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이나 빼앗긴 서울… 이젠 다시 빼앗기지 말자!”
《6·25전쟁의 현장》(12) / 1951년 3월15일 아침, 국군 제1사단이 여의도에서 마포를 향해 渡河를 개시, 그날 중으로 서울을 탈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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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의 성명은, 준비되고 있던 대통령의 성명과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이에 트루먼은 맥아더의 해임을 결심하게 된다. 한편, 맥아더는 그의 북진계획에 기초해 38선 북쪽 20km를 연결하는 ‘캔사스 라인’에의 진출을 꾀하는 ‘쥐잡이 작전’을 발령, 1951년 4월9일 각 군단은 북상을 개시했다. 그 이틀 후인 4월11일, 맥아더 원수는 유엔군 총사령관 職(직)에서 해임되었다.

“우리들 있으므로 조국은 번영하리…”

병력이 부족했던 프랑스 대대에는 80명의 카투사와 100명의 일반병 등 모두 180명의 한국인 병사가 섞여 있었다. 이에 대해 프랑스대대에 배속되어 지평리 전투에 참전했던 林應祥(임응상·경기도 군포시 거주) 옹의 증언이 있다. 이 증언은 양평문화원이 발간한 《지평리를 사수하라―그때부터 중공군을 이겼다!》에 게재되었다.

<1950년 12월, 피난길에서 적령기(18세)가 된 나는 국군에 입대했다. 2개월 동안 大邱(대구) 육군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친 나를 포함한 동기생 100명은 1951년 2월10일자로 미 2사단 제23연대 예하의 프랑스 대대에 배속되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한국에 파견된 프랑스 대대는 그 유명한 외인부대였다.
 (중략) 소년티를 벗지 못한 우리 한국인 병사에 대해 그들 모두는 막내아우를 대하듯 친절하고 따뜻하게 보살펴 주었다. 그들은 우리들에게는 결코 거칠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가 이 대대에 도착하기 전에 80명의 한국군 카투사가 이미 배속돼 있었고, 이 병사들 또한 우리 애숭이 병사들이 부대생활에 적응하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주었음을 잊을 수가 없다.
 나의 소속 중대는 프랑스대대 제2중대. 이 제2중대에는 동기생으로 지금 서울에 사는 박문준, 강화에 사는 이병선, 홍천에 사는 박동준 등이 있었다. 이들 중 나와 박문준·박동하는 소총병이었고, 이병선은 의무소대 소속이었다.>

그렇다면 外人부대에 소속된 한국인 병사의 戰意(전의)는 어떠했을까? 임응상 옹의 이어지는 증언이다.

<부대는 전투 준비에 골몰하고 있었다. 우리 대대 옆에는 미군들, 모두가 참호를 좀 더 깊이 파는 일에 매달리고 있었다. 지평리를 빙둘러 철조망이 이중삼중으로 쳤고, 砲(포) 배치, 기관총 배치, 탱크 배치 등 삼엄한 전투준비에 우리들은 모두 오금이 저리고 무섭기도 했다. 소총수에게 필요한 총, 대검·수류탄 등 개인장비를 지급받았을 때 오히려 막연한 자신감이 우러났다.
 프랑스 병사들은 그들의 지휘관 몽클라르에 대한 존경심이 넘치고 있었다. 지팡이를 짚고 빨간 머플러를 두르고 베레모를 쓰고 부대를 순시하는 그의 모습에 전쟁영웅의 기개가 넘쳤다. 사흘 후인 1월13일 밤, 말로만 들었던 전투에 나도 경험하는 순간이 다가왔다.
 먼발치에서 들려오는 피리소리, 그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나팔과 꽹과리 소리도 섞이고, 북소리 등과 합쳐서 이제는 인간을 공포로 몰아넣는 위협의 소음으로 변하고 있었다. 가슴이 오그라들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온몸은 떨고 있었다.
 (중략) 바로 눈앞까지 중공군이 달려오는데, 프랑스 장병들은 침묵, 중공군의 前衛(전위)가 철조망을 넘으려는 찰라, 몽클라르가 “죽여라!”고 외쳤다. 프랑스군의 사이렌 소리가 귀청을 찢어놓을 듯이 울리고, 동시에 우리 측의 대포, 기관총, 소총 소리가 밤하늘을 찢어 놓았다.
 (중략) 14일 새벽 2시, 대포소리가 “쿵! 쿵!” 울리는 가운데 탱크들이 적진을 향해 돌진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프랑스 병사들은 장총에 帶劍을 꽂고 참호에서 일제히 튀어나와 敵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나도 그 돌격 대열에 섞여 있었다.>

