄으로, 주로 차폐용 연막탄 등에 이용됨]을 집중시켰다.

유엔군의 화력 앞에 중공군은 속수무책이었다. 유엔군의 포병과 박격포 세례에 살아남은 자는 지뢰지대에서 죽고, 지뢰지대를 벗어난 자는 철조망 앞에서 기관총 연속사격에 쓰러졌다. 일부 진지 내에서는 중공군과 백병전을 벌였다. 혼전이었다.

제2대대는 보병·포병·전차·항공기의 전투력을 집중해 역습했지만, 중공군은 완강했다. 그러나 먼동이 트면서 중공군의 기세가 꺾이기 시작했다. 이에 제2대대가 탱크를 前面(전면)에 내세워 사격을 가하자, 중공군은 갑자기 동요해 자중지란에 빠져 수천 구의 시체를 남기고 도주했다. 그날 밤 지평리에는 함박눈이 내려 널브러진 戰死體(전사체)를 하얗게 덮고 있었다.  
   

鄧華의 자아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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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23연대를 지원하기 위해 지평리로 향하는 미 제5기병연대 전차소대. / 출처: 육군군사연구소 刊
<1129일간의 전쟁 6·25>


2월15일, 지평리에서 이틀간의 처절한 전투를 치른 미 제23연대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지만, 다시 진지를 보수하고 그날 밤의 결전에 대비하고 있었다. 이때 지평리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리지웨이 8군사령관은 미 제9군단에 지평리와의 연결작전을 명령했다.

리지웨이로부터 지평리 구원을 명받은 미 제9군단은 제5기병연대장 크롬베즈 대령의 이름을 딴 ‘크롬베즈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해 지평리로 파견했다. 부대는 즉각 前進(전진)했지만, 2월15일 아침 지평리 남방 6km인 谷水里(곡수리) 부근에서 중공군의 저항에 부딪혔다. 이에 크롬베즈는 탱크 23대에 160명의 보병을 싣고 적진을 돌파하며, 지평리로 向發(향발)했다.

항공기의 지원 하에 적진을 돌파하기 시작한 특수임무부대의 전차종대는 50m의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선두와 후미 간의 길이가 1500m에 달했다. 연대장은 5번 전차에 탑승했다. 전차의 전진이 지체되면 보병이 하차하여 통로를 개척했다.

그러나 연대장이 중단 없는 전진을 독려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차한 보병이 다시 탑승할 여유도 없이 전차가 출발했다. 그로 인해 남겨진 보병은 적진에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전진 중인 전차 역시 敵의 사격이 치열해 몇 번이나 정지하여 양쪽 高地의 적을 제압하려 했으나, 그때도 크롬베즈 대령은 “정차하면 절대 안 된다. 달리면서 사격하라!”고 독려했다.

제5기병연대가 제23연대와의 연결을 이루기 위해서는 망미산 아래와 그 좌측 248고지 사이를 반드시 뚫어야만 했다. 기병연대의 선두 전차가 협로 입구에 들어서자 중공군의 박격포와 로켓포가 집중되어 그 중 한 발이 전차 포탑에 명중했다. 이어 전차 중대장이 탄 전차가 로켓포 공격을 받아 히어스 대위와 전차 대원들이 戰死했다. 

결국 제5기병연대는 도중에 중공군의 매복공격을 받아 보병을 거의 다 소모시키면서 17시15분, 지평리 남쪽 망미산을 공격 중인 미 제23연대 전차와의 연결에 성공했다. 탱크도 23대나 증원되었다. 原陣(원진) 내의 제23연대 장병들은 환호했다.

그날 밤, 연대는 조명탄을 쏘아 올리고, 중공군의 야습을 기다렸다. 휘영하게 불타는 조명탄이 눈 덮힌 지평리를 밝혔다. 그러나 그날 밤, 중공군은 야습해 오지 않았다. 증원부대가 속속 도착할 것이라고 판단한 중공군은 드디어 공세를 중지했다. 사흘간의 血鬪(혈투)가 끝난 것이다.
 
이리하여 미 제23연대는 겨우 1개 연대로서 중공군 3개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지평리를 지켜냈다. 그것은 유엔군이 중공군의 공격을 격퇴한 최초의 승리였다. 처음 국군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 중공군의 4차 공세는 그들에게 첫 패배를 남긴 채 막을 내린 것이다. 중국인민지원군 副사령관 洪學之의 회고록 《抗美援朝回憶(항미원조회억)》은 지평리 전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鄧華(등화·중공군부사령원)는 39군과 42군 일부를 서둘러 再정비해 2월13일 밤 신속하게 지평리의 미군을 공격토록 했다. 그러나 우리 공격부대는 미군 진지를 돌파하는 데 실패했다.
 우리는 制空權(제공권)이 없어 고전을 면치 못했다. 대낮에는 미군 전투기가 벌떼처럼 달려들어 맹폭을 가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밤에만 기동이 가능했고, 밤에만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 첫날 밤 공격에 실패한 후 이튿날 밤에서야 겨우 포병의 지원을 받아 비로소 공격다운 공격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반면 미군은 지원 병력이 물밀 듯이 몰려왔다. 鄧華는 당시 전황을 분석한 끝에 더 이상의 공격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2월15일 17시30분 지평리에 대한 공격의 중지를 명령했다.
 (중략) 2월16일, 동트기 전 鄧華가 이끄는 부대는 북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지평리에서 미군을 제대로 포위하지 못한 점에 대해서 自我(자아)비판을 했다. 그러나 최선을 다했음이 밝혀지자, 팽덕회 사령관은 더 이상 나무라지 않았다.>  


‘위대한 아버지’로 추앙받은 프리먼 연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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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리전쟁기념관에 전시된 23연대장 프리먼 대령의 소개글과 필자.


1950년 7월31일, 미 제23연대장으로 부산에 첫발을 디딘 폴 프리먼 대령은 8월19일 낙동강 방어전의 요충 多富洞(다부동)으로 이동하여 국군 제1사단을 지원해 縱深(종심)방어의 임무를 수행했다.

그해 11월, 중공군의 공세로 유엔군이 淸川江(청천강) 지역으로부터 전면 철수하는 상황에서 프리먼은 자신의 독자적 현장 결심으로 중공군의 매복 지역인 軍隅里(군우리)의 이른바 ‘笞刑(태형)의 계곡’을 우회해 기동로를 安州(안주) → 肅川(숙천)으로 돌리는 순발력을 발휘한 결과 병력의 손실을 막았다. 이는 당시 ‘명령 불복종’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훗날 탁월한 지휘력으로 再평가되었다. 꺼벙한 모습의 그는 말 그대로 전쟁터의 진짜 사나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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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먼 연대장

그는 1907년 아버지의 任地(임지)인 필리핀에서 태어났다. 1927년 美 웨스트포인트를 졸업, 소위로 임관되었다. 1937년 포트베닝(美 포병학교)에서 탱크 과정을 수료한 뒤 1939년 중국대사관의 武官(무관)보좌관으로 근무해 중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다.

1940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의 중국군사사절단 요원, 1943년 중국·印度(인도)·버마戰區(전구)의 참모 및 敎官(교관), 1955년 제2보병사단장을 역임했다. 1962년 육군 대장으로 진급, 美 육군 유럽사령관 등을 지낸 뒤 1967년 전역했다. 1988년 캘리포니아 몬터레이에서 101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껑충한 키의 프리먼은 소박한 성격의 전형적인 버지니아人이었다. 병사들은 꺼벙한 그에게 “Tall Paul, The Great Father, Colonel  Paul”(키 큰 폴, 위대한 아버지, 폴 대령)이라고 존경했다. 그는 행군 중에 햄릿처럼 뭔가 중얼거리며 獨白(독백)하는 버릇을 지녔다고 한다.

지평리 전투 당시 중공군의 나팔·피리소리에 맞서 예하의 프랑스 대대에서 사이렌을 울려대자 그는 그 바쁜 중에도 “뉴욕 경찰이 우리를 구하러 오는 것 아냐?”라고 조크했다고 한다.

프리먼은 다리에 중상을 입었으면서도 後送(후송)을 거부하고 지평리에서 부대를 지휘했다. 지평리 전투에서 10만 명의 중공군을 물리친 그는 부하들로부터 ‘위대한 아버지’로 추앙받았지만, 지평리 전투 직전에 헬기를 타고 병문안을 온 리지웨이 8군사령관으로부터는 ‘고집불통’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다음은 그때 리지웨이와 프리먼의 대화.

“귀관의 負傷(부상) 소식에 무척 놀랐네. 후송을 명령했는데, 이렇게 꼼짝 않고 있으면 안 되지. 명령 불복종에 대한 징계는 알고 있는가?”

“견딜 만합니다, 각하. 여기까지 오신 것, 감사합니다.” 

“지금부터 자네 별명은 ‘고집불통’이라는 것을 명심하게! 그러나 귀관의 열정에는 감동을 받았네.” 

“각하, 우리는 결단코 이곳을 지키고, 敵을 물리칠 것입니다. 염려 안하셔도 됩니다. 다만 여기는 위험합니다. 사령관께서 탑승한 헬기가 적탄을 맞는 그런 끔찍한 사고를 저희 전부가 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각하는 저희들의 보호자이니까요.” (계속)

[ 2016-07-07, 17:0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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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호     2016-07-10 오후 3:55
전쟁 기념관에 몽클라르 장군(중령)의 동상이 세워져야한다. 무엇을 기념하나?
서울이 파죽지세로 점령당한 기념? 인도교 조기 폭파로 민간과 군장비까지 고스란히 적의 수중에 넘긴 기념? 전쟁기념관은 재고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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