지평리 전투에 참전한 한국인 병사 중에 전사자가 발생했을 것으로 본 《지평리를 사수하라―그때부터 중공군을 이겼다!》의 저자 이정환 씨는 육군본부에 ‘전사자 확인’을 신청한 결과, 시신이 아직 수습되지 않은 미 제2사단 소속 한국인 전몰 장병 10명의 인적사항을 통보받았다. 지평리 전투의 전사자로 추정되는 한국병사의 인적 사항은 다음과 같다.

 ◎ 미 2사단 소속 戰歿(전몰) 한국인 장병 인적사항

    소속            계급      군번         성명   사망일자     사망장소     본적         안장구분
-----------    ------    ------       -----   -----          ----     --------     ---------- 
미2사 23연대    일병     K1120533     이상규  51.3.15      지평리    경남 창원   위:41-2-026
미2사 23연대    일병      K1106779    장정후  51.2.24      지평리    부산 서구   위:40-6-048
미2사 佛대대    하사      0230145      이태산  51.12.2                   서울 종로   위:06-5-138     
미2사 후근중대  일병     K1108554    김재명  51.2.14      추암리    경남 밀양   위:40-7-021  
미2사               하사     K1108596    장해수  51.2.14                   경남 밀양   위:23-16-9823
미2사 佛대대    일병      K1108611    안보국  51.2.13                   서울 성북   위:40-7-028  
미2사              일병      K1120997    이우림  51.2.28                    경남 창원  위:33-41-22780 
미2사              일병      K1122552    이현목  51.2.15                    경남 함안  위:33-43-23799
미2사              일병      K1122634    심상배  51.2.15                    경남 김해  위:33-37-19675
미2사              일병      K1122644    김인수  51.2.15                    경남 김해  위:23-27-14723


중공군 공세 계속 기간은 1주일

지평리에 대한 중공군의 공격은 저지되었지만, 중앙선을 따라 또다시 충북 堤川(제천) 부근까지 중공군에게 돌파되었다. 소위 중공군의 제4차(2월) 공세였다.
 
중공군의 제4차 공세(2월11∼18일)로 눈 쌓인 중부전선에서의 격투는 계속되었다. 중공군의 제4차 공세에 대해 유엔군은 처음엔 좌우 부대의 連携(연휴)를 유지해 완만하게 후퇴하면서, 중공군의 기세가 둔해지는 것을 기다렸다.

그런 후에는 상대에게 보급과 휴양의 기회를 주지 않고 反攻(반공)으로 전환해 탱크의 집중 사용으로 역으로 중공군을 분할·포위했다. 중공군이 傳家(전가)의 寶刀(보도)처럼 휘둘렀던 人海전술에 대해서는 유엔군은 항공전력과 화력으로 대응했다.

제4차 공세가 시작되고 1주일 정도 되면 중공군의 衝力(충력·충격에 의한 힘)은 눈에 띄게 쇠약해졌다. 중공군은 유엔군의 화력에 얻어맞고, 추위 속의 보급·의료의 부족으로 엄청난 사상자를 내고 드디어는 기진맥진했다. 이즈음 남한산성 지구에도 중공군 제38군이 출격하고, 그 일부가 水原(수원)까지 위협했지만, 유엔군의 砲·爆擊(포·폭격)에 의해 격퇴되었다.

유엔군이 힘에 의해 중공군의 공격을 격퇴했다고 하는 의미는 대단히 컸다. 중공군의 개입 이래 이를 神秘的(신비적)인 군대로 보는 일종의 공포감을 품고 있있던 유엔군 장병들은 1951년 2월 공세의 격퇴로 비로소 자신감을 되찾았던 것이다.

중공군은 오만하기까지 했던 자신감을 잃었다. 兵站(병참)기지인 만주와 가까운 청천강변에서는 그 특색을 살리는 작전이 가능했지만, 압록강으로부터 460km 떨어진 戰場(전장)은 전혀 상황이 달랐던 것이다. 중공군은 탄약과 식량을 등에 지고 공세를 개시했지만, 7∼10일이면 군수품이 바닥나 공세는 자연 중지되고 말았다.

결국, 만주에 가까운 전쟁터에서는 交戰(교전) 지속력이 2주간 정도였지만, 38선 이남에서의 작전지속력은 그 절반 수준 이하로 떨어졌던 것이다. 중공군의 기본 전술인 人海전술·운동전·포위섬멸전도 이미 한계를 보였다.

1951년 2월20일, 미 8군은 이런 분위기를 타고 全전선에 걸쳐 공세로 전환, 漢江(한강)∼지평리∼횡성∼강릉으로 진출해 이후의 본격적인 북진을 준비하는 ‘킬러 작전’을 발동했다.

각 부대는 2월20일 北進(북진)을 개시했다. 중공군과 북한군은 이에 격렬하게 저항하고, 특히 남한산성 지구의 중공군 제38군과 지평리의 중공군 제39군의 저항이 강렬했다.

때마침 내린 豪雨(호우)는 사람도 차량도 모두 떠내려 보내려는 듯 40시간 동안이나 퍼부었다. 早春(조춘)의 호우는 戰場을 일변시켜 눈 녹은 물의 홍수는 하천도, 도로도 변형시켰고, 有線(유선)은 절단되고, 보급품 및 架橋(가교)는 떠내려가고, 그 뒤엔 온통 뻘구덩이가 되어버렸다. 제8군은 공산군과 호우라는 두 개의 적과 싸우면서, 2월 말에 한강 南岸(남안)∼양평∼지평리∼횡성∼강릉線으로 진출했다.


서울 再탈환

중공군의 2월 공세가 끝나자, 유엔군은 敵에게 휴양과 재편성의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 즉각 공세로 이전했다. 

리지웨이 8군사령관은 ‘킬러 작전’의 성과를 불충분하다고 판단, 중공군을 계속 압박하기 위해 ‘리퍼 작전’의 준비를 지령했다. 리퍼 작전은 킬러 작전을 계승한 것으로서, 우선 중·동부 전선에서 공세를 취해 적의 主力을 격파하고, 서울 포위 태세를 갖춘 후 탈환을 기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한 목표 선으로 서울∼춘천∼38선의 要點(요점)을 잇는 線(선)이 선정되어 ‘아이다호 라인’이라 命名(명명)되었다.

1951년 3월7일, 유엔군은 다시 15만 병력을 동원해 대대적인 공세를 개시했다. 목표는 38선. 작전명은 ‘리퍼’. 중·동부 전선의 국군 제3군단, 국군 제1군단, 미 제9군단, 미 제10군단 은 38선을 향해 북진을 개시했다. 중공군과 북한군은 소부대로 분산해 遲滯(지체)전투를 계속했다. 중공군은 특히 산악전투에 익숙했지만, 제8군은 이들 진지를 하나하나 분쇄하면서 북진했다.

서부전선에서는 국군 제1사단과 미 제3사단이 서울 남쪽에서 敵을 견제하는 가운데 미 제25사단은 서울 동쪽의 두물머리[兩水里·양수리]로부터 한강을 渡河(도하)해 43번 국도를 타고 포천으로 진격했다. 右翼(우익)의 미 제3사단도 뚝섬을 도하해 3번 국도를 타고 의정부로 진격했다.  
 
이때 미 제1군단의 좌익이었던 白善燁(백선엽) 준장의 국군 제1사단은 한강을 사이에 두고 이따금씩 포격을 주고받으며, 서울 탈환을 위한 공격 명령을 기다렸다. 또한 자주 한강 對岸(대안)에 斥候(척후)를 보내고 있었다. 3월14일, 척후들이 잡은 포로들의 말에 의하면 유엔군에 원격 포위된 중공군과 북한군은 이미 철퇴하고 있었다.
 
백선엽 제1사단장은 밀번 미 제1군단장에게 이런 서울의 상황을 보고했다. 1951년 3월15일 아침, 국군 제1사단은 미 제1군단의 水陸兩用車(수륙양용차)의 지원을 받아 여의도에서 마포를 향해 도하를 개시, 그날 중으로 서울을 탈환했다.

이때 서울로 달려온 申性謨(신성모)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은 백선엽 제1사단장을 부둥켜안고 “두 번이나 빼앗긴 서울… 이젠 다시 빼앗기지 말자!”며 눈물을 펑펑 쏟았다. 영국 商船(상선) 선장 출신인 신성모(1891∼1960)는 카리스마의 李承晩 대통령을 부지런히 보좌했으나, 대통령을 대신해 욕을 많이 얻어먹은 戰時宰相(전시재상)이었다.  

서울 再탈환으로 勢(세)를 탄 유엔군은 3월23일 공격의 끈을 더욱 세차게 당겼다. 미 제187공수여단을 임진강 하구의 汶山(문산)에 투하시켜 失地(실지)를 회복하려는 토마호크 작전을 전개하자, 국군 제1사단은 문산으로 진격해 공수여단과의 연계작전에 돌입했다. 닷새 동안 3447명의 공정대원과 220톤에 달하는 야포와 장비들이 문산에 투하되었다. 이 전투에서 아군은 포위망을 좁혀 북한군 제1군단을 섬멸하고자 했지만, 이들이 신속히 탈출해 1개 연대 규모의 적을 소탕하는 데 그쳤다.

아군은 1·4 후퇴 후 3개월 만에 38선을 회복했다. 즉, 전선이 세 번째로 原狀(원상)으로 되돌아간 셈이었다. 따라서 또다시 38선을 넘을 것인지의 여부가 세간의 주목을 받았지만, 38선은 이제 정치적 의미를 상실했다. 북한군이 먼저 이 선을 넘어 침략했기 때문이다.
 
3월27일, 맥아더는 나중에 그의 파면 動機(동기)와 연결되는 聲明(성명)을 발표하고, 북진을 지령하기 위해 한국으로 날아왔다. 유엔군의 다음 공격 목표는 북한군의 6·25 남침의 거점이며, 중공군의 집결지인 ‘鐵(철)의 삼각지’였다. 철의 삼각지란 평강-철원-김화를 잇는 한반도 중앙부의 전술적 요충을 말한다.
 
맥아더가 東京으로 돌아간 후 미 8군은 남한강변 驪州(여주)에 있던 전투지휘소에 團隊長(단대장)들을 불러 두 번째의 북진을 협의했다. 그리하여 날씨가 회복되고 병참 준비가 끝나면 38선을 넘기로 했다.

여주회의라 하면 金白一 장군이 생각난다. 여주회의를 마친 후 김백일 제1군단장은 영월의 육본 전방지휘소에서 만주군관학교 동기생인 정일권 참모총장과 하룻밤을 지냈는데, 다음날인 3월28일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악천후 속에서 경비행기를 타고 강릉으로 귀대 도중 태백산맥의 묏부리에 기체가 충돌하는 바람에 추락·전사했다. 
  
북진 작전이 다시 개시된 4월7일, 白善燁(백선엽) 준장은 소장으로 진급하면서 故 金白一(김백일) 소장의 후임으로 제1군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제1사단장 후임에는 만주군관학교 후배인 姜文奉(강문봉) 준장이 임명되었다.

만주군관학교 동기생인 김백일·정일권은 해방 직후 공산화된 북한에서 38선을 넘어오기 전, 평양의 민족주의자 曺晩植(조만식) 선생을 방문했는데, 그때 조만식의 비서였던 白善燁은 만주군관학교 4기 선배인 두 사람에게 가능한 한 빨리 越南(월남)할 것을 권고했었다. 절묘하게도 전쟁 발발 후 국군의 지휘부는 곧 함경도·평안도 태생의 만주군관학교 인맥이 장악하게 된다. 


戰線이 안정되려던 시기에 해임당한 맥아더

전쟁지역을 한반도로 限定(한정)하고 그런 중에 정치적 해결을 꾀하는 미국 정부에게, 군사적 승리야말로 정치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맥아더는 獨善的(독선적)으로 비쳤다.        

유엔군의 창설 이래 맥아더 元帥(원수)와 미 정부 사이에는 적지 않은 견해의 차이가 있었다. 유엔군의 임무는 “Korea에 침입한 적을 격퇴하고, 평화와 안전을 회복한다”는 것이었지만, 이 ‘Korea’를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 그 전략은 달라지게 마련이었다. 맥아더는 이것을 ‘한반도 전역’으로 생각했다. 반면 美 정부는, 당초에 ‘38선 이남’, 북진 때는 ‘한반도 전역’, 중공군의 개입으로 38선 以南(이남)으로 밀린 시점에서는 ‘남한’ 혹은 ‘37도선’ 등으로 변화해 왔다.

1951년 시점에서 전쟁지역을 한반도로 한정하고, 그 안에서 정치적 해결을 꾀하던 미국 정부에게, 만주 폭격도 불사하려는 맥아더의 행동은 독선적인 것으로 비쳤다. 한편 군사적 승리야말로 정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믿는 맥아더에게 워싱턴은 여러 가지 간섭으로 군사적 행동을 制約(제약)하는 존재였다.

그것은 맥아더 원수와 트루먼 대통령이라는 2인의 개인적 대립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정책적 차이에 의한 것이었다. 兩者(양자)의 서로 다름은 38선의 再월경을 둘러싼 문제로 再燃(재연), 드디어 최후의 결별로 향하게 된다. 다음은 트루먼 대통령의 생각이었다.
  
“38선을 회복한 이상, 유엔군은 그 使命(사명)을 다했다. 이 이상의 北進(북진)은 수렁에 빠질 위험성이 클 뿐이다. 또 중국 본토의 폭격, 원폭 사용, 國府軍(국부군·대만군)의 참전은 서방 동맹국들의 離反(이반), 소련의 반발, 제3차 세계대전의 유발 우려 등 잃을 것이 많다. 따라서 目下(목하)의 정책은 중국에게 군사적 모험을 단념시켜 중국을 교섭의 테이블에 앉히는 것이다.”

국무성은 휴전을 호소하는 대통령 성명을 起案(기안)했다. 그런데 3월24일, 맥아더는 워싱턴과 사전협의도 없이 성명을 발표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엔이 유엔군에 課(과)하고 있는 제한 사항을 철폐하면 중공을 군사적으로 붕괴시킬 수 있다”

맥아더의 성명은, 준비되고 있던 대통령의 성명과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이에 트루먼은 맥아더의 해임을 결심하게 된다. 한편, 맥아더는 그의 북진계획에 기초해 38선 북쪽 20km를 연결하는 ‘캔사스 라인’에의 진출을 꾀하는 ‘쥐잡이 작전’을 발령, 1951년 4월9일 각 군단은 북상을 개시했다. 그 이틀 후인 4월11일, 맥아더 원수는 유엔군 총사령관 職(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는 “老兵(노병)은 결코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미 의회에서의 연설로 52년간에 걸친 군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의 후임으로는 당시 미 8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이, 미 8군사령관에는 밴플리트 장군이 임명되었다. 

맥아더의 해임을 놓고 文民統制上(문민통제상)의 문제 등이 다양하게 거론되지만, 그 배경은 근본적으로는 對中共(대중공) 전략의 서로 다름에 있었다. 트루먼의 ‘중공 봉쇄’ 전략과 맥아더의 ‘美中 직접대결’ 전략이 충돌한 것이었다. (계속)

[ 2016-07-10, 20:3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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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배     2017-11-19 오후 8:56
맥아더 장군, 당신 멋지십니다

유머강사 김진배
   지평선     2016-07-11 오후 3:46
인구 오천만 남북합 칠천만 , 금수강산의 아름 다움이 빛날 한반도 ,
그심장부에 있는 , lucky seoul ~~~~~ 이다 .
ㄱ 정은 삼대가 마지막 발악을 한다. 대한민국은 서울을 중심에 뒀을때 번영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